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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1-15 00:10
[한국사] 고려의 서경은 정말 현재 평양이었을까?
 글쓴이 : 보리스진
조회 : 1,422  

김부식의 전에 평양의 북쪽은 산을 등지고, 삼면이 물에 막혀있다고 했다. 

권근의 기에 평양은 나라에서 가장 큰 진(鎭)이었다고 했다.

자비령 나한당 기에 서해와 평양의 경계선에 크고 높은 산이 있어 여행객이 이곳을 넘을 때마다 고생이 심한 까닭에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자비령(慈悲嶺)이라고 했다.

현재의 평양은 평야지대라서 위와 같은 기록들과 부합되지 않는다.

얼마나 산을 넘기 힘들었으면 자비령이라고 이름지었을까. 현재 평양은 강원도가 아니다.

산이 있으면 길을 돌아서 평지로 걸어가면 얼마든지 평양에 당도할 수 있다.


수많은 북방민족이 쳐들어와서 전쟁을 벌였다.

처절하게 전투가 벌어져서, 평야보다 산에서 싸워야 방어에 유리하다.

서경도 엄연히 수도인데, 그 중요한 곳을 방어해야하는데 왜 평야에 자리잡을까?

산이 곁에 있어야 방어에 안전하다.

개성,경주,한양은 전부 산이 곁에 있다.

자연적으로 높이 솟은 위치에 자리잡기 때문에 방어에 많이 유리하다.


그리고 북쪽으로 갈수록 겨울에 북서풍이 강하게 분다.

따라서 산이 북쪽에 있어야 이 강한 바람을 막아줄 수 있다.

그리고 산이 북서쪽에 있어야 강이 서출동류로 흐른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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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21-01-15 03:37
   
연구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연구를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흥미보다는 조금 더 강한 탐구심에서 연구자가 되는 기로, 즉 갈림길 앞에 서 계신 것인지

사학계 통설에 강한 의구심을 품게 되셨으니 그것을 해결하려면
결국은 사서를 모조리 다 보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우리 사서,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실록
여기서 고려사만 면밀히 보시는 데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에요
세가와 성보, 열전, 참역 등을 교차해서 봐야하고
그 다음에 고려사절요를 이것에 교차해서 봐야 하고
또 동인지문사륙에서 관련 내용이 없나 검토를 하셔야 할 것이고

이들 사서는 이미 국역돼 있으니 수월하실 겁니다
그런데 과연 국역된 내용과 실제 원문이 맞는지 대조하는 작업도 하셔야 합니다

다음으로 중국사서
요사, 금사, 송사, 삼조북맹회편, 거란국지, 대금국지, 또 각종 일정록, 전요지, 요동지, 명일통지, 독사방여기요, 만주원류고, 성경통지, 성경강역고, 문헌통고, 자치통감, 속자치통감, 무경총요, 이밖에 여기에 거명하지 않은 여러 사서들

이것을 또 면밀히 국역해 가면서 분석하셔야 합니다
이것들 국역하고 분석하는 것은 무척 길고 극심한 고통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요사만 해도 본기, 열전, 지리지, 병지, 문학, 화식 등을 다 국역하고 교차해서 봐야 합니다

그러면 또 여기서 그치느냐
우리 사서와 중국 사서, 상기 수십 종을 다 대조해 가면서 분석을 해야 합니다

서경이 현 요양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몇몇 기록과 정황은 있습니다
저는 저 사서들을 모두 직접 면밀히 국역해서 대조하면서 찾았습니다

그러면 언제 현 요양이 고려 서경이 되었느냐
확언하여 말할 수 있는가?

없어요

또는 그곳이 과연 현 요양이 맞는지 확언할 수 있는가?

