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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7-26 13:22
[한국사] 부여족은 원래 어디에서 온 것인가(3)
 글쓴이 : 독산
조회 : 485  

이상의 점을 감안해 볼 때 창해군倉海郡은 멸망하기 전의 패수浿水(지금의 대릉하)를 경계로 하는 고조선古朝鮮의 지역 내이기보다는 한나라의 영역 내에 위치한 것이 된다.

 

*한나라에서 볼 때 가장 동북쪽에 있었던 곳이 요동군(실지로는 潦東郡)으로 남려南閭가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여 창해군이 성립한 것을 감안하면, 그 위치는 요동군과 인접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의 사신 섭하涉河가 요동동부도위로 임명된 것은 원봉元封2년이다.

원봉 2년은 기원전 109년으로 창해군이 파되는 원삭元朔 3, 즉 기원전 126년으로부터 17년 후의 일이다.

따라서 섭하가 임명된 요동동부도위는 원래 창해군이 있던 곳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삼국지예왕지인관련기사를 감안하면, 흉노(동부세력)를 새내에서 축출한 후, 창해군에 거주하던 예왕과 예인들은 오환과 함께 장성 연장성 북쪽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예왕지인濊王之印전왕지인滇王之印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내신內臣의 왕도 아니고 외신外臣의 왕도 아닌 내신內臣으로 여겨지던 만이蠻夷의 왕이다.

 

외신外臣의 징표인 이 접두接頭하지 않아 내신의 왕으로 자칫 착각하기 쉬우나, 가 아닌 을 접미接尾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가 아닌 을 칭하여 한나라 영역 내에 있던 蠻夷의 왕임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사서에 기록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부여가 왕의 인을 한조漢朝로부터 받았던 사실이 있었다면, 삼국지가 전하는 인문印文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과 같은 양식인 한부여국왕漢夫餘國王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일본 북구주北九州 박다만博多灣 지하도志賀島에서 발견된 금인金印은 현재 복강시福岡市 박물관에 내장되어 있다고 한다.

 

라고 하는 것은 부여夫餘는 왜노국倭奴國과 마찬가지로 한의 영역 외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지가 전하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란 인문印文전왕지인滇王之印과 마찬가지로 한의 영역 내에 있었고, 그 원 소유의 주체가 모종의 이유로 한의 영역으로부터 부여 지역에 있었던 모처某處으로 이동하게 되어서도 수대에 걸쳐 보물로 전세傳世하고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의 영역 내라고 하는 것은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패수 밖에 위치한 고조선과는 달리 패수내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모처某處가 바로 예성濊城인 것이다.

 

한나라 영역을 벗어나 멀리 동북쪽 새외에 있던 부여는 더 이상 예왕지인을 사용할 자격이 되지 않아 창고에 보관하였던 것이다.

결코 손진기가 말하듯이 연용할 성질의 물건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오환이 이치移置되었던 이유와 같이 흉노가 물러난 좌지左地(즉 동쪽 지역)의 경계 임무를 연북장성 밖에서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다 오환의 뒤를 이은 선비의 남하와 동시에 동쪽으로의 세력 확장으로 인하여 원래 있던 예성의 위치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이동한 바, 그것이 삼국지후한서에서 보는 부여夫餘의 모습이다.

 

즉 부여가 선비에 쫓겨 동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삼국지가 기록한 예성은 더 이상 부여의 영역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여의 족속문제는 예족으로 밝혀졌는데 과연 그들의 경유지인 창해군과 원주지는 어디에 있었을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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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21-07-26 15:27
   
■ 주장 1)

"흉노(동부세력)를 새내에서 축출한 후, 창해군에 거주하던 예왕과 예인들은 오환과 함께 장성 연장성 북쪽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오환이 이치移置되었던 이유와 같이 흉노가 물러난 좌지左地(즉 동쪽 지역)의 경계 임무를 연북장성 밖에서 수행하였을 것이다."

□ 반론

① 후한서와 한서에 따르면, 서기전 119년에 곽거병이 흉노의 동쪽을 격파하면서 흉노에 예속돼 있던 오환에 대한 영향력을 넓힌 것으로 나옵니다. 후한서는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오환을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塞外"로 이주시켜서 변방을 지키며 흉노를 감시하도록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즉 '새내'가 아니라 '새외'입니다.

