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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2-10 10:32
[한국사] 윤내현교수의 韓國 古代史 新論 (한국고대사 신론)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1,528  


韓國 古代史 新論 (한국고대사 신론)



"중국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인식"을 발표한 이후 필자의 고대사에 대한 견해에 대해 상당히 강한 반발이 한국 사학계에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일찌기 신채호, 장도무, 정인보 등의 사학자들은 서로 견해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한국고대사 지역을 만주 지역까지로 보았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記"에 의하면 고조선은 4번 도읍을 옮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행해진 바 없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한국 유학자들은 중국의 현인으로 전해오는 기자의 교화를 받았음을 긍지로 삼고자 하여, 기자동래설을 적극 옹호 했지만, 일본인들은 한국고대사의 고조선을 부정하고 위만조선과 그 뒤를 이은 한사군을 중국세력의 한반도 진출로 인식 되도록 하려고, 기자 동래설을 부정하였다.






고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로 보는것은 한국역사학계의 통설로 되어있다. 이런 견해는 고려중기에도 존재했고 조선시대에 이런 견해가 주류를 형성했다. 그후 일본인 학자들에의해 평양지역에서 발굴된 중국식의 유적이 한사군의 낙랑군유적으로 보고됨으로써 고조선의 위치에 대한 그런 견해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고조선의 경우 충분하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그 위치와 강역, 국가구조 사회성격 등을 밝힐수 있는 기록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보는것은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로 되어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 두어야 할 것은 고조선의 도읍을 평양으로 기록한 중국 문헌은 당唐나라 이후의 것이라는 점이다.



고조선과 위만조선 연구의 기본사료인 “史記(사기)”와 “漢書(한서)”의 “朝鮮傳(조선전)”에는 위만조선의 도읍이 “王險城(왕험성)”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주석으로 실린 “史記集解(사기집해)”와 “史記索隱(사기색은)”은 고조선 또는 위만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의 지명이“ 險瀆(험독)” 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이었다는 중국 문헌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史記(사기)” “秦始皇本紀(진시황본기)“에는 조선이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이 조선에 대하여 ”史記正義(사기정의)“에 주석 하기를 ” ”括地志(괄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가 통치하는 평양성은 본래 漢(한)의 낙랑군 王險(왕험)성인데 바로 옛 조선이다” 라고 하였고, “通典(통전)에서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은 바로 옛 조선국의 王險城(왕험성) 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舊唐書(구당서)“ ”高句麗傳((고구려전)“에서도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바로 漢(한)의 낙랑군 옛 땅“ 이라고 하였다.



주지하는 하는바와 같이 “사기정의"에 인용된 ”괄지지“는 당 태종의 네째 아들인 위왕 진 등이 편찬하였으며 ”사기정의“는 장수절, ”통전“은 두우에 의하여 모두 당나에 편찬되었다. 그런데 고조선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당唐나라때의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이 문헌들에 나타난 평양이 반드시 지금의 평양을 지칭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일단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위의 여러 문헌들에 나오는 평양의 위치가 한결같이 지금의 평양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史記(사기)” “秦始皇本紀((진시황본기)”의 본문에는


秦帝國(진제국)의 땅이 동쪽으로 海(해)에 이르고 朝鮮(조선)에 미쳤다'고 했는데 “사기정의”에서 장수절이 주석하기를 여기의 海(해)는 渤海(발해)를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가 통치하는 평양성은 본래 한의 낙랑군 왕험성인데 바로 옛 조선이다“ 라고 하였다.



진제국의 동북부 경계는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灤河(난하) 상류 중류와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昌黎(창려) 碣石(갈석)까지 였으므로 海(해)를 발해로 본 장수절의 주석은 옳다고 생각되며 발해와 더불어 언급된 조선은 한반도 일수가 없으며 발해로부터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이 조선을 장수절은 漢(한)의 樂浪(낙랑)군 왕험성,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본 것이다


다음에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밝혀지겠지만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는 朝鮮(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후에 西漢(서한)의 武帝(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난하 중류와 하류 동부연안에 낙랑군을 설치함에 따라 그 곳은 낙랑군의 조선현이 되었다.



이 조선지역에는 기자국이 그 말기에 중국의 통일세력인 진제국에 밀려 이곳에 와 있다가 오래지 않아 위만에게 정권을 탈취당한 바 있었다. 따라서 기자국과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은 이 지역에 있었다는게 된다. 이렇게 볼때 장수절이 말한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의 난하 중하류 동부연안에 위치했던 조선지역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말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두우는 “通典(통전)”에서 고구려가 부여의 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면서 고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인데 그 곳에 서한 무제가 縣(현)을 설치하여 낙랑군에 속하게 하였다고 말하고 도읍인 평양성은 옛 조선국의 왕험성 이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두우가 낙랑군, 조선국, 왕험성, 고구려 평양성을 동일한 지역으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舊唐書(구당서)”에서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이 漢(한)의 낙랑군의 옛 땅이라고 말하면서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 말하기를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遼水(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靺鞨(말갈)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이 기록에 나오는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라와 백제의 위치를 말하면서 바다 건너에 있다고 말할 필요가 없고, 그 방향에 대한 표현도 옳지않다. 이 평양도 위에 언급한 지금의 난하 중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왕검성과 동일한 곳으로 생각되는데 그렇게 되면 신라. 백제와의 지리적 관계에 대한 표현도 합당함을 알수있다.



이상의 고찰에서 분명해진 것은 고구려의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만을 지칭한것이 아니었음을 알수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魏書(위서)”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이 阿斯達(아사달)에 도읍하여 개국하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고 전하면서 아사달에 대해 주석하기를 “經(경)에는 무엽산 또는 白岳(백악)이라고 하였는데 白州(백주)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었다고도 하는데 白岳宮(백악궁)이 그것이다” 라고 하였다



“魏書(위서)”가 전한 고조선의 첫도읍인 아사달에 대해서는 개성 동쪽이라고 했다. 그러면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 三國史記(삼국사기)와 帝王韻紀(제왕운기)에는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동천왕 21년 (서기 247)에 환도성이 난을 겪어 다시 도읍할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는데 ,평양은 본래 仙人(선인) 王儉(왕검)의 宅(택)으로서 왕의 도읍이었던 王儉(왕검)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천왕 21년(서기 247)에는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중국의 東漢(동한) 광무제에 의하여 설치된 낙랑(한사군의 낙랑군과는 다름)이 아직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동천왕 21년에 천도하였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일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한사군이 설치 되어있던 시기에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崔理(최리)의 樂浪國((낙랑국)이 있었던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제왕운기에는 요동에 중국과는 다른 하나의 별천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의 사방천리가 조선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했었음을 알수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서기32)조를 보면



여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를 여행하였는데 낙랑왕 최리가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는 묻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같지 않은데 혹시 북쪽의 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드디어는 함께 돌아가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위의 내용에서 神王은 고구려의 대무신왕을 뜻하는 것이니 崔理(최리)는 고구려를 북쪽의 나라라고 불렀음을 알게된다. 따라서 최리의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기록은 서기 32년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당시에 고구려 남쪽의 동부에는 濊(예) 또는 濊貊(예맥)이 있었고 최리의 낙랑국은 예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최리의 낙랑국의 위치는 평양지역이 될 수밖에 없게된다.


종래에는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평양지역으로 보았기 때문에 최리의 낙랑국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최리의 낙랑국을 복원시켜 놓고 보면 문제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당시에 한사군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는데 만약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면 최리의 낙랑국과 한사군의 낙랑군, 즉 2개의 낙랑이 같은 지역에 있었다는 모순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필자는 서로 다른 지역에 있었던 두 개의 낙랑을 상정하게 된다. 하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 하류 동부연안 즉 위만조선지역의 서부에 설치되어 있었던 한사군의 낙랑군이요, 다른 하나는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던 최리의 낙랑국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낙랑에 관한 문헌의 기록은 두 종류로 구별해서 읽어야 한다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던 최리의 낙랑국은 서기 37년에 멸망하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서기37)조에는


“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 시켰다” 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만으로는 어느 낙랑을 멸망 시켰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4년(서기37)조에는 “ 고구려의 왕 撫恤(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시켰다. 그나라(낙랑국)사람 5천명이 투항하여 오므로 여섯 부락으로 나누어 살게 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고구려 대무신왕이 멸망시킨 낙랑은 신라와 접한 지역에 있었으므로 최리의 낙랑국임을 알수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후의 기록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서기44)조에는


“가을 9월에 동한의 光武帝(광무제)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縣(군현)을 만드니 薩水(살수)(지금의 청천강) 이남은 동한에 속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종래에는 이 기록을 한사군의 낙랑군과 연결시켜 인식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인식하기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



이 시기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이미 자기들의 영토가 되어있는 한사군의 낙랑군에 군사를 파견하여 그 곳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縣(군현)을 만들었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한사군의 낙랑군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최리의 낙랑국이 있었던 지금의 평양지역을 쳤음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수 있다.



바다를 건넜다는 내용은 그것을 한층 명확하게 하여 준다. 최리의 낙랑국은 이보다 7년전에 이미 고구려에 의하여 멸망되었지만 그 지역이 낙랑국이 있엇던 곳이기 때문에 낙랑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동한의 광무제가 낙랑국이 있던 평양지역을 친것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였다고 생각된다. 당시에 동한은 세력이 성장하고있던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를 공략하고 그곳에 군사식민지를 만들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한편 낙랑국이 고구려에 멸망된 것은 오래지 않았었으므로 그 주민들은 아직 고구려에 동화되지 않았었을 것이고 또 저항감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낙랑국의 지배계층은 원래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낙랑군 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이 대부분 이었을 것이므로 그러한 연고관계를 이용하여 동한의 세력을 빌어 낙랑국을 재건 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한의 광무제는 비교적 용이하게 평양을 칠수 있엇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이지역은 한반도에 있어서의 중국의 군사기지및 교역의 거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앞에서 인용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조의 기록에 의하면 동한 광무제의 군사에 의하여 점령된 지역은 지금의 청천강 까지였는데 이것이 아마도 낙랑국의 북쪽 경계선 이었을 것이다



동한 광무제에 의하여 점령된 평양지역은 그전의 명칭에 따라 낙랑이라 불리어졌고 행정적으로는 한사군의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던 것같다. 평양지역이 낙랑이라고 불리어졌음은 토성지역에서 수집된 “낙랑예관” “낙랑귀부” 등이 새겨진 기와에 의하여 알수있는데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평양지역의 낙랑은 漢(한)시대의 낙랑군의 屬縣(속현) 땅이었을 것 이라고 하였고, 이익도 같은 견해를 피력한바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평양에서 발견된 중국식 유적인 소위 낙랑유적은 동한 광무제에 의하여 설치되었던 군사기지인 낙랑의 유적인 것이다. 끝으로 한가지 부연해 둘 것은 지금의 평양지역에 연대가 빠른 중국식 유적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르게 인식하는데는 매우 조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잠간 언급하였듯이 평양지역에 있었던 낙랑국의 지배계층은 대부분 위만조선의 팽창과 서한 무제의 침략으로 인하여 낙랑군 지역으로부터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이주해온 사람들인데 낙랑군 지역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서쪽 변경에 위치하여 중국지역과 접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의 문물에 매우 친숙해 있엇을 것이라는 점에 항상 유의해야 할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결론지으면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분석.검토해 볼때 지금의 평양지역에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낙랑군이 위치했었다는 분명한 근거는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종래의 선입관을 배제하고 충실하게 사료에 따라 고조선의 위치를 복원하는 작업에 임해야 할 것이다








古朝鮮(고조선)의 位置(위치)와 遼東요동)


앞에서 잠깐 언급 하였듯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문헌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의 내용을 면밀하게 분석 검토하여 보면 이 책의 저자들이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을 몇 개 더 찾아볼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嬰陽王(영양왕)23년(서기 612)에 중국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그의 군대에게 훈시하기를 “左軍(좌군) 12隊(대)는 누방.장곤.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현토.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로 향하고 右軍(우군) 12대는 점선.함자.혼미.임둔.후성.제계.답둔.숙신.갈석.동시.양평 등의 길로 향하여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서 總集(총집)하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도로명 가운데는 한사군의 낙랑군에 속해 있었던 縣(현)의 명칭이 들어있고 遼東(요동), 玄菟(현토), 沃沮(옥저), 樂浪(낙랑), 臨屯(임둔) 등이 보이며 그 위치가 분명한 碣石(갈석)도 포함되어 있다. 이 도로명은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동쪽에 있었던 지명과 일치하며 한반도에 있었던 지명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내용은 낙랑군 현토군 임둔군 옥저등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일찍이 이익이 주장했던 것처럼 고조선이 요동지역에 위치 했었음을 알게 된다



한사군의 낙랑군이 요동지역에 있었음을 알게 하는 기록도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고조선이 요동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94년(서기 146)조에 의하면 ,


그해 가을에 태조대왕이 장수를 보내어 한의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붙잡은 사실이 있다. 이 내용은 한사군의 낙랑군과 대방이 요동지방에 있었음을 알게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69년(서기121)조에는


태조대왕이 馬韓(마한).濊貊(예맥)의 기병 1만여명을 인솔하고 가서 현토성을 포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고구려와 마한 예맥 사이에 한사군이 존재하지 않고 고구려와 마한 예맥이 연접되어 있거나 그 사이에 그들의 동맹세력이 위치하고 있어서 서로 왕래가 자유스러웠음을 말하여 준다.


만일 고구려와 마한사이를 한사군이 가로막고 있었다면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을 사용할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기사는 “後漢書(후한서)” 효안제기와 동서 東夷(列傳(동이열전)에서도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 등은 고조선에 대해서 연구하기에는 너무 후대의 기록일뿐 아니라 그 내용도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 놓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앞에 든 기록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학자에 따라서는 필자와 다른 견해를 가질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는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었던 당시의 기록을 활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러한 한국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 따라서 중국문헌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종래에는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흔히 “三國志(삼국지) 魏書(위서) 烏丸鮮卑東夷傳(오환선비동이전)”이 중요시 되었다. 그러나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그것은 보충자료는 될수 있으나 기본사료가 될수는 없다.



왜냐하면 삼국지가 3세기 후반에 편찬 되었으므로 위만조선이나 그전 시대의 고조선을 연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대의 기록이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은 그 전시대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당시의 상황을 싣고있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성장과 서한 무제의 위만조선 침략등 역사적 대사건을 겪으면서 한국고대사에 등장한 여러 정치세력의 위치와 판도가 이미 크게 변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은 고조선이 존재했던 당시나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기록의 검토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주지되어 있는 바와같이 고조선의 위치를 전하는 가장 오랜 문헌은 “山海經(산해경)”이다. 산해경은 戰國時代(전국시대)로부터 西漢(서한)초기에 걸쳐서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조선이 존재하던 당시의 기록인 것이다



산해경의 “海內北經(해내북경)”에는


“朝鮮(조선)은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하며 열양은 燕國(연국)에 속한다 ” 고 하였고 同書(동서) “海內經(해내경)”에는 “東海(동해)의 안, 北海(북해)의 귀퉁이에 명칭을 朝鮮(조선)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있다 “고 하였다.



이 기록은 고조선이 북쪽은 산과 접해있고 남쪽은 바다와 접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동해 안쪽에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에 위치할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에 한반도 남부에는 三韓(삼한)이나 그 전신의 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고조선의 남쪽이 바다와 접할수 없으며 중국의 동해는 한국의 황해를 말하는데 한반도는 중국의 동해 밖이 되므로 산해경의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고조선의 위치를 보다 더 분명하게 전해주는 기록은 “史記(사기)” “朝鮮(列傳(조선열전)”이다. 여기의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 이지만 위만조선은 고조선 지역에 위치했었으므로 위만조선 지역이 확인되면 그 지역이 바로 고조선지역이 된다는데 이의가 있을수 없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서한의 무제가 군사를 파견하여 위만조선을 친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였는데 齊(제)를 출발하여 渤海(발해)에 떳다..... 누선장군은 제의 병사 7천을 거느리고 먼저 王險(왕험)에 이르렀다. 右渠王(우거왕)은 성을 지키다가 누선군이 적은것을 탐지하고 바로 성을 나가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군은 패하여 흩어져 도망하였다 ”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누선장군 양복이 이끈 수군은 제를 출발하여 발해를 항해한 후 위만조선의 우거왕과 전쟁을 하였다. 그런데 제는 지금의 산동성 이었으므로 발해의 위치가 확인되면 누선군의 항해 방향을 알수 있고 그렇게 되면 위만조선의 위치가 밝혀지게 된다.



그러면 당시의 발해는 어디였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戰(國策(전국책)”과 “史記(사기)”에서 찾을수 있다.


전국책 “齊策(제책)” 에는 “齊國(제국)의 북쪽에 渤海(발해)가 있다”고 하였고, “史記(사기)” “河渠書(하거서)”에는 “黃河(황하)가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고 하였다. 전국책은 전국시대의 상황을 전하여 주고 사기는 서한 무제때에 편찬되었으므로 이 기록은 전국시대와 서한시대의 발해의 위치를 알게하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戰國時代(전국시대)의 齊(제)국은 지금의 산동성에 위치했었으므로 당시의 발해는 산동성 북쪽에 있었다는 것이 되며, 황하는 지금의 발해로 흘러 들어 가므로 당시의 발해는 지금의 발해와 다름이 없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볼때 위만조선을 치기위해 양복의 군대는 산동성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발해를 항해 하였고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이를 맞아 싸웠으니 위만조선의 위치는 발해의 북쪽, 즉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로부터 요녕성지역에 위치 하였을 것임을 알게 된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할 때 양복의 누선군과는 별도로 좌장군 * *가 이끈 육군이 요동에 출격하여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은 요동이 위만조선의 영토였음을 알게 하여준다.


요동이 위만조선의 영토였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사기 조선열전 첫머리에는 위만조선이 성립되기 이전에 있었던 고조선과 燕(연),秦(진),西漢(서한) 사이의 국경변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 燕國(연국)이 전성기로부터 진번, 朝鮮(조선)(고조선 서쪽 변경의 지명)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기 위하여 鄣塞(장새)를 축조하였다. 진국이 연국을 멸망시키니 그것이 요동의 외오에 속하게 되었다. 서한이 일어나 그것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要塞(요새)를 수리하고 浿水(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서한 이전에는 고조선과의 국경선에 장새와 요동의 외오 등 초소가 있었는데 서한이 일어나 그것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여 사용하였다고 했으므로 요동의 옛 요새는 요동의 외오보다 서한지역으로 후퇴한 지역에 있었을 것임을 알수있다.


따라서 요동의 외오가 있었던 요동지역은 고조선에 속해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 의하면 장새와 요동의 외오는 전국시대에 연국이 고조선의 서쪽변경인 진번. 조선 지역을 침공한후 설치 되었으므로 그 전에도 본래는 그 지역이 고조선에 속해 있었음을 알수있다



요동이 고조선의 영역에 속해 있었음은 전국책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전국책 연책”에는 전국시대의 策士(책사)였던 蘇秦(소진)이 연국의 문후(기원전 362~333)를 만나서 合從(합종)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연국의 동쪽에는 조선의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林胡(임호). 樓煩(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雲中(운중). 九原(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呼陀(호타). 易水(역수)가 있으며 국토가 사방 2천리나 되며,,,,,,”子라고 말하고 있다




전국책은 서한의 류향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지만 위의 소진과 문후의 대화는 중국의 전국시대에 고조선이 연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게 하여준다. 그런데 “조선의 동쪽에 조선의 요동이 있다”는 구절의 원문을 보면 “燕東有朝鮮遼東” 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혹시 조선과 요동을 분리시켜 “연국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해석하고 요동이 고조선에 속하지 않았던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조선과 요동의 지리적관계는 요동이 서쪽에 위치하여 연국과 접해 있었다고 하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 그러므로 요동이 고조선에 속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연국에서 가까운 요동을 먼저 언급하고 다음에 조선을 언급하여 “燕東有遼東. 朝鮮(영동유요동. 조선)”이라고 기록했어야 할 것이다.



설사 이기록에 대한 필자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요동이 고조선 영역이었음은 이미 앞에서 확인 되었고, 또 다음에 요동의 위치를 밝히는 과정에서 그 대부분이 고조선의 영토였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므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위치를 밝히기 위하여는 요동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요동은 遼水(요수)의 동쪽 또는 동북쪽 지역을 말한다. 戰國時代(전국시대) 말기에 呂不韋(여불위)가 편찬한 “呂氏春秋(여씨춘추)”“有始覽(유시람)”에는 당시의 6대 강으로 河水(하수). 赤水(적수), 遼水(요수), 黑水(흑수), 江水(강수), 淮水(회수) 등이 열거되어 있는데 동한시대의 고유는 요수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요수는 砥石山 (지석산) 에서 나와 塞(새)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곧게 요동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서한시대에 류안이 편찬한 “淮南子(회남자)”“ ?形訓(?형훈)”에도 당시의 6대강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여씨춘추”에 실린 것과 동일하다.




회남자에 나오는 요수에 대해서도 고유는 주석하기를 “요수는 碣石山 (갈석산) 에서 나와 塞(새)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곧게 요동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여 “여씨춘추”의 요수에서와 동일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단지 요수의 시원지를 “여씨춘추”의 주석에서는 지석산 이라고 하였고, “회남자”의 주석에서는 갈석산 이라고 한 차이를 보여 주고있다. 어떻든 위의 고유 주석은 요수가 요동의 서남부 경계를 이루는 강이었음을 전하여 주고있다.



그러므로 고조선과 위만조선이 있었던 시기인 戰國時代(전국시대)와 西漢(서한)시대의 遼東(요동)을 확인하기 위하여는 당시의 요수가 지금의 어느 강이었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고유는 요수의 시원지에 대해서 지석산과 갈석산을 들었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착오일게 분명한데 지석산은 아직까지 고증되지 못한 상태에 있으나 갈석산은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昌黎(창려)에 위치하고 있다. 이 갈석산은 고대 중국의 동북부 변경에 위치했던 산의 명칭으로 자주 문헌에 등장한다. 그런데 갈석산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강으로는 지금의 난하밖에 없다.



갈석산은 발해의 해안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2십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므로 바다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요수의 시원지가 될수는 없겠지만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켰을 것으로 본다면 고유가 주석한 요수는 난하일 것으로 상정된다. 요수의 흐름 방향에 대해서 고유는 말하기를 “ 塞(새)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흐른다” 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금의 난하 하류의 흐름 방향과 일치 하는 것이다.




춘추시대로부터 서한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요수의 위치를 확인할수 있는 보다 더 분명한 기록이 “說苑(설원)”에 보인다.


“ 설원” “辨物(변물)”편에는 춘추시대에 齊國(제국)의 桓公(환공)이 貫中(관중)과 함께 孤竹國(고죽국)을 침공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기록을 보면 그들은 고죽국에 이르기 전에 卑耳(비이)라는 계곡을 10리쯤 못가서 강을 건넜는데 그 강의 명칭이 요수인 것으로 되어있다. 이기록은 “管子(관자)” “小問(소문)”편에 있는 것을 옮겨 적은 것인데 “관자”의 기록에는 강을 건넌 것으로만 되어 있고 강명은 적혀있지 않았다.



그런데 “설원”에는 요수라는 강명이 삽입되어 있다. 따라서 설원의 저자인 류향이 강명을 확인하여 보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죽국의 위치는 대체로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 노령현 지역이었을 것이라는데 이론이 없으며 노령현은 난하의 하류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西周(서주)시대로부터 戰國時代(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齊國(제국)은 지금의 산동성에 있었고 당시에 제국의 환공과 관중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북부에 있었던 山戎(산융)을 토벌한후 동쪽을 향하여 고죽국 침공에 나섰으므로 그 지리적 관계로 보아 침공시 건넌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수있다.




“관자”는 전국시대의 저술이지만 제국의 환공은 춘추시대 초기인 기원전 7세기의 인물이며 “설원”은 서한의 류향에 의하여 저술되었으므로 춘추시대 또는 전국시대로부터 서한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지금의 난하가 요수로 불리어 졌음을 알수있다.



