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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21 23:04
[한국사] 고대 한반도 해수면 시뮬레이션
 글쓴이 : 밑져야본전
조회 : 2,688  




해수면 60M라는 가정으로 형성된 시뮬레이션 입니다.



해수면1.png
김해(대부분이 바다로 되어있습니다)


해수면3.png
경주(역시 바다로 메워져 있는 모습입니다)


해수면2.png
경주와 김해(빨간 글씨)



해수면4.png
경주와 김해 사이에 있는 신불산과 가지산(빨간색 동그라미)



신라 기록 中 '73년에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해 신라에서는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여기서 목출도를 동그라미의 가지산 혹은 신불산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지금은 산이지만 당시엔 저 주변까지가 전부 바다였고, 저 두 산은 섬이었다는 주장입니다.(http://www.histopia.net/zbxe/320899 참고)


하지만 보다시피 해수면을 60미터(최고 설정값)로 해도 멀쩡히 육지인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고로 목출도가 섬이라는 전제 하에, 신불산이나 가지산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죠.. 


만약 이 시뮬레이션이 사실이라면
금관가야는 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만약 신라 기록에 나오는 3세기 중반의 왜의 실체가 금관가야이고 임나가라라면, 유례이사금이 서불한 홍권에게 바다를 건너 왜를 치는게 어떻겠냐고 말한 기록에 어느정도 부합하는 지리적 근거라고 보여집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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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져야본전 20-09-21 23:04
   
이미지 크기가 작은 점은 양해바랍니다. 캡쳐본을 그림판으로 저장했는데 여기에만 업로드하면 자꾸 이미지가 작아지네요..
스커트 20-09-22 00:32
   
저정도 거리를 두고 바다를 건넌다는 말을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요?
탄드 20-09-22 08:35
   
전에 역사스페셜에서 왕릉을 찾는게 나왔는대 산기슭에 항구가 있는걸 발견함 역사가가 신라시대에는 여기까지 물이 들어왔을거라고 예측하더군요 물론 전부 물이 잠긴게아니고 강처럼 물이 들어왔을거라고 합니다.

위에시뮬레이션은 전부 잠길거라고 생각하지만 네델란드처럼 해수면보다 낮아도 지형덕에 잠기지않는땅이 대부분이라는걸 생각해줘야함
지누짱 20-09-22 12:57
   
