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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2-28 14:57
[한국사] 화랑세기 필사본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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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는 『삼국사기』에 신라시대 김대문(金大問)이 지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멸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박창화(朴昌和, 1889~1962)가 원본을 발췌하여 붓으로 옮겨 적은 발췌본이 1989년에, 원본 자체를 붓으로 옮겨 적은 필사본이 1995년에 세상에 알려졌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발견되자마자 곧 위작 논쟁에 휘말렸다. 그것은 역사적 통념을 완전히 바꾸는 내용의 파격 때문이었다.


『화랑세기』필사본이 만약『삼국사기』에서 언급한 김대문의 『화랑세기』라면, 현전(現傳)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史書)인 『삼국사기』보다 무려 460년이나 앞서는 기록이다. 더욱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고려인이 쓴 삼국시대 이야기라면, 『화랑세기』는 신라인이 쓴 신라 이야기인 만큼, 한국 고대사학계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필사본의 발견 초기에는 위서(僞書)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필사본 『화랑세기』의 연구가 확산되면서 진짜임을 뒷받침해 주는 주장들이 속속 나오고, 또 신라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책들이 출간됨에 따라, 지금은 진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추세에 있다고 하겠다.


『화랑세기』는 주로 32명의 풍월주(風月主)의 세보를 밝히면서 신라시대 진골정통(眞骨正統)과 대원신통(大元神統)의 계보, 가야의 왕실 계보 등까지 왕을 중심으로 운용되던 신라시대 골품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하급자가 임신한 아내를 상급자에게 보내는 마복자(摩腹子) 제도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제도라 해서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화랑세기』 기록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내용들이 『화랑세기』에서 밝혀지고 있는 것을 찾아내어 기존의 『삼국사기』나 『삼국사기』를 통해서만 보아왔던 신라 사회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화랑세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새로운 사실


화랑도의 성격에 대하여 『삼국사기』 진흥왕조에는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을 인용하여 유불선(儒敎佛仙) 삼교를 포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하였다. 그러나『화랑세기』는 화랑도가 선도仙道에서 출발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화랑은 선도이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화랑은 애초에 신궁(神宮)에서 일종의 제관(祭官)의 역할을 맡아 천신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 주축이던 원화는 진흥왕 때 남성 우두머리가 이끄는 화랑도로 대체되고, 중국으로부터 유불선(儒佛仙)이 들어옴에 따라 원광법사의 세속5계로 발전적으로 승화시켰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呻)은 유교적 충효신(忠孝信)의 관념이요, 살생유택(殺生有擇)은 불교의 자비요, 임전무퇴(臨戰無退)는 곧 호국의 정신이었다. 화랑도는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점차 무사(武事)에 관심이 커졌는데, 그러한 변동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화랑도의 파가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화랑도의 조직도 확대ㆍ개편되었다.

화랑도의 정통은 원래 풍월주 계통이었는데, 사다함 또는 문노부터 도맥의 정통인 국선(國仙)이 생겼다. 풍월주 계통의 화랑도는 신문왕 원년(681) 흠돌의 난으로 폐지된 바 있다. 그 후 부활된 화랑도는 국선을 우두머리로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조를 보면 화랑도의 기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흥왕) 37년 봄, 처음으로 원화(源花)제도를 두었다. 남모와 준정이라는 미녀 두 사람을 선발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3백여 명의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두 여자가 서로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강권하였다. 준정은 남모가 취한 후에 그녀를 끌어내어 강물에 던져 죽였다. 그 후 다시 얼굴이 잘생긴 남자를 뽑아 단장시켜 화랑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하고, 그를 떠받들게 하였다. 그러자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그들은 더러는 도의를 연마하고, 더러는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 유람하여,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인품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선량한 인물을 택하여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러나『화랑세기』서문에는 지소태후가 원화제도를 폐지하고 화랑제도를 두었다고 쓰고 있다.


우리나라(신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는데,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國人)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魏花郞)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진흥왕은 7살에 왕위에 올랐는데(삼국유사에는 15살에 즉위하였다고 함),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화랑세기 1세 풍월주 위화랑조에는 '지소태후가 국정을 맡자 화랑을 설치해 위화랑을 풍월주로 삼았다'고 하였으며, 2세 풍월주 미진공조에는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선화를 화랑으로 삼았으며, 그 무리를 풍월이라 했고,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했다. 또 위화공을 풍월주로 삼고 미진부공을 부제로 삼았다'고 하였다.