지금의 난하가 요수였음은 “水經注(수경주)”에서도 확인된다. 지금의 난하는 濡水(유수)라고도 불리어졌는데, “수경주” “유수”조를 보면 앞에 소개된 “관자” “소문”편의 환공이 고죽국을 정벌한 내용이 실려있다. 그리고 비여현 근처의 산 위에 있는 사당에 얽힌 전설도 소개하고 있는데 전설에 등장한 그 지역의 강명이 요수로 불어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여현은 고죽국 지역으로써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다. 이로써 “수경주”의 편찬자인 *도원도 지금의 난하를 요수로 인정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지금의 요하를 고조선. 위만조선시대의 요수로 인정하고 그 동족지역을 요동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요수라는 강명이 어느 시기에 지금의 요하로 이동해 왔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漢書(한서)”“지리지” 현토조를 보면 “한서”의 편찬자인 班固(반고) 자신의 주석으로 요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강은 중국의 문헌에 등장한 요수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그 위치나 흐름 방향으로 보아 지금의 요하이다. 다시말하면 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요수는 지금의 난하가 아니라 지금의 요하인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에 따라 서한시대와 그 이전의 요수는 지금의 요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것은 “漢書(한서)”는 東漢(동한)시대에 편찬 되었으므로 서한 말까지의 역사와 지리가 수록되어 있는데 서한 초로부터 말기 사이에는 서한의 동북지역의 영역에 크게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즉 서한 무제가 원봉3년(기원전 108)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여 서한의 영토가 지금의 요하에 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보아 요수는 고대 중국인들이 그들의 동북부 국경을 이루는 강에 대해서 부르던 명칭 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요하가 원래 요수가 아니었음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삼국유사 “順道肇麗(순도조려)”에는 “요수는 일명 鴨淥(압록)이었는데 지금은 安民江(안민강) 이라고 부른다”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로써 서한 무제 이후에 중국인들이 지금의 요하를 요수라고 부른 이후에도 고구려인들은 그것을 압록수라고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도 안민강 이라고 했음을 알게 된다. 고대 중국인들은 동북부 국경을 이루는 강을 遼水(요수)라고 하였고, 고대 한국인들은 그것을 鴨淥水(압록수)라고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로서 분명해진 것은 고조선. 위만조선시대의 요수는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였고, 지금의 요하가 아니었으며 당시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의 동북쪽 지역을 지칭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동은 고조선.위만조선의 영토였으므로 남하의 동쪽지역이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요수라는 명칭이 지금의 난하로부터 요하로 옮겨온 후에도 난하의 동북부유역을 여전히 요동이라고 불렀던 것이니 “삼국지” “魏書(위서)” “烏丸鮮卑東夷傳(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는데 중국의 삼국시대에 고구려는 서쪽 국경을 지금의 요하와 접하고 있었으므로 당시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 동북부 유역이었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管子(관자)를 보면 춘추 전국시대에 연국에도 요동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管子(관자)” “地數(지수)”편에는 管仲(관중)이 제국의 환공에게 말한 내용 가운데 楚國(초국)에는 汝漢(여한)의 金(금)이 있고 齊國(제국)에는 渠展(거전)의 鹽(염)이 있으며 燕國(연국)에는 遼東(요동)의 煮(자)가 있다고 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국에는 煮(자)의 생산지인 요동이 있었음을 알 수있다.



煮(자)는 짠물을 끓여서 만든 소금을 말하므로 연국의 요동은 해변지역 이었을 것이다. 제국의 환공과 관중은 춘추 초기(기원전 7세기초)의 인물이었으므로 연국의 요동은 춘추초기부터 있었다고 볼수 있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종합해 보면 요동은 고조선에 속한 부분이 있었고 연국에 속한 부분이 있었는데 연국에 속한 부분은 바다에 접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요동은 요수의 동북지역에 대한 명칭이었음은 앞에서 확인된바 있다. 따라서 연국. 句은주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요수의 동북부 지역에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요동을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하여는 연국의 요동이 요동의 어느 부분이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鹽鐵論(염철론)” “險固(험고)”편에는 연국의 국경에 대해서



大夫(대부)가 말하기를 ,,,,,, “연국은 碣石(갈석)에 의하여 막히었고 邪谷(사곡)에 의하여 끊겼으며 요수에 의하여 둘러싸였다.,,,,, 이것들은 나라를 굳게 지킬수 있게 하니 산천은 나라의 보배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에서 갈석과 사곡이 요수와 더불어 연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언급된 갈석은 秦(진).韓(한)시대에도 같은 명칭으로 불리어 졌던 곳으로 앞에서 언급된바 있는 갈석산이 있는 곳인데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에 있는 창려 갈석이었다는 것은 주지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으므로 연국 요동의 남부지역은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의 발해와 접한 하북성내의 일부로서 창려.갈석까지 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연국 요동의 북부 경계는 어디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呂氏春秋(여씨춘추)”에는 전국시대 각국의 요새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大汾(대분). 冥*.荊阮(형완), 方城(방성), *, 井경. 令차, 句注(구주), 巨庸(거용) 등을 들고있다. 이 가운데 영차와 거용은 연국의 국경에 있던 요새인데 동한의 고유는 영차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영차는 요서에 있는데 이곳은 바로 令支(영지)이다” 라고 하였다.



巨庸(거용)은 지금의 북경 북방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요서군조에 의하면 영지에는 고죽성이 있었으니 영지가 고죽국지역 이었음을 알수 있다. 고죽국의 중심지가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으로 지금의 노룡현 지역이었다고 하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杜佑(두우)는 通典(통전)에서 고죽성이 唐시대의 노룡현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난하가 濡水(유수)로도 불리어진 바 있음은 앞에서 말하였는데 “수경주” 유수조를 보면 “유수는 동남으로 흘러 노룡의 옛성의 동쪽을 지난다”고 하였고, 또 “동남으로 흘러 영지현 옛성의 동쪽을 지난다”고 기록 되어 있으니, 영지는 유수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영지는 전국시대에는 영차였고 유수는 난하의 옛 명칭 이었으므로 연국의 국경 요새였던 영차는 지금의 난하 서부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영차의 이북지역은 난하의 상류와 중류에 의해서 고조선과 연국 사이의 국경이 형성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난하 중하류의 서부연안에 위치했던 영차요새로부터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창려 갈석에 이르는 선을 경계로하여 난하와 그 사이가 연국의 요동이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요동의 대부분은 고조선에 속해 있었고 그 서남부 귀퉁이 일부가 연국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제기 될수 있다. 그것은 고죽국의 중심지가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이었다면 어찌해서 영지의 고죽성은 난하의 서부연안에 위치했었나 하는 점이다. 이점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영지의 고죽성은 방어용의 것으로써 원래 고죽국이 난하의 서부연안까지 진출해 있었으나 후에 연국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그 지역이 연국에 속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다음에 확인 되겠지만 이와 비슷한 예를 고조선과 서한 사이에서 볼수 있다. 전국시대에 연국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후 국경초소를 난하의 동부연안에 설치한바 있는데 그후 서한 초에 이르러 서한이 그것을 유지하기가 곤란하므로 국경 초소를 난하의 서부연안으로 옮겼던것이다. 다시말하면 고대에 있어서 국경 초소는 국경선을 이루는 강의 건너편에 설치된 예가 있었던것이다



또 한가지 해명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요녕성에서 출토된 연국의 청동기에 관한 것이다. 지금의 중국 요녕성 능원현 마창구에서는 “匽侯(언후)” 라는 명문이 있는 연국의 청동기가 출토된 바 있다. 이 청동기의 출토지점은 연국의 요동지역을 조금 벗어난 고조선의 요동에 속하는 곳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청동기의 출토에 근거하여 그 지역이 연국에 속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것은 당시에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했던 연인이 있었음을 알게하여 주는 것이다.



“史記(사기)” “燕召公世家(연소공세가)”에 의하면 전국시대말에 연국이 진국에 의하여 멸망될때 燕王(연왕) 喜(희)가 요동으로 도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전하는 “仕記(사기)” “秦始皇(진시황)本紀(본기)”의 기록에는 단순히 연왕 희가 요동으로 도망하여다고 전하지 않고 연왕 희가 동쪽의 요동을 회수하여 그곳의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연왕 희가 도망했던곳이 연국의 요동임을 분명하게 해준다. 만약 연왕 희가 고조선의 요동으로 도망했었다면 그곳을 회수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가 없을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원전 222년(연왕 희 33)에 진국이 요동을 치고 연왕 희를 붙잡았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연왕 희의 일행 가운데 일부가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을 하였고 앞의 “언후” 청동기는 그들이 남긴 유물일 것으로 생각된다. “史記(사기)” “조선열전”과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주석으로 실린 “魏略(위략)”에 의하면 위만은 옛 燕(연). 齊(제) 망명자들을 규합, 箕子國(기자국)의 準王(준왕)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했는데 이러한 연,제의 망명자들은 이미 전국시대에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상으로서 전국시대의 연국 요동은 확인되었는데 진시대로부터 서한초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속해 있었던 요동은 어느 지역이었는가? 이 시기에 중국에 속해 있었던 요동도 전국시대와 다름이 없었다. 진에 속해 있었던 요동의 위치는 “사기 진시황본기”에서 확인된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진제국의 2세황제가 동부의 군.현을 순행 하였는데 그때 이사. 거질. 덕 등의 대신들이 수행을 하게 되었다. 갈석산에 이르러 진시황제가 세웠던 비석의 한 귀퉁이에 2세황제를 수행했던 대신들이 그들의 이름을 기념으로 새겨넣고 돌아왔다. 이에 대해서 2세황제는 대신들의 이름만 새겨넣고 始皇帝(시황제)의 공덕을 새겨넣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그러자 대신들이 잘못을 빌고 다시 갈석산에 가서 시황제의 공덕비를 세우고 돌아 왔는데, 이에 대해서 “史記(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은 대신들이 요동에 다녀왔다고 적고있다. 이것은 진시대의 요동이 갈석산이 있는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갈석산은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의 창려 갈석에 있는 것으로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임을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이로써 진시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하 동쪽이 아니라 난하 동북쪽이었다는 것이 분명하여졌다



그러면 서한 초에 중국에 속해 있었던 요동은 어느 지역이었는가?









“漢書(한서)” “張陳王周傳(장진왕주전)”에는 서한 초에 주발이 연왕 노관의 반란을 평정한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 가운데 당시의 요동군 주변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 있다. 노관은 원래 서한 고조와 동향의 막역한 친구로써 서한왕조 개국공신 이었기 때문에 서한 고조 5년(기원전 195) 8월에 연왕에 봉해졌다. 그후 서한 왕실에 모반하였다가 고조 12년(기원전 195) 4월에 흉노로 도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주발은 이 반란을 평정하면서 노관을 추격하여 長城(장성)에까지 이르렀고 그 과정에서 상곡군 12현, 우북평 16현, 요동군 29현, 어양군 22현을 평정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서한은 고조때에 새로 장성을 축조하였거나 동북부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한 일이 없다. 오히려 흉노를 비롯한 주변의 이민족 들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주발이 노관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도달한 장성은 秦(진)장성을 뜻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평정된 요동군을 포함한 여러 군현은 진 장성의 안쪽에 있었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를 보면 요동군은 진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되어있다. 진제국의 요동은 앞에서 확인된바와 같이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으로 전국시대 연국의 요동과 동일한 지역이었는데 그 지역이 요동군 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한시대의 요동군도 진시대의 요동군과 동일한 지역이었을 것인데 그것은 장성의 위치를 확인하면 자연히 밝혀질 것이다.



“史記(사기)” “匈奴列傳(흉노열전)”에 의하면 전국시대 말기에 연국은 東胡(동호)를 포함한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朝陽(조양)으로부터 양평에까지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의 군을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淮南子(회남자)” “人間訓(인간훈)”에는 진제국이 서쪽으로는 유사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요수와 만나며 동쪽으로는 조선과 국경을 맺는 장성을 축조하였다고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에서 진 장성의 東端(동단)은 바로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史記(사기)” “蒙恬列傳(몽념열전)”에 의하면 진제국이 중국을 통일한후 몽념에 의하여 진 장성이 축조되었는데 그것은 임조에서 시작되어 요동에 이르렀던 것으로되어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된 전국시대 말기에 축조된 연 장성은 그 東端(동단)이 양평에 이르렀고 진 장성의 동단은 요동 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두 지점은 전연 다른 곳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같은 지역에 대한 다른 vtrl인가?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하여는 양평의 위치를 밝힐 필요가 있게 된다.




“사기”“흉노열전”의 연 장성 기록에 나오는 양평에 대해서 “史記索隱(사기색은)”은 주석하기를 삼국시대 吳國人(오국인)인 韋昭(위소)의 말을 인용하여 삼국시대의 요동군치소 라고 말하였을뿐 그 이상 양평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魏書(위서)” “地形志(지형지)” 영주 요동군조에는 北魏(북위)시대에 요동군에는 양평과 신창 두 개의 현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양평현에 대한 주석에는 양평현은 서한과 동한을 거쳐 晉(진)시대에 이르기 까지 변화가 없었다가 그후 일시 폐지된 일이 있으나 북위의 효명제 정광 년간(서기 520~525)에 다시 설치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양평의 위치는 북위시대까지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있다.




그러므로 서한시대부터 북위시대에 이르기 까지의 기록에서 양평의 위치를 확인해 낸다면 그곳이 바로 연 장성의 동단인 양평인 것이다. 그런데 “晉書(진서)” “地理志(지리지)” 平州條(평주조)를 보면 동한 말기에 공손도와 그의 아들 공손강 그리고 그의 손자 공손문예는 양평이 속해있는 요동에서 할거하였으며 魏國(위국)에서는 東夷校尉(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주하게 하고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5군으로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가 후에 다시 유주로 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양평을 “후한서”에서도 확인할수 있는데 同書(동서) “원소유표열전”에는 공손강에 대해서 그는 요동인이고 양평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양평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요동이 어느 지역 이었는지가 문제로 남는다. 지금의 요하 동쪽인가, 아니면 서한 초 이전에 요수로 불리어 졌던 지금의 난하 동쪽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은 후한서의 이현의 주석이 해명하여 준다




唐시대의 이현은 “후한서” “원소유표열전”에 보이는 공손강의 거주지였던 양평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양평은 현인데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 그 옛성이 지금의 평주 노령현 서남에 있다”고 하였다. 당시대의 평주 노령현은 동한시대의 비여현인데 비여현은 고죽성이 있었던 영지현과 접해 있었다. 따라서 비여현은 고죽국 지역이었던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연 장성의 동단인 양평이 있었던 요동은 지금의 요하 동쪽이 아니라 난하의 동쪽을 지칭한 것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 하였듯이 “사기”“흉노열전”에서 사마천은 진 장성의 동단이 요동에 이르렀다고 말한바 있는데 이 요동도 지금의 요하 동쪽을 말한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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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 21-02-10 10:34
   
지금의 난하 동쪽을 지칭한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후 진국에 의해서 축조된 진 장성은 전국시대부터 있었던 여러 장성을 보수.연결하여 완성 시킨 것으로 그 동단 부분은 연 장성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연 장성의 동단을 양평, 진 장성의 동단을 요동이라고 표현 한 것은 전연 다른 지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에 대한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동은 넓은 지역명으로 표현된 것이고 양평은 구체적인 지명인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는 “通典(통전)”의 기록이 뒷받침 하여 준다. 두우는 통전에서 한시대의 비여현에는 갈석산이 있었다고 말하고 진 장성은 이 갈석에서 시작 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전국시대로부터 서한시대 초까지 주욱에 속해 있었던 요동은 지금의 난하 하류와 난하 중하류 서부연안에 있었던 令疵塞(영자새)를 기점으로 하여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갈석산을 잇는 선 사이의 지역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지역에 요동군이 설치 되었으며 갈석산으로부터 영자새로 이어지는 고조선과의 국경선상에 燕(연) 長城(장성)과 秦(진)長城(장성)이 위치 했었다는 것이 된다. 이 중국의 요동은 遼陽(요양)이라고도 불리어졌다.

 

 

 

 

“漢書(한서)”“諸侯王表(제후왕표)”에는 요양에 대해서 顔師古(안사고)는 “요양은 요수의 陽(양)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요수의 양은 요수의 양지 즉 동쪽을 말하므로 당시의 요수였던 지금의 난하 동쪽을 말함을 알 수 있는데 당시의 요동 가운데 중국의 요동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 즉 당시의 요동이 대부분 고조선에 속해 있었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史記(사기)” “朝鮮(조선)列傳(열전)”에는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한 “史記(사기)集解(집해)”의 주석이 실려있는데 거기에는 삼국시대의 魏(위)國人(국인)인 張晏(장안)의 말을 인용하여

조선에는 濕水(습수), 列水(열수), 汕水(산수)가 있는데, 이 세강이 합하여 열수가 된다

아마도 樂浪(낙랑)의 朝鮮(조선)은 그 이름을 여기에서 취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이라는 국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그것은 이 논문의 논리 전개에 관계가 없으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장안의 말 가운데는 고조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들어잇다. 그것은 낙랑의 조선지역에는 열수가 있었고 그 열수에는 습수, 선수 세 지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에 확인되겠지만 낙랑지역에는 고조선과는 다른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으며 낙랑지역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그 지역에 설치되기 전에는 위만조선에 속해 있었고 그 전에는 고조선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습수, 열수, 선수의 세 지류가 있는 열수를 찾아낸다면 그 지역이 바로 고조선의 영역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고조선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있는 강들 가운데 이러한 명칭을 가진 세 지류를 가지고 있는 강은 지금의 난하밖에 없다.

 

 

지금의 난하가 濡水(유수)로도 불리어진 바 있음은 앞에서 말하였는데 “水經注(수경주)” “濡水(유수)”조를 보면, 유수가 흐르는 도중에 무열계를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武列水(무열수)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앞의 세 지류 가운데 하나인 열수는 무열수의 악칭인 것이다.

 

중국문헌에서 이와 같이 약칭이 사용된 예는 흔히 있는 것으로 청장수를 장수, 압록수를 압수로 표기한것은 그 예이다. 지금도 난하 지류에는 무열하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그리고 “수경주”에는 유수와 합류하는 강으로 濕餘水(습여수)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 약칭이 습수였다고 생각된다. 또 유수의 지류로써 龍鮮水(용선수)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용선수의 약칭이 鮮水(선수) 또는 汕水(산수)였다고 생각된다.

 

 

“사기색은”에 조선의 명칭에 대해서 언급 하면서 鮮(선)의 음은 仙(선)인데 汕水(산수)가 있었으므로 취하였다고 하였으니, 鮮(선)과 汕(산)은 통용되었음을 알게된다 . 이상의 고찰로써 습수,열수,산수가 합류하였던 열수는 유수로서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종래에는 열수가 한반도 북부에 있는 지금의 대동강이었던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 근거는 “한서”“지리지” 낙랑군 呑列縣(탄열현)조에 반고는 주석 하기를 “分黎山(분여산)에서 列水(열수)가 나오는데 서쪽으로 黏蟬(점선)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런데 대동강 유역에서 秥蟬平山君神祠碑(점선평산군신사비)가 발견되자 黏(점)과 秥(점)이 음이 통하는 것에 근거하여 이 지역이 바로 한사군의 낙랑군에 속했던 黏蟬縣(점선현)일 것으로 믿게 되었고 이 지역을 흐르는 대동강이 列水(열수)일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지적 하였듯이 “점선평산군신사비”는 그 건립 연대가 동한 이후가 되어 한사군 설치연대 보다 너무 늦고, 또 한사군의 낙랑군 점선현과는 달리 그 명칭의 첫 자가 秥(점)으로 되어있어 동일한 지명으로는 볼수 없고 음만 같은 다른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대동강이 열수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山海經(산해경)”에 의하면 열수의 동쪽에 열양이라는 지역이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어야 하는데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대동강의 동쪽에는 이러한 지역을 상정할 수 없게 된다.

 

 

앞에서 지금의 난하는 요수로 불리어졌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열수로도 불리어졌던 것으로, 이러한 다른 명칭이 난하의 다른 부분에 대한 명칭이었는지, 사람이나 시기에 따라 달리 불리어졌던 것인지, 또는 遼(요)와 列(열)이 고대에 음이 동일하여 통용되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고조선의 서쪽 경계 일부를 이루는 강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필자는 문헌의 기록을 통하여 고조선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가 아니고 wlma의 渤海(발해) 북쪽에 위치 하였으며 당시의 요동은 지금의 남하 동북쪽 지역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고조선에 속해 있었음을 고증하였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를 밑받침하는 지도가 있다.

 

그것은 13세기(南宋(남송) 말. 元(원)초)에 曾先之(증선지)가 그린 것으로 그의 “十九史略通考(십구사략통고)”에 실려있다. 이 지도에 의하면 조선(고조선 도는 위만조선)의 위치는 압록강 밖, 발해의 북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이 지도에 보이는 요수는 그 흐름 방향으로 보아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난하로 상정된다. 이 지도는 그려진 연대가 “삼국유사”가 저술되던 시기와 대체로 비슷한 것으로 문헌의 기록이 지니는 모호함을 해결하여 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고조선의 西邊(서변)과 東南邊(동남변)

 

앞에서 고조선의 서쪽 경계는 대체로 확인되었다. 즉 전국시대로부터 서한 초에 이르기까지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지금의 난하 상류와 중류에 의하여 그 북부가 형성 되었고, 그 남부는 난하의 중하류 서부연안에 있었던 영자새로부터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던 창려 갈석에 이르는 선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국경선상에 연 장성이 축조되었고 그것이 후에는 진 장성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고조선의 西邊(서변)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하여 그 지리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고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의 국경선의 변화와 그 주변 지리를 전하여 주는 “사기”“조선열전”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왕인 滿(만)은 옛날 燕國人(연국인)이었다.

 

연국이 전성기로부터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기 위하여 鄣塞(장새)를 축조하였다. 진국이 연국을 멸망시킴에 따라 그것이 遼東外오에 속하게 되었다. 서한이 흥기하였으나 그것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 故塞(고새)를 다시 수리 하였고 浿水(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국(서한의 侯國(후국))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이 서한에 반항하여 흉노로 들어가니 滿(만)도 망명하였는데 1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상투머리에 蠻夷(만이)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도주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다. 그는 진국의 옛 공지인 上下鄣(상하장)에 거주하면서 겨우 변방을 지키며 진번. 조선에 속해 있었는데 蠻夷(만이)및 옛 연국. 제국의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니 王險(왕험)에 도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진번. 조선. 장새. 요동외요. 요동고새. 패수. 상하장 등이 고조선의 서쪽 변경지대에 있었던 여러 명칭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하여 봄으로써 보다 더 구체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진번과 조선은 순서에 따르면 진번을 먼저 고찰 하여야 겠지만 편의상 조선의 위치부터 확인 하고저 한다. 종래에는 이 조선이 고조선을 의미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이 기록을 해석 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만약 이 조선이 고조선 이라면 전국시대의 연국이 전성기에 고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선은 고조선을 지칭하는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일개 지명이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하여는 “삼국지”“위서”“오환선비동이전”의 주석으로 실린 “魏略(위략)”의 내용을 보면 “연국이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그(고조선) 서방을 공략하여 2천여리의 땅을 얻고 滿.番汗(만.번한)까지로 경계를 삼으니 조선은 마침내 약화 되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앞의 “사기”“조선열전”에서 소개된 전국시대의 연국이 전성기에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는 내용을 좀더 자세히 전하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 “조선열전”에는 조선이 연국에게 공략당하여 복속된 것으로 나타나고 “위략”에는 조선이 그 서방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긴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연국에 복속된 조선과 서방의 땅 2천여 리를 빼앗긴 조선이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전자는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지명이고 후자는 고조선인 것이다.

 

 

 

“한서” “西 南夷兩*朝鮮傳(서남이양*조선전)”에서 안사고는 조선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전국시대에 연국이 공략하여 이곳을 얻었다”고 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 안사고가 말한 조선은 “사기”“조선열전”의 첫머리에 진번과 나란히 기록된 조선을 말하는 것으로 고조선 전 지역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조선이 전국시대에 완전히 연국에게 병합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시대적인 배경은 다르지만 이와 유사한 내용이 “鹽鐵論(염철론)”“誅秦(주진)”편에서도 발견 된다.

 

 

 

거기에는 “진국이 천하를 병합한 후에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도 고조선 전지역일 수가 없다. 고조선이 진국에게 멸망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조선을 어떻게 인식하여야 하는가?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조선이 언급된 사건을 면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한서”에서 안사고가 주석한 조선이 나오는 본문은 “사기”‘ 조선열전“을 옮겨온 것으로 전국시대의 연국이 전성기에 고조선을 침략했던 사실을 적은 것인데 이것은 ”위략“이 전하는 진개전쟁을 말하고 있음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진개는 고조선의 서부를 침략한 사실은 있지만 고조선을 복속시킨 일은 없다.

 

 

종래에는 진개가 서부 2천여 리를 침략하였다는 ”위략“의 기록에 따라 이 시기에 고조선의 서쪽 국경이 크게 후퇴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진개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크게 피해는 입었겠지만 오래지 않아 진개는 후퇴를 했었고 국경선은 크게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위략”에 의하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전쟁이 있은 후에 연국은 고조선과의 국경을 滿.番汗(만.번한)까지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만.번한의 위치가 확인되면 국경선의 변화를 알수 있게 된다.. 만.번한의 위치는 “한서”“지리지”와 “수경주”의 기록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에는 文.番汗(문.번한)의 두 縣名(현명)이 보인다.

