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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18 13:22
[한국사] <삼국사기>와 <송서>에 등장하는「왜」& 신묘년 기사
 글쓴이 : 지누짱
조회 : 1,276  

출처..https://kibaek.tistory.com/586

왜가 본래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던 나라라는 것을 앞서 여러 경로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이번에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송서(宋書)>의 기록을 통해 '한반도의 왜'를 조명해보기로 하겠다. 거기에 실린 아래의 기록들 역시 왜(倭)가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생겨나기 어려운 기록들이다. 4세기의 일본열도에는 통일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겨우 원시시대를 벗어난 문명이었으므로 한반도를 침공할 만한 세력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의 왜는 한반도에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물론이요 우리나라의 역사조차도 이 '왜'를 바다 건너의 왜라고 기술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일본의 역사 왜곡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거기에 동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광개토대왕비문의 신묘년 기사를 놓고 일본에 끌려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니, 문제의 신묘년 기사부터 우선 짚고 넘어가보자.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일본학자들은 이 내용을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고 진구왕후(신공왕후)의 삼한(한반도 남부) 정벌 증거로 여기고 있다.(☞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힌다 I - 신라를 침략한 왜인') 그리고 우리가 마땅한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위 내용과 <송서>를 토대로 임나일본부설이 탄생하였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엽까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일본부'라는 통치기구를 세우고 식민지화했다는 학설)

우리가 밀리고 있는 위 광개토대왕비문의 신묘년 기사도 왜가 한반도 남쪽 지역에 있던 나라였다는 팩트를 그대로 대입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석되니, 재차 나의 해석을 디밀자면 다음과 같다.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이때까지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신라 땅에) 오니 (태왕께서)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

 

광개토대왕비는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새긴 글이다. 따라서 주인공은 당연히 광개토대왕일 터, 왜가 엉뚱하게 주인공으로 등장할 이유가 없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는 뜬금없는 소리가 나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바다를 건넌 주체는 당연히 광개토대왕의 수군(水軍)이 되겠다.

 

전에도 말했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사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390년(광개토왕 1년) 7월에 석현 등 10성을 빼앗고, 이어 10월에는 군사를 7개 방면으로 나누어 수군으로써 관미성(關彌城)을 공격, 20일만에 함락시킨 바 있다.(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域四而蛸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攻擊二十日乃拔)

 

※ 백제도 곧 반격을 시도하여 393년(아신왕 2년) 8월에 백제장군 진무(眞武)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관미성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지역의 국방상의 중요성은 고금(古今)이 같으니 백제 임진강 방어선 붕괴는 결국 수도 한성 함락으로 이어진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삼국사기>와 <송서>에 나오는 '왜'의 기록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신라 흘해이사금(재위: 310-356) 때의 기록

 

● 재위 3년째 되는 해 3월,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처를 구했던 바,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倭國王遣使 爲子求婚 以阿飡急利女送之)

 

● 재위 35년 2월, 왜국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나 딸이 이미 출가했다고 사절하였다.(倭國遣使請婚 辭以女旣出嫁)

 

● 재위 376년, 왜병이 풍도와 금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내물마립간(재위: 356-402) 때의 기록

 

● 재위 9년째 되는 해 4월에 왜군이 크게 쳐들어왔다.(倭兵大至)

 

※ 이 시기는 혼란의 시기로서, <일본서기> 신공 46년기(366년)에 의하면 그 2년 전인 364년에 백제와 왜 사이에도 전투가 벌어진다. 이후 응신 18년(397년)에는 백제 독산성주가 3백 명을 데리고 왜에 투항하지만,(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응신 20년 9월에는 왜 한직의 초대 주지사인 아시 사주와 그 아들 도가 사주가 자신들에게 속한 17현을 이끌고 백제에 귀의한다.(倭漢稙祖 阿知使主 基子都加使主 並率己之黨類十七縣而來歸焉)

 

