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요서경략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송서(宋書)』 백제전(百濟傳)에 실려 있다. 즉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점령하니, 백제는 요서(遼西)를 점령하고 진평군(晉平郡) 진평현에 이 지역의 통치기관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송서』는 심약(沈約, 441∼513)이 편찬한 사서이다. 그는 송과 남제(南齊)에 걸쳐 관직에 있었으며, 남제에서는 상서령(尙書令)을 역임하였다.
『양서(梁書)』 백제전에서도 “진(晉)나라 때 백제가 고구려의 요동지배에 대응해 요서·진평 두 군을 점령하고 그 땅에 백제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양 직공도(職貢圖양나라에 조공해 온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설명을 곁들인 화첩)의 백제국기(百濟國記)에 “백제는 옛날의 내이(萊夷)이며, 마한(馬韓) 족속이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진평현을 경략하였다.”고 하여 점령시기가 진나라 말기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남사(南史)』 백제전 및 『통전(通典)』 변방문(邊防門) 백제조에서도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통전』에서는 요서·진평 두 군의 지역에 대해 “오늘날(7세기 말)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坪) 사이”라고 주석을 붙였다.
이 밖에도 『진서(晉書)』 모용황재기(慕容皝載記)에 의하면, 345년 모용황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인 봉유(封裕)가 상소를 올려, 전연(前燕)의 팽창에 따라 포로로 잡아온 고구려인·백제인 및 선비족(鮮卑族)의 우문부(宇文部)와 단부(段部) 사람들이 전연의 수도인 용성(龍城)에 너무 많이 집중되어 있어 우려가 된다고 하였다.
또 『자치통감(資治通鑑)』 효종목황제(孝宗穆皇帝) 영화(永和) 2년조에는, 346년 모용황이 부여를 공략할 때 당시 부여의 상황에 대해 “전에 부여가 백제의 침입을 받아 쇠약해져 서쪽으로 연(燕)에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해왔는데 방어가 미비하였다.”고 하였다.
『진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에서 요서지방의 백제세력에 관한 단편적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즉, 모용씨의 전연은 유목민인 선비족 출신으로서, 당시 세력 중심지와 지배지역은 만주 서부지방과 북중국이었다. 따라서 바다를 건너 백제지역에 세력을 미칠 수 없었다.
또한 백제도 북만주의 부여를 반도 서남부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곧바로 공략하기는 불가능하였다. 결국 두 기사의 사실은 당시 백제가 요서지방에 세력근거지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위서(魏書)』 물길전(勿吉傳)에 물길이 해로를 통해 백제와 연결, 고구려를 칠 계획을 북위에 통보하고 북위의 의사를 묻는 기록이 보인다. 이 역시 동북부 만주에 있던 물길이 해로로 백제와의 연결을 모색한 것은, 비록 이미 6세기 초 당시에는 소멸되었더라도 요서지역까지 진출한 바 있는 백제의 세력에 대한 기대에서일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 요서경략에 대한 기록이 한곳도 아니고 여러곳에서 나오는것 같은데 이정도면 백제의 요서경략설이 아니라 백제가 확실히 요서땅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해도 되는거 아닌가요?
저는 역사에 대해 그리 깊은 지식이 있는 편이 아니라 여기다른 분들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