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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26 11:44
[한국사] 고조선이 문제가 아니라 낙랑이 문제입니다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464  

연구자분들, 연구자가 아니다 하더라도 비교적 깊이 탐구하는 탐문자분들은 공감하실 것입니다

후한ㅡ조위, 즉 서기 3세기까지의 서북한 지역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쟁점입니다

삼국지, 위략, 후한서 기록과
삼국사기 기록,
그리고
서북한 물질문화상을 교차하여 보면

서북한 평양이 애초의 왕검성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르면 서기전 1세기 중후반, 대체로 서기 1세기부터 3세기까지는 이 지역이 낙랑군이었고

이 지역을 근거로 한반도에 정치적ㆍ군사적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해 보이거든요

이렇게 되면

아주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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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옹 21-04-26 11:51
   
당시 기록만봐도 낙랑은 지금 대동강유역이었져.. 그뒤 고구려에게 망하구서 (313년) 요동으로 옮겨갔는데.. 이거때매 낙랑요동설 졸라 우겨대는 꼴임.
철령위만봐도 원나라때 원나라땅이덩 쌍성총관부 주원장이 지네땅이라 주장하다가 고려가 뒤집혀서 조선된뒤엔 주원장이 걍 이미 말한건있고하니 만주에다 철령위만든건데.. 원래 철령위는 만주에 있다란 개소리가 나왔던거고..
     
보리스진 21-04-26 12:28
   
아닌데요.
          
천추옹 21-04-26 12:36
   
맞음여.. 진수의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족전에도 나오는 내용임..
예의 남쪽은 진한이고 북쪽은 구려 (고구려), 옥저고 동쪽은 큰 바다 (동해)라고 나오는데.. '단단대산령'서쪽은 '낙랑'에 속하였다고 나옴..
예의 위치는 논란이 안되는 지역임.. 그 서쪽이 낙랑인데 여기가 어딜지 생각해보삼..
그리고 고구려가 대무신왕때 낙랑을 멸망시켰는데 이때 얘기가 호동왕자 얘기임.. 옥저로 사냥나갔다가 낙랑국의 왕을 만났다는..
암튼 그뒤 후한의 광무제가 바다 건너서 낙랑을 그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옴.
               
보리스진 21-04-26 12:40
   
낙랑과 요동 사이를 이동했다는 것은 주류사학계 이론인데요.
고구려 중심지 이동설이라고,
이에 대한 재야사학계의 반론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제 전공이 아니라 넘어가겠습니다.

철령위하고 철령은 당시 만주에 있었던 것이 맞습니다.
고려시대 문인 이색의 기록에 따르면 정료위가 설치되면서 쌍성과 접경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정료위의 범위는 중국사료에 따르면 현재 압록강 북쪽이구요.
철령위하고 철령 모두 원래 만주에 있었던게 맞습니다.

철령위하고 백두산 내용은 제가 조금 압니다.
혹시 자세히 토론하고 싶으시면 제가 답변 달아드릴게요.
                    
천추옹 21-04-26 12:55
   
님아.. 정료위는 서로는 산해관부터 동으론 압록강까지 이르는 지역임... 쌍성총관부경우는 원나라가 화주에설치한건데 공민왕때 이거 병합하면서 동북면이라고 부르던지역이고 이지역은 여진몰아내고 넓혀가면서 존나 커져갔슴.
서북쪽은 압록강부터 북으론 백두산이남지역까지..

만주 철령위는 1387년 주원장이 철령북쪽은 원래 명나라 땅이니 국경을 철령위로 하겠다고 우왕에게 서신보내면서 요동정벌할려고했던거고.. 그때 위화도 회군으로 나라 뒤집혀지니 1388년에 주원장이 만주에 임시로 철령위 세우고서 거길 그냥 국경으로 삼은거임.. 그게 다임. 그러다 그 철령위도 옮겨서 1393년에 한참 더 북쪽에다 세웠슴.

당시 주원장이 제주도도 원나라땅이었으니 내놓으라고도 했었구 그래서 제주도말은 원나라꺼였다구해서 제주도말 주원장에게 줬던거였슴. (말 안내놓을려던 제주도 목호들이 반란일으켜서 최영이 제주도 원정갔던 이유고)

압록강으로 국경삼은것도 명나라 기록에 이렇게 나옴
“고려가 예로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고 하여, 이제 철령에 관해 그럴 듯하게 말을 꾸몄지만, 거짓되고 속이는 게 분명하다. 이런 뜻을 짐의 말로 효유하여, ‘본분을 지키게 하여 흔단을 만들지 말라고 유시한다."
                         
보리스진 21-04-26 13:14
   
아닌데요.
북계하고 동계는 다른데요.
님이 말씀하신 것은 동북면, 동북계, 동계를 말씀하신 것이구요.
압록강하고 접경하는 것은 고려의 북계지요.

화주(和州)지방은 동계(동북면)에 속하는 곳이에요.

주원장하고 고려하고 서로 경계를 다툴 때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주원장은 압록강으로 하라, 고려는 철령으로 하겠다.
주원장이 압록강으로 하라고 해서, 철령에다가 철령위를 설치해서 자기네 땅으로 만들어서 압록강을 경계로 경계선이 나뉩니다.
만약 현재 강원도 철령이라고 하면 모순이 되기 때문에 강원도 철령이 아니에요.
                         
천추옹 21-04-26 13:30
   
님아 원나라가 고려침공하면서 점령한 지역이 서로는 서경일대였슴. 여기다 동녕부 세웠고 그 동쪽인 화주엔 철령위 세운거였슴. 이둘간은 고대시절부터 산맥으로 나눠지는 지역임. 지금도 마찬가지고.. 평안도 함경도로 나눔..

근데 동녕부는 충렬왕때 반환받슴돠..  동녕부가 압록강하고 접하는 부근이래봐야 의주가 다였슴. 그상류쪽은 공민왕이 수복한 지역으로 보고있슴.

