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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18 16:23
[한국사] 한국고대사신론(1)ㅡ윤내현
 글쓴이 : 지누짱
조회 : 1,279  

머리말

 

기존 관념은 강하게 작용한다. 필자는 지난 수년 동안 한국 고대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점을 절실하게 느꼈다. 지금까지의 통설과 크게 차이가 있는 한국 고대사에 관한 필자의 견해가 발표되는 동안 그 내용에 공감하여 격려를 보내 준 분들도 있었지만 강한 반발과 의문을 표시한 분들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필자의 견해에 반발이나 의문을 표시한 분들의 생각은 그간의 통설이나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史料(사료)의 비교. 검토를 통한 것이 아니라 그간의 통설의 영향으로 형성된 기존 관념 때문 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역사학은 철저하게 근거에 의존한다. 따라서 그 근거의 확실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료의 가치를 논하게 되고 사료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사료의 분석과 비판이라는 작업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작업 없이는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역사학이란 이름으로 발언이 허용될수 없는 것이다.

 

역사학자는 글을 쓰고 말을 하는것을 직업의 한 부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얻어낸 연구 결과가 없이는 글과 말을 삼가야 하는 학자적 양식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한국 고대사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바라면서도 그것은 먼저 사료의 검토부터 행하여지기를 기대한다.

 

한국고대사가 충분히 밝혀지지 못하였음은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다. 그리고 거기에 산재해 있는 오류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의 영향 때문 이라는 논의도 있어 왔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학자 어느 누구도 자신이 사대사관이나 식민사관의 추종자나 그 아류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고대사에 존재하는 오류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의 영향 아래서 범하여졌고 그것을 아직까지 극복하지 못하였다면 한국의 역사학자는 그 책임을 회피할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한국고대사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집필하는 동안 기존의 한국 고대사 체계가 완전히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수정 작업의 책임이 필자에게도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필자가 전공한 분야인 중국 고대사의 연구를 잠시 중단하고 한국 고대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게 된 所以(소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싣고 있는 내용은 필자가 상정한 한국 고대사의 대체적인 얼개일 뿐이며 앞으로 부분적인 수정과 보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 부수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과제들은 앞으로 능력있는 한국사학자들에 의하여 연구.해결될 것으로 믿으며 필자가 범한 오류가 있다면 질정이 있기를 바란다.

 

이 책에 실린 6편의 논문 내용에는 중복된 부분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원래 각각 독립된 논문으로 집필.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 도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1986년 3월 1일.

북악산 기슭 진관재에서

尹 乃 鉉 (윤내현).

 

 

 

차 례

 

1. 導論 (도론)

 

2. 古朝鮮의 위치와 疆域(강역)

 

(1) 서론

(2) 한반도 북부설의 비판

(3) 고조선의 위치와 遼東(요동, 여기서 요자는 멀다는 뜻)

(4) 고조선의 西邊(서변)과 동남변( 여기서 변자는 가장자리의 뜻)

(5) 결론

 

3. 고조선의 都邑(도읍) 遷移考(천이고, 여기서 천자는 옮긴다는 뜻)

 

(1) 서론

(2) 국내사료의 분석

(3) 중국사료의 검토

(4) 천도의 사유

(5) 도읍지의 위치

(6) 결론

 

4. 고조선의 사회성격

 

(1) 서론

(2) 고대사회의 모형

(3) 고조선의 사회단계

(4) 고조선의 사회구조

(5) 결론

 

5, 箕子新考(기자신고)

 

(1) 서론

(2) 기자전설의 형성과 전개

(3) 기자전설에 대한 종내의 인식

(4) 商(상). 西周(서주)왕국의 구조와 동북부 상황

(5) 기자의 실체와 기자국의 이동

(6) 기자국의 원위치와 최후위치

(7) 결론

 

6. 衛滿(위만)조선의 재인식

 

(1) 서론

(2)위만조선의 건국

(3) 위만조선의 西邊(서변, 서쪽 경계)

(4) 위만조선의 동변

(5) 위만조선의 성격

(6) 列國(열국)시대의 개시

(7) 결론

 

7. 漢四郡(한사군)의 樂浪郡(낙랑군)과 평양의 낙랑

 

(1) 서론

(2) 한사군의 낙랑군

(3) 평양지역의 낙랑

(4) 낙랑유적의 재검토

(5) 결론

 

8. 總結(총결)

 

부록 (1) 碣石考(갈석고, 여기서 갈은 비석의 뜻)

 

 



一. 導 論 (도 론)

 

필자는 83년6월 한국사연구회의 월례발표회에서 "기자신고"를 발표한 바 있다. 그것은 기자가 실존인물임을 확인하고 그 이동경로와 기자국의 마지막 위치 등을 고증한 내용이었다

 

그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최한 한국사 학술회의에서 "중국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인식"을 발표한 이래 한국 고대사에 관한 논문을 계속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필자가 한국 고대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箕子新考(기자신고)”를 발표할 당시 필자는 그 내용이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의 한국 고대사의 구조와 전개에 관한 여러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관건이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고대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지금까지 미궁에 빠져있는 한국고대사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한국사학계의 움직임을 느낄수 없었고, 더우기 "중국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인식"을 발표한 이후 필자의 고대사에 대한 견해에 대해 상당히 강한 반발이 한국 사학계에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필자의 견해에 대한 반발이 사료나 논리의 전개에 모순이 있다든지 해야지, 종래의 정설에 대한 선입견이거나, 종래의 정설을 지지해 왔던 학자들이 학계에서 누리고 있는 권위의 영향 때문이라면 그것은 학자적인 양식으로 다호히 배격 되야한다.

 

종래의 정설과 다른 한국고대사의 인식체계를 제시한 것은 필자가 처음이 아니다.

일찌기 신채호, 장도무, 정인보 등의 민족사학자들은 서로 견해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한국고대사의 전개지역을 한반도로 국한하지 않고 만주 지역으로 까지 확대하여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해방후 한국사학계에는 종래의 정설파와 민족사학자들의 인식체계가 병존하였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의 인식체계는 그 가능성여부도 검토되지 못하고 한국사학계에서 축출되었다

 

필자는 종래의 여러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부정하거나 옹호하는 전제 위에서 논의를 전개 시킬 의사는 없다

다만 고조선으로 부터 한사군에 이르기까지의 고대사의 전개에 관한 여러 견해와 사료를 구체적이고 종합적으로 검토한 업적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사학계가 어느 하나의 견해를 정설로 일방통행 시키고 있는데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6편의 논문은 고조선으로부터 한사군에 이르기 까지 고대사의 구조와 전개에 대한 필자의 견해가 전체적으로 반영될 것인데 이를 미리 소개한다

6편의 논문중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을 제외한 5편의 논문은 필자가 최초로 제출한 독자적인 견해라 할수있다

 

고조선의 위치는 지금의 발해 北岸(북안)으로 보고 그 강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로 부터 한반도 북부의 청천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민족 사학자들에 의해 이미 제출되었지만, 사료 제시나 논리 전개에 있어서 설득력을 갖기에 충분치 못했다

 

북한에서는 지금은 고조선의 강역을 중국 요녕성에 있는 大凌河(대능하)로부터 한반도 북부의 청천강 까지로 보는 설이 우세한 위치에 있다.

