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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2-24 16:01
[한국사] 창해군 중국 바이두- 지누짱님을 위한 기계 번역
 글쓴이 : 삼바
조회 : 993  

창해군 중국 바이두- 번역기와 유물 사진들
번역기로 돌리고 문맥이 너무 맞지 않은 부분을 읽을 수 있게만 손본 것입니다.
오류가 있을수  있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반복된 부분이나 중요하지 않는 부분은 글이 길어 삭제했습니다.

바이두 창해군
https://baike.baidu.com/item/%E6%B2%A7%E6%B5%B7%E9%83%A1

창해군, 
고군명은 한무제 원삭 원년(전 128년)에서 3년(전 126년) 사이에 중국 동북 요동반도에 설치된 것으로, 
지금의 랴오닝성 대련시 보란점구 경내에 있다.

창해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구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창해군 땅은 원래 동이 예인이다.
한무제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가을, 동이예군 남려 등 인구 28만명이 내항하여 창해군이 되였다
.원삭 3년(기원전 126년) "봄, 창해군을 파(중지)했다"
안사고주 : "남려는, 예나라 임금님 이름이다."
복건주 "예맥은 진한의 북쪽에 있고, 고구려 ·옥저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은 큰 바다에 막다른 곳이다"
이에 따라 학계는 창해군 관할지에 무제 원봉 3년 동안 설치된 임둔군(임둔군)이 포함돼야 한다고 봤다.
(지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한국에 분단된 강원도 지역)

창해군 설치는 조선과 흉노의 연계를 막기 위한 것이다.또한 송화강 유역에서 압록강 유역까지를 지정하는 학자도 있다.
사서의 기록이 간략하여 그 건립 상황은 이미 자세히 고찰하기 어렵다.

2017년 6월 22일 중국 전역에서 온 고고학 및 역사학 전문가들은 다롄시 보란점구에서 회의를 열고, 
다롄대학의 중국 동북사연구센터장인 왕우랑 교수가 제안한 보란점 장점의 한성이 창해군 유적의 치소인지 여부와 향후
 장점의 한성 유적보호 이용에 대해 광범위하고 충분한 논의를 진행했다.
전문가들은 장점 한성이 한무제 때 창해군의 치소로 사용된 것은 국내외 학자들이 논설한 것보다 과학적이고 근거가 충분하다고 입을 모은다.
보란점 장점의 한성이 서한( 沧漢) 시기 창해군( 遗址海軍)의 유적지라 할 수 있는데, 
축성연대가 서한의 성(城)보다 이른 것은 장점(張店) 고성 안에서 전국시대 문화유산이 발견됐기 때문에 다롄(大連)시의 도시 역사기원(城史紀元)의 
시작은 한무제 원삭 원년(前128) 창해군(元海軍)으로 앞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역사적 '상식'을 깬 결론이다.
이는 다롄 지역의 역사가 기원전 1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에 이미 일개 군 1급 중심도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해군은 우리나라 한나라 때의 도시로 역사적으로 존재기간은 2년으로 짧다.
《한서·무제기》《후한서·동이전》《삼국지·동이전》 등 많은 문헌에 따르면 기원전 128년, 
 예국 군왕 남려는 28만 명의 인구를 이끌고 한무제에 항복하였고, 한무제는 이를 요동 안치하고 내속하게 하여 창해군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126년 창해군은 소멸됐다.창해군의 이름은 《사기》에서 다시 보인다.
《史记》에서 말하기를 : "팽오가 예와 교역(장사)하여, 조선, 창해군을 설치했다"
『한서』식화지는 "팽오는 예맥조선을 뚫고 창해군을 설치했다"고 했다.
범엽 후한서(後漢書)의 경우 "원삭 원년, 예군(闾君) 남려(南闾) 등이 우거를 배반하여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에 내속했다.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는데 수년 만에 그만 두었다(군을 파했다).

국무원 정부 특별 보조금 수상자, 중국대외관계사학회 부회장, 중국중외문화교류사학회 회장, 국가철학사회과학기금 프로그램 심사 전문가인 
다롄대 중국동북사연구센터 주임 왕우랑 교수는 고증을 통해 예국을 한나라 소수민족 정권으로 규정했다.
오늘날 길림성 모자산, 동단산, 서단산 부근에 있다.