철령이 요동에 있었다면 우왕이 뭐하러 명나라 치러했겠슴? 영토 늘려준다는건데..??
당시  압록강이북 요동은 이미 유익이 귀부해버려서 명나라땅이었슴..
나하추가 졸라 치다가 개발렸던 지역임.
                         
보리스진 21-04-26 13:52
   
예..그러니까,
동녕부=서경=북계.
쌍성=화주=동북계

압록강하고 접경하는 지역은 북계이구요.
동북계인 쌍성이 아니구요.
그래서 정료위하고 접경했던 쌍성은 현재의 함경도 쌍성이 아니라는 뜻이죠.

철령 이북에서 공험진까지 원래 고려영토였는데,
명나라가 정료위를 설치하면서 요양, 심양을 차지해가니까, 고려가 공격을 한 것이죠.
원래 요동에 철령이 있었고, 철령 이북, 이서, 이동에 고려 땅이 있었는데, 고려 땅을 뺏기니 당연히 한 번 붙어볼까 하는 것이죠.
그리고 원나라 세력이 북쪽에 있으니, 원나라하고 외교가 오고가려면 이 지역을 차지하는게 중요하고, 원하고 연합해서 명나라하고 전쟁해볼 수도 있죠.
                         
천추옹 21-04-26 14:05
   
님아 가서 그냥 동녕부 지역이나 확인하고 다시오삼..  지금도 압록강 중상류는 자강도이지 평안도가 아님.. -_-
                         
보리스진 21-04-26 14:17
   
압록강 중상류는 평안도가 맞는데요.
조선시대기록을 보면 어면수가 합류하고 난 다음에 함경도에서 평안도로 경계가 바뀐다고 명확하게 나오는데요.
현재 지명으로는 장진강이 합수한 지점에서 왼쪽입니다.

현재 학계의 정설대로 또는 교과서대로 고려 국경을 살펴보면
절대로 쌍성(화주)지역이 압록강까지 가지도 못합니다.
                         
천추옹 21-04-26 14:38
   
하 조선시대 평안도가 아니라 지금말하는거임. 암튼 동녕부 지역확인은 해봤삼?? 압록강 하루 의주지역만 동녕부였지..
그냥 자비령 이북은 걍 원나라 직속이었슴.

쌍성총관부는 화주지역말하던거지만 공민왕때 북방영토 수복하면서 그게 죄다 동북면에 속하게되면서 커진거임.. 동녕부는 애초 고려땅이된뒤니깐 변함없고..
                         
보리스진 21-04-26 15:32
   
그니까,
의주에서 강계까지 북계
강계의 동쪽은 동북계

현재 주류학계 학설을 보면
강계 동쪽은 압록강하고 닿은 적이 없어요.
강계도 압록강하고 안닿아요.

그리고 고려가 예로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고 한 것은
만주 지역의 압록강을 말합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현재 파저강, 현재 혼강 주변에 장백산(백두산)이 있었다는 내용이 남아있습니다.

저 압록강을 명나라가 정료위를 설치하면서 잃어버립니다.
이 압록강 양쪽 지역이 다 잃어버렸다는 기록이 또한 목은 이색의 기록에 나옵니다.
                         
천추옹 21-04-26 16:37
   
님아 이기록 본적 한번도 없삼??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로 고쳤다.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의 8주와 선덕(宣德)·원흥(元興)·영인(寧仁)·요덕(耀德)·정변(靜邊)의 5진(鎭)을 수복하였다.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삼아 파견하여, 강역을 정하고 다시 동북면으로 불렀다. 몽고에 몰락한 지 무릇 99년만에 비로소 수복한 것이다. 명(明) 나라 태조(太祖) 홍무(洪武) 무진년(1388)에 비로소 강릉도(江陵道)와 나뉘어 스스로 1도가 되었는데, 삭방도라 일컬었다.대개 철령 이북을 삭방도라 일컫고, 이남을 강릉도라 일컫는다. 혹은 나누거나 혹은 합치므로 칭호가 한결같지 않다. 초년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 이남, 삼척(三陟) 이북을 통틀어 동계(東界)로 불렀다"

이게 공민왕당시 명칭들임.. 애초 쌍성총관부 수복 (1356년)하구나서 강릉삭방도라고 부르다가 (이게 동계였슴) 8주와 5진 수복하고난뒤엔 동북면으로 부른거임.
쌍성총관부의 화주가 저 8주중 1개주였단 얘기임.. 즉 동북면이 조올라 커지게되면서 나눌수밖에 없단얘기임..
그뒤 우왕때가서 강릉도랑 삭방도로 나뉘는데 그 경계가 철령이었슴..
철령이남은 강릉이된거고.. 철령 이북은 삭방도가 된거고..
                         
천추옹 21-04-26 16:39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90

세종실록 153권, 지리지 강원도

강원도(江原道)

본래 예맥(濊貊)의 땅인데, 뒤에 고구려의 소유로 되었다. 고려 때에 이르러 영동(嶺東)은 성종(成宗) 14년 을미 【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 에 삭방도(朔方道)라 불렀고, 명종(明宗) 8년 무술 【송나라 효종(孝宗) 순희(淳熙) 6년.】 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불렀으며, 원종(元宗) 4년 계해 【송나라 이종(理宗) 경정(景定) 4년.】 에 강릉도(江陵道)라 불렀었다. 공민왕(恭愍王) 5년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6년.】 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 불렀고, 또 다음해 정유에 강릉도(江陵道)라 불렀다가, 또 4년 경자에 삭방강릉도(朔方江陵道)로 불렀고, 또 7년 병오에 다시 강릉도라 불렀다. 영서(嶺西)는 명종(明宗) 8년 무술에 춘주도(春州道)로 불렀고, 그 뒤 혹은 동주도(東州道)로 불렀으며, 원종 4년 계해에 교주도(交州道)라 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원년 무진 【대명(大明) 홍무(洪武) 21년.】 에 영동과 영서를 합쳐서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라 하고, 충주(忠州) 소관(所管)의 창평군(昌平郡)을 내속시켰다. 〈공양왕〉 3년 경오에 경기(京畿)를 더 넓힘에 따라, 철원(鐵原)과 영평(永平)을 분할하여 경기에 옮겨 붙이고, 본조 태조 4년 을해에 이르러 비로소 강원도라 일컫고, 도관찰사(都觀察使)의 관청을 원주(原州)에 두었는데, 공정왕(恭靖王) 원년 기묘에는 원주의 임내 영춘(永春)과 충주(忠州)의 소관 영월(寧越)이 개 이빨처럼 들쭉날쭉하다 하여 서로 바꿔 붙였다. 태종 13년 계사에 또 가평(加平)과 조종(朝宗)을 분할하여 경기에 이속(移屬)하였다.