그런데 고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한 한반도 북부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보고자 할때 고조선 자체에 관한 연구뿐 아니라 그 것을 뒷받침 할수있는 기자, 위만조선, 한사군, 평양의 낙랑유적 등에 관한 충분한 연구결과가 있어야 한다

 

"고조선의 도읍 천이고"에서는 고조선의 천도과정과 도읍의 위치를 추적할것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記"에 의하면 고조선은 네번 도읍을 옮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행해진 바 없다

고조선의 천도는 고조선의 성쇠및 고조선족의 활동영역과 관계를 갖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중국의 옛문헌에 기록된 내용과 고조선이 겪었던 역사적 상황을 연결시켜 검토하고 그에따라 고조선의 도읍지를 추정함으로써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의 기록이 정확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고조선의 사회성격”에서는 이미 국가단계의 사회에 진입하였고, 그 사회구조는 중국의 고대국가와 유사한 邑制(읍제)국가로서 동양적 고대봉건제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될것이다

 

“기자신고”에서 필자는 기자가 실존 인물임을 확인하고, 그 이동 과정과 정착지를 추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자국이 마지막으로 위치했던 곳이,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 난하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 변경이었음을 확인하게 될것이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한국 유학자들은 중국의 현인으로 전해오는 기자의 교화를 받았음을 긍지로 삼고자 하여, 기자동래설을 적극 옹호 했지만, 일본인들은 한국고대사의 고조선을 부정하고 위만조선과 그 뒤를 이은 한사군을 중국세력의 한반도 진출로 인식 되도록 하려고, 기자 동래설을 부정하였다.

 

“위만조선의 재인식”에서는 건국과정, 그 위치와 강역및 역사적 성격과 의미 등을 재검토 한다. 위만조선은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하여 성립되었으므로, 그 초기의 위치는 기자국 말기의 위치와 동일하게된다

그런데 기자국은 위만에게 그 정권을 탈취당할 당시에 고조선의 서쪽변경인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의 난하 중하류 동부연안에 위치했다. 따라서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부변경에서 출범하여 그 영역을 점차 확대하면서 고조선과 병존했던 정치세력이지, 고조선의 후계세력이 될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위만조선의 흥망과 더불어 한가지 밝혀야 할 것은 고구려, 예맥, 부여, 옥저, 낙랑 등 여러 정치세력의 독립이다. 중국의 옛 문헌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위만조선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지금의 요하 서쪽 지역에 거주했다. 그런데 위만이 망한후에는 요하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바뀌면서 각각 독립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즉 위만조선의 멸망은 한국고대사에 있어서 열국시대의 개시를 가져왔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것이다

 

“한사군의 낙랑과 평양의 낙랑”에서는, 한사군의 낙랑군의 위치를 고증하고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낙랑의 실체를 밝히게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위만조선의 강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 난하 동부연안으로부터 지금의 요하에 조금 못미치는 지역이었으므로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에 설치된 한사군은 당연히 지금의 요하 이서지역에 위치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사학계에서는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와 요하 이동의 만주 지역으로 인식해왔다. 그리고 한사군 가운데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믿어왔다

필자는 이러한 오류를 사료를 통해서 바로 잡게 될것이다.

그런데 평양지역에서 발견된 낙랑유적은 어떻게 설명되야 하는가?

즉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다른 낙랑이 존재했음이 확인될것이다

 

 

二. 古朝鮮의 위치와 疆域(강역, 지경)

 

1. 서론

 

고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로 보는것은 한국역사학계의 통설로 되어있다. 이런 견해는 고려중기에도 존재했고 조선시대에 이런 견해가 주류를 형성했다

그후 일본인 학자들에의해 평양지역에서 발굴된 중국식의 유적이 한사군의 낙랑군유적으로 보고됨으로써 고조서느이 위치에 대한 그런 견해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한반도 밖으로 확대해 인식하였지만, 실증성의 결여, 논리체계의 미숙등으로 부정되 왔고 해방후 40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재검토 되지 않은채 평양을 중심으로한 한반도 북부설이 통설로 정착되어 있다

 

필자는 근래에 고조선의 위치를 평양지역으로 볼수 없는 자료들을 발견하면서 민족사학자들의 고대사 인식체계에도 관심을 갖게되었다.

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인 사료에 근거하여 고조선의 위치를 복원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보다 연대가 앞서는 역사문헌은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 문헌들은 12세기 이후에 저술된 것들이기 때문에 고조선에 관한 연구는 중국문헌을 활용할수 밖에 없게된다

 

그러므로 필자는 고조선이 존재했던 당시나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기의 중국 문헌에 나타난 기록, 즉 先秦(선진)시대로부터 兩漢(양한)시대(전후 한나라)까지의 기록을 주로 활용하게 될 것이다

 

고조선의 경우 충분하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그 위치와 강역, 국가구조 사회성격 등을 밝힐수 있는 기록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연구를 보면 매우 늦은 시대의 자료에 의존한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이미 변화된 후대의 상황을 고조선시대에다 북원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는 경계해야 할 연구방법이다.

 

 

2. 한반도북부설의 비판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보는것은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로 되어있다. 그 이유는 다음 몇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 한국과 중국의 옛 문헌에는 고조선의 도읍이 평양이었다고 기록되 있는데 그 명칭이 한반도 북부에 있는 지금의 평양과 일치되어 지명의 동일성에서 그 가능성이 발견됨

 

둘째로, 한국과 중국의 옛 문헌에 대한 주석자들은 대체로 지금의 평양이 고조선의 평양이었던 것으로 기록함

 

셋째로, 고려 중기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지금의 평양을 고조선의 도읍지로 인식하여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보는것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넷째로, 지금의 평양에서는 중국식의 유적이 발굴된바 있는데 그것이 한사군의 낙랑군유적일 것으로 인식됨으로써 고고학적으로도 문헌의 기록을 뒷받침하여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상의 근거에 대해서 선입관을 배제하고 통찰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되며 그것들이 “고조선의 한반도북부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될수 없음을 알게된다

우선 한국 고대어에서 평양은 어떠한 뜻을 지녔으며 고조선의 평양이 바로 지금의 평양을 지칭하는 것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언어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고대어에서 平壤(평양)은 “大邑(대읍)” 또는 “長城(장성)”을 의미하였다