『삼국사절요』, 『동사강목』, 『동국통감』등에도 진흥왕 원년에 풍월주를 설치한 것으로 나오고 있으므로, 『화랑세기』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사다함은 5세 풍월주였는데, 『삼국사기』진흥왕조를 보면, 사다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진흥왕) 23년(562) 9월에 가야가 배반하므로 왕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이를 치게 하고, 사다함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사다함이 3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 전단문에 들어가서 흰 깃발을 세우니 성중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치니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로를 평가하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기에 왕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왕이 강력히 권하므로 포로를 받았으나, 그러나 사다함은 이들을 풀어주어 양민을 만들고, 밭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사다함에 대한 기록은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삼국유사』에도 나오고 『화랑세기』에도 나온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화랑세기』에는 미실과 사다함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미실은 전쟁에 나가는 사다함을 위하여 송출정가(送出征歌)를 직접지어 노래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어서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사다함은 기병 5천명을 이끌고 대가야 국경선의 성문인 전단량을 기습해 큰 전과를 올렸다. 사다함이 대가야 정벌에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 보니 미실은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부르며 슬픔을 달랬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될까, 나는 죽어 신병되리

(미실)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身)되어

매일 아침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죽지않게 하리라.


여기서 파랑새(靑鳥)는 물론 미실을 가리킨다. 사다함은 노래로써 자신의 사랑을 승화하려 했지만 연모의 정을 달래지 못하고 끝내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삼국사기』열전 사다함조는 '사다함이 처음에 무관랑과 생사를 같이하는 벗이 되기로 약속했는데, 무관랑이 병들어 죽음으로 매우 섧게 울다가 7일 만에 자신도 죽으니 그때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고 적고 있으나, 『화랑세기』는 사다함의 진짜 사망원인이 상사병(相思病)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무관랑의 죽음에 대해서도『화랑세기』는 병들어 죽은 것이 아니라 금진낭주를 몰래 만나기 위해 밤에 궁장(宮墻) 넘다가 구지(溝池)에 떨어져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무관랑이 넘었던 궁장은 월성의 담이고, 그가 빠졌던 구지는 월성 밖의 해자(垓字)라고 부르고 있는 당시의 구지였던 것이다. 1985년 발굴을 통해 처음 밝혀진 월성의 해자는 화랑세기에 나오는 것과 같이 구(溝)와 지(池)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진지왕은 미실과 그 추종자들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맏아들 동륜태자가 보명궁(寶明宮)의 담을 넘다가 개에게 물려 죽는 바람에 진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폐위되고 말았다.

진지왕의 폐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으나, 『삼국유사』에는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기강이 문란해져서 나라사람들이 왕을 폐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나라사람이란 어떤 집단(세력)을 가리키는 것인지, 지금까지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 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가 있었다.


『화랑세기』 7세 풍월주 설화랑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진지대왕은 미실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 색을 밝혀 방탕하였다. 사도태후가 걱정을 하다가, 이에 미실과 폐위할 것을 의논하였다. 노리부공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였다. 노리부공은 곧 사도의 오빠이다. 미실의 남편인 세종과 더불어 장차 대사를 일으키려 할 때, 문노의 도(徒)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태후의 명령으로 두 개의 도를 합쳐 하나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화랑세기』는 진지왕을 보위에 앉힌 인물도 미실과 그 추종 세력이고, 진지왕을 권좌에서 몰아 낸 인물도 미실과 그 추종세력 임을 밝히고 있다.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위시키기도 한 미실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는 미실에 대하여서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그러나 『화랑세기』는 미실이란 인물에 대해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미실의 아버지는 미진부고 어머니는 묘도였다. 화랑세기에 '미실은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묘도를 닮아서 백 가지 꽃의 영검함이 뭉쳐 있고, 세 가지의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고 극찬 할 정도로 완벽한 미모와 몸매를 가진 여인이었다.