동쪽은 양양(襄陽) 바다 어귀에 이르고, 서쪽은 경기 가평현에 이르며, 남쪽은 충청도 영춘현에 이르고, 북쪽은 철령(鐵嶺)에 이르는데, 동서가 2백 50리, 남북이 5백 58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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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북쪽은 철령..  강원도 북쪽이 요동같음??
                         
천추옹 21-04-26 17:09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110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함길도(咸吉道)

동쪽은 큰 바다[大海]에 임하고, 남쪽은 철령(鐵嶺)에 닿고,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接)하였다. 준령(峻嶺)이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기복(起伏)하여 남쪽으로 철령(鐵嶺)까지 뻗쳐 있어, 천여 리에 긍(亘)한다. 북쪽은 야인(野人)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은 철령으로부터, 북쪽은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1천 7백 여 리이다. 동쪽과 서쪽으로 큰 산과 큰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 땅의〉 넓고 좁은 것이 같지 아니하여, 어떤 데는 수백여 리가 되고, 어떤 데는 6, 70리가 되는데, 오직 갑산(甲山)만이 큰 산의 서북쪽 바깥으로 쑥 들어가 있다.

함길도 동쪽은 바다.. 남쪽은 철령... -_-...
                         
보리스진 21-04-26 17:14
   
동계=동북계=강릉삭방도=강릉=삭방
동계=철령=화주=쌍성

현재 주류학계 고려 영토로는 동계가 압록강과 접경하는 곳은 없음

북계=의주, 강계
현재 주류학계 고려 영토로 압록강 하류에서 의주와 접경한다.
강계는 압록강과 떨어져있으나, 강계 이동은 동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강계에서 동쪽은 압록강과 접경하는 곳은 없다.

따라서 정료위가 설치되어 쌍성과 접경하게 되었다고하는 것은
쌍성이 만주지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영토이동이 있음을 "향산", "압록강","백두산"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얘기한 바 있음.
조선시대 기록에 나오는 철령은 현재의 강원도의 철령이거나 함경도의 철관을 의미하는데, 고려시대에 나오는 철령과 다르다.
                         
천추옹 21-04-26 17:40
   
"동계=동북계=강릉삭방도=강릉=삭방" 이런 ㅄ같은 소리하는 애덜 꼭있어서 굳이 일부러 조선왕조실록 기록까지 퍼온건데 난독인가...

쌍성총관부 수복하고나서 기존 동계랑 화주랑 합쳐서 부른게 강릉삭방도임.
나중에 8주 4진 수복하고나선 (이게 공민왕이 수복한 영토임 .. 서로는 압록강 중상류부터 갑주까지) 철령 이남은 강릉.. 그 이북은 삭방주로 나눴다고..
기록에도 나와있는데 뭔소리임??

삭방도라 일컬었다.대개 철령 이북을 삭방도라 일컫고, 이남을 강릉도라 일컫는다삭방도라 일컬었다.대개 철령 이북을 삭방도라 일컫고, 이남을 강릉도라 일컫는다삭방도라 일컬었다.대개 철령 이북을 삭방도라 일컫고, 이남을 강릉도라 일컫는다삭방도라 일컬었다.대개 철령 이북을 삭방도라 일컫고, 이남을 강릉도라 일컫는다삭방도라 일컬었다.대개 철령 이북을 삭방도라 일컫고, 이남을 강릉도라 일컫는다

이해못함?? 암튼 난 여기까지.. 알아듣건 못하건 그건 너님 몫임..
                         
보리스진 21-04-26 18:02
   
공민왕 때 수복한  8주 4진 다 계산에 다 넣고 말한건데요.
님이 말한 철령이북은 갑주 길주를 말하는데, 여기는 압록강과 접경하지도 못합니다.
압록강에서 접경이 가능한 곳은 의주 뿐인데, 의주에서 강계까지가 북계입니다.

그래서 현 주류학계 통설대로 하면 쌍성총관부는 압록강과 접경을 못합니다.
그래서 쌍성=화주=철령은 현재 강원도가 아니고, 만주라는 것이죠.
천추옹 21-04-26 11:53
   
간도랑 백두산정계비도 마찬가지임.. 그냥 착오로 시작된일.. 걍 재야사학ㅄ들 주장하는건 다 씹고보면됨. 애초 학자들도 아니고 그냥 일반민간애덜이 스스로 공부하면서 상상속에 주절대면서 시작된거니..
     
보리스진 21-04-26 12:32
   
아니에요.
기록으로 보면 백두산(장백산)은 여러 장소에 위치해있다고 나와요.
대체로 현재 요령성에서 길림성에 걸쳐있는 지역에 위치해있는데요.

현재 백두산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동된 지역입니다.
          
천추옹 21-04-26 12:40
   
하 백두산 정계비 위치는 지금도 존재함  1712년에 세워진거고..
청나라 사신, 조선사신 양쪽이 현장답사하고 지은거임
               
보리스진 21-04-26 12:54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을 보면 압록강의 수원지가 현재의 장진강이라고 말한 기록이 있으므로, 압록강의 상류 부근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압록강의 발원지인 백두산(장백산)을 현재의 파저강 부근이라는 기록이 있고, 또 현재의 만탑산 부근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백두산(장백산)에 대한 위치가 명확하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조선시대 중후기로 내려오면서는 혼하가 장백산에서 발원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 지도로 보면 독로강의 발원지, 허천강의 발원지, 장진강의 발원지 부근에는 백산이라는 지명이 있는데요.