邑(읍)은 취락을 뜻하므로 대읍은 큰취락을 말한다. 일반의 취락은 읍 또는 소읍이라고 하였고 일정한 지역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을 이루는 취락은 모두 대읍 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한국고대어에서 평양은 오늘날의 큰취락 또는 도읍에 해당하는 보통명사 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때 평양은 반드시 한곳에만 있었을 수는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도읍이 이동함에 따라 평양이라는 명칭도 이동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지금의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지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 두어야 할 것은 고조선의 도읍을 평양으로 기록한 중국 문헌은 唐時代(당시대) 이후의 것이라는 점이다. 고조선과 위만조선 연구의 기본사료인 “史記(사기”와 “漢書(한서)”의 “朝鮮傳(조선전)”에는 위만조선의 도읍이 “王險城(왕험성)”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주석으로 실린 “史記集解(사기집해)”와 “史記索隱(사기색은)”은 고조선 또는 위만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의 지명이“ 險瀆(험독)” 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로 보아 고조선, 위만조선시대에 도읍에 대한 명칭으로 평양보다는 王險城(왕험성)이나 險瀆(험독)이 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王險(왕험)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王儉(왕검)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險과 儉은 통용되었거나 중국인들이 고조선 지역의 지명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儉이 險으로 잘못 기록되었을 것이므로 王險城(왕험성)은 王儉城(왕검성), 險瀆(험독)은 儉瀆(검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검성은 임검성 즉 임금성, 검독은 검터로 읽어야 할텐데 고대 한국어로 검은 임금을 뜻하므로 왕검성이나 검독은 모두 도읍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볼때 왕검성은 검터가 한자화되면서 임금과 터의 중국표현인 王자와 城자가 검과 결합되어 왕검성이 되었을 것이므로 儉瀆(검독) 즉 검터라는 말이 王儉城(왕검성)이라는 말의 원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이었다는 중국 문헌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史記(사기)” “秦始皇本紀(진시황본기)“에는 조선이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이 조선에 대하여 ”史記正義(사기정의)“에 주석 하기를 ” ”括地志(괄지지)“에 이르기를 高(句麗)가 통치하는 평양성은 본래 漢(한)의 樂浪(낙랑)군 王險(왕험)성인데 바로 옛 朝鮮(조선)이다” 라고 하였고, “通典(통전)에서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은 바로 옛 조선국의 王險)城(왕험성) 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舊唐書(구당서)“ ”高句麗傳((고구려전)“에서도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바로 漢(한)의 낙랑군 옛 땅“ 이라고 하였다

 

주지하는 하는바와 같이 “사기정의"에 인용된 ”괄지지“는 당 태종의 네째 아들인 위왕 진 등이 편찬하였으며 ”사기정의“는 장수절, ”통전“은 두우에 의하여 모두 당시대에 편찬되었다. 그런데 고조선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당시대의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이 문헌들에 나타난 평양이 반드시 지금의 평양을 지칭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일단 검토해볼 필요가 잇을 것이다

 

먼저 위의 여러 문헌들에 나오는 평양의 위치가 한결같이 지금의 평양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史記(사기)” “秦始皇本紀((진시황본기)”의 본문에는

秦帝國(진제국)의 땅이 동쪽으로 海(해)에 이르고 朝鮮(조선)에 미쳤다

고 했는데 “사기정의”에서 장수절이 주석하기를 여기의 海(해)는 渤海(발해)를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가 통치하는 평양성은 본래 한의 낙랑군 왕험성인데 바로 옛 조선이다“ 라고 하였던 것 이다

 

진제국의 동북부 경계는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灤河(난하) 상류 중류와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 에 있는 昌黎(창려) 碣石(갈석)까지 였으므로 海(해)를 발해로 본 장수절의 주석은 옳다고 생각되며 발해와 더불어 언급된 조선은 한반도 일수가 없으며 발해로부터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이 조선을 장수절은 漢(한)의 樂浪(낙랑)군 왕험성,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본 것이다

 

다음에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밝혀지겠지만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는 朝鮮(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후에 西漢(서한)의 武帝(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난하 중류와 하류 동부연안에 낙랑군을 설치함에 따라 그 곳은 낙랑군의 조선현이 되었다

 

이 조선지역에는 기자국이 그 말기에 중국의 통일세력인 진제국에 밀려 이곳에 와 있다가 오래지 않아 위만에게 정권을 탈취당한 바 있었다 다라서 기자국과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은 이 지역에 있었다는게 된다. 이렇게 볼때 장수절이 말한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의 난하 중하류 동부연안에 위치했던 조선지역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말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두우는 “通典(통전)”에서 고구려가 부여의 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면서 고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인데 그 곳에 서한 무제가 縣(현)을 설치하여 낙랑군에 속하게 하였다고 말하고 도읍인 평양성은 옛 조선국의 왕험성 이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두우가 낙랑군, 조선국, 왕험성, 고구려 평양성을 지금의 어느 지역으로 인식했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이들을 동일한 지역으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舊唐書(구당서)”에서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이 漢(한)의 낙랑군의 옛 땅이라고 말하면서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 말하기를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遼水(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靺鞨(말갈)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이 기록에 나오는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라와 백제의 위치를 말하면서 바다 건너에 있다고 말할 필요가 없고, 그 방향에 대한 표현도 옳지않다. 그래서 필자는 이 평양도 위에 언급한 지금의 난하 중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왕검성과 동일한 곳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게 되면 신라. 백제와의 지리적 관계에 대한 표현도 합당함을 알수있다.

 

이상의 고찰에서 분명해진 것은 고구려의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만을 지칭한것이 아니었음을 알수있다. 따라서 필자는 고구려의 평양성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를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魏書(위서)”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이 阿斯達(아사달)에 도읍하여 개국하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고 전하면서 아사달에 대해 주석하기를 “經(경)에는 무엽산 또는 白岳(백악)이라고 하였는데 白州(백주)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었다고도 하는데 白岳宮(백악궁)이 그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일연은 “古記(고기)”에는 이르기를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고 칭하였다고 기록하고 평양성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당시의 西京(서경)이라고 하였다

 