● 재위 38년 5월, 왜군이 와서 금성(경주)를 포위하고 5일간이나 풀지 않았다.(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 사서를 종합하면 왜는 무려 27 차례나 신라를 공격했다. 특히 399년, 왜의 공격에 무너진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청했고, 광개토대왕은 서기 400년, 5만의 군사로써 그들을 몰아냈던 바, 이에 관한 광개토대왕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九年己亥百殘爲誓與倭和通王巡下平壤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特遣使還告以密計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다시)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순시하면서 평양으로 내려오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나라 국경지역에 가득 차서 성들을 파괴하며 노객(신라왕을 낮춰 이르는 말)으로 하여금 왜의 신민으로 삼으려고 하니 이에 태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이 그 충성심을 긍휼히 여겨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鹽城倭寇大潰城內十九盡拒隨倭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때 (고구려군이)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인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이에 (고구려군이) 왜적의 뒤를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성은 곧 항복하였던 바, 그 성에 파수병과 주둔병을 두었다. 신라성 염성 등을 함락시키니 왜구가 크게 궤멸되었고 성안 사람 열에 아홉은 왜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송서> 이만(夷蠻)열전 왜국조의 기록

 

무제(재위: 363-422년) 때의 기록

 

● 443년, 왜왕 찬(讚)이 1만여리나 떨어진 곳에서부터 조공을 바치니, 멀리서 정성을 다함이 예의에 밝다 하겠다. 제수(除授)를 내림이 옳다.(倭讚萬里修貢, 遠誠宜甄, 可賜除授)

 

 

문제(재위: 424-453년) 때의 기록

 

● 425년, 찬이 또다시 사마(司馬) 풍달(曹達)을 보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찬이 죽고 그 아우 진(珍)이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 자칭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이라 하였다. 표를 올려 정식으로 제수를 구하므로, 안동장군·왜국왕을 제수하였다.(讚死, 弟珍立, 遣使貢獻. 自稱使持節·都督倭 百濟 新羅 任那 秦韓 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表求除正, 詔除安東將軍·倭國王)

 

● 443년, 왜국왕 제(濟)가 사신을 파견해 봉헌(奉獻)하므로 다시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삼았다. 451년에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를 더하였으며, 안동장군은 이전과 같이 하였다. 아울러 23인에게 군(軍)·군(郡)을 제수하였다.(倭國王濟遣使奉獻 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 加使持節·都督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六國諸軍事 安東將軍如故. 幷除所上二十三人軍·郡)

 

※ 군(軍)은 장군의 호칭, 군(郡)은 지방 수장의 호칭으로 생각된다.

 

 

순제(재위: 477-479) 때의 기록

 

● 478년, 왜왕 무(武)가 사자를 보내 표를 올리고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이라는 작위를 요청하였다.(使持節·都督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조서를 내려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을 제수하였다.(使持節·都督·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 이른바 '왜5왕'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가 부강해진 왜가 백제 신라 임나 가라(加羅) 진한 등의 영토를 크게 잠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아래의 지도에 넓게 표시된 임나일본부의 영토이다. 이에 송나라에서는 왜가 요구하는 7국 중에서 백제를 제외한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왕'이라는 작위를 내린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이때 송나라가 (비록 명목상이라 할지라도) 백제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 남조와 유대가 돈독했던 백제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 송나라가 최소한 백제의 위상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말이지만, 그 반면 외교 관계가 없었던 신라, 임나, 가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어서 왜의 일방적인 주장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두번 째는 왜가 지배권을 인정받기를 원하는 지역이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으로 모두 한반도 남쪽에 국한돼 있다는 점이다. 즉 당시의 왜는 일본열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반도 내의 왜일 뿐이다. 그리고 이때 왜는 지배권을 인정받기를 원하는 지역에 이미 없어진 진한과 모한이라는 나라까지 집어넣어 세 불리기에 애쓴다. 그러면서도 구슈(九州) 등으로 짐작될 법한 일본열도의 지명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 일본에서는 왜왕 무(武)를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유라쿠천황(雄略天皇, 재위: 456~479)과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송서>에 보이는 이른바 '왜5왕'의 행보는 <일본서기>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일본학자들도 인정하는 편이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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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져야본전 20-09-19 17:23
   
신라가 왜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중반 부터죠.. 그니까 광개토대왕 시기 한참 전인 3세기 중반 부터 이미 신라 기록에 나오는 왜라고 불리우는 세력은 신라 보다 군사력이 강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유례 이사금이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왜를 백제와 도모하여 바다를 건너서 토벌하는게 어떻겠냐는 말이요. 즉,  3세기 중반 부터 신라를 괴롭힌 왜는 바다 건너의 세력이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남깁니다. 그렇다면 일본 열도 하나 밖에 없죠. 근데 만약 위 글 내용을 바탕으로 광개토대왕 시기의 왜가 한반도 내의 세력이라면, 광개토대왕 비문에 등장하는 왜와 유례 이사금 때의 왜는 다른 세력이라는 것이고, 두 왜 세력 모두 신라를 일방적으로 괴롭힌 세력이라는 결론이 나오죠..
     
