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기록에는 명나라가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을 설치한다고 나온다.
(허우범, 「여말선초 서북 국경선 연구」,『 인하대학교 대학원』, 2020 참조)
(허우범,『여말선초 서북 국경과 위화도』, 책문, 2021 참조)
명실록에는 섬서성 해주에서 강소성 회안까지 소금 운반하는데 27참을 두고, 참과 참 사이 거리가 100리에 해당한다고 나온다. 900km 정도 거리가 나오니 한 참당 33km정도가 된다.
100리를 33km로 계산하면, 요동에서 강원도 철령까지 15참 거리밖에 안되고, 요동에서 요동 철령까지 4참 거리 밖에 안되니 기록이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남경에서 요동까지 70참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사의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이라는 것은 명나라 수도에서부터 이어져오던 참이 요동을 거쳐 철령까지 오면서 70참이 되었다는 뜻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남경에서 오던 참을 더하여 최종적으로 철령까지 70참인데,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이라는 것은 잘못이고, 요동에서 철령까지 최종적으로 70참이라면 맞는 말이다
북경에서 요동까지 29참이라고 하는데, 해주에서 회안까지 27참이니 거리상 참의 개수가 비슷하다. 남경에서 북경까지 41참은 중심지역이라 그런지 참의 거리가 더 짧다.
결국 고려사를 보면, 요동에서 철령까지의 거리를 명확히 알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 같은 형태의 애매한 기록이 철령이라는 지명에서도 나온다.
고려사지리지 동계에 철령이북이 등장한다.
그런데 강계가 북계에 해당하니, 봉집현에 설치된 철령은 강계보다 서쪽이므로, 동계가 될 수 없다.
동계에는 철령 단독으로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북계에도 없다.
동계에는 철령이북이라 거론된 문,고,화,정,함주와 공험진이 단독으로 등장할 뿐이다.
철령이북이라는 표현은 철령이북 지명들이 동계에 속하니 동계에 속한다고 표현해도 맞는 말이다.
그리고 철령은 교주도에 속한다고 나오는데, 또 동계에 철령이북은 삭방도, 철령이남은 강릉도라는 기록이 니온다.
지역과 지명에서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표현한 측면이 강하다.
고려사를 편찬할 때, 왕과 기득권의 눈치를 봐야하고, 강대국인 명의 눈치도 봐야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가 위기 상황에 참고해야할 역사서를 대놓고 거짓으로 작성하기 어렵고, 하물며 당대에는 고려와 원의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거짓으로 왜곡하기 어렵다.
이때 쓸 수 있는 방법이 1. 누락이요. 2. 중의적 표현이다. 논란거리가 있으면 누락하여 사전에 차단하고, 중의적 표현을 써서 도망갈 구멍을 마련해놓는 것이다.
철령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은 전부 이 같은 것들이 많다.
<고려사 철령 70참>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 2인을 보내 병사 1,000여 명을 데리고 와서 강계(江界)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고 있으며, 황제가 먼저 본 위(衛)의 진무(鎭撫) 등의 관원을 설치하여, 모두 요동(遼東)에 이르렀습니다.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站)을 두고, 참마다 백호(百戶)를 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西北面都安撫使崔元沚報, “遼東都司遣指揮二人, 以兵千餘, 來至江界, 將立鐵嶺衛, 帝豫設本衛鎭撫等官, 皆至遼東. 自遼東至鐵嶺, 置七十站, 站置百戶.”
<명실록>
해주에서 회안까지 소금을 실어 나르는데, 27개의 참을 설치했고, 참과 참 사이에 100리를 뒀다는 기록이 있다.
太祖高皇帝實錄 卷二百二十二 洪武二十五年 十月 五日
癸丑戶部言運解州池鹽計其路程自河口楊壺站至淮安白萍站共二十七站每站一百里
<조선왕조실록 문종 2년>
요동(遼東)과 북경(北京)의 사이가 29참(站)이고 북경(北京)과 남경(南京)의
사이가 41참(站)이니 합계하면 70참(站)인데, 빨리 간다면 7, 8일이면 능히
도착할 것입니다.
『朝鮮王朝實錄』,「文宗實錄」13卷, 文宗 2年 4月 辛未
遼東北京之間, 二十九站, 北京南京之間, 四十一站, 竝計七十站, 而疾行則七八日能到
고려 철령과 철령위는 요동에 있었다. (1부)
쌍성총관부의 위치는 요동에 있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