일연시대의 서경은 지금의 평양이므로 일연은 고조선의 도읍을 지금의 평양으로 인식했던 것 처럼 보이나 “魏書(위서)”가 전한 고조선의 첫도읍인 아사달에 대해서는 개성 동쪽이라고 했으니 그는 고조선 도읍의 위치에 대해 확신을 갖고있지 못하였고 당시의 견해들을 주석으로 기입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연이 고조선의 도읍을 개성 동쪽 또는 지금의 평양으로 주석을 한 것을 보면 그는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상정했었을 것으로 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다음의 기록에서 모순이 발견된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위만조선에 관하여 “漢書(한서)”“朝鮮傳(조선전)”을 인용하고 있는데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은 낙랑군 浿水패수) 동쪽에 있었다는 신찬의 설을 주석으로 싣고있다. 그러나 왕검성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당시의 어디였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馬韓(마한)에 대해서는 “魏志(위지)”를 인용하여 “위만이 조선(기자국)을 공격하니 조선(기자국)왕 準(준)이 좌우의 宮人(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 韓(한)의 땅에 이르러 개국하고 馬韓(마한)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한은 고구려, 진한은 신라였다는 최치원의 설을 소개하고 거기에 대해서 주석하길를 고구려가 마한을 병합하였기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하였고 또 고구려땅에 (고구려가 병합한 마한지역) 마읍산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일연은 마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국유사 “太宗春秋公(태종춘추공)”조에서 당의 소정방이 고구려 군대를 浿江(패강)(지금의 대동강)에서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 병영으로 삼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했다고 하였으니 일연은 마읍산이 있었던 지금의 평양지역을 마한으로 인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이 옳다면, 일연은 準王(준왕)이 위만의 공격을 받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렀다고 했으므로 기자국이나 위만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지역으로 보지 않았고 바다건너 먼 곳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했음을 알수있다. 그렇다면 위만조선은 고조선 지역에 있었으므로 고조선도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을수 없게된다. 그런데도 일연은 고조선의 도읍지에 대해서 개성 동쪽 또는 지금의 평양으로 주석을 한것은 그 자신이 그렇게 믿어서 라기보다 당시의 여러견해를 참고로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고조선의 위치에 관한 일연 자신의 분명한 견해는 확인되지 않는데 그것은 당시의 역사인식의 한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 三國史記(삼국사기)와 帝王韻紀(제왕운기)에는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에는 동천왕 21년 (서기 247)에 환도성이 난을 겪어 다시 도읍할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는데 ,평양은 본래 仙人(선인) 王儉(왕검)의 宅(택)으로서 왕의 도읍이었던 王儉(왕검)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평양이 당시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있다

 

다음에 밝혀지겠지만 동천왕 21년(서기 247)에는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중국의 東漢(동한) 광무제에 의하여 설치된 낙랑(한사군의 낙랑군과는 다름)이 아직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동천왕 21년에 천도하였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일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한사군이 설치 되어있던 시기에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崔理(최리)의 樂浪國((낙랑국)이 있었던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김부식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알수있다. 결국 김부식이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인식했었다는 근거를 삼국사기에서는 찾을수가 없다

 

제왕운기에는 요동에 중국과는 다른 하나의 별천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의 사방천리가 조선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했었음을 알수있다

그러면서도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아사달은 당시이 九月山(구월산)인데 弓忽(궁홀) 또는 三危(삼위)라고도 부른다고 주석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구월산을 황해도 구월산으로 인정한다면 이승휴는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보았고 요동을 한반도를 포괄한 지역으로 인식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왕운기” “ 고구려기”에서 고구려가 마한의 왕검성에서 개국하였다고 기록하고 마한의 왕검성은 당시의 서경 즉 지금의 평양 이라고 주석 하였다. 즉 고구려가 마한의 왕검성에서 개국했다는 인식은 문제가 있지만 지금의 평양지역을 마한으로 보았으므로 고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지역으로 보았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승휴가 고조선의 아사달을 구월산으로 주석한 것은 당시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로 반영시킨 것이거나, 황해도 구월산과는 다른 구월산이 고조선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어떻든 제왕운기 에서도 고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으로 본 확증을 찾을수가 없다

 

그런데 “高麗史(고려사) ”地理志(지리지)“에 이르면

 

평양부는 본래 세 조선의 옛 도읍으로서 옛날 神人(신인)이 檀木(단목)의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들이 그를 받들어 君主(군주)로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號(호)를 檀君(단군)이라 하니 이것이 前朝鮮(전조선)이요, 西周(서주)왕국의 무왕이 商(상)왕국을 멸망시키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이것이 후조선이다. 그 후 41대 후손인 準(준)때에 燕(연)인 위만이 망명하여 와서 1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준의 땅을 공탈하고 왕검성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고려사에서는 지금의 평양이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지였다고 단정하고 이 세 조선은 같은 지역에서 계승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조선시대 초기의 한극고대사 인식태도를 대표한 것으로 볼수있는데 그 후 이러한 인식태도가 조선시대 전기간을 통하여 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기자조선의 존재는 부정하면서도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지를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것은 한국역사학계의 통설로 되어 있다

 

이는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중기 이래 구한말로부터 일제시대에 걸쳐 근대사학이 성립될때까지 유교사관에 바탕을 둔 것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유교문화권에 편입되고 영토가 반도로 축소된 후대의 역사경험은 자연히 고대의 역사경험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유교라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가지고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기자가 주목되고 중세적 세계질서로서 事大(사대)관계가 존중되며, 그 결과 사대관계가 형성된 이후의 현강토인 반도를 失地(실지)인 만주보다 더 중시하는 새로운 학국사 인식의 성립을 보게된 것이다

 

이러한 학계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지금의 평양지역에서 중국식 유적이 발굴되어 西漢(서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한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일 것으로 보고 됨으로서, 그것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데 적극적인 고고학적 근거가 되었다

 

옛 문헌들은 위만조선이 고조선지역에 있었고 한사군이 위만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선후관계가 부정되지 않고 평양의 중국식 유적이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임에 틀림없다면 지금의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지였음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없게 된다

 

평양에서 중국식 유적이 발굴된후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설치되었을 것이라는 설에 반대했던 일부 학자들은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위조품일 것이라고 일소에 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 유적을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든 대표적인 것 들을 검토하여 그 타당성 여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封泥(봉니)가 있다. 평양에서 200점이 넘는 封泥(봉니)가 수집됬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은 封泥(봉니)가 한곳에서 수집된 예가 없어 처음부터 그것들 모두가 진품일것인지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 의문점은 이미 정인보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지적된바 있는데, 필자는 그 전부를 위조로 보지는 않지만 상당수 위조품이 포함됬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樂浪大尹章(낙랑대윤장)”이라는 봉니가 있는데 大尹(대윤)은 王莽(왕망)시대의 관직명이다. 西漢(서한)시대에는 郡(군)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을 太守(태수)라고 하였는데 왕망시대에는 대윤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대윤이라는 관직명에 따르면 이 봉니는 왕망시대의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왕망시대에는 서한시대에 사용하던 모든 군명을 개명했는데 낙랑군은 樂鮮郡(낙선군)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봉니가 왕망시대에 만들어 졌다면 “樂鮮大尹章(낙선대윤장)”이 되어야 한다. 군명과 관직명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품일수가 없는것이다

 

어떻든 이 봉니들은 土城(토성)부근에서 수집되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樂浪太守章(낙랑태수장)”, “樂浪右尉(낙랑우위)”, **長印(**장인)“등이 있다. 西漢(서한)과 東漢(동한)의 관직을 보면 郡(군)에는 太守(태수)가 있었고 큰 縣(현)에는 丞(승)과 左.右尉(좌 우위)가 있었으며 작은 縣(현)에는 長(장)이 있었다. 그리고 漢書(한서) 地理(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樂浪(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현과 **현이 있었다

 

따라서 봉니는 낙랑군 조선현 **현의 치소가 평양에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 되었다

 

