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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15 15:01
[한국사] 철령위는 황성에 설치된 적이 없다 (4부)
 글쓴이 : 보리스진
조회 : 1,230  

1.

명실록, 명사, 고려사에는 철령위가 황성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명실록에는 지휘첨사 이문,고옹,진무,두석이 봉집현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김완가, 김천길 등이 철령위에 들어오자 이들을 받아드렸다고 한다.

이어서 철령위에 참을 세우고, 압록강 이동의 주민을 초무하게 하였다.


명사에는 철령위의 유래가 나와있는데, 첫 번째 설치된 철령위는 철령성이라는 곳인데, 이는 봉집현에 있었던 곳이다.


앞선 명실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철령위의 최초 설치 장소는 봉집현이다.

봉집현에는 혼하가 있었다고 하니 현재 신빈만족자치현에서부터 북서쪽에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양성지가 연산파절을 가리켜 명태조가 경계로 삼았다는 말이 있으니, 이 곳은 철령위의 남동쪽 국경지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위치는 번시시 만족 자치현이다.


2.

고려사에는 강계에 요동도사 휘하 군사가 와서 장차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뜻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철령위의 위치가 명시되어있지 않아 의미가 모호한 기록이다.

따라서 명나라 요동도사 군사가 강계에 와 군사행동을 한 목적이 불분명하다.

1) 강계 근처에 장차 위를 설치하기 위함인지. 2) 강계 근처에 장차 참을 설치하기 위함인지.


고려사에서 앞선 기록을 보면, 명나라와 요동을 두고 군사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사에서 이후 기록을 보면 강계원수 이의가 요동 경계에 가서 군사행동을 했고, 강계가 고려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를 보면 강계에 철령위가 설치되어 완전한 명의 영토가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고려사 최영 열전 기록을 보면, 철령위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고려의 양계에 전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양계는 북계와 동계를 합쳐 가리키는 말인데, 강계는 북계에 속하니, 동계의 어느 지역에서도 명나라측의 접근과 전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계에 직접적인 위 설치를 위해 접근했다기보다, 명나라와의 접경지대 가운데 하나였고, 이에 양계에 의견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강계에서도 의견이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강계는 철령위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국경을 마주하게 된 국경지역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결정적으로 명실록, 명사와 교차분석을 하면, 참을 설치하고, 초무를 하는 과정에서 강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강계는 철령위의 동쪽 경계와 접경한다.



3.

철령위가 황성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은 요동지에 나오는 기록을 근거로 하는데, 기록을 곡해한 측면이 크다.

요동지에는 철령으로 군을 이끌고 가서, 위와 참을 세워 황성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어서 강계만호 김완기 등을 초무하는데 까지 이른다.

황성에 위와 참을 세운 것이 아니다. 철령위를 세우고, 참을 세우면서 철령위의 영토가 황성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요동지의 기록과 명실록, 명사, 고려사를 교차 분석해보면

철령위의 동쪽 경계가 황성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결국 황성은 접경지대인 것이다.

또한 황성에 이르러 강계만호를 초무했다는 기록은 고려후기의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지류인 혼강을 기준으로 했을 수 있다는 논리로도 확장될 수 있다.



4.

고려사 박의중 열전에 박의중이 표문을 전달해서 철령위가 중지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애초에 황성에 설치하려던 것이 중지되어 다른 곳에 설치 된 것이 아니다.


애초에 황성에 설치하려고 한다는 기록 자체가 없는 것이다.

박의중의 표문에 의해 중지되었다는 기록은 고려측 기록에는 있는데, 명나라측 기록에는 없다. 따라서 박의중의 표문에 의해 일시 중지되었고, 이후에 다시 철령위 설치 마무리 작업이 개시되어 동일한 곳에 끝내 설치되었다.

최초의 철령위 설치 지역은 봉집현인데, 일시 중단이 있었지만 다시 재개되어 결국 봉집현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5.

고려사에는 철령위에 대해서 1)누락, 2)중의적표현을 사용하여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교차분석을 해보면 결국 철령위가 봉집현에 설치되었고, 황성과 강계는 철령위의 동쪽 경계에 해당하여 고려와 접경했던 곳이란 것을 알 수 있다.



1.

