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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11 02:57
[한국사] 진나라 이후 동이족은 고대 동이족과 관련이 있습니까?
 글쓴이 : 예왕지인
조회 : 1,235  

진나라 이후 동이족은 고대 동이족과 관련이 있습니까?

진나라 이전 동이족은 산동 지역에 살던 피부가 다양한 인종들이 였는데

이들이 이족 입니다.

근데 진나라 이후 동이족인 만주 한반도 일본을 가르키는데

진나라 이후 동이족들은 고대 산동지역 동이족 하고 어떤 관계 입니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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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바구룬 20-10-11 03:00
   
여러분 , 댓글 달지마세요.
예왕지인님 한족 화교라서 여기 댓글 달면 번역해서 중국사이트에 올리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예왕지인 20-10-11 03:01
   
정말 진지해서 물어보는겁니다 ;;
백제는 분명히 사서에 구이 라고 나옵니다.
근데 삼한은 도이 라고 기록이 나옵니다.
     
예왕지인 20-10-11 03:02
   
그러니깐 고대 동이족 하고 이후에 정해진
동이족들은 서로 관계가 있는지 물어보는겁니다
도이는 섬나라를 뜻해서 도이라고 합니다.
     
윈도우폰 20-10-11 11:02
   
난 지금까지 이 녀석이 왜놈인 줄 알았음...하는 짓거리가 복선을 깔고 한국의 역사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글들을 올려서...그런데 자칭 한족이라고? 오해했네 야비한 왜놈인줄 알았는데 ... 짱개니 뭐니 해대서 아주 야비한 왜놈인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대륙쪽 애들까지 싸잡아 욕하는 것을 보니 부모가 대만 쪽 출신인가...사는 곳은 강원도?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섬에 살던 놈들의 출신은 왜나 대만이나 야비함 그 자체 같음
          
예왕지인 20-10-11 11:37
   
화교 맞습니다
구름위하늘 20-10-11 10:41
   
[양키의 의미]
다른 나라 사람들은 미국인들을 양키라고 부른다. 미국에선 북부 사람들을 양키라고 부른다. 북부에선 동부 사람들을 양키라고 부른다. 동부에선 뉴 잉글랜드 사람들을 양키라고 부른다. 뉴 잉글랜드에선 버몬트주 사람들을 양키라고 부른다. 버몬트에선 푸세식 화장실을 쓰는 사람들을 양키라고 부른다.

(동)이의 의미도 비슷하게 유추해보십시오.
     
예왕지인 20-10-11 10:52
   
혼자 뇌피셜  ㅋㅋㅋㅋㅋ
     
예왕지인 20-10-11 11:08
   
[산해경] 해내북경(海內北經):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해(海)의 북쪽이며 산(山)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

 

[관자] 권 23 규도(揆道)편: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관자에게 '내가 듣건대 해내(海內)에 귀중한 물건이 있다고 하던데 그것에 대해 들을 수 있겠소? 라고 하니

관자가 '음산(陰山)의 유민이 그 한 가지요, 연(燕)의 자산백금이 그 한 가지요, 발(發)과 조선의 문피(文皮)가 그 한 가지요(후략)이라고 답했다."

권 24, 경중갑(經重甲)편:

"발(發)과 조선이 조근(朝瑾)을 오지 않는 것은 문피와 태복을 예물로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한 장의 표범가죽이라도 여유 있는 값으로 계산해 준다면 8천 리 떨어진 발과 조선도 조근을 오게 될 것입니다."

 

[전국책] 연책(燕策):

"소진(蘇秦)이 (중략) 연문후(燕文侯: 기원전 361~333)에게 말하기를 연의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으며(후략)"

[염철론(鹽鐵論)] 권 8, 벌공(伐公)편:

"연(燕)이 동호(東胡)를 습격하여 바깥으로 천리를 물러가게 했으며 요동(遙東)을 지나 동쪽으로 조선을 공격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중국의 위(魏)·촉(蜀)·오(吳) 3국의 정사(正史).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가 편찬한 것으로,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 합계 65권이다 

                                                                                            우리역사연구모임-김용만저 http://cafe.daum.net/smohg/JjIs/305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

東夷: 夫餘·高句麗·東沃沮·相婁·濊·韓·倭.

 

前言

書稱[東漸于海, 西被于流沙]. 其九服之制, 可得而言也. 然荒域之外, 重譯而至, 非足跡車軌所及, 未有知其國俗殊方者也. 自<虞> <周>, 西戎有白環之獻, 東夷有<肅愼>之貢, 皆曠世而至, 其遐遠也如此. 及<漢>氏遣<張騫>使<西域>, 窮<河>源, 經歷諸國, 遂置都護以總領之, 然後<西域>之事具存, 故史官得詳載焉. <魏>興, <西域>雖不能盡至, 其大國<龜玆>·<于 >·<康居>·<烏孫>·<疎勒>·<月氏>·< 善>·<車師>之屬, 無歲不奉朝貢, 略如<漢>氏故事. 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 天子爲其絶域, 委以海外之事, 遂隔斷東夷, 不得通於諸夏. <景初>中, 大興師旅, 誅<淵>, 又潛軍浮海, 收<樂浪>·<帶方>之郡, 而後海表謐然, 東夷屈服. 其後<高句麗>背叛, 又遣偏師致討, 窮追極遠, 踰<烏丸>·<骨都>, 過<沃沮>, 踐<肅愼>之庭, 東臨大海. 長老說有異面之人, 近日之所出, 遂周觀諸國, 采其法俗, 小大區別, 各有名號, 可得詳紀. 雖夷狄之邦, 而俎豆之象存. 中國失禮, 求之四夷, 猶信. 故撰次其國, 列其同異, 以接前史之所未備焉. '

 

서경'에서 말하길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유사에 접한다.'라고 하니, 이는 그 구복의 제도를 얻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거칠은 지역의 바깥에도, 중요한 역사들이 이르렀으나, 발자취와 수레바뀌가 미치지 않으면, 그 나라의 풍속과 타국을 알 수 없다. '우'에서 '주'에 이르기 까지 서융은 백환을 받침이 있었고, 동이는 '숙신'의 조공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대에 이르르는 것이니, 멀고 먼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한'에 이르러 '장막'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황하'의 근원에 다다르고, 여러나라를 지나니, 이르러 도호를 둠으로써, 이를 다스렸다. 그러한 이후로 서역의 일이 보존하게 되고, 고로 사관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었다. '위'가 일어나자, '서역'이 비록 능히 전부 이르르지 못했으나, 그 큰 나라인 '구자', '우치', '강거', '오손', '소륵', '월씨', '선선', '거사'가 속하니, 세세토록 조공을 받치지 않음이 없으니, '한'의 옛일과 같은 다스림이었다. '공손연'이 아버지, 할아버지부터 삼대를 '요동'에 있으니, 천자가 그 지역과 단절하고, 해외의 일을 내버려 두었다. 이에 '동이'와 단절하고, 여러 나라들은 통함을 얻지 못하엿다. '경초'중에 군사를 크게 내어 '연'을 베고, 군사를 죽이니, '낙랑'과 '대방'의 고을을 거두어 들이니, 후에 바다가 고요해 지고, 동이가 굴복하였다. 후에 '고구려'가 모반을 하자, 또 군사를 파견하여 치고, 멀리까지 쫓아가니, '오환'과 '골도'를 넘어, '옥저'를 지나, '숙신'의 땅까지 밟으니,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다. 늙은 노인이 말하길,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해가 떠오르는 곳 가까이 있다 하여, 두루 여러 나라를 보아 그 법과 풍속을 얻으니, 크고 작은 구별이 있고 각각 이름이 있어 가히 얻어 자세히 기록하는 것이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지만, 조두모양의 그릇이 있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 버리면, 사이에서 구한다 하는 것은 역시 믿을만 한 것이다. 고로, 그나라의 일을 기록하여, 같음과 다름을 열거하여 과거의 역사가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을 보충하려고 하는 것이다.

 

夫餘

<夫餘>在<長城>之北, 去<玄 >千里, 南與<高句麗>, 東與<相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二千里. 戶八萬, 其民土著, 有宮室·倉庫·牢獄.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平敞. 土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序大, 性彊勇謹厚, 不寇 . 國有君王, 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 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諸加別主四出, 道大者主數千家, 小者數百家. 食飮皆用俎豆, 會同拜爵洗爵, 揖讓升降.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在國衣尙白, 白衣大袂, 袍·袴, 履革 . 出國則尙繒繡錦 , 大人加狐狸· 白·黑貂之 , 以金銀飾帽. 譯人傳辭, 皆 , 手據地竊語.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다. '현토'에서 천리를 간다. 남으로 '고구려'가 있고, 동쪽으로 '읍루'가 잇으며, 서쪽으로 '선비'가 있다. 북쪽으로 '약수'가 있으며, 가히 이천리이고 호수는 팔만호이다. 그 백성은 토착생활을 하고, 궁실과, 창고, 감옥이 있으며, 산과능선이 많으며, 연못이 넓으니, 동이의 지역중에 가장 평평하다. 흙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과격하고, 크다.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삼갈 줄 알고, 후덕하니 도둑질 하지 않는다. 나라에 군옹이 있고, 모두 여섯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명하니,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 가 있다. 읍락에는 호민이 있는데, 신분이 천한 사람들을 모두 노비로 하였다. 여러 '가'의 주인은 각각 사방을 다스리는데, 도가 큰자의 주인은 수가 천집이고 작은자는 백집이다. 음식을 먹음에는 모두 조두를 사용하고, 여럿이 모이는 때에는 서로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마시며,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출입한다.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 이를 '영고'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가둠이 없고, 죄인들을 풀어준다. 나라에서 옷에 흰색을 숭상하여, 백색 옷에 소개가 넓고, 도포와 바지가 있다. 신발은 가죽으로 한다. 나라에서 나갈때는 비단옷을 입기를 숭상한다. 성인은 여우, 원숭이, 흑색담비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전할 때는 모두 꿇어 손을 땅에 대고, 조용히 말을 한다.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竊盜一責十二. 男女淫, 婦人 , 皆殺之. 尤憎 , 已殺, 尸之國南山上, 至腐爛.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兄死妻嫂, 與<匈奴>同俗. 其國善養牲, 出名馬·赤玉·貂 ·美珠. 珠大者如酸棗. 以弓矢刀矛爲兵, 家家自有鎧仗. 國之耆老自說古之亡人. 作城柵皆員, 有似牢獄. 行道晝夜無老幼皆歌, 通日聲不絶.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有敵, 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 其死, 夏月皆用 . 殺人殉葬, 多者百數. 厚葬, 有槨無棺.{《魏略》曰:其俗停喪五月, 以久爲榮. 其祭亡者, 有生有熟. 喪主不欲速而他人彊之, 常諍引以此爲節. 其居喪, 男女皆純白, 婦人着布面衣, 去環 , 大體與中國相彷彿也.}

 

형벌을 사용함에 엄하고 급하여, 살인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한 자는 열두배로 갑으며, 남녀가 음탕하거나, 부인이 투기를 하면, 이를 모두 죽인다. 특히 투기를 미워하여, 이미 죽은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위에 두고 썩힌다. 여자 집에서 이를 얻을려면, 소나 말로 갚은후 옮긴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처로 삼는데, '흉노'와 풍습이 같다. 나라에서 좋은 소(제사용)을 기르고, 이름있는 말, 붉은 옥과 담비와 아름다운 구슬이 나온다. 구슬이 큰 것은 대추만 하다. 활과 화살 칼과 창으로써 병기를 하고, 집집마다 모두 갑옷과 무기가 있다. 나라의 늙은 노인이 말하길, 옛날 망명인들이 성을 지을 때 성책을 둥글게 하니, 감옥과 같았다. 밤낮 길을 가며 노인과 아이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 굽이 풀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쳐져 있으면 길하였다. 적의 침입이 있으면, 모든 '가'들이 스스로 전쟁을 하는데, 아래 백성들은 양식과 음료를 짊어지고 이를 먹였다. 그가 죽으면, 여름에는 얼음을 사용하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으면, 백명이나 되었다. 장사는 후하게 치루고,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위략'에 그 풍속에 장사는 오개월이나 되는데, 오랠수록 성한 것이다. 망자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산채로 하는 것도 있고, 익히는 것도 있다. 상주는 빨리 하고자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강제로 잡아당겨 다투면서 이를 한다. 상에 거할 때, 남녀는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거리와 패물을 때어 놓으니, 대체적으로 중국과 비슷함이 있다.

