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論한다. 옛날 箕子註 136가 쇠망하는 殷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朝鮮 땅에 피난하였다. 처음엔 그 나라의 풍속이 알려진 바 없었으나, 八條의 法註 137을 시행하여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게 하니, 마침내 그 邑落에 음란한 행동과 도둑이 없어져서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악하고 나쁜 풍습을 바꾸고 너그럽고 간략한 법을 이루어 수백년 동안 행하여졌다. 그러므로 東夷의 전체가 柔謹으로 風化되어 三方註 138의 풍속과는 다르게 되었으니, 진실로 政敎가 창달되면 道義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仲尼(공자)가 분연히 九夷에 가서 살으려 하였더니 어떤 이가 그곳은 더러운 곳이 아닌가 하므로, 孔子가 ‘君子가 살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더럽겠는가’註 139 한 것도 특히 그런 까닭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 뒤 드디어 [중국과] 통상을 하게 되고 점차 上國과 교역하더니, 燕나라 사람 衛滿註 140이 그들의 풍속을 어지럽히자, 이에 [그들도] 따라서 나빠지게 되었다. 老子는 ‘法令이 불어날수록 도적이 많아진다’고 하였다. 箕子가 법조문을 간략하게 하고 信義로 다스린 따위는 聖賢의 法을 만든 근본취지를 얻었다 하겠다.
○ 贊한다. 옛날 堯임금이 羲仲을 嵎夷(산동성)에 살게 하니 곧 暘谷이라 한다. 山과 바다에 사는 것을 아홉 종족으로 구분지었다. 秦나라 말년에 정치가 혼란해지자 燕나라 사람들이 [이 땅에] 피난하여, 중국의 풍속을 어지럽히고 [東夷의] 풍속까지 나빠지게 하더니, 드디어 漢나라와 통하게 되었다. 아득하고 멀리서 통역하자니 복속도 하고 배반도 하는구나.
「王制」에 이르기를 ‘東方을 夷註 003라 한다’고 하였다.註 004 夷란 根本이다. [그 의미는] 夷가 어질어서 生命을 좋아하므로註 005 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夷는] 天性이 유순하여 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君子國(서국 추정)과 不死國(산동반도 청구국 추정)이 있기까지 하다.註 006 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가 그것이다.註 007 그러므로 孔子도 九夷에 살고 싶어하였다.註 008
○ 옛날 堯임금이 羲仲을 嵎夷(산동성)에 살도록 命하면서 ‘暘谷’이라 하였으니註 009 그곳은 대체로 해가 돋는 곳이다. 夏后氏의 太康이 德을 잃자, 夷人들이 처음으로 叛하기 시작하였다.註 010 少康 이후부터는 대대로 王化에 감복되어 王室에 복종하고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치게 되었다.註 011 桀이 포악해지니 諸夷가 內地에 侵入하여 왔는데, 殷의 湯王이 革命하고 [난 뒤] 이들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註 012 仲丁 때에 이르러 藍夷가 침입하였다.註 013 이로부터 복종하고 배반하기를 3백여년간 계속하였다. 武乙에 이르러 [殷이] 衰弱해지자, 東夷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淮水(산동성과 강소성 경계, 안휘성과 하남성 경계)와 岱山(산동성 泰山)으로 나뉘어 옮겨오더니 점차 中土에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註 014
○ [周] 武王이 [殷의] 紂를 멸망시킴에 이르러 肅愼이 와서 石砮와 楛矢를 바쳤다.註 015 管叔과 蔡叔이 周나라를 배반하고 夷狄을 招誘하였는데, 周公이 이들을 정벌함으로서 東夷가 드디어 평정되었다.註 016 康王 때에 肅愼이 다시 왔다.註 017 그 후에 徐夷(강소성 서주시 부근)가 참람되어 王號를 칭하며 九夷를 거느리고 宗周를 쳐서 서쪽으로 黃河의 上流에까지 이르렀다.註 018 穆王은 그 세력이 한창 떨침을 두려워하여 동방 諸侯를 분리시켜 徐偃王註 019에게 命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偃王은 潢池 동쪽에 살았는데 國土가 500리였으며, 仁義를 행하니 陸路로 와서 朝會하는 나라가 36國이나 되었다. 穆王이 後에 赤驥·騄耳 등의 말을 얻어서 造父로 하여금 그 말을 몰고 楚나라에 알려서 徐國을 치게 하니, [造父는] 하룻만에 [楚나라에] 도착하였다. 이에 楚文王이 大兵을 일으켜 徐國을 멸망시켰다.註 020 偃王이 어질기만 하고 權道가 없어서 차마 그 백성을 데리고 싸우지 못하였으므로 敗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북으로 彭城 武原縣 東山 아래로 달아났는데, 따라간 백성이 萬名이나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산의 이름을 徐山이라고 하였다.(이하 생략)
○ 濊 註099