없어요

추정은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렇게 볼 수 있다"라고 이 한 마디 하기 위해서는
이 말 앞에 치밀한 고찰과 논증의 과정이 선행돼야 합니다

왕건은 918년에 황폐하게 버려져 있던 평양을 대도호로 승격시키고 주민을 이주시켰으며, 919년에 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평양 건설은 몇 대에 걸쳐 수십 년 간 지속되었고, 심지어 949년 정종이 죽었을 때는 노역에 시달리던 인부들이 기뻐 날뛰었습니다

대체 이 서경, 즉 이 평양이 현 요양입니까?

만약 고려 서경이 서북한 평양이 아니라 현 중국 요녕성 요양시라 생각하신다 하면
이런 것을 논파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록이 조작됐다 한마디로 그냥 밀고 나아가는데
이런 것은 연구가 아니라 문학이요, 문학에서도 저급으로, 아예 문학으로조차 취급 받지 못 합니다

이게 조작됐다
그러면 증거는? 그 증거를 우선 논설해 보여야 겠지요
이게 조작이다, 저게 조작이다, 모두 조작이다
그러면 뭘 가지고 연구를 하겠습니까?
근거가 없으니 논설을 세울 수 없고, 사료가 없으니 연구를 할 수가 없고
그냥 역사 연구는 손 놓아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연구자는 한정된 사료를 분석하여 근거를 찾고, 또 그것을 토대하여 논설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보리스진 21-01-15 11:54
   
저는 제 삶의 절반을 언어 연구에 메달렸어요.
깨달음이 많이 왔고, 나름 만족도 해요.
그런데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몇 없더군요.
언어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 무슨 말만하면 부정부터 하는 사람 등등 많잖아요.

우리말을 배우는 일본인에게 얘기해주니 많이 좋아하더라구요.
문법책에 안나오는 것들을 얘기해주니까 궁금증이 해소되면서 어려움이 줄어드나봐요.
저는 주로 영어하고 일본어 분석을 많이 했는데도 말이에요.

한편, 시간이 지나고 보니, 완벽하게 모든것을 다 깨우치겠다는 마음이 너무 강했구나.
그래서 오랜 세월을 보냈구나라고 느껴요.

그걸 하고 나니까, 이제는 완벽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생겨요.
물론 아직도 꼼꼼하게 살펴보고, 강박적으로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마음이 남아있어요.
그래도 그걸 많이 해서 이제는 편하게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생겨요.
     
보리스진 21-01-15 12:55
   
사실 누군가가 요양성 얘기를 앞으로 할거라고 미리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제 밤에 요양성과 평양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중간에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그만두었어요.

제가 역사 관련 글을 쓰기 시작한건 우연이에요.
별 뜻이 없었어요.
다른 사람 글 읽고 답변을 달면서 쓰기 시작한 것 뿐이에요.

제가 문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기록들을 끄집어내는 것도 다 마찬가지에요.
많은 분들이 주로 사서를 중심으로 해서 연구를 하시더라구요.

사람들의 관심이 조명되지 못한 곳을 찾는 게
진실을 가리는데 도움이 될꺼라고 생각해서 올린 거에요.

제가 올린 것들 내용 보시면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이에요.
대중들에게 공개해서, 학자들도 보고, 연구자들도 보고, 일반인들도 봐서, 진실을 아는데 도움이 됐으면 했지요.

제가 철령에 대해서 쓴 글을 주류학계 측 블로그가 비아냥거리는 것을 실제로 봤어요.
아직 논문이나 서적에서는 본 것은 없는 것 같네요.
일본인이 제 글을 읽어봤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역사학자들하고 대학원생들도 인터넷에 올라온 글 다 읽어봐요.
인터넷 여론만 잡아놓고 분위기만 만들어놓으면 자기들이 유리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학생들이나,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이나 자료,논문,서적 검색하는 장소가 인터넷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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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으로는요.
현재의 요양시 중심부는 사실 도읍지 자리가 아니에요.
지기가 강하게 치솟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구요. 우선순위에서 떨어진다는 뜻이에요.