그러나 주지하고 있는바와 같이 봉니는 공문서를 보낼대 봉함하는 것으로 사용하는것 이므로 봉니가 출토된 곳은 봉니의 주인이 보낸 공문서를 받은곳이 된다 . 따라서 봉니가 진품이라 하드라도 평양은 공문을 받은곳이 되지, 그들이 거주 하던 곳이 될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봉니가 수집된 토성지역에서는 “大晉元康(대진원강)”, “樂浪禮官(낙랑예관)“, ”樂浪富貴(낙랑부귀)“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아가 출토되었는데 이것도 평양이 낙랑군의 치소였음을 알게하는 증거로 제시 되었는데, 여기서 대진원강은 西晉 惠帝(서진 혜제)의 연호로서 서기 291년부터 299년 사이가 된다. 따라서 이 기와 연대에 의하면 이 유적의 연대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西漢(서한) 武帝(무제) 元封(원봉) 3년(기원전 108년)보다 400여 년이 뒤진 서기 290년대의 유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사군의 낙랑군유적으로 보기에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또 앞에서 언급한 봉니들의 書體(서체)에 대해서 정인보는 한시대의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정돈되 있음을 지적한바 있는데, 위의 기와에서 확인된 연대로 보아 봉니들도 한시대 보다는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낙랑예관” “낙랑부귀”등은 평양이 낙랑이라고 불리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유적의 연대는 한사군의 설치 연대와는 크게 차이가 날뿐 아니라, 다음에 확인 되겠지만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다른 樂浪(낙랑)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古墳群(고분군)이 있다. 평야에서는 중국식 고분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발굴자들은 그 위치와 墓制(묘제)로 보아 제1호분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규모가 가장 큰것 가운데 하나라 하였다. 따라서 발굴자들의 견해가 옳다면 평양의 중국식 고분은 모두가 제1호분 보다는 늦은 시기의 것이 된다

 

그런데 제1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貨泉(화천)이 있었다. 화천은 왕망시대에 주조된 것이다. 따라서 이 고분의 연대는 왕망시대 이전으로 올라갈수가 없다. 왕망시대는 불과 15년간 이었고 그 뒤는 東漢(동한)시대가 되므로 왕망시대에 주조된 화폐가 한반도에까지 도달된 시간을 감안하면 제1호분의 조성연대는 동한시대로 보아야한다 결국 고분군의 조성연대는 한사군의 설치연대 보다는 훨씬 늦은 것이다

 

넷째로, 왕광묘와 왕간묘에서 출토된 印章(인장)이 있다. 왕광묘에서는 “樂浪太守掾王光之印(낙랑태수연왕광지인)”,“ 臣光(신광)”, “王光私印(왕광사인)” 등의 목제인장이 출토되었고 왕간묘에서도 “五官掾王盰(오관연왕간)” , “王盰印信(왕간인신)” 등의 목제인장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태수연이나 오관연은 모두 군태수에게 속해있던 관리들로 이 인장들은 지금의 평양이 한사군의 낙랑군 치소였음을 알게하는 증거로 제시 되었다. 그런데 군태수에게 속해있던 관리들이 반드시 군치소에만 근무했던게 아니며 멀리떨어진 곳에서도 근무하는 경우를 배제해서는 안된다 다음에 밝혀지겠지만 평양에 있었던 낙랑은 한 때 행적적으로 낙랑군의 지시를 받는 屬縣(속현)과같은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관리인 태수연이나 오관연이 그곳에 근무하고 있었다는것이 낙랑군의 치소였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 고분의 연대이다. 인장의 서체에서도 그것이 서한시대보다 늦은 시기의 것임을 알수 있는데 왕간묘에서 명문이 있는 칠기가 출토되어 그 조성연대를 분명하게 해 주었다. 칠기 가운데는 “ 永平 十二年(영평12년)” 이라는 명문이 있는것이 있었는데 영평12년은 東漢 명제 때로서 서기 69년이 된다. 따라서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서기 69년 이전으로 올라갈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고분에서 출토된 목재를 이용하여 방사성탄소측정이 행해진바 있는데 그 결과는 서기 133년이었다. 결국 이 고분도 한사군이 설치된 서한시대의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늦은 동한시대의 것이다.

 

다섯째로, 秥蟬平山君神祠碑(점선평산군신사비)가 있다. 이 비는 앞에서 언급한 토성의 동북 150m 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비문의 첫머리를 보면 “*和二年 四月戊午(*화2년 4월무오), 秥蟬長渤興(점선장발흥)” 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서한과 동한시대에 長(장)은 縣(현)을 다스리던 관리였으므로 이 비는 점선현의 장이 세웠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한서 지리지를 보면 서한시대의 낙랑군에는 秥蟬縣(점선현)이 있었고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동한시대의 낙랑군에는 占蟬縣(점선현)이 있었다. 이로보아 서한의 점선현의 한자표기가 동한시대에는 달라짐을 알수 잇는데, 黏. 占. 秥이 당시에는 통용되었기 때문에 비문에서는 秥蟬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비문에 나오는 점선은 서한시대 낙랑군의 黏蟬縣을 말하며 이 비가 서있는 지역이 바로 黏蟬縣 지역일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에대해 정인보는 점선장이 자신의 관할지역에 비를 세울 경우에는 자신의 직명을 새겨 넣지 않는것이 한시대의 비문 양식이라고 말하면서 비문에 점선장 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비가 서 있는 지역이 점선이 아님을 알수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크게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였다. 비문의 양식이 언제나 일치하였을 것으로는 볼 수 없기대문에 정씨의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볼수 없지만 참고할 가치는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필자는 이 비에 대해 두가지 문제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는 이비가 세워진 연대이다. 비문의 첫 자는 마손이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고, 둘째자는 和(화), 셋째자는 二(이)와 비슷 하였다고 한다 그러데 和字가 들어간 중국의 연호는 元和(원화), 章和(장화), 永和(영화), 光和(광화), 太和(태화) 등이 있는데 元和가 가장 빠른 연대이다. 元和는 東漢 章帝의 연호로서 그 원화2년은 서기 85년이다. 따라서 비문의 연호를 가장 빠른 것으로 계산하더라도 이 비는 동한시대의 것이 된다. 다시말하면 한사군의 설치연대 보다는 훨씬 늦은 것이다 . 둘째로 黏. 占. 秥이 음이 같다고 해서 동일한 의미로 볼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음이 같으면서도 다른 문자를 굳이 사용한 것은 서로 구별할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음이 동일한 다른 지명이었을 것이다

 

이 비의 건립연대가 서한시대가 아니라는 점은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강하게 뒷받침 하여준다

 