 

<夫餘>本屬<玄 >.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尉仇台>死, <簡位居>立. 無適子, 有 子<麻余>. <位居>死, 諸加共立<麻余>. 牛加兄子名<位居>, 爲大使, 輕財善施, 國人附之, 歲歲遣使詣京都貢獻. <正始>中, <幽州>刺史< 丘儉>討<句麗>, 遣<玄 >太守<王 >詣<夫餘>, <位居>遣大加郊迎, 供軍糧. 季父牛加有二心, <位居>殺季父父子, 籍沒財物, 遣使簿斂送官. 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

 

'부여'는 본래 '현토'에 속하였는데, '한'말에 '공손도'가 바다 동쪽에서 크게 일어서자, 바깥 오랑캐를 위엄으로 복속시켰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에 속하였다. '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자, '공손도'가 '부여'가 두 오랑캐 사이에 있자, 종실의 여자를 처로 삼게 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섰다. 적자가 없고, 첩의 아들인 '마여'가 있어, '위거'가 죽자 여러 '가'들이 함께 '마거'를 세웠다. '우가'의 형의 아들이 있는데, 그 이름도 '위거'이니, 대사로 하였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선을 배푸니, 나라사람들이 따랐다. 세세토록 사신을 파견하여 서울에 이르러 공물을 바쳤다. '정초'중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구려'를 벌하고, '현토' 태수 '왕기'를 부여에 보냈는데, '위거'가 대가를 보내어 성 밖에서 맞이하여, 군량을 보태었다. 계부인 우가가 두 마음이 있자, '위거'가 계부의 아비와 아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기록하고, 염송관으로 보내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 가뭄이 들고, 날이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익지 않으면, 갑자기 그 왕을 책망하는데, '혹 바뀜이 마땅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麻余>死, 其子<依慮>年六歲, 立以爲王. <漢>時, <夫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 郡>, 王死則迎取以葬. <公孫淵>伏誅, <玄 >庫猶有玉匣一具. 今<夫餘> 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 傳世以爲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魏略》曰: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似)[以]也.{《魏略》曰:舊志又言, 昔北方有<高離>之國者, 其王者侍婢有身, 王欲殺之, 婢云:[有氣如?子來下, 我故有身.] 後生子, 王捐之於 中, 以喙噓之, 徙至馬閑, 馬以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也, 乃令其母收畜之, 名曰<東明>常令牧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度, 魚鼈乃解散, 追兵不得渡. <東明>因都王<夫餘>之地.}

 

'마여'가 죽었는데, 그 아들 '의려'가 여섯 살로 왕위에 올랐다. '한'때에 부여왕은 옥갑으로 장사를 지내는데, 항상 '현토군'에 놓아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곧 가져다가 장사하였다. '공손연'을 쳤을 때 '현토'의 곳간에 옥갑 하나가 있었다. 이제 '부여'의 곳간에는 옥벽과 규와 제기들이 있으니, 세세토록 전하는 보물로, 늙은 노인이 말하길 선대에 하사 받은 것이라 한다. [위략에 말하길 그 나라는 몹시 부유하니 선대부터 왔다. 아직 깨어지지 않았다.] 그동장의 글자에 '예왕의 도장'이라 하니 나라의 옛성에 '예성'이 있다. 대개 근본은 '예맥'의 땅이다.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노릇을 하고, 스스로 '망인'이라 하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위략에서 말하길 예날 북방에 '고리'국이 있었다. 그 왕의 시녀가 태기가 있어, 왕이 이를 죽이고자 하자 시녀가 말하길 계란같은 기운이 있어 내려와 내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으니 왕이 돼지 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기운으로 덥히고, 마굿간으로 옮기자 말들도 이와 같아, 죽지 않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하늘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말을 기르게 명하였다. '동명'은 궁술에 능하자, 왕이 나라를 빼앗길까봐 두려워 하여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의 '시엄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이네 흩어지자, 쫓던 병사들은 건널수가 없었다. '동명'은 이로 인하여, '부여'의 땅에서 왕노릇하고 있다.

 

 高句麗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戶三萬. 多大山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 食澗水.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其俗節食, 好治宮室, 於所居之左右立大屋, 祭鬼神, 又祀靈星·社稷. 其人性凶急, 喜寇 . 其國有王, 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 衣先人, 尊卑各有等級. 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其性氣衣服有異. 本有五族, 有<涓奴部>·<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도성은 '환도'로, 사방 이천리 이며 호수는 삼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으며, 벌판과 호수가 없다.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서 밭을 경작하지만, 열매가 충분하지 않아, 배가 고프다. 풍속에 음식을 절약하고, 집을 관리하는 것을 즐겨 그 거하는 곳에 큰 집을 좌우에 세우고, 귀신에 제사지낸다. 또한 신령스런 별과 토지신에게도 제사 지낸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여, 도둑질함을 즐긴다. 그 나라에 왕이 있고 관직이 있어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승', '사자', '조의','선인'이라 하니, 높고 천함의 등급이 각각 있다. 동이의 오랜 말로써 '부여'의 다른 종류로 언어가 여러 가지이나,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 그러나, 그 성질과 기운과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래는 다섯 부족으로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을 했는데, 점점 약해저, 이제는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 郡>受朝服衣 , <高句麗>令主其名籍. 後稍驕恣, 不復詣郡, 于東界築小城, 置朝服衣 其中, 歲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 溝 >. <溝 >者, <句麗>名城也. 其置官, 有對盧則不置沛者, 有沛者則不置對盧. 王之宗族, 其大加皆稱古雛加. <涓奴部>本國主, 今雖不爲王, 適統大人, 得稱古雛加, 亦得立宗廟, 祠靈星·社稷. <絶奴部>世與王婚, 加古雛之號. 諸大加亦自置使者· 衣先人, 名皆達於王, 如卿大夫之家臣, 會同坐起, 不得與王家使者· 衣先人同列.

 

한나라때에 북치고 피리부는 재주를 가진 사람을 하사하였는데, 항상 '현토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다. '고구려'를 영주로서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 후에 점점 교만해지고 방자해 지더니. 군에 복종하지 않고, 또한 동쪽 경계에 작을 성을 쌓았다. 조복과 의책을 그 가운데 두면, 해마다 이를 가질러 왔다. 이제 '호'들 조차도 그 성의 이름을 '책구루'라 한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의 이름이다. 이곳에 관을 두고 '대로'을 두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두면. '대로'를 두지 않았다. 왕의 종족으로 '대가'는 모두 '고추가'로 칭하는데, '연노부'가 본래 나라의 주인으로 이제는 비록 왕이 아니라 하더라도, 혈통을 잇는 대인으로 '고추가'가 칭한다. 역시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가 있다. '절노부'는 세세토록 왕과 혼인을 하는여, '고추'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러 대가들은 역시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어 그 이름을 모두 왕에게 알리는데, '대부' 벼슬하는 집의 신하들은 모임에 앉거가 일어서는데 있어,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반열을 얻지는 못한다.

 

其國中大家不佃作, 坐食者萬餘口, 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 其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 聚, 相就歌戱. 無大倉庫, 家家自有小倉, 名之爲 京. 其人 淸自喜善藏釀. 拜申一脚, 與<夫餘>異, 行步皆走.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其公會, 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 大加主簿頭著 , 如 而無餘, 其小加著折風, 形如弁.

 

그 나라의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데, 앉아서 밥 먹는 자가 만여호나 이른다. 아랫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쌀과 양식과 물고기와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공손히 보태준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추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는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들어, 서로 따르며 노래하고 춤춘다.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스스로 작은 창고가 있어, 이름하여 '부경'이라 한다. 사람들은 탐욕이 없지만, 좋은 술을 감춰두는 것을 좋아한다. 꿇어 엎드려 절할 때 다리 하나를 뻗는데, '부여'와 이것이 다르다. 길을 갈때는 모두 달린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명'이라고 한다. 공적인 모임때의,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 無牢獄, 有罪諸加評議, 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 其俗作婚姻, 言語已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壻屋, 壻暮至女家戶外, 自名 拜, 乞得就女宿, 如是者再三, 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 傍頓錢帛, 至生子已長大, 乃將婦歸家. 其俗淫. 男女已嫁娶, 便稍作送終之衣. 厚葬, 金銀財幣, 盡於送死, 積石爲封, 列種松柏. 其馬皆小, 便登山. 國人有氣力, 習戰鬪, <沃沮>·<東濊>皆屬焉. 又有<小水貊>.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依小水作國, 因名之爲<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 시월 나라의 큰 모임에서 수혈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수혈신의 자리를 만들어 둔다. 감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를 죽인후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그 혼인하는 풍속은 말로써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 한다. 사위 될 사람이 저녁무렵에 여자의 집 대문 밖에 이르러, 스스로의 신분을 밝힌 후 꿇어 엎드려 절한 후에 여자와 하룻밤 자기를 청하는데, 보통 두세번 한다. 여자의 부모님이 받아들여 작은집에서 잠잘 수 있게 하면, 돈과 비단을 내 놓는다. 아들은 낳아 장성하게 되면, 이에 마땅히 부인과 집으로 돌아 온다. 그 풍속은 음란하다. 남녀가 결혼만 하면, 조금씩 죽어서 입을 옷을 만든다. 장사는 후하게 하는데, 금은 비단을 죽은자에게 보낸다.(함께 묻는다.??) 돌을 쌓아 봉분을 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말들은 모두 작아, 산을 오르기에 편하다. 나라 사람들은 기력이 있고, 전투를 익힌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속하였다. 또한 '소수맥'도 속하였다. '구려'가 나라를 일으킬 때 큰 물을 의지하여 일어났는데, '서안평현'북쪽에 소수가 잇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으로 소수를 의지해 나라를 일으키니, 인하여 '소수맥'이라고 이름한다.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이라 한다.

 

<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 不欲行, 彊迫遣之, 皆亡出塞爲寇盜. <遼西>大尹<田譚>遣擊之, 爲所殺. 州郡縣歸咎于<句麗侯>< >, <嚴尤>奏言: [<貊>人犯法, 罪不起于< >, 且宜安慰, 今猥被之大罪, 恐其遂反.] <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期<句麗侯>< >至而斬之, 傳送其首詣<長安>. <莽>大悅, 布告天下, 更名<高句麗>爲<下句麗>. 當此時爲侯國, <漢><光武帝>八年, <高句麗王>遣使朝貢, 始見稱王.