 

 

이 문.번한은 “위략”에 보이는 만.번한 이라는데 이론이 없는데, 동한시대에 이르면 文縣(문현)은 汶縣(문현)으로 바뀐다. 文. 汶. 滿(문.문. 만)은 중국의 동남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吳音(오음)으로는 동일한 음이 된다. 古音(고음)이 주로 변경지역에서 오래 보존되어 내려온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때 이 세 문자는 고대에 동일한 음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文縣(문현)과 番汗縣(번한현)이 항상 나란히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연접되어 있었던 지역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번한현”의 반고 주석에는 그곳에 패수가 있다고 하였으며 응소의 주석에는 汗水(한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경주 유수조”를 보면 유수의 지류로 汗水(한수)가 있다. 그런데 유수는 지금의 난하의 옛 명칭이므로 결국 패수와 한수는 난하의 지류였을 것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만.번한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인 것이다.

 

 

 

반고와 응소는 패수와 한수의 흐르는 방향에 대해서 “塞(새) 밖으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요수의 흐르는 방향과는 다르다. 요수는 동쪽 또는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간다고 하였었다. 만약 고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서쪽 경계였던 요수와 패수가 동일하게 지금의 난하였다면 그 흐르는 방향이 왜 다르게 기록되었는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난하는 매우 긴 강 이다. 따라서 부분에 따라 흐르는 방향과 명칭이 다르게 되는데 요수의 경우는 그 하류 방향을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번한과 관계된 패수와 한수는 난하의 지류이므로 흐르는 방향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현재 난하의 지류로써 서남으로 흐르는 강은 瀑河(폭하), 靑龍河(청룡하) 등이 있다.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후 후퇴했음은 당시 연국의 정황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여진다..

 

 

"위략“의 기록을 ”사기 조선열전“과 연결시켜 보면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시기는 연국의 전성기 였음을 알게된다. 연국의 전성기는 召王(소왕) 때로서 기원전 311년부터 기원전 279년 사이였으니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이 기간에 있었을 것이다. 연국은 기원전 284년에 秦國(진국), 楚國(초국), 趙國(조국), 魏國(위국), 韓國(한국) 등과 연합하여 강국인 齊國(제국)을 치고 70여개의 성과 제국의 도읍인 臨淄(임치)까지 점령 하였었다.

 

이 시기에 진개가 箕子國(기자국)과 고조선을 친 것인데 당시의 연국의 국력으로 보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5년 후인 기원전 279년에는 연국의 소왕이 사망하고 혜왕이 즉위하였는데 혜왕은 용렬한 군주여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서 연군은 제군에게 크게 패하고 철수 하여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원전 273년에는 한국.위국.초국이 연합하여 연국을 정벌한 사태까지 일어났다 . 그후 연국은 멸망될 때까지 국력이 크게 쇠퇴되었다.

 

 

연국은 전성기를 맞은 것으로부터 불과 5년이 지난 후부터 국력이 크게 쇠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조선을 친 진개만이 그 지역을 계속해서 확보하고 있었을 것으로는 생각할수 없다. 진개도 어쩔수 없이 후퇴했었을 것이다. “위략”의 기록에 진개가 기자국과 고조선의 땅 2천여 리를 빼앗았다고 말하고 그 다음에 국경을 만.번한으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번한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이었다.

 

 

즉 진개의 침략후에도 고조선과 연국의 국경은 그전과 크게 차이가 없이 지금의 나하 유역이었던 것이니, 이것은 진개가 후퇴 하였음을 입증하여 준다. 진개가 침략하였다는 2천여 리는 실제의 거리라기보다는 많은 땅을 침략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어떻든 고조선은 진개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지 않아서 영토는 거의 회복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것은 전국시대에 연국만 일방적으로 고조선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도 연국을 침공한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鹽鐵論(염철론)”“備胡(비호)”편을 보면 고조선이 요동에있던 연국의 傲(오)(국경초소)를 넘어 연국의 동부지역을 탈취한 일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요동에 있었던 연국의 傲(오)는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요동외오를 지칭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동열전의 내용에 의하면 요동외오는 진개의 고조선 침략후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염철론 비호”편의 기록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후에 고조선도 연국을 침공한 사실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이로보아 고조선과 연국은 때때로 상호 침공이 있었으나 국경선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염철론”의 “伐功(벌공)”편에서는 “연국은 東胡(동호)를 물리치고 1천 리의 땅을 넓혔으며 요동을 지나 조선을 침공하였다. ”고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기 흉노열전”과 ‘위략“에 보이는 진개의 침략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만약 진개가 고조선의 영토를 침공하여 그것을 확보하고 있었다면 연국의 국경은 동쪽으로 크게 이동되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철론 험고“편에서는 연국의 국경은 碣石(갈석). 邪谷(사곡), 요수였다 고 밝히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진개의 전쟁이 일시적인 침략행위에 불과했고 다시 후퇴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국시대에 연국시대에 연국보다는 제국이 강대국이었는데 제국은 지금의 산동성지역이었다. 그런데 종래의 통설처럼 연국이 압록강을 고조선과의 국경으로 삼고있었다면 연국은 제국의 두 배 정도의 대국 이어야 한다. 이것은 전국시대의 상황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연국은 북쪽으로 蠻貊(만맥)의 압력을 받았고, 안으로는 제국. 진국과 국경을 함께하여 강국들 사이에 끼어 있던 변방의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로서 여러번 멸망할 위험을 겪었다“고 말하여 연국을 약소국으로만 표현하고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언급하지도 않았다는 점도 참고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전국시대에 진개의 고조선 침략으로 연국에 복속되었다는 진번과 조선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일 수밖에 없게된다. 그리고 “염철론 주진”편에서 언급된 진국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패수(지금의 난하)를 건너 토벌하였다는 조선도 그 기록이 옳다면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에 있어야 한다.

 

진국은 중국을 통일한후 도망한 연왕 희를 붙잡기 위하여 장수 왕분의 인솔 아래 요동을 친 일이 있으며, 장수 蒙恬(몽념)의 지휘아래 요동에 장성을 축조한바 있다. 그러나 고조선을 크게 침공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진국이 토멸하였다는 조선은 국경지역에 있었던 지명일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까지 소개된 조선에 관한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조선은 고조선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일개 지명이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 의하여 입증된다.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를 보면 낙랑군에 속해있던 25개의 현 가운데 조선현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응소는 주석하기를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서 지형지 평주 북평군조”를 보면 북평군에는 조선과 창신(신창?) 두 개의 현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현의 주석에는 “서한. 동한을 거쳐 진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낙랑군에 속해있다가 그후 폐지되었다.

 

 

북위의 연화 원년(서기 432)에 조선현의 거주민을 비여현으로 이주시키고 다시 설치하여 북평군에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현의 위치는 진시대까지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므로 진시대까지의 기록에서 조선현의 위치를 확인해 내면 그곳이 서한.동한 이래의 조선현의 위치가 된다.

 

 

그런데 “晉書(진서) 지리지 평주낙랑군조”를 보면 진시대의 낙랑군은 한시대에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누방, 駟望(사망) 등 6개의 현이 있었는데 조선현은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고, 수성형은 秦(진)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조선현의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수성현은 진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으므로 그 위치가 확인된다.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진 장성의 동단은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창려 갈석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수성현의 위치는 이 지역이 된다. 수성현이 창려 갈석 지역이었다면 같은 군에 속해있었던 조선현은 이 지역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고 수성현과 조선현을 포괄한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 되어야 한다.

 

 

晉(진)시대의 낙랑군은 서한시대에 설치되었고 조선현도 그 위치가 서한시대로부터 진시대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었으므로 서한의 무제가 설치했던 漢四郡(한사군)은 이 지역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임을 알게 된다.

 

 

“漢書(한서)”“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고전)” “賈捐傳(고연전)”에는 西漢(서한) 武帝(무제)의 업적을 말하면서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토와 낙랑으로써 郡(군)을 삼았다” 고 했는데 이 표현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갈석을 기준으로 하여 그 위치를 표현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된 北魏(북위) 延和(연화) 원년 (서기 432)에 移置(이치)된 조선현의 위치를 분명하게 해 주는 기록은 “隋書(수서)”“지리지 북평군조”에서 확인된다. 수시대의 북평군에는 노령현이 있었을 뿐인데 노령현에 대한 주석에는

옛날에 북평군을 설치하여 신창. 조선 두현을 統領(통령)하였는데 後齊(후제)(북제)시대에 이르러 조선현을 폐하고 신창현에 편입시켰으며 또 요서군을 폐하게 됨에 따라 해양현을 비여현에 편입시켜 통령하게 되었다.

 

 

 

개황 6년(서기 586)에는 또 비여현을 폐하여 신창에 편입시켰고, 개황 18년(서기 598)에는 노령현으로 개명 하였다. (중략) 長城(장성)이 있고 關官(관관)이 있고 臨渝宮(임유궁)이 있고 覆舟山(복주산)이 있고 갈석이 있고 玄水(현수), 盧水(노수), 溫水(온수), 閨水(규수), 龍鮮水(용선수), 巨梁水(거량수)가 있고 바다가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나오는 현수,노수,용선수 등은 난하의 지류이며 비여현,장성,갈석 등이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음은 앞에서 이미 확인된바 있다.

 

 

따라서 북위시대에 이치된 조선현도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는데 후에 노령현으로 편입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된 북위 연화 원년(서기 432)에 있었던 조선현의 비여현 지역에로의 이치는 조선현이 본래 있었던 곳으로부터 가까운 지역으로 이루어졌던 것임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분명하여진 것은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변경에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후에 그 지역에 조선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문헌에서 조선에 관한 기록이 나타날 경우에는 그것이 고조선 전체에 관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수 있다.

 

 

고조선지역 안에 국명과 동일한 지명이 존재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대 중국의 예가 참고로 제시 될수 있다. 중국 최초의 국가였던 商王國(상왕국)의통 경우 국명과동일한 商(상)이라는 명칭의 邑(읍)이 존재했음이 甲骨文(갑골문)과 문헌의 기록에서 확인되며, 西周王國(서주왕국)에서는 정치적 중심지를 周(주)라 불렀는데 도읍인 鎬京(호경)을 宗周(종주), 東京(동경)인 洛邑(낙읍)을 成周(성주)라고 불러 그 명칭이 국명과 동일했음은 주지된 사실이다.

 

 

조선이라는 지명이 어떤 연유로 붙여졌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으나 적어도 고대 중국인들에게 그 지역이 고조선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곳을 도읍지로 보기에는 너무 변방에 치우쳐 있고 고조선 세력이 집중되어 있던 곳으로 보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작다.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에는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으로 전해온다”고 하였는데, 명시대의 영평부에는 난주, 노령현, 천안현, 무녕현, 창려현, 낙정현 등이 속해 있었으며 난하 하류유역에 있었다. 이로보아 영평부에 있었던 조선성은 앞에서 언급된 조선에 있었던 성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아마도 고조선에서 국경지대에 방어용으로 축조했을 것인데 그 위치로 보아 令疵塞(영자새)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큰 성이 있었고 그러했기 때문에 변경의 고조선인들이 그곳에 비교적 욵비해서 살았을 것인데, 중국인들의 눈에 그 지역이 고조선의 상징으로 보여 조선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부연해 둘 것은 중국의 西周(서주) 초에 동북지역으로 이동을 했던 기자 일행이 난하의 서부연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진시대에 중국의 통일 세력에 밀려 난하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변경에 있었던 조선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기자국의 준왕은 위만에게 정권을 탈취당하였던 것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었다는 기록을 옛 문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이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던 지명이라면 “사기 조선열전”에 조선과 나란히 기록된 진번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이것은 동열전에 주석으로 실린 “사기집해”의 기록이 해결하여 준다. 거기에는 진번에 대해서 주석하여 “요동에 番汗縣(번한현)이 있다”고 하였다.

 

즉 요동의 번한현 지역이 진번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번한현은 지금의 난하 연안에 있었다. 따라서 진번은 난하 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로써 조선과 병기된 진번은 조선과 근접하여 난하의 동부연안에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지역의 명칭에 따라 한사군의 진번군이 설치되었을 것이다. 진번이 난하의 동부연안에 있었음은 다음에 국경선의 변화가 확인됨으로써 더욱 분명하여질 것이다.

 

 

 

 

앞에서 이미 인용하였듯이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전국시대에 연국이 진개전쟁의 결과로 난하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부 변경지대에 있었던 진번과 조선을 복속시키고 그 지역에 鄣塞(장새)를 설치하였는데 진시대에 이르러는 그것을 요동외오에 속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장새와 요동외오는 어떻게 해석 되어져야 하는가? 이 점은 “사기색은”이 밝혀준다.

 

 

 

“사기”“ 黥布列傳(경포열전)”에 나오는 “오”에 대해서 “사기색은”은 주석하기를 “오라고 하는 것은 변경에 있는 亭(정)과 塞(새)를 말한다. 오 로써 변방을 둘러싸고 항상 그것을 지킨다”고 하였다. 이것은 오와 鄣(장)을 매우 명료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오와 장은 다 같이 초소를 말하는데 특히 변경에 있는것을 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기 조선열전” 에 나오는 전국시대의 연국이 고조선과의 경계에 축조했던 鄣塞(장새)는 국경선에 있었던 초소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진국이 연국을 멸망시킴에 따라 장새가 속하게 된 요동외오는 요동에 있었던 외곽의 초소를 지칭한 것임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요동외오는 진개전쟁 후에 요동의 국경지대에 설치하였던 최전방 초소였는데 연국이 진국에 멸망 됨으로써 그것도 진국에 속하게 되었고 장새를 행적적으로 이 요동의 외오에 소속 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사기 조선열전”에서 연국이 조선을 친 후에 장새를 축조한 사실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위략”에서 진개전쟁후에 국경이 만.번한 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경선에 변화가 있었음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후 연국의 내부 사정의 악화로 인하여 퇴각을 함으로서 고조선과 연국의 국경은 그 전과 대체로 비슷하게 되었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고 다소 고조선 지역으로 이동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만.번한 지역에 설치된 장새라는 국경의 요새를 축조하여야만 했고 만.번한 이라는 새로운 지역이 국경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보아야한다.

그런데 장새나 요동외오가 모두 진개전쟁후에 설치된 국경의 초소 또는 요새라면 서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새와 오의 차이를 확인함으로서 분명하여질 것이다.

 

 

 

 

“漢書(한서)”“ 佞幸傳(영행전)”에서 안사고는 오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오는 새와같은 것이다. 동북에 있는 것을 새라 하고, 서남에 있는 것을 오라고 부른다. 새라는 명칭은 鄣塞(장새)에서 온 것이고, 오는 ”오遮(오차)“의 뜻을 취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새와 오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닌데 단지 그 위치하는 방향에 따라 달리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조선과 연국의 사이에 있었던 새와 오의 경우는 발해에서 가까운 지역, 즉 난하 하류 동부유역은 요동의 서남쪽이 되므로 이 지역에 있었던 국경 초소는 오라고 불리어졌고, 그보다 북쪽인 난하 상류나 중류 동부 유역에 있었던 초소는 새라고 불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추정에 불과한 것이므로 이 점을 좀더 명확히 하기 위하여는 당시에 위치가 분명한 새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위치가 분명하게 학인되는 연국의 새로는 令疵塞(영자새)가 있다. 이 영자새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난하 중하류의 서부연안에 있었다,

 

 

 

그리고 영자새를 서북쪽의 기점으로 하여 창려 갈석에 이르는 자연적 장벽을 이용한 長城(장성)을 경계로 하여 서쪽으로는 난하에 의하여 제한되고 동남쪽은 발해에 잇닿은 지역이 전국시대 연국의 요동이었음은 앞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러므로 영자새는 바로 연국 요동의 서북부에 있었으며 강에 의하여 형성된 국경선이 장성에 의하여 형성된 국경선과 만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대체로 이 지역이나 그 보다 북쪽에 있었던 국경의 초소가 새로 불리어 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장새는 영자새가 있었던 지역에서 약간 동쪽으로 이동된 지점에 있었을 것이고 요동외오는 그보다 남쪽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지점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한 초에 이르러 장새와 요동외오가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그것을 버리고 장새와 요동외오를 설치하기 이전의 국경 초소를 수리하여 다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수리해서 사용한 遼東故塞(요동고새)는 영자새와 장성에 있었던 초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되어 고조선과의 국경성에 있었던 서한의 초소는 난하의 서부연안과 장성에 위치하게 되었고 鄣塞(장새)가 있었던 난하의 동부연안과 요동외오가 있었던 장성의 동부지역은 다시 고조선과 기자국에 속하게 되었다. 위만이 서한으로부터 기자국으로 망명할 때 塞(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다고 한것은 이상과 같은 지리적 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 즉 국경 초소인 새가 패수의 서부연안에 있었음을 알게 하는데, 패수는 난하의 한 부분이거나 지류에 대한 명칭 이었다.

 

 

 

이 사실은 이미 소개된 “한서 지리지 요동군 번한현”의 반고의 주석에서 “그곳에 패수가있다” 고 한 기록과 번한현이 난하 동부연안에 있었던 사실을 연결시켜 보면 분명해진다.

 

서한 초에 국경으로 삼았던 패수가 전국시대의 진개전쟁 이전의 국경과 동일했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위만은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후 서한에 그 外臣(외신)이 될 것을 약속하고 서한으로부터 군사와 경제의 원조를 받아 주변을 소읍을 쳐서 항복을 받았으며 진번과 임둔도 복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것은 진번이다. 동열전의 첫머리에 의하면 전국시대의 연국은 전성기에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 시켰다. 이것은 “위략”이 전하는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말하는데 이때 이미 진번이 연국의 영역으로 소속된후 변화가 없었다면 서한시대에는 진번이 서한의 영역에 속해 있어야 하므로 서한의 지원을 받은 위만이 진번을 복속시켰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면 위만이 진번을 복속시켰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기록은 서한 초에 진번이 고조선 영역에 속해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징개의 고조선 침략으로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조선과 진번이 일시 연국에 복속된 일이 있었으나 그후 다시 고조선의 영역이 되었고 그 조선지역에는 진시대 이후 기자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한 초에 서한으로부터 기자국으로 망명한 위만이 준왕으로부터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하였으므로 위만조선도 초기에는 고조선의 서쪽 변경인 조선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만이 서한의 외신이 되는 것을 조건으로 서한으로부터 군사와 경제의 원조를 받아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주변의 소읍을 공략하여 항복을 받았고 고조선의 大邑(대읍)이었던 진번과 임둔도 복속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위만이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켰다는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은 위만조선이 바로 조선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부변경에서 출발하여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하면서 동쪽으로 영역을 확장한 정치세력이라는 점과 서한 초에 있어서의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전과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고조선과 서한 사이의 국경선이었던 패수는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전에는 고조선과 연국 사이의 국경선 이었던 지금의 난하나 그 지류였음을 알게 하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옛 문헌에 여러개의 패수가 등장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한서 지리지”에는 앞에서 언급된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 외에 낙랑군 패수현의 주석에도 패수가 보인다. 패수현의 패수에 대해서 반고는 주석 하기를 “서쪽으로 흘러 증지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이강은 위치하는 지역이 다르므로 번한현의 패수와는 분명히 다른 강인 것이다. 이 패수와 구별하기 위하여 번한현의 패수에는 음이 같은 沛(패)字(자)를 사용 했을 것으로 생각 된다.

 

 

 

이 강들과는 다른 패수가 “수경주”에서도 발견된다 . ‘수경주“의 본문을 보면 패수에 대해서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통과하여 동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 패수는 그 흐르는 방향이 번한현의 패수나 패수현의 패수와 다른 도 하나의 패수인 것이다. 그런데 酈道元(력도원)은 ”수경주“의 패수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본문에 패수가 동남쪽으로 흐른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며 패수는 서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그것은 력도원 자신의 주석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한사군의 낙랑군을 지금의 평양으로 인식하고 패수를 대동강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패수는 앞의 패수들과는 또 다른 강인 것이다.

 

 

“遼史(요사)” “지리지”에는 요양현의 패수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곳은 한시대의 패수현이었다고 적고 있으며 “盛京通志(성경통지)”에서는 이 강이 淤泥河(어니하, 진흙강의 뜻)라고 하였다. 이 강은 “한서 지리지” 낙랑군 패수현조에 보이는 패수와 동일한 강인 것처럼 기록되었지만 한시대의 영역은 지금의 요하까지 였으므로 이 지역이 한시대의 패수현이 될수 없으므로 또 다른 패수인 것이다. 이 외에도 정약용은 압록강을 고조선의 경계였던 패수로 본바있다.

 

 

 

이상과 같이 패수가 여러 강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그것이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었고 일반적으로 강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에서 연원하였기 때문이었다. 퉁구스 계통 종족의 언어를 보면 강을 만주어로는 畢拉(필납)(중국음으로 삘라), 쏠론(索倫 , 색륜)어로는 必拉(필납, 삘라), 오로촌어로는 必雅拉(필아납, 삐알라)라고하는데, 고대 한국어로는 펴라, 피라, 벌라 등이었다.
     
스리랑 21-02-10 10:37
   
강에 대한 이러한 언어의 어원이 같은 것임을 알게 되는데 고대에 고조선족이 살던 지역의 강들의 보통명사인 펴라, 피라, 벌라가 鄕札(향찰)식으로 기록됨으로써 후에 여러 강들이 浿水(패수)라는 동일한 명칭으로 나타나게 되어 혼란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 결론을 말하면,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던 패수는 지금의 난하나 그 지류였는데 후에 위만조선의 성장, 한사군의 설치 등에 의하여 한의 세력과 문화가 팽창됨에 따라 고조선 지역에 있었던 여러 강들이 패수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고찰한 과정에서 아직 충분하게 설명되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다. 그것은 서한시대에 이르러 국경의 초소가 진시대보다 후퇴된 지역에 설치되어야 했던 이유가 충분하게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진시대의 초소가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만 전하고 있는데,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있는 보충설명이 필요 할 것같다. 그것은 서한 초의 정국을 살펴보면 분명하여질 것이다.

기원전 202년에 서한의 통일전쟁은 종결을 보게 되지만 오랜 기간의 전쟁에 의한 피해로 경제와 사회는 크게 파괴되었다. “사기 평준서”와 “한서 식화지”의 기록에 따르면 조정을 출입하는 將相(장상)들이 마차를 사용하지 못하고 우차를 사용하는 형편이었고, 민중은 극도의 기근에 처하여 인구가 줄어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 권력은 아직 충분하게 강화되지 못하였고 지방에서 빈번히 반란이 일어났다. 기록에 나타난 것만 하더라도 기원전 202년부터 기원전 154년까지 약 반세기 동안에 무려 13차례의 반란을 겪게 되었다. 국내의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서한 정부는 우선 지방의 세력을 약회시키는 정책의 실천이 급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시대 이래 지방의 귀족세력과 각국의 왕실 후예및 토호들을 장안으로 대거 이주 시키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방의 봉지를 받고 候(후)가 된 공신들이 현지로 가지않고 장안에 거주하고 있는 현상의 개선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실천을 위하여 문제는 후들에게 봉지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내렸고 승상인 주발도 해임시켜 봉지로 가도록 하였다. 이와같이 국내정치가 안정되지 못하였던 서한 정권은 미처 주변의 이민족에 대해서 강력한 정책을 실행할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閩越(민월)은 절강 남부를 침략했고 南越(남월)은 내지 깊숙이까지 쳐들어왔으며, 북쪽의 흉노를 비롯한 이민족들이 변경지역을 소란시켰다.

