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두백과》를 기준으로 하면, 《신당서(新唐書)》가 기술한, 낙양에서 낙랑군 땅이었다 한 평양까지의 거리는 후한서 리수로 환산하였을 시에 약 5천 420 리, 《구당서(舊唐書)》가 기술한, 낙양에서 낙랑군 땅이었다 한 평양까지의 거리는 후한서 리수로 환산하였을 시에 약 5천 545 리라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무려 약 420 리, 약 545 리의 오차가 나는 것이다.
사서 |
기록 |
한민족백과 기준
후한서 리수 환산값 |
바이두백과 기준
후한서 리수 환산값 |
후한서 군국지 |
5천 리 |
(1천 814.2km) |
(2천 79km) |
신당서 고구려전 |
4천 250 리 |
약 5천 200 리 |
약 5천 420 리 |
구당서 고구려전 |
4천 350 리 |
약 5천 322 리 |
약 5천 545 리 |
《후한서(後漢書)》 군국지의 요동군 “낙양 동북쪽 3천 6백 리(雒陽東北三千六百里)” 기록과 낙랑군 “낙양 동북쪽 5천 리(雒陽東北五千里)” 기록은 의도적으로 현 요양(遼陽)을 요동군 치소로 비정하고 계산한 것으로 분석된다. 두 군(郡) 사이의 거리인 ‘1천 4백 리’는 진·한(秦漢) 415.8m 리수 적용 시 582.12km이며, 이를 수·당(隋唐) 시대 리수로 재 환산하면 약 1천 98 리로서, 북송(北宋) - 청(淸) 시대 사서에서 기술한 ‘현 요양~서북한 평양’의 거리값에 상당하다. 그런데 지금의 요양(遼陽)이 요동성(遼東城)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때는 대체로 오대(五代)에서 요(遼) 시기의 일이다.
《후한서(後漢書)》 군국지의 기록을, 낙랑군과 요동군을 먼저 찍고, 거기서 서쪽으로 비정하여 간다 하면, 요동군보다 300 리 서쪽에 있는 요서군(遼西郡)은 현 북진시(北鎭市) 일대가 될 것이고, 요동속국(遼東屬國)은 대릉하(大陵河) 중하류 일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학계 통설의 바람처럼 간단하지 않다.
2부에서 계속__
※ 별도 붙임 : 《바이두백과(百度百科)》 1 리(里) 진·한(秦漢) 415.8m, 수·당(隋唐) 530m 자료 값 적용
후한서 |
거리 |
구당서 |
거리 |
탁군
涿郡 |
낙양 동북 1천 8백 리
(748.440km)
雒陽東北千八百里 |
탁주
涿州 |
낙양까지 1천 4백 80 리
(784.400km)
至東都一千四百八十里 |
계
薊 |
낙양 동북 2천 리
(831.600km)
雒陽東北二千里 |
계
幽州大都督府
(薊州所治) |
낙양까지 1천 6백 리
(848km)
至東都一千六百里 |
대군
代郡 |
낙양 동북 2천 5백 리
(1,039.5km)
雒陽東北二千五百里 |
울주
蔚州 |
낙양까지 1천 6백 40 리
(869.2km)
去東都一千六百四十里 |
상곡군
上谷郡 |
낙양 동북 3천 2백 리
(1,330.56km)
雒陽東北三千二百里 |
규주
媯州 |
낙양까지 1천 9백 10 리
(1,012.3km)
至東都一千九百一十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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