북쪽 지방은 겨울에 북서풍이 강하게 부는 곳이에요.
현재 요양시는 겨울의 강한 북서풍의 살기를 그대로 받는 곳이에요.
그래서 북쪽에 산이 있거나, 북서쪽에 산이 있는 곳에 보통 자리를 잡았어요.
요양시는 북쪽이 탁트인 곳이지 않습니까.

고구려의 졸본도 의무려산 근처였다는 것은 북서쪽에 산이 있어서, 겨울의 추운 바람을 막아주는 곳에 있었어요.

물론 평야지대에 도읍지가 들어설 수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평야지대에도 지기가 강하게 치솟아 올라오는 곳은 도읍지로서 마땅한 곳이에요.
옛 어른들이 말하기를 비산비야라고 하셨어요. 비산비야 명당터

땅에서 지기가 강하게 치솟아 오는 곳 가운데 도읍지를 골라야해요.
그런데 평야지대는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리고 겨울에 추운 바람을 직격으로 맞아서 겨울에 고생하고, 농작물, 가축들도 힘들어하죠.
우리는 대체로 산에서 적들을 막아내고 방어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지기가 강하게 치솟아 오는 곳들 가운데 북서쪽에 산이 있어야 더 알맞은 곳이겠죠.
중국인이 쳐들어와서 고구려가 현재 요하를 건너 현재 요동벌판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는
어쩔 수 없으니까, 북서쪽이 탁트인 평야지대에 자리 잡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 고려의 평양이라는 것은 어디냐.
요양성(遼陽城)에 평양이 있었다기 보다는 요양로(遼陽路)에 평양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본계시 부근이라고 봐요.
本이라는 글자나 溪라고 하는 글자가 우리나라 도읍지를 뜻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신라의 수도를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지요.
伐은 (베다)는 것이에요.
백제의 수도를 거발성(居拔城), 고마성(固麻城) 이라고 하지요.
拔는 (빼다, 뽑다)는 것이고, 麻는 (삼베)라는 것이에요.
고구려의 수도를 졸본(卒本)이라고 해요.
本은 (뿌리,불휘)라는 것이지요.
평양(平陽)에서 陽(볕)이지요.

[불],[베]이런 음이 도읍지 또는 큰 도시를 뜻했던 것을 알게 되어요.
본계시의 本이나, 草河의 草나, 鴨綠江의 綠이나
전부 [불휘],[풀],[푸른] 이라는 음을 가져요.
그래서 이 지역 일대에 도읍지가 있었던 것으로 봐요.
          
감방친구 21-01-15 17:16
   
지금 요양시는 거란 동경성, 즉 옛 요양성 자리가 아닙니다
동경성은 태자하 북쪽에 있었어요
즉 지금 요양에서 태자하 건너 편
               
보리스진 21-01-15 22:43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지만,
태자하 건너편 그 자리도 대동소이한 자리에요.

저는 평양을 평야지대로 보지 않고, 구릉지대, 고개로 봅니다.
지리 과학적인 용어는 모르겠어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평야 지대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평양에서 평은 평평하다는 게 아니고, 저는 고르다라고 해석해요.
장당경, 장안성 모두를 통틀어서 분석해보면 평평하다가 아니고 자음이 [ㄱ]으로 시작해요.
그리고 단군 기록에 보면요.
하나는 태백산 단수신 얘기가 나와요.
둘째는 호랑이와 곰 얘기가 나와요.
태백산 단수신은 산신을 뜻하는거구요.
호랑이는 현재까지도 산신을 뜻하고요.
곰은 시베리아 쪽 북방민족에게 숲, 숲의 사람, 숲의 신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평양이라는 것은 곁에 반드시 산을 끼고 있어야 해요.
우리나라 도읍지라고 하는 집안, 환인, 개성, 서울, 부여, 공주, 익산, 경주 모두 다 산을 끼고 있습니다. 특히나 평야지대라고 하는 전북 같은 경우에 전주에 가장 큰도시가 있는데요
전주도 산을 끼고 있구요.
익산도 산을 끼고 자리잡았고, 나주평야에도 나주는 산을 끼고 있구요.
가야의 묘들도 산에 자리잡고 있어요.
                    