그 가운데 특히 흉노는 세력이 강성하여 장성내에까지 진출하였고 기원전 200년의 백등산전쟁에서는 서한의 고조를 참패시킴으로써 서한정권으로 하여금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도록 만들었다. 당시에 흉노는 장안의 북방 7백리 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치었고 운중, 압문, 연, 대 등의 북방 지역을 거의 매년 쳐들어와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서한의 도읍인 장안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서한으로서는 장성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 할수 없는 형편이어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당면한 최대의 염원이었다. 이상과 같은 서한 초의 정황을 살펴볼 때 고조선과의 국경선에 있었던 초소를 경영하기에 비교적 유리한 난하의 서부연안과 장성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서한정권의 고심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조선과 서한의 국경선이 전국시대의 진개전쟁 이전과 동일해지게 되었는데 진개전쟁 이후에 설치되었던 鄣塞(장새)와 요동외오가 있었던 지역은 고조선과 기자국에 속하게 되었으나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空地(공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위만이 서한으로부터 기자국에 망명하여 거주하였던 진의 옛 공지 上(상).下(하)鄣(장)은 바로 장새가 있었던 지역인 것이다. 장새는 국경에 있었던 초소이므로 여러 곳에 설치되었을 것인데 그 가운데 上鄣(상장)과 下鄣(하장)이 있었던 공지에 위만이 거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 변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원래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상류와 중류 그리고 그 중하류 서부얀안에 있었던 令疵塞(영자새)를 기점으로 하여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창려 갈석에 이르는 선으로 형성 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전국시대인 기원전 311년부터 기원전 279년 사이에 일어난 진개의 침략전쟁 후에 국경선은 종전보다 약간 동쪽으로 이동하여 난하의 동부연안이 되었다. 그후 서한 초인 기원전 205년경에 이르러 국경선은 다시 진개전쟁 이전과 동일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고조선의 동남쪽 국경 즉 한반도에서의 경계를 확인할 단계에 이르렀다. 필자는 그것을 지금의 청천강으로 잡고자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후한서 동이열전 濊傳(예전)”에는 濊(예)및 沃沮(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고조선의 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동옥저전”에는 “서한 초에 연국의 망명인인 위만이 조선의 왕이었을 시기에 옥저는 모두 거기에 속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濊(예)는 원래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동부연안에 위치하였으나 위만조선의 성장과 서한 무제의 침략을 받은후 한반도 동북부 지역으로 이동하였을 것으로 필자는 믿고 있다. 그리고 옥저는 위만조선에 속했다고 했으니 본래 그 땅이 지금의 요하 서쪽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의 예.옥저 위치는 고조선의 동남 국경과는 관계가 없게 된다. 그러나 동한시대의 예와 고구려만은 그 영토가 한반도 북부에까지 미쳤으므로 고조선의 국경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4년(서기56)”조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남쪽으로는 薩水(살수) 즉 지금의 청천강에 일렀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기 37년까지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최리의 낙랑국이 있었는데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 북쪽 국경도 지금의 청천강까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최리의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멸망된 7년후에 동한의 광무제가 그 지역을 침략하여 살수 즉 지금의 청천강까지를 차지했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한의 광무제가 쉽게 그 지역을 차지할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 주민들의 낙랑국 재건운동과 영합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동한의 광무제가 차지했던 지금의 청천강 이남이 최리의 낙랑국지역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리의 낙랑국이 언제 건국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지역에 청천강 이북지역과는 다른 청치세력이 존재했었다는 점과 고구려는 본래 고조선땅이었다는 “후한서 동이열전 예전”의 기록을 연결시켜 볼때 고조선의 한반도 내에서의 남쪽 경계는 지금의 청천강까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문헌의 고찰을 통하여 얻어진 결론은 고고학 자료와도 일치되는데 그것은 明刀錢(명도전)의 출토상황이다.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에 으하면 명도전은 청천강 이북지역에서만 출토되고 그 이남에서는 출토 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여 주는가?

주지되어 있는 바와 같이 명도전은 전국시대의 연국 화폐였다. 그런데 연국과 국경을 접하고 교역을 가졌던 정치세력은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이 일찍이 춘추시대에 이미 중국지역과 교역을 하였음은 “管子(관자)”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관자” “揆度(규도)”편에는 호랑이 가죽이 고조선의 특산품으로 적혀있고 同書(동서) “輕重甲(경중갑)”편에는 제국의 환공이 四夷(4이)가 불복하는 것은 아마도 잘못된 정치가 천하에 퍼진 때문일 것이라고 걱정을 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묻자 관중이 대답하기를 아무리 먼 나라들이라도 그 나라 특산품을 높은 가격으로 교역해 주면 모두 절로 찾아오는 법이라고 말하고 發(발)과 조선의 특산물로서 호랑이 가죽과 털옷을 들고 있다. “관자”는 전국시대에 편찬된 책이라고 하지만 제국의 환공과 관중은 춘추 초기의 인물이므로 위내용은 춘추시대의 교역상황을 전하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고조선의 대중국 교역은 전국시대에 이르면 한층 활발하여졌을 것이다. 고조선의 뒤를 이어 중국지역과 국경을 접하였던 정치세력은 위만조선인데 위만조선의 건국시기는 서한 초가 되므로 위만조선은 명도전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명도전이 청천강 이북지역에서만 출토된다고하는 것은 전국시대의 연국과 교역을 했던 고조선족의 거주지가 청천강까지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5. 결 론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관한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 유교사상에 기초한 慕華思想(모화사상)의 영향으로 한국 고대사의 인식체계가 한반도 중심으로 위축되는 경향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등의 기록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본 결과 이 책의 저자들은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인식하지 않았고 한반도를 벗어난 당시의 요동 지역(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으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조선 초에 이르러 유교가 지도이념으로 채택되고 이에 따라 모화사상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한반도로 국한된 한국 고대사 인식체계가 학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보는 견해가 통설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학계의 추이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밖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면면히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지금의 평양지역에서 중국식의 유적이 발굴되어 그것이 한사군의 낙랑군유적으로 보고되자 고조선이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본 견해가 움직일수 없는 사실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평양지역에서 발견.발굴된 유적은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그것은 한사군의 낙랑군유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것은 동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의 배후를 친후 설치했던 군사지역의 유적인 것이다.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동한의 광무제가 그 지역을 치기 이전에 최리의 낙랑국이 있었기 때문에 그후에도 여전히 낙랑이라고 불리어졌다. 따라서 이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구별되어져야 한다

이상과 같이 고조선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을 것으로 본 한국 학계의 통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부정됨에 따라 종래의 선입견을 버리고 고조선의 위치를 확인해 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객관성을 지닌 중국의 고대 기록 특히 고조선과 위만조선이 있었던 당시와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을 검증하였다.

그 결과 고조선은 지금의 발해 북안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로부터 동쪽으로는 한반도 북부에 이르렀음이 확인 되었다. 종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조선의 서쪽 경계는 본래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상류.중류및 난하 중하류 서부연안에 있었던 영자새를 기점으로 하여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창려.갈석에 이르는 선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후에 이 선상에 연 장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국시대 연국의 전성기인 소왕 때(기원전 311~279)에 진개가 고조선의 서부 깊숙이 침략하였다가 다시 후퇴한 후 고조선과 연국 사이의 국경선은 다소 그 전보다 동쪽으로 이동하여 난하의 동부연안과 장성의 동쪽에 있게 되었다. 이 국경선은 중국의 진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후 서한이 건국되었는데 서한은 이 국경선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전의 국경선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따라서 진개의 고조선 침략이후에 설치되었던 난하 동부연안과 장성 동쪽의 국경초소를 폐기하고 난하서부연안과 장성상에 있었던 옛 초소를 다시 사용하게 되었고, 그 동쪽은 고조선에 속하게 되었다. 이 국경선은 고조선의 멸망시까지는 물론 위만조선시대에도 유지되었다. 한편 고조선의 한반도에서의 국경은 지금의 청천강이었음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평양지역은 고조선과 관계가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지금의 요녕성 지역에는 중국의 황하 유역과는 다른 독립된 청동기문화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 개시연대는 대략 기원전 23.4세기경으로서 황하유역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화인 二里頭文化(이리두문화)와 비슷하거나 앞선것이다. 이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9세기경에 이르러 琵琶形銅劍(비파형동검)으로 특징지어지는 청동기문화 단계에 접어들고 후에 細形銅劍(세형동검)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청동기문화는 요녕성의 서부에 있는 남산근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하북성의 동북부. 내몽고 동남부로부터 동쪽은 요녕성과 길림성을 거쳐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 청동기문화 영역은 필자에 의하여 확인된 고조선의 강역과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청동기문화의 주인공이 고조선족이었을 것으로 믿고있다.

이상과 같은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필자의 결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아 있을 수 있다. 한국사에 등장한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이 그 후에 등장한 여러 국가보다도 넓은 강역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중국의 예에서 찾을수 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했던 여러 나라는 원래 西周(서주)왕국의 封建(봉건)諸侯(제후)들이 독립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강역이 그전의 商王國(상왕국)이나 서주왕국 보다는 훨씬 협소하였다. 다시 말하면 읍제국가 또는 고대 동양적 봉건국가가 붕괴되고 그 결과 여러 개의 영역국가가 형성되면서 각국의 강역들이 협소해졌던 것이다. 이 점은 다음에 “고조선의 사회성격”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밝혀두어야 할 점은 청천강 이북지역은 고조선의 직접 통치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청천강 이남에는 韓(한, 일반적으로 三韓(삼한)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옳지않다)이 있었는데, 한은 고조선의 간접 통치지역 이었고 고조선의 문화권이었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고조선 영토는 청천강 이남의 한반도 전부가 포함 된다. 이 논문은 고조선의 국가구조와 연결시켜 그 직접 통치지역만을 다루었으나 청천강 이남의 간접 통치지역에 관하여는 필자의 韓(한)에 관한 연구논문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三. 고조선의 都邑(도읍) 遷移考(천이고)

1. 서 론

필자는 그간 중국의 고대 문헌을 주된 자료로 채용하여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및 사회성격을 규명하는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한 바 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역사학계에서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 상고사에 관한 인식체계가 크게 수정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이 필자에게는 재검토의 대상으로 등장된다. 이 글은 이러한 재검토 작업의 일환으로써 이미 발표되었거나 앞으로 발표될 필자의 한국 고대사에 관계된 논문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였고 그 도읍지는 대동강 유역에 있는 지금의 평야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그간의 한국 사학계에서 받아들인 통설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고조선의 위치를 발해의 北岸(북안)으로 보고 그 영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를 서쪽 경계로 하여 하북성 동북굽로부터 요녕성 전부와 길림성을 포함하고 한반도 북부에 있는 청천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본 바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고조선의 도읍지는 지금의 평양이 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새로 확인된 고조선의 영역내에서 그 도읍지를 찾을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一然(일연)은 “古記(고기)”를 인용하여 고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아사달 이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고조선은 세 번 천도하였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출발점으로 하여 중국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도읍지의 위치를 추적하게 될 것이다. 그 위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따른 천도의 사유까지도 밝히게 될 것인데, 그 결과로서 기자국과 고조선의 관계가 한층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며 기자국및 위만조선의 도읍지도 확인될 것이다.

2. 국내사료의 분석

史料(사료)의 분석과 비판은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檀君(단군). 箕子(기자). 衛滿(위만) 등 한국의 상고시대에 관계된 사료가 단편적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이고 보면, 그것을 한국사의 전체적인 맥락 위에서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고대사에 대한 인식의 방향에 크게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현존하는 사료의 각 구절을 단순히 해석. 나열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어떠한 맥락 위에서 언급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주지되어 있는 바와 같이 고조선에 관한 가장 오랜 한국의 기록은 “帝王韻紀(제왕운기)”와 “삼국유사”인데 그 내용이 疏略(소략)하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기록부터 살펴 보는것이 순서 일 것이다. 우선 “삼국유사”의 編次(편차)를 보면 卷(권) 1 의 “奇異(기이)”편에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항목을 설정하고 있는데, 고조선에는 王儉(왕검)조선이라고 주석하여 놓았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왕검조선을 고조선이라고 호칭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세칭 檀君朝鮮(단군조선)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삼국유사”의 편차에서 필자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古朝鮮(고조선)은 王儉朝鮮(왕검조선) 또는 檀君朝鮮(단군조선)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衛滿朝鮮(위만조선)을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흔히 고조선 속에 단군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까지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일연의 역사의식과는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토착의 정치세력 이었던 단군조선과 중국으로부터의 망명객에 의하여 수립된 위만조선, 읍제국가의 성격을 지녔던 단군조선과 영역국가의 성격을 지녔던 위만조선을 그 시대적 성격을 도외시 하고 고조선이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묶어서 처리하여도 좋을지는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로, 箕子(기자)에 대해서는 독립된 항목이 설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연이 한국사의 전개를 고조선(단군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기자가 한국사의 주류를 이루는 맥락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 일연이 고조선과 위만조선 사이에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했다면 기자조선이라는 항목이 고조선 다음에 설정되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혹자는 고조선편에 기자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들어 일연이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주장할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선 “삼국유사”에 실린 기자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古記(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이) 唐高(堯)(당고, 요)가 즉위한지 50년인 康寅(강인) [당고의 즉위 원년은 戊辰(무신)인즉 50년은 丁巳(정사)요 강인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에 평양성[지금의 西京(서경)]에 도읍하고 비로서 朝鮮(조선)이라 일컫고, 또 白岳山阿斯達(백악산아사달)에 옮기어 도읍하였는데 그곳을 또 弓(궁) [혹은 方字(방자)로 됨]忽山(궁홀산) 또는 今彌達(금미달)이라고도 하니 治國(치국)하기 1500년 이었다. 西周(서주)의 虎王(호왕)이 己卯(기묘)에 즉위하여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藏唐京(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가 숨어서 山神(산신)이 되니 壽(수)가 1천 9백 8세이었다 한다

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후에도 고조선은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기었을 뿐 계속해서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것이 고조선의 종말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기자가 봉해진 조선은 고조선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사를 받게 된다. 만일 기자가 고조선 전지역의 통치자로 군림 하였다면 고조선이 계속해서 존재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 고조선의 서쪽 변경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남하 연안에는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은 이 지역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점은 다음에 자세히 논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일연은 기자를 고조선의 뒤를 이은 세력으로 인식하지 않았으며 그가 “삼국유사”“고조선”편에서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것을 언급한 것은 고조선이 백악산아사달(궁홀산 또는 금미달)로부터 장당경으로 천도한 사유를 밝히기 위함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것과 고조선이 장당경으로 천도한 것은 서로 연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삼국유사”에서 보여준 일연의 기자에 대한 인식은 “제왕운기”와 “고려사”및 조선시대의 문헌들이 보여주는 기자에 대한 인식태도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제왕운기”는 단군이 중국의 商王國(상왕국) 虎丁(호정,武丁(무정))8년 乙未(을미)에 아사달에 들어가 神(신)이 된 후에 기자가 중국의 西周(서주)왕국 무왕 원년 봄에 그 곳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자로부터 41대 후손인 準(준)에 이르러 서한의 장수였던 위만에게 정권을 탈취당하였으며 다시 위만의 손자인 右渠(우거)에 이르러 서한의 토벌을 받아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에 서한의 4군이 설치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제왕운기”의 저자인 이승휴는 後朝鮮(후조선)의 시조를 기자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조선인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기자조선이 존재했던 것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제왕운기”의 기록 가운데는 우선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단군이 상왕국 무정 때에 아사달로 들어가 신이 되었고, 그 후 서주왕국 무왕 때에 기자가 그곳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면 고조선 지역에는 상당히 긴 정치적 공백기가 존재하게 된다. 무정은 상왕국 22대 왕이었고, 그후 9대를 지나 30대 帝辛(제신)때에 이르러 서주왕국의 무왕에게 상왕국이 멸망되었다. 따라서 단군이 신이 되었다는 상왕국의 무정8년 으로부터 기자가 그 곳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서주왕국의 무왕 원년까지는 220여 년이라는 긴 기간이 되는데 이 기간 동안 고조선 지역은 정치적 공백기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왕운기”의 기록 가운데는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저자의 진의를 추출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단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조선의 뒤를 이어 같은 지역에 기자조선이 존재했던 것으로 이승휴는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숙종7년에,

禮部(예부)가 上奏(상주)하기를 우리나라가 예의로써 교화된 것은 기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기자가) 祀典(사전)에 실려있지 않으니 그 墳塋(분영)을 구하여 祠堂(사당)을 세우고서 제사를 지내자고 하므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고 한다. 그 후 충숙왕 12년에는 평양부에 명령을 내려 箕子祠(기자사)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恭愍王(공민왕) 5년에는 기자사를 수리하고 시기에 맞추어 제사지내도록 평양부에 명령을 내렸는데, 같은 명령을 공민왕 20년에도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고려사 지리지”에는

평양부는 본래 세 조선의 옛 도읍으로서 唐堯(당요) 戊辰年(무진년)에 神人(신인)이 檀木(단목)의 아래로 내려오니 國人(국인)들이 그를 받들어 군주로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호를 단군이라 하니 이것이 前朝鮮이요 서주왕국의 무왕이 상왕국을 멸망시키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이것이 後조선이다. 그후 41대 후손인 準(준)때에 연인 위만이 망명하여 와서 1천여명의 무리를 모아 준의 땅을 공탈하고 왕검(험)성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사” “樂志(낙지)”에는 기자를 흠모한 기록들이 보인다.

“제왕운기”와 “고려사”에 나타난 단군 기자 위만에 대한 인식은 같은 맥락위에 있음을 알수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면 주자학이 성행함에 따라 慕華思想(모화사상)과 더불어 기자숭배도 날로 증진되었다고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제왕운기”의 체재를 잠간 살표볼 필요가 있다. “제왕운기”는 상.하 두 권으로 되어있는데 상권에서는 중국 역대 제왕의 흥망을 盤古(반고)로부터 金時代(금시대)까지 七言(칠언)으로 서술하였고, 하권에서는 한국의 사적을 단군에서 발해까지를 칠언으로, 고려 시조로부터 충렬왕까지는 五言(오언)으로 기술하였다. 그런데 상권에서 중국의 역사를 먼저 서술한 다음 하권에서 한국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승휴도 모화사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삼국유사”가 편찬된 고려 중기 이래 구한말.일제시대에 근대사학이 성립될

때까지 한국의 編史活動(편사활동)은 유교사관에 바탕을 둔 것이 주류를 이루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의 유교문화권에 편입되고 영토가 반도로 축소된 후대의 역사경험은 자연히 고대의 역사경험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제 한국사는 유교문화권이라는 시야에서 유교라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가지고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기자가 주목되고 중세적 세계질서로서 事大關係(사대관계0가 존중되며 그 결과 사대관계가 형성된 이후의 現疆土(현강토)인 한반도를 失地(실지)인 만주보다 더 중시하는 새로운 한국사 인식의 성립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교적 한국사 인식은 고대적 한국사인식을 극복하고 성립된 것으로서 보다 현실성과 합리성을 띤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성과 합리성이라는 것은 사관의 측면에서 그러한 것이지 한국사 인식 자체가 史實的(사실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제왕운기”와 “고려사”는 이러한 유교사관의 범주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제왕운기”와 “고려사”가 유교사관의 한국사 인식체계 위에서 성립되었다고하여 필자는 거기에 나타난 기자에 대한 인식을 오류로 단정할 의사는 없다. 그것은 철저한 사료분석과 비판을 통해서 결론지어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단지 유교사관에 의한 한국사 인식태도는 모화사상의 결과로서 기자를 부각시키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참고로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로서 필자는 한국 상고사 인식에 두 개의 다른 견해가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하나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것으로 고조선의 뒤를 이는 정치세력은 위만조선이며 고조선과 위만조선 사이에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한국사 인식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제왕운기”와 “고려사”및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 보이는 것으로 한국 상고사의 전개를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순서로 보는 인식체계이다. 이 가운데 하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현존하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기자조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견해가 우세하므로 이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사료의 분석과 비핀에 의하여 확인되는 것이지 후세 학자들의 지지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불교 승려였기 때문에 한국 상고사를 유교사관에 바탕을 둔 유교문화권이라는 세계질서 속에서 인식하지 않고 옛 기록을 충실하게 전했을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즉 날로 팽배해 가는 유교사관과 모화사상의 결과로 중국으로부터의 이주민인 기자가 지나치게 부각되자 일연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삭제 또는 격하시켰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같은 중국으로부터의 이주민인 위만에 의하여 성립된 정권인 위만조선에 대해서 일연이 성실하게 기재해 놓은 것을 보면 그러한 의문은 기우에 불과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든 한국 사학계는 한국 상고사에 관한 한국내의 사료로서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보다 연대가 더 올라가는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이 문헌들은 위만조선의 성립으로부터 계산하더라도 1400여 년이 지난 후의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문헌에 나타난 한국 상고사에 관한 기록은 그 자체만 가지고는 어느 쪽에도 절대적 또는 상대적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문헌들의 내용과 비교 검토할 수있는 다른 자료를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것은 옛 기록을 비교적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중국의 문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문헌에 나타난 고조선.기자.위만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3. 中國史料(중국사료)의 檢討(검토)

중국사와 한국사에 대한 비교적 폭넓은 역사인식의 맥락 위에서 한국 상고사에 관한 기록을 취할 수있는 것은 “史記(사기)”일 것이다. “사기”보다 오랜 중국문헌에 고조선이나 기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각각 어떤 특정한 사건만을 단편적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에 고조선과 기자의 관계를 전체적인 한국사 전개의 맥락 위에서 인식하기 위한 자료로는 적합하지 않다. “사기”에 실려있는 한국사에 관계된 내용을 중국사와 한국사의 전체적인 맥락 위에서 인식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하여 여기서 잠깐 “사기”의 체재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사기”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本紀(본기), 表(표), 書(서), 世家(세가), 列傳(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기,세가,열전이 주된 골격을 이룬다. 본기는 중국의 역대 최고 통치자에 관한 기록이고, 세가는 제후.열국에 관한 사실을 싣고 있으며 각 시대에 활약했던 인물들에 대한 전기이다. “사기”의 저자인 司馬遷(사마천)은 말하기를

28개의 星座(성좌)는 北極星(북극성)을 돌고 30개의 바퀴살은 한 개의 바퀴통을 향하고 있어 그 운행이 무궁하다. (천자를) 보필했던 * 肱(*굉)의 신하들을 배열하여 충신으로 道(도)를 행함으로써 主上(주상)을 받들었던 내용을 모아 30世家(세가)를 지었다. 義(의)를 돕고 재기가 높이 뛰어나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세운 사람을 모아 70列傳(열전)을 지었다.

고 하였다.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사기”는 중국의 최고 통치자였던 천자를 정점으로 한 천하사상, 다시 말하면 중국적 세계질서의 사상적 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적 세계질서에 포함되지 않거나 관계가 없다고 인식되었던 내용은 싣지를 않고 있다.

“사기”에 한국 상고시대에 관계된 내용을 싣고 있는 것으로 “朝鮮列傳(조선열전)”이 있다. 그 첫 부분을 보면,

조선왕 滿(만)은 본래 燕(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는 그 전성기에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기 위하여 鄣塞(장새)를 축조하였다......[西漢(서한)의 侯王(후왕)인] 燕王(연왕) 盧綰(노관)이 서한을 배반하고 匈奴(흉노)에 들어가니 滿(만)도 망명을 하였는데 ....(처음에는) 겨우 변방을 지키며 진번과 조선에 속해 있었으나 蠻夷(만이)및 옛 燕(연).齊(제)의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니 王險(왕험)에 도읍 하였다.

라고 하고 계속하여 위만조선과 서한의 관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그 첫머리에 위만조선이 성립되기 이전에 중국의 전국시대 연국.진제국.서한제국과 고조선 사이에 있었던 국경문제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였을 뿐 , 전편이 위만조선에 관해서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만약 위만조선 이전에 기자조선이 존재했다면 어찌해서 “사기”조선열전에는 기자조선에 대해서 한마디의 언급도 없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전국시대의 연국이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고 했는데 이 시기에 고조선은 연국에 복속된 일이 없으므로 이 기록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기 조선열전”에서 고조선을 깊이 언급하지 않은 것은 매우 당연하다. “사기”는 중국의 역사서이며 그 체제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의 천자를 정점으로 한 천하사상 즉 중국적 세계질서의 사상적 체계가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이민족의 토착 정치세력으로서 중국의 세계질서 속에 포함 되지 않았던 고조선에 대해서는 깊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자의 경우는 다르다. 기자는 상왕실의 후예로서 상왕국 멸망시에 있었던 세 사람의 어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서주왕국의 무왕에게 弘範(홍범)을 가르쳤다고 전해오며 중국인들에게 추앙을 받아오고 있다.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은 夏族(하족). 商族(상족). 周族(주족)이 모두 黃帝(황제)의 후손으로서 중국민족의 주체인 華夏族(화하족)의 근간을 이루었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상족의 후예인 기자가 고조선 전체의 통치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므로 그는 마땅히 긍지를 가지고 기자에 관해서 “조선열전”에 언급했어야만 할 것이다.