지누짱 20-09-20 12:41
   
이때 바다건너라 함은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요. 목출도란 섬이 일본서기에 나오는데 대략 위치를 양산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당시 경주근처까지가 바다였고 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하여 신라와 바다를 경계로 마주하고 있었지요. 3세기에 일본에 백여척의 전함을 만들 세력이 없었습니다
          
지누짱 20-09-20 12:49
   
목출도의 위치신라사조회 수 287 추천 수 0 2019.04.19 07:25:40
一道安士*.3.199.170http://www.histopia.net/zbxe/320899

 지금의 김해평야는 1세기에 석탈해가 경주에 도착할 무렵에 김해바다였다. 지금의 김해평야에 있는 산들은 당시에는 섬이었다. 그러다 3세기 중반 이후 아시아대륙의 평균기온이 낮아지는 한랭화가 찾아온다. 몽골초원의 목초지가 만리장성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이를 따라 가축을 기르던 유목민족들도 만리장성 이남으로 남하하게 되니 4세기에 중국대륙이 대 혼란에 돌입하게 된다. 이를 흔히 5호16국 시대라 부르는데 이 시기를 통하여 중국 漢族의 주류가 북방계로 바뀐다.



 3세기 이전에 경주는 항구였다. 석탈해 선단은 남해안을 항해하다, 김해에서 방향을 틀어 김해와 부산 사이의 바다를 통과하여 북상한 후 경주의 남쪽 항구에 상륙한 것이다. 따라서 돌아가는 모서리에 있던 김해가야를 만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래는 김해지역에 상륙하려 하였으나 여기에 먼저 와 있던 수로왕의 가야에게 밀려 상륙하지 못하고 계속 북상하여 경주항에 상륙한 것이다.



 김해바다는 3세기 중반 이후 해수면이 낮아지면 3~4세기에 걸쳐 서서히 메워지기 시작하여 ‘바다->호수->강’의 변화과정을 거쳤다. 김해바다를 통하여 100척 규모의 대규모 선단이 항해가 가능했던 것은 3세기 초 이전이었고, 이후부터 5세기 초 사이에는 소규모 선단이 항해할 수 있을 정도로 메워졌다고 생각된다. 5세기 초에는 고구려의 대규모 기마군단이 지나갈 정도로 육지화 된 것이다. 그리고 5세기 중반 이후에는 선단이 지나가기에는 이미 너무 메워졌다.



김해평야가 바다였을 때는 가야의 해상군단이 신라의 기마군단을 압도하였으나, 바다가 점차 육지로 바뀌자, 5세기에는 신라의 기마군단과 가야의 해상군단이 대등하게 되었다. 그러다 6세기 이후에는 신라의 기마군단이 가야의 해상군단을 압도하게 되어 결국 신라가 가야를 통합하게 된 것이다.



  가야가 신라에게 진 것은 기후변화에 따른 김해바다의 지형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결과였다고 본다. 김해바다가 평야로 전환됨에 따라 가야의 해상군단도 기마군단으로 전환하였겠지만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수백 년을 거쳐 쌓아온 기술을 가진 신라의 기마군단을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탈해이사금 17년(73), 왜인이 木出島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거기서 죽었다.



  이 기록은 1세기 후반에 왜인들이 목출도라는 섬에 쳐들어오자 왕이 우오라는 장군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막게 하였으나 패하였다는 기록이다. 이후 목출도는 나오지 않는데 왜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목출도라는 섬이 지금의 어디일까?

  당시 석씨 신라는 이미 경주에 들어와 있었고, 박씨 신라는 아직 충청북도 지역이 있었을 때다. 따라서 훗날 석씨의 시조인 석탈해가 박씨 왕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가면서 함께 들어간 기록이다. 따라서 우오를 보낸 왕은 석탈해다. 탈해에게 이사금이라는 시호를 주고, 우오에게 각간이라는 시호를 준 것은 훗날 신라사를 정리하면서였다고 본다.