<명실록 철령위 기록>
철령위 지휘사사(指揮使司)를 두었다. 이에 앞서 원장(元) 김완가가 그 부속 김천길 등을 거느리고 내부(來附)하였다. 이에 이르러, 지휘첨사 이문(李文)·고옹(高顒), 진무(鎭撫) 두석(杜錫)이 봉집현(奉集縣)에 위(衛)를 설치하고 그 무리를 안무(撫安)하였다.
太祖高皇帝實 卷189 洪武 21年 3月 27日: 置鐵嶺衛指揮使司先是元拔 金完哥 率其部屬金千吉等來附至是遣指揮僉事李文高顒鎮撫社錫置衛於奉集縣以撫安其眾.
 
<명실록 철령위 기록>
삼만위(三萬衛)를 개원(開元)으로 옮겼다. 앞서 지휘첨사(指揮僉事) 유현(劉顯) 등에게 조칙(詔)을 내려 철령에 이르러 입참(立站)하고, 압록강 이동(以東) 이민(夷民)을 초무(招撫)하게 하였다. 때마침 지휘첨사 후사가노(侯史家奴)가 보기(步騎) 2천을 거느리고 알타리(斡朵里)에 이르러 입위(立衛)하였는데, 양향(糧餉)이 이어지기 어려워 군대를 퇴각시킬 것을 주청(奏請)하여 개원(開元)으로 돌아와 도착하자 야인(野人) 유연합(劉憐哈) 등이 무리를 모아 계탑자구(溪塔子口) 에 주둔(屯)하고 관군을 맞아 공격하였다. 유현(顯) 등이 독군(督軍)하여 백여인을 분살(奮殺)하고 이를 패배시켰으며 그 나머지 무리를 무안(撫安)하였다. 마침내 개원(開元)에 위(衛)를 두었다.
太祖高皇帝實 卷189 洪武 21年 3月 27日
徙置三萬衛于開元先是詔指揮僉事劉 顯等至鐵嶺立站招撫鴨綠江以東夷民指揮僉事侯史家奴領步騎二千抵幹朵里立衛以 糧餉難繼奏請師還至開元野人劉憐哈等集眾屯于溪塔子口邀擊官軍顯等督軍奮殺百 餘人敗之撫安其餘眾遂置衛于開元.

<조선왕조실록 양성지 상소문>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我高皇帝明見萬里, 以遼東之東百八十里, 連山把截爲限

<금사 봉집현 위치 기록>
봉집현(奉集縣)【요(遼)의 집주(集州) 회원군(懷遠軍) 봉집현(奉集縣)이며, 본래 발해(渤海)의 옛 현이었다. 혼하(渾河)가 있다.】
奉集【遼集州懷遠軍奉集縣, 本渤海舊縣. 有渾河.】

 
2.
-고려사 철령위 설치 관련 기록-
<고려사 우왕 14년 1388년 3월>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 2인을 보내 병사 1,000여 명을 데리고 와서 강계(江界)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고 있으며, 황제가 먼저 본 위(衛)의 진무(鎭撫) 등의 관원을 설치하여, 모두 요동(遼東)에 이르렀습니다.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站)을 두고, 참마다 백호(百戶)를 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西北面都安撫使崔元沚報, “遼東都司遣指揮二人, 以兵千餘, 來至江界, 將立鐵嶺衛, 帝豫設本衛鎭撫等官, 皆至遼東. 自遼東至鐵嶺, 置七十站, 站置百戶.”

<최영 열전>
최원지가 또 보고하기를, “요동도사가 지휘(指揮) 2명을 보내어 군사 1,000여 명으로 강계(江界)에 와서 장차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하고 있으며 〈명〉 황제가 이미 관아(官衙)와 역참(驛站)을 설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울면서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내가 요동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듣지 않아서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8도(道)의 군사를 징발하고 최영이 동교(東郊)에서 군사를 열병하였다.
얼마 후에 〈명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와서 철령위(鐵嶺衛)를 세웠다고 알렸다. 최영이 신우에게 보고하여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兩界)에 온 요동기군(遼東旗軍) 21명을 죽이게 하였으며, 다만 이사경 등 5명은 머무르게 하고 그곳을 감시하게 하였다.
元沚又報, “遼東都司遣指揮二人, 以兵千餘, 來至江界, 將立鐵嶺衛, 帝已設官置站.” 禑泣曰, “群臣不聽吾攻遼之計, 使至於此.” 遂徵八道兵, 瑩閱兵于東郊.
俄而後軍都督府遣遼東百戶王得明, 來告立鐵嶺衛. 瑩告禑, 令殺遼東旗軍持榜文至兩界者二十一人, 只留思敬等五人


