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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1-19 00:38
[한국사] 부여와 읍루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479  


■ 부여



부여는 전한 시대 이래 읍루를 지배하고 있었다.

조위 문제 황초(黃初,  220~226) 연간에  부여의 과도한 과세와 부역에 
반발하여 읍루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을 끝내 진압하지 못 하였고, 
이로써 읍루 지배력을 상실한다.

(* 세금과 부역을 부과했다 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간접지배가 아니라 직접지배에 가깝다) 

이후 읍루(자치통감에는 ‘백제’로 기술돼 있음)의 잦은 침략을 받자
중심지를 서쪽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서기 285년, 모용외의 공격을 받아 국가가 파괴되었다.

이후 서진의 도움으로 국가를 재건하였는데
다시 서기 346년 모용준의 공격을 받아그 왕 현과 백성 5만여 명이 끌려갔다.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북표현 라마동 무덤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결과 일부 무덤군의 물질문화(마구)의 세부적 특징이 모용선비의 것과 다르고, 함께 부장된 토기를 비롯한 기타 유물이 부여 유적인 길림성 노하심(老河深) 유물과 동질하며, 그 유전형질이 현대 한국인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자 이 무덤군의 주인이 346년, 모용준의 공격을 받고 끌려간 부여 유민의 것으로 추정 결론을 내렸다. (* 붉은 글씨에는 위성위치가 링크돼 있음)

【구체적으로, 1988년 요녕성 북표현문관소(北票縣文管所)가 라마동(喇嘛洞) 삼연문화묘에서 금동 마구 한 세트를 수집되었는데, 이후 1993∼1998년 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研究所)에서 라마동의 삼연문화묘에 대해 다섯차례 발굴을 진행하여 대량의 금속마구를 수습하였다.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처음에 모용선비의 무덤이자 그 물질문화로 파악하였는데, 연구를 심층적으로 진행함에 따라 일부 무덤군의 마구(안교편)가 모용선비와 다른 세부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고, 해당 무덤군에서 함께 출토된 토기를 비롯한 기타 유물이 부여의 유적인 길림 노하심 유적의 건과 동질하여서 우선 라마동 무덤군 가운데 일부에 해당하는 무덤군의 주인을 346년 모용준의 공격을 받고 끌려온 부여 유민의 것으로 추정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와 그 결과적 사실은 2006년 대한민국에서 국제학술회의(가야사 세미나)가 있었을 때에 중국 측 학자(전립곤)가 발표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중국고고학계에서는 라마동 무덤군의 인골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진행하였는데 처음 부여 유민의 것으로 추정한 무덤군의 인골이 지닌 유전형질이 선비족 계통이나 북중국인 계통이 아닌 현대 한국인과 그 형질이 동질한 것으로 나타나서 이 무덤군의 주인을 346년 모용준의 공격을 받아 끌려간 부여 유민들의 것으로 결론내렸다. 이 연구와 그 결과적 사실은 2010년 대한민국에서 국제학술회의(가야사 세미나)가 있었을 때에 중국 측 학자(길림대 주홍)가 발표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부여 지역에 남아있던 잔존 세력이 다시 부여를 부흥하였는데 모두루 묘지명에 '북부여수사'라 하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에, 또한 훗날 474년 경 물길의 사신 을력지의 북위 방문 일정에서의 행적 등으로 볼 때에 현 장춘, 사평 등지는 이미 고구려 차지가 된 것으로 추정되며,

부여를 공격하여 몰아내고 들어선 물길국의 위치가 현 하얼빈을 중심한 지역이므로, 346년 모용준의 공격을 받아 국가가 파괴된 후에 다시 재건된 부여의 위치 역시 하얼빈을 중심한 지역으로 생각된다. 

이후 물길국과 고구려 사이에서, 고구려의 보호를 받다가 494년, 부여 왕이 처자를 데리고 스스로 고구려에 귀순함으로써 완전히 고구려에 통합되고, 역사에서 그 본적을 감추게 되었다.

부여의 자손은 고구려, 백제, 두막루 등의 국가가 있으며, 신라와 가야 역시 부여 계통으로 추정된다.

실질적으로, 우리 역사의 적통은 고조선의 후신인 부여에서 왔으며, 위만조선은 우리 역사의 적통과 무관하다.



■ 읍루



읍루는 옛 숙신으로서, 호칭이 혼용되었다. 3세기 초에 부여로부터 독립한 읍루는 서기 280년, 고구려 서천왕 11년에 고구려의 변경을 침입했다. 이 때에 고구려는 달가가 주장이 돼 숙신을 정벌하여 본진이 있던 단로성(檀盧城)을 빼앗고, 추장을 죽인 후에 숙신 백성 6백여 가를 포로로 잡아 사민시키고, 다른 항복한 부락 예닐곱 곳을 복속시켰다. 