 

'왕망'초에 '고구려'병사를 일으켜 '호'를 치려고 하는데, 가고자 하질 않았다. 강제로 다그쳐 이에 파견하였는데, 모두 변방에서 달아나 버려 도둑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을 보내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거기에서 살해 당하였다. 주군현에서 '구려후 추'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이니, 죄는 '추'에게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큰 죄를 뒤집에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망'이 듣지 않고, '우'에게 공격하라 명하니, '우'가 '구려후 추'를 꾀어, 만나길 약속하자, '추'가 이르자 이를 베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길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로 바꾸어 명하게 하였다. 마땅히 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한''광무제' 팔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자,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至< >·<安>之間, <句麗王><宮>數寇<遼東>, 更屬<玄 >. <遼東>太守<蔡風>·<玄 >太守<姚光>以<宮>爲二郡害, 興師伐之. <宮>詐降請和, 二郡不進. <宮>密遣軍攻<玄 >, 焚燒<候城>, 入<遼隧>, 殺吏民. 後<宮>復犯<遼東>, <蔡風>輕將吏士追討之, 軍敗沒.

 

'상제'와 '안제'의 사이에 이르러, '구려왕 궁'이 수차례 '요동'을 침범하자 다시'현토'가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제풍과 현토 태수 '요광'이 '궁'이 두 고을에 해가 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궁'이 거짓 항복하며 화친하길 청하자, 두 군이 나아가질 않았다. '궁'이 비밀히 군사를 보내어 '현토'를 공격하여,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후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제풍'이 제빨리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려 했지만, 군사가 패하고 말았다.

 

<宮>死, 子<伯固>立. <順>·<桓>之間, 復犯<遼東>, 寇<新安>·<居鄕>, 又攻<西安平>, 于道上殺<帶方>令, 略得<樂浪>太守妻子. <靈帝><建寧>二年, <玄 >太守<耿臨>討之, 斬首虜數百級, <伯固>降, 屬<遼東>. (嘉)<[熹]平>中, <伯固>乞屬<玄 >. <公孫度>之雄海東也, <伯固>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 破之.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섰다. '순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겨향'을 약탈하고,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길위에서 '대방' 태수를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얻어, 사로잡았다. '영제 건안' 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포로 수백의 머리를 베자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가평'중에 '백고'가 '현토'에 속하길 빌었다. '공손도'의 웅지가 바다동쪽에 이르자, '백고'가 대가 '우거'와 주박 '연인'등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어, 이를 깨뜨렸다.

 

<伯固>死, 有二子, 長子<拔奇>, 小子<伊夷模>. <拔奇>不肖,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 自<伯固>時, 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家. <建安>中, <公孫康>出軍擊之, 破其國, 焚燒邑落.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降<胡>亦叛<伊夷模>, <伊夷模>更作新國, 今日所在是也. <拔奇>遂往<遼東>, 有子留<句麗國>, 今古雛加< 位居>是也. 其後復擊<玄 >, <玄 >與<遼東>合擊, 大破之.

'백고'가 죽었는데, 두아들이 있어, 장자는 '발기'이고, 작은 아들은 '이이모'이다. '발기'가 불초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왕위에 세웠다. '백고'때에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고, 또한 망한 '호'의 오백여가를 받아들였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 나라를(고구려) 깨뜨리고, 고을을 불살랐다. '발기'가 형으로써, 왕이 되지 못함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와 백성 삼만여호를 데리고, '공손강'에 항복하고, '비류수'로 돌아와 살았다. 항복한 '호' 역시 '이이모'를 배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금일의 있는 것이 이것이다. '발기'는 '요동'으로 가고, 아들을 '구려국'에 남겼는데, 지금의 고추가인 '교위거'가 이것이다. 후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자,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伊夷模>無子, 淫<灌奴部>, 生子名<位宮>. <伊夷模>死, 立以爲王, 今<句麗王><宮>是也. 其曾祖名<宮>, 生能開目視, 其國人惡之, 及長大, 果凶虐, 數寇 , 國見殘破. 今王生墮地, 亦能開目視人, <句麗>呼相似爲位, 似其祖, 故名之爲<位宮>. <位宮>有力勇, 便鞍馬, 善獵射. <景初>二年, 太尉<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 <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 <正始>三年, <宮>寇<西安平>, 其五年, 爲<幽州>刺史< 丘儉>所破. 語在《儉傳》.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와 음란하여 아들을 낳으니, '위궁'이다. '이이모'가 죽고 왕위에 섰다. 지금의 '구려왕 궁'이 이것이다. 그 증조의 이름도 '궁'인데, 태어나서 능히 눈을 뜨고 보았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악하고 사나워져, 수차례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여, 나라를 헤롭게 하고, 깨지게 하였다. 지금의 왕도 타지에서 태어나 역시 능히 눈을 뜨고 사람을 보니, '구려'사람들이 그 증조와 닮았다 하여, 서로 부르기를, '위궁'이라 하였다. '위궁'은 힘과 용기가 있고, 말을 잘 타며, 궁술에 능하였다. '경초'이년 태사'사마선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을 치자, '궁'이 주박 과 대가인 장수와 병사 수천인을 파견하여 도왔다. '정시'삼년 '궁'이 '서안평'을 침략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깨졌다. '검전'에 있어 전한다.

 

沃沮(東沃沮)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相婁>·<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漢>初, <燕>亡人<衛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 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 >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그 땅의 형태는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호수는 오천이다. 큰 군장은 없고, 세세토록 읍락 각각에 '장사'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와 크게 같으나, 조금은 다르다. '한나라'초에 '연'의 망명인 '위만'이 '조선'에서 왕노릇할 때 '옥저'가 속하게 되었다. '한 무제 원봉'이년 '조선'을 치고, '위만'의 손자 '우거'을 죽인 후 그 땅을 나누어 사군을 두었는데, '옥저성'은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와 '맥'이 침입하여, 마을을 '구려'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 '현토'에 있는 옛 마을이 이것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領>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縣. <漢>(光)<[建]武>六年, 省邊郡, 都尉由此罷. 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 <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 夷狄更相攻伐, 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 皆濊民作之. <沃沮>諸邑落渠帥, 皆自稱三老, 則故縣國之制也.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使相主領, 又使大加統責其租稅, 貊布·魚·鹽·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以爲婢妾, 遇之如奴僕.

 

'한'의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를 두고, '불내성'에서 다스렸다. 주령 동쪽을 나누어 칠현을 두었는데, 이때 '옥저'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한 건무' 육년 변방의 군을 살피고 '도위'를 없엤다. 그 후로 현에 있는 거사들을 모두 현후로 삼았는데, '불내', '화려', '옥저'의 여러 현들은 모두 후국이 되었다. 오랑캐들이 서로 공격하고 쳤는데, 오히려, '불내'와 '예후'는 '공조'와 '주박제조'를 두었다. 이는 모두 '예'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거수들은 모두 스스로 삼로라 칭하는데, 즉 옛날 현국의 제도인 것이다. 나라가 작고, 큰나라 사이에 있어 궁핍하여 신하로써 '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구려'는 다시 대인들을 사자로 삼았는데, 사는 주인인 것이다. 또한 대가들이 조세를 받도록 하였는데, 맥포와 물고기, 소금 과 바다음식이다. 천리를 메어 짊어지고 가서 받쳤다. 또한 미녀들을 보내와 첩으로 삼았는데 이는 노비와 같은 것이다.

 

其土地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田種. 人性質直彊勇, 少牛馬, 便持矛步戰. 食飮居處, 衣服禮節, 有似<句麗>.{《魏略》曰: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一]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又有瓦 , 置米其中, 編縣之於槨戶邊.

 

그 땅은 기름지고,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오곡에 마땅하며, 밭농사가 좋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하며, 용감하다. 소와 말이 작고, 창병과 보병에 능숙하다. 음식과 거처 의복과 예절은 '구려'와 같음이 있다. '위략'에서 말하길, 그 시집가고 장가드는 법에 여자는 십세가 되면, 이미 허락을 한다. 사위되는 집에서 이를 맞이하여, 클때까지 길러 부인으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다시 여자집으로 돌아오는데, 여자집에서 돈을 요구한다. 돈이 다 떨어지면, 이내 다시 사위집으로 돌아온다. 장사지낼때는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그 윗부분이 출입구를 하나 낸다. 세로 죽은자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은 후 피부와 살이 썩으면 이내 뼈를 취하여 곽 안에 둔다. 집안 모두가 하나의 곽에 공동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깍는다. 죽은자의 수와 같다. 또한 기와 모양의 솥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쌀을 넣고, 곽의 출입구 한쪽에 메어둔다.

 

< 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相婁>接. <相婁>喜乘船寇 , <北沃沮>畏之, 夏月 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 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王 >別遣追討宮, 盡其東界. 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 耆老言國人嘗乘船捕魚, 遭風見吹數十日, 東得一島, 上有人, 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 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 又說得一布衣, 從海中浮出, 其身如中(國)人衣, 其兩袖長三丈. 又得一破船, 隨波出在海岸邊, 有一人項中復有面, 生得之, 與語不相通, 不食而死. 其域皆在<沃沮>東大海中.

 

 '관구검'이 '구려'를 칠 때, '구려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는데, 진격하여 이에 이르러 부딧쳤다. '옥저'의 읍락이 모두 깨지고, 포로와 삼천여급의 머리를 베었다.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이다.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다. '읍루'에 접해 있다. '읍루'는 배들 타고 노략질 함을 즐기는데 '북옥저'는 이를 두려워 하여 여름에는 산속 바위 깊은 동굴속에서 있으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춥게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촌락에 거한다. '왕기'에게 부대를 나누어 궁을 토벌하려고 파견하였는데, 그 나라 동쪽의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었다.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늙은 노인이 말하길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얻었다. 올라가 보니 사람이 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 풍속에 항시 칠월에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받치는 것이 있다. 또 말하길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가운데에 있다.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또 말하길 바다에서 떠 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국인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된다.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었다. 살아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안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 이 지역은 모두 '옥저'동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相婁

 

<相婁>在<夫餘>東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其土地多山險. 其人形似<夫餘>, 言語不與<夫餘>·<句麗>同. 有五穀·牛·馬·麻布. 人多勇力, 無大君長, 邑落各有大人. 處山林之間, 常穴居, 大家深九梯, 以多爲好. 土氣寒, 劇於<夫餘>. 其俗好養 , 食其肉, 衣其皮. 冬以 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 夏則裸袒, 以尺布隱其前後, 以蔽形體.

 

'읍루'는 '부여' 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에 닿는다. 남쪽은 '북옥저'에 닿고, 그 북쪽의 끝은 알지 못한다. 그 땅은 산이 험하고 많으며, 그 사람들의 형태는 '부여'와 유사하다. 언어는 '부여'와는 다르고 '구려'와 같다. 오곡이 있으며, 소 말 마포가 있다. 사람들은 용력이 많고, 대군장은 없다. 읍락 각각에 대인이 있다. 산림사이에 거처하면서 항상 동굴에서 산다. 큰 집은 사다리 아홉 개 정도의 깊이고 깊을수록 좋은 것이다. 땅기운이 차가운데, '부여'보다 심하다. 그 풍속에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겨울에 돼지 비계를 몸에 여러번 두껍게 칠하여 추운 바람을 막는다. 여름에는 곧 벌거 벋고, 한척되는 천으로 앞 뒤를 가리는 것으로 형체를 가린다.