조선시대 초기 중기 후기를 거쳐서 백두산(장백산)의 위치가 명확하지 못하고, 기록에 따라서 위치가 달리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조선시대 기록에 따르면 백두산(장백산)의 위치는 현재의 혼하 상류, 파저강 상류, 휘발하 상류 지역에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천추옹 21-04-26 12:59
   
청나라-조선간에 백두산 정계비를 국경으로 삼은거고.. 그 정계비가 지금도 백두산에 존재함.. 여기서 뭔 다른걸 논할수가 있는거임??
걍 압록강, 두만간이 국경으로 하자라고하면서 증거까지 비석으로 세운건데.. 비석내용가지구서 간도가 원래 조선영토였다란 개소리가 나온거지..
                         
보리스진 21-04-26 13:21
   
서위압록 동위토문 이라고 영토 결정을 지었는데요.
토문강이 어디냐 논란이 있으므로 학자에 따라서 간도가 우리땅이니 아니니 주장하는게 다른것 아닙니까?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102065557g
                         
천추옹 21-04-26 13:33
   
그러니깐 글자가지고 영토분쟁이 된건데 따지고보니깐 당시 청나라쪽은 두만강의 상류가 토문강으로 알구서 했던거임..
토문강이 실제는 송화강의 상류라 그러니깐 간도지역은 조선의 땅이다란 주장이 나왔던거고..
이건 지금도 아니라 구한말떄도 나왔던 논쟁이었슴..

애초 국경정할때 조선에서 국명으로 압록강 두만강 건너지 마라.. 어기면 국법어긴걸로 처벌한다구했슴.. 끝임..
                         
보리스진 21-04-26 14:07
   
압록강 두만강 건너면 국법을 어긴다고 처벌한다는 내용은
앞으로 연구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청나라에서도 봉금지대로 설정했던 지역이고, 청나라에서도 그 지역으로 가서 사는 것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천추옹 21-04-26 14:29
   
연구가 필요하시면 대동여지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해보삼 ^^
                         
보리스진 21-04-26 16:22
   
조선과 청(淸)이 국경으로 삼았던 백두산정계비의 토문(土門)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松花)강 지류임을 중국 정부가 1960년대 비밀 외교문서에서 공식 인정한 사실이 확인됐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E2%88%A3=sec&sid1=100&oid=005&aid=0000216576
                         
천추옹 21-04-26 16:51
   
님아..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가 맞음 ㅋㅋㅋ 근데 국경정할때 두만강 상류가 토문강으로 알고서했던 실수였단 얘기임.. -_-..
청-조선간에 국경정한뒤에 조선이 국경월경하면 사형에 처했는데 그게 압록강 두만강이었슴.. 여기서 뭔소리를 더해야하남??
                         
보리스진 21-04-26 17:31
   
간도가 우리 영토였음을 통시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그 다음에 고려시대에도 우리 영토였었다.
공험진, 선춘령이 고려 영토였다는 기록, 윤관의 9성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고,
유물로 연해주 지방에서 고려 유물이 나오고 있음이 최근에 확인된 바 있다.

그 다음에 조선시대에에도 우리 영토였었다.
조선시대에는 마찬가지로 공험진, 선춘령이 조선의 영토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조선시대 중기 이전만해도 우리 영토였음이 분명하다.

청나라와의 협정 이후에는 그 토문강이 어느 강이냐에 따라 여러 설이 갈리게 된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나라의 지도, 레지 등의 서양식 지도를 참고해보면 현재의 두만강 북쪽도 조선의 영토였음을 주장할 수 있다.

조선후기 청나라가 망해가면서 조선인이 엄청나게 많이 살게 되었고, 경작도 하고 있었다.
수십~백여년 사람이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 영토 분쟁에서도 유리한 요건이 된다.

대일항쟁기에는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자주적인 주장을 할 수가 없으므로 이를 감안해서 판단해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원천 무효라 할 수 있다.

북한과 중국이 영토협정을 통해서 땅을 내줬으나, 조선족 자치주로 되었고,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협의를 통해서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로 명확하게 가름되어, 조선족 자치주의 면적을 정하는데 참고가 되었다.
나중에 영토 분쟁이 발생하면, 조선인이 수십년간 거주하여, 조선족 자치주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천추옹 21-04-26 17:47
   
윤관의 9성은 짓자마자 패전하구 돌려줬슴..
근데 주원장하고 공험진 이남은 조선영토라고 정했기에 세종때.. 당시 기록 다 뒤져가면서 거기 이남은 우리꺼니 명에게 허락받고  "조종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라면서 그지역 수복한게 김종서의 4군6진임.

애초 윤관이 9성수성 실패한게.. 산을 기점으로 수비하다 실패한거라 세종은 두만강을 방어선 삼아서 지킬수있던거였슴.
이런판인데 뭔 간도가 조선시대때 영토란거임??
                         
보리스진 21-04-26 18:04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에 있는데요.
9성을 뺏기건 말건 점령했다는 기록이 있고, 공험진, 선춘령까지 조선시대 영토로 삼았다는 기록이 엄연히 있는데요.
그리고 공험진 선춘령은 현재 두만강 북쪽에 있어.
     
위구르 21-04-26 14:01
   
걍 재야사학ㅄ들 주장하는건 다 씹고보면됨 <- 박사님이 저런 글을 쓴 리유가 이런 식으로 재야사학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텐데도 기회삼아 발호해서 전에 이 게시판에 기생했던 병자들마냥 이런 헛소리를 자랑스레 써대니 어느 놈이 부계정가지고 이 따위로 장난치는지 알겠다
위구르 21-04-26 13:21
   
한사군이 현 평양에 위치했다고 보시는겁니까? 이를 반박할 사서 기록이 많은데 어째서 그렇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물질 문화라는건 유물을 뜻하는 말 같은데 고구려가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일 수도 있지 않나요?
     