이후 4세기 초의 숙신은 그 중심지가 연해주 최북단, 현 흑룡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지역으로 옮겨가 있던 것이 산해경의 곽박 주석과 진서 등에 나타나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의, 영락 8년, 즉 서기 398년 기사에 태왕께서 군대를 보내 숙신 지역을 순찰하고, 포로를 잡아왔으며, 숙신을 복속시킨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후 5세기 말, 읍루(숙신)는 물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 때의 물길은 백제의 지원을 받아서 현 하얼빈 지역에 있던 부여를 공격해 몰아내고 그곳에 물길국을 세웠다.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국가가 크게 파괴되어 와신상담하여 왔는데 물길국과 북위를 규합해, '백제 - 물길 - 북위'의 국제 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를 압박하여 마침내 멸망시키려는 외교적 노력을 벌였으나 고구려와의 파워게임에서 북위가 밀리고, 고구려가 지두우를 유연과 분할하고, 물길 사신의 북위 방문을 도운 거란의 일부 부족을 징벌하고, 다시 백제를 대공격하여 파괴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물길은 이후, 위서의 기록을 분석하여 보면 고구려 사신을 따라서 위나라를 방문하였는데, 6세기 말이 되면 흑수말갈이라는 명칭으로,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된 채 등장한다.

당 태종의 고구려 침략 당시 흑수말갈군 3천여 명이 당나라 군대에 의해 생매장된 바 있다.

서기 720년대에, 이 당시 거란에 친당 기류가 형성되면서 그동안 평주(현 진황도), 어양(현 당산시), 유주(현 북경시) 등을 전전하던 당나라 영주가 일시적으로 현 칠로도산 동북쪽으로 다시 진출하게 되었다.

이 때에, 흑수말갈의 추장 예속리계(倪屬利稽)가 당나라를 방문하여 조현(조근)을 하였고, 당 현종이 예속리계에게 발리주자사(勃利州刺史) 벼슬을 주면서 흑수말갈을 기미 통치하여 발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점차 가시화 되자 발해는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 732년 등주 함락과 733년 마도산 전투라 하는 대대적인 당나라 침공을 야기하였다.

이 때 이후로 발해에 완전 복속돼 발해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되는데, 발해 멸망 후에 등장한 이른 바 생여진이 바로 이 흑수말갈이다. 

(* 한편,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고려사 세가 등의 기록을 보면,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흑수, 또는 흑수말갈이 신라, 또는 고려와 접촉한 사실이 나타나는데 이를 근거하여 볼 때에 발해의 중앙집권력은 이미 9세기 후반부터 약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생여진은 고려사에는 동여진, 또는 동북여진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발해 멸망 후에 발해의 옛 중심 터전에 해당하는 현 하얼빈 일대와 목단강 일대, 훈춘 일대로 진출해 터 잡은 이들이다. 한편 여전히 흑수, 즉 연해주 흑룡강 일대에 남아있던 나머지 잡족들의 하나로 흑수여진이 있었다.

______________

□ 연구 및 작성 : 무쿠리(mvkuri)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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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바 21-01-20 05:01
   
라마동 고분군은 중국식 분석을 너무 추종한것 같습니다. 이것에 대한 이견입니다.
346년 선비가 부여 공격하고 그 유민의 유물이 라마동 고분군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라마동 고분군을 여울가 모여씨 유물로 봅니다.
근거는
봉유의 347년 싱소문 10만의 도성 포로 서쪽 변경 나누어 살게 해야......
우문부=창려군(도성을 기준으로 우문부의 반대쪽)
고구려=석성(고화 고운) 도성기준 서북
백제 왜=수경주 고평천수 왜성 유류성 도성기준 서북
을련= 수경주 백랑수 중하류 하련성 련성 도성기준 동쪽
부여= 요서군 영지현(385년 여암) 도성기준 서남
모용선비는 봉유의 상서문 처럼 포로 발생지에서 도성 기준 반대편에 사민 한것이 사서로 증명이 됩니다.
라마동 고분군은 모용선비 화룡성으로 비정되는 조양의 근교 동쪽으로 봉유의 상소문 내용과 배치되며 사서에 나타나는 다른 국가 포로 사민 위치와 배치됩니다
그 유물이 유일하게 나타난 것이라면 너무 찬란하다고 생각됩니다.
즉 라마동 고분군은 모용외가 도피한 여울가이며 302년 모여구 모여하 부터 모용선비와 찬란한 문화와 권력을 공유하고 385년 모여근 때 모용선비에 제거된 모여씨로 보야야만 라마동 고분군의 찬란한 유물이 설명 된다고 판단됩니다.
     