여섯째로, 孝文廟銅鐘(효문묘동종)이 있다. 이 동종의 명문은 “孝文廟銅鐘用十斤, 重冊十斤, 永光三年六月造” 라고 되어 있다. 永光(영광)은 서한 元帝의 연호로서 영광3년은 기원전 41년 이므로 이 동종은 서한시대에 제조된 것이다. 이 동종은 제9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 되었는데 이러한 동종이 평양에서 출토된것은 평양이 서한의 낙랑군 치소로서 孝文廟(효문묘)가 있었음을 알게하는 증거라고 인식하였다. 효문은 서한의 文帝(문제)를 말하는데 과연 지금의 평양지역에 효문묘가 설치될수 있었을까? 서한시대에는 郡國廟(군국묘)가 있었는데 군국묘는 高祖(고조)가 그의 아버지 太上皇(태상황)의 묘를 모든 제후왕의 도읍지에 설치하도록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국묘로서의 皇帝의 묘가 모든 군에 설치 되었던 것은 아니다. 군국은 그곳을 巡行(순행)을 했거나 잠시라도 거주한 일이있는 , 다시 말하면 그 지역과 연고가 있는 황제에 대해서만 廟(묘)를 설치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한사군은 武帝(무제)때 설치되었고 文帝(문제)는 무제보다 앞선 황제였다

그러므로 문제는 낙랑군과 연고를 맺을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설사 지금의 평양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효문묘는 설치될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 두어야 할것은 서한의 군국묘는 元帝(원제) 영광4년(기원전 40), 즉 평양에서 출토된 동종이 제조된 1년후에 모두 폐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효문묘동종이 출토된 제9호분의 조성연대는 함께 출토된 銅鏡(동경)가운데 서한시대 이후의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한시대 이전으로는 올라갈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과 같은 점을 종합해 볼때 이 효문묘동종은 다른곳의 군국묘에서 사용되었던것이 군국묘가 폐지된 후 어떤 경로를 거쳐 제9호분 주인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사망과 더불어 부장품으로 묻혔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곱째로, “夫租薉君(부조예군)”, “夫租長(부조장)”등의 銀印(은인)이 있다. 이 은인은 1958년 평양의 정백동 土壙墓(토광묘)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묘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 또는 기원전 1세기 경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한의 낙랑군에는 夫租縣(부조현)이 있었다. 그러므로 평양에서 “부조예군”,“부조장”등의 은인이 출토되었다고 하는것은 그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 이었음을 알게하는 증거라고 인식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이미 김정학에 의해서 지적되었듯이 “부조예군”으; 은인은 낙랑군 설치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사군이 설치된 서한시대 이후의 관직을 보면 郡(군)에는 太守(태수), 大尹(대윤), 丞(승), 長史(장사)가 있었고 縣(현)에는 令(영)이나 長(장), 丞(승),尉(위) 등이 있었을뿐 君(군)이라는 관직은 없었다

 

그러나 漢書(한서) 武帝記(무제기)에 “元朔(원삭) 원년 (기원전 128) 가을에 東夷(동이)의 薉君(예군)인 南閭(남려)등 28만 명이 항복하니 그곳을 蒼海郡(창해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東夷(동이)의 薉族(예족)이 君(군)이라는 관직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부조현은 낙랑군에 속해있었는데 낙랑군 지역은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위만조선에 속해있었다. 따라서 부조예군은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사용하던 관직명임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조예군의 묘에서는 전형적인 고대 한국 청동기인 細形銅劍 (세형동검)등도 출토되어 그 주인이 중국계가 아님을 알게하여 주었다. 부조예군의 은인은 漢(한)으로부터 주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필자는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만들어 졌을 가능성을 인정하고있다. 고조선은 西周(서주)시대이래 중국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었으므로 漢字(한자)는 물론 중국의 문물제도가 상당히 수입되어 있었을 것이며 위만조선에 이르면 그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중국 망명객에 의하여 형성되어 있었을 것인데 그들은 서한의 문물제도에 매우 친숙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고찰로서 부조예군 은인이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인 되었지만 그 출토지점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부조였고 후에는 낙랑군의 부조현이었지 않겠느냐는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나 다음에 확인되겠지만 한사군의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灤河(난하)의 동부 연안에 있었다. 따라서 낙랑군의 부조현이나 고조선, 위만조선 시기의 부조도 그 지역에 있었다는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조예군 은인은 위만조선이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후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하던 시기 또는 서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던 시기에 당시의 지배계층이던 부조예군이 이에 항거하면서 지금의 평양지역으로 이주해 왔을것임을 알게 하여준다. 지금의 평양은 원래 마한지역이었는데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에 있었던 낙랑의 토착민들이 외세에 항거하다가 평양지역으로 이주해와 그 지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함으로써 평양지역도 낙랑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필자는 믿고있다.

 

이제 부조장 이라는 은인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한시대의 현에는 장이라는 관직이 있었다 따라서 이 은인은 낙랑군 부조현의 장이 소유했던 것이라고 볼 수있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점은 이 부조장 은인은 문자의 형태만 알아볼수 있도록 부식 시킨 것으로 인장으로서는 사용할수 없는 형식적인 물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묘의 주인이 부조현의 장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망시에는 자신이 사용했던 인장을 소지하고 있지 못했음을 알수있다. 따라서 필자는 부조장묘의 주인도 먼곳으로 부터의 이주민 이었을 것으로 믿고있다. 이 부조장묘는 앞의 부조예군묘와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친연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믿고있다. 그런데 필자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싶다/ 즉 부조장은 부조예군과 친연관계에 있었거나 그 후손 이었는데 부조예군이 외세에 항거하다 지금의 평양으로 이주한후 그 지역에 남아 낙랑군 부조현의 장이 되었다가 후에 그도 부조예군이 거주하고 있던 평양으로 이주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종합해 볼때 해방 이후에 출토된 부조예군, 부조장의 은인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될수 없고 해방전 일본인학자들에 의하여 조사 발굴된 고분.토성등 소위 평양의 낙랑유적은 그 조성연대가 한사군이 설치 되었던 서한시대가 아니라 그보다 늦은 동한시대 이후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 하였다

 

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거운데는 서한시대나 그 이전의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은 늦은 시기에 제조된 유물과 함께 출토됨으로써 후대에 뭍혀진 것임을 알게하여 주었다 소위 낙랑유적의 성격을 밝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출토된 유물의 제조연대가 아니라 유적의 조성연대인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한가지 의문을 갖게된다. 그것은 한사군의 낙랑군은 서한 전기에 설치되었는데 지금의 평양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 이었다면 어찌해서 그곳에서 서한의 유적은 보이지 않는가 하는점이다. 한사군은 서한시대에 설치되었지만 유적은 그보다 늦게 조성되었을 수도있다 그러나 그 많은 중국식 고분과 유적이 모두 동한시대 이후의 것이라면 그 성격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던 시기에 지금의 평양에는 어떠한 정치세력이 있었으며 평양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낙랑예군” “낙랑부귀”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는 이 지역이 낙랑과 관계가있음을 알게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은 다음의 기록이 해명하여 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서기32)조를 보면