천추옹 21-04-26 13:37
   
낙랑군의 위치는 313년이후론 지금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요서지역으로 옮김..  그전엔 대동강유역이었고..
그당시 중국사서기록은 대동강유역 = 낙랑군이라고나옴.. 그뒤의 기록은 요서임..이둘 분간못하는게 재야사학 수준이란거고..

재야사학쪽 주장은 밑에 간략 요약한거도있슴.. 첨엔 일제가 북경일대에서 사온 유물로 조작한거라고 하다가.. 북한쪽이 나중에 발굴한 유물들도 수두룩 나오니.. 당시 한족 포로들의 유물이란 개소리하다가.. 낙랑목간같은 유물도 나오니 원래 요서낙랑사람이 이주한거다 이런식의 걍 근거도없고 그때그때 말바꾸는게 다임..

사서쪽 기록 더 파보길.. 명확하게 낙랑위치 나오니
최초 낙랑기록이 한서 그리고 진수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임..
          
감방친구 21-04-26 13:46
   
이 분은 참 전후관계와 사실관계를 뒤죽박죽으로 알고 있으면서 자꾸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

동아게에 갑자기 처음 나타나서 이러는데 뭔 동아게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천추옹 21-04-26 14:02
   
사실관계를 어떻게 뒤죽박죽으로 알고잇는건지 틀리면 지적해보던가여..
북경일대에서 사온 유물로 조작한거란건 북한쪽이 먼저 들고나왔던 얘기인데 재야사학쪽에서 이걸 근거로 내세웠던거였슴.

근데 이게 뒤바뀐게 애초 세키노가 사들인 중국유물은 죄다 한나라시절 유물들이었고 사들인 중국문화재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중국문화재로 등록되어있슴.
낙랑유물들하고 비교하기위해 중국 한나라시절 유물들 사들인거였슴.  세키노가 주장하고싶었던건 한국문화의 시초는 한나라 식민이었다란거 주장할려던거였고 이건 낙랑유물은 물론 그이전 고조선 유물들까지 발굴되면서 식민사관인 타율성론은 나가리된 상태임..

이런데 재야사학애덜은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는 증거라는 개소리로 쓰던거임.

이논리는 해방이후 북한에서 발굴되는 낙랑유물들에대해 할말이 없으니깐..
이거에 대한 반론이래봐야 한족 포로들의 유물이란 개소리밖에 들은게 없슴.. 있다면 추가해주길..
                    
위구르 21-04-26 14:10
   
이런데 재야사학애덜은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는 증거라는 개소리로 쓰던거임. <- 애초에 평양에서 한사군을 증명하는 유적이 발견됐으면 그 따위로 안하고 그냥 밀어붙이면 되었을 것을 굳이 중원에서 사들여서 가져와가지고 락랑 유물이라 날조했으니 그게 바로 한사군이 없던 평양이 락랑군으로 날조된 증거가 아니고 뭐임? 근데 무슨 헛소리

그리고

이논리는 해방이후 북한에서 발굴되는 낙랑유물들에대해 할말이 없으니깐.. <- 할말이 없는건 강단사학 쪽이겠지. 2600기의 락랑 유적을 조사한 결과 락랑'군' 유적은 없었다 라는게 북한의 조사 결과인데 그걸 군으로 둔갑시키는 것 밖에는 당신네들이 할 짓이 없잖아 빡대가리야
                         
천추옹 21-04-26 14:20
   
세키노가 사들인 유물은.대부분. 중국문화재로 등록되어있슴.. 위조되었다는부분들은 이미 밝혀진부분들임 (대표적인게 봉니)

북한유물들은.. 북괴 해석이 낙랑유물이 아니라고한거일뿐이지 보면 낙랑유물들임 ㅋㅋㅋ
초원 4년 호구부는 빼도박도 못하고 낙랑유물인데.. ㅉㅉㅉ
     
감방친구 21-04-26 13:44
   
한사군 문제는 전한 ㅡ 신(왕망) ㅡ 후한/조위
이렇게 세 시기로 나누어서 봐야 하고
전한도 토착세력(우리 조상)의 활동으로 현도/요동/낙랑의 재조정이 있었던 BC 7-80년대를 전후로 봐야 할 듯합니다

저는 이미 고구려 건국 초기인 전한 말에
한사군이 현 요하-혼하 서쪽으로 밀려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대무신왕 대에 낙랑을 정벌했다가 후한이 바다를 건너와 차지했다 하는 기록에서

서기 1-3세기 서북한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죠
          
위구르 21-04-26 14:09
   
두번째 문단의 한사군이 료하-혼하 서쪽에 밀려갔다는 말씀은 그 이전의 사군이 그 동쪽 혹은 남쪽에 있었다는 뜻인데 정말로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이 그 지역(북한)에 존재했다는 것인가요. 나중에 보면 위만조선의 반역자들이 받아먹은 봉토가 현 하북성 동부에서 산동 북부에 이르는 발해의 서부 연안인데 이에 따르면 위만조선의 령역이 바로 그 산동 북부에서 하북성에 이르는 지역(나라가 패망하고 나면 그 땅은 그 나라의 기득권에게 맡겨 다스리는게 흔한 수법이므로)이거나 2. 그 봉토에 린접한 하북성 북부에서 료녕성 서부에 이르는 만주 서부지역이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라 생각하는데 2번은 어째서냐면 항복한 장강, 로인 등의 무리에게 위만조선의 령역 내에서 봉토를 마련해주는게 합리적인데도 그러지 못했다면 위만조선을 정복하지 못했다는 뜻이거나 정작 그 고토에 자국 한나라의 관리를 따로 파견했다는 뜻이니까 이왕 항복한 자들에게 어쩔 수 없이 봉토를 준다면 그 위만조선의 린접 지역에 위치시키는게 옳으니 그 봉토의 위치의 근접한 지역에 위만조선이 있다고 봐야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감방친구 21-04-26 14:14
   
천산산맥(현 본계 동북쪽에서 여순 방면으로 뻗으며 현 요동반도를 반으로 가르고 있는 산맥)의 서쪽까지는 한사군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위구르 21-04-26 13:59
   