감방친구 21-01-20 05:29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부여와 백제 연구에 좋은, 대안적 시각이 돼줄 의견입니다
감방친구 21-01-20 21:39
   
삼바님의 의견을 검토한 후 받아들여서 본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였습니다.

__________

<수정 전>

이 때 끌려간 이들이 남긴 무덤이
북표현 라마동 부여인 무덤으로 이들의 유전형질은 현대 한국인과 동일하다.

<수정 후>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북표현 라마동 무덤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결과 일부 무덤군의 물질문화(마구)의 세부적 특징이 모용선비의 것과 다르고, 함께 부장된 토기를 비롯한 기타 유물이 부여 유적인 길림성 노하심(老河深) 유물과 동질하며, 그 유전형질이 현대 한국인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자 이 무덤군의 주인이 346년, 모용준의 공격을 받고 끌려간 부여 유민의 것으로 추정 결론을 내렸다. (* 붉은 글씨에는 위성위치가 링크돼 있음)

【구체적으로, 1988년 요녕성 북표현문관소(北票縣文管所)가 라마동(喇嘛洞) 삼연문화묘에서 금동 마구 한 세트를 수집되었는데, 이후 1993∼1998년 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研究所)에서 라마동의 삼연문화묘에 대해 다섯차례 발굴을 진행하여 대량의 금속마구를 수습하였다.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처음에 모용선비의 무덤이자 그 물질문화로 파악하였는데, 연구를 심층적으로 진행함에 따라 일부 무덤군의 마구(안교편)가 모용선비와 다른 세부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고, 해당 무덤군에서 함께 출토된 토기를 비롯한 기타 유물이 부여의 유적인 길림 노하심 유적의 건과 동질하여서 우선 라마동 무덤군 가운데 일부에 해당하는 무덤군의 주인을 346년 모용준의 공격을 받고 끌려온 부여 유민의 것으로 추정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와 그 결과적 사실은 2006년 대한민국에서 국제학술회의(가야사 세미나)가 있었을 때에 중국 측 학자(전립곤)가 발표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중국고고학계에서는 라마동 무덤군의 인골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진행하였는데 처음 부여 유민의 것으로 추정한 무덤군의 인골이 지닌 유전형질이 선비족 계통이나 북중국인 계통이 아닌 현대 한국인과 그 형질이 동질한 것으로 나타나서 이 무덤군의 주인을 346년 모용준의 공격을 받아 끌려간 부여 유민들의 것으로 결론내렸다. 이 연구와 그 결과적 사실은 2010년 대한민국에서 국제학술회의(가야사 세미나)가 있었을 때에 중국 측 학자(길림대 주홍)가 발표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삼바 21-01-20 22:22
   
고맙습니다.
그런데 표시해 주신 라마동 고분군이 조양의 북동쪽이네요.
제 기억이 오랜된 것이기는 하지만 저는 동쪽 근교로 알고 있습니다.
구글 지도에서 辽宁省北票市南八家乡四家板村  대릉하  이 위치를 라마동 고분군 위치로 알고있는데. 확인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감방친구 21-01-20 22:45
   
예, 해당 무덤군은 북표현 라마동 삼연문화 지구에 해당하더군요
구글위성지도에서의 위치와 인력으로 그린 그림 지도와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더군요
저도 구글 위성에서 위치를 찾아보고 생각보다 멀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또 막상 다시보니 그렇게 먼 위치도 아니더군요
          
감방친구 21-01-20 22:47
   
아, 다시 찾아보니 제가 위치를 잘못 표시했습니다
지적을 안 해주셨으면 큰일날뻔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방친구 21-01-20 22:50
   
링크 수정했습니다
떡국 21-01-23 10:25
   
라마동 고분군에서 나온 유물들을 일전에 검색해서 찾아본 적이 있는데
이건 뭐 그냥 고구려,신라,가야,백제 거랑 100% 똑같다고 해도 무방하더군요.
오히려 동시대 모용씨 계통 무덤에서 나온 것들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있고요.
고고학을 잘 모르는 일반인이지만 유전자 분석 이런거 이전에 그냥 논쟁의 여지 자체가 없겠더라고요.
     
삼바 21-01-23 12:46
   
네 그렇습니다.
특히 가야 신라 왜는 라마동 고분군의 유물이 최상위 무덤에서 나옵니다.
게다가 유물이나 문화 층을 보면 모용선비가 라마동으로 이동 한것이지 부여가 라마동으로 이동한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라마동 고분군 세력은 346년 부여의 포로로 볼수 없습니다.
또 모용선비의 대극성은 객좌(조양의 서남쪽 대릉하 상류)에 있었는데 중국은 의현(조양 동남 대릉하 하류)에 있다고 조작 하였는데. 우리 학자들의 머리에 너무 박혀있어서 중국식 분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수경주 백랑수만 잘 살펴 보아도 알수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조만간 제가 글을 써볼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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