 

其人不 , 作 在中央, 人圍其表居. 其弓長四尺, 力如弩, 矢用 , 長尺八寸, 靑石爲鏃, 古之<肅愼氏>之國也. 善射, 射人皆入(因)[目]. 矢施毒, 人中皆死. 出赤玉·好貂, 今所謂<相婁>貂是也. 自<漢>已來, 臣屬<夫餘>, <夫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夫餘>數伐之, 其人衆雖少, 所在山險, 國人畏其弓矢, 卒不能服也. 其國便乘船寇盜, 國患之. 東夷飮食類皆用俎豆, 唯<相婁>不, 法俗最無綱紀也.

 

사람들이 깨끗하질 못하여 중앙에 화장실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둘레에서 거한다. 활의 길이는 사척이고 힘이 쇠뇌만큼 든다.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길이가 한척팔촌이다. 푸른돌로 화살촉을 만들니, 옛날부터 '숙신씨'의 나라라 한다. 궁술에 능하여 사람을 쏘면 모두 눈을 맞치고, 화살에 독을 발라 사람에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나오니, 이제 읍루초가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 '한'의 말기에 '부여'의 신하였다가, '부여'가 조세와 조역을 중하게 하니, '황초'중에 모반 하엿다. '부여'가 수차례 정벌하였으나, 사람들의 무리가 비록 적으나, 산이 험하고,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 활과 화살을 두려워 하여 병사로써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노략질을 잘 하는데, 이웃나라들의 근심거리였다. 동이들은 음식류에 모두 조두를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는 아니었다. 법과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

 

 濊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準]>僭號稱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燕>人<衛滿>, 結夷服, 復來王之. <漢><武帝>伐滅<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 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 其人性愿慤, 少嗜欲, 有廉恥, 不請(句麗)[ ].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衣服有異. 男女衣皆著曲領, 男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예'의 남쪽은 '진한'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호수는 이만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 이르러 팔조의 가르침으로 가르치자 문을 닫지 않고 백성들은 도둑질 하지 않았다. 그 사십여세 후에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였다. '진승'등이 일어나니, 천하가 '진'을 배신하였다. '연','제', '조'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조선땅으로 들어오니, 수만이나 되었다. '연'인 '위만'이 있어 상투틀고 이족옷을 입어 돌아와 왕노릇하였다. '한 무제'가 조선을 벌하여 멸하니, 나누어 그 땅에 사군을 두었다. 이로부터, '호'와 '한'이 점점 나뉘게 되었다. 대 군장이 없고, 스스로 한때부터의 관직에, '후', '읍군', '삼노'가 있어 하호의 주인으로 다스렸다. 그 늙은 노인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구려'와 같은 종류라고 한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 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 '구려'에 구걸함을 청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크게 '구려'와 같고 의복만은 다름이 있다. 남녀의 옷은 모두 분명하게 옷깃이 굽었고, 남자들은 넓이가 수촌이나 되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는 것으로 장식을 한다. 스스로 '단단대산령'서쪽은 '낙랑'에 속하였다. 령의 동쪽에 칠현을 두었는데 도위가 주인이었다. 모두 예의 백성이다. 후에 도위를 없에고, 그 거수들을 후에 봉하니, 이제 '불내, 예'는 모두 그 종류인 것이다.

 

<漢>末更屬<句麗>.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捐棄舊宅, 更作新居. 有麻布, 蠶桑作 . 曉候星宿, 豫知年歲豊約. 不以珠玉爲寶.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少寇盜.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 樂浪檀弓出其地. 其海出班魚皮, 土地饒文豹, 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 {臣<松之>按: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

 

'한'의 말에는 다시 '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그 풍속에 산과 천을 중하게 여기어 산천으로 각각 부를 나누어서, 서로 들어와 허망함을 바라지 못하게 하였다.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못하니, 꺼리는 것들이 많았다.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빨리 버리고, 옛집도 버린다. 새로 집을 짓는다. 마포가 있으며, 양잠을 하고, 면을 짓는다. 별자리를 보아서 그래의 풍년들 것임을 미리 알고,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없이 술마시고 노래하고 츰을 추니, 이름하여, '무천'이라 하였다. 또한 호랑이를 신으로 모셔 제사지낸다. 읍락끼리 서로 침범을 하면, 서로 꾸짓어 소나 말로 갚는데, 이를 명하여, '책화'라 한다. 사람을 죽이면, 죽음으로 보상하고, 도둑이 적다. 창은 길이가 삼장이나 되고, 혹 여러 사람이 함께 창을 들기도 한다. 보병전에 능하다. '낙랑'과 '단궁'이 이 땅에서 나오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나오며, 얼룩표범이 있고 또한 과하마가 나온다. '한 환제'때에 이것들을 받쳤다. 신하 '송지'가 말하길 과하마는 높이가 삼척이고 타면 가히 과실수를 아래로 해서 간다. 고로 과하라고 하는 것이다. '박물지', '위도부'에서 보았다.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詣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 供給役使, 遇之如民.

'정시' 육년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이 '동예'가 '구려'에 속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불내후'들이 읍을 들고 항복하였다. 팔년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받치니, 다시 '불내'를 '예왕'이라 벼슬을 내린다고 고하였다. 그는 민간들 틈에 섞여 살면서 사시로 군에 나와 조알했다. 두 군은 군사의 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 부역 시키는 일 등을 모두 일반 백성과 똑같이 대우했다.

 

韓(馬韓)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로 한다.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사방 사천리이다. 세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고, 셋은 '번한'이다. '진한'은 옛날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백성들은 토착을 하며 씨를 뿌리며 양잠을 알고, 갈포를 짓는다. 각각 장사가 있는데 큰 자는 스스로를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한다. 산과 바다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은 없다.

 

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 國>·<臣 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 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 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酸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 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 報安邪 支 臣離兒不例拘邪 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원양국>·<모수국>·<상외국>·<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탁국>·<신분고국>·<백제국>·<속로불사국>·<일화국>·<고탄자국>·<고리국>·<노람국>·<월지국>·<자리모로국>·<소위건국>·<고원국>·<막로국>·<비리국>·<점리비국>·<신흔국>·<지침국>·<구로국>·<비미국>·<감해비리국>·<고포국>·<치리국국>·<염로국>·<아림국>·<사로국>·<내비리국>·<감해국>·<만로국>·<벽비리국>·<구사오단국>·<일리국>·<불미국>·<지반국>·<구소국>·<첩로국>·<모로비리국>·<신소도국>·<막로국>·<고랍국>·<임소반국>·<신운신국>·<여래비리국>·<초산도비리국>·<일난국>·<구해국>·<불운국>·<불사분사국>·<원지국>·<건마국>·<초리국>, 등 무릇 오십여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만여가 정도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 정도이다. 총 10여만 호 정도이다.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린다. '신지' 혹은 '가우'를, '신운견지'라 부르는데, 안정됨을 지키고, 정도에 벗어남을 멀리하고, 신하를 받들어 주는 것과, 아이에게 베푸는것이 사됨이 없어 비교할수 없다. '진지'는 겸손한 호칭이다. 그 관직은 위나라를 따라서, '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이다.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 >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 >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후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고, '연'나라 망명인 '위만'이 공격하여 빼앗았다. [ '위략'에서 말하길,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가 '주나라'가 약해짐을 보고, '연'이 스스로를 왕으로 높이고, 동쪽의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병사와 함께 '연'을 공격하여 '주'의 왕실을 높이고자 하였다. 대부 '예'가 이를 간하여, 멈추게 되고, '예'를 서쪽으로 보내어 '연'에게 말하니 '연'도 이를 그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이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여리를 취하였다.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지게 되었다.'진'이 천하를 아우르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때에 '조선왕 비'가 섰다. '진'이 엄습할까를 두려워 하여 복속하여 '진'에 속하였지만, 알현하지는 않았다. '비'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섰다. 이십여년후에 '진', '항'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럽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시름하였다. 점점 '준'에게 가서 망명을 하니, '준'이 이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이 '노관'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이 '연'과의 경계를 '패수'로 삼았다. '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호'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이에 이르러, '준'에게 항복하였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하니,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의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하였다. '만'이 망한 무리들을 꾀여, 무리가 점점 많아지니, 이에 '준'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고하길, '한'의 병사가 열길로 쳐들어 온다. 방비하기 위해 들어가니, 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만'과 전쟁을 하는데, 대적하질 못하였다.] 그 좌우궁인들과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의 땅에 거하였다. 스스로 '한왕'이라 하였다.[위략에 말하길 그 아들이 나라에 있어, 성을 '한씨'라 하였다. '준'이 바다가운데 있은 후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후로 끊어져 멸망하니, 지금 '한'인이 오히려 그를 제사지내는 자가 있다.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魏略》曰: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至<王莽><地皇>時, <廉斯 >爲<辰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 <>曰:[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 <戶來>曰:[可.] (辰)< >因將<戶來>(來)出詣<含資縣>, 縣言郡, 郡卽以< >爲譯, 從<芩中>乘大船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尙得千人, 其五百人已死. <>時曉謂<辰韓>:[ 汝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辰韓>曰:[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 乃出<辰韓>萬五千人, <弁韓>布萬五千匹, <>收取直還. 郡表< >功義, 賜冠 ·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한'나라 때에 '낙랑군'에 속하게 되고, 사시 조알하였다. [위략에, 처음 '우거'가 깨어지지 않았을 때 '조선'의 재상 '역계경'이 간하였지만, '우거'가 쓰지 않았다. 동쪽의 '진국'은 이때에 백성들이 따라나온자가 이천여호나 되었고, 역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 지황'때에 이르러, '염사착'이 '진한'의 우수거가 되었다. '낙랑'이 땅이 좋고, 백성들이 부유하다는 말을 듣고, 도망쳐 와서 항복하였다. 그 읍락에서 나와, 밭 가운데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는데, 말이 '한'인이 아니었다. 이에 물으니, 남자가 말하길, '우리는 '漢'인이다. 이름은 '호래'이다. 우리의 무리는 천오백명으로 나무를 베려다, '韓'인에게 붙잡여서 모두 머리를 깍이고, 종이 되었다. 삼년이나 되었다.' '염사착'이 말하길 '나는 '한의 낙랑'에 항복할 것이다. 당신도 같이 가겠는가?'하니 '호래'가 말하길 '좋다'했다. '염사착'이 '호래'와 '함자현'에 이르러, 현에서 군을 말하니, 군에서 '착'을 통역으로 삼고, '금중'으로 나아가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갔다. 역시 '호래'와 함께이다. 항복받은 무리 천명을 얻었으나, 그 오백명은 이미 죽었다. '착'이 이때 '진한'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오백명을 돌려 보내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마땅히 병사 만으로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하니 '진한'이 말하길 '오백인은 이미 죽었다. 나는 마땅히 재물로써 값겠다.'하고, '진한'에서 만오천명과 '변한'에서 포 만오천필이 나오니, '착'이 거두어 곧바로 돌아갔다.군에서 '착'에게 공로를 표시하고, 관책과 밭과 집을 하사하였다. 자손이 수대에 내려오다가, '안제 연광' 사년때에 옛날 복재를 받았다.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 , 下戶詣郡朝謁, 皆假衣 , 自服印綬衣 千有餘人.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환제', 와 '영제'말에 '한예'가 강성해지자, 군현들이 능히 제도 하질 못하고, 백성들이 많이 '한국'으로 들어갔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둔유현'의 남쪽 거친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고, '공손모', '장창'등을 보내어 유민을 모아, 병사를 일으켜 '한예'를 쳤다. 옛 백성들이 점점 나오니, 이후로 '왜'와 '한'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중에 '명제'가 비밀히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두군의 바다를 건너서, 여러 '한국'의 신지에게 읍군의 인수를 하사하고, 다음으로 읍장에게 하사하였다. 그 풍속에 옷과 두건을 좋아하는데, 하호들이 군에 조알할때에 모두 옷과 두건을 한다. 이제 하사한 옷과 두건을 한자가 천여명이나 된다. '부종사 오림'이 '낙랑'이 '한국'을 통일했다고 해서 '진한'의 팔개국을 나무어 '낙랑'에게 주었다. 통역하는데 다르고 옳음이 있어 전해지자, 신지 '첨한'이 노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 태수 유무'가 함께 병사로 쳤는데, '준'은 전사하고, 이군은 '한'에 멸망하게 되었다.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 拜之禮. 居處作草屋土室, 形如 , 其戶在上, 擧家共在中, 無長幼男女之別. 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 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縣頸垂耳, 不以金銀錦繡爲珍. 其人性彊勇, 魁頭露 , 如炅兵, 衣布袍, 足履革 .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 之, 通日 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勸作, 且以爲健.