또 나중에 고구려가 마음놓고 한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해 황하 북쪽 천여리(태원)에 이를 정도였는데 배후인 현 북한 지역에 한나라의 군이라는 적이 유력한 세력으로 버티고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니 한나라의 행정구역으로서의 기능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현 북한지역이 한나라와 관계가 있다면 명목상으로 책봉을 받거나 고구려를 견제하기위해 한나라를 끌어들이려고 획책한 것이 전부일 것이고 한나라의 유물이 있다면 그것은 또한 하사받거나 교역을 통해 들여온 물건이라고 보는게 어떻습니까? 물론 박사님도 이에 대해서 고려해보셨겠지만
          
감방친구 21-04-26 14:11
   
예, 저 역시 진한(고조선)의 이주 세력인 서북한 지역의 낙랑이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후한에 가서 붙었다고 보고 있는데

요서지역(현 요하 서쪽)의 낙랑/대방과 별도로
남 낙랑/대방이 존재했고

이는 조위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ㆍ군사ㆍ경제적 장악 의도에서 조위 시대에 강화된 것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리영 전투 기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입니다

https://namu.wiki/w/%EA%B8%B0%EB%A6%AC%EC%98%81%20%EC%A0%84%ED%88%AC
               
위구르 21-04-26 14:17
   
나중의 당나라가 고구려를 량면에서 공격한 전략이 그 때 이미 비슷한 윤곽을 드러낸 셈이니 현 북한 지역이 고구려에 억압받는 현실과 결부되어 상당히 유효한 전략이 되었을 수도 있으므로 한나라가 직접 지배했을리는 없으되 나중의 신라가 당나라의 관복을 받고 인질을 보낸 것 처럼 한반도 북부 지역의 국가들이 한나라에 저자세로 갔는데 그걸 지배했다고 기록했을 수 있죠. 기리영 기사는 시간이 있으면 보고 도움될만한 의견을 만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얼마 전에 제가 무도한 어법으로 비난해서 감정을 상하게 해드렸는데도 답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천추옹 21-04-26 14:15
   
북한이 보는 사관이 딱 그런상황임.. 고조선 중심지는 요동이었구.. 당시 한나라가 점령한건 위만조선.. 요서지역이었구.. 평양의 낙랑유물은 그냥 한나라랑의 교역의 증거일뿐이고 ...

한국 재야사학사이비애덜은 그거에 끼워맞추니.. 결국엔 백제신라.... 삼국대륙설이 나올수밖에 없슴..
               
위구르 21-04-26 14:18
   
백제는 중원 동부를 지배했다는게 사서에도 확인되는데 그런 사서기록을 근거로 한 주장은 저기에 끼워맞추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멍청한 놈아. 고구려가 료동을 차지하니 백제가 료서를 차지했다는 기록을 개나 줘버렸나
                    
천추옹 21-04-26 14:26
   
료동 료서 ㅋㅋㅋ태생이 북괴인가요??
위에 누가 기리영전투 언급한게 좀 알면 그런 개소리 못해섭니다..

국사(國史)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혁거세(赫居世) 30년에 낙랑인들이 와서 신라에 항복하였다.”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쳐서 멸망시키자,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 사람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고구려가 낙랑쳐서 멸망시키니 대방사람들하고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라고 나오는데 저게 요서면 ㅅㅂ 신라는 어디까지인건지 ㅋㅋㅋㅋ

이뒤엔 한나라 광무제가 바다건너서 다시 낙랑을 정벌했다란 중국쪽 기록도 있슴 ㅋㅋㅋㅋ 요서인데 바다건너 갈까여?
                         
위구르 21-04-26 15:40
   
혁거세(赫居世) 30년에 낙랑인들이 와서 신라에 항복하였다 <- 여기서 락랑은 락랑국.

고구려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쳐서 멸망시키자 <- 여기의 락랑도 락랑군이 아닌 락랑군. 고로 나중에 가서 15대 임금 미천태왕 대에 락랑군을 다시 공격하는 것이 대무신태왕 때 망한 락랑이 락랑국이기 때문.

한반도의 락랑'국'을 모르니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지 수꼴아
                         
천추옹 21-04-26 15:51
   
에휴.. 37년에 망한 낙랑하고.. 한사군의 낙랑하고 다르게봐야한다는건 북괴의 주장에서 나온거 고대로 재야사학ㅄ들이 주접떨고있는거임. 최씨낙랑국이라고
근데 그러면 광무제가 바다건너 낙랑을 정벌했다란거엔 찍소리도 못하고있지..
이건 한국쪽 사료만이고

중국쪽까지보면 진수 삼국지 동이전에 빼도박도 못하고 낙랑위치가 나오는데?? 최씨낙랑국 위치 = 한사군 낙랑이여..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準]>僭號稱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燕>人<衛滿>, 結夷服, 復來王之. <漢><武帝>伐滅<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 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 其人性愿慤, 少嗜欲, 有廉恥, 不請(句麗)[ ].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衣服有異. 男女衣皆著曲領, 男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예'의 남쪽은 '진한'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호수는 이만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 이르러 팔조의 가르침으로 가르치자 문을 닫지 않고 백성들은 도둑질 하지 않았다. 그 사십여세 후에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였다. '진승'등이 일어나니, 천하가 '진'을 배신하였다. '연','제', '조'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조선땅으로 들어오니, 수만이나 되었다. '연'인 '위만'이 있어 상투틀고 이족옷을 입어 돌아와 왕노릇하였다. '한 무제'가 조선을 벌하여 멸하니, 나누어 그 땅에 사군을 두었다. 이로부터, '호'와 '한'이 점점 나뉘게 되었다. 대 군장이 없고, 스스로 한때부터의 관직에, '후', '읍군', '삼노'가 있어 하호의 주인으로 다스렸다. 그 늙은 노인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구려'와 같은 종류라고 한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 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 '구려'에 구걸함을 청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크게 '구려'와 같고 의복만은 다름이 있다. 남녀의 옷은 모두 분명하게 옷깃이 굽었고, 남자들은 넓이가 수촌이나 되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는 것으로 장식을 한다. 스스로 '단단대산령'서쪽은 '낙랑'에 속하였다. 령의 동쪽에 칠현을 두었는데 도위가 주인이었다. 모두 예의 백성이다. 후에 도위를 없에고, 그 거수들을 후에 봉하니, 이제 '불내, 예'는 모두 그 종류인 것이다.
천추옹 21-04-26 14:44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14r_0020_0300