미실의 첫 남편은 세종이었다. 세종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이부동부(異父同腹) 동생으로, 어머니는 지소태후였다. 당시 신라에는 왕실에 왕비 등의 여자를 공급하는 혈통이 두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진골신통(眞骨神統) 계요, 다른 하나는 대원신통(大元神統) 계였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이 두 혈통은 부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딸로, 딸에서 손녀로 이어지는 모계 세습의 특징이 있었다. 두 혈통은 국왕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경쟁관계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지소태후는 같은 진골신통계인 숙명공주에게 왕후자리를 주려고, 대원신통계인 미실의 숙모 사도왕후를 폐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은 사도왕후를 사랑했기 때문에 지소태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지소태후의 분노가 사도왕후의 조카인 미실에게 미쳐, 미실은 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궁에서 쫓겨나온 미실은 사다함을 만났다. 세종이 미실이 상대한 첫 남자라면 사다함은 그가 만난 첫 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기로 굳게 약속하였지만 대가야가 모반을 하여 사다함은 전선으로 나가게 되었고, 미실을 그리워한 세종이 상사병에 걸려 지소태후의 명령으로 다시 입궁하게 되었다.


미실은 진흥왕 말년부터 진평왕 중엽까지, 30여 년 간 왕권을 능가할 할 정도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음을 『화랑세기』는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는 김춘추와 문희가 결혼하게 된 아야기가 나온다.


문희는 김유신의 손아래 누이이다. 그 언니(보희)가 꿈에 서형산 꼭대기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는데, 온 나라 안에 득찼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문희)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웃으면서 언니의 꿈을 내게 팔아라.”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비단치마로 꿈 값을 치렀다.


며칠 뒤 유신이 김춘추와 축국(축구)을 하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이 찢어졌다. 유신이 우리 집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가서 옷고름을 궤맵시다.”라고 말하여서 함께 집으로 갔다. 큰누이를 불러 옷고름을 꿰매라고 말하였으나 무슨 일이 있어서 나오지 못하고, 그 동생이 나와서 대신 꿰매어 주었는데, 어여쁨이 눈부실 정도였다. 춘추가 기뻐하며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렀다. 이내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법민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문희와 춘추의 결혼은 아무런 문제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문희가 보희의 꿈을 사는 과정이 좀 더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고, 두 사람의 결혼이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신은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무슨 까닭이냐?”라고 꾸짖었다. 그리고는 선덕여왕이 남산에 거동한 틈을 타서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라고 아뢰었다. 선덕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이라고 아뢰자, 선덕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하였다. 왕은 "내가 한 짓이니 빨리가서 구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춘추공은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



김춘추는 왜 문희에게 임신을 시켜놓고 수수방관하고 있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일체의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한 해답도 『화랑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

『화랑세기』에는 김춘추가 임신한 문희를 외면한 이유를 '김춘추의 정궁부인(正宮夫人)인 보량궁주(寶良宮主)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화랑세기』는 '보량궁주가 아름다웠으며 공(춘추)과 몹시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를 낳아 공이 몹시 사랑하였다.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하였다'고 쓰고 있다.


문희가 김춘추를 받아들일 때, 그에게 부인이 있는지를 모르지는 않았다. 문희나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바란 것은 정실자리가 아닌 첩의 자리였다. 일단 첩으로 살다가 정실부인의 자리가 비면 그 자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보량 궁주가 아들없이 딸만 있다는 점이 이런 기대를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춘추는 문희와 유신의 이 같은 바람을 외면했다. 그래서 김유신은 동생을 불에 태워 죽이려는 극단적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유신이 문희를 불 태워 죽이려고 한 때를 『삼국사기』나『삼국유사』는 '선덕왕 때'라고 적고 있으나, 『화랑세기』는 진평왕 때이며, 문희를 살린 것이 선덕공주임을 밝히고 있다.


그때 공(춘추)은 선덕공주를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다. 공주가 연기에 대해서 물으니, 좌우에서 사실대로 고하였다. 공이 듣고 얼굴색이 변하였다. 공주가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 공은 이에 문희를 구하였다.


이때 문희가 임신하여 낳은 아이가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이다. 문무왕은 진평왕 47년(626)에 태어났고, 선덕여왕은 이보다 6년 뒤인 632년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화랑세기』의 기록이 보다 정확하다고 하겠다. 선덕공주의 개입으로 문희는 김춘추와 결혼 할 수 있었다.