-고려사 1388년 이전 기록-
<고려사 우왕 10년 1384년 1월>
요동(遼東) 군사 100여 기(騎)가 강계(江界)를 침범하여, 별차(別差) 김길보(金吉甫)와 백호(百戶) 홍정(洪丁)을 포로로 잡고 돌아갔다.
遼東兵百餘騎, 侵江界, 虜別差金吉甫·百戶洪丁, 以歸.

<고려사 우왕 13년 1387년 11월>
요동(遼東)의 첩자가 자주 출몰하자, 〈우왕이〉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정희계(鄭熙啓), 도안무사(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 및 니성(泥城)·강계(江界)·의주만호(義州萬戶)에게 비단을 1인당 1필을 하사하고, 사전(私田)의 전조를 반을 거두어 군량미로 비축하도록 하였다. 또 여러 도의 안렴사(按廉使)들에게 장수들의 능력과 수령의 근무 성적을 고과하여 월말에 도당(都堂)에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以遼東細作橫行, 賜西北面都巡問使鄭熙啓, 都安撫使崔元沚, 及泥城·江界·義州萬戶, 段子人一匹, 命收私田半租, 以備軍餉, 又令諸道按廉使, 考將帥能否, 守令殿最, 月季報都堂.


-고려사 1388년 이후 기록-
<고려사 우왕 14년 1388년 5월>
갑신 이성원수(泥城元帥) 홍인계(洪仁桂), 강계원수(江界元帥) 이의(李薿)가 먼저 요동(遼東) 경계에 들어가서 사람을 죽이고 돌아오니, 우왕이 기뻐하며 금으로 된 정아(頂兒)와 무늬 있는 비단[綺絹]을 하사하였다.
甲申 泥城元帥洪仁桂, 江界元帥李薿, 先入遼東境, 殺掠而還, 禑喜賜金頂兒·文綺絹.

<고려사 공양왕 2년 1390년 9월>
공양왕(恭讓王) 2년(1390) 9월에 도당(都堂)에서 아뢰기를, “의주(義州)·니성(泥城)·강계(江界)는 나라의 울타리가 되므로 마땅히 어루만지고 진휼을 더해야 하니 요역(徭役)을 감면해 주기를 청하옵니다.”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
恭讓王二年九月 都堂啓, “義州·泥城·江界, 爲國藩屛, 宜加撫卹, 請蠲徭役.” 從之.



3.
<요동지 철령위 기록>
21년(1388년) 철령으로 군을 이끌고 위(衛)와 참(站)을 새로 세우고, 황성(黃城)에 이르러 강계(江界) 만호 김완기(金完奇) 등 2700餘口를 초무(招)하였다
遼東志 周鶚傳
二十一年領軍鐵嶺創立衛站至黃城招至江界萬戶金完奇等二千七百餘口.


4.
<고려사 박의중 열전>
황제가 또 예부관에게 명하여 박의중을 위해 회동관(會同館)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를 예전의 원(元)의 평장원사(平章院使)보다 위에 앉게 하였고, 마침내 철령위(鐵嶺衛)를 세우자는 의논을 중지시켰다. 그때 장자온(張子溫)이 금의위(錦衣衛)에서 죽었고 그를 수행했던 2명은 아직 귀국하지 못하였는데, 황제가 박의중에게 딸려 보냈다. 귀국 길에 오른 지 며칠 뒤에 요동(遼東)에서 최영(崔瑩)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들었다.
帝又命禮部官, 享宜中于會同館, 坐之前元平章院使上, 遂寢鐵嶺立衛之議. 時張子溫死於錦衣衛, 其從行二人尙未東還, 帝附宜中遣之. 行數日, 遼東以崔瑩擧兵聞.


고려 철령과 철령위는 요동에 있었다. (1부)


쌍성총관부의 위치는 요동에 있었다. (2부)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은 무엇인가? (3부)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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