후한 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하다 ( 44년 09월(음) )

27년(44) 가을 9월에 한나라의 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註 001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http://db.history.go.kr/id/sg_014r_0020_0210

낙랑국을 정벌하다 ( 32년 04월(음) )

〔15년(32)〕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註 001이 옥저(沃沮)註 002에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註 003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물어 말하기를, “그대의 낯빛을 보니 예사 사람이 아니오. 어찌 북국(北國)註 004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최리가〕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이 나라로 돌아와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의 딸에게 알려 말하기를, “만일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요, 그렇지 않는다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어서 만약 적병이 있으면 저절로 소리가 났다. 그런 까닭에 이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의 딸이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 안에 들어가 북의 면(面)과 나팔의 주둥이를 쪼개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비하지 못하였다. 우리 병사가 엄습하여 성 아래에 다다른 연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을 멸망시키고자 마침내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맞이하여 아들의 처로 삼고,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 병장기를 파괴하게 하였다.”라고 한다

고구려 왕자인 호동이 옥저로 사냥갔는데 낙랑왕을 만나구.. 나중에 낙랑을 멸하니 대방사람들하고 신라에 투항하고..
저게 요서면 말이 되남?? 이러니 ㅅㅂ 신라 백제 모두 대륙에 존재해야져.. ㅋㅋㅋㅋ

근데 그뒤  광무제가 바다건너 낙랑치는건 뭐라 하는지 함 들어봅시다..
     
감방친구 21-04-26 14:58
   
이 사람은 왜 혼자 지랄똥을 싸는겨?
          
천추옹 21-04-26 15:11
   
삼국지의 동이전에 나오는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은 다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거기나오는 낙랑만 사실로 안받아들이는게 말이되냐는겁니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準]>僭號稱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燕>人<衛滿>, 結夷服, 復來王之. <漢><武帝>伐滅<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 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 其人性愿慤, 少嗜欲, 有廉恥, 不請(句麗)[ ].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衣服有異. 男女衣皆著曲領, 男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예'의 남쪽은 '진한'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호수는 이만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 이르러 팔조의 가르침으로 가르치자 문을 닫지 않고 백성들은 도둑질 하지 않았다. 그 사십여세 후에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였다. '진승'등이 일어나니, 천하가 '진'을 배신하였다. '연','제', '조'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조선땅으로 들어오니, 수만이나 되었다. '연'인 '위만'이 있어 상투틀고 이족옷을 입어 돌아와 왕노릇하였다. '한 무제'가 조선을 벌하여 멸하니, 나누어 그 땅에 사군을 두었다. 이로부터, '호'와 '한'이 점점 나뉘게 되었다. 대 군장이 없고, 스스로 한때부터의 관직에, '후', '읍군', '삼노'가 있어 하호의 주인으로 다스렸다. 그 늙은 노인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구려'와 같은 종류라고 한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 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 '구려'에 구걸함을 청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크게 '구려'와 같고 의복만은 다름이 있다. 남녀의 옷은 모두 분명하게 옷깃이 굽었고, 남자들은 넓이가 수촌이나 되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는 것으로 장식을 한다. 스스로 '단단대산령'서쪽은 '낙랑'에 속하였다. 령의 동쪽에 칠현을 두었는데 도위가 주인이었다. 모두 예의 백성이다. 후에 도위를 없에고, 그 거수들을 후에 봉하니, 이제 '불내, 예'는 모두 그 종류인 것이다.

예의 동쪽은 동해.. 남쪽은 진한, 북쪽은 옥저랑 고구려.. 서쪽은.. 낙랑...
이런판인데.. 진수가 삼국지쓸당시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면 모든게 뒤죽박죽이되버리져..
               
감방친구 21-04-26 15:34
   
그러니까 그런 주접을 왜 자꾸 저한테 떨고 계시냐 이겁니다
                    
천추옹 21-04-26 15:42
   
낙랑이 요서에 위치했다고 하는 사람한테 쓴거임
                         
감방친구 21-04-26 15:44
   
전한 낙랑군이 서북한에 있었다 하는 증거가 뭔데?
특기할만한 서기전 2~1세기 물질문화상이 서북한 지역에 나타남?
                         
천추옹 21-04-26 16:01
   
유물들 -_- .. 지표채집된건 조작가능성있어서 배제하구 조올라 많은 당시 낙랑 고분군 (한두개도 아니고 천단위가 넘음) 에서 나온 유물들중 중국계 청동유물들도 조올라 많이 섞여있는데 첨엔 그냥 일제가 조작했다라고 둘러대던게 안통하니깐 그뒤부턴 그냥
교역해서 얻은거란 개소리했었잖음??
풉 근데 무덤양식부터가 중국식 귀틀무덤에 한반도에선 잘 안쓰인 쇠뇌나 마차에 쓰이던 청동부품들..

아니 ㅅㅂ 이런식으로 우길거면.. 기존의 중국에서 발굴되는 고구려식 고분이나 유물들도 짱..깨들이 맘대로 우기는거랑 뭐가다름??
                         