濊(하북성 중부 창주시)註 100는 북쪽으로는 高句驪·沃沮와, 남쪽(산동성)으로는 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大海(황해)에 닿으며, 서쪽은 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朝鮮의 지역이다. 일찍이 [周] 武王이 箕子를 조선에 봉하니,註 101 기자는 [朝鮮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八條의 敎를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아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婦人들은 貞節을 지키며 음식은 籩豆를 사용하여 먹었다.註 102 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에 이르러 스스로 王이라 칭하였다. 漢初의 대혼란기註 103에 燕·齊·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衛滿은 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 元朔 원년(B.C.128) 에 濊君(창주시 예맥조선) 南閭註 104 등이 右渠를 배반하고 28萬口를 이끌고 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武帝는 그 지역으로 蒼海郡註 105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元封 3년(B.C.108)에 이르러서는 조선(형수시 무강현의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樂浪·臨屯·玄菟·眞番의 四郡을 두었다. 昭帝 始元 5년(B.C.82)에는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註 106 현도는 다시 [高]句驪로 옮겼으며 單單大領의 동쪽의 沃沮와 濊貊은 모두 낙랑에 예속되었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註 107 다시 [大]領의 동쪽 7縣을 떼어 낙랑군에 속한 東部都尉를 두었다. [濊가 漢에] 복속된 후부터註 108 풍속이 점점 나빠짐에 따라, 법령도 점차 늘어나 60여條나 되었다.註 109 [後漢] 建武 6년(A.D.30; 高句麗 大武神王 13)에 [東部]都尉의 관직을 폐지하고, [大]領 동쪽의 지역을 포기한 뒤, 그 지방의 우두머리(渠帥)들을 봉해 縣侯로 삼으니, 歲時마다 모두 와서 朝賀하였다. (이하 생략)
馬韓은 서쪽(산동성 서부)에 있는데, 54國註 114이 있으며, 그 북쪽은 樂浪註 115, 남쪽은 倭(오나라 월나라 대만)와 接하여 있다.註 116진한은 동쪽(산동성 동쪽)에 있는데, 12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濊貊(창주시의 예맥조선)과 接하여 있다. 弁辰은 辰韓의 남쪽(강소성)에 있는데, 역시 12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倭(오나라 월나라 대만)와 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註 117 伯濟註 118(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萬餘戶, 작은 나라는 數千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동쪽바다는 황해, 서쪽 바다는 소양호)로 하니 모두 옛 辰國註 119이다. (이하생략)
--- 사기 평준서에는 예맥조선이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있다고 적혀 있다라고 소설을 쓰시는데, 그런 거 없음. 사기 평준서에서 말하는건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군비를 조달해야 하고, 결국 인근 연과 제 지역에서 군비를 충당할테니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임. 이는 이 기사의 앞에 언급하는 양월을 평정할려고 하니, 강수와 회수지역이 군비 때문에 파탄이 났고, 서남이지역까지 도로를 건설하려는게 결국 파촉 지방의 백성들까지 피곤하게 만든다고 언급하고 있을 뿐임. 문맥 해석을 아무리 오지게 해봐도 님 같은 소설은 나올 수 없음.
2) 후한시대(AD 25 ~ 220년)의 중국 역사책인 후한서에는 한이 예맥조선의 남쪽에 있다고 했으니 한(마한,진한, 변한)은 산동성과 강소성에 있었다
--- 후한서에는 한의 북쪽에 예맥이 있다고 했지만 예맥이 북경 남쪽 창주시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데요? 자 후한서의 예에 대해서 보죠. 예는 북쪽에 고구려 옥저가 있고 남쪽에는 진한이 있다고 합니다. 아니 후한서 동이열전 부분을 보면 누가봐도 현재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지역을 설명합니다. 아무리 대가리 깨진 해석을 하더라도 님같은 해석은 불가능함.
애당초 소설을 쓰는건 좋은데, 좀 원문을 다 읽어보고 글 싸지릅시다. 1번의 가정이 틀렸는데도 억지로 그걸 옳다고 주장하면서 2번을 들이대니 님처럼 개소리를 하게 되는 것임. 상식도 없는 개소리 수준이라 역겨울 정도임.
그런데 평준서 내용은
" 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燕), 제(齊) 사이가 바람에 휩쓸리듯 소란해졌다."
