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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5-03 21:57
[한국사] (5-1) 후한서 군국지/1~3세기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777  

앞에서 본 연구자는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의 요서군, 요동속국, 요동군, 낙랑군 등이 사학계가 비정한 위치가 될 수 없음을 고증하였다. 특히 후한서 군국지의 요동군은 현 요녕성 요양시에 비정될 수 없으며, 낙랑군 또한 현 서북한 평양에 비정될 수 없음을 면밀히 고증하였다. 또한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의 낙랑군과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의 낙랑군(평양)은 전혀 다른 장소이며, 만약 후한서 군국지의 낙랑군을 현 서북한 평양에 비정할 시에 두 당서의 낙랑군은 황해도 해주, 또는 개성, 경기도 파주, 또는 서울 등에 위치시켜야 함을 밝혔다. 


평양(平壤)이 낙랑군(樂浪郡) 땅이었다 한 기술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등 북송(北宋)의 사서가 비교적 처음으로,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의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천 리(雒陽東北五千里)”라 한 주석은 《구당서(舊唐書)》의 “경사 동쪽 5천 1백 리(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신당서(新唐書)》의 “경사에서 5천 리(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去京師五千里)”의 기계적 답습(踏襲)이다 하는 것이 본 연구자의 주장이다.


사서

내용

편찬 시기(완성 판본 기준)

후한서(後漢書)군국지

낙양 동북 5천 리

11 세기, 북송(北宋)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

경사에서 5천 리

11세기, 북송(北宋)

구당서(舊唐書)고구려전

경사 동쪽 51백 리

10세기, 북송(北宋)



《후한서(後漢書)》 군국지의 요동군 “낙양 동북쪽 3천 6백 리(雒陽東北三千六百里)” 기록과 낙랑군 “낙양 동북쪽 5천 리(雒陽東北五千里)” 기록은 의도적으로 현 요양(遼陽)을 요동군 치소로 비정하고 계산한 것으로 분석된다. 두 군(郡) 사이의 거리인 ‘1천 4백 리’는 진·한(秦漢) 415.8m 리수 적용 시 582.12km이며, 이를 수·당(隋唐) 시대 리수로 재 환산하면 약 1천 98 리로서, 북송(北宋) - 청(淸) 시대 사서에서 기술한 ‘현 요양~서북한 평양’의 거리값에 상당하다. 


즉 낙양(雒陽)으로부터 순차적으로 사실 거리를 측정한 것이 아니라 《구당서(舊唐書)》의 ‘낙양~안동도호부’ 3천 820 리(東都三千八百二十里) 값과 ‘경사~평양’ 5천 1백 리‘ 값, 즉 ’낙양~평양‘ 4천 150 리 추산 값(장안~낙양 거리 수 950 리를 단순 감산한 경우)을 산술하여 낸 ’1천 330 리(1,300~1,400리)를 단순 적용하였거나 당·송(唐宋) 시대의 현 요녕성 요양과 서북한 평양의 거리 수인 1천 100 리 내외를 漢尺으로 환산하여 ‘1천 400 리(당척 1천 98 리)’ 값을 내고, 이를 후한서 군국지 해당 조에 주석으로 넣은 것으로 필자는 추정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의 완본(完本)이 최초 간행된 해는 1022년이고, 《구당서(舊唐書)》는 945년, 《신당서(新唐書)》는 1060년이다. 이 시기는 오대(五代) 말에서 북송(北宋) 시대에 해당하는데 당(唐) 왕조가 망한 이후 외세(外勢)의 침탈로 영토가 급격히 줄어든 시대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의 여러 왕조들은 국력이 쇠퇴(衰退)하고 영토가 크게 줄었을 때면 반드시 영역(領域)을 과장하여 왜곡하는 위사(僞史)를 시도하였다.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가 그렇고,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이 그러하며, 북송(北宋)의 《신당서(新唐書)》가 그러한데 《후한서(後漢書)》 역시 그러한 시대적 배경과 맥락(脈絡)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의 군현(郡縣) 거리 기록에서 요동군과 낙랑군 등만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사례가 바로 상곡군(上谷郡) 기록(주석)이다.


雒陽東北三千二百里


한(漢)나라 상곡군은 저양현(沮陽縣)에 치소를 두었는데, 후위(後魏) 때에 폐지되었다가 훗날 당(唐)나라에 이르러서 그 자리에 규천군(媯川郡) 회융현(懷戎縣)을 두었다. 그 위치는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懷來縣) 일대이다. 양한(兩漢)의 상곡군 저양현이 현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 일대에 있었다 하는 것은 사학계의 정설로서 이론이 없다. 