张店汉城曾被认为是史料中出现的沓氏县
장점 한성은 일찍이 사료에 나타난 답씨현으로 여겨졌다

2009년 랴오닝(遼寧)성과 다롄(大連)시로 구성된 고고학팀은 장뎬(張店) 한성 유적지 주변의 한묘(漢墓)를 발굴해 양한묘 212기를 수습하고 옥복면, 금동패록진 등 2000여 점의 유물을 출토했다.
장점은 유적이 크고 유물이 풍부해 역사의 산증인 무덤으로, 장점한성이 2000년 이전까지 인구가 집중된 번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전문가들은 한때 장점의 한성이 진한시대 역사 문헌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번성하는 답씨현은 다롄의 모성(母城)이다.


왕우랑은 22일 다롄 시에서 열린 푸란점 장뎬 서울 유적 보존 이용 심포지엄에서 장점 한성이 한나라 창해군이라고 밝혔다.
이는 그동안 학계의 여러 시각을 뒤집은 것이다.
한대의 도시는 군현의 정향으로 지어져, 군의 행정 수준이 비교적 높고, 종종 지역적인 중심 도시였다.왕우랑은 역사 문헌에 기록된 그 추악한 나라의 인구 28만 명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그 수가 방대하고, 요동군의 인구도 겨우 유일하다고 소개하였다. 25만. 이는 다롄이 2000년 전 한나라 때 이전에 부른 '답씨현'이 아닌 부성(副省)급 대도시였음을 의미한다. 다롄 역사는 다시 쓰여질 것으로 보인다.

왕우랑은 여섯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1, 한 문헌에 기록된 예왕이 남천하였고, 한무제에 의해 요동 안에 설치되어 창해군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2, 요동은 오늘날 요양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지역으로, 북에서 개원, 서풍, 서에서 심양과 요하, 동에서 압록강, 남에서 다롄(大連)의 순로(順老) 철산까지다. "내속"은  조정에 귀순한 속지나 속국을 뜻한다.
3、창해( 沧海)라는 이름은 창해군 이전에 이미 지어진 것으로 짙은 청색의 바다라는 뜻이다.
고증에 의하면 창해는 요동반도 양쪽 면에에 위치한  황해와 발해 양안이다, 창해군은 요동 지역의 바다에 인접해 있다.
4.장점 한성은 발해 연안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창해의 지망에 대한 고증의 범위에 해당한다.
그 자연 지리적 위치가 매우 우수하다.남쪽에는 안장강이 있고, 동쪽에는 평안하가 있어, 천연 해자이다.
두 강은 거의 같은 지점에서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 장점 한성은 양하 입구의 충적평야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세가 평탄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농사에 용이하다. 성을 쌓고 많은 인구를 모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양한시대 이런 대규모 도시를 건설한 지리적 조건에 부합한다.
5.군터에는 한나라 성터나 한나라 문물이 반드시 발견된다. 장점한성의 고고학적 발견을 보면 전국~한대에는 '임해승인' 봉니, '천추만세(千秋萬世)' 와당, 줄무늬 기와, 구리촉, 철농기구, 화천, 말발굽금 등 진귀한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성터에 남아 있던 깨진 기와 조각들이 모두 고성에 밀집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천추만세(千秋萬世)' 와당은 높은 등급의 성터 관청(官府)의 상징 중 하나로 군(郡)현(縣) 1급(級)의 성(城)만이 '천추만세(千秋萬世)' 와당(와당)을 장식하는 예제와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6,장점 한성의 마제금은 이 성이 보통의 현급 규모가 아님을 더욱 입증해 준다. 기존 학계에서는 '(niao ti)'를 마제금( 马蹄金)으로 통일했다.2015년 강서 남창의 서한 해혼후대묘에서 출토된 금기는 인지와 요제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마제금과 인지금(麟趾金)은 모두 황제의 축복을 기원하며 봉상하는 물건이다.
결론적으로 왕우랑은 장점 한성유적은 한무제 때 창해군의 치소가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다롄시 역사 기원의 시작은 한무제 때인 기원전 128년으로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미나 전문가가 의견서를 작성했다.전문가들은 왕위랑의 장점  한성은  한무제 때 창해군 지소로 국내외 학자들의 기존 논설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근거가 충분하다며 다롄시의 기원(城史紀元)이 되며 한무제 원삭 원년(기원전 128) 창해군 설치로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마제금=
1.말굽 모양으로 주조한 금(金).
2.쓰촨(四川)성에서 나는 여주의 일종.
보통 무게가 250그램 정도. 가치는 무게가 중요.
마제금은 제왕이 상을 내리거나 선물 예물 교역과 외교에 사용. 유통 화폐아님.
일반적으로 제왕이 소장 상여 증여 대량거래에 사용 금화이다.