② 왕망이 집권하여 흉노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환의 군대가 대군에 주둔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북변 5군 지역에 그들의 가족들이 인질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를 유심히 보면 기존에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서, 그전부터 북변 5군 지역에 오환이 들어와서 살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③ 그러나 서기 0년을 전후한 기사를 살펴보면 오환은 여전히 그들이 살던 지역인 대흥안령 남부로부터 한나라 북변 5군의 접경지역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거주 분포는 9~10세기 초의 해족의 영역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④ 오환이 정식으로 새내로 이주된 것은 후한 광무제 건무 25년(49)의 일로서,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속국, 광양, 대, 안문, 태원, 삭방 등지입니다.

⑤ 후한서의 제기와 열전 등을 검토하여 보면, 왕만의 신이 망하고 후한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과도기에 지금의 진황도시와 그 동북쪽 바깥은 오한과 예맥 등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새로 들어선 후한은 그 초기에는 당산시 바깥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⑥ "예왕과 예인들은 오환과 함께 장성 연장성 북쪽에 배치되었을 것이다."하셨는데 그러한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해부터 예, 예맥 등을 비롯한 서기전 1세기 이전 우리 고대사의 여러 문제를 탐구하고자 모든 사서 기록을 샅샅이 탐색하여 검토하고 있습니다.

⑦ 전한과 후한의 역사에서, 이른 바 한나라의 창업을 도왔다 하는 북맥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서 기록에서 예, 또는 예맥은 고구려 자신, 또는 고구려에 부용하는 세력으로 나타납니다. 부여는 이들과 함께 거명, 또는 언설된 바가 없습니다.
감방친구 21-07-26 15:42
   
■ 주장 2)

"《삼국지》가 전하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란 인문印文은 「전왕지인滇王之印」과 마찬가지로 한漢의 영역 내에 있었고, 그 원 소유의 주체가 모종의 이유로 한漢의 영역으로부터 부여 지역에 있었던 모처某處으로 이동하게 되어서도 수대에 걸쳐 보물로 전세傳世하고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한漢의 영역 내'라고 하는 것은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패수 밖에 위치한 고조선과는 달리 ‘패수’ 내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모처某處가 바로 예성濊城인 것이다."

"한나라 영역을 벗어나 멀리 동북쪽 새외에 있던 부여는 더 이상 『예왕지인』을 사용할 자격이 되지 않아 창고에 보관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오환의 뒤를 이은 선비의 남하와 동시에 동쪽으로의 세력 확장으로 인하여 원래 있던 ‘예성’의 위치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이동한 바, 그것이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보는 부여夫餘의 모습이다."

□ 반론

① 삼국지 위서 부여전은 '예성'이 그 나라 안에 있다고 적었습니다.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似也。〕또한 부여 창건 세력이 본래 예맥의 땅이었던 당시 부여 지역에 외부(탁리국/고리국/색리국)에서 들어온 자들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후대 두막루국의 기사에서 보이듯, 부여 건국세력은 송화강 북쪽 지역에서 이주한 집단으로 보이며, 그보다 전대에는 선비족과 함께 현 시라무룬허와 로합하 사이에서 활동한 모종의 집단인 것으로 저는 추정해 오고 있습니다.

② 선비족이 한나라와 정식으로 접촉한 때는 광무제 건무 25년(49)의 일입니다. 선비족은 본래 시라무룬허의 북안에 거주하였으며 한나라와 선비족 영역 사이에 오환이 있었던 까닭에 접촉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한나라가 전한-신-후한으로 교체되면서 새외에 대한 통제력을 일부 상실하고, 또 오환이 대거 새내로 이주하면서 비로소 교류를 하게 된 것입니다.

③ 예군 남려의 창해군이 현 칠로도산 바깥, 로합하 유역에서 대릉하 유역의 어느 일정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하는 추정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 후에도 이들 지역에서 예맥, 또는 맥이 자주 언급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들 세력이 부여라는 주장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감방친구 21-07-26 15:43
   
독산님의 논문이 다루고 있는 쟁점을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 제반 문제를 지금도 계속 탐구 중인 저로서는
큰 자극과 도움을 얻었습니다
독산 21-07-26 16:31
   
반론 중에 (1)즉 '새내가 아니라 '새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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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오환과 부여를 새내에 배치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흉노(동부세력)를 새내에서 축출한 후, 창해군에 거주하던 예왕과 예인들은 오환과 함께 연장성 북쪽(즉 새외)에 배치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듯이 '새외'에 배치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반론 중에 (6)...그러한 기록은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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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러한 기록은 없기에 '배치되었을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개연성을 말한 것입니다.