감방친구 21-01-15 23:18
   
우리말에 '난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른 벌, 즉 넓고 평평한 땅을 뜻하는 말입니다

평양(平壤)에서 壤은 땅이라는 뜻입니다

즉 순우리말에도 이미 平壤과 그대로 호응하는 명사가 존재합니다

또한

平壤이라는 지명은
꼭 우리 강역이 아니어도 중국(지역적 개념)의 지명에서도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모두 땅이 평평하고 넓은 지역을 뜻합니다

구체적으로 주변은 산으로 둘러쌓여있되
유독 그 사이에 넓게 펼쳐져 있는 땅을 平壤이라 한 사례가 우리 강역이 아닌 곳에서도
나타납니다

또한
평양이라는 지명은 고구려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신라에도 있었습니다

- 평양주에 배다리를 만들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 이사금, 413년)
- 평양주와 우두주의 지세를 살펴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736년)

물론 님이 平을 고르다로 보고, 고르다에서 음가를 추출해 본래의 말을 재구하려 하는 그 시도는 뭐라 할 거 없이 좋다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검토와 비판이 선행돼야 하는데
보리스진님은 이 과정을 간과하고 계십니다
                         
보리스진 21-01-16 00:56
   
그 얘기는 평양이 보통명사냐 고유명사냐는 논의에서 봤던거에요.

그러면 어느정도로 평평한 곳을 의미하느냐로 구체적으로 얘기가 들어가야겠죠.
지형 지리로만 따져봤을 때는요.
현재의 요양시 중심부는 평양이 아니에요.
현재의 평안도 평양도 과거의 평양이 아니에요.
평양 안학궁터도 현재의 평양에서 동쪽에 있어서, 도읍지의 자리로써 구색은 대충 맞췄어요.
그래도 저는 안학궁터 보다 동쪽으로 가야 도읍지 자리가 더 알맞다고 생각해요.

요녕성 봉성시는 평양이 맞아요.
요녕성 궁장령시를 평양으로 연구하시는 분이 계시던데, 평양이 맞아요.

고려시대 전후해서 도읍지가 어디었느냐
개성, 서울 경복궁,
도읍지 후보는 계룡산 신도안, 서울 연세대
이런 곳이 그 당시 도읍지로 알맞다고 판단되는 곳이었습니다.

저 도읍지 지형지리를 대조해서 판단해야 맞죠.
서경이었던 평양은 예외적으로 다르냐? 그건 아니라는 거죠.

말타고 다녔던 고구려 국내성, 여진족 흥경을 대조해보면 명확한 거죠.
                    
감방친구 21-01-15 23:22
   
한 나라의 도읍지라 함은
외적의 침입에 방호하기 좋고,
더하여 이뿐만 아니라 국토의 물산과 인마의 유통이 원활한 곳이어야 합니다

인류 역사상 거의 모든 나라가 이러한 곳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산이나 산고개에다 도읍을 정하고 대체 어떻게 나라를 경영한다는 말입니까
                    
감방친구 21-01-15 23:36
   
태백산 단수신이라는 말은 오직 제왕운기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태백산 단수신을 산신이라 하는 것은 지금 보리스진님의 해석이고요
그러면
태백산 단수신이 왜 산신인지에 대한 논설이 있어야 하고,
태백산 단수신을 산신이라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시조를 그저 특정한 산을 지키는 산신으로 제한하는 것 아니냐 하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님이 어원 분석하고, 재구하는 글들을 계속 봐왔는데
우리말, 그리고 한자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계속하였습니다

