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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11 15:08
[북한] (6.25) 한국전쟁에 대해 각 나라별 인식 차이..
 글쓴이 : 돌통
조회 : 848  

●  같은 전쟁, 다른 시선

 

 

■  한국전쟁에 관한 각 나라 교과서 분석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과 관련된 국가들은 그 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래서 각 나라별 교과서 분석을 통해서 살펴보는것도 의미 있을것 같같다.

 

 

 

1) 중국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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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 조선 내전이 폭발했다. 미국이 단호하게 파병하여 조선을 침략 하였다. 미군을 주로 한 소위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곧바로 중국 변경 압록강 변까지 공격하였다; 미군 비행기가 중국 영공을 침략해 들어와 중국 동북 변경의 도시를 폭격, 소사하였다; 미국 제7함대가 중국 대만해협으로 침략해 들어와 인민 해방군의 대만 해방을 저지하였다. 미국의 침략 활동은 중국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위 내용은 중국의 인민 교육 출판사에서 나온 '중국 역사 8년급 하'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중국은 많은 교과서에서 '항미원조(抗米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전쟁을 설명하려고 하였고 이를 통해 중국은 미군이 한국전쟁을 통해 중국을 위협하려고 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신중국이 대담하게 미국과 대결을 진행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 당시 국내외에서는 각양각색의 의논들이 있었다. 미국은 세계상 가장 강대한 국가이며, 군대 장비가 가장 선진적이고, 또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신중국은 이제 탄생한지 1년밖에 되지 않아 치유되어야 할 장기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경제는 막 회복되기 시작하여 손봐야 할 일들이 많다. 상호 이해가 같은 밀접한 관계, 즉 조선의 존망과 중국의 안전은 긴밀히 상관되며, 항미원조는 바로 국가를 방위하는 것이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미국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 중국도 상당한 부담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이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 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중국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전쟁에 대한 중국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는 미제국주의의 침략 정책과 전쟁 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조선의 독립과 중국의 안전을 보위 했으며 중국의 국제 위망은 전에 없이 제고 되었다.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는 미국이란 무적의 신화를 깼고, 미국의 전략 계획을 분쇄 하였으며, 중국의 경제 건설을 위해 평화로운 환경을 얻었다.

 

이를 통해 중국은 한국전쟁을 '승리'하였다고 여기고 있으며 자국의 세계적 위상이 올라갔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일본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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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은 경제적 호황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었다. 1945년 이후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고 이 시기, 실질적인 주권은 연합 사령부 측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전쟁에 관한 일본 교과서의 서술은 7줄 정도에 불과하다.

 

신판은 「식민지의 해방과 아시아」의 항에서

 

조선은 일본의 패전에 의해 식민지에서 해방 되었지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을 소련이, 남쪽을 미국이 점령하고 이윽고 1948년 북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북조선)이, 남에는 대한민국(한국)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1950년, 북한이 한국에 침공해 한국 전쟁이 시작 되었습니다.1953년에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쟁은 계속 되었습니다」(p.187)

 

라고 쓰고, 그 옆에 「집이 불타서 망연자실한 시민」의 사진을 싣고 있다.

또한,

 

조선은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 되었지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을 소련에, 남을 미국에 점령당하여 1948년 북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남에는 대한민국이 수립 됐습니다. 1950년 북한이 한국을 침공하여 한국전쟁이 시작 되었습니다. 미국 중심의 유엔군이 한국을, 중국의 인민 의용군이 북한을 각각 지원하여 전쟁은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위의 내용은 전쟁이 언제 시작 되었으며 언제 끝났는지에 대한 단편적인 서술이다. 하지만 눈 여겨 봐야 할 대목은 대한민국과 북한을 주체적인 정부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3) 미국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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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교과서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6·25 전쟁은 미국에서 흔히 잊힌 전쟁으로 불려진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겐 절대로 잊힌 전쟁이 아니다.

   

남한과 북한의 각 정부는 통일된 한국을 원하였다. 하지만 남과 북은 그들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통일 되기를 원하였다. 북한군이 먼저 쳐들어왔다. 1950년 6월 25일에 약 9만의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38선 이남의 남한의 수도 서울로 내려왔다.

 

북한군이 남한을 선제 공격하여 전쟁이 발발되었다는 것은 여타 일본과 한국 교과서의 시점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드러나듯 남한 뿐만 아닌 북한의 정부도 통일을 원했다는 것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시선으로 이 전쟁을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맥아더는 북한군의 빠른 전진으로 인해 북한의 보급로가 약화될 것으로 파악하고 이 약점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부산을 방어하기 위한 군대를 보낸 직후로 1950년 9월에 남한의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그리고 후방에서부터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 하였다. 맥아더의 전략은 적중 하였다.

 

위의 글을 본다면, 인천상륙작전을 설명하기 보다는 맥아더가 어떤 지시를 내렸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한국전쟁의 전반적인 흐름보다는 이 시기 활약했던 미국의 인물들에 집중하고 있다.

 

 

 

 

4) 북한 교과서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북한에 대한 입장을 생각하지 않은 채 교과서를 분석할 수는 없다. 

북한은 『혁명력사』에서 

 

 오래전부터 침략 전쟁을 준비하여 온 미제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놈들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혁명력사』,2003, p.152.)