그 개연성이란

《사기·흉노열전》에 “諸左方王將居東方, 直上谷以往者, 東接穢貉·朝鮮.,…”
한초漢初, 한漢 무제武帝가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을 파견해 흉노 좌지를 격파하고 5군郡 새외塞外에 오환을 불러들이기 전前〔《후한서·오환선비전》 참조.〕의 형세로 정확 연대는 미상.
*“及武帝遣驃騎將軍霍去病擊破匈奴左地, 因徙烏桓於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五郡塞外, 為漢偵察匈奴動靜. 其大人歲一朝見, 於是始置護烏桓校尉, 秩二千石, 擁節監領之, 使不得與匈奴交通.”〔《후한서·오환선비전》 참조.〕
〔이에 무제가 표기장군 곽거병을 파견하여 흉노좌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곧 오환을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5군 새외로 옮겨, 한나라를 위하여 흉노 동정을 정찰케 하였다. 그 대인은 매년 1회 조견하였는데 이에 비로소 호오환교위를 설치하였는데 질은 2천석이며, 부절을 가지고 그들을 감령監領하여 흉노와 교통할 수 없게 하였다.〕

《사기·화식열전》에 “夫燕亦勃·碣之間一都會也. 南通齊·趙, 東北邊胡. 上谷至遼東, 地踔遠, 人民希, 數被寇, … 北隣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眞番之利.”
한漢 무제武帝가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을 파견해 흉노 좌지를 격파한 후 오환을 불러들임(《후한서·오환선비전》). 연대 미상.

위의 2기사는 모두 한4군 설치 이전의 기록입니다.
하북성(창주)에 있던 창해군의 '예왕' 이 연북장성 밖 오환의 동쪽에 나타나는 것은  <삼국지>부여전의 기사를 감안하면 그 시기적으로 보아 오환과 비슷한 시기이거나 조금 뒤진 시기에  오환 동쪽으로 이치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시기의 하한은 한4군 설치 이전입니다.

반론 중 (7)한나라의 창업을 도왔다는 북맥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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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나라를 도운 것은 '오환'일 것입니다.

통상 貊貉을 같은 자로 이해하나 후자의 맥은 '락'으로 섬서성 낙하부근에 있다가 주나라 초기 '기산지맹'(국어의 선비)에 참여하고 이후 동진하여 晉나라 북쪽(산서성)에서 조나라 연나라 북쪽으로 이동하는 임호(선비)누번(오환)을 칭하고 바로 동호입니다.
전자의 맥은 고죽과 산융으로 후의 고구려와 거란의 전신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만 이 추정에 대한 입론과정은 사정상 밝힐 수 없기에 생략하겠습니다.

본고는 부여의 족원과 '예성'의 위치를 논하는 과정이기에 이어지는 논고를 기다려주십시요.
     
감방친구 21-07-26 16:39
   
답변 감사합니다

그리고 실은 제가 최근 몇 달간 계속 예맥, 예, 맥을 분석하고 있던 차여서
제가 분석하고 추정한 여러 가지 '론' 중에서 독산님의 견해가 일부 겹칩니다

그런데 저는 더 붙잡고 따져보려고 (실은 머리가 잘 안 따라줘서) 어느 '론'을 선택하여 세우지 않고
계속 스스로 제 자신을 지켜보려 하고 있습니다
천추옹 21-07-26 17:30
   
걍 바이칼호 부리야트족이라보면 쉬운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이 졸본천(卒本川)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런데 『위서(魏書)』에는 주몽왕이 부여에서 남하하여 흘승골성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는데, 이곳은 곧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비류곡 홀본서성산(沸流谷 忽本西城山)’에 해당된다.

홀승골 = 홉스골 = 파란물

(왕께서) 비류곡(沸流谷)에 있는 홀본 서쪽 산에 성을 쌓아 수도를 건설 하셨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비류수 구글 검색해보삼.. 강이 깊어서 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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