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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11 15:30
[한국사] 고려 철령과 철령위는 요동반도에 있었다. (1부)
 글쓴이 : 보리스진
조회 : 1,369  

1.
철령이라는 지명은 고려사 지리지에 교주도의 교주에 속한 곳으로 나온다. 
이는 현재 학계에서 강원도 철령으로 말한다. 
그리고 명사에는 철령성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요동의 봉집현에 있었던 철령을 말한다. 
또한 고려사 지리지에는 동계에도 철령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마찬가지로 강원도 철령으로 말한다.

 
2.
그런데, 고려하고 명나라하고 영토다툼을 할 때, 철령이라는 지명과 철령위라는 위소가 등장한다.
이 때, 서로 외교문서를 주고 받던 기록이 전해진다.

박의중하고 권근이 명나라에 표문을 보내면서 철령이북은 고려땅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명나라측에서는 철령이북은 인정할 수 없고, 압록강을 경계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철령위 설치를 양보하지 않았다. 따라서 압록강 북쪽에 있었던 철령이북을 의미한다.
고려와 명나라가 다투던, 철령이라는 지명과 철령위라는 위소 설치 지역이 
모두 압록강 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사 지리지에 나오는 철령이라는 지명과 
서로 외교문서를 주고 받던 기록에 나오는 철령이북이라는 지명은 전혀 다른 곳이다.


3.
또한, 조선시대 개국 뒤에 권근과 김종서의 기록에 철령이 나온다. 
그런데 이는 고려시대의 외교문서 기록과는 다르게 동북면이 강조되고, 
김종서의 기록을 보면 더 명확하게 철령이북이 강원도 철령을 뜻하는 것으로 씌여있다.

조선 시대로 갈수록 철령 이북이 압록강 북쪽의 철령에서 
강원도의 철령을 말하는 것으로 바뀌어간다.
압록강 북쪽에서 압록강 남쪽으로 가리키는 곳이 변화하는 것이다.

결론을 지으면, 명하고 고려가 철령위를 다툴 때 나온 철령이라는 지명은 압록강 북쪽의 철령이다.
고려사 지리지, 조선시대의 김종서나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철령이라는 지명은 강원도 철령이다.

또한 고려사 지리지에는 교주도에 철령이 있다고 하는데, 다른 행정구역에서도 철령 지명이 나온다.
동계라는 행정구역에 나오는데. 철령이북은 삭방도, 철령이남은 강릉도라고 구분한다고 한다.
고려사 지리지에 나오는 철령이라는 지명은 불명확한 측면이 있는 기록이다.
앞서 고려측 기록과 명나라측 기록을 교차분석해보면, 
고려사지리지의 철령은 일부러 모호하게 작성하여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명에서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하고, 설치를 했을 당시의 고려측 기록을 보면, 
명나라측이 고려의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를 장차 설치하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명이 설치하려고 하는 철령위가 고려의 강계 북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사지리지에 강계는 북계에 속한다고 나온다. 
앞서 박의중, 권근의 표문에 나오는 철령이북과 문주, 고주, 화주, 정주, 함주, 공험진은
동계에 속한다고 나온다. 동계는 동북면, 동북계로도 불리었다.

명나라측 기록과 교차분석을 해보면, 박의중, 권근의 표문에 나오는 철령이북, 문,고,화,정,함, 공험진은 
압록강보다 북쪽이라는 것과 동북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강계는 동북면보다 서쪽인 북계에 속하므로 압록강보다 북쪽지역에서 서쪽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강계는 고려사지리지에 독로강만호라는 지명이었다고 나오는데, 
독로강은 현재 압록강의 지류이고, 위치로는 강계시에서 지안시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압록강 보다 북쪽이라는 뜻은 압록강 바깥쪽인 요동지역이었다는 것이고, 
강계가 독로강이 있는 곳을 말하니, 현재 강계시와 지안시에 이르는 지역 가운데 
압록강 바깥쪽인 요동지역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조선시대의 양성지 상소문을 보면, 명태조가 연산파절을 경계로 삼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와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로 영토다툼을 했을 당시에 명태조가 연산파절로 경계를 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철령위가 설치되고, 고려 그리고 조선과 연산파절에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현재 지명으로 번시 만족 자치현이 있는 곳이다.

또한 명사 지리지에 철령위는 옛 철령성에 설치하였는데, 
이 곳은 봉집현이고 고려와 접경하고 있다고 나와있다.
봉집현이라는 곳은 금사지리지에 혼하가 존재하고 있었던 곳이라고 나와 있다.
혼하의 상류 근처에는 신빈 만족자치현이 있다.


5.
고려사지리지에 나오는 철령은 교주도와 동계에 나오는데, 학계에서 강원도 철령으로 말한다.
불명확한 부분이 많은 기록인데, 일부러 애매하게 표현하여 왜곡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김종서, 세종실록지리지의 철령이라는 지명은 강원도 철령을 가리킨다.