  신라에서 임나를 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변으로 길게 연결된 반도지형을 따라 육로로 가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왜가 남변으로 침입하기도 하고 동변으로 침입하기도 하는데, 남변은 해로와 육로가 모두 가능하지만 동변은 모두 육로로 침입하는 것이다. 후대로 갈수록 동변 침입이 많아지는 것은 남변은 김해바다가 메워져 선단이 항해할 수 없기 때문에 육로인 동변을 택한 것이다.



  2세기의 신라인은 경주항에서 바다를 건너면 임나에 이르고, 임나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면 대마도에 이르고, 대마도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면 구주에 이르렀는데, 이를 통칭하여 왜라 불렀다. 이들 지역은 모두 가야인들이 개척한 땅이다.



*숭신천황 65년(115), 가을 7월,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을 떠나 2천여 리,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수인천황 2년(118); 이 해에 임나인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였다. 아마도 선왕의 시대에 알현하러 와서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가? 그래서 소나갈질지에게 융숭하게 상을 주었다. 아울러 붉은 비단 1백 필을 주어 임나왕에게 하사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아 이것을 빼앗아버렸다. 양국의 원한이 이때 처음으로 생겼다.



  이 일본서기 기록은 숭신이 죽어 임나에서 조문사절이 왔다가 3년 상을 마치고 돌아간 것을 기록한 것인데, 신라본기 지마이사금조에 해당하는 내용이 나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모두 연대가 정확함을 알 수 있다. 또 임나는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신라(계림)와 나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2세기의 김해바다 지형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이후 돌아가던 임나 사신이 신라군에게 선물을 뺏기는 일이 발생하여 두 나라의 원한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5세기 이전에 신라가 부산 일대에 내려왔던 것은 2세기 지마이사금 때뿐이다. 이후 신라가 다시 내려오는 것은 6세기 법흥왕 때다.



*신공황후 섭정 전년(401); 겨울 10월, 배를 따라온 파도가 멀리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 신라왕은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신라의 건국 이래 바닷물이 나라 안까지 들어온 일은 아직 없었다. ...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즉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삼아 금은채색(金銀彩色) 및 능라겸견(綾羅縑絹)을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일본서기 신공조에 나온 신라정벌이 영락 11년(401)인데 당시까지도 경주에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일본서기는 내물이사금을 '파사매금'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서역에서 온 신라왕'이란 뜻으로 마립간신라의 기원까지 설명하는 구절이다. 신라에 '파사'라는 왕명은 2세의 파사이사금이 또 있는데, 둘 다 북방에서 강력한 기마군단을 이끌고 경주에 내려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 김해평야에 있는 산들은 1세기 당시에는 섬이었다. 따라서 목출도는 지금의 가지산과 신불산 일대로 추정된다. 木出島라는 이름이 나무가 많이 나는 섬이란 뜻인데, 가지산과 신불산이 山이라서 섬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밑져야본전 20-09-20 22:08
   
해당 내용은 저도 읽어본 바 있습니다.

저 사이트에 작성된 '왜'관련 글을 몇 개 읽어봤는데 결국 신라 기록에 나오는 왜를 임나 = 금관가야와 같은 세력이라고 잠정적 결론을 냈더군요..


만약 그렇다면 김해평야가 바다였다고 해도, 임나까지는 육로로 연결 되어있으니 유례이사금과 신하 간에 아래와 같은 말이 오갔을 리가 없죠


"왜인들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없으니 내 생각엔 백제와 더불어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떠한가?"

이에 서불한 홍권(弘權)이 만류하였다.

"우리는 수전에 익숙지 못한데 모험을 무름쓰고 바다를 건너 원정하면 예기치 못한 변을 당할까 우려되며,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를 삼키려는 마음이 있으니 백제와 일을 도모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 내용은 왜를 치기 위해선 바다를 건너야 함이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같은 한반도 위에 육로로 연결되어 있다면 왜 굳이 자신들에게 낯선 바다 건너 침략을 감수하려고 하겠습니까.

저도 해당 사이트에 나온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에 대한 반박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지누짱 20-09-22 13:45
   
임나가 구주와 부산김해 양쪽에 있으니 백제는 부산김해를 치고 신라는 바다를 건너 치자라고 할 수도있고요. 또 고대사료에서 대화는 신뢰도가 확 떨어지는 사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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