구분

기록

중국사학계 비정위치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문위키백과참고)

탁군(涿郡)

낙양 동북 18백 리

雒陽東北千八百里

하북성 탁주시

今河北省涿州市

()

낙양 동북 2천 리

雒陽東北二千里

북경시 대흥구

今北京市大興區

상곡군(上谷郡)

낙양 동북 32백 리

雒陽東北三千二百里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 일대

今河北懷來縣一帶



그런데 이 두 지점의 거리를 후한서 군국지는 무려 1천 200 리로 적고 있는 것이다. 혹자(或者)는 하북성 방향이 아니라 산서성을 거쳐 가는 경로의 거리 수를 표시한 것 아니냐 하고 반문할 수 있다. 만약 후한서의 저 3천 200 리 거리가 낙양에서 산서성을 거쳐 산길을 경유하는 거리 수를 표현한 것이면 우선 동북(東北)이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 산서성 방향은 낙양에서 동북(東北) 방향이 아니라 서북(西北), 또는 북(北) 방향이므로. 또한 무엇보다 후한(後漢)의 상곡군은 유주(幽州) 소속이었다. 따라서 탁군과 계 등 유주(幽州) 중심부와의 관계 속에서 그 위치와 거리가 제시돼야 함이 마땅하고도 자연스럽다. 


계와 상곡군, 현 북경시 대흥구와 장가구시 회래현의 현대 도로에서의 거리는 140km이다. 후한서(後漢書)가 제시한 두 지점의 거리 ‘1천 200 리’는 한척, 즉 1里가 415.8m였던 진·한(秦漢) 시대 도량형으로 계산하면 무려 498.96km이다. 통전(通典)에서는 두 지점, 즉 규천군과 범양군(유주)의 거리가 ‘200 리’*였다고 적었다. 이를 1里가 530m였던 당나라 시대 도량형으로 계산하면 106km이다. 이는 실제 양한(兩漢) 상곡군 저양현과 당(唐) 규천군 회융현의 위치가 현 장가구시 회래현의 동남쪽에 위치했음을 시사하는데 동시에 후한서(後漢書) 군국지의 1천 200 리 거리 수치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 과장이요 왜곡인가 하는 것을 선명히 알려준다. (* 규천군 조에서는 200 리, 범양군 조에서는 210 리)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후한서(後漢書) 편찬자는 이러한 황당한 왜곡을 저질렀을까? 그 이유는 바로 ‘연운(燕雲) 16주’의 상실(喪失)에 있다. 연운 16주는 후진(後晉)의 석경당이 후당(後唐)을 공격하며 군사원조를 받은 대가로 936년에 거란(契丹)에 할양한 지역이다. 그 지역은 구체적으로, 유주(幽州), 계주(薊州), 탁주(涿州), 단주(檀州), 순주(順州), 영주(瀛州), 막주(莫州), 신주(新州), 규주(媯州), 유주(儒州), 무주(武州), 울주(蔚州), 운주(雲州), 환주(寰州), 응주(應州), 삭주(朔州)로서 오늘날 하북성 중북부와 산서성 북부를 망라하는 광대한 영역이다. 중국 왕조들은 북송(北宋)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을 수복(收復)하고자 끊임없이 군사적 시도를 하였으나 좌절하였고, 이 영역은 거란의 남경과 서경도에 고스란히 편제(編制)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이 “낙양에서 상곡군까지 3천 2백 리(雒陽東北三千二百里)”라 한, 후한서 군국지의 황당한 주석의 배경이다.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의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상곡군까지 3천 2백 리(雒陽東北三千二百里)”가 송나라 판 서북공정이라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요동군까지 3천 6백 리(雒陽東北三千六百里)”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낙랑군까지 5천 리(雒陽東北五千里)” 등은 송나라 판 동북공정에 다름 아니다. 후한서의 이러한 술수(術數)와 아주 유사한 방식이 이미 당(唐)나라 때에 있었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이 바로 그것이다. 통전의 다음 기록들을 살펴보자.


명칭

기술 내용

핵심

북평군

(北平郡)

東至柳城郡七百里南至海一百里西至漁陽郡三百里北至塞百八十里東南到臨榆闗一百八十里西南到馬城縣一百八十里西北到石城縣一百四十里東北到柳城郡七百里去西京四千三百二十里去東京三千五百二十里

 

동쪽으로 유성군까지 700

동북쪽으로 유성군까지 700

서쪽으로 어양군까지 300

동남쪽으로 임유관까지 180

 

서경(장안)까지 4320

동경(낙양)까지 3520

 

유성군

(柳城郡)