지금 호랑이와 곰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우리말에 대한 이해가 있는 분이시면
호랑이는 '虎狼이'에서 온 말이고,
본래 순우리말에서 호랑이는 범, 검(감/곰), 갈(/가) 등이 있었으며
따라서
호랑이와 곰을 뜻하는 우리말이 같았다는 점을 지적하셔야 하는데
그러하지를 못 하십니다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한 것은
바로 호랑이를 뜻하는 우리말이 감/검/곰/갈/가 계열로서 神, 君, 上, 尊 을 뜻하는 말이었던 데에서 온 것이며

우리 민화에서
호랑이가 늘 산신과 함께 나오는 까닭은
산신과 호랑이가 두 개체, 또는 호랑이가 산신의 조력자, 보조자, 부하가 아니라
사람 형상을 한 산신은 신을 의인화한 것이요,
호랑이는 신을 영물화한 것으로
즉 한 존재를 두 개체로 표현한 것이다
하는
해석까지 접근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보리스진 21-01-16 01:24
   
단군할아버지, 산신할아버지,
단군은 산신이 맞아요. 태백산, 마니산, 백두산

산신에게 기도 올릴 때, 산 정상에 기도 올리는 터가 따로 있기도 해요.
현재 산 정상에서 산신에게 기도 드리던 풍습이 남아있어요.
태백산 정상 신단수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풍습을 말하는 것으로 봐요.

우리나라는 산지가 70%가 넘어요. 우리나라 곳곳에 산신이 있어요.
그래서 산신에 대한 구전,전승이 전지역에 걸쳐있어요.
거의 모든 절에 산신각이 모셔져 있어요.
특정 지역을 관장하는 산신으로 제한한게 아니에요.

무속에서, 우리 민간 전승에서 호랑이가 산신하고 연계가 되어 있어서 꺼낸 말이었어요.
언어학을 드셔서 말한거하고, 민화를 드셔서 말한거하고,
그 말씀이 제가 말하고자하는 바하고 맥락상 별 차이가 없어서.
                    
감방친구 21-01-15 23:39
   
한자를 풀어서 우리 옛말을 재구하시고자 한다면

- 우리 옛말에 대한 이해, 우리 말의 음가의 변천에 대한 이해
- 음운현상에 대한 이해
- 이두, 향찰, 구결 등의 차자표기법 등에 대한 이해
- 한자음, 즉 중고음과 상고음 등에 대한 이해
등이

선행돼야 합니다

이게 최소한의 바탕입니다
이 바탕을 깔고서 재구를 해야 합니다
                         
보리스진 21-01-16 01:48
   
한자를 풀어서 우리 옛말을 구현했던 것은요.
제가 바로바로 떠오르는 것을 적은 거에요.

삼매하고 비슷해요.
완전히 삼매에 들어간 것은 아닌데요.

사실 어제 요양과 평양에 대한 글을 쓰려다가 밤이 너무 늦어서 쓰다가 중간에 그만뒀어요.
왜냐하면 요양에 대한 질문이 올라올 걸 알고 있었거든요.
정확히 누가 질문하느냐 까지는 몰랐어요.

그래서 우리 옛말이 세세하게 각론으로 가면 틀릴 수는 있겠죠.
그리고 음운,음가 변천 등을 자세하게 파고들면 더 또렷하게 볼 수는 있겠죠.

일본인이나, 우리 학자들이나, 재야 사학자들이나, 심지어 신채호까지도
거의 대부분 한자의 음으로 풀이 해석을 하시더군요.

어미,조사 같은 거는 한자의 음독으로 해석하는 게 맞구요.
그 외에는 한자의 훈독으로 제발 풀이했으면 좋겠어요.
삼국사기나, 옛 서적에서 비교할 수 있는 단어들이 여럿 있는데요.
제발 연구자들이 제 글을 보고 훈독으로 비교분석을 시도해봤으면 좋겠네요.
                    