사마천은 기우너전 145년경에 출생하였고 위만이 기자국의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한 것은 기우너전 194년경이 되므로 기자국이 멸망한 것은 사마천이 출생하기 불과 50여년 전의 일이다. 사마천은 史觀(사관)으로서 太史令(태사령)의 직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폭넓은 사료를 섭렵하였고 또 태사령이었던 그의 아버지 사마담이 중국의 통사를 집필하기 위하여 모아 두었던 사료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기자국의 전말에 관해서는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사마천이 “조선열전”에서 기자에 대해서 전연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기자가 고조선 지역 전체의 통치자가 된 사실이 없음을 말 하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사마천은 서한으로부터 망명하여 고조선 지역에 통치세력을 구축한 위만의 시대를 기점으로 하여 고조선 지역을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조선열전”에서는 기자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면서도 “宋微子世家(송미자세가)”에서 미자의 宋國(송국)에 대해서 서술하면서 기자에 대해서도 곁들여서 언급을 하고 있다. “송미자세가”는 상왕국을 멸망시킨 서주왕국의 무왕이 상왕국의 마지막 왕인 帝幸(제행)의 庶兄(서형)인 미자 啓(계)를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 지역에 봉하여 상족의 유민을 다스리도록 했던 宋(송)국에 관한 기록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사기”의 체제 가운데 世家(세가)는 기본적으로 중국내에서 천자의 주변세력을 형성하여 중국사 전개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 특히 제후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기자가 “송미자세가”에서 언급되었다는 것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그것은 기자가 중국내에서 활약했던 제후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겠지만 기자세가라는 독립된 편명으로 설정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리 큰 세력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송미자세가”의 기자에 관한 기록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서주왕국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이 “조선열전‘에서 기자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기자가 봉해졌던 조선과 ”조선열전“의 조선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후에도 계속해서 고조선이 존재했음을 말한바 있고, 사마천은 ”사기 조선열전“에서 전국시대의 연국이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고 했으나 고조선은 연국의 진개로부터 서방을 침략받은 일이 있을뿐 복속된 사실은 없다. 따라서 고조선과는 다른 조선이 존재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조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한국 상고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관건이 된다.

“한서”“서남이양*조선전”의 주석에서 안사고는 조선에 대해서 말하기를 “전국시대 연국이 공략하여 이 곳을 얻었다”고 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 안사고가 말한 조선은 “사기 조선열전”에서 전국시대 연국이 공략하여 복속시켰다는 진번과 병칭된 조선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대적인 배경은 다르지만 이와 유사한 내용이 “염철론”‘주진“편에서도 보인다. 거기에는 ”진국이 천하를 병합한 후에 동쪽으로 패수(지금의 난하)를 건너 조선을 토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도 고조선의 전지역일 수가 없다. 고조선이 진국에게 멸망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국시대 연국이 전성기에 장수 진개를 시켜 고조선의 서부 깊숙이 침공한 일이 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진개는 후퇴를 했었고 단지 국경의 초소가 당시의 국경선이었던 중국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지금의 난하 서부연안으로부터 동부연안으로 옮겨지는 변화를 보였었다. 따라서 “사기 조선열전”이나 “한서 서남이양*조선전”의 안사고 주석과 같이 전국시대에 연국이 복속 또는 병합한 지역으로서 조선이 있었다면 그곳은 난하의 동부연안 어느 지역일 수밖에 없게 된다. “염철론 주진”편에서 언급된 진국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패수를 건너 토멸하였다는 조선도 그 기록이 옳다면 난하의 동부연안에 있어야 한다. 진국은 중국을 통일한후 도망한 연왕 희를 붙잡기 위하여 장수 왕분의 인솔 아래 요동을 친 일이 있으며, 장수 몽념의 지휘 아래 요동에 장성을 축조한바 있다. 그러나 고조선을 크게 침공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당시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으로 고조선에 속한 부분과 연국에 속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요동의 분계선상에 장성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국이 토멸하였다는 조선은 국경지역에 있었던 지명일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조선에 관한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조선은 고조선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조선이 하나의 지명이었다고 하는 것은 훋3o의 기록들에 의하여 입증된다.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를 보면 낙랑군에 속해있던 25개의 현 가운데 조선현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응소는 주석 하기를,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다.

라고 하였다. 서한시대의 낙랑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 한국 사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이지만 필자는 그곳이 난하 하류의 동부지역일 것으로 믿고있다. “위서 지형지 평주 북평군조”를 보면 북평군에는 조선과 신칭 두 개의 현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현의 주석에는

서한.동한을 거쳐 진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낙랑군에 속해 있다가 그후 폐지 되었다. 북위의 연화 원년 (서기 432년)에 조선현의 거주민을 비여현으로 이주 시키고 다시 설치하여 북평군에 속하게 했다.

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현의 위치는 서한시대부터 진시대까지는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서 지리지 평주 낙랑군조”를 보면 진시대의 낙랑군은 한시대에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조선.둔유.혼미.수성.누방.*망 등 6개의 현이 있었는데 ,조선현은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고 수성현은 진제국의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주석 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진시대의 조선현은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라고 하였으므로 그 곳이 서한시대의 조선현과 동일한 지역이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사기집해”에 의하면 중국의 삼국시대 위국인인 장안은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열수.선수가 있는데 이 세강이 합하여 열수가 된다. 아마도 낙랑의 조선은 그 이름을 여기에서 취하였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 가부를 논하는 것을 보류 하기로 한다. 그런데 위 내용에서 확인되는 것은 삼국시대의 낙랑군 조선현 지역에 습수.열수.선수라는 세 지류가 있는 열수라는 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된 바와같이 낙랑군 조선현은 서한시대로부터 동한.삼국시대를 거쳐 진시대까지는 그 위치가 변화되지 않았었으므로 위의 세 지류가 있는 열수를 확인해 낸다면 그 지역이 낙랑군의 조선현으로 기자가 거주했던 곳이 되는 것이다. 중국의 동북부 지역에서 그러한 명칭의 세 지류를 가지고 있는 강은 지금의 중국의 동북부에 있는 난하밖에 없다. 지금의 난하는 류수라고도 불리어졌는데 “수경주 류수조”를 보면 류수에는 습여수.무열수.용선수의 세 지류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앞에서 인용된 장안이 말한 습수는 습여수, 열수는 무열수, 汕水(산수)는 용선수의 약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산수가 용선수의 약칭이었음은 “사기색은”에 조선의 명칭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鮮(선)의 음은 仙(선)인데 汕水(산수)가 있었으므로 취하였다.고 하였으니, 鮮(선)과 汕(산)은 통용되었으므로 용선수의 약칭이 汕水(산수)였을 것임을 알수 있다. 중국문헌에서 이와 같은 약칭이 사용된 예는 흔이 있는 것으로 淸漳水(청장수)를 漳水(장수), 鴨綠水(압록수)를 鴨水(압수)로 표기한 것도 그 한 예이다. 따라서 습수,열수,산수의 세 지류를 가지고 있던 열수는 지금의 난하 본류나 그 지류였음을 알 수 있으니 결국 서한시대부터 진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낙랑군 조선현 위치는 지금의 난하 유역이었다는 것이 된다.

조선현의 위치가 지금의 난하 유역이었음은 수성현의 위치가 확인됨으로써 더욱 분명하여진다. 앞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晉書(진서” “지리지”에는 진시대의 낙랑군에는 조선현.수성현 등 6개의 현이 있었는데 수성현은 秦(진)제국의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는 진제국의 장성은 진제국과 고조선의 국경선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그 동단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창려현 갈석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고증한 바 있다. 그러므로 서한시대로부터 진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수성현은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창려현 갈석지역이었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를 “사기” “夏本紀(하본기)”에 주석으로 실린 “사기색은”과 두우에 의하여 편찬된 “通典(통전)”의 내용이 뒷받침하여 준다.

“史記索隱(사기색은)”에는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의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었는데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라고 하였고, “通典(통전)”에는 당시의 용선현에 대해서 주석하면서,

한시대의 비여현 지역으로 갈석산이 있었는데 바닷가에 우뚝 솟아 서 있으므로 그러한 명칭을 얻었다. 晉(진)시대의 “태강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秦(진)장성의 축조가 시작된 곳이다.

라고 하였다. 갈석산이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 창려현에 있고, 한시대의 비여현 위치가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이었음은 이론이 없다. 결국 조선현가 수성현은 지금이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서로 근접하여 위치하였고 이두 현을 포괄한 난하 중류와 하류 동부연안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성현에 속해 있었던 갈석산은 지금의 발해 연안에 있으므로 수성현은 발해와 접해 있었고 수성현의 북쪽에 조선현이 위치했었을 것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조선현은 난하의 중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漢書(한서)” “嚴朱吾丘圭父徐嚴終王賈傳(엄주오구규부서엄종왕가전)” “賈捐傳(가연전)”에는 서한 무제의 업적을 말하면서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玄菟(현토)와 낙랑으로써 군을 삼았다

고 했는데 이 기록은 매우 정확한 것으로 한사군(후에 현토,낙랑 두 군이 되었음)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면 중국의 하북성 동북부 난하 하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을 기준으로 해서 그 위치를 말할 리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魏書(위서)”“지리지” 평주 북평군 조선현의 주석을 인용한바 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조선현은 北魏(북위) 연화 원년(서기 432)에 비여현 지역으로 이치되었다. 그런데 “隨書(수서)” 지리지에는 이치된 후의 조선현 위치를 분명하게 해주는 기록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수시대의 북평군에는 노령현이 있었을 뿐인데 노령현의 주석에,

옛날에 북평군을 설치하여 신창, 조선 두 현을 통령하였는데 後齊(北齊)(후제,북제)시대에 이르러 조선현을 폐하고 신창현에 편입시켰으며 또 요서군을 폐하게 됨에 따라 해양현을 비여현에 편입시켜 통령하게 되었다. 개황6년(서기 586)에는 비여현을 폐지하여 신창에 편입시켰고 개황18년(서기 598)에는 노령현으로 개명하였다..... 장성이 있고 關官(관관)이 있고 임류관이 있고 복주산이 있고 갈석이 있고 현수,노수,온수,윤수,용선수,거량수가 있고 바다가 있다.

고 하였다. 이 기록은 이치된 조선현 지역에 비여현. 장성. 갈석. 용선수 등이 있었으며 그 지역이 후에 노령현으로 편입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현수,노수,용선수는 난하의 지류이며 비여현. 장성. 갈석은 모두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에 있었다. 따라서 북위시대에 이치된 조선현도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분명하여진 것은 난하의 중하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후에 그 지역이 서한에 복속된 후 그 곳에 조선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상왕국에서 국명과 동일한 商(상)이라는 명칭의 읍이 있었고, 서주왕국에도 국명과 동일한 周(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宗周(종주)와 成周(성주)가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고조선에도 국명과 같은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낙랑군에 속해있던 25개 현 가운데 하나였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영역에 설치되었던 낙랑.진번.임둔의 3군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조선의 크기는 위만조선 전체 면적의 75분의 1 정도의 좁은 지역이었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조선이라는 지명이 어떤 연유로 붙혀졌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으나 중국인들에게 그 지역이 고조선의 상징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으로 전해온다”고 하였는데, 명시대의 영평부에는 난주,노령현,천안현,무녕현,창려현,낙정현 등이 속해 있었으며 난하 하류유역에 있었다. 이로 보아 명시대의 영평부에 있었던 조선성은 앞에서 언급된 여러 문헌에 나타난 조선 지역에 있었던 성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중국지역과의 국경지대에 있었으므로 대중국 방어용이었을 것인데 그 곳에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필자는 기자가 이주했던 곳은 고조선의 서부 국경지대에 있었던 조선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게 되면 일연의 “삼국유사”와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고조선과 기자에 관한 내용이 무리없이 풀려 나가게 되고 그 기록이 정확한 것임도 알게 된다.

4. 遷都(천도)의 事由(사유)

지금까지 필자는 고조선의 천도 상황을 살펴보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그것과 관계된 사료를 검토.분석하여 보았다. 이제 고조선의 천도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삼국유사”의 기록을 다시 한번 보면,

“魏書(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檀君王儉(단군왕검)이 있어 도읍을 阿斯達(아사달)[經(경)에는 無葉山(무엽산)이라 하였고 또한 白岳(백악)이라고도 하는데 白州(백주)라는 땅에 있다. 또한 개성의 동쪽에 있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白岳宮(백악궁)이 그것이다]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하여 국호를 朝鮮(조선)이라 하니 高(고)[堯(요)]와 동시라 하였다. “古記(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이) 唐高(당고)[堯(요)]가 즉위한지 50년인 강인(당고의 즉위 원년은 무진인즉 50년은 정사요 강인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에 평양성(지금의 西京(서경))에 도읍하고 비로서 조선이라 일컫고,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에 옮기었는데 그곳을 또 弓(궁)[혹은 方(방)字(자)로도 됨]忽山(홀산) 또는 今彌達(금미달)이라고도 하니 治國(치국)하기 1500년 이었다. 西周(서주)의 虎王(호왕)이 기묘에 즉위하여 箕子(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藏唐京(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가 숨어서 山神(산신)이 되니 壽(수)가 1908세 이었다 한다.

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일연은 “위서”를 인용하여 고조선의 檀(壇)君王儉(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고 나라를 개창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하고, 또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서 조선이라고 일컬었다고 했으니, 여기에 따른다면 그전에는 조선족이 조선이 아닌 다른 명칭으로 불리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일연은 “고기”를 인용하여 고조선이 백악산아사달(궁홀산 또는 금미달). 장당경. 아사달 등으로 천도했음을 전하고 있다. 일연이 인용한 “위서”와 “고기”는 현존하지 않으므로 그 원문을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일연 이전에 전해오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일연은 “위서”가 전하는 단군왕검의 도읍인 아사달에 대해서 무엽산. 백주의 백악. 개성 동쪽의 백악궁, “고기“가 전하는 단군왕검의 첫 도읍지인 평양성에 대해서는 당시의 서경(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석하여 놓았는데 이것은 일연이 생존했던 고려시대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한 것으로 당시에 고조선의 첫 도읍지에 대한 견해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필자는 고조선의 도읍지를 확인함에 있어서 이러한 주석이 참고는 되겠지만 그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일연의 시대는 이미 유교사관이 주류를 이루어 사대관계가 존중되었고 한국사 인식의 판도가 한반도로 위축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첫 도읍지를 “위서”에서는 아사달이라 했고, “고기”에서는 평양성이라고 했다는데 아사달과 평양성은 각각 다른 두 개의 지명인지 또는 동일한 곳에 대한 다른 호칭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간 언어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고대 한국어에서 阿斯達(아사달)의 阿斯(아사)는 王(왕)이나 大(대) 또는 母(모)의 뜻을 가지며, 達(달)은 邑(읍)을 뜻하는 것으로 아사달은 ‘大邑(대읍)’ 또는 ‘王邑(왕읍)’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平壤城(평양성)의 平(평)은 大(대) 또는 長(장)을 뜻하며 壤(양)은 邑(읍) 또는 城(성)을 뜻하는 것으로 平壤(평양)은 ‘大邑(대읍)’ 또는 ‘長城(장성)’을 의하는데 이것이 漢字(한자)로 표기되면서 한문식으로 城(성)이 다시 결합되어 平壤城(평양성)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사달과 평양성은 왕읍 또는 대읍을 뜻하는 보통명사로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당시의 큰 취락 또는 도읍에 대한 호칭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위서”가 말한 아사달과 “고기”가 말한 평양성은 같은 곳에 대한 다른 호칭에 불과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아사달과 평양성은 특정한 어느 한 곳에 대한 명칭일 수가 없으며 도읍이 옮겨지면 자연히 그것을 따라 옮겨지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일연이 인용한 “고기”에 의하면 고조선의 도읍지는 평양성. 백악산아사달(궁홀산 또는 금미달). 장당경. 아사달 네 곳이 되는데 마지막 도읍지였다는 아사달에 대해서 원문에 “ 후에 아사달에 돌아가.....”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 아사달은 이전에도 도읍을 했던 곳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아사달이 “위서”가 말한 첫 번째 도읍지였던 아사달이었는지 또는 “고기”가 말한 두 번째 도읍지였던 백악산아사달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결국 고조선의 도읍지는 세 곳이었다는 뜻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일연은 고조선이 두 번째 도읍지였던 백악산아사달로부터 세 번째 도읍지였던 장당경으로 천도하게 딘 것은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기 때문이라고 “고기”를 인용하여 밝히고 있으면서도 나머지 두 번의 천도 사유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삼국유사”가 전하는 고조선의 천도가 사실과 부합되는 것인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고조선으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천도를 하도록 만들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당시의 상황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삼국유사”가 고조선의 천도 사유로 전하는 기자의 이동과정이 문제로 등장된다.

필자는 이미 “기자신고”를 통하여 기자의 정체와 그 이동과정을 소상하게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것을 재론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그 요점만을 소개하고 그것이 고조선의 천도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甲骨文(갑골문). 金文(금문) 및 옛 문헌의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를 중점적으로 검토한 결과로 얻어진 기자에 관한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기자는 중국의 商(상)왕실 후예로서 箕族(기족)을 다스리기 위하여 지금의 중국 하남성 상구현 지역에 봉하여졌다. 그런데 周族(주족)이 상왕국을 멸망시키고 서주왕국을 건립하자 기자는 통치지를 잃고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중국의 동북부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 하류의 서부연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서주왕국의 봉국인 연국의 통치지역이었으므로 소국이었던 기자국은 연국의 통제 아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북경 교외에서 출토된 서주 초기 청동기의 명문에 보이는 箕侯(기후, 箕子 기자)가 燕侯(연후)로부터 恩賞(은상)을 받았음을 알게 하는 기록에서 알 수 있거니와 “한서” 지리지에 箕國(기국)이 燕國 (연국)의 변방 일부였다고 전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戰國時代(전국시대)에 이르러 西周(서주) 이래의 사회질서가 붕괴되고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하여 토지겸병전쟁이 계속되자 연국과 기자국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연국의 장수인 진개의 침략으로 기자국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으나 연국내부의 사정으로 진개가 후퇴함으로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그 후 중국이 秦國(진국)에 의하여 통일되자 기자국은 중국의 통일세력에 밀려 난하 중하류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자리하여 고조선의 侯國(후국)이 되었다. 이것은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에서 상왕국 말기에 제조된 箕侯(기후, 기자)의 청동기가 출토된 것에 의하여 입증 된다.

이 청동기는 기자국의 準王(준왕)이 위만에게 정권을 탈취당할 때 남겨놓은 기자국의 마지막 유물일 것이다. 기자국이 先秦(선진)시대에는 중국지역에 있었고 진시대 이후에는 고조선의 변경에 있었기 때문에 선진시대의 문헌에서는 기자가 서주왕실을 왕래한 기록은 보이지만 기자가 조선과 연관을 가진 기록은 볼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서한시대 이후의 문헌에서 비로서 기자가 조선과 관계를 맺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자국이 서주시대 이래 고조선의 변경으로 이주하기까지 위치하였던 난하의 서부연안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지명인 조선과는 난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 위치였다. 그리고 그 후 기자국이 고조선의 변경으로 밀려 들어와 위치했던 곳은 조선과 그 주변지역을 포괄한 난하의 중하류 동부연안이었다. 따라서 기자가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이동한 후에 거주했던 곳이 조선이었다고 전하는 “사기 송미자세가”나 “삼국유사 고조선편”의 기록이 전연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기자국이 위치했다고 전하는 조선은 고조선 전체를 뜻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일개 지명이었음도 분명하여진다. 그러했기 때문에 사마천은 기자를 “사기”의 “조선열전”에서 언급하지 않고, “송미자세가”에서 다루었던 것이다. “서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사기 송미자세가”의 기록은 무왕 때에는 기자가 아직 조선지역으로 이동해 오지 않았으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가
          
스리랑 21-02-10 10:41
   
엄밀하게 말하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무왕이 서주의 分封制度(분봉제도)를 실시하였고 기자가 조선과 근접된 지역에 거주하다가 종국에는 조선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므로 그렇게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고조선이 도읍을 옮긴 것은 기자가 조선 지역으로 이동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자국이 고조선의 변경인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으로 이동함으로서 말미암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기자국이 고조선의 국경 밖인 난하 하류의 서부연안에 위치했을 때에는 고조선이 내부상황에는 변화를 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자국이 고조선의 변경으로 밀려들어오자 고조선은 도읍을 옮기게 되었을 것인데 그것은 고조선의 도읍이 서쪽 변경으로부터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고조선의 천도가 기자국의 무력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고조선이 기자국과 전쟁을 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전국시대에 연국과 상호 침공의 전쟁을 치루어 강한 군사력을 보유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조선이 중국의 통일세력에 밀린 소국인 기자국에게 위협을 느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자국은 고조선의 후국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 변경에 자리하는 것을 허용받았을 것이다. 고조선으로서는 기자국이 그 서쪽 변경에 위치하는 것이 중국의 통일세력을 견제하는 완충지로서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후에 서한으로부터 기자국으로 망명한 위만이 서한의 침략을 방어하는 조건으로 국경지대인 패수 유역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받았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이렇게 볼때 중국의 옛 문헌에 보이는 ‘朝鮮侯 箕子(조선후 기자)’라는 표현은 고조선의 지배자라는 뜻이 아니라 고조선의 諸侯(제후)인 기자 또는 조선(고조선 변경의 지명)지역에 거주하는 제후인 기자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종합해 볼때 기자가 조선 지역으로 이동해 오기까지 고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였던 백악산아사달은 조선 지역으로부터 가까운 지금의 중국 하북성과 요녕성의 접경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기자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천도한 고조선의 세 번째의 도읍지였던 장당경은 그보다 동쪽에 위치했을 것이다.

장당경으로부터 네 번째 도읍지였던 아사달로의 고조선의 마지막 천도는 위만조선의 성장과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한으로부터 기자국으로 망명한 위만은 당시 고조선과 서한의 국경이었던 패수(지금의 난하)연안에 거주하면서 중국 지역으로부터의 망명객을 모아 무리를 형성한 후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서한에 그 外臣(외신)이 될것을 약속하고 서한으로부터 군사와 경제 원조를 받아 주변의 小邑(소읍)과 진번. 임둔 등 大邑(대읍)을 공략하여 고조선의 서부지역을 점차로 잠식하였다. 종국에는 위만이 지금의 요하에 조금 못미치는 지역까지를 차지하고 위만조선이 성립되었으며 고조선은 그 동쪽에 위치하여 위만조선과 병존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때의 천도는 불가피했던 것으로 그 도읍지는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어야 한다.