 

그 풍속은 기강이 적어, 나라의 읍에 비록 주인이 있지만, 읍락에 섞여 살고, 능히 제도하거나 다스림에 능하지 못하다. 꿇어 앉아 엎드려 절하는 예의도 없다. 거처는 흙으로 만든 집에 풀로 지붕을 올리는데, 형태가 무덤과 같다. 그 문은 위로 내고, 가족이 함께 그 가운데 있다. 어른과 아이와 남녀의 구별이 없다. 그 장사는 곽은 있으나 관이 없다. 소와 말타는 것을 알지 못하여, 소나 말은 사람이 죽었을 때 보내져 쓰인다. 구슬 목걸이를 보내로 삼는데, 혹은 옷에 꾀메어 씀으로 꾸민고, 혹은 목에 매달기도 하고, 귀에 달기도 한다. 금은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강하고 용감하고, 상투를 트는데, 모양이 경병과 같다. 포로 옷을 해 입고, 신발은 가죽신을 신는다. 그 나라에 일이 있으면, 관가에서 성곽을 쌓토록 시키고, 용감하고 건강한 여러 소년들이 등가죽을 뚫어, 큰 밧줄에 이를 묶은후, 큰 나무에 붙들어 맨후 종일 지껄이며, 고함을 치며, 힘을 쓰는데, 아파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에 힘쓰는 것과 건강함을 권하는 것이다.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 ,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 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 無他珍寶. 禽獸草木略與中國同. 出大栗, 大如梨. 又出細尾?, 其尾皆長五尺餘. 其男子時時有文身.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 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 .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 乘船往來, 市買<韓>中.

 

항상 오월 씨뿌릴때가 되면,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을 춘다. 밤낮없이 쉴줄 모르고 술을 마신다. 그 춤은 수십사람이 함께 일어나 따라가면서 땅을 밟는데, 손과 발이 서로 응한다. 마디마다 아뢰는 사람이 있어, 탁무와 비슷함이 있다. 시월 농사가 끝나면 다시 이와 같이 하는데 귀신을 믿는 것이다. 나라에서 각각 천신에 제사지내는 주인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천군'이라고 한다. 또한 여러 나라 각가가에는 특별한 읍이 하나 있는데, 이를 '소도'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메달고, 귀신을 부린다. 여럿이서 그 가운데로 도망하면 이에 돌아오지 못한다. 도둑이 일어나기에 좋다. '소도'의 뜻은 '부거'와 비슷한테 선악을 행하는 것에는 다름이 있다. 그 북방 군과 가까운 나라들은 예의 풍속이 조금 있고, 먼 곳은 죄인과 같이 노비들과 서로 섞여 산다. 다른 보배는 없고, 짐승들과 초목들도 중국과 같다. 큰 밤이 나오는데 크기가 배만 하고, 또 꼬리가 가는 닭이 있는데, 그 꼬리가 오척이나 된다. 남자들은 때때로 문신을 한다. 또한 '주호'가 있는데, '마한'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 사람들이 작고, 언어는 '한'과 같지 않으며, 곤두 함이 '선비'와 같다. 가죽옷을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고, 옷에는 위는 있지만 아래는 없어 벌거 벗은 것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과 교역을 한다.

 

韓(辰韓)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늙은 노인이 세를 전하여 말하길 옛날 '秦'의 사역을 피하여 온 망명인이 '한국'에 왔다. '마한'이 그 동쪽땅을 나누어 주었다. 성책이 있고,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았다. '국'을 '방'이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적'을 '구'라 하고, '행주'를 '행상'이라 하였다. 서로 불러 무리로 하니 '秦'나라 사람과 같음이 있으니, 단지 '연'과 '제'의 사물의 명칭뿐이 아니다. '낙랑'사람을 '아잔'이라 하고 동쪽 사람을 '아'라고 하는데, '낙랑'사람은 본래 그 남은 세력이다. 이제 그 이름을 '진한'이라고 하니 처음에는 육국이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열두나라가 되었다.

 

韓(弁辰)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有<已 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 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
               
예왕지인 20-10-11 11:14
   
잘 읽어보셈
                         
예왕지인 20-10-11 11:31
   
사기 기록이군요 ㅋㅋ 후한서 동이열전에도 나옴

** 조선열전朝鮮列傳 : 『사기』「조선열전」은 중국 정사상 최초로 조선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는데, 그것이 주로 위만조선과 그의 대한투쟁對漢鬪爭 및 소위 ‘한사군’으로 귀결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사기』「송미자세가」에 따르면 은의 멸망시 현인 기자가 주 무왕에 의해 조선에 봉해졌다고 하였는데, 본격적인「조선열전」에 와서 기자에 관한 사실이 전무한 것은 유념할만한 문제라 하겠다. 같은 맥락에서 ‘단군조선’의 경우가 지적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또 다른 별개의 문제다. 여하튼 이에 대하여 기자가 봉해졌던 조선과 위만이 통치하였던 조선이 서로 다른 지역이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으나 (윤내현,「위만조선의 재인식」) 우선적으로 기자의 동래설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전제되는 이상 보다 입체적인 해석방법이 요구된다고 하겠으며, 이 경우 고고학적·인류학적 시각은 정당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에서도 역시 해당 지역의 성격, 즉 문화권적인 이해에서 그칠 것인가, 또는 그것을 국가적 통치영역으로까지 심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신중한 고려를 요하는 것이다. 아울러 특히 고조선 내지 위만조선의 영역 범위가 첨예한 논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이것이 향후 대한전역對漢戰役과 그로 결과되었다고 하는 한사군의 존재 및 그 위치 비정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조선에 관한 기록이『관자』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을 보아 이미 기원전 7세기에 중국인들은 조선에 대하여 일정한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사기』의「조선열전」에 투영된 사마천의 인식범위에 위만조선 이전 단계의 사실史實이 소략하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사기』의 외국전外國傳기술의 목적이 주변제국에 대한 상세한 소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제국의 팽창과 관련한 현실적 관심의 반영으로 중국 자체의 역사기술에 불가결한 부분만을 서술하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병익,「 중국정사의 외국열전」)
** 조선朝鮮 :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의 여러 견해가 있어 왔다.『사기집해』에 인용된 3세기경 위魏의 장안張晏은 ‘조선에는 습수·열수·산수 3개의 강이 있는데 이들이 합쳐 열수가 되었으며 낙랑과 조선이라는 명칭은 이 강들의 이름에서 따온것 같다’고 하였다. 또『산해경』의 주석자인 4세기 초의 곽박郭璞은 ‘조선은 요동에 있던 낙랑과 동의어’라고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쪽 끝에 있어 해가 뜨는 지역이므로 조선이라 불렀다’고 하였으며,『동사강목』에서는 ‘선비의 동쪽에 있으므로 조선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신채호와 정인보는 조선을 같은 음을 지닌 만주어의 주신珠申에서 온 것으로 해석하였다. (신채호,『조선상고문화사』pp.351∼369; 정인보,『조선사연구』pp.51~52)『만주원류고』에는 원래 만주어로 ‘소속’을 주신이라고 하였는데 숙신은 주신이 전음轉音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근거하여 ‘소속’을 ‘관경管境’과 뜻이 통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주신은 국호의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인식하였고, 옛 문헌에 보이는 조선과 숙신은 동일한 뜻을 지닌 다른 호칭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의 명칭은 주신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양주동은 고대 조선족은 태양숭배 신앙을 가지고 이동하면서 도처에 ‘밝’이나 ‘새’라는 지명을 남겼을 것으로 보고, 조朝를 ‘밝’으로 선鮮을 ‘새’로 해석하여 조선을 ‘밝새’로 보았다. (『고가연구』pp.380~391) 이병도는『삼국유사』고조선조에 나오는 ‘조선’은 국가 이름이고 ‘아사달’은 그 수도라는 대목에 주목하여 이 단어들이 동의어일 것으로 보아, 조선은 곧 고대조선의 단어 ‘아사달’의 중국식 모사라 하였다. (「단군설화의 해석과 아사달문제」 pp.27~43)
한편 리지린은 기본적으로 장안의 설을 받아들였으나 약간의 이견을 보이고 있다. 그는 습수·열수·산수 등의 명칭으로부터 숙신·식신·직신 등의 숙신족 제명칭이 배태되었다고 보면서, 조선은 결국 위의 수명水名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직접 온 것이 아니고, 숙신이라는 종족명칭을 통하여 온 것이라고 하였다. (『고조선연구』pp. 11∼20)
** 만滿 : 위만衛滿의 조선망명 및 왕위찬탈에 관련된 본문의 내용은『한서』와『후한서』에 거의 그대로 답습되고 있으나,『삼국지』인용의『위략』에서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收中國亡命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일단 양사료에서 볼 수 있는 차이는 본문에서는 ‘만’으로만 기록된 것에 비해 후기사료인『위략』이나『후한서』등에서는 ‘위’라는 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즉, 당시 만이 노관의 반란에 공모하여 국외로 망명하였고 또 천여인의 지지자를 거느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이 중국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뒤에 기술된 ‘추결만이복魋結蠻夷服(상투를 틀고 오랑캐옷을 입음)’하였다는 사실은 이같은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그런데『위략』·『후한서』·『잠부론』등에 ‘위’성이 부가되고,『삼국유사』에 ‘위만’으로 나타난 사실은 그를 중국출신으로 보고자 한 의도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본문 후반부에 나타나듯이 조선인의 인명이 ‘상로인지자최相路人之子最, 니계상참尼谿相參’ 등으로 나타나고『위략』에서도 ‘대부례大夫禮’가 보이는 것을 감안할 때 단철음 인명이 조선인 가운데 상당수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위만이 노관의 반란직후 망명하였다면, 기원전 195년 경에 조선에 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후한서』에 의하면 ‘ …… 陳涉起兵 天下崩潰 燕人衛滿避地朝鮮 因王其國 百有餘歲 武帝滅之(진섭기병 천하붕궤 연인위만피지조선 인왕기국 백유여세 무제멸지) …… ’라 하여 위만이 조선으로 간 시기가 대략 기원전 209년 경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위만은 조선에서 왕위를 점유한 후에 계속 ‘조선’이란 국호를 사용하였고, 진번·조선의 백성들이 위만을 지지한 사실 등에서 위만이 조선출신이였음은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 진번,조선眞番·朝鮮 :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는 이 기록은『삼국지』에 인용된『위략』의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방 2천여리를 공략하였다는 내용에 대응하는 것이다. 진번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과 나란히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서로 인접된 지역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과『위략』의 조선을 각각 지명과 국명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견해가 있으나, (윤내현,「고조선의 서변경계고」)『사기』와『위략』의 기사는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서로 대응되는 기사라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 기사는 연의 동방진출과 관련하여 고조선의 영역 및 그 중심지에 관한 논쟁점이 되고 있다. 아울러 뒤의 한사군 가운데 보이는 진번군과의 관련에서도 중시되는 사항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될 사실은 진번이란 표현이 고조선시대의 구체적인 명칭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본문에 계속하여 나타나는 ‘기방소읍 진번·임둔진번방중국 其傍小邑 眞番·臨屯眞番旁衆國’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당시의 구체적인 정치체명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종래 진번 등의 명칭이 한사군설치와 관련하여 처음 나타난 것처럼 이해되는 경향은 불식되어야 하며, 상당한 정치체로 성장해 있는 진번 및 임둔 등 중국衆國의 존재가 중시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 나오는 진번의 원위치는 후일의 진번군과는 달리 요동지역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보다 높다고 보여진다. 한편 이와 함께 진번·조선의 조선도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전체 고조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진번처럼 일부 지역에 한정된 의미로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 장새鄣塞 : 전국시戰國時 연燕 소왕대昭王代(B.C.311~279)의 장군인 진개의 조선공략과 관련되어 설치된 것으로 이해되는 요새이다.
** 요동외요遼東外徼 : 진秦은 15년간 존속한 나라로서 사마천은 이 시기 고조선과 진사이에 있었던 국경선 변동을 본문과 같이 ‘진멸연秦滅燕 속요동외요屬遼東外徼’란 내용으로 간략히 기술하였다. 허승종은 이를 ‘요동새외지요遼東塞外之徼' 즉, 요동새바깥의 ‘요’로 해석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재개하였다. (「중국『사기』에 보이는 ‘요동고새’에 대하여」 pp.18∼26) 그런데 ‘요’는 전국戰國이래 한대에 이르기까지 국경지역에 설치된 변경초소선으로서『사기』「사마상여전」을 주석한『색은』에서 ‘요’는 새塞이다. 목책과 강으로 만이蠻夷와 경계가 되는 것이다’라고 한 내용 등을 볼 때 그 성격이 보다 구체화된다.
한편『연감류함』의 편자들은 ‘외요外徼는 진대秦代에 속하고 고새故塞는 한대漢代에 수리한 것이다(外徼屬於秦時 故塞修於漢代)’라 하여 외요를 요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외요를 요외徼外로 이해하여 지역적 성격을 부여할 것이 아니라, 새塞와 같은 국경초소선으로 보아야 하며 ‘요동새’의 바깥 ‘요徼’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이 요동외요의 위치는 난하 이동以東으로 보는 견해와, 이후 중국의 요동식민의 거점이 된 곳임이 분명한 데에서 후대의 요동군치遼東郡治인 양평襄平 일대가 아닌가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 패수浿水 : 패수는 한과 조선의 국경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위만의 망명과 한 무제의 조선침공 및 한사군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패수의 위치에 관해서는 종래 대동강설, 청천강설, 압록강설, 요동방면설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예왕지인 20-10-11 11:41
   