마제금 인지금은 형태만  다를뿐 전국시대 초나라에서 시작되어 전한시대 유행했으며 그 당시 무게 약 한근(250g)에 해당한다.

임해승인  봉니
장점한성에서 발견된 임해승인 봉니는 전한시대 봉니의 형식이고, 그 당시 인근의 현명이 아니다.
창해군의 속현 임해현으로 추정됨.
임해승인 봉니와 금주 태둔집에서 발견된 임둔태수장 봉니는 같은 형식.

관련 사진 자료는 링크에 바이두 그림 창고하세요
https://baike.baidu.com/item/%E6%B2%A7%E6%B5%B7%E9%83%A1

사진 그림 올리는법 알려주세요. 사진 어케 올리는 거임? 전에는 올렸는데 지금은 안되네. 플래시 지원 문제인가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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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감방친구 21-02-24 16:05
   
PC에서 작업하시면
사진을 Imgur 같은 사진 공유 사이트에 올린 후에
그 URL을 따서 외부링크로 거셔야 합니다

바이두에 있는 사진 주소를 가져오셔도 될 겁니다

PC 글쓰기 화면에서 좌측하단을 보시면
연필모양이 있습니다
그걸 클릭하면 HTML편집 화면으로 바뀌는데
거기에
<img src="사진주소">
이렇게 직접 써넣으셔야 해요

모바일에서 거실 때는

<img src="사진주소">
하신 후에 상단의 html을 체크하시고 확인을 눌러 발행을 하시면 됩니다

댓글 창에는
[사진주소]

이렇게 거시면 됩니다
     
삼바 21-02-24 16:20
   
감사합니다.
          
감방친구 21-02-24 16:41
   
바이두에서 직접은 안 걸리는 모양이네요
감방친구 21-02-24 16:26
   
이 바이두 백과의 기술내용은
예전에 제 글에 댓글로 적어주신 바 있어서
그 때에 읽어본 바 있는데요

저곳을 창해군으로 수긍하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창해군 설치 정황, 이유와 목적, 관련사와 어긋남이 있고
저 당시의 요동은 현 이수ㅡ대청하 북쪽~패주/랑방시~당산시 일대였지 저 곳이 요동이 아니었음

더구나 창해라는 명칭은 발해-요해의 이칭으로 쓰인 바 요ㅡ송 때에 이르러서야 현 금주시(비단 금) 남쪽 바다를 창해라 이르렀음(무경총요)

물론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초기에 현 요동반도가 접한 바다를 창해라 이른 사실이 있음

그러나
대체로 현 창저우시(滄州) 일대가 전통적 개념의 창해

연과 제에서 큰 부담으로 혼란을 겪었다 하는 것을 보면
연과 제에서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연과 제 사이인 현 창주(滄州) 일대가 유력해보이나
한편으로는

거리가 멀었다 하였으므로 현 요동반도 남단이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또한 저곳은 산동에서 490리(태평환우기)로 거리가 멀다 하기 어려움

당시 조선을 어디로 고증하느냐가 관건인데
저 중국측의 연구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물질문화 자체에 대한 주체적 판단이 우선돼야 할 듯 합니다

유물발굴이 2009년, 2015년인데
이 지역에 대한 국내 고고학계의 연구경향은
전국ㆍ진ㆍ한과의 교류상은 보이나 어디까지나 토착세력 지역이었다는 것

사실 저 대련시 지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산동지역(용산문화)과의 교류가  있었던 지역
     
