“재위 3년(312년)에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기 아들의 신붓감을 요청하자 급리의 딸을 보냈다.
이때 왜국에서 신라의 왕녀를 요구한 것은 일종의 결혼 동맹을 맺고자 한 것으로 일방적으로 왕녀를 요구한 것을 보면 당시 신라가 왜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즉 신라는 왜에 화친을 맺기는 했으나, 대등한 입장이 아니라 저자세에서 맺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흘해왕에게 공주가 있었다면, 왜는 필시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흘해가 어렸기 때문에 시집보낼 만한 딸이 없었다. 그래서 재상직을 수행하고 있던 급리의 딸을 보냈던 것이다.
어쨌던 급리의 딸이 왜로 간 덕분에 왜와 신라는 결혼동맹 형태의 화친을 맺어 한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왜와 화친 관계는 그로부터 32년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재위 35년(344년) 2월에 왜가 다시 청혼을 해 왔다. 이번에는 홀해왕의 딸을 요구했으나 흘해왕은 딸이 이미 출가하였기 때문에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이듬해 2월에 왜왕은 화친을 파기하고 절교한다는 글을 보내왔고, 이로써 신라와 왜의 위태로운 화친은 끝나고 말았다.
절교를 선언한 왜왕은 이듬해 대군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해 왔다. 왜군은 일단 풍도(포항 앞바다 목출도)를 장악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이어 서라벌로 치고 들어와 순식간에 금성을 포위했다”
흘해이사금 시기의 기사에 대한 글인데요.
한반도 내에서 입지적으로 왜 보다 신라가 훨씬 우위에 있다고 저는 생각했는데 아래의 글을 보면 거의 쩔쩔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데 어떻게 그냥 가능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