따라서 창해군은 연과 제 사이이니 예맥조선은 연과 제 사이인 지금의 창주시입니다
(예의 임금 남여가 항복해서 설치한 군이 창해군이며 몇년 후에 한나라가 쫒겨 났습니다)
--> 이게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설명입니다(간단한 내용이니 쉽게 보면됩니다)
그리고 거짓말 하셨네요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있다고 적혀 있다라고 소설을 쓰시는데, 그런 거 없음.' 라고
숨겼는데 들통났고요
그리고 사료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료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례는
간단한 내용을 1) 어렵게 설명하고 2)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으면
거짓말과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嚴助、朱買臣等招來東甌, 事兩越, 江淮之閒蕭然煩費矣.
양월(남월과 민월)과의 전쟁으로 강수와 회수지역이 고통
唐蒙、司馬相如開路西南夷, 鑿山通道千餘里, 以廣巴蜀, 巴蜀之民罷焉.
서남이지역까지 도로를 개통할려니 그 도로건설 지역의 주민들이 고통
彭吳 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
조선과의 전쟁으로 그 인근 연과 제지역이 동요
이런 맥락으로 사마천이 서술한거지. 니가 말하는데로 무슨 예맥이 연과 제 사이에 있다고 기술한게 아님. 바보가 아니라면 이해하겠지?
그리고 평준서 내용인
" 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燕), 제(齊) 사이가 바람에 휩쓸리듯 소란해졌다."
따라서 창해군은 연과 제 사이이니 예맥조선은 연과 제 사이인 지금의 창주시입니다
(예의 임금 남여가 항복해서 설치한 군이 창해군이며 몇년 후에 한나라가 쫒겨 났습니다)
--> 이게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설명이다(간단한 내용이니 쉽게 보면됩니다)
이게 어떻게 전비 조달 내용인가요? 예맥조선 장소 이야기 입니다
연과 제가 언급된 건 중국 왕조의 조선 고구려 침공에는 수륙 양동작전이 기본인데, 수군은 제 지역 육군은 연 지역을 기반으로 출정하니 그 두 지역이 군비 충당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란다. 진짜 바보가 아니라면 사기 평준서에서 사마천이 언급한 의도가 무언지를 알텐데, 이런 엉뚱한 개소리를 한다는거 보면 참 한심하다.
머 이런 멍청한 사람하고 시간낭비하는 내가 바보일수도 있겠다.
아무튼 동아게 수준이 이정도인가 싶지만, 어디 역사카페 같은데 가서 이런 멍청한 소리 하지 않길 바래
확실한 예맥조선 위치 중국 25사 중에서 최고로 치는
사마천 사기 내용을 부정하고 후대 그것도 2천년 후의 한국 역사학계가 주장하는 내용
아니면 오늘날 일부 역사학자의 주장을 더 믿겠다고 하면 저도 할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더 설명드린다면..
1) 거리는 정확하다고 무조건 믿지 마시고 참고용도로 사용하시는 것이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대인들이 현장 직접 답사하거나, 지금과 같은 정확한 지도를 보면서 거리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고요, 전해들은 말을 본인이 판단하여 기록했을 가능성이 많으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정확하다고는 믿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맥조선이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인 창주시라는 사실은
1) 양심있는 중국학자라면 누구도 문헌이나 사료를 이용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2) 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이나 한국 사학계의 약점을 이용하여 반론할 수 있겠지요
- 예가 창주시면 낙랑군 한사군이 중국내륙인데 니들이 100년동안 한사군,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국사학계가 100년동안 가짜 연구를 했다고 있정하겠다는 말이냐
- 예가 창주시면 고구려가 하북성에 있게 되는데 한국사학계 통설은 고구려가 요동반도에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고구려가 하북성에 있게되는 예가 창주시에 있다는 주장할 수 있느냐
이렇게 중국학계가 문헌적인 반론이 아니라 정치적인 그리고 한국사학계의 약점을 공격하게 되겠지요
말로만 듣던 환빠가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ㅋㅋ 그래요, 환단고기가 다 맞다 치면 지금 현실에 어떤 도움이 되나요? 중국이 땅을 떼주나요? 일본이 형님이라고 불러주나요? 전세계가 경악하고 찬사를 보내리라 생각하나요???
지금의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현실이 너무 어두워서 가상의 과거 대제국을 만들어 자존심을 채우려 하시는 거란 자각은 안 드십니까..? 다 맞다손 치더라도 현재 우리에게 풀어야할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1도 도움이 안됩니다. 과거사뽕은 적당히 혼자만의 뇌내망상으로 즐기시고 현재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힘을 쏟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