감방친구 21-04-26 16:09
   
여보슈
서북한 지역 물질문화상이
전한시대 것이 거의 안 나온다고
전국연ㆍ진ㆍ전한 ㅡ 거의 안 나옴

그러니 문제가 복잡하다는 말인데
자꾸 뭔 자기만 옳다고 뭐라도 된 거마냥
남들 조롱하고 지랄발광을 하시냐 이겁니다
                         
천추옹 21-04-26 16:49
   
거의 안나오긴.. 나오지만 지표채집이라 조작된거라면서 재야사학에선 그냥 덮어놓고 죄다 인정안하는거지.. 그래서 그냥 봉분유물로만 언급한거 아님??
청동기 유물경우 동이족계열하고 한족계열은 뚜렷히 나뉘니깐.. 한족계열 청동기 유물들하고 중국식 무덤양식이면 그게 짱...깨새끼꺼인지 동이족사람꺼인지 구분도 못하남???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7632&cid=46619&categoryId=46619

부조예군묘

‘정백동 1호 무덤’이라고도 한다. 1958년 11월 공사 중에 발견 수습된 기원전 1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토광목곽묘이다. ‘夫租薉君’이라 새겨진 은도장이 출토되어 무덤 이름이 명명되었다. 정백동 언덕 일대는 토광묘·귀틀무덤·벽돌무덤 등이 있다.

유물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부조예군’ 도장이다. 인면 한 변의 길이는 약 22mm이고 정방형에 가까우며 짐승모양의 손잡이가 있다. 이와 같은 변의 길이는 한(漢)의 관인(官印)과 같다. 글은 소전체로 반문(反文)으로 음각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인장 새김방식도 한대의 방식이다.

‘부조’는 『한서(漢書)』 지리지에 낙랑군의 현의 하나로 나오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는 옥저(沃沮)로 나온다. 부조는 기원전 108년과 107년의 한군현 설치시 현도군에 속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임둔군의 속현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부조예군’의 종족명 ‘예’ 는 『사기(史記)』에서는 ‘穢’로 『한서』에서는 ‘穢’와 ‘薉’로 쓰이고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에는 ‘濊’로 쓰이고 있어 시기별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조예군이 기원전 1세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강해준다.
지누짱 21-04-27 10:47
   
진한교체기 청동기 요동지역 출토문제

지금의 중국 요녕성 능원현 마창구에서는 “匽侯(언후)” 라는 명문이 있는 연국의 청동기가 출토된 바 있다. 이 청동기의 출토지점은 연국의 요동지역을 조금 벗어난 고조선의 요동에 속하는 곳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청동기의 출토에 근거하여 그 지역이 연국에 속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것은 당시에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했던 연인이 있었음을 알게하여 주는 것이다. “史記(사기)” “燕召公世家(연소공세가)”에 의하면 전국시대말에 연국이 진국에 의하여 멸망될때 燕王(연왕) 喜(희)가 요동으로 도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전하는 “仕記(사기)” “秦始皇(진시황)本紀(본기)”의 기록에는 단순히 연왕 희가 요동으로 도망하여다고 전하지 않고 연왕 희가 동쪽의 요동을 회수하여 그곳의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연왕 희가 도망했던곳이 연국의 요동임을 분명하게 해준다. 만약 연왕 희가 고조선의 요동으로 도망했었다면 그곳을 회수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가 없을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원전 222년(연왕 희 33)에 진국이 요동을 치고 연왕 희를 붙잡았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연왕 희의 일행 가운데 일부가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을 하였고 앞의 “언후” 청동기는 그들이 남긴 유물일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고대산신론, 윤내현
지누짱 21-04-27 10:51
   
부조예군 은도장

일곱째로, “夫租薉君(부조예군)”, “夫租長(부조장)”등의 銀印(은인)이 있다. 이 은인은 1958년 평양의 정백동 土壙墓(토광묘)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묘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 또는 기원전 1세기 경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한의 낙랑군에는 夫租縣(부조현)이 있었다. 그러므로 평양에서 “부조예군”,“부조장”등의 은인이 출토되었다고 하는것은 그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 이었음을 알게하는 증거라고 인식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이미 김정학에 의해서 지적되었듯이 “부조예군”으; 은인은 낙랑군 설치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사군이 설치된 서한시대 이후의 관직을 보면 郡(군)에는 太守(태수), 大尹(대윤), 丞(승), 長史(장사)가 있었고 縣(현)에는 令(영)이나 長(장), 丞(승),尉(위) 등이 있었을뿐 君(군)이라는 관직은 없었다

 

그러나 漢書(한서) 武帝記(무제기)에 “元朔(원삭) 원년 (기원전 128) 가을에 東夷(동이)의 薉君(예군)인 南閭(남려)등 28만 명이 항복하니 그곳을 蒼海郡(창해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東夷(동이)의 薉族(예족)이 君(군)이라는 관직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부조현은 낙랑군에 속해있었는데 낙랑군 지역은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위만조선에 속해있었다. 따라서 부조예군은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사용하던 관직명임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조예군의 묘에서는 전형적인 고대 한국 청동기인 細形銅劍 (세형동검)등도 출토되어 그 주인이 중국계가 아님을 알게하여 주었다. 부조예군의 은인은 漢(한)으로부터 주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필자는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만들어 졌을 가능성을 인정하고있다. 고조선은 西周(서주)시대이래 중국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었으므로 漢字(한자)는 물론 중국의 문물제도가 상당히 수입되어 있었을 것이며 위만조선에 이르면 그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중국 망명객에 의하여 형성되어 있었을 것인데 그들은 서한의 문물제도에 매우 친숙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고찰로서 부조예군 은인이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인 되었지만 그 출토지점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부조였고 후에는 낙랑군의 부조현이었지 않겠느냐는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나 다음에 확인되겠지만 한사군의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灤河(난하)의 동부 연안에 있었다. 따라서 낙랑군의 부조현이나 고조선, 위만조선 시기의 부조도 그 지역에 있었다는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조예군 은인은 위만조선이 기자국(윤내현 교수는 준왕의 정권의 성격을 고조선 서변을 지키는 번국정도로 보고 있슴)의 정권을 탈취한후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하던 시기 또는 서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던 시기에 당시의 지배계층이던 부조예군이 이에 항거하면서 지금의 평양지역으로 이주해 왔을것임을 알게 하여준다. 지금의 평양은 원래 마한지역이었는데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에 있었던 낙랑의 토착민들이 외세에 항거하다가 평양지역으로 이주해와 그 지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함으로써 평양지역도 낙랑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필자는 믿고있다.

한국고대사신론, 윤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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