중국의 옛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서한(전한) 초까지는 遼水(요수)가 지금의 난하에 대한 호칭이었으나, 서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한 후에는 요수가 지금의 遼河(요하)에 대한 명칭으로 이동하였다. 다시 말하면 요수는 고대에 중국의 동북부 국경을 이루는 강에 대한 호칭으로서 서한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요수라는 강명도 동북쪽으로 이동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사군 가운데 낙랑.진번.임둔은 위만조선의 영역에 설치되었고, 현토군은 위만조선의 영역 밖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사군이 설치된 후의 요수가 지금의 요하였던 것으로 보아 위만조선의 동쪽 경계는 지금의 요하에 조금 못 미쳤을 것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고조선의 잔여 세력은 그 동쪽에 있게된다. 앞에서 고조선이 마지막 도읍이었던 아사달은 그 전에도 도읍을 했던 곳일 것임을 말한바 있는데 그 곳이 고조선의 첫 번째 도읍지였을 것임이 여기서 명백해 진다. 왜냐하면 두 번째와 세 번째 도읍지는 모두 지금의 요하 서쪽에 있었을 것이므로 요하 동쪽에 있었던 네 번째 도읍지인 아사달과는 동일한 곳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첫 번재 도읍지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었고 두 번째 도읍지는 지금의 난하로부터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조선족이 원래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개진된 필자의 견해에 대해서 두 가지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는 전국시대에 연국의 진개가 고조선의 서부 깊숙이 침공한 사실이 있는데 그 때는 어찌하여 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인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종래에는 위만조선의 성립은 바로 고조선의 종말을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었는데 필자가 위만조선의 성립후에도 고조선이 지금의 요하 동쪽에 존재했었다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첫째의 의문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한후 오래지 않아서 후퇴를 함으로써 국경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후 고조선이 연국을 침공한 바도 있다는 사실이 해명하여 준다.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한 것은 연국의 전성기인 소왕 때가 되는데 연국은 그로부터 수년후에 소왕이 사망하고 국력이 극도로 쇠퇴하여 멸망의 위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고조선을 침공한 진개도 후퇴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주석으로 실린 “위략”에는 진개의 고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이 있은 후 연국은 국경을 滿.番汗(만.번한)까지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만.번한은 지금의 난하 하류유역에 있었던 지명인 것이다. 이것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한 후 난하 하류 유역으로 다시 후퇴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둘째의 의문은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濊傳(예전)의 기록이 풀어준다. 예전에서 예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濊(예)는 남쪽은 辰韓(진한), 북쪽은 高句麗(고구려).沃沮(옥저)와 접하고 동쪽은 大海(대해)에 이른다. 지금의 朝鮮(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라고 하였다. 예의 위치를 ‘지금의 조선의 동쪽’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삼국지”가 저술되던 시기에도 고조선은 존재했었음을 알게 된다. “삼국지”의 저자인 陣壽(진수)는 서기 233년부터 297년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므로 고조선은 3세기까지도 존재했었다는 것이 된다. 이 시기의 고조선은 그 전보다 훨씬 작은 세력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진수는 “삼국지 예전”에서 기자와 위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이 위치했던 지역과 당시의 고조선 위치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당시의 고조선을 “지금의 조선”으로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종래에는 이러한 진수의 표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자 또는 위만의 출현을 바로 고조선의 멸망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족은 원래 지금의 요하 동쪽에서 일어나 그 지역에 도읍을 하고 있었다. 그 후 세력이 성장하여 그 영역이 지금의 난하에 까지 이르게 되자 도읍을 서쪽으로 옮겨 지금의 하북성과 요녕성의 접경지역에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 진국에 의해 통일되고 그 통일세력에 밀려 기자국이 고조선의 서쪽 변경으로 들어오자 당시의 도읍이 너무 국경에서 가까웠으므로 중국과의 경계 서남부지역의 방어를 기자국에게 맡기고 동쪽으로 천도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종국에는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이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하여 지금의 요하 가까이까지 차지하게 되자 고조선은 요하의 동쪽에 있었던 첫 도읍지에 다시 도읍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추정은 “삼국유사”에 실린 고조선의 천도에 관한 기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기는 하지만 이를 확실히 입증하기 위하여는 보다 더 구체적인 자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옛 문헌은 이러한 자료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중국의 옛 문헌에 의한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5. 都邑地(도읍지)의 位置(위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유사”는 고조선이 세 번 천도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도읍지의 위치를 확인할 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문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것도 충분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중국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중국과 관계가 있었던 사항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단편적이어서 한국 고대사의 전체적인 맥락 위에서 그것들을 인식 하기란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이 점은 고조선의 도읍을 확인하는데 있어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따라서 중국문헌의 기록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하여는 그 기록을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연결시켜 분석. 종합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고조선의 도읍지를 추정하는 실마리를 찾게하는 기록은 “사기 조선열전”에 보인다.주지되어 있는 바와 같이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인데 그 가운데 “蠻夷(만이)와 옛 燕國(연국). 齊國(제국)의 망명자들이 그(위만)를 왕으로 삼으니 王險(왕험)에 도읍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런데 왕험에 대한 주석을 보면 “史記集解(사기집해)”에는,

徐廣(서광)은 말하기를 昌藜(창려)에 險瀆縣(험독현)이 있었다고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고 “史記索隱(사기색은)”에는,

韋昭(위소)는 말하기를 (왕험은) 옛 읍의 명칭이라 하였고 서광은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응소는 “한서 지리지”에 주석 하기를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舊都(구도)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위 주석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위소는 왕험을 읍의 명칭이라 하였고, 서광과 응소는 險瀆(험독)을 王險(왕험)과 같은 뜻으로 파악하였으며 신찬은 이것을 王險城(왕험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왕험. 험독. 왕험성은 동일한 뜻을 지닌 것으로 도읍에 대한 명칭이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위만조선 지역의 언어 즉 고대 한국어가 漢字化(한자화)된 것임이 분명하며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의 도읍으로 기록된 아사달. 평양성과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고조선의 통치자를 壇(檀)君王儉(단군왕검)이라 하였으니 “사기 조선열전”의 王險(왕험)과 신찬이 말한 王險城(왕험성)의 왕험은 단군왕검의 王儉이 달리 표기된 것이다. 결국 險瀆(험독). 王險(왕험). 王險城(왕험성). 王儉(왕검). 王儉城(왕검성). 阿斯達(아사달). 平壤城(평양성) 등은 한국 고대상에 나타난 도읍에 대한 다른 호칭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기집해”와 “사기색은”은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곳을 소개하고 있는 것인데 그 위치를 보면 서광의 창려 험독현, 응소의 요동 험독현, 신찬의 낙랑군 패수 동쪽의 왕험성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서광. 응소. 신찬이 말한 지역이 각각 다른 곳인가, 아니면 같은 곳에 대한 다른 표현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기록에 따라 그 위치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먼저 서광이 말한 창려 험독현은 어디인가? 서광은 晉(진)시대의 인물이므로 우선 진시대의 창려 험독현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평주에 창려군이 있었는데 그 주석을 보면,

漢(한)시대에는 요동속국의 도위에 속해 있었으며 魏(위)시대에 군을 설치하여 두 개의 현을 통령하도록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창려군에 속하는 현으로서 창려와 賓徒(從 ?)(빈도(종?)가 적혀있다. 따라서 진시대의 창려에는 험독현이 없었다. 그러므로 서광이 한 말의 뜻은 그전 시대의 험독현이 진시대의 창려군 지역에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진서 지리지 창려군” 주석에서 창려가 동한시대의 요동속국에 속해 있었음이 학인된다. 그러나 “후한서 군국지”를 보면 요동속국에는 창려는 보이지 않고 비슷한 명칭으로 창요가 있으며 험독도 보인다. 이에 대해서 顧炎武(고염무)는 “후한서 군국지”의 창요는 창려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한서 지리지 요서군”에 보이는 서한의 交黎(교려)가 동한시대의 창려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서 지리지”에 요서군의 교려에 대해서 “응소는 지금의 창려라고 말하였다”고 주석 되어있다. 응소는 동한시대의 인물이므로 이 주석으로 보아 서한의 교려가 동한시대에 창려가 되었음이 분명하며 “후한서 군국지”의 창요는 창려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고염무의 지적은 옳다고 인정된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가 남게 된다. 서광은 창려에 험독이 속해 있었다고 했는데, 창요가 창려의 誤記(오기)라면, “후한서 군국지”에 어떻게 창요와 험독이 대등하게 병존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아마도 동한시대에는 창려(창요)와 험독이 분리되어 있었으나 그후에 험독이 창려에 병합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서광이 말한 험독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는 서한시대의 交黎(교려)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요서군에는 14개의 현이 있었는데 교려가 영지. 비여. 빈도 다음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교려는 이 지역들과 인접해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지에는 고죽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응소는 말하기를 옛 고죽성이 있다”고 하였다고 주석되어 있다. 그리고 비여에 대해서는 현수가 동쪽으로 흘러 濡水(유수)로 들어가고 류수는 남쪽으로 흘러 해양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빈도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교려에는 渝水(유수)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위치가 분명해 지는것은 영지와 비여이다. 고죽국이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고 渝水(유수)는 지금의 난하에 대한 옛 명칭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서한시대의 영지와 비여는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는데 비여는 그 동부연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과 인접되어 있었던 교려도 지금의 난하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서한시대의 교려는 지금의 창려군 부근 즉 하북성 동북부에 있었을 것인데 그 지역에 서광이 말한 험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응소가 말한 요동의 험독현과 신찬이 말한 낙랑군의 왕험성은 어디인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기 색은”에 “응소는 ”한서 지리지“에 주석하기를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구도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의 주석을 보면 “응소는 말하기를 조선왕 滿(만)의 도읍이었다”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사기색은”의 기록과 약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사기색은”에는 험독현에 대해서 응소가 조선왕의 구도였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함으로써 그곳이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가능성도 시사하여 주고 있으나, “한서 지리지”에서는 험독현에 대해서 응소가 조선왕 만의 도읍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함으로써 이곳을 위만 조선의 도읍이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두 기록 가운데 하나는 착오일 것임이 분명한데 어떻든 요동군의 험독현은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의 주석에서는 “응소는 말하기를 조선왕 만의 도읍이었다”라고 했음을 전하면서 계속해서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이로부터 험독이 되었다”고 했으며 “안사고는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응소가 요동군의 험독을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본 것에 대해서 신찬은 반대하고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으며 그곳과 구별하기 위하여 요동군 험독현이 험독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에 대해서 안사고는 신찬의 견해가 옳다고 지지했다는 것이다. 응소와 신찬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아직 말하기 어렵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응소가 말한 험독과 신찬이 말한 왕험성은 다른 곳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신찬은 험독현이 왕험성과 구별되기 위하여 험독으로 불리어졌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필자는 요동군의 험독현도 원래는 왕험성으로 불리어졌을 것이라는 시사를 받게 된다.

그런데 “위서 지형지 창려군조”를 보면 晉(진)시대에 요동을 나누어 창려군을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창려군은 진시대 이전에는 요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서 지리지”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창려군이 동한시대에는 요동속국에 속해 있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위서 지형지”에서 진시대의 요동을 나누어 창려군을 설치했다는 요동은 동한시대의 요동속국을 말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진시대의 창려군 지역에 서광이 말한 험독현이 있었고 이 지역이 동한시대에는 요동속국에 속하여 창려(창요)현과 험독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인 서한시대에서 요서군에 속한 교려 지방으로서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 창려현 북근이었다.

이렇게 볼때 응소가 말한 요동군의 험독현과 서광이 말한 창려의 험독현은 동일한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先秦(선진)시대로부터 서한 초까지의 중국 요동은 지금의 난하 하류로부터 창려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이 秦(진). 西漢(서한)시대의 요동군 이었다. 그런데 서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병합함에 따라 서한의 영토가 동북지역으로 확대되고 행정구역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결국 서광이 말한 창려 험독현이 지금의 창려 부근이었고 그 곳은 서한시대에 요동군에 속해 있었으므로 응소가 말한 요동군 험독현이 서광이 말한 창려 험독현과 같은 곳일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점이 등장한다. 앞에서 고증한 바에 의하면 서광의 창려 험독현은 “한서 지리지”의 요서군 교려군이었는데 이 곳이 어떻게 같은 책인 “한서 지리지”에 수록된 요동군 험독현과 동일한 지역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한서 지리지”는 서한시대 전기간의 지리를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병합함에 따라 서한의 강역과 행정구역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로 요서군이 새로 설치되었는데 그 때까지 요동군의 변경에 있었던 험독현의 일부 또는 전부가 새로 설치된 요서군에 편입되어 교려라는 지명을 얻었을 것이며 동한시대에는 그 지역에 요동속국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신찬이 말한 낙랑군 왕험성을 확인할 단계에 와 있다. 종래에는 한사군의 낙랑군을 한반도의 평양지역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왕험성도 지금의 평양일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인식하지 않고 있다. 이미 앞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한사군의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갈석 지역이었다. 그런데 갈석은 전국시대의 연국이래로 서한초까지 중국의 동북부 국경을 이루었던 곳이므로 낙랑군의 서남부 변경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낙랑군의 왕험성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이것을 분명하게 해 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왕험성이 조선현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한시대의 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현이 있었다. 이 조선현 지역은 중국의 先秦(선진)시대 문헌에서도 조선이라는 지명으로 등장하며 기자국이 그 말기에 위치했던 지역으로서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었음은 앞에서 이미 고증된 바 있다. 그리고 조선현의 위치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중하류 동부연안에 있었음도 확인되었다. 그런데 기자국이 그 말기에 조선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 기자국의 도읍이 서한시대의 조선현 지역내에 있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기자국의 도읍지를 그대로 계승하여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위만조선의 도읍지였던 왕험성은 지금의 난하 중하류의 동부연안에 위치했으며 그곳은 서한시대의 조선현 지역이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위만조선의 왕험성에 관한 서광. 응소. 신찬의 설 가운데 신찬의 견해가 옳은 것임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하북성 창려 부근에 있었던 서광과 응소가 말한 險瀆(험독)을 어떻게 인식하여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남는다. 험독이라는 명칭이 고대에 도읍지에 대한 호칭이었다는 점이라든가 서광과 응소가 전한 내용으로 보아 이 곳은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도읍지(그전은 기자국의 도읍지)인 王險城(왕험성)은 앞에서 확인되었으므로 창려 부근의 험독은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조선이라는 동일한 국명을 사용하였으므로 그 도읍지들이 단순하게 조선의 도읍지로만 전해짐으로써 후세에 혼란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문헌들은 두 개의 험독을 더 전하고 있다. 하나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이 있는 大凌河(대능하) 중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북진으로서 일찍부터 이 곳이 험독으로 전해오고 있다. 북진의 舊名(구명)은 광녕이었는데 “대청일통지”에는 광녕현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險瀆舊城(험독구성)이 광녕현 남부에 있는데 漢(한)시대에는 현으로서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고 하였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讀史方輿紀要(독사방여기요)”에서도 보인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요하 동부연안에 있는 심양 부근으로 “遼史(요사)”“지리지”에서 확인된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는 集州(집주) 懷衆軍(회중군)에 대해서,

옛 陴離郡(비리군)의 땅으로 漢시대에는 험독현에 속했고 고구려가 상암현으로 삼았다가 渤海(발해)가 州(주)를 설치 했다.

고 전하고 있다. “독사방여기요”에 의하면 遼(요)시대의 集州(집주)는 지금의 심양 동남에 있었다고 한다. 대능하 동부연안의 북진과 요하 동부연안의 심양 지역은 그 위치로 보아 漢(한)시대의 요동군 또는 험독현이 될 수 없는데 서한의 요동군에 그 지역의 옛 명칭과 같은 험독이 보이므로 후대에 혼란을 일으켜 한시대의 험독으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이 험독이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세 곳의 험독이 확인되었다.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창려 부근, 대능하 중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북진, 요하 동부연안에 위치한 심양 지역이 그것이다. 여기서 “삼국유사 고조선”편의 기록과 그것에 따라 필자가 앞에서 추정한 고조선의 천도 사유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연은 “古記(고기)”를 인용하여 고조선은 평양성으로부터 백악산아사달로 천도하였고, 기자가 조선지역으로 이주해 오자 다시 장당경으로 천도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아사달로 옮겼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기자가 秦(진)시대에 중국의 통일세력에 밀려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조선 지역으로 이동해 왔었는데 이러한 기자의 이동이 고조선으로 하여금 천도를 하도록 만들었다면 그것은 고조선의 당시 도읍지가 너무 서쪽 변경에 치우쳐 있어 조선 지역에 가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본 바 있다. 그리고 마지막의 아사달 천도는 위만조선이 성장하여 지금의 요하 가까이까지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고조선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아사달과 장당경은 지금의 요하 서쪽에 있었을 것이고 마지막 도읍지인 아사달은 요하 동쪽에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일연이 고조선의 마지막 천도를 기록하면서 “아사달로 돌아갔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 아사달은 그전에도 도읍을 했던 곳일 것인데 아마도 첫 번째 도읍지였던 평양성이었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이러한 필자의 가정은 王險城(왕험성)과 險瀆(험독)의 위치가 입증하여 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자국은 그 말기에 고조선의 변경인 지금의 난하 중하류 동부연안에 위치하고, 신찬이 말한 낙랑의 왕험성에 도읍하고 있었다. 당시 고조선이 도읍지는 서광과 응소가 말한 험독으로 지금의 창려 부근 이었다. 이곳은 난하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므로 새로 이주해온 기자국의 영역에 거의 접해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은 당시의 도읍이 기자국에 너무 인접해 있고 또 이제부터는 기자국이 중국 세력에 대한 완충지의 역할을 할 것이므로 도읍을 굳이 서쪽 변경에 둘 필요가 없었으므로 동쪽으로 옮겼을 것인데 그 곳이 바로 대능하 중류 동부연안의 험독인 지금의 북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만조선이 성장하여 지금의 요하 서쪽을 거의 전부 차지하게 됨에 따라 고조선은 다시 요하 동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곳이 지금의 심양 동남에 있었던 험독이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창려 부근의 험독은 고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아사달이었고, 북진의 험독은 세 번째 도읍지인 장당경이었으며, 심양 동남의 험독은 첫 번째와 네 번째 도읍지였던 평양성과 아사달이었다. 이상의 고찰로서 “삼국유사”에 실린 고조선의 천도 기사가 중국문헌이 전하는 王險城(왕험성)과 險瀆(험독)에 관한 기록과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6. 결 론

일연이 “삼국유사”에 인용한 “古記(고기)”에 의하면 고조선은 평양성. 백악산아사달. 장당경. 아사달 등에 도읍하였는데 마지막 도읍지였던 아사달은 그전에도 도읍을 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조선의 도읍지는 세 곳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고조선이 백악산아사달로부터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중국 商王室(상왕실)의 후예인 箕子(기자)가 조선 지역으로 이동해 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문헌에서는 고조선이 위치했던 지역에 고조선 또는 위만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險瀆(험독)과 王險城(왕험성)이 있었음을 전하는 기록들이 보인다. 필자는 이들의 위치를 고증하고 그 위치의 상호관계를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 하였다. 즉 험독은 지금의 요하 동부연안인 심양의 동남지역, 대능하 중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북진, 하북성 창려 부근 등 세 곳에 존재하였는데 이곳들이 고조선의 도읍지였다. 심양의 동남에 있었던 험독은 “삼국유사”에서 말한 고조선의 첫 번째와 마지막 도읍지였던 평양성과 아사달이었으며, 창려 부근의 험독은 두 번째 도읍지였던 백악산아사달 이었고, 북진의 험독은 세 번째 도읍지였던 장당경 이었다.

그리고 고조선의 서쪽 변경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중하류 동부연안에는 조선이라는 명칭을 가진 지역이 있었는데 그 지역에는 기자국 말기의 도읍지였다가 후에 위만조선의 도읍이 된 왕험성이 있었다.

 


원래 중국의 동북부 변경(지금의 난하 서부연안)에 있었던 기자국이 秦(진)시대에 중국의 통일세력에 밀려 고조선의 서부 변경에 위치한 조선지역으로 이주하여 왕험성에 도읍을 하게되자 고조선은 당시의 도읍인 백악산아사달이 너무 서쪽에 치우쳐 있어 기자국과 인접하게 되었으므로 그보다 동쪽인 장당경으로 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위만이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하고 세력을 키워 고조선의 서부 영역을 잠식하여 지금의 요하 부근까지 차지하게 되자 요하의 동부에 위치한 아사달로 다시 도읍을 옮겼는데 그곳은 고조선의 첫 번째 도읍지였던 평양성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조선이 백악산아사달로부터 장당경으로 천도한 시기는 秦國(진국)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경이 될 것이며, 장당경으로부터 아사달로 다시 도읍을 옮긴 시기는 위만이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기원전 194년경보다 조금 늦을 것이다.

고조선의 첫 번째 도읍지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었고, 두 번째 도읍지가 그보다 훨씬 서쪽인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조선족은 원래 지금의 요하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진출하였을 가능성을 말하여 준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記(고기)”의 내용을 보면 첫 번째 도읍지인 평양성으로부터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아사달로 옮긴 것을 “또 옮겼다”(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우이도어백악산아사달)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조선족이 평양성에 도읍하고 국호를 “朝鮮(조선)”이라고 정하기 이전에는 평양성 즉 심양의 동남이 아닌 다른 곳에 거주하였을 것임을 알게 된다.

이상과 같은 고조선의 도읍지가 확인됨으로써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가 전하는 고조선의 천도에 관한 내용이 매우 정확한 것임도 입증되었다.

그리고 고조선과 기자국의 관계가 한층 분명해짐으로써 기자국을 한국고대사의 주변 맥락 위에서 인식하지 않았던 일연의 견해가 매우 옳은 것임도 확인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제후국으로써 서족 변경에 있었던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후 고조선의 서부 영역을 잠식하여 성립되었으므로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일시에 교체된 정치세력이 될수 없음도 알 수 있다.

 


四. 古朝鮮(고조선)의 社會性格(사회성격)

 


1. 서 론

고대국가에 도달하기까지의 인류사회 전개과정 및 국가의 기원과 그 형성 등에 관하여 근래에 인류학과 고고학은 괄목할 만한 연구 업적을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학계의 동향에 따라 한국 역사학계에서도 한국의 고대사회, 특히 고대국가의 형성과 그 성격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해 보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김정배의 “한국고대국가기원론”, “위만조선의 국가적 성격”, “蘇塗(소도)의 정치사적 의미”와 최근에 발표된 최몽룡의 “한국고대국가형성에 대한 일고찰-위만조선의 예”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그 내용에서 알수 있듯이 1970년대 이후 구미 학계에서 성행하고 있는 국가의 기원과 형성에 관한 인류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엘만 서비스(Elman Service). 모튼 프리드(Morton Fried). 마샬 사아린스(Marshall Sahlins). 윌리암 샌더스(William Sanders). 바바라 프라이스(Barbara Price). 로버트 카네이로(Robert Caneiro). 켄트 플래너리(Kent Flannery) 등의 연구 결과에 기초하고 있다.

김정배는 엘만 서비스에 의하여 제출된 후 구미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무리(群(군), band). 부족(部族, tribe). 추방(酋邦, chiefdom). 국가(國家, state)라고 하는 인류사회의 전개과정에 기초하여 종래에 한국 역사학계에서 채용해 온 부족사회. 부족국가. 부족연맹. 고대국가라는 사회전개의 설정이 타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특히 부족은 국가단계에 도달하기 이전의 사회단계가 되므로 부족과 국가가 부합된 부족국가의 설정은 개념상으로 보아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도 종래의 견해처럼 삼국시대에서 찾을것이 아니라 고조선시대에서 찾는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김씨의 견해는 위만조선의 국가적 성격을 정복국가로 규정짓는 데까지 발전 하였다. 최몽룡도 엘만 서비스를 비롯한 여러 인류학자들의 국가 기원에 관한 이론을 소개하고 그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모형을 제시하고 있는 켄트 플래너리의 이론에 따라 위만조선에 관한 옛 문헌의 기록과 고고학적인 연구 업적을 점검하였다. 그 결과 켄트 플래너리에 의해 제시된 국가형성의 중요한 요소인 인구 증가, 전쟁, 토지의 협소와 확장, 전문직의 발생, 신분계층의 분화, 행정관료의 존재, 징세 및 징병 등이 위만조선에서 확인 되므로 한국역사상 최초의 고대국가를 위만조선으로 설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고대국가의 기원이 그 전으로 소급되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앞으로 고고학적인 자료의 증가에 따라 한국 고대국가의 기원은 더욱 소급될 수 있을 r서으로 보았다.

김씨와 최씨는 논리 전개에서 다소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론적 기초가 엘만 서비스에서 출발한 최근 인류학계의 연구 업적에 의한 것이라는 점과 한국 고대국가이 기원을 종래의 견해보다는 시대를 훨씬 올려 잡아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성이 있다.

그런데 한국사에 있어서 초기사회의 전개과정에 대한 각 단계의 설정이나 고대국가 기원의 연대가 종래의 견해와 김.최 양씨의 견해 사이에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을 한국 역사학계에 병존해야할 상이한 학설로 받아들일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차이는 기본적으로 인류학계가 이룩한 업적의 결과에 따라 일어난 것인데 그것은 인류학의 진보를 보여 주는 것이며 한국역사학계에 대두된 김.최 양씨의 새로운 견해는 거기에 따른 수정안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백남운은 한국사의 전개 과정을 원시씨족사회. 원시부족국가. 노예국가. 집권적 봉건국가로 설정하였고, 손진태는 씨족공동사회. 부족국가. 귀족국가로 구분한 바 있다. 그리고 김철준은 국가의 전개과정을 부족국가. 부족 연맹. 고대국가의 순으로 파악하였다. 백씨와 손씨는 부족연맹 단계를 독립시켜 설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족국가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회성격으로서의 부족연맹을 상정하고 있고 김씨의 견해에는 부족국가 이전에 씨족사회 도는 부족사회라는 단계가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위의 견해들은 각 단계의 연대와 성격규정에는 각각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씨족사회(또는 부족사회). 부족국가. 부족연맹. 고대국가(노예국가 또는 귀족국가)라는 도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일찍이 루이스 모오건은 씨족. 胞(포)족. 부족. 부족연맹. 국가의 순으로 인류사회의 통치조직이 발전했다는 견해를 제출한 바 있다. 그리고 국가단계 이전의 사회는 혈연적인 구조와 기능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되고 국가는 재산과 지역이라는 물질적 관계를 기저로 하여 성립된 사회라고 보았었다. 그러던 것이 미개민족이나 고대사의 연구에서 혈연적 집단인 씨족이나 부족의 기능이 중시되어 약사학계에 부족국가라는 개념이 정착하게 되었다.

백남운. 손진태. 김철준 제씨의 사회단계 설정은 모오건의 고전적 사회단계 설정에서 부족을 부족국가로 대체시켰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위와 같은 학계의 경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부족국가의 개념 설정은 전연 다른 사회단계를 지칭하는 개념인 부족과 국가가 복합된 것으로 처음부터 모순을 야기시킬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더욱이 최근 정치인류학의 발전으로 국가의 개념이 한층 분명하게 정립됨에 따라 그러한 문제는 더욱 현저하여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종래에 한국 역사학계에서 사용하던 고대사회 전개에 관한 도식은 인류학의 고전적 견해에 따른 것이었으며, 최근에 김정배. 최몽룡에 의하여 제출된 견해는 근래에 인류학이 이룩한 업적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부족과 국가가 전연 다른 사회단계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지금에 부족국가라는 단계나 개념이 가능한지의 여부를 논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 이라고 생각된다.. 단지 고대국가의 개념 파악 및 그것을 한국사에 적용하는 방법이 타당했는지의 여부만이 문제가 될 것이다. 서양사학계에서도 인류학의 새로운 업적에 따라 그리스를 모델로하여 고대국가 기원문제가 재검토되고 있다는 점은 관심을 가질 만하다.