근데 단군 조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위만조선 기자조선만 나옵니다.....
예왕지인 20-10-11 11:14
   
'변진' 역시 열두나라이다. 역시 여러개의 작은 별읍이 있다. 각각 거사가 있으니 큰 자의 이름은 '신지'이고 다음은 '험측'이라 하고, 다음은 '번예'라 하고 다음은 '살해', 다음은 '읍차'라 한다. <이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고자미동국>·<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진악노국>·<군미국(변군미국)>·<변진미오사마국>·<여담국>·<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변진구사국>·<변진주조마국>·<변진안사국(마연국)>·<변진독로국>·<사로국>·<우유국>이니 '번', '진한'을 합쳐 이십사개국이다. 큰 나라는 사오천가를 이루고 작은 나라는 육칠백가를 이룬다. 총 사오만호이다.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魏略》曰: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 作 布, 乘駕牛馬. 嫁娶禮俗, 男女有別.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魏略》曰:其國作屋, 橫累木爲之, 有似牢獄也.}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俗喜歌舞飮酒. 有瑟, 其形似筑, 彈之亦有音曲. 兒生, 便以石厭其頭, 欲其 . 今<辰韓>人皆 頭. 男女近倭, 亦文身. 便步戰, 兵仗與<馬韓>同. 其俗, 行者相逢, 皆住讓路.

 

그 열두 나라는 '진왕'에 속하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이 하여, 대대로 잇는다. '진왕'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위략에 말하길 밝음이 이주민에게 있어 고로 마한의 제도가 되었다.] 땅은 좋고, 오곡과 벼에 알맞으며, 양잠과 겸포를 하고, 소나 말을 탄다. 결혼하는데 예절이 있으며 남녀는 구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로 장사지내는데, 그 뜻은 죽은자가 날아 오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략에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로 얽어 매는데 감옥과 비슷하다.] 나라에 철이 나오고, '한','예','왜',가 모두 이를 가져다 썼다. 저자에서 돈을 사용함이 중국의 돈사용과 같아, 두군에서도 넉넉히 사용하였다. 풍속에 노래하고, 춤추고, 음주함을 즐긴다. 거문고가 있는데, 모양이 '축'과 비슷하고, 연주하면, 역시 소리와 곡률이 있다. 아이나 태어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르는데, 머리를 모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진한'사람이 모두 '편두'이다. '왜국'과 가까워 남녀가 모두 문신을 한다. 보병전을 하고 병사의 무기는 '마한'과 같다. 풍속에 길가던 사람이 서로 만나면, 모두 길을 비켜준다.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祠祭鬼神有異, 施 皆在戶西. 其<瀆盧國>與<倭>接界. 十二國亦有王, 其人形皆大. 衣服 淸, 長髮. 亦作廣幅細布. 法俗特嚴峻.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산다. 역시 성곽이 있으며,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서로 유사함이 있으나, 귀신에 제사함은 다른데, 부엌신을 문에서 서쪽에 두는 것이다. '독노국'은 '왜'와 접해 있다. 열두나라역시 왕이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크다. 의복은 정결하고, 머리를 길른다. 역시 폭이 넓은 가드다란 포를 짓고, 법과 풍속은 특히 엄하다.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하여 국읍(國邑)을 이룬다. 예로부터 백여개의 나라가 있어, '한'나라 때에는 알현하는 자가 있었고 사역(使譯)이 통하는 바로는 지금은 30국이다    ※사역(使譯)-호시(互市)무역에 종사하던 민간상인으로 추정)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 其大官曰卑狗, 副曰卑奴母離. 所居絶島, 方可四百餘里, 土地山險, 多深林, 道路如禽鹿徑. 有千餘戶, 無良田, 食海物自活, 乘船南北市 . 又南渡一海千餘里, 名曰<瀚海>, 至一大國, 官亦曰卑狗, 副曰卑奴母離. 方可三百里, 多竹木叢林, 有三千許家, 差有田地, 耕田猶不足食, 亦南北市 .

 

군(郡)에서 왜(倭)에 이르기까지는, 해안을 돌아 물 길로 가서 한국(韓國)을 거치고 남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 그 북안(北岸)인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도착하는데 7천여 리이다. 비로소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도착한다. 대마국의 대관(大官)을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卑奴母離)라 한다.. 떨어진 섬에 거주하는데, 거리가 사백여리이다. 땅은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다. 천여 호(戶)가 있는데 좋은 농지는 없고 살아 있는 해물(海物)을 먹으며 배를 타고 남북 시장에서 식량을 구입한다. . 또 남으로 바다 건너 천여리에 일명 한해(瀚海)를 건너면 큰 나라가 하나 있는데, 역시 관리를 '비구'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사방 3백 리이고 많은 대나무와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며 약 3천 정도의 가구가 있다. 전지(田地)가 있어 경작하는 점이 (대마국과) 다르나 식량이 부족해 또한 남북 시장에서 식량을 구입한다.

 

 又渡一海, 千餘里至<末盧國>, 有四千餘戶, 濱山海居, 草木茂盛, 行不見前人. 好捕魚鰒, 水無深淺, 皆沈沒取之. 東南陸行五百里, 到<伊都國>, 官曰爾支, 副曰泄謨 ·柄渠 . 有千餘戶, 世有王, 皆統屬<女王國>, 郡使往來常所駐. 東南至<奴國>百里, 官曰 馬 , 副曰卑奴母離, 有二萬餘戶. 東行至<不彌國>百里, 官曰多模, 副曰卑奴母離, 有千餘家. 南至<投馬國>, 水行二十日, 官曰彌彌, 副曰彌彌那利, 可五萬餘戶. 南至<邪馬壹國>, 女王之所都, 水行十日, 陸行一月. 官有伊支馬, 次曰彌馬升, 次曰彌馬獲支, 次曰奴佳 , 可七萬餘戶. 自<女王國>以北, 其戶數道里可得略載, 其餘旁國遠絶, 不可得詳.

