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회백의 의주목 제영시에 하늘은 학야(요하 근처)에 닿으니 바람 쓸쓸하고, 땅은 용만에 닿으니 길이 아득히 멀다는 기록이 있다.
김부일의 서경 용언궁 대연 치어에는 앞으로 요양의 땅이 다시 고려의 영토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정현의 시에 용천(의주)이 요양과 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색의 기에 향산은 요양과 접경하고, 압록강의 남쪽, 평양부의 북쪽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몽주의 시에 고려의 국경 말갈수에는 산이 겹겹이고, 요양성에는 길이 드넓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정몽주의 시에 말갈수를 건너면 학야(요하 근처)의 하늘이 드넓을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의 북계가 여진,달달,요심(遼瀋)과 경계가 서로 맞붙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는 요나라의 동경이 모두 고려의 영내에 있고, 압록강 안팎이 모두 고려땅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색의 시에 명나라의 정료위가 쌍성과 접경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료위는 동으로 압록강, 북으로 개원까지가 영토 범위 한계였다는 기록이 있다.
압록강은 고려의 북계이고, 쌍성은 고려의 동북계 이므로 쌍성은 개원의 동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쌍성에는 화주, 정주, 함주 등의 주들이 속해있었다.
요양은 요나라에서 명,청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가 변함이 없었다. 개원은 명나라 이후 그 위치가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이 기준이 된다.
따라서 고려 말기에 고려의 영토는 현재 요녕성 요양시와 요녕성 개원시에서 접경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
고려사 지리지에는 마탄촌(馬灘村)이 강동현에 속했다가, 성주(成州)에 속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탄(馬灘)은 평양의 대동강가에 있는 지명이고, 강동현은 평양부에 속한 현이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평양과 성주(成州)는 근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려사에는 마탄(馬灘)에서 옛 화주(古和州)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평양과 성주(成州)는 옛 화주(古和州)로 가는 길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른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거란이 쳐들어와서 지채문은 화주를 방어하고 있었다. 왕이 명령하여 서경을 돕게 하였다.
화주(和州)에서 강덕진(剛德鎭)으로 이동한 다음에 서경(西京)에 도착한다.
강덕진(剛德鎭)은 성주(成州)에 속해 있던 곳이다. 따라서 화주(和州), 성주(成州), 서경(西京)은 서로 인접 거리에 있었던 지역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3.
향산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보도록 하겠다.
그동안 학계와 재야에서 요동반도의 요양에 고려의 평양이 위치해있었다는 연구가 많이들 나왔다.
향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었으므로, 현재의 요양시보다 북쪽에 위치해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요녕성 개원시 동쪽은 과거에 명나라의 정료위와 고려의 쌍성이 접경하고 있었다.
화주(和州)는 쌍성에 속한 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화주(和州)는 현재 요녕성 개원시 동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려사에는 평양과 성주(成州), 화주(和州)가 인접거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향산(香山)과 성주(成州)가 근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면 성주(成州)는 평양과 화주(和州)의 가운데에 있었던 것을 알게된다.
평양은 현재의 요양시의 동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화주(和州)는 현재의 개원시 동쪽에 있었다.
그래서 현재의 요녕성 궁장령구와 현재의 요녕성 청원 만족 자치현의 사이에 성주(成州)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향산의 위치도 요녕성 궁장령구 동쪽, 그리고 요녕성 청원 만족 자치현 서쪽에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면 이제 향산(香山)의 위치가 나오게 되는데, 현재의 요녕성 무순시 근방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