여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를 여행하였는데 낙랑왕 최리가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는 묻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같지 않은데 혹시 북쪽의 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드디어는 함께 돌아가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는 기록이 보인다. 위의 내용에서 神王은 고구려의 대무신왕을 뜻하는 것이니 崔理(최리)는 고구려를 북쪽의 나라라고 불렀음을 알게된다. 따라서 최리의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기록은 서기 32년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당시에 고구려 남쪽의 동부에는 濊(예) 또는 濊貊(예맥)이 있었고 최리의 낙랑국은 예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최리의 낙랑국의 위치는 평양지역이 될 수밖에 없게된다. 종래에는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평양지역으로 보았기 때문에 최리의 낙랑국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최리의 낙랑국을 복원시켜 놓고 보면 문제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당시에 한사군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는데 만약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면 최리의 낙랑국과 한사군의 낙랑군, 즉 두 개의 낙랑이 같은 지역에 있었다는 모순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필자는 서로 다른 지역에 있었던 두 개의 낙랑을 상정하게 된다. 하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 하류 동부연안 즉 위만조선지역의 서부에 설치되어 있었던 한사군의 낙랑군이요 다른 하나는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던 최리의 낙랑국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낙랑에 관한 문헌의 기록은 두 종류로 구별해서 읽어야 한다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던 최리의 낙랑국은 서기 37년에 멸망하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서기37)조에는

 

“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 시켰다” 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만으로는 어느 낙랑을 멸망 시켰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同書(동서)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4년(서기37)조에는 “ 고구려의 왕 撫恤(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시켰다. 그나라(낙랑국)사람 5천명이 투항하여 오므로 여섯 부락으로 나누어 살게 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구구려 대무신왕이 멸망시킨 낙랑은 신라와 접한 지역에 있었으므로 최리의 낙랑국임을 알수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후의 기록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서기44)조에는

“가을 9월에 동한의 光武帝(광무제)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縣(군현)을 만드니 薩水(살수)(지금의 청천강) 이남은 동한에 속하게 되었다”

 

는 기록이 보인다. 종래에는 이 기록을 한사군의 낙랑군과 연결시켜 인식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인식하기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 이 시기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이미 자기들의 영토가 되어있는 한사군의 낙랑군에 군사를 파견하여 그 곳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縣(군현)을 만들었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한사군의 낙랑군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최리의 낙랑국이 있었던 지금의 평양지역을 쳤음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수 있다. 바다를 건넜다는 내용은 그것을 한층 명확하게 하여 준다. 최리의 낙랑국은 이보다 7년전에 이미 고구려에 의하여 멸망되었지만 그 지역이 낙랑국이 있엇던 곳이기 때문에 낙랑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동한의 광무제가 낙랑국이 있던 평양지역을 친것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였다고 생각된다. 당시에 동한은 세력이 성장하고있던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를 공략하고 그곳에 군사식민지를 만들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한편 낙랑국이 고구려에 멸망된것은 오래지 않았었으므로 그 주민들은 아직 고구려에 동화되지 않았었을 것이고 또 저항감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낙랑국의 지배계층은 원래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낙랑군 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이 대부분 이었을 것이므로 그러한 연고관계를 이용하여 동한의 세력을 빌어 낙랑국을 재건 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한의 광무제는 비교적 용이하게 평양을 칠수 있엇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이지역은 한반도에 있어서의 중국의 군사기지및 교역의 거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앞에서 인용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조의 기록에 의하면 동한 광무제의 군사에 의하여 점령된 지역은 지금의 청천강 까지였는데 이것이 아마도 낙랑국의 북쪽 경계선 이었을 것이다

 

동한 광무제에 의하여 점령된 평양지역은 그전의 명칭에 따라 낙랑이라 불리어졌고 행정적으로는 한사군의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던 것같다. 평양지역이 낙랑이라고 불리어졌음은 토성지역에서 수집된 “낙랑예관” “낙랑귀부” 등이 새겨진 기와에 의하여 알수있는데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평양지역의 낙랑은 漢(한)시대의 낙랑군의 屬縣(속현) 땅이었을 것 이라고 하였고, 이익도 같은 견해를 피력한바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평양에서 발견된 중국식 유적인 소위 낙랑유적은 동한 광무제에 의하여 설치되었던 군사기지인 낙랑의 유적인 것이다. 끝으로 한가지 부연해 둘 것은 지금의 평양지역에 연대가 빠른 중국식 유적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르게 인식하는데는 매우 조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잠간 언급하였듯이 평양지역에 있었던 낙랑국의 지배계층은 대부분 위만조선의 팽창과 서한 무제의 침략으로 인하여 낙랑군 지역으로부터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이주해온 사람들인데 낙랑군 지역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서쪽 변경에 위치하여 중국지역과 접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의 문물에 매우 친숙해 있엇을 것이라는 점에 항상 유의해야 할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결론지으면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분석.검토해 볼때 지금의 평양지역에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낙랑군이 위치했었다는 분명한 근거는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종래의 선입관을 배제하고 충실하게 사료에 따라 고조선의 위치를 복원하는 작업에 임해야 할 것이다

 

 

3. 古朝鮮(고조선)의 位置(위치)와 遼東요동)

 

 


앞에서 잠깐 언급 하였듯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문헌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의 내용을 면밀하게 분석 검토하여 보면 이 책의 저자들이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을 몇 개 더 찾아볼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嬰陽王(영양왕)23년(서기 612)에 중국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그의 군대에게 훈시하기를 “左軍(좌군) 12隊(대)는 누방.장곤.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현토.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로 향하고 右軍(우군) 12대는 점선.함자.혼미.임둔.후성.제계.답둔.숙신.갈석.동시.양평 등의 길로 향하여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서 總集(총집)하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도로명 가운데는 한사군의 낙랑군에 속해 있었던 縣(현)의 명칭이 들어있고 遼東(요동), 玄菟(현토), 沃沮(옥저), 樂浪(낙랑), 臨屯(임둔) 등이 보이며 그 위치가 분명한 碣石(갈석)도 포함되어 있다. 이 도로명은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동쪽에 있었던 지명과 일치하며 한반도에 있었던 지명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내용은 낙랑군 현토군 임둔군 옥저등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일찍이 이익이 주장했던 것처럼 고조선이 요동지역에 위치 했었음을 알게 된다

 

한사군의 낙랑군이 요동지역에 있었음을 알게 하는 기록도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고조선이 요동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94년(서기 146)조에 의하면 ,그해 가을에 태조대왕이 장수를 보내어 한의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붙잡은 사실이 있다. 이 내용은 한사군의 낙랑군과 대방이 요동지방에 있었음을 알게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69년(서기121)조에는 태조대왕이 馬韓(마한).濊貊(예맥)의 기병 1만여명을 인솔하고 가서 현토성을 포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고구려와 마한 예맥 사이에 한사군이 존재하지 않고 고구려와 마한 예맥이 연접되어 있거나 그 사이에 그들의 동맹세력이 위치하고 있어서 서로 왕래가 자유스러웠음을 말하여 준다. 만일 고구려와 마한사이를 한사군이 가로막고 있었다면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을 사용할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기사는 “後漢書(후한서)” 효안제기와 동서 東夷(列傳(동이열전)에서도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 등은 고조선에 대해서 연구하기에는 너무 후대의 기록일뿐 아니라 그 내용도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 놓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앞에 든 기록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학자에 따라서는 필자와 다른 견해를 가질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는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었던 당시의 기록을 활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러한 한국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 따라서 중국문헌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종래에는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흔히 “三國志(삼국지) 魏書(위서) 烏丸鮮卑東夷傳(오환선비동이전)”이 중요시 되었다. 그러나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그것은 보충자료는 될수 있으나 기본사료가 될수는 없다.