삼바 21-02-24 17:11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지금까지 창해군 주장중에 가장 유물(임해승인)등을 가지고 주장하고 있으며, 다른곳은 머리카락 하나 유물 제시를  못하는 곳입니다.
말씀하신바와 같이 한나라 이전에 다른 토작세력이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조한전쟁시 요동은 난하유역이며
기원전 108년 조선 항복
기원전 107 현도군 설치 조선 내부를 점령시작
 옥저(임둔)에 주둔. 원래 임둔의 일부가 현도군임. 진번은 조한전쟁시 상하장이 포함된 지역으로 전시에 직접 무력 점령된 지역과 항복한 곳이 분할되어 직접 무력 점령지는 고대 전쟁 특성상 한나라 기존 군현이 되어버림.
기원전82  남은 임둔과 진번을 낙랑에 편입시킴--여기서 주의할점 원래 임둔 진번의 전부가 아님
옥저(현도군이 있던) 지역에 요동군이 이치됨. 현도는 점령군으로 고구려의 서쪽의 이맥으로 지칭된 세력을 공격하여 그 지역을 차지.
기원전 75년 이전 창해군을 설치 했다가 물러난 지역을 요동군 서부도위로 편입
현재 요양에 요동성과 심양지역에 현도군을 쌓음'
식민학계는 현도군을 1현도 2현도 3현도 로 분류하면서 1현도는 서북한 2현도는 고구려 3현도는 심양
이런식으로 주장하면서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현도군을 몰아낸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만.
시기적으로 맞는 주장임 아님
기원전 75년 까지는 현도군이 힘이 강력 했고, 식민학파 주장을 근거할만한 유물 유적이 없음
현도군은 기원전 75년 까지 동진한 것임.
현도군은 조한전쟁 이전에 우북평군에 있는 군사세력이 모태로. 우북평군에 주둔하면서 흉노 동호의 공격을 막는 군대였는데. 조한정쟁시 참전하여 조선 항복시 조선 내부 점령군이 되어 임둔에 주둔하여 정리하고 이맥을 공격하여 차지한 것임(현도군을 몰아낸것 아님.  오히려 현도가 동진한 것)
그러니까 예전 창려군은 기원전 75년경 요동군이 된것임.
이 부분을 심도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방친구 21-02-24 17:32
   
기준이 될 훌륭한 견해로 생각됩니다
          
삼바 21-02-24 17:53
   
오타수정
장려군=X
창해군=O
감방친구 21-02-24 16:33
   
위 본문 내용에 참고하면 좋을 내용

1) BC 4세기 물질문화 판도
ㅡ 보라색은 우리 사학계가 비정한 고조선 영역
ㅡ 철영자/정구자문화는 철영자/정구자유형의 오기



2) BC 3세기 물질문화 판도
ㅡ 윤가촌, 상보촌, 서황산, 남연해주 유형/문화도 세형동검
ㅡ 상보촌의 경우 현 압록강을 경계로 현 서북한을 분리해서 서북한 지역을 따로 떼어서 고조선으로 보려는 것이 기존학설이었으나 최근의 경향은 구분성이 낮아 하나의 유형권으로 묶고 있음


* 본인은 난하 동쪽의 전국연문화권(빨간색 표시영역)을 위만조선으로 보고 있음
     
삼바 21-02-24 17:39
   
저도 표시하신 빨간색을 위만조선으로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중국의 창해군 주장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적극 주장자=대련시 연구자들 /대련시 시의 기원으로 주장. 유물로 주장
무시자= 중국 중앙정부. 식민학파.=서북한이라고 주장. 유물 없음
위구르 21-02-24 17:19
   
ㅈㄴㅉ 보니까 빼박 중공 간첩인데 알려줘야 뭐하나 싶네요
     
삼바 21-02-24 19:51
   
오잉? 눈치 빠르시네요
          
지누짱 21-02-25 09:26
   
지금 동조하시는게요?
번역해줘서 고마운데 이건 아니지요
     
지누짱 21-02-25 09:25
   
중국간첩이요? ㅋㅋㅋ
정확히 신고대상이구랴
이런식으로 쓰면 몰라보나요?

자 이제 신고갈텐데 내가 중공간첩이라는 증거를 제시하시오. 안하면 바로 신고할거요
          
삼바 21-02-25 11:43
   
다들 뭔소리를 하는지요.
저를 중국간첩 지목해서 저런 댓글 단것입니다.
지누짱님을 간첩 지목해서 제가 동조한것 아님니다.
아 중국간첩 빨리 되고 싶다. 뭔놈의 중국어 이렇게 어렵냐???????
               
지누짱 21-02-25 12:20
   
그렇군요. 하지만 앞글에서 저를 그런 식으로 표현해서요. 저자는 여기 있으면 안될 사람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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