감방친구 21-01-15 23:48
   
위에서 평양을 平陽이라 하셨는데 平壤이 옳습니다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이나 고려 서경이었던 평양을 가리키고자 하신 것이라면
그 평양은 平陽이라 쓰지않고 平壤이라고 씁니다
                         
보리스진 21-01-16 01:50
   
제가 오늘도 몇시간 동안 일을 해서요. 꼼꼼하게 살펴보지 못했네요.
          
감방친구 21-01-15 17:25
   
그리고 님이 거론해오고 있는 문집류의 글들과 그 단편은
저 역시 검토를 했던 것들입니다 단지 거론을 안 했을 뿐이죠

저는 문집류의 단편들은 연구에서 차안으로 두고 배제를 한 것입니다

제가 본래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입니다

문학은 문학적 표현 방식이 있습니다
상징, 은유, 대유, 대구 등
또 작가의 문학적 태도가 있습니다
또한 작가는 실제 사실공간이 아니라 사실공간을 작가 본인이 가공한 문학적 공간에서 재구성합니다

즉 이를테면
학야와 요양을 거명했다 해서
무조건 실제 지명인 학야현이나 요양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에요

또 요동을 거명했다고 해서 현 요동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정보를 기술한 정사와 정서표현이 주가 되는 문집의 글은 역사연구에 있어서 주와 부가 뒤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보리스진 21-01-15 23:13
   
진경산수화가 있고, 관념산수화가 있어요.
제가 올린 것들은 여러 가지 가운데서 실제 자기가 보고 지은 기록이라고 판단해서 추려낸 겁니다.
진경산수화라고 판단한 것들만 다 올려놨어요.

옛날 사람들은 종이가 부족했고, 우리처럼 글을 길게 늘려쓰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문학을 쓰기 위해서만 시를 쓴게 아니구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도 시를 쓴 거에요.
제영시라는 게 있어요.
그 내용들을 보면은요. 여행 기록문 같은 느낌이에요.


그런데 고려시대 기록부터 조선시대 기록까지 분석을 해보면
님이 말하는 문학적 표현 방식이 조선시대에 주로 많이 쓰입니다.
요동반도 근처 지명에 대한 시들을 읽어보면요.
명나라 사람하고 조선 사람들이 외교관들이 교류하면서 남긴 기록들에 그런 표현이 많이 등장해요.
특히나 명나라 사람들 시에 그런 표현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조선의 압록강 의주에서 요양성까지 실제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경계에서 요양 근처까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보고 쓴 것이냐 아니면 관념적인 장소로 쓴 것이냐.
고려시대 시하고 조선시대 시하고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있기는 합니다.

노태돈 교수하고 중국인들이 요동을 한반도까지도 통틀어서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 요하도 이동하고 요동이라는 지역도 이동했다는 거 알고 있었습니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도 올렸습니다.
없는 기록을 가져다가 최대한 모아보려고 하는 것이죠.

우리는 기록을 남기고 싶으면 일기장에 적으면 되고, 보고서에 남기거나, sns를 사용하면 됩니다.
궂이 시를 안씁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기록을 남기고 싶으면 그냥 시로 적기도 했어요.

역사 연구에서 주와 부를 뒤바꿀 필요가 없어요.
제가 하는 것은 아무도 안하는거, 알려지지 않은거 합니다.

30년이상 재야학자들이 서적도 쓰고, 또 학계의 소수파들이 쓴 논문들도 있구요.
인터넷에서 재야학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글들을 써놨습니다.
근데 그래서 논쟁이 끝났습니까?
공기관에서 작성한 기록하고 사적으로 개인이 작성한 기록하고 두개로 나눠볼 수가 있습니다. 공기관에서 빈 부분을 개인이 작성한 기록으로 채워넣을 수 있지요.
프란치스 21-01-15 13:05
   
여러분들이 있어  진실된 역사가  밝혀질듯 합니다.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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