『화랑세기』는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보량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 문희에게 꿈을 판 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러나 『화랑세기』 18세 춘추공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보희는 꿈을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 공(김춘추)은 이에 첩으로 삼았는데, 아들 지원(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


자매가 한 남자를 지아비로 섬겼다는 것, 동생은 정실부인이고 언니는 첩실이었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은 신라시대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삼국사기』 태종 무열왕조에는 '왕 2년(655) 10월, 왕의 딸 지소(智炤)가 대각간 유신에게 시집갔다'고 적혀 있다. 지소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의 딸이다. 이때 김유신의 나이는 예순 살로 환갑이었다. 그리고 『삼국사기』열전 김유신조에는 김유신의 아내 지소 부인은 아들 다섯, 딸 넷을 두었다고 적고 있다.


유신의 아내 지소 부인(智炤夫人)은 태종대왕의 셋째 딸이다.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이찬 삼광(三光)이요, 둘째 아들은 소판 원술(元述)이요, 셋째 아들은 해간 원정(元貞)이요, 넷째 아들은 대아찬 장이(長耳)요, 다섯째 아들은 대아찬 원망(元望)이었고, 딸이 넷이었다. 또 서자에 아찬 군승(軍勝)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의 성명은 알 수 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지소부인과 결혼했다는 기록 외에, 다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김유신은 환갑이 될 때가지 독신으로 지냈다는 말인가?


『화랑세기』는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화랑세기』 15세 유신공조에 따르면 '김유신은 진평왕 34년(612), 열일곱의 나이로 하종공의 딸 영모(令毛)와 첫 결혼을 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하종은 세종 전군(殿君)과 미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하종의 어머니인 미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진흥ㆍ진지ㆍ진평의 세 임금을 쥐고 흔든 미모의 여걸이었다. 그 미실의 손녀가 유신의 첫 부인이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환갑의 나이에 결혼하여 79세까지 살았는데, 첫 번째 부인인 영모 외에 다른 부인은 없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김유신의 5남 4녀가 전부 지소부인이 낳은 자식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진덕왕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 28대왕을 성골(聖骨)이라고 불렀으며, 무열왕으로부터 마지막 임금까지를 진골(眞骨)이라 불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김춘추는 왜 성골이 되지 못하고 진골의 신분이었을까?'하는 점이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신분의 높낮이를 결정짓는 것은 혈통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춘추는 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를 아버지로, 26대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를 어머니로하여 태어났으므로 혈연적으로는 순수한 왕족임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김춘추는 성골이 사라진 뒤에야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이 의문을 푸는 열쇠는 '춘추의 아버지인 용수가 왜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을까?'하는 문제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용수가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된 이유를 찾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성골과 비성골을 구별짓는 요소가 될 것이다. 용수와 춘추 두 부자가 어떤 이유로, 언제부터 비성골이 되었느냐?하는 시기와 원인은 전적으로 그의 조부인 진지왕에 있다고 생각된다.


진지왕은 정치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된 왕이다. 『삼국유사』왕력편에는 '진지왕묘는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했는데, 능(陵)이라 하지 않고 묘(墓)라고 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진지왕이 폐위되고 왕의 신분도 박탈된 후, 그 아들 용수ㆍ용춘, 손자인 춘추의 신분도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었다고 보아진다. 그렇다면 성골이라는 것은 혈연만이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없고, 지배력을 형성하는 세력 중에서도 왕권을 계승할 수 있는 특정한 집단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화랑세기』는 성골의 신분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화랑세기』 12세 보리공조에는 '보리공의 어머니인 숙명공주가 황후의 지위로 이화공의 아름다움에 빠져 골품(骨品)을 초개같이 버리고 동혈(同穴)의 벗의 벗이 되기로 약속해 손을 잡고 출궁해 종신토록 배반하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그런가 하면 13세 용춘공조에는 진평왕의 장녀인 천명공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숙명공주와 천명공주의 출궁은 골품 신분 유지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숙명이나 천명이 궁에 있을 때는 분명히 성골 신분을 가졌고, 천명은 왕위를 계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출궁해 골품을 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그들이 버린 골품은 성골이었다. 그들은 궁 밖에서 살면서 진골 신분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화랑세기 시대의 왕궁은 성골집단의 거주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물론 왕궁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도 살았으나, 기본적으로 왕궁은 왕과 그 형제들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성골집단의 거주지였다는 밝혀진 것이다.