 

왜냐하면 삼국지가 3세기 후반에 편찬 되었으므로 위만조선이나 그전 시대의 고조선을 연구하기에는 너무 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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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누짱 20-12-18 16:32
   
지누짱 20-12-18 16:36
   
이 글이 80년대중반 글인데 그간 논의들을 보면 한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느낌을 받네요. 강단사학계의 철저한 기득권 추구와 종교세력의 일방적 주장과 국뽕세력의 자아도취와 각종 알밥들의 분탕질 뒤섞여 있어서 그런것같습니다.
     
비좀와라 20-12-18 19:59
   
종교세력의 일방적 주장?

삼일운동은 툭하면 민중이 주도한 운동이라고 좌파 새끼들이 주장 하는데 삼일운동의 지도자 중에 좌파가 있어요? 있으면 말해 봐요.

그 나마 온건한 좌파인 유학자들도 없죠?

사실상 한국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종교세력 즉 우파가 주도한 것인데 뜬금없이 민중타령은...

좌파는 독립운동을 발전시키기는 커녕 우파가 주도 하는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딴지를 걸은 것인 사실이죠.

독립운동만 그래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서는 안 그랬을 것 같아요?

이순신이나 권율 그리고 김응서 등이 실질적으로 임진왜란의 주 장수죠?

저 들이 의병이고 민중세력 이에요? 저들은 관군이에요.

실질적으로 전쟁은 관군이 주도적인 역활을 잘 해야 전쟁에 이기는 거고요 의병등의 민간병력이 나오는 시점은 심각한 상황이란 말이에요.

군대 갔다 온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사항이죠. 정규군이 버티고 있는데 예비군이 동원될 이유가 없단 말이에요.

툭 하면 좌파새끼들은 임진왜란등의 전쟁에서 민중들이 활약해서 이겼다 그러는데 문제는 이러한 개뻥이 먹힌다는 거죠. 조금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에 동조 하는데 환장 하겠네요.

종교의 특징은 말이죠. 사회가 안정되고 잘 돌아가면 종교는 잊어집니다. 반면에 사회가 어지럽고 전란이 일어나면 종교가 일어나는 거고요.

구한말 시기에 외세가 침입하고 세도정치의 피해로 조세정책의 혼란과 더불어 군역이 문란해 지고 더군다나 대원군의 독재와 무능으로 조선이 큰 혼란에 빠지자 동학이 일어난거에요.

동학 특히 전봉준의 봉기가 문제가 뭐냔 하면요. 실질적으로 대원군과 이와 결탁한 조대비 즉 풍양조씨 외척세력의 횡포로 조선이 혼란한 상황에 오히려 대원군을 지지하고 고종과 민비를 축출하려고 했단 말이죠.

반면에 전봉준이 처형 된 후의 나중의 전개는 그 반대로 고종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가는 거구요. 당연히 반 대원군과 이를 지원한 일본에 대한 저항으로 나오는 거죠.

그런데 전라도는 자신들이 동학의 원조인양 하는 것이 웃기죠. 반란군 세끼들이 자신들이 정권을 잡겠다고 반란을 일으켜서 그나마 약한 국력을 소진 한 것에 대한 반성은 없고 자랑질을 해!!!

우리나라는 그 동안 후기 유학등과 같은 좌파들에 그렇게 고생 했으면서 아직도 좌파들이 설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ㅉㅉㅉ

좌파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싫어해요.

만일 사람들이 잘먹고 잘 살면 사람들은 좌파의 이야기에 귀을 기울이지 않거든요.

이러다 보니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도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좌파죠.

치안이 세계적으로 좋은데도 치안이 안 좋다고 꽥괙 거리거나 빈부의 격차도 별로 없는 최 상위 국가인데도 툭하면 빈부가 격차가 많다고 하거나 남녀 문제도 실질적으로 차별이 많은 나라가 아님에도 많다고 꽥꽥...

한사군 문제도 한사군의 위치등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상 우파이고 그 반대가 좌파에요. 당연히 좌파는 한국이 잘 나가면 안되기 때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툭하면 국뽕이네 뭐네 싸부럽 쌓지...

말이 되는 소리좀 해요.
          
신서로77 20-12-18 22:08
   
대다수가 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죠...님은 정의롭지 못하고 일반적이지도 않아요...임진왜란은 이순신 권율 두분모두 관군에만 의지한것도 아니고 왜 거기서 좌파 우파가 나오나요?....역사에 진실이 중요하지 왜 여기서 정치질 하는지 모르겠네요...
          
부르르르 20-12-19 13:29
   
그당시 좌파와 현재의 좌파 구분의 기준은?
선택적 좌파 취사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 구만.
          
워해머 20-12-20 16:04
   
님은 왜 항상 좌파, 우파 타령입니까? 원래도 헛소리만 했었지만 언제부턴가 정치색 강하게 드러내면서 헛소리를 더욱 심각하게 하네요.
Marauder 20-12-19 10:02
   
이분책 고조선 어쩌고 읽어봤는데점점 갈수록 비약이 되는거 같더라구요. 하나하나 읽어봤을땐 그럴듯한것 같은데 문제는 쌓이다보면 문제가생깁니다.
예를들어 강역문제에 있어서 확실한 근거에 1차적 추론을 통한 가설을 내세우면 긴가 민가한데 1차적가설이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기반으로 논리를 전개해나가는데 물론 어쩔 수 없다는건 알면서도 비약으로 느끼게 되죠. 뭐 바람이 불면 통장수가 돈을번다... 뭐 이런 느낌이랄까요.
     
부르르르 20-12-19 13:33
   
그렇다면 반대에 존재하는 강역의 근거 또한 다를 바 없죠.
객관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모두 동일한 잣대를 대야합니다.

과연 어느 쪽이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하는 지...
          
Marauder 20-12-19 15:35
   
고조선은 부분은 기록도 없고 거의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도 다릅니다. 기존 강역은 그냥 확실한 부분만 색칠한거에요.
책상 위에 사과를 놓은뒤 몇개냐고 물어봤을때 a씨는 2개라고 말하고 b씨는 1개라고 말하면, 최소한 1개 이상인건 확실하니까 1개라고 적는거랑 마찬가지죠. 다만 중국 측에서 공격적으로 색칠하는데 우리나라만 그러는건 문제가 있긴 하죠.
               
부르르르 20-12-19 23:42
   
중국 사서들의 강역에 대한 기술이 얼마나 이익에 편승한 선택적이고 일관성 없는 것인지는 교차검증으로 확인된 사실입니다.

또한 고조선에 관한 기록도 그 사서들의 교차검증을 통해 합리적인 추론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최소한 선택적이고 일관성 없는 그것에 비해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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