근래에 천관우는 부족국가 대신에 성읍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그것은 부족국가라는 용어가 인류의 사회단께를 규정짓는 개념으로서 타당하지 않다는 지적이 학계에 대두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성읍국가는 도시국가라는 개념에 상응하는 것으로 씨족사회. 성브국가. 영역국가. 대제국이라는 국가 전개과정의 도식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러한 도식은 중국에서의 고대사회 전개과정을 세계사적인 보편원리에서 찾고자 했던 궁기시정이 씨족사회. 부족국가. 도시국가. 영토국가. 대제국이란 sehtlr을 중국역사에 적용했던 것과 흡사하다.

이기백도 원시공동체. 성읍국가. 연맹왕국. 귀족국가라는 도식을 채택 함으로써 종래의 부족국가를 성읍국가, 부족연맹을 연맹왕국, 고대국가를 귀족국가로 대체시켰다. 그리고 이씨는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한국사에서의 최초의 국가는 성읍국가였다고 말하고 한국에서의 국가의 기우너은 성읍국가로부터 잡아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성읍국가는 한국사에 최초로 등장한 고대국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개념으로서 종래에 고대국가 이전의 단계로 설정했던 부족국가라는 개념과는 다른 것임을 알수 있다. 이씨는 고조선이 성읍국가로부터 연맹왕국 단계에 이르는 사회변화를 보였을 것으로 인식하였으므로, 한국 고대국가의 기우너을 고조선까지 소급해 보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김정배.최몽룡의 견해와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한국 역사학계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의문을 떨쳐 버릴수 없을 것이다. 첫째로, 구미의 인류학계가 제출한 고대사회에 관한 이론을 한국사에 그 특수성을 살펴보지 않고 그대로 적용해도 문제가 없을까?

둘째로,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다면 고조선을 고대국가로 보는데 문헌적. 고고학적 근거는 충분한가? 셋째로, 고조선이 고대국가였다면 그 국가구조는 어떠했으며 그것을 성읍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을 풀어 주기에는 한국 고대사 관계의 자료가 충분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는 한국과 비슷한 자연환경에 있는 인접지역의 고대사회를 하나의 모형으로 살펴보고 그것을 한국의 고대사회와 비교연구할 필요가 있게 된다. 이러한 비교연구의 모형으로 제시될 수 있는 지역은 중국일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연접되어 있어서 문화적으로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풍부한 고대문헌이 남아 있고 최근에는 고고학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생산하여 상당히 구체적인 고대사회의 복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최근 인류학이 제시한 고대사회의 전개에 관한 이론을 적용하여 중국의 고대사회가 지닌 보편성과 특수성을 확인하고 그것을 한국의 고대사회와 비교.검토하여 보려고 한다. 필자가 이 글에서 지칭하는 고조선은 세칭 단군조선만을 의미함을 밝혀 둔다.

2. 고대사회의 모형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근래 인류학계는 초기의 인류사회가 무리(band). 부족(tribe). 추방(酋邦, chiefdom)의 세 단계를 거쳐 국가(state)에 도달하였다는 데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무리사회는 구성원의 규모, 방랑생활의 정도, 식료의 종류와 수급상황에 따른 구성원의 계절적인 변화 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30명부터 100명 사이의 작은 지역적 집단으로서 사냥과 채집의 경제에 의존하여 생활하였다. 그리고 동일지역내에서의 족외혼과 동일한 지역에서의 거주를 특징으로 하였다. 따라서 생활환경이 허락한다면 주어진 영역에서 함께 거주할 것이 요구되는 상호 관련이 있는 핵가족의 연합체로 이루어진 혈연집단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정치조직, 사회계층, 경제적 분업 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고학적으로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는 이 단계의 사회에 해당한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인류인 元謨人(원모인)이 생존했던 170만 년 전으로부터 중석기시대였던 1만 년전 전후까지가 이 단계의 사회에 해당 된다.

부족사회는 무리사회의 구조가 자연적으로 성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무리사회에서와 같은 족외혼과 결혼에 의한 혈연집단의 동거가 한층 확산되었다. 그리고 부족사회는 무리사회의 구조로부터 진화되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평등을 바탕으로 하여 수평적으로 집합된 조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부족사회에는 사회적인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고 정치적 기술에 의하여 조직된 사회도 아니었다. 부족사회는 일반적으로 농업경제와 결합되어 있었으나 시장, 조직적인 교역, 전문적인 기술집단 등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족사회는 고고학적으로 신석기시대의 개시와 더불어 확산되는데 각 부락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기본 단위가 되므로 부락사회 단계라고도 불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황하 중류유역에서는 裵李崗文化(배이강문화). 磁山文化(자산문화). 仰韶文化(앙소문화). 황하 하류유역에서는 北辛文化(북신문화). 大汶口文化(대문구문화)전기(종래의 청화강문화 강북류형의 청연강기)가 이 단계의 사회에 속한다. 그간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이 시기의 부락구조와 각 부락단위의 공동묘지에서는 강한 부족공동체의 특징이 확인된다. 그리고 각 묘에서 출토된 부장품이 매우 영세하고 량과 질에서 서로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은 당시에 계층의 분화나 경제적인 빈부의 차이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게 하여준다. 일부의 부락유적에서는 저장용 구덩이가 한지역에 밀집되어 있어 식료 등을 부락 구성원이 공유했을 것임을 알게 하여 주었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사유제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질그릇 제조에 물레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라든가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장신구 등의 대량 출토를 볼 수 없는 것은 전문 기술집단이 출현하지 않았었음을 알게 하여 준다.

추방사회는 기본적으로 구성원 사이에 평등이 유지되었던 부족사회와는 달리 사회신분과 지위에 의한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중심인물은 추장이었다. 추장을 중심으로 하여 원추형의 계층적 사회구조를 형성한 모든 사회구성원은 추장과의 관계에 따라 집단 안에서의 사회적 지위와 계층이 결정되었다. 종교적으로도 중심인물이나 중심세력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권령과 결합되었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특권과 의무가 부여 되었는데 이것이 사회결합의 기본적인 기술이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생산에서 분업이 일어나고 이에따라 생삼품을 사회 전체에 재분배. 공급하는 행위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추방사회는 부족사회와는 달리 여러 집단의 큰 합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요약하면 추방사회는 경제.사회.종교 등에 있어서 공동생활의 중심이 출현하였다는 점이 부족사회와 다르다. 규모가 크거나 진보된 추방사회의 경우에는 그 중심은 추장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상당한 수의 행적적인 보조원이나 전문 행정인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단계는 고고학적으로 신석기시대 후기에 나타나는데 부족 또는 부락이 합병 또는 연맹을 이루었으므로 부족연맹사회 또는 부락연맹사회 단계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황하 중류유역에서는 협서용산문화. 하남용산문화. 황하 하류유역에서는 대문구문화 후기(종래의 대문구문하)와 산동용산문화가 이 단계에 속한다. 이 시기의 묘 가운데서는 일반묘와는 달리 부장품이 풍부한 소수의 묘가 발견되어 경제적.사회적으로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었고 질그릇 제조에 물레의 사용이 확산된 것이라든가 장신구가 다양화되고 풍부해진 것은 전문기능인이 출현하였을 것임을 알게 하여 주었다.

여러 유적에서 신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사용된 점뼈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종교적 전문직이 존재했음을 알게 하여 주는 것으로 이 종교직은 추장을 비롯한 지배집단을 위하여 봉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황하 중류유역의 이 시기 유적에서는 전쟁에 의하여 희생된 유골이 많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다른 지역보다 황하 중류유역에서 치열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었음을 알게 하여 주었다. 이러한 전쟁은 기후변화에 따른 생산감퇴와 인구증가가 복합되어 가져온 식료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약팔전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상당히 영속적인 부족연맹이 형성되었을 것이며 강력한 지배자의 출현을 불가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묘저구2기문화와 대문구문화 중기(종래의 청련강문화 강북류형의 유림기와 화총기)를 어느 단계의 사회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황하 중류유역에서 앙소문화로부터 협서용산문화.하남용산문화로의 과도기적인 문화양상을 띠고 있는 묘저구2기문화(용산문화 전기)의 유적에서는 사회계층의 분화나 빈부의 차이를 확인 할 만한 자료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질그릇 제조에 물레를 사용하였고 앙소문화가 모계사회였던 것과는 달리 이 시기는 부권사회였다는 점에서 사회성격이 변화되는 징후를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묘저구2기문화는 엄밀하게 말하면 부족사회로부터 추방사회로의 과도기로 보아야겠지만, 추방사회 초기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황하 하류유역의 대문구문화 중기 유적에서는 빈부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묘들이 발견 되었으므로 부족사회로부터 추방사회로의 과도기 또는 추방사회 초기에 포함시킬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황하 중류유역에서는 앙소문화, 황하 하류유역에서는 대문구문화 전기까지를 부족사회, 그 이후를 추방사회로 보아서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추방사회 다음 단계인 국가단계는 사회계층의 분화, 직업의 전문화 등 추방사회가 지니고 있던 사회특성과 요소를 대부분 계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양과 질에서 팽창되었고 사회규모가 확대되었으며 조직이 한층 복잡하여 졌다. 국가단계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법적인 힘에 의한 특수구조에 의하여 통합된 사회라는 점이다. 국가는 법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무력의 사용행위와 그 상황이 정당화되는 반면에 개인과 개인 또는 그 사회의 구성집단에 대해서는 그들 사이의 분쟁에 의한 소란으로 그들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금지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국가단계 사회의 정치적 조직은 뚜렷하게 규정된 사회계층 이었는데 분배기구로서 시장이 있었고 사회신분의 차이가 한층 철저한 형태였다. 추방사회는 그 지배세력이 혈연적인 조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반면에 국가단계에서는 원칙적으로 법적인 권력으로 특정지어졌다.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국가는 전문적인 지배계층이 있으며 아주 현저하게 집중화된 정부가 있는 매우 강한 사회형태로서 혈연에 의하여 결속되는 것을 특징으로하는 단순한 사회(이전의 사회단계)와는 크게 다르다. 국가는 혈연이나 친족관계보다는 직업의 전문화에 기초한 거주형태를 가지며 그것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크게 계층화 되고 매우 다양화 되었다. 국가는 무력의 독점을 유지하려고 기도하는데 진정한 법에 의하여지배되는 사회로 특징지어진다. 대부분의 범죄는 국가에 대한 죄악으로 인정되었으며 각 범죄에 대한 처벌은 단순한 사회에서와 같이 피해를 입은 집단이나 그의 혈연이 책임지는것이 아니라 국가가 법제화된 절차에 따라 처리하였다. 개개의 인민은 반드시 폭력을 포기해야 하지만 국가는 전쟁을 수행할 수가 있다. 또한 국가는 병사의 징집, 세금의 징수, 공납의 강요를 할 수가 있다.

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단계가 중국역사에서는 어느 시기에 출현하였는가?

이 점을 검증하기 위하여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인 갑골문의 내용을 살펴보는것이 순서일 것이다. 갑골문에 의하면 商王(상왕)은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을 함께 장악하고 스스로를 ‘一人(일인)’ 또는 ‘余一人(여일인)’이라고 칭하며 유아독존의 위치에서 신권전제통치를 행하였다.. 상왕국 말기로 오면서 그 성격이 변화되기는 하였지만 신권통치의 기초가 되었던것은 占卜(점복)행사와 제사의식이었다. 상왕은 점복을 통하여 신의 뜻을 파악하여 그것을 집행하고 상왕국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연맹부족의 수호신에 대한 제사를 통괄함으로써 종교적 권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왕 밑에는 대신.무관.문관 등으로 분류되는 20개가 넘는 관료가 있어서 상왕의 행정을 보좌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상시대에 이미 왕권이 확립되어 있었고 전문적인 지배계층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조직화된 중앙행정기구가 존재하여 집중회된 정부를 형성하였을 것임을 알게 하여 준다.

상왕국의 사회 구성원은 크게 나누어 지베귀족. 평민. 노예로 볼 수 있다. 지배귀족은 상왕을 우두머리로 하여 그 밑의 각급 관료와 多婦(다부). 多子(다자)등의 왕실귀족 그리고 ‘外服(외복)’에서 작위를 받은 侯(후).伯(백) 등이 있었는데 이들만이 방대한 관료기구와 강대한 군대및 종교적 권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위치에서 그들은 호사스러운 낭비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인데 발굴 결과에 의하면 재화가 소수의 귀족에게 집중되었던 현상을 보여 주고있다. 평민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지배귀족의 통치대상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지배귀족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빈한하였다. 노예는 주인이 사망하면 그를 위하여 순장되기도 하였고

동물과 함께 제물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생사권마저도 찾지 못한 채 처참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사회가 심하게 계층화되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상시대에는 정치적 전문 지배계층과 종교적 전문계층이 존재했음을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데 수공업 방면에서도 매우 전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시대의 청동기는 ‘司母戊鼎(사모무정)’과 같이 3백 명 이상의 집단노동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뿐만 아니라 종류가 다양하고 제품이 정교하고 우아하여 예술적 가치로도 세계 역사상 가장 우수하다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상시대는 製陶業(제도업)도 크게 발달하여 대표적인 것으로 硬陶(경도)와 瓷器(자기)의 출현은 제도기술의 진보를 보여주는 것이며 白陶(백도)는 일종의 진귀품으로 그릇모양의 문양에서 매우 높은 예술적 가치를 보여준다.

明器(명기)는 생산자가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이 방면의 전문 직업인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骨器(골기). 刻器(각기). 牙器(아기). 貝器(패기). 玉器(옥기). 漆器(칠기). 紡織品(방직품) 등도 매우 우수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주와 안양 등지에서는 청동기. 도기. 골기. 각기 등의 제조장터와 사회신분과 직업에 따라 거주지역이 다른 도시구성이 확인 되었다. 이러한 자료는 당시의 사회가 매우 분업화되고 다양화되었으며 그것에 기초한 거주형태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대형의 건물터, 성터, 능묘와 악기 등도 그 분야의 전문 직업인이 있었을 것임을 알게 하여 준다.

상왕국에는 王族(왕족). 多子族(다자족). 五族(오족). 三族(삼족) 등의 중앙 상비군이 있었고 군대의 조직은 좌. 중. 우의 3師(사)로 편성되어 있었다.

갑골문에서는 刑具(형구)와 감옥에 관한 상형문자도 보이고, 상시대에 이미 墨刑(묵형). 비형. 宮刑(궁형). 刖刑(월형). 殺刑(살형) 등 후세의 소위 5刑(형)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으며 1회에 수십 명 또는 1백여 명이 刖刑(월형)에 처해진 기록도 보인다. 刖刑(월형)을 받은 유골이 출토된 바 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에 이미 정부가 무력을 독점하고 있었고 상당히 정비된 법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법제회된 절차에 따라 형벌이 가해졌을 것임을 알게 하여 준다.

갑골문에 의하면 상왕국은 주변의 대립된 세력인 方國(방국)들과 잦은 전쟁을 하였는데 이러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에 따라서 한 부족 또는 여러 부족으로부터 3천, 5천 또는 1만 명을 징집하였다. 武丁(무정)시대에는 土方(토방). * 方( * 방)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7월부터 9월까지 38일간에 모두 2만 3천여명을 징집한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상왕국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연맹부족은 상왕실에 대한 병역의무와 더불어 貢納(공납)의 의무도 지고 있었는데 공납에 관한 기록은 갑골문에서 자주 확인된다. 공납은 상왕국을 유지하는 경제적 기초의 한 부분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상왕실에서는 필요에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였고 병사를 징집하고 공납을 받아들였음을 알게 한다.

지금까지 언급된 것 외에도 상왕국의 사회구조에 있어서 계층화와 다양화를 보여주는 많은 자료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된 자료만으로도 두 가지의 분명한 결론에 도달 하게된다. 그것은 첫째로 상왕국은 근래에 인류학자들이 제시한 사회진화 개념상에 있어서의 국가단계에 이미 진입해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구미의 인류학자들이 제시한 고대 국가의 구조에 관한 이론이 동아시아지역에서도 적용될 수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있다. 그것은 정치권력의 기초와 거주형태에 관한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지적하기를 국가단계에서는 혈연이나 친족에 의한 결속이 와해되어 정치적인 권력은 법에 기반을 두게 되고 거주형태는 직업의 전문화에 기초를 둔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에 자세히 확인되겠지만, 중국에서는 상시대는 물론이고 西周(서주)시대까지 정치권력을 포함한 사회구조가 혈연적인 조직에 기초하고 있었고 전문직업이나 거주형태도 혈연적집단을 토대로 하여 형성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점은 보편적인 고대국가 이론에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서 혈연적인 공동체의식이 기초가 된 정치권력과 사회구조는 아시아 고대국가의 특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상왕국에 관한 주된 자료는 갑골문이며 그것은 상왕국 후기의 기록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22대 무정 이후의 기록이다. 따라서 앞에서 학인된 국가단계의 사회는 상왕국 후기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상왕국 후기에는 이미 완벽한 국가단계에 도달하여 있었으므로 국가단계로의 진입은 그보다 올려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근래에 이리두문화가 발견되었는데 그 유적의 분포와 년대가 중국 최초의 왕조였다고 전하는 夏(하)의 전설지 및 연대와 일치하여 그것이 하문화일 가능성이 높아지자 중국의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고대국가의 기원을 하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제출되어 있다. 이리두문화의 유적에서는 궁궐로 보이는 대형의 건물터, 성터 등이 확인되어 강한 정치권력 집단이 출현하였을 것임을 알게 하여 주었고 묘제에서는 사회계층 분화와 빈부의차이를 보여 주었으며 청동기의 출현과 다양한 玉肌(옥기) 등은 전문 직업인이 존재하였음을 알게 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리두문화에서는 아직 당시의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그 사회의 구조, 정치권력의 성격, 법제의 유무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고 그것을 하문화로 단정한다는 것도 무리이다. 그러므로 중국고대국가의 기원을 하에서 찾는 노력은 좀더 보류되어야 할 것이며 이리두문화를 추방사회의 말기 단계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상시대의 유적을 보면 중기와 후기의 도읍지는 발굴되었는데 전조의 도읍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상왕국 전기의 사회성격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상왕국 중기의 도읍지였던 오는 지금의 정주로 추정되고 후기의 도읍지였던 殷(은)은 지금의 안양인데 정주에서는 상시대의 도시구조가 확인되었고 안양기는 앞에서 언급된 상왕국 후기에 해당된다. 정주에서 발견된 상시대의 토성은 전체의 길이가 약 7km에 이르고 북쪽의 성벽이 약간 구부러지긴 하였지만 대략 正方形(정방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1천 3백만여 일의 노동일을 요하는 거대한 것이었다. 이 성 안의 동북부에는 궁궐터가 있었고 성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는 청동기. 골각기. 도기 등의 제조장터가 있었다. 그리고 사회계층과 전문직업에 따라 거주지역이 구분된 도시구조가 확인되었다.

정주기, 즉 상
               
스리랑 21-02-10 10:44
   
정주기, 즉 상시대 중기의 당시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 도시구조가 매우 강한 정치권력의 출현, 사회계층의 형성과 전문직업의 분화, 그것에 기초한 거주형태를 보여 주고 있으므로 이 시기에 국가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국에서의 고대국가 출현은 상시대 중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상왕국의 국가구조는 어떠했으며 그것이 후에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볼 시점에 와있다. 상왕국의 국가구조와 그후의 중국에서의 국가구조 변화는 고조선의 사회성격을 검증하는데 좋은 모형이 될 것이다. 상왕국의 국가구조는 邑(읍)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갑골문에 邑字(읍자)는 일정한 영역을 뜻하는 사각형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상시대의 읍이 경계가 있는 영역과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을 요소로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거주지역을 뜻하는 것이다. 이 읍의 주위에는 경작지와 수렵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포괄한 일정한 지역을 鄙(비)라고 불렀다.

갑골문에서는 ‘作邑(작읍)’에 관한 기록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읍의 건설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읍은 자연적으로 성장한 거주지역이라기보다는 인위적으로 건설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鄙(비)에는 하나의 읍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20개 또는 30개의 읍이 있는 지역도 있었고 지금까지 갑골문에서 확인된 읍의 수는 1천여개에 달하는데 이것들이 모두 인위적으로 건설되었을 것으로 보는데는 무리가 있다. 邊境(변경)지대에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하기 위하여 읍을 건설하는 경우와 같이 필요에 따라 읍이 건설되기도 하였겠지만 당시의 읍 가운데는 자연적으로 성장한 소규모의 취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읍은 그 규모의 대소에 차이가 있었지만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부락 또는 취락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읍은 부족사회 단계에서의 부락이 성장 또는 계승된 것과 그후에 새로 건설된 것 등 두 종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읍 가운데는 大邑(대읍)이라고 불리어진 것이 있었다. 갑골문의 기록 가운데 한 예를 보면 唐(당)이라는 곳에 大邑(대읍)을 건설하였고, 이 읍은 唐邑(당읍)이라고 불리어졌다. 그리고 당으로부터 상왕실에 공물이 납부된 바 있고 당에서 제례의식이 거행된 바도 있다. 이로 보아 일정한 지역의 읍 가운데서 그 규모가 크고 종묘와 祭地(제지)가 있어서 그 지역의 정치와 신앙의 중심지였던 읍을 大邑(대읍)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읍에 그 지역을 다스리는 諸侯(제후)가 거주하였던 것이다. 읍은 상왕국 국가구조의 기본단위였는데 소읍은 종교적.정치적으로 대읍에 종속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대읍 가운데는 추방사회에서 부락연맹이 이루어 지면서 그 중심을 이루었던 부락이 성장 또는 계승된 것도 있었을 것이고 상왕국에서 필요에 의하여 새로 건설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상왕국에 있어서 지방의 종교적.정치적 중심지가 대읍이었다고 한다면 상왕국 전체의 종교적.정치적 중심지는 어디였겠는가? 오늘날의 관념으로는 바로 상왕국의 도읍을 연상하겠지만 당시에는 종교적 중심지와 정치적 중심지가 분리되어 있었다. 이 두 곳을 포함한 지역이 상왕의 직할지인 ‘王畿(왕기)’여/t을 것인데 ‘도읍지역’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갑골문에는 商(상)이라는 지명이 자주 보이는데 그것은 항상 취락을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상은 읍명임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商邑(상읍)으로도 불리어 졌다. 갑골문 연구가 초기단계에 있었던 시기에는 상을 당시 상왕국의 도읍이었던 지금의 안양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후 결론적으로 상은 당시의 도읍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지금의 商邱(상구)지역이었음이 확인되었다. 商族(상족)은 당시의 도읍지가 아닌 다른 곳에 고정되어 있는 상읍에 대하여 그곳이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中商(중상)이라고도 부르고 그것을 중심으로하여 다른 지역을 방위에 따라서 동토.서토.남토.북토라고 불렀다. 상족이 특별한 읍으로 생각하였던 상읍은 그들 조상의 도읍지 또는 거주지였던 곳으로 상왕실에서 가장 중요시하던 종묘. 위패. 왕위의 표징품 등을 그곳에 두고 특별한 제사의식과 많은 군대의식이 그곳에서 행하여졌던 것이다.

商(상)이 고정된 지명으로서 전기간을 통하여 이동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이동이 가능한 상왕국의 도읍지는 분명히 각각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었을 것인데 현재로는 후대의 문헌에 의거하여 그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문헌에 의하면 상왕국의 도읍은 毫(호). 오. 相(상). 邢(형). 암. 殷(은) 등이다.