東至遼河四百八十里南至海二百六十里西至北平郡二百里北至契丹界五十里東南到安東府二百七十里西南到北平郡三百七十里西北到契丹界七十里東北到契丹界九十里契丹衙帳四百里去西京三千里去東京四千一百一十里

동쪽으로 요하까지 480

서쪽으로 북평군까지 200

서남쪽으로 북평군까지 370

동남쪽으로 안동도호부까지 270

 

서경까지 3천 리

동경까지 4110

어양군

(漁陽郡)

東至北平郡三百里南至三㑹海口一百八十里西至范陽郡二百十里北至慶長城塞二百三十五里東南到北平郡石城縣一百八十五里西南到范陽郡安次縣界一百二十五里西北到密雲郡二百一十七里東北到北平郡石城縣界廢盧龍戍二百里去西京二千八百二十里去東京二千二十里

동쪽으로 북평군까지 300

동남쪽으로 북평군 석성현까지 185

동북쪽으로 북평군 석성현 지역의 폐지된 노룡수까지 200

서쪽으로 범양군까지 210

서남쪽으로 범양군 안차현 지역까지 125

 

서경까지 2820

동경까지 220

범양군

(范陽郡)

東至漁陽郡二百十里南至文安郡二百八十里西至上谷郡一百十四里北至媯川郡二百十里東南到里西北到(탈락자)里西南到北到里東歸化郡八十里去西京二千五百二十三里去東京一千六百八十里

동쪽으로 어양군까지 210

 

서경까지 2520

동경까지 1680

안동부

(安東府)

東至越喜部落二千五百里南至栁城郡界九十里西至契丹界八十里北至渤海一千九百五十里東南到丹衙帳一千里里西南到丹界八十里西北到契東北到契里去西京五千三百二十里去東京四千四百四十里

남쪽으로 유성군 지역까지 90

북쪽으로 발해까지 1950

 

서경까지 5320

동경까지 4440



북평군(北平郡)


당(唐)나라 북평군(北平郡)은 평주(平州), 즉 현 진황도시의 난하(灤河) 유역에 있으면서 노룡현(盧龍縣)에서 다스렸다. 이 지역의 행정단위와 명칭은 당나라 시대에 북평군과 평주 둘 사이를 오갔다. 쉽게 말해서 당 북평군은 당 평주다. 


북평군 조를 보면 북평군에서 어양군까지 300 리라고 하였고, 어양군 조를 보면 어양군에서 북평군까지 역시 300 리라고 하여서 두 기술이 일치한다. 한편 범양군 조를 보면 범양군에서 어양군까지 210 리라고 하였고, 어양군 조에서는 어양군에서 범양군까지 역시 210 리라고 하여서 또한 두 기술이 일치한다. 이를 바탕하면 범양군(유주)에서 북평군(평주)까지 510 리임을 쉽게 산술할 수 있고, 이 거리는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기술한 역대 사서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런데 북평군에서 서경과 동경까지의 거리 기록은 매우 이상하다. “북평군에서 서경(장안)까지 4천 320 리”라고 했고, “북평군에서 동경(낙양)까지 3천 520 리”라고 했다. 분명히 바로 앞에서 어양군과 북평군의 거리가 300 리라는 것을 교차로써 확인하였다. 통전이 기술한 어양군에서 서경(장안)과 동경(낙양)까지의 거리는 각각 2천 820 리, 2천 20 리이다. 북평군에서 따로 배를 타지 않는 다음에는 반드시 현 당산시 일대에 있던 어양군을 지나서 가야 하며 수로(水路)나 해로(海路)를 이용하는 경로라 하면 그것을 명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치에 맞는 북평군과 서경/동경의 거리는 어양군의 해당 거리에 300 리 내외의 수치를 가산(加算)한 것이어야 한다.


현 당산시 일대에 있던 어양군과 불과 300 리 떨어져 있던, 현 진황도시 난하 유역에 있던 북평군이 아무런 맥락 없이 무려 1천 200 리 멀어진 것이다. 현 노룡에서 1천 200 리 더 동쪽으로 떨어진 곳은 당척으로 산술하면 636km로서 현 의무려산(醫巫閭山) 일대의 북진(北鎭), 또는 의현(義縣) 쯤에 해당한다. 이곳이 당나라의 북평군이었던 적은 결코 없다.