신라는 철저한 골품제 신분사회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선덕왕조에는 덕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덕만이요, 진평왕의 맏딸인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다. 덕만은 성질이 너그럽고 어질었으며 명민하였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덕만을 왕위에 올려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이와 같이『삼국사기』 에는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 왕력편은 선덕여왕의 즉위를 "성골의 남자가 없어졌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하였다."고 좀 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선덕여왕은 핏줄을 잘 타고나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삼국사기) 덕만은 진평왕의 맏딸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덕만 이외에 다른 딸도 있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덕만의 이름과 함께(奇異1, 선덕여왕 지기삼사 편)과 함께, 서동요에 등장하는 선화가 셋째 딸이라고 쓰고 있고(奇異2, 선화공주와 무왕 편),


『화랑세기』는 천명이 맏딸이고, 덕만은 둘째 딸이라고 하였다. 김춘추의 아버지에 대해서도,『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일설에는 용수라 한다)이라고 쓰여 있고, 『삼국유사』에는 용수(혹은 용춘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용춘과 용수를 동일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화랑세기』는 용수와 용춘이 분명히 다른 인물이며, 두 사람은 형제지간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언니 천명공주(天明公主)가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하였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화랑세기』13세 풍월주 용춘편에 의하면, 진지왕은 폐위되었으나 태상태후의 명령으로 진지왕의 두 아들-용수와 용춘-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ㆍ덕만과 함께 궁궐에서 자랐다. 이들은 서로가 이복형제인 줄 알고 있다가 나중에 자신들이 숙부와 조카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천명공주는 용춘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신라 사회에 숙부와 조카 사이는 서로 사랑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의 천명공주에게 싹튼 사랑의 대상은 용춘이었으나, 그는 공주의 그런 마음을 몰라주었다.


천명공주는 어머니 마야왕후에게 "남자 중에는 용숙(龍叔)같은 사람이 없습니다."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용수와 용춘 중에서 '젊은 아재(叔)'란 뜻으로 용숙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야왕후가 잘못 알아듣고 진평왕에게 "천명이 용수를 좋아하고 있다."고 알렸던 것이다.


왕후로부터 천명의 말을 전해들은 진평왕은 '양수겸장(兩手兼將)의 묘수'라고 생각했다. 『화랑세기』는 이를 '그때 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공(용춘)의 형, 용수 전군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진평왕은 용수를 사위로 삼고 왕위까지 물려주려고, 용수를 천명공주의 남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왕후가 천명공주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바람에 천명공주는 그만 사랑하는 용춘이 아닌, 형 용수의 아내가 되고 만 것이다. 용수의 아내가 되어서도 용춘에 대한 천명공주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화랑세기』는 '공주는 제(帝, 진평왕)에게 공의 자리를 떠받쳐주게 하였고, 여러 차례 공의 관계(官階)를 승진시켜 위(位)가 용수공과 같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천명공주가 공주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용춘의 지위를 높여주었음을 뜻한다.

한편 13세 풍월주가 된 용춘은 많은 업적을 쌓고 있었다. 그가 낭도를 이끄는 방법은 신분이 아니라 실력과 공(攻)을 위주로 삼는 것이었다.


용춘이 풍월주로서 큰 업적을 이룩하자 진평왕은 용춘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천명에게 왕위계승권을 양보하라고 권했다.


『화랑세기』는 '이 때 천명공주가 효심으로 순종하여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했다'고 적고 있다.

영국의 윈저(Windsor,1894~1972)공이 심슨(Simpson) 부인과의 사랑을 위해 왕위마저 버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천명공주 역시 사랑하는 용춘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것이다.


천명공주가 출궁함으로써 왕위는 자연히 용춘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선덕공주가 여기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남자만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에 도전했던 것이다. 언니가 즉위한다면 모르겠지만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용춘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덕공주는 왕위를 양보하기는커녕 용춘이 자신의 사신(使臣)16)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평왕은 선덕이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했지만, 이 정도의 배포라면 왕 노릇을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진평왕은 선덕의 요청을 받아들여 용춘에게 선덕을 받들라고 명령했다. 이는 용춘이 선덕의 사신이자 남편이 되는 것을 뜻했다.

