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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29 22:56
[한국사] (1) 후한서 군국지 거리 기록 분석과 서기 1-3세기의 이해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309  

평양(平壤)이 낙랑군(樂浪郡) 땅이었다 한 기술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등 북송(北宋)의 사서가 비교적 처음으로,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의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천 리(雒陽東北五千里)”라 한 주석은 《구당서(舊唐書)》의 “경사 동쪽 5천 1백 리(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신당서(新唐書)》의 “경사에서 5천 리(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去京師五千里)”의 기계적 답습(踏襲)이다.

사서

내용

편찬 시기(완성 판본 기준)

후한서(後漢書)군국지

낙양 동북 5천 리

11 세기, 북송(北宋)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

경사에서 5천 리

11세기, 북송(北宋)

구당서(舊唐書)고구려전

경사 동쪽 51백 리

10세기, 북송(北宋)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는 6세기 말 양(梁)나라 유소(劉昭)가 주석을 붙였다 하나, 북송(北宋) 진종(眞宗) 건흥(乾興) 원년(1022년)에 간행한 판본(板本)이 최종본으로서, 오늘날 전해지는 《후한서(後漢書)》가 모두 이 판본(板本)을 원본으로 한다. 왕건(王建)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면서 폐허가 돼 있던 지금의 서북한 평양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이곳을 주(周)나라의 고사(古事)를 본 받아 서경(西京)으로 승격(昇格)해 존숭하면서 대내외(對內外)에 고려가 고구려의 적통(嫡統)임을 선전하였다. 왕건의 고려(高麗)는 오대(五代)의 이행(移行)적 정권들과 교류하였고, 북송(北宋)부터 송(宋)나라와 깊은 관계를 형성하였다. 평양(平壤)이 낙랑군(樂浪郡) 땅이었다 한 기술이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등 북송(北宋)의 사서에서 비교적 처음 등장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서 기술한, 유주(幽州) 소속 주요 군(郡)의 낙양(雒陽)과의 거리 및 사학계가 비정한 위치는 다음과 같다.

구분

기록

중국사학계 비정위치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문위키백과참고)

탁군(涿郡)

낙양 동북 18백 리

雒陽東北千八百里

하북성 탁주시

今河北省涿州市

()

낙양 동북 2천 리

雒陽東北二千里

북경시 대흥구

今北京市大興區

대군(代郡)

낙양 동북 25백 리

雒陽東北二千五百里

하북성 울현 일대

今河北蔚縣一帶

상곡군(上谷郡)

낙양 동북 32백 리

雒陽東北三千二百里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 일대

今河北懷來縣一帶

어양군(漁陽郡)

낙양 동북 2 천 리

雒陽東北二千里

북경시 밀운구 구역

今北京市密雲區的區域

우북평군(右北平郡)

낙양 동북 23백 리

雒陽東北二千三百里

내몽골 영성현

今內蒙古寧城縣甸子鎮黑城村黑城古城

요동속국(遼東屬國)

낙양 동북 3260

雒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요녕성 서부 대릉하 중하류 일대

今遼寧省西部大凌河中下游一帶

요서군(遼西郡)

낙양 동북 33백 리

雒陽東北三千三百里

요녕성 의현 서쪽

今遼寧省義縣西

요동군(遼東郡)

낙양 동북 36백 리

雒陽東北三千六百里

요녕성 요양시

今遼陽市

현도군(玄菟郡)

낙양 동북 4천 리

雒陽東北四千里

요녕성 심양·무순 일대

今沈陽撫順一帶

낙랑군(樂浪郡)

낙양 동북 5천 리

雒陽東北五千里

서북한 평양시 대동강 남안

今平壤大同江南岸


전근대 중국의 각 시대별 도량형(度量衡)은 차이를 보이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바이두백과》가 설명하는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1 리(里)는 다음과 같다.

구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百度百科

·(秦漢)

 

415.8m

전한(前漢)

362.84m

 

·(隋唐)

 

530m

()

443.87m

 


《바이두백과》가 설명한, 당(唐)나라 1리 530m는 필자 본인이 「645년 당 태종(太宗)의 고구려 침략과 요택의 위치」 연구에서 유주(북경)와 북평(노룡)의, 현대 도로에서의 거리와 통전의 거리 기록을 대략적으로 비교하여 산술한 값인 10 리 5.2km 값에 근사(近似)하다. 《바이두백과》가 중국학계의 최신의 성과를 더욱 잘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바이두백과》의 설명에 더 비중을 두고자 한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서의 평양(낙랑군) 거리 기록은 경사(京師), 당(唐)나라 도읍이었던 장안(長安)을 기준하여서 낙양(雒陽)을 기준한 《후한서(後漢書)》와 차이가 있다. 《구당서(舊唐書)》에서 장안과 낙양의 직접 거리는 950 리이지만 주변 행정지와 거리 수를 제시할 때에는 각기 다른 경로를 사용하여 제시하고 있어서 그 수치가 제각각이므로 기계적으로 950 리를 빼는 방식으로 산술할 수 없다. 따라서 《구당서(舊唐書)》의 거리 기록에서 한국계(韓國界)와 중국계(中國界)의 중간 지점에 해당한다 볼 수 있는 방위와 위치에 해당하는 3 지점을 다음과 같이 선별하여서 해당 기술에 나타난 “장안-□”과 “낙양-□”의 거리 차를 비교하였다.

구분

경사(장안) 기준 거리

동도(낙양) 기준 거리

현 위치

거리 차

平州

2650

(在京師東北二千六百五十里)

1900

(至東都一千九百里)

노룡현

750

營州

3589

(在京師東北三千五百八十九里)

2910

(至東都二千九百一十里)

조양현

679

安東都護府

4625

(去京師四千六百二十五里)

3820

(東都三千八百二十里)

미상

805


혹자는 《구당서(舊唐書)》의 안동도호부 위치를 요동성(遼東城)으로 보는데 해당 기술 어디에도 요동성(遼東城)이라 설명한 내용이 없다. 경사에서 4천 625 리에 있다 한 안동도호부의 위치를 요동성으로 보는 것은 단지 심증적 추측일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일단 미상(未詳)으로 처리하였다.

당(唐)나라 평주와 영주, 안동도호부는 모두 낙양의 동북방으로서, 현 하북성 당산(唐山)과 진황도(秦皇島) 일대에서 동쪽으로 위치하였는데 각기의 장안과 낙양 기준 거리 기술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3 곳의 중간값에 해당하는 평주(平州)의 거리차인 ‘750 리’를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이를 한(漢)과 당(唐)의 도량형(度量衡) 1 리(里) 값을 적용하여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출전

기록 상 거리

1 m 환산

총 거리 km 환산

漢尺 적용

후한서 군국지

낙양낙랑군

5천 리

(바이두)

415.8m

279km

-

(민족문화)

362.84m

1814.2km

-

신당서 고구려전

낙양평양

4250

(바이두)

530m

2252.5km

(바이두 415.8m)

5420

(민족문화 362.84m)

6210

(민족문화)

443.87m

1886.447km

(바이두 415.8m)

4540

(민족문화 362.84m)

5200

구당서 고구려전

낙양평양

4350

(바이두)

530m

2305.5km

(바이두 415.8m)

5545

(민족문화 362.84m)

6354

(민족문화)

443.87m

1930.834km

(바이두 415.8m)

4644

(민족문화 362.84m)

5322


위와 같이 《후한서(後漢書)》와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가 기술한 거리를 분석한 결과 동일한 장소라고 결코 볼 수 없을 만큼 거리차가 크게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글이 잘려서 1부의 뒷부분을 새 글로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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