유성군(柳城郡)


당나라가 영주(營州)를 유성군(柳城郡)으로 개칭(改稱)한 때는 서기 742년이다. 그 후 758년에 다시 명칭을 환원하여 영주(營州)라고 하였다. 영주는 696년 거란의 반란 이후로 무력화 되었는데 699년 어양현으로 교치했다가 다시 705년 유주에 붙여서 다스렸으며, 716년 거란에 친당 세력이 집권하자 다시 옛 영주 지역(양 당서에는 ‘유성’으로 적음)으로 복귀했다가 다시 718년 거란에서 반당 세력이 집권하자 북평군(평주)로 쫓겨났다가 또다시 720년 어양현에 교치하였다. 722년, 또는 723년에 다시 거란에 친당 세력이 집권하자 옛 영주 지역으로 복귀했으나 또다시 반당 세력이 득세하자 곧 쫓겨들어왔다. 그 후 거란이 돌궐에 스스로 복속하고, 이어서 발해와 거란, 돌궐이 연합하여 유주와 평주 등 지금의 하북성 북부를 공격(733년)해 왔는데 그 후 당나라는 영주(營州)를 장성 밖으로 진출시키지 못 하고 지금의 진황도시 창려현(昌黎縣) 일대에 두었으며, 당나라가 망하고, 오대(五代)를 거치며 거란이 이 지역을 차지할 때까지 계속 이 자리에 있었다.


통전(通典)의 북평군 조에서 제시하는 유성군의 위치는 “동쪽으로 유성군까지 700 리”, “동북쪽으로 유성군까지 700 리”로서 지금의 조양시 조양현 위치에 상당하다. 그런데 유성군 조에서 제시하는 북평군과의 거리 수는 매우 이상하다. “북쪽으로 북평군까지 200 리”, “서남쪽으로 북평군까지 370 리”하였는데 방위도 위치도 전혀 일치하지 않고 엉터리다. 


서경(장안) 및 동경(낙양)과의 거리 수치는 더욱 엉망이다. “유성군에서 서경까지 3천 리(去西京三千里)”, “동경까지는 4천 110 리(去東京四千一百一十里)”라고 적었는데 서경보다 동경이 더 먼 거리라는 것이 우선 말이 안 되며, 이 두 수치가 뒤바뀐 것이라고 보아도 북평군보다 오히려 가까운 것(북평군에서 서경까지 4천 320 리, 동경까지 3천 520 리)이 되므로 이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겨우 30여 년 남짓 장성 밖을 영유(領有)하였을 뿐으로, 696년 거란의 반란 이후로는 망할 때까지 계속 장성 밖을 나서보지 못 한 것이 당나라의 실상이었다. 특히 두우(杜佑)가 통전을 쓸 당시인 8세기 중후반은 발해가 강성하였고, 거란과 돌궐이 당을 압박하며 통제를 벗어나 있었으며, 각지에서는 절도사(節度使)들이 반란을 일으켜 말그대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대였다. 이것이 《통전(通典)》을 편찬한 두우(杜佑)가 자행한 역사공정의 배경이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생략



5-2부에서 계속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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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uder 21-05-05 05:25
   
역사왜곡을 저질렀다면 다른 누군가가 보고 의문을 품어보지않았을까요? 특히 중국 쪽에서 연구를 많이 했을텐데 동북공정을 위한 낙랑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지금까지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거론한 사람이 있었을 법도 한데 혹시 찾아보신적 있으신가요?
     
감방친구 21-05-05 13:10
   
통전과 후한서 등의 거리 기록이 조작됐을 거다 하는 거는
예전부터 말들이 있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냥 봐도 이상하거든요

그런데 이 문제를 파고든 사람들은 매우 적고
대부분 그 기록을 그대로 믿고 어떻게든 끼워맞추려고
해왔습니다

동아게에서는 제가 유일하게 개인적 분석을 토대로 조작됐다는 견해를 몇 년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해왔습니다

지금 찾아보면 민간연구자들 중에 한척과 당척 등을 대입하여
분석을 시도한 이가 두어 분 보이는데
한척과 당척의 수치를 근거도 불분명한 값으로 계산을 하고
엉뚱하거나 부실한 결론에 도달하더군요

후한서 군국지 문제에 대해서 저처럼 이렇게 입체적이고 디테일 하게 분석하여 연구한 연구자는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밑에 지누짱님이 게시하신 김종서 박사 연구가 학자들 중에는
유일한 것으로 아는데 그 연구내용과 결론에 저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 연구는 거의 모두 누군가의 기존 연구를 참고 하지 않고 사서만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어서 제 연구 대다수가 독창적인 것이 많습니다
Marauder 21-05-09 19:58
   
이거 읽어봤는데 표에서는 분명 유성군에서 서쪽으로 북평 200리라고 해놓으셨고 원문도 그게 맞는데

중간에 북쪽으로 북평 200리라는 해석은 어디서 나온거에요?
     
감방친구 21-05-09 21:17
   
실수입니다
표 안의 해석은 뒤늦게 발견해서 수정했는데
다른 거는 수정을 못 했습니다
감방친구 21-05-09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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