용춘은 선덕의 남편자리를 사양했으나 임금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화랑세기』는 '여왕은 3명의 남편을 둘 수 있게 하는 삼서지제(三壻之制)를 제도화하여, 용춘 외에도 흠반(欽飯)과 을제(乙祭)를 남편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천명은 남성이 즉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여 왕위와 용춘을 모두 놓쳤으나, 선덕은 이런 고정관념에 도전한 결과 왕위와 용춘을 전부 차자하고, 두 남자까지 더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에 관한한 최후의 승리자는 천명공주였다. 화랑세기는 '공(용춘)이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선덕에게서)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용춘이 선덕에게 애정이 없었음을 말해준다.


천명공주는 용수가 죽으면서 자신과 아들을 용춘에게 맡김에 따라 원하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용춘은 아들을 두지 못하였으므로 천명공주와 용수 사이에 난 춘추를 아들로 삼았는데, 훗날 김춘추가 즉위하자 용춘을 갈문왕(葛文王)17)으로 추존하였다.

선덕여왕이 3명의 남편에게서 자신의 뒤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한 데 반해, 천명공주는 비록 자신이 왕이 되지는 못했으나 삼국통일의 주역을 생산하였으니, 천명공주의 인생이 결코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포석사(포석정)는 유희의 장소가 아니었다.

포석정은 술 먹고 춤추며 풍류를 즐기던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신라본기 경애왕조의 다음과 같은 기록 때문이다.


(경애왕) 4년, 가을 9월에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므로 (중략), 겨울 11월에 서울을 습격하였다. 이 때 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뛰어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부 및 시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다. 적에게 붙잡힌 자들은 귀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놀라고 진땀을 흘리며 엎드려 노복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치 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목전(고울부)에 와 있는데 아무런 일도 없는 듯,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풍류를 즐길 수 있었을까? 더구나 때가 음력 11월 엄동설한이었다. 엄동설한에 유상곡수연(遊觴曲水宴)을 즐겼다는 것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사실이다.


그런데,『화랑세기』는 포석정이 단순한 유흥의 장소가 아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화랑세기』 8세 풍월주 문노 편을 보면 '포석사에 (문노의) 화상을 모셨다. 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공(문노)을 사기(士氣)의 으뜸으로 삼았다. 각간으로 추종하고 신궁의 선단(仙壇)에서 대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오고, 『화랑세기』12세 풍월주 보리 편에는 '공(보리)이 하종공에게 속하였을 때, 신궁에 들어가서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交神像)에 절하였다.


보리공과 만룡이 혼인하기로 결정되자, 만호태후가 친히 신궁에 가서 공주례를 고하고 포석사(포석정)에서 길례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국선 문노와 윤궁의 길례, 김춘추와 문희의 길례도 포석사에서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포석사는 위대한 왕이나 국선 문노와 같은 훌륭한 화랑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길례의 장소로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견훤이 서라벌로 쳐들어오자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킬 힘을 상실한 신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포석사에 모신 호국영령(護國英靈)들의 힘을 빌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제사를 지내다가 견훤의 군사에게 참변을 당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밖에도『화랑세기』에는 화랑의 세보(世譜)ㆍ조직ㆍ파맥(派脈)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밝혀지고 있으나 지면 관계상 이만 줄이기로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화랑세기』는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저술된 책이다.

『삼국사기』가 정사(正史)를 기록한 사서라면 『삼국유사』는 야사(野史)를 기록한 사서에 해당되며, 『화랑세기』는 화랑(풍월주)의 세보를 기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화랑세기』는 기존의『삼국사기』나 『삼국유사』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나 미해결로 남아있던 내용들을 상당 부분 새롭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진본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진위의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왜 고대사 연구에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뒤따라야 하는가? 그 해답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나오는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라매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아름답고) 열매가 많으니라.

샘이 깊은 물은 가믐에 그치지 아니하므로 내가 되어 바다에 가느니라.


출처: 경주문화 15호, 경주문화원(요약 글)


〔참고문헌〕

삼국사기 제1권(신라본기), 김부식 지음, 이재호 옮김, 솔출판사, 1997. 6. 30

삼국유사 1.2.3권, 일연지음, 이재호 옮김, 솔출판사, 1997. 2. 2.

화랑세기, 김대문 저, 이종욱 해, 소나무, 1999. 6. 26.

세상을 바꾼 여인들, 이덕일 지음, 도서출판 옥당, 2009.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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