일리있는 시뮬레이션입니다. 다만 그간의 퇴적작용을 적게 고려한듯합니다ㅡ아래글참조

왜의 신라침공은 울산에 가까운 부산쪽에서 이뤄졌겠네요. 목출도위치는 추정이니 다른 곳도 살펴 봐야겠군요
지누짱 20-09-22 13:07
   
낙동강 하구 삼각주 지대에 위치하는 현재의 김해평야는 쌀을 비롯해 대파, 화훼의 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그런데 김해평야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보면 시대가 올라갈수록 현재와는 매우 다른 환경적 변화를 거쳐 왔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져 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김해평야는 과거에는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낙동강 중유역의 대륙 분지와 같은 곳이었다가 고김해만이라고 하는 바다로 변했으며, 다시 현재와 같은 하천(낙동강)의 하류역으로 변화해 왔던 것입니다.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 지대에 위치한 현재의 김해평야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20,000년∼18.000년전쯤의 매우 추운 시기로, 김해평야에는 자갈층(충적층기저역층)이 퇴적되었습니다. 이후 기후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면서 실트질 점토층, 모래 자갈층도 계속 퇴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퇴적층이 퇴적될 무렵의 김해지역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 쌓인 현재의 대구 분지처럼 낙동강 중유역의 내륙 분지였을 것으로 추정 되어집니다. 그리고 이 무렵의 바다의 높이 ,즉 해수면은 현재보다 110∼140m정도 낮았으며, 당시의 낙동강 하구는 일본의 대마도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의 유적, 유물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현 낙동강 하구 부근 일대에 구석기 시대의 유적과 신석기 시대 이른 시기의 유적들이 매몰되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약 10,000년전 무렵이 되면 기후는 계속 따뜻해지고 해수면도 계속 상승해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4,100년전 무렵에는 김해평야의 안쪽인 대동면 예안리 유적지 부근 일대까지도 바다였다는 사실도 확인되었습니다. 즉 이 무렵의 바다 범위는 산지·구릉지와, 그에 접하는 선상지(성곡저평야), 평야내 독립 구릉을 제외한 거의 전지역이었으며, 적어도 양산까지가 바다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 이무렵의 해수면 고도에 대해서는 현재와 거의 같았다(0m)는 견해, 현재보다 상당히 높은 7m전후 였다는 견해 등으로 나뉘고 있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해평야가 온통 바다였던 이 무렵은 고고학의 시대 구분에서는 신석기시대로 불리우며, 이 바다(내만, 즉 고김해만)의 성립을 배경으로 당시 김해 사람들은 해수산의 조개, 어류, 동물 등을 먹거리로 삼는 어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습니다. 그 결과, 김해 각지에는 수가리패총, 범방 죽곡패총, 북정패총, 농소리패총, 금곡동 율리패총 등 신석기시대의 해수산 패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패총의 조개는 굴류가 주체이며, 꼬막이 많은 것은 당시의 바다 바닥이 실트질 점토인 점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고김해만의 안쪽에 위치하는 김해 예안리 유적지는 사주에 입지하며, 이 사주가 적어도 신석기시대 후·말기 이전에 형성·육화되었던 사실도 아울러 밝혀졌습니다.
신석기시대 다음의 청동기시대가 되면 기후는 다시 추워졌고 해수면도 낮아졌으며 바다의 범위도 이전보다 축소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이를 밝혀줄 조사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금관가야가 성립·전개되는 삼한·삼국시대 무렵에는 다시 김해 평야각지에 해수산 패총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들 패총에 근접해 만들어진 당시의 무덤에서도 조개를 부장하거나 조개를 무덤바닥 시설에 이용한다던지 어로 관련 도구가 출토되는 등 바다 관련 현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삼한·삼국시대에도 신석기시대처럼 바다를 무대로 활발한 어로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는 해수면의 재상승과 바다 범위의 확대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 이 무렵의 해수면고도, 바다의 범위 등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 봉황대유적, 양동리고분군, 부원동패총, 예안리유적 등은 이 시대에 만들어진 유명한 유적들입니다.



그런데 7세기 무렵이 되면 고김해만의 안쪽인 예안리유적지의 부근일대가 이전까지는 바다였다가 배후습지성 소택지로 전환해 간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유적지 일대에서 바다는 물러가게 됨과 동시에 낙동강은 보다 많은 토사를 운반해 퇴적함으로서 마침내 고김해만은 쇠퇴·소멸해가게 됩니다. 또 운반 퇴적된 토사로 이루어진 삼각주가 마침내 육화해 현재의 김해평야의 골격이 완성되어 가는 것도 이 무렵의 일입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에 보이는 낙동강 하류 역화한 김해지역의 모습이 이 무렵의 상황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해지역이 평야 농업지대로서 본격화하는 것은 이보다 더욱 지난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입니다. 일제는 쌀의 증산과 수탈을 목적으로 낙동강변에 제방을 쌓고 수로를 정비하고 저습지를 간척해 삼각주를 본격적인 평야농업 지대로 전환시켜온 것입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김해평야는 현재와는 상당히 다른 자연 환경적 변천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러한 자연 환경적 변천에 대응해 김해 사람들의 생산활동도 크게 변화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산활동의 변화는 김해평야에 형성된 유적의 입지와 그 시대적 변천, 출토유물등에 반영되어 왔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제상황은 선사·고대의 김해지역을 지탱해 온 생산력의 기반문제, 고대국가로서의 성립과 유지의 메카니즘을 해명해 가는데 간과할 수 없는 많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김해평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고환경의 복원을 위해서는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자연 과학적 조사연구가 시급히 요망된다는 점도 덧붙여 두고 싶습니다. 아직 김해평야에 대한 자연 과학적인 조사연구는 극히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연구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김해평야의 고환경적 변천과 이와 연동하는 김해의 역사와 문화를 해명하는 것은 실로 요원한 일일 것입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iry777&logNo=220654085517&proxyReferer=http%3A%2F%2Fwww.google.com%2F
서해 20-09-22 18:47
   
우리나라 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재와 과거의 해수면 차이와 지형이 어떠했는가를 먼저 이해하는 게 필수인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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