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광개토대왕과 백제 근초고왕 ~ 근구수왕 때의 전성기 지도를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중국 남북조시절 남조국가 역사서 송서, 남제서, 양서 등에
백제는 어양 등 산둥반도, 요서에 진출하여 백제군을 두었다고 기록
어떤 사람은 기록만으로 사실역사로 보기 힘들다지만
아무리 중국이 이민족 기록을 좋게 안 써도
이 지역들에 백제가 진출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허구로 기록했을 리가 없음
백제가 이 지방들에 진출했기때문에 기록했을 터,
백제 고흥이 집필한 서기가 발견되면 산둥반도, 요서 백제군과
일본과의 관계 등 더 자세한 것을 알게 되 교차검증을 할 수 있겠지만
서기 역사서가 현대까지 발견 안 되고 있음
(당나라 침입으로 소실될 가능성과 일본으로 반출되었을 가능성)
그렇다면 백제가 진출하기 좋은 때는 언제인가?
중국이 혼란하던 5호 16국 시대에 백제 근초고왕과 그 뒤를 이은 아들 근구수왕이
어차피 그 시대에 집권하셨으니
백제를 잘 아는 사람이 전연이 있는데 어떻게 진출했겠냐는 소리를 할 것 같아
그래서 전연에는 모용황이 있어서 힘들 것 같고 전연이 전진에 망해가는 시기에서
전진이 화북을 통치하고 남조 동진에 싸움걸었다가 망하고 후연이 세워지는 초중기까지 유력함
(산둥반도 백제군은 북위나 동위, 남연 또는 송, 제, 양, 진나라 중에 하나에 의해 소실됬다고도 함)
어차피 중국이 기록해뒀으니..
백제 근초고왕은 집권하고 어지러운 형세를 바로잡고 남아있는 마한세력을 공격, 멸망 후 통합하고
가야와 왜에 진출, 교류하고 전연의 침략으로 어려워진 고구려를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그 무렵 전연이 전진에 멸망하던 시대라서 백제는 산둥반도, 어양 등과 요서에 진출, 백제군을 두게 된다.
(혹은 근구수왕 때 백제군을 두었다는 설도 있음)
백제가 난하쪽의 요서 지방에 요서군을 두고
난하쪽 요서 서쪽 지도에 보이는 노란 동그라미의 부여(서부여)와 백제군이 연합해
중국과 전투를 벌였다는 중국 측 기록도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접권하고 넓혀놓은 고구려 땅, 고구려 전성기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 후연과 백제를 가만두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초기 백제의 10성들을 공격해서 빼앗았다.
그런 후 나중에 후연 공격할 때 후미의 화근이 될 것같은 요북의 거란족(비려)을 정복하고
그곳의 소금 자원도 획득한다.
그리고 동북쪽의 숙신(말갈)도 정벌해버림
백제가 아신왕이 집권하고 고구려에 대항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대대적인 백제 공격을 감행, 난공불락의 관미성마저 20일만에 함락시키고
백제의 땅이었던 황해도지역과 한강 서쪽과 북쪽 유역의 성들을 빼앗고 아신왕을 항복시켰다.
백제의 아신왕은 그 후에 굴하지 않고 왜를 끌어들여 백제, 가야, 왜 연합군으로
고구려의 동맹국인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에서 구원을 요청,
이에 광개토대왕은 군사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한다.
백제의 아신왕은 왜를 또 끌어들여 협동공격으로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지역을 공격하고 임진강 유역까지 북진했으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또 혼이 남.
(이 기록만 일본서기 기록)
고구려가 백제 공격에 주력하는동안 후연이 고구려의 신성, 남소성을 공격해 빼앗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백제가 전지왕이 집권하고 고구려 남쪽 전선이 안정되자
후연을 몇 차례 공격한 후 대규모 병력으로 후연을 공격했다.
베이징이 그당시 유주로 불렸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온다고 하니
유주자사 모용귀는 성을 버리고 달아난다.
이렇게 고구려는 유주(베이징) 유역을 점령하고 군을 주둔시킨다.
(베이징 주변에 고려영이라는 마을이 존재, 고구려군이 주둔했다고 해서 붙인 이름,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함)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후연을 멸망직전까지 내몰았다.
후연이 멸망하고 동족 고구려 출신 고운이 북연을 세우니
광개토대왕은 유주(베이징)와 그 주변과 난하쪽 요서 서쪽을
북연이 다스리라고 북연에게 땅을 내어준다
북연의 고운은 얼마 안가 풍발에게 죽고 풍발이 북연의 주인이 된다.
광개토대왕은 집권 말년에 고구려 동쪽에 있는 동부여에 항복을 안 하면 공격하겠다고 했는데
동부여가 항복을 안 하자 출병하니 동부여가 항복하고 고구려에 복속됨
이처럼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총 64성 700여 촌락을 획득했다. 백제 성만 해도 58성이나 된다고 한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동족의식이 있어서 백제와 부여는 항복시키고
동족 출신 고운의 북연에게 땅도 내주었으나
후연이나 왜(일본) 같은 이민족들은 철저하게 짓누르고 축출시켰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용병술에 능했던 왕이다.
그는 그 능력으로 고구려의 땅을 넓혀 전성시대를 열었다.
평양에 있는 안악 3호분의 벽화에는 고구려 군이 그려져있는데
전성기 고구려의 병사 형태와 그 병사들로 어떤 전술을 펼쳤을지도 알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북만주도 광개토대왕 때에 고구려 땅이 아니냐는 소리를 할텐데
북만주는 동부여가 고구려에 복속, 통합되고 난 후
멸망한 부여(동부여와, 서부여)유민들이 북만주로 건너가 두막루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두막루가 장수왕 후기나 문자명왕 때 세웠다는 설도 있음)
나중에 두막루는 고구려에 복속, 조공하면서 왕조는 유지했음(발해 무왕 때 발해의 공격으로 멸망)
고구려 남쪽 한반도에 고구려 남쪽 땅이 충주까지가 아닌 것 같다고 할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답을 하자면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의 지도이고 광개토대왕은 한강유역을 고구려 땅으로 만들었지만
충주까지 내려와 중원고구려비를 세운 왕은 장수왕임, 이 점을 명시하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신라는 왜 없냐 할 것 같은데 신라는 다음에..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