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점을 감안해 볼 때 「창해군倉海郡」은 멸망하기 전의 패수浿水(지금의 대릉하)를 경계로 하는 고조선古朝鮮의 지역 내이기보다는 한나라의 영역 내에 위치한 것이 된다.
*한나라에서 볼 때 가장 동북쪽에 있었던 곳이 요동군(실지로는 潦東郡)으로 남려南閭가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여 ‘창해군’이 성립한 것을 감안하면, 그 위치는 요동군과 인접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의 사신 섭하涉河가 요동동부도위로 임명된 것은 원봉元封2년이다.
원봉 2년은 기원전 109년으로 창해군이 파罷되는 원삭元朔 3년, 즉 기원전 126년으로부터 17년 후의 일이다.
따라서 섭하가 임명된 요동동부도위는 원래 창해군이 있던 곳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삼국지》의 ‘예왕지인’ 관련기사를 감안하면, 흉노(동부세력)를 새내에서 축출한 후, 창해군에 거주하던 예왕과 예인들은 오환과 함께 장성 연장성 북쪽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예왕지인濊王之印」은 「전왕지인滇王之印」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내신內臣의 왕도 아니고 외신外臣의 왕도 아닌 내신內臣으로 여겨지던 만이蠻夷의 왕』이다.
외신外臣의 징표인 「한漢」이 접두接頭하지 않아 내신의 왕으로 자칫 착각하기 쉬우나, 「새璽」가 아닌 「인印」을 접미接尾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후侯」가 아닌 「왕王」을 칭하여 한나라 영역 내에 있던 『蠻夷의 왕』임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사서에 기록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부여가 왕의 인印을 한조漢朝로부터 받았던 사실이 있었다면, 《삼국지》가 전하는 인문印文은 「한위(왜)노국왕漢委(倭)奴國王」과 같은 양식인 「한부여국왕漢夫餘國王」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일본 북구주北九州 박다만博多灣 지하도志賀島에서 발견된 금인金印은 현재 복강시福岡市 박물관에 내장되어 있다고 한다.
라고 하는 것은 부여夫餘는 왜노국倭奴國과 마찬가지로 한漢의 영역 외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지》가 전하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란 인문印文은 「전왕지인滇王之印」과 마찬가지로 한漢의 영역 내에 있었고, 그 원 소유의 주체가 모종의 이유로 한漢의 영역으로부터 부여 지역에 있었던 모처某處으로 이동하게 되어서도 수대에 걸쳐 보물로 전세傳世하고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한漢의 영역 내』라고 하는 것은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패수 밖에 위치한 고조선과는 달리 ‘패수’ 내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모처某處가 바로 예성濊城인 것이다.
한나라 영역을 벗어나 멀리 동북쪽 새외에 있던 부여는 더 이상 『예왕지인』을 사용할 자격이 되지 않아 창고에 보관하였던 것이다.
결코 손진기가 말하듯이 연용할 성질의 물건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오환이 이치移置되었던 이유와 같이 흉노가 물러난 좌지左地(즉 동쪽 지역)의 경계 임무를 연북장성 밖에서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다 오환의 뒤를 이은 선비의 남하와 동시에 동쪽으로의 세력 확장으로 인하여 원래 있던 ‘예성’의 위치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이동한 바, 그것이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보는 부여夫餘의 모습이다.
즉 부여가 선비에 쫓겨 동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삼국지》가 기록한 ‘예성’은 더 이상 부여의 영역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여의 족속문제는 예족으로 밝혀졌는데 과연 그들의 경유지인 창해군과 원주지는 어디에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