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秦幷六國,其淮·泗夷皆散爲民戶.陳涉起兵,天下崩潰,燕人衛滿避地朝鮮,因王其國.百有餘歲,武帝滅之,於是東夷始通上京.(후한서 동이열전)
사료[1]을 보면 고대중국과 東夷사이에는 위만조선이 박혀있다.
그래서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꺽어버린후에 東夷가 고대중국과 始通(통하기 시작하다)하게 된다.
여기에서 東夷는 당연히 부여,고구려,읍루,옥저,예맥,삼한,왜..등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고대중국의 동북쪽에 위만조선이 있고 위만조선의 동북쪽에 東夷 여러나라가 있었다.
<고대중국->위만조선->동이지역...>
일반적으로 東夷여러나라의 위치를 대략 현 요하일대를 중심으로 그 서쪽지역이라 다들 얘기하므로 이는 위만조선의 절대적 방위가 요하의 서쪽이라는 말이 된다.
요하의 서쪽에 있는 위만조선에 설치된 현도군과 낙랑군,그것도 위만조선의 또 가장 서쪽변에 설치된 낙랑군이 현 평양지역과 아주 많이 떨어져있으니 "낙랑군 재평양설"이 아니라 "낙랑군 재요서설"이 맞는듯하다.
[2]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天子爲其絶域,委以海外之事,遂隔斷東夷,不得通於諸夏.景初中,大興師旅,誅淵,又潛軍浮海,收樂浪·帶方之郡,而後海表謐然,東夷屈服.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窮追極遠,踰烏丸·骨都,過沃沮,踐肅愼之庭,東臨大海.長老說有異面之人,近日之所出,遂周觀諸國,采其法俗,小大區別,各有名號,可得詳紀.雖夷狄之邦,而俎豆之象存.中國失禮,求之四夷,猶信.故撰次其國,列其同異,以接前史之所未備焉.(삼국지 동이전)
사료[2]의 앞부분을 해석할때 잘못 해석할 확률이 꽤 있다.
여기에 보면 공손씨세력이 요동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천자는 其를 絶域로 여겼다.
絶域 라는것은 뭐 거의 외국의 땅을 뜻하는데 특히 여기의 其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대부분 사람들은 여기의 其를 東夷라고 보는듯한데 그것은 틀렸을것이다.
만약 여기의 其를 東夷라고 보면 뒤에 遂隔斷東夷는 왜 튀어나오는가?遂隔斷東夷 라는말은 "그리하여 東夷와 끊겼다"라는 식의 말로 앞의 부분은 東夷와 끊어진 이유를 말한다.
그러니깐 그 이유가 바로 공손씨가 요동을 차지한것이고 공손씨가 요동을 차지하므로써 공손씨의 요동일대는 천자가 絶域로 여긴것이다.그렇기때문에 요동일대는 고대중국에 속하지 않는 상황이 된것이고 이에 遂隔斷東夷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또 뒤에 委以海外之事 라는것이 내가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사람들은 "공손씨에게 동이를 관리하는 것을 위임하였다"라는 식으로 말하는데,나는 이것이 앞뒤를 볼때 "요동지역을 공손씨가 다스리도록 위임하였다"라고 생각된다.이것은 요동일대가 공손씨가 차지하였다는 첫마디와 통하고,또 그것은 공손씨가 차지하므로써 絶域가 되었으니 중원이 실제로 관리하기 어려운 상태고 또 중원이 요동일대를 포기하기는 싫고하여 그냥 에라잇 냅뒤 라는 식으로 공손씨에게 위임하는듯한 기록을 남긴것이다.그니깐 일단 "공손씨야 니가 잠시 관리해라,나중에 널 죽여줄게" 라는 의미라고 볼수있다.