 

또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말로국(末盧國)에 도착한다. 4천 여 가구가 있고 산기슭과 해안에 거주한다. 초목이 무성해 길을 다닐 때 앞사람을 볼 수 없을 정도다. 물고기, 전복 잡는 것을 좋아해 물이 얕고 깊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물에 들어가 잡는다. 동남쪽 육지를 따라 오백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이 있는데, 관리를 '이지'(爾支)라 부르고, 부관을 '설모고'(泄謨?), '병모고'라 부른다. 천여호가 있으며, 세습하는 왕이 있는데 모두 '여왕국'(女王國)에 통속(統屬)되어 있다. 군(郡-대방군?)의 사신이 왕래하고 항상 머문다. 남동쪽으로 백리를 가면 노국(奴國)에 도착하는데 그 관리는 시마고(?馬?), 부관은 비노모리(卑奴母離)라 하며 2만 여 호(戶)가 있다. 동쪽으로 백리에는 불미국(不彌國)이 있어, 관리를 다모(多模)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卑奴母離)라 부르며, 호수는 천여가이다. 남쪽으로 투마국(投馬國)이 있어 물로 이십일을 간다. 관리를 미미(彌彌)라 하고, 부관을 미미나리(彌彌那利)라 부르는데, 가히 오만여호이다. 남쪽으로 야마일국(邪馬壹國)이 잇어 여왕이 거하는 도읍으로 물로 십일을 가고 육지로는 한달이 걸린다. 관리를 이지마(伊支馬)라 하고 다음을 미마승(彌馬升), 다음을 미마획지(彌馬獲支), 다음을 '노가제(奴佳?)라 하니 가히 칠만여호이다. 여왕국의 북쪽은 그 호구수와 도로 거리에 대해 대략 기재했으나 나머지 다른 나라들은 멀고 끊어져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야마일국(邪馬壹國-‘야마타이’의 음차. 여기서 일(壹)을 대(臺)의 오자로 보아 일본에서는 ‘야마대국’이라 하나 [삼국지] 원문에 는 ‘야마일국(邪馬壹國)’으로 되어있다. [후한서-동이열전]에는 야마대국(邪馬臺國)으로 표기)

 

次有<斯馬國>, 次有<已百支國> 次有<伊邪國>, 次有<都支國>, 次有<彌奴國>, 次有<好古都國>, 次有<不呼國>, 次有<姐奴國>, 次有<對蘇國>, 次有<蘇奴國>, 次有<呼邑國>, 次有<華奴蘇奴國>, 次有<鬼國>, 次有<爲吾國>, 次有<鬼奴國>, 次有<邪馬國>, 次有<躬臣國>, 次有<邑利國>, 次有<支惟國>, 次有<烏奴國>, 次有<奴國>, 此女王境界所盡. 其南有<狗奴國>, 男子爲王, 其官有狗古智卑狗, 不屬女王. 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

사마국(斯馬國), 이백지국(已百支國), 이야국(伊邪國), 도지국(都支國), 미노국(彌奴國), 호고도국(好古都國), 불호국(不呼國), 저노국(姐奴國), 대소국(對蘇國), 소노국(蘇奴國), 호읍국(呼邑國), 화노소노국(華奴蘇奴國), 귀국(鬼國), 위오국(爲吾國), 귀노국(鬼奴國), 야마국(邪馬國), 궁신국(躬臣國), 읍리국(巴利國), 지유국(支惟國), 오노국(烏奴國), 노국(奴國)이 있고, 이것으로 여왕국의 경계가 다한다. 남쪽에 구노국(狗奴國)이 있는데, 남자가 왕을 하고, 관리를 구고지비구(狗古智卑狗)라 하는데, 여왕에 속해 있지 않다. 군(郡)으로부터 여왕국(女王國)까지 만 2천여 리 거리이다.

 

男子無大小皆 面文身. 自古以來, 其使詣中國, 皆自稱大夫. <夏后><少康>之子封於<會稽>, 斷髮文身以避蛟龍之害. 今<倭>水人好沈沒捕魚蛤, 文身亦以厭大魚水禽, 後稍以爲飾. 諸國文身各異, 或左或右, 或大或小, 尊卑有差. 計其道里, 當在<會稽>·<東冶>之東. 其風俗不淫, 男子皆露 , 以木 招頭. 其衣橫幅, 但結束相連, 略無縫. 婦人被髮屈 , 作衣如單被, 穿其中央, 貫頭衣之. 種禾稻·紵麻, 蠶桑·緝績, 出細紵· . 其地無牛馬虎豹羊鵲. 兵用矛·楯·木弓. 木弓短下長上, 竹箭或鐵鏃或骨鏃, 所有無與< 耳>·<朱崖>同.

 

남자는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한다. 예로부터 왜의 사신이 중국에 이르렀는데 모두 대부(大夫)를 자칭했다. 하후소강(夏后少康)의 아들을 회계(會稽)에 봉했는데 머리를 깎고 문신하여 교룡(蛟龍)의 해를 피한 적이 있다.. 지금 왜의 물가에 사는 사람들이 물에 들어가 물고기와 조개 잡는 것을 좋아하는데 또한 몸에 문신하여 큰 물고기와 바다 짐승이 이를 싫어하게 하였고 후에 점점 문신을 장식으로 삼게 된 것이다.. 여러 나라의 문신이 각기 다른데, 왼쪽이나 오른쪽, 크거나 작은데 따라 존비(尊卑)의 차이가 있다. 왜에 이르는 거리를 볼 때 회계(會稽), 동야(東冶)의 동쪽에 있다.

 . 그 풍속은 음란하지 않고, 남자들은 노계(露?-관을 쓰지 않고 맨상투를 드러냄)하여 목면(木綿)으로 머리를 묶는다. 그 의복은 횡폭(橫幅)으로 묶어 서로 연결하여 대체로 바느질하지 않는다. 부인(婦人)은 머리를 풀어헤쳐 묶어 올리고(굴계-屈?) 옷은 홑옷(단옷-單被)과 같이 지어 그 중앙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어 입는다.(이른바 ‘관두의貫頭衣’)

. 벼, 모시, 삼, 누에, 잠상(蠶桑?누에와 뽕나무)이 있고 길쌈하여 세저(細紵-세모시)와 겸면(?綿-합사비단)을 생산한다. 그 땅에는 소, 말, 호랑이, 표범, 양, 까치가 없다. 병장기로는 모(矛-창), 순(楯-방패), 목궁(木弓)을 사용한다. 목궁은 아래가 짧고 위가 긴 죽전(竹箭-대나무 화살)인데 철촉(鐵鏃-쇠 화살촉)이나 골촉(骨鏃-뼈 화살촉)을 쓴다. 그 있고 없음이 담이(?耳), 주애(朱崖)와 같다.(담이,주애-해남도에 설치된 군현)

 

<倭>地溫暖, 冬夏食生菜, 皆徒跣. 有屋室, 父母兄弟臥息異處, 以朱丹塗其身體, 如中國用粉也. 食飮用 豆, 手食. 其死, 有棺無槨, 封土作 . 始死停喪十餘日, 當時不食肉, 喪主哭泣, 他人就歌舞飮酒. 已葬, 擧家詣水中 浴, 以如練沐. 其行來渡海詣中國, 使一人, 不梳頭, 不去 蝨, 衣服垢汚, 不食肉, 不近婦人, 如喪人, 名之爲持衰. 若行者吉善, 共顧其生口財物; 若有疾病, 遭暴害, 便欲殺之, 謂其持衰不謹. 出眞珠·靑玉.

 

왜(倭)의 땅은 온난(溫暖)하고 겨울과 여름에 생채(生菜)를 먹고 모두 맨발로 다닌다. 옥실(屋室)이 있어 부모형제가 다른 방에 거처한다. 주단(朱丹)을 몸에 바르는데 중국의 분(粉)과 같은 것이다. . 음식을 하는데는 '변두'를 사용하고 손으로 밥을 먹는다. 사람이 죽으면 관이 있느나 곽은 없이 흙으로 무덤을 만든다. 처음 사람이 죽흐며 십여일을 상을 치루는데 마땅히 이때고기를 먹지 않고 상주는 곡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장사를 마치면, 집안이 모두 물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데, 연목(練沐)과 같다. 사신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갈때는 한 사람이 머리에 빗질하지 않고, 이나 서캐도 잡지 않고, 의복은 더럽게 하고, 고기도 먹지 않고, 부인과 가까이 하지 않으니 상을 치루는 사람과 같다. 이를 '지쇠'라고 한다. 만약 행인이 있어 길선(吉善)하면 그의 노예와 재물을 돌봐주나 만약 질병이 생기거나 재해를 당하면 그를 죽이려 하며 지쇠가 불근(不謹)하다고 일컫는다. . 진주와 푸른옥이 나온다.

 

其山有丹, 其木有 · ·豫樟· ·投 ·烏號·楓香, 其竹篠 ·桃支. 有薑·橘·椒· 荷, 不知以爲滋味. 有 ·黑雉. 其俗擧事行來, 有所云爲, 輒灼骨而卜, 以占吉凶, 先告所卜, 其辭如令龜法, 視火坼占兆. 其會同坐起, 父子男女無別, 人性嗜酒.{《魏略》曰:其俗不知正歲四節, 但計春耕秋收爲年紀.} 見大人所敬, 但搏手以當 拜. 其人壽考, 或百年, 或八九十年. 其俗, 國大人皆四五婦, 下戶或二三婦. 婦人不淫, 不妬忌. 不盜竊, 少諍訟. 其犯法, 輕者沒其妻子, 重者滅其門戶 及宗族 尊卑各有差序, 足相臣服. 收租賦. 有邸閣.

 

산에는 단사가 있는데, 그 나무로는 남·저·예장(豫樟)·유력·투강·오호(烏號)·풍향(楓香) 등이 있고, 대나무로는 가는대(篠?)와 조지(桃支)가 난다. 생강과 귤, 산초나무와 양하(?荷)가 있지만, 맛을 보태는 것인줄 알지 못한다. 원숭이 와 검은 꿩을 사냥한다. 그 풍속으로 큰 일이 있을 때 행하는 일이 있는데 뼈를 태워 길흉을 점친다. 먼저 점치는 바를 고하는데 그 고하는 내용은 거북점의 경우와 같으며 불에 타서 갈라지는 것을 보고 점괘를 뽑는다.. 불이 터지는 것을 보아서 점을 치는 것이다. 회동하고 업무를 처결할 때(會同坐起) 부자(父子)와 남녀(男女)의 구별이 없으며 그 인성(人性)이 술을 즐긴다. [위략에 그 풍속에 정확히 해와 사절기를 알지 못한다. 다만 봄에 밭갈고 가을에 거두는 것으로 그 해의 기준으로 삼는다] 대인(大人)을 보면 공경하여 다만 손을 잡고 궤배(?拜-꿇어 엎드려 절함)한다. 그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 혹은 백년 혹은 8-90년이다. . 그 풍속으로 나라의 대인은 모두 4-5명의 부인을 두고 하호(下戶)는 간혹 2-3명을 둔다. 부인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다. 도둑질하지 않고 쟁송(諍訟)이 적다. 도둑이 없고, 송사가 적다. 법을 어기면 죄가 가벼운 자는 처자를 몰수하고 죄가 무거운 자는 그 가문을 멸족시킨다. 종족(宗族)에 존비(尊卑)가 있어 각각 차이와 서열이 있고 서로 신복(臣服)한다. 조부(租賦-세금)를 거두고 저각(邸閣-물자 저장창고)이 있다.

 

 國國有市, 交易有無, 使<大倭>監之. 自<女王國>以北, 特置一大率, 檢察諸國, 諸國畏憚之. 常治<伊都國>, 於國中有如刺史. 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 及郡使<倭國>, 皆臨津搜露, 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 不得差錯. 下戶與大人相逢道路, 逡巡入草; 傳辭說事, 或 或 , 兩手據地, 爲之恭敬. 對應聲曰噫, 比如然諾.

 

나라에 시장이 있어 교역이 있는데 '대왜'가 이를 관리한다. '여왕국'의 북쪽에 특별히 대솔(大率) 한 명을 두어 여러 나라들을 검찰(檢察)하게 하니 여러나라들이 이를 두려워 하고 꺼린다. '이도국'을 다스리는데 나라 중앙에 자사(刺史-한나라 때 주州의 장관)와 같은 것을 항상둔다. 왕이 경도(京都-후한의 수도 즉 낙양), 대방군, 한국(韓國)과 군사(郡使-앞서 기술했던 이도국에 주재한다는 대방군의 관원?), 왜국(倭國)에 사자를 보낼 때, 모두 진(津-나루터 or 지명?)에 임해 전송하는 문서와 물품을 검사하여 서로 섞여 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하호가 대인과 도로에서 만나면 뒷걸음질쳐 풀숲으로 물러난다. 전하는 말로는 몸을 구부리거나 혹은 엎드려 양손을 땅에 짚어 공경을 표한다고 한다. 공손히 응할 때 희(噫)라고 하는데, 이는 승락한다는 말과 같다.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壻,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

 

그 나라 또한 본래 남자가 왕으로 7-80년을 이어오다 왜국에 난이 일어 여러 해에 걸쳐 공벌(攻伐)하였다. 이에 한 여인을 왕으로 함께 세웠는데 이름은 비미호(卑彌呼-히미꼬)라 한다. 귀도(鬼道-기괴한 술법)를 행하고 능히 백성을 미혹시켰는데 나이가 먹도록 남편이 없었다. 남자 동생이 있어 치국(治國)을 보좌했다.