이 가운데 毫(호)만이 갑골문에서 학인될 뿐이고 殷(은)이나 다른 도읍명은 아직 학인되지 않았다. 단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상왕국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지금의 안양을 ‘玆邑(자읍)’ 즉 ‘이 읍’ 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안양에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여 대규모의 상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출토되어 상왕국 후기의 도읍지였던 殷(은)으로 확인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갑골문에서 보이는 대읍을 도읍에 대한 호칭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상왕국의 도읍도 대읍가운데 하나였기는 하겠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읍이 도읍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종합하여 볼때 상왕국의 국가구조는 거주지. 농경지. 수렵지로 구성된 읍이 기본단위가 되어 소읍.대읍.도읍.상읍이라고 하는 읍의 누층적인 관계에 기초를 두고 원추형을 이루고 있었다. 읍이라는 취락의 거주인들은 혈연적으로 결합된 집단인 씨족이나 부족이었으므로 읍의 층서관계는 바로 씨족이나 부족 사이의 층서관계를 형성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갑골문 연구가 초기단계에 있을때 邑字(읍자)를 성벽과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이에 근거하여 읍은 하나의 작은 단위국가였을 것으로 인식된 바가 있다. 그리고 상왕국은 이러한 작은 단위국가인 읍이 연맹을 이루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상왕국은 읍의 연맨체이기 때문에 읍제국가라고 불러야 한다는 가설이 제출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읍이 단위국가가 안었음은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으므로 이 점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왕국을 그대로 읍제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단지 그것이 갖는 의미는 소국인 읍의 연맹체가 아니라 취락인 읍이 기초가 된 읍의 누층적 층서관계로 형성된 국가라는 것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상왕국을 멸망시키고 건립된 西周(서주)왕국은 혈연적인 宗法制(종법제)에 기초를 둔 分封(분봉)제도를 실시하였다. 주왕은 천하의 宗主(종주)로서 天子(천자)가 되어 서주왕국을 통치하였다. 천자의 자리는 嫡長子(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諸侯(제후)로 封(봉)하여졌다. 제후는 천자로부터 일정한 封地(봉지)를 받아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 제후의 자리는 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卿(경). 大夫(대부)로 봉하여졌다. 경. 대부는 제후로부터 일정한 봉지를 받아 그 곳을 통치하였다. 경. 대부의 자리도 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士(사)가 되었다. 士(사)에게는 食地(식지)가 주어졌다. 士(사)도 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평민이 되었다. 주왕실과는 혈연관계가 없는 異族(이족)출신이 제후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들에게도 이러한 제도가 擬制化(의제화)되었다.

그런데 당시에 천자가 직접 지배하는 직할지를 ‘王畿(왕기)’라고 하였는데 그 안에는 宗周(鎬京)[종주(호경)]와 成周(洛邑)[성주(낙읍)]가 있었다.

宗周(종주)는 서주왕국의 도읍으로서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宗廟(종묘)가 있어서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成周(성주)는 周族(주족)이 상왕국을 멸망시킨후 동방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건설된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로서 서주왕국의 제2도읍이었다. 그리고 제후가 거주하는 읍을 國(국)이라고 하였고, 卿(경). 大夫(대부)가 거주하는 읍을 都(도)라고 하였으며 그 외의 일반적인 소읍은 鄙(비)라고 불리어졌다. 따라서 서주왕국의 국가구조는 鄙(비).都(도).國(국).成周(성주).宗周(종주)의 순서로 상시대보다 읍이 중층화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서주시대의 국가구조는 각 층 위의 읍에 대한 호칭이 바뀌었고 중층화되었을뿐 상시대의 그것을 계승하여 한층 구체화된 것이었다.

상.서주시대의 영토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것은 읍의 집적이었다. 당시에는 읍과 읍 사이에는 경작지가 포함된 읍의 면적보다 훨씬 넓은 空地(공지)가 있었는데 사람도 거주하지 않고 개간이나 경작도 되지 않은 이러한 공지는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서주왕국의 국가구조는 기본적으로 같은 기초위에 있었던 것으로 읍의 集積(집적)과 層序關係(층서관계)로 형성된 邑制國家(읍제국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구조와 질서는 春秋時代(춘추시대)를 거쳐 戰國時代(전국시대)에 이르는 사이에 와해되었다. 서주왕국이 몰락하고 춘추시대가 개시되면서 천자는 권위는 추락되었고, 패권을 장악한 제후가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으며 춘추 중기에 이르면 卿(경).大夫(대부)의 세력이 성장하여 제후국내에서의 실권을 장악하고 종국에는 제후를 능가하는 세력을 갖게 되었다.

한편 서주의 사회질서가 붕괴되어 감에 따라 경제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상.서주시대의 농민은 혈연적인 집단을 이루어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며 그 사회적 신분은 세습되었다. 즉 농민과 그들이 거주하는 읍 그리고 그들의 신분은 일체화되어 자유로이 그들의 소속집단이나 거주지를 이틸할 수가 없었다. rfj나 서주 후기부터 사회가 혼란하여짐에 따라 이러한 농촌구조가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춘추시대에 이르면 농가는 1家(가)1戶(호)가 단위가 되어 토지 소유주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農具(농구)와 농경기술의 발달은 종래의 사회구조를 붕괴시키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춘추시대에 보급되기 시작한 철제농구는 전국시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철제농구의 보급은 종래의 空地(공지)를 개간할 수 있게 하였고 水利(수리).관개시설을 용이하게 하였으며 여기에다 농경기술면에서 牛耕(우경)의 확산은 생산을 크게 증대시켰다. 이렇게 되어 토지의 면적은 바로 경제력의 기초가 되었다. 이에 따라 춘추 중기 이후에는 토지 쟁탈전이 심각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이 전국시대에 이르면 列國(열국)간의 土地兼倂戰爭(토지겸병전쟁)으로 화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춘추시대에 읍제국가 구조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전국시대에 이르면 영역이라는 개념이 중요시되어 領域(영역)국가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국가구조와 의식의 변화는 종국적으로 秦國(진국)에 의한 중국의 통일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이해와 비교의 편의를 위하여 년대를 보충하면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170만년 전에 중국대륙에 출현한 인류는 1만년 전후까지 무리사회 단계에 있다가, 後氷期(후빙기)를 맞이하여 농경생활에 들어가면서 부족사회의 확산을 맞게 되었다. 고고학의 발굴결과에 의하면 황하 중류 유역에서 가장 오래된 부족사회는 배리강문화.자산문화로서 기원전 6천년 이전이 되고, 황하 하류유역에서는 북신문화로서 그 개시연대는 기원전 5300년경이 된다.

그후 황하 중류유역에서는 앙소문화를 거쳐 묘저구2기문화에서 사회성격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여 협서용산문화.하남용산문화에서는 완전한 추방사회 단계에 도달하였는데 묘저구2기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2900년 경이며, 협서용산문화와 하남용산문화는 기원전 2600년경이다.

황하 하류유역 즉 산동성 지역에서는 대문구문화 전기를 거쳐 중기에서 사회성격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여 후기에는 추방사회 단계에 도달하였는데 대문구문화 전기의 년대는 기원전 4500년경이고, 중기는 기원전 4천년경이며, 후기의 개시연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기원전 2400년보다는 앞설 것이다. 기원전 2천년경에 이르러 황하 중류유역에는 추방사회 말기로 볼 수 있는 상당히 강한 정치권력이 출현한 이리두문화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기원전 17.8세기경에 상시대가 개시되는데 그 중기인 기우너전 15.6세기경에는 국가단계에 도달하였다.

상왕국의 국가구조는 읍이 누층적 층서를 형성한 읍제국가였는데 그것은 서주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기원전 770년에 시작되는 춘추시대에 읍제국가 구조는 와해되었고 기원전 103년에 시작되는 전국시대에 이르면 영역국가 단계에 도달하였으며 이것이 전개되어 기원전 221년에는 秦國(진국)에 의하여 통일된 고대제국이 출현하였다.

3. 고조선의 사회단계

앞에서 필자는 중국에서의 고대사회 전개과정을 다소 장황하게 언급하였다. 이에 대하여 독자 가운데는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찰하면서 중국의 고대사회에 관하여 이렇게 장황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중국의 고대사회 전개과정은 한국의 고대사회연구에 좋은 모형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더욱이 고조선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연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문화적인 면에서 서로 크게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은 자명하다. 고조선이 존재했던 기간은, 후대의 기록에 의한 그 건립연대에 의심을 품는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읍제국가로부터 영역국가의 단계를 거쳐 통일제국이 출현한 이후까지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조선의 말기, 즉 중국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오늘날과 같은 통일된 중국이나 중국민족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점은 한국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고조선은 한반도지역은 물론이고 지리적으로 직접 접해 있던 중국지역과도 여러 면에서 밀접한 간계를 맺고 있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리적으로 접해 있는 지역을 단위로 하여 깊은 관계를 갖는것은 시대가 올라 갈수록 현저하였다. 중국의 선사문화를 예로 보면 북부지역의 문화는 남부지역보다는 몽고.시베리아와 깊은 연관이 있었으며 남부 해안지역문화는 북부보다는 해안선을 따라 동남아지역과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권이 형성되면서 감퇴되기는 하였지만 통일된 한국이나 중국이라는 개념이 출현하기 이전의 사회를 고찰하면서 오늘날의 국가단위를 영역으로 설정하고 자료의 선택을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조선을 연구하는 傍系(방계)의 자료로서 한반도의 것이 중국지역의 것보다 반드시 더 가치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사회를 고찰하기 위하여 먼저 분명히 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이다.
                    
스리랑 21-02-10 10:47
   
평양에서 중국식 유적이 발굴된후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설치되었을 것이라는 설에 반대했던 일부 학자들은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위조품일 것이라고 일소에 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 유적을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든 대표적인 것 들을 검토하여 그 타당성 여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封泥(봉니)가 있다. 평양에서 200점이 넘는 封泥(봉니)가 수집됬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은 封泥(봉니)가 한곳에서 수집된 예가 없어 처음부터 그것들 모두가 진품일것인지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 의문점은 이미 정인보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지적된바 있는데, 필자는 그 전부를 위조로 보지는 않지만 상당수 위조품이 포함됬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樂浪大尹章(낙랑대윤장)”이라는 봉니가 있는데 大尹(대윤)은 王莽(왕망)시대의 관직명이다. 西漢(서한)시대에는 郡(군)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을 太守(태수)라고 하였는데 왕망시대에는 대윤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대윤이라는 관직명에 따르면 이 봉니는 왕망시대의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왕망시대에는 서한시대에 사용하던 모든 군명을 개명했는데 낙랑군은 樂鮮郡(낙선군)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봉니가 왕망시대에 만들어 졌다면 “樂鮮大尹章(낙선대윤장)”이 되어야 한다. 군명과 관직명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품일수가 없는것이다

 

어떻든 이 봉니들은 土城(토성)부근에서 수집되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樂浪太守章(낙랑태수장)”, “樂浪右尉(낙랑우위)”, **長印(**장인)“등이 있다. 西漢(서한)과 東漢(동한)의 관직을 보면 郡(군)에는 太守(태수)가 있었고 큰 縣(현)에는 丞(승)과 左.右尉(좌 우위)가 있었으며 작은 縣(현)에는 長(장)이 있었다. 그리고 漢書(한서) 地理(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樂浪(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현과 **현이 있었다

 

따라서 봉니는 낙랑군 조선현 **현의 치소가 평양에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 되었다

 

그러나 주지하고 있는바와 같이 봉니는 공문서를 보낼대 봉함하는 것으로 사용하는것 이므로 봉니가 출토된 곳은 봉니의 주인이 보낸 공문서를 받은곳이 된다 . 따라서 봉니가 진품이라 하드라도 평양은 공문을 받은곳이 되지, 그들이 거주 하던 곳이 될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봉니가 수집된 토성지역에서는 “大晉元康(대진원강)”, “樂浪禮官(낙랑예관)“, ”樂浪富貴(낙랑부귀)“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아가 출토되었는데 이것도 평양이 낙랑군의 치소였음을 알게하는 증거로 제시 되었는데, 여기서 대진원강은 西晉 惠帝(서진 혜제)의 연호로서 서기 291년부터 299년 사이가 된다. 따라서 이 기와 연대에 의하면 이 유적의 연대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西漢(서한) 武帝(무제) 元封(원봉) 3년(기원전 108년)보다 400여 년이 뒤진 서기 290년대의 유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사군의 낙랑군유적으로 보기에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또 앞에서 언급한 봉니들의 書體(서체)에 대해서 정인보는 한시대의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정돈되 있음을 지적한바 있는데, 위의 기와에서 확인된 연대로 보아 봉니들도 한시대 보다는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낙랑예관” “낙랑부귀”등은 평양이 낙랑이라고 불리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유적의 연대는 한사군의 설치 연대와는 크게 차이가 날뿐 아니라, 다음에 확인 되겠지만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다른 樂浪(낙랑)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古墳群(고분군)이 있다. 평야에서는 중국식 고분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발굴자들은 그 위치와 墓制(묘제)로 보아 제1호분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규모가 가장 큰것 가운데 하나라 하였다. 따라서 발굴자들의 견해가 옳다면 평양의 중국식 고분은 모두가 제1호분 보다는 늦은 시기의 것이 된다

 

그런데 제1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貨泉(화천)이 있었다. 화천은 왕망시대에 주조된 것이다. 따라서 이 고분의 연대는 왕망시대 이전으로 올라갈수가 없다. 왕망시대는 불과 15년간 이었고 그 뒤는 東漢(동한)시대가 되므로 왕망시대에 주조된 화폐가 한반도에까지 도달된 시간을 감안하면 제1호분의 조성연대는 동한시대로 보아야한다 결국 고분군의 조성연대는 한사군의 설치연대 보다는 훨씬 늦은 것이다

 

넷째로, 왕광묘와 왕간묘에서 출토된 印章(인장)이 있다. 왕광묘에서는 “樂浪太守掾王光之印(낙랑태수연왕광지인)”,“ 臣光(신광)”, “王光私印(왕광사인)” 등의 목제인장이 출토되었고 왕간묘에서도 “五官掾王盰(오관연왕간)” , “王盰印信(왕간인신)” 등의 목제인장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태수연이나 오관연은 모두 군태수에게 속해있던 관리들로 이 인장들은 지금의 평양이 한사군의 낙랑군 치소였음을 알게하는 증거로 제시 되었다. 그런데 군태수에게 속해있던 관리들이 반드시 군치소에만 근무했던게 아니며 멀리떨어진 곳에서도 근무하는 경우를 배제해서는 안된다 다음에 밝혀지겠지만 평양에 있었던 낙랑은 한 때 행적적으로 낙랑군의 지시를 받는 屬縣(속현)과같은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관리인 태수연이나 오관연이 그곳에 근무하고 있었다는것이 낙랑군의 치소였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 고분의 연대이다. 인장의 서체에서도 그것이 서한시대보다 늦은 시기의 것임을 알수 있는데 왕간묘에서 명문이 있는 칠기가 출토되어 그 조성연대를 분명하게 해 주었다. 칠기 가운데는 “ 永平 十二年(영평12년)” 이라는 명문이 있는것이 있었는데 영평12년은 東漢 명제 때로서 서기 69년이 된다. 따라서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서기 69년 이전으로 올라갈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고분에서 출토된 목재를 이용하여 방사성탄소측정이 행해진바 있는데 그 결과는 서기 133년이었다. 결국 이 고분도 한사군이 설치된 서한시대의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늦은 동한시대의 것이다.

 

다섯째로, 秥蟬平山君神祠碑(점선평산군신사비)가 있다. 이 비는 앞에서 언급한 토성의 동북 150m 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비문의 첫머리를 보면 “*和二年 四月戊午(*화2년 4월무오), 秥蟬長渤興(점선장발흥)” 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서한과 동한시대에 長(장)은 縣(현)을 다스리던 관리였으므로 이 비는 점선현의 장이 세웠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한서 지리지를 보면 서한시대의 낙랑군에는 秥蟬縣(점선현)이 있었고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동한시대의 낙랑군에는 占蟬縣(점선현)이 있었다. 이로보아 서한의 점선현의 한자표기가 동한시대에는 달라짐을 알수 잇는데, 黏. 占. 秥이 당시에는 통용되었기 때문에 비문에서는 秥蟬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비문에 나오는 점선은 서한시대 낙랑군의 黏蟬縣을 말하며 이 비가 서있는 지역이 바로 黏蟬縣 지역일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에대해 정인보는 점선장이 자신의 관할지역에 비를 세울 경우에는 자신의 직명을 새겨 넣지 않는것이 한시대의 비문 양식이라고 말하면서 비문에 점선장 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비가 서 있는 지역이 점선이 아님을 알수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크게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였다. 비문의 양식이 언제나 일치하였을 것으로는 볼 수 없기대문에 정씨의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볼수 없지만 참고할 가치는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필자는 이 비에 대해 두가지 문제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는 이비가 세워진 연대이다. 비문의 첫 자는 마손이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고, 둘째자는 和(화), 셋째자는 二(이)와 비슷 하였다고 한다 그러데 和字가 들어간 중국의 연호는 元和(원화), 章和(장화), 永和(영화), 光和(광화), 太和(태화) 등이 있는데 元和가 가장 빠른 연대이다. 元和는 東漢 章帝의 연호로서 그 원화2년은 서기 85년이다. 따라서 비문의 연호를 가장 빠른 것으로 계산하더라도 이 비는 동한시대의 것이 된다. 다시말하면 한사군의 설치연대 보다는 훨씬 늦은 것이다 . 둘째로 黏. 占. 秥이 음이 같다고 해서 동일한 의미로 볼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음이 같으면서도 다른 문자를 굳이 사용한 것은 서로 구별할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음이 동일한 다른 지명이었을 것이다

 

이 비의 건립연대가 서한시대가 아니라는 점은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강하게 뒷받침 하여준다

 

여섯째로, 孝文廟銅鐘(효문묘동종)이 있다. 이 동종의 명문은 “孝文廟銅鐘用十斤, 重冊十斤, 永光三年六月造” 라고 되어 있다. 永光(영광)은 서한 元帝의 연호로서 영광3년은 기원전 41년 이므로 이 동종은 서한시대에 제조된 것이다. 이 동종은 제9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 되었는데 이러한 동종이 평양에서 출토된것은 평양이 서한의 낙랑군 치소로서 孝文廟(효문묘)가 있었음을 알게하는 증거라고 인식하였다. 효문은 서한의 文帝(문제)를 말하는데 과연 지금의 평양지역에 효문묘가 설치될수 있었을까? 서한시대에는 郡國廟(군국묘)가 있었는데 군국묘는 高祖(고조)가 그의 아버지 太上皇(태상황)의 묘를 모든 제후왕의 도읍지에 설치하도록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국묘로서의 皇帝의 묘가 모든 군에 설치 되었던 것은 아니다. 군국은 그곳을 巡行(순행)을 했거나 잠시라도 거주한 일이있는 , 다시 말하면 그 지역과 연고가 있는 황제에 대해서만 廟(묘)를 설치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한사군은 武帝(무제)때 설치되었고 文帝(문제)는 무제보다 앞선 황제였다

그러므로 문제는 낙랑군과 연고를 맺을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설사 지금의 평양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효문묘는 설치될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 두어야 할것은 서한의 군국묘는 元帝(원제) 영광4년(기원전 40), 즉 평양에서 출토된 동종이 제조된 1년후에 모두 폐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효문묘동종이 출토된 제9호분의 조성연대는 함께 출토된 銅鏡(동경)가운데 서한시대 이후의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한시대 이전으로는 올라갈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과 같은 점을 종합해 볼때 이 효문묘동종은 다른곳의 군국묘에서 사용되었던것이 군국묘가 폐지된 후 어떤 경로를 거쳐 제9호분 주인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사망과 더불어 부장품으로 묻혔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곱째로, “夫租薉君(부조예군)”, “夫租長(부조장)”등의 銀印(은인)이 있다. 이 은인은 1958년 평양의 정백동 土壙墓(토광묘)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묘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 또는 기원전 1세기 경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한의 낙랑군에는 夫租縣(부조현)이 있었다. 그러므로 평양에서 “부조예군”,“부조장”등의 은인이 출토되었다고 하는것은 그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 이었음을 알게하는 증거라고 인식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이미 김정학에 의해서 지적되었듯이 “부조예군”으; 은인은 낙랑군 설치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사군이 설치된 서한시대 이후의 관직을 보면 郡(군)에는 太守(태수), 大尹(대윤), 丞(승), 長史(장사)가 있었고 縣(현)에는 令(영)이나 長(장), 丞(승),尉(위) 등이 있었을뿐 君(군)이라는 관직은 없었다

 

그러나 漢書(한서) 武帝記(무제기)에 “元朔(원삭) 원년 (기원전 128) 가을에 東夷(동이)의 薉君(예군)인 南閭(남려)등 28만 명이 항복하니 그곳을 蒼海郡(창해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東夷(동이)의 薉族(예족)이 君(군)이라는 관직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부조현은 낙랑군에 속해있었는데 낙랑군 지역은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위만조선에 속해있었다. 따라서 부조예군은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사용하던 관직명임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조예군의 묘에서는 전형적인 고대 한국 청동기인 細形銅劍 (세형동검)등도 출토되어 그 주인이 중국계가 아님을 알게하여 주었다. 부조예군의 은인은 漢(한)으로부터 주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필자는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만들어 졌을 가능성을 인정하고있다. 고조선은 西周(서주)시대이래 중국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었으므로 漢字(한자)는 물론 중국의 문물제도가 상당히 수입되어 있었을 것이며 위만조선에 이르면 그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중국 망명객에 의하여 형성되어 있었을 것인데 그들은 서한의 문물제도에 매우 친숙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고찰로서 부조예군 은인이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인 되었지만 그 출토지점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부조였고 후에는 낙랑군의 부조현이었지 않겠느냐는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나 다음에 확인되겠지만 한사군의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灤河(난하)의 동부 연안에 있었다. 따라서 낙랑군의 부조현이나 고조선, 위만조선 시기의 부조도 그 지역에 있었다는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조예군 은인은 위만조선이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후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하던 시기 또는 서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던 시기에 당시의 지배계층이던 부조예군이 이에 항거하면서 지금의 평양지역으로 이주해 왔을것임을 알게 하여준다. 지금의 평양은 원래 마한지역이었는데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에 있었던 낙랑의 토착민들이 외세에 항거하다가 평양지역으로 이주해와 그 지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함으로써 평양지역도 낙랑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필자는 믿고있다.

 

이제 부조장 이라는 은인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한시대의 현에는 장이라는 관직이 있었다 따라서 이 은인은 낙랑군 부조현의 장이 소유했던 것이라고 볼 수있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점은 이 부조장 은인은 문자의 형태만 알아볼수 있도록 부식 시킨 것으로 인장으로서는 사용할수 없는 형식적인 물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묘의 주인이 부조현의 장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망시에는 자신이 사용했던 인장을 소지하고 있지 못했음을 알수있다. 따라서 필자는 부조장묘의 주인도 먼곳으로 부터의 이주민 이었을 것으로 믿고있다. 이 부조장묘는 앞의 부조예군묘와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친연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믿고있다. 그런데 필자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싶다/ 즉 부조장은 부조예군과 친연관계에 있었거나 그 후손 이었는데 부조예군이 외세에 항거하다 지금의 평양으로 이주한후 그 지역에 남아 낙랑군 부조현의 장이 되었다가 후에 그도 부조예군이 거주하고 있던 평양으로 이주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종합해 볼때 해방 이후에 출토된 부조예군, 부조장의 은인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될수 없고 해방전 일본인학자들에 의하여 조사 발굴된 고분.토성등 소위 평양의 낙랑유적은 그 조성연대가 한사군이 설치 되었던 서한시대가 아니라 그보다 늦은 동한시대 이후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 하였다

 

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거운데는 서한시대나 그 이전의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은 늦은 시기에 제조된 유물과 함께 출토됨으로써 후대에 뭍혀진 것임을 알게하여 주었다 소위 낙랑유적의 성격을 밝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출토된 유물의 제조연대가 아니라 유적의 조성연대인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한가지 의문을 갖게된다. 그것은 한사군의 낙랑군은 서한 전기에 설치되었는데 지금의 평양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 이었다면 어찌해서 그곳에서 서한의 유적은 보이지 않는가 하는점이다. 한사군은 서한시대에 설치되었지만 유적은 그보다 늦게 조성되었을 수도있다 그러나 그 많은 중국식 고분과 유적이 모두 동한시대 이후의 것이라면 그 성격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던 시기에 지금의 평양에는 어떠한 정치세력이 있었으며 평양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낙랑예군” “낙랑부귀”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는 이 지역이 낙랑과 관계가있음을 알게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은 다음의 기록이 해명하여 준다
지누짱 21-02-10 15:19
   
윤내현 교수가 대단한건 환단고기를 전혀 참조하지않고도 고조선의 모든 부분을 탐구했다는 점이죠
Unicorn 21-02-10 16:06
   
한민족의 역사는 결코 완성된게 아니죠.

아직 미완이며 우리가 찾아야할 역사가 굉장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5천년의 역사.

그러나 일제가 겨우 십수년의 시간 만에 정리해 논게

오늘날 우리가 정사라고 믿고 있는 한민족의 역사.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고 빠져도 한참 빠져 있을것이 당연.

그러니 한민족의 역사는 이미 완성되었고 정사가 되었으니 다른 주장은 다틀렸다고 보는

시각이 얼마나 어리석은건지 말 안해도 알수 있으면 좋겠지만.

말해도 못알아 먹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분적인 사실만을 놓고 이게 맞네 저게 맞네 하는건 걍 허공에 삽질하는 거.

역사를 바라보는 가치관 자체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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