그래서 遂隔斷東夷 즉 東夷와 더이상 통하지 못하는것이다.여기의 東夷는 당연히 부여,고구려...등등의 나라들을 가리킨다.그렇기때문에 고대중국은 絶域가 된 요동일대를 차지하기위하여 바로 뒤에 나오듯이 大興師旅,誅淵 하였는데 공손씨를 죽여버렸다.그리고 又潛軍浮海,收樂浪·帶方之郡 라고 하여 공손씨의 관리를
받는 요동 주변의 낙랑군과 대방군도 고대중국이 다시 차지한것이다.공손씨를 죽이고 요동일대를 장악하고 공손씨가 관리하던 낙랑군과 대방군까지 수복하였다.
여기까지는 고대중국이 공손씨가 차지하여 따로 떨어져나간 요동지역과 그 근처의 낙랑군과 대방군을 수복하는 상황이다.그러므로 이때에 고대중국은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러자 而後海表謐然,東夷屈服 라고 하는걸 보아 고대중국이 옛 영역을 회복하니 동이들이 두려워 굴복했다는 고대중국식의 기록이다.또 이것은 실제로 굴복했다기보다는 그 이후에 其後高句麗背叛 이라는것의 이유를 상대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할수도 있다.
고구려가 배반?하니깐 바로 유명한 그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는 상황이 발생한다.뒤에 遂周觀諸國,采其法俗,小大區別,各有名號,可得詳紀 라고 한것은 고대중국이 고구려를 치기전에는 東夷지역에 대해서 잘 모르다가 고구려를 치고 그 일대를 휘젓고 다니다보니 東夷지역의 상황을 잘 알게 되어 동이열전을 지은것이라고 삼국지에서 고백하고 있다.여기에서 알수잇듯이 공손씨가 장악한 요동을 중심으로 낙랑군 대방군 등은 모두 고구려의 서쪽에 있다.
또 雖夷狄之邦,而俎豆之象存 라고 한데서 알듯이 이제야 東夷의 문화를 눈으로 직접 보고 겨우 안것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이것은 고구려를 치기전에 고대중국이 東夷지역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것이므로 결국엔 東夷지역(부여,고구려,옥저,예맥..등등)의 서쪽에 낙랑군이 위치하는 셈이다.東夷지역을 요하이동으로 볼때 낙랑군은 요하의 서쪽으로 방위가 결정된다.
그리고 각 나라의 위치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夫餘國,在玄菟北千里.
挹婁,古肅愼之國也.在夫餘東北千餘里
高句驪,在遼東之東千里
東沃沮在高句驪 蓋馬大山之東
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
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여기에 보면 부여와 고구려는 모두 중국의 군현의 각도에서 먼저 소개한다.
부여는 현도군의 북쪽 천리,고구려는 요동구느이 동쪽 천리이다.
그리고 마한의 북쪽에 樂浪이 있다고 하는데,이것을 낙랑군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부여와 고구려를 보듯이 중국의 군국과 가까우면 군국을 기준으로 소개한다.
즉 부여는 "현도군을 기준으로 북쪽",고구려는 "요동군을 기준으로 동쪽".만약 여기의 樂浪이 낙랑군이라면 "마한의 북쪽이 낙랑"이 아니라 "낙랑을 기준으로 남쪽이 마한"이라는 식으로 해야 맞다.
그러므로 마한의 북쪽으로 지목되는 낙랑은 낙랑군이라고 볼 이유가 없다.
여기의 樂浪이 낙랑군이 아니라는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였지만 "낙랑군 재평양설"추종자들이 반박을 못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3]至安帝 永初五年,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후한서 부여)
만약 마한의 북쪽의 樂浪이 낙랑군이라면 樂浪의 북쪽에는 고구려와 옥저가 있으므로 부여가 樂浪을 칠 이유도 없고 칠 방법도 없다.그것도 8000명이나 되는 보병과 기병으로 말이지...따라서 사료[3]의 낙랑과 마한북쪽의 낙랑은 이름만 같을뿐,서로 다른 정치체다.[3]의 낙랑은 낙랑군이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적으로 후한서 삼국지가 과연 낙랑군 재평양설1차 사료로 적합한지 의문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