왕이 된 이래 (그녀를) 본 자가 적었다. 계집종 천명이 시중들게 하고 오직 남자 한 명이 음식을 공급하며 말을 전했다. 거처에 출입하는 자를 궁실의 망루에서 감시하고 성책을 엄중히 지었고 항상 병장기를 갖춘 위병이 지켰다.<女王國>東渡海千餘里, 復有國, 皆<倭>種. 又有<侏儒國>在其南, 人長三四尺, 去女王四千餘里. 又有<裸國>·<黑齒國>復在其東南, 船行一年可至. 參問<倭>地, 絶在海中洲島之上, 或絶或連, 周旋可五千餘里. '여왕국'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의 종류이다. 또한 그 남쪽에 주유국(侏儒國)이 있는데 사람들의 키가 삼사척이고 '여왕국'으로부터 사천여리 거리이다. 또한 나국(裸國)과 흑치국(黑齒國)이 그 나라 동남쪽에 있는데 배로 일년을 가야 이른다. 왜의 땅은 바다 가운데 섬에서 끊어지거나 혹은 연결되어 주위를 돌면 대략 5천여 리이다.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 其年十二月, 詔書報<倭女王>曰: [制詔<親魏倭王><卑彌呼>: <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次使<都市牛利> 奉汝所獻男生口四人, 女生口六人, 班布二匹二丈, 以到. 汝所在踰遠, 乃遣使貢獻, 是汝之忠孝, 我甚哀汝. 今以汝爲<親魏倭王>, 假金印紫綬, 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 其綏撫種人, 勉爲孝順. 汝來使<難升米>·<牛利>涉遠, 道路勤勞, 今以<難升米>爲率善中郞將, <牛利>爲率善校尉, 假銀印靑綬, 引見勞賜遣還.

 

경초 2년(238년) 6월, '왜여왕'이 대부 난승미(難升米)등을 보내어 군(郡)에 이르러, 천자(天子)에게 조헌(朝獻)하기를 구하자 태수 '유하(劉夏)가 관원과 장수를 보내 (왜의 사신을) 경도(京都)까지 호송하게 했다. 그 해 12월, 조서를 내려 왜 여왕에게 말했다 「친위왜왕(親魏倭王) 비미호에게 제조(制詔-천자의 명령)한다 : 대방태수 유하가 관리를 보내 너희 대부 난승미와 차사(次使) 도시우리(都?牛利)를 호송하게 했고 너희들이 바친 남자노비 4명, 여자노비 6명, 반포(班布) 2필 2장이 도착했다.

너는 아주 멀리 있으면서도 사자를 보내 조공하니 이것이 너의 충효로구나. 갸륵하도다.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임명하고 금인(金印), 자수(紫綬)를 내리고 장봉(裝封-물건을 넣고 봉인함)하여 대방태수에게 보내 네게 하사토록 한다.

이로써 네 종인(種人)들을 어루만져 달래고 효순(孝順)에 힘쓰도록 하라. 네가 보낸 사신인 난승미, 우리(牛利-도시우리)는 먼 길을 걸어 애썼으므로 난승미는 솔선중랑장, 우리(牛利)는 솔선교위로 임명하여 은인(銀印), 청수(靑綬)를 내리고 접견하여 위로하고 돌려 보낸다.

 

今以絳地交龍錦五匹· {臣<松之>以爲地應爲 , <漢><文帝>著 衣謂之 是也. 此字不體, 非<魏朝>之失, 則傳寫者誤也.}絳地 粟 十張· 絳五十匹·紺靑五十匹, 答汝所獻貢直. 又特賜汝紺地句文錦三匹·細班華 五張·白絹五十匹·金八兩·五尺刀二口·銅鏡百枚·眞珠·鉛丹各五十斤, 皆裝封付<難升米>·<牛利>還到錄受. 悉可以示汝國中人, 使知國家哀汝, 故鄭重賜汝好物也.]

 

그이제 강지교룡금(絳地交龍錦) 5필, [ 신하'송지'가, 땅에 비단을 상응하게 한 것은 '한 문제'가 검은옷 입은것과, 두터운 비단을 취한것을 말했으니,이것이다. 이 글귀가 없는것은 위나라때 빠뜨린것이 아니라, 이전에,베껴쓰던 자들의 착오이다], 강지추속계(絳地?粟?) 10장, 천강(?絳) 50필, 감청(紺靑) 50필을 주어 너의 조공에 답한다. 또 특별히 너에게 감지구문금 삼필과 새반화계 오장, 백견 오십필, 금 팔냥, 오척도 두자루, 동경 일백 매, 진주와 공단 각 오십근씩을 모두 포장하여 '난승미'와 '우리'에게 주어 돌려 보내는 터이니, 너희는 이를 갖다가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일일이 보여 주어서 우리 나라가 너희를 아끼는 뜻을 알게 하도록하라. 그래서 정중하게 이같은 좋은 물건을 너희에게 하사하는 바이다] 했다.

 

<正始>元年, 太守<弓遵>遣建忠校尉<梯儁>等奉詔書印綬詣<倭國>, 拜假<倭王>, 幷齎詔賜金·帛·錦 ·刀·鏡·采物, <倭王>因使上表答謝恩詔. 其四年, <倭王>復遣使大夫<伊聲耆>·<掖邪狗>等八人, 上獻生口·倭錦·絳靑 · 衣·帛布·丹木· ·短弓矢. <掖邪狗>等壹拜率善中郞將印綬. 其六年, 詔賜<倭><難升米>黃幢, 付郡假授. 其八年, 太守<王 >到官.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 遣<倭><載斯>·<烏越>等詣郡說相攻擊狀.

 

정시(正始) 원년(240년),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건중교위 제준(梯俊)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어 왜국에 이르게 했다. 왜왕(倭王)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가져온 금(金), 비단(帛), 금계(錦?), 도(刀), 경(鏡), 채물(采物)을 하사했다. 이에 왜왕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은조(恩詔-은혜로운 조서)에 사례했다.

정시 4년(243년),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 이성기(伊聲耆), 액야구(掖邪狗) 등 8명을 보내 노비, 왜금(倭錦), 강청겸, 면의, 면포, 단목, 부, 단궁시(短弓矢)를 헌상했다. 액야구 등을 모두 솔선중랑장(率善中?將)으로 임명하고 인수(印綬)를 주었다.

정시 6년(245년), 조서를 내려 왜의 난승미(難升米)에게 황당(黃幢-대장기의 일종)을 하사했는데 군(郡)으로 보내 수여토록 했다.

정시 8년(247년), 태수 왕기(王?)가 임지에 도착했다. 왜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 남왕(男王) 비미궁호(卑彌弓呼)는 평소 불화했는데 재사(載斯), 오월(烏越) 등을 군(郡)으로 보내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遣塞曹 史<張政>等因齎詔書·黃幢, 拜假<難升米>爲檄告喩之. <卑彌呼>以死, 大作 , 徑百餘步, 葬者奴婢百餘人.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當時殺千餘人. 復立<卑彌呼>宗女<壹與>, 年十三爲王, 國中遂定. <政>等以檄告喩<壹與>, <壹與>遣<倭>大夫率善中郞將<掖邪狗>等二十人送<政>等還, 因詣臺, 獻上男女生口三十人, 貢白珠五千, 孔靑大句珠二枚, 異文雜錦二十匹.

 

 (태수 왕기는) 새조연사(塞曹?史) 장정(張政) 등을 파견해 가져간 조서와 황당(黃幢)을 난승미(難升米)에게 하사하고 격문으로 이를 널리 알렸다.' 비미호가 죽자 무덤을 크게 만들어 지름이 백여 보(步)에 이르렀고 함께 순장한 노비가 백여 인이었다..

뒤를 이어 다시 남자를 왕으로 세웠는데 나라 사람들이 불복하여 서로 죽였고 이때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이리하여 다시 비미호의 일가(종녀 宗女)인 일여(壹與)를 세워 13세의 나이로 왕으로 즉위하자 나라 안이 마침내 안정되었다.

장정 등은 격문으로 널리 알리고, 일여(壹與)는 왜 대부 솔선중랑장(率善中?將) 액야구(掖邪狗) 등 20명을 보내 장정을 전송했고 관청에 이르러 남녀 노비 30명을 헌상하고 백주(白珠) 5천, 공청대구주(孔靑大句珠) 2매, 무늬가 다른 잡금(異文雜錦) 20필을 바쳤다.
     
예왕지인 20-10-11 11:38
   
단군은 어디로 살아졌나요??
한국인들이 그토록 부정하는
기자조선 위만조선 대해서만 나오네요
          
구름위하늘 20-10-19 16:13
   
너희 나라 기록이니
너희 나라와 관계있는 기록만 남은 것이지

그들이 빼았거나 이동해서 정착한 그 이전의 나라가 단군조선임.
     
예왕지인 20-10-11 11:53
   
하지만 위만조선은 서한에 멸망하므로써 낙랑군이 되어 달아난 동이족들 모두 중국인으로 되었다. 앞서 은나라때에 남하하지 않고 원래 지역에 남은 동이족들과 동북쪽으로 더 이동한 동이족들은 나중에 고구려 부여 등등 나라의 백성으로 되었다. <----------- 굿

근데 삼한은 없네요?
          
구름위하늘 20-10-19 16:14
   
"등등" 이게 뭔지 모르나요?
예왕지인 20-10-11 11:44
   
주나라 무왕이 감옥에 가둔 기자를 나중에
조선에 붕했다는건 이것도 믿어야 하나요?
근데 단군은 어디에 있습니까?
     
구름위하늘 20-10-19 16:11
   
위만조선도 기자조선은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있던 나라를 쿠테타로 빼았거나 찾아가서 왕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그 기록의 사실 여부를 제외하고
위만이나 기자가 왕이 되기 전의 이미 존재한 그 나라는 뭐임?
예왕지인 20-10-11 11:48
   
근데 그 조선과 당시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과 진하고 관련이 있습니까??
뉴딩턴 20-10-11 19:50
   
황하 유역과 요하 동쪽 지방의 신석기·청동기 문화가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도 주요한 논점이다. 중국의 청동기와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청동기는 양식이 전혀 다르며 성분 또한 크게 다르다. 기자가 상나라의 왕족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상나라와 관계가 있는 청동 유물 등이 나타나야 하나 실제 고고학 발굴 결과는 두 지역 사이에 문화가 크게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구름위하늘 20-10-19 16:08
   
천일야화의 "알라딘"은 중국사람으로 나옵니다.
중국사람 이름이 알라딘?

우리의 기록이 부족하여 화족의 기록을 참고해야 하지만,
자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쓴 기록의 정확할 것이냐는 의심을 많이 품고 해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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