 

북한은 한국전쟁의 시작도 미국과 남한에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무수히 많이 보고 되었다.) 앞잡이가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용의 정황상 이는 남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어서 전쟁의 결과에 대한 내용도 들어가 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한 북한도 미국의 침략으로부터의 승리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5) 한국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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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전쟁의 당사국인 만큼 이에 대한 서술이 많은 분량으로 되어있다. 많은 교과서에서 이에 대해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금성 교과서와 대안 교과서 중심으로 비교하여 서술하도록 하겠다. 금성 교과서는 7페이지에 걸쳐 6.25 전쟁의 발발, 전개, 결과 그리고 관련 사진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대안 교과서는 12페이지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우선, 금성 교과서에서는 이 전쟁이 발발하기 전 상황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남북 사이의 무력 충돌도 적지 않았다. 지리산을 비롯한 남한 곳곳에서도 북한을 지지하는 무장 유격대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38도선 곳곳에는 국군과 북한군 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이러한 충돌은 1950년에 들어 줄어들었으나 불안한 정세는 계속되었다.

 

또한, 전쟁 전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군사력과 무기를 지원했다는 내용을 바로 옆 페이지에 표로 보여줌으로 발발 전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또한 대안교과서에서도 이 상황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미군의 철수 이후 38도선에서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자주 일어났다. 북한이 남침해 올 것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상호 방위조약 체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의 군사 전략적 중요성을 낮게 평가한 미국은 한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요청에 따라 중공군에 편입 되었던 한국인 3개 사단, 약 5만 명을 북한으로 보냈다. 중국의 공산혁명 이후,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지원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전쟁 전에 남과 북이 대립했다는 내용과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지원을 했다는 내용은 동일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남과 북의 충돌 중에서 금성 교과서는 ‘서로 충돌했다.’고 표기되어 있는 반면, 대안 교과서에서는 ‘일방적인 북한의 도발’이라는 식으로 표기되어있다. 두 교과서 모두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유엔군이 참전했으며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었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 분량에 대한 차이가 있다. 금성 교과서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한 내용이 4줄에 불과한 반면, 대안교과서에서는 1페이지를 할양하며, 맥아더의 역할과 이승만에 대한 서술을 넣고 있다. 그 이후 정전협상까지의 서술은 양의 차이가 있으나 크게 다른 점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차이는 분명하다. 우선 금성 교과서에서의 전쟁 후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쟁 과정에서 상대방의 편을 들거나 협력 하였다는 이유로 보복이 잇달았다. 전쟁 초 승리를 거둔 북한군은 점령 지역에서 토지 개혁이나 노동 법령의 개정과 같은 북한식 개혁을 하면서, 지주나 공무원 등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하게 되자 반대로 북한군에 협력한 사람들에 대한 처형이 뒤따랐다. 민간인 학살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남한에서는 보도 연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이 있었고, 경남 거창과 충북 영동의 노근리 등 여러 곳에서 주민들이 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후퇴하는 북한군도 대전 등지에서 많은 주민을 죽였다. 남과 북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적대감이 쌓여갔다.

 

금성 교과서에서는 민간인들 학살 내용에 대해 남북군이 진격 한 곳에서 서로 발생했다는 표현을 쓰면서 쌍방의 상황을 썼다. 그러나 그 옆에 보도연맹에 대한 주석을 달면서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에 대한 소개를 강조 시켜 놓았다. 그러나 대안교과서는 보도연맹에 대한 부분은 민간인 학살을 서술하면서 괄호로 ‘보도연맹 사건’이라고 표기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다른 쪽의 민간인 학살에 집중하였다.

 

 

1952년 《대한민국 통계 연감》은 전쟁 중에 살해된 민간인이 12만 2,799명이라고 하였다. 그와 별도로 1952년 공보처 통계국은 전재우 중에 북한군과 빨치산에 의해  의해 살해된 공무원과 민간인을 조사하여 《6․25사변 피살자 명부》를 작성하였는데, 현재 국립 중앙도서관과 정부 기록 보존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것은 한 페이지에 따로 표를 만들어 서술한 북한군의 민간인 학살 내용이다. 이에 사진까지 첨부하여 당시, 북한군이 얼마나 잔혹하게 민간인을 살해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6.25와 관련된 4개국과 북한의 교과서를 살펴 보았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양극체제는 1990년대가 오면서 해소되었다. 필자가 전에도 밝힌 바 있듯이 이제 더이상 이념에 대한 논란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아직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대안 교과서와 금성 교과서가 우파, 좌파로 갈려서 여러 혹평들을 받고 있음을 본다. 이렇듯 과거의 일들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과거의 글, 혹은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영향들을 생각하고, 연구하게 되었을 때 죽어있다고 생각되는 과거의 일은 지금도 호흡하고 있는 산 역사로 우리 앞에 다시 재조명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의 50%가 6.25를 알지 못한다는 설문조사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전쟁의 여파는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 점점 더욱 크게 다가올 것으로 확신한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국가가 같은 과거를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바라보고 있고 교육하고 있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다.

아이들에게 보다 정확한 교육을 하고, 주변국가들의 시선을 정확히 인식했을 때

보다 밝은 미래가 다가올 것이다. 

 

기억하라.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는 반복된다.

 

이상..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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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uder 20-10-11 22:08
   
미국교과서 부분에서 북한이 통일을 원해서 침략전쟁을 일으킨거고 그들만의 방식이란 무력통일을 의미하는건데 이걸 모르는사람도 있음..? 우리랑 다른 시선이란게 무엇인지... 설마 북한이 분단을 원했다고 생각한사람이 있었음?
눈틩 20-10-14 11:31
   
미국에서 6.25가 잊혀진 전쟁으로 되고 있다니 씁쓸하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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