반대로 고려와 명나라가 철령위를 두고 다투던 기록에 나와있는 철령이라는 지명과 철령위는 
모두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
철령과 철령위는 번시 만족자치현에서 신빈 만족자치현 서북쪽에 있었고, 
번시·신빈 만족자치현, 지안시에서 고려와 경계를 이루었다.

고려와 명은 요동의 철령을 두고 철령위 설치를 다투었고, 
그리고 강원도에도 철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개가 존재한다.

 
1.
<고려사 지리지의 교주도 교주 철령>
충렬왕 34년(1308)에 철령구자(鐵嶺口子)가 적을 경비하는 데에[把截] 공(功)이 있어 회주목(淮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 2년(1310)에 여러 목(牧)을 정리하면서 회양부(淮陽府)로 강등하였다. 요충지[要害處]가 2곳으로 철령(鐵嶺)·추지령(楸池嶺)이다.
忠烈王三十四年, 以鐵嶺口子, 把截有功, 陞淮州牧. 忠宣王二年, 汰諸牧, 降爲淮陽府. 要害處二, 鐵嶺·楸池嶺
 
<명사의 요동 봉집현 철령성>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즉 옛 철령성으로 고려(高麗)와의 경계에 접해 있으며
奉集縣, 即古鐵嶺城也, 接高麗界

<금사 봉집현>
봉집현(奉集縣)【요(遼)의 집주(集州) 회원군(懷遠軍) 봉집현(奉集縣)이며, 본래 발해(渤海)의 옛 현이었다. 혼하(渾河)가 있다.】
奉集【遼集州懷遠軍奉集縣, 本渤海舊縣. 有渾河.】


2.
<고려시대 명나라측 기록>
이원명(李原名)의 자(字)는 자선(資善)으로 안주(安州) 사람이다. … 고려에서 상주하기를, 요동(遼東)의 문주(文州)·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가 모두 그 나라의 옛 땅이니 철령(鐵嶺)에서 둔수(屯戍)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원명이 말하기를, “몇몇 주(州)는 모두 원의 판도(版圖)에 들어와서 요(遼)에 속하였으니 고려의 땅은 압록강을 경계로 합니다. 지금 철령에 이미 위(衛)를 두었으니 다시 진청(陳請)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李原名, 字資善, 安州人. … 高麗奏遼東文·高·和·定州皆其國舊壤, 乞就鐵嶺屯戍. 原名言, “數州皆入元版圖, 屬於遼, 高麗地以鴨綠江爲界. 今鐵嶺已置衞, 不宜復有陳請.”

<고려시대 명나라측 기록>
〈홍무(洪武)〉 21년(1388) 4월에 우왕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철령(鐵嶺)의 땅은 실로 그들이 대대로 지켜온 곳이라고 하면서 예전대로 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는 과거에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는데, 이제 철령이라고 꾸며 말하니 거짓임이 분명하다. 짐의 말로써 그들을 깨우쳐 그들로 하여금 본분을 지키면서 흔단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라.”라고 하였다.
〈洪武〉二十一年四月, 禑表言, 鐵嶺之地實其世守, 乞仍舊便. 帝曰, “高麗舊以鴨綠江爲界, 今飾辭鐵嶺, 詐僞昭然. 其以朕言諭之, 俾安分, 毋生釁端.”

<고려시대 박의중 표문>
명(明)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자 하니, 우왕이 밀직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으로 청하기를......(중략)
철령(鐵嶺)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文州)·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함주(咸州)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大明欲建鐵嶺衛, 禑遣密直提學朴宜中, 表請曰......
切照鐵嶺迆北, 歷文·高·和·定·咸等諸州, 以至公嶮鎭, 自來係是本國之地.

<고려시대 권근 표문>
오직 소국이 동떨어져 한 구석땅에 있으매, 협소한 것은 실로 묵지(墨誌)와 같고, 메마르기는 돌밭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하물며 동쪽 모퉁이로부터 북쪽 변방까지는 산과 바다에 끼어 있어 형세가 매우 편협하고,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와 구역이 한정이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철령(鐵嶺) 이북은 문(文)ㆍ고(高)ㆍ화(和)ㆍ정(定)ㆍ함(咸) 등의 여러 주(州)를 지나 공험진(公嶮鎭)에 이르기까지는 자고로 본국의 땅이었는데
粤惟弊邦。僻在遐壤。褊少實同於墨誌。崤嶢何異於石田。况從東隅。以至北鄙。介居山海。形勢甚偏。傳自祖宗。區域有定。切照鐵嶺迤北。歷文高和定咸等諸州。至公嶮鎭。自來係是本國之地。


3.
<조선시대 권근 기록>
동북(東北) 일대는 왕업의 터전을 이룩한 근본 지역입니다. 상국(上國)에서 철령(鐵嶺)에다 위(衛)를 세우려 할 때 신이 표문(表文)을 지었는데
東北面。王業所基。根本之地也。上國欲於鐵嶺立衛之時。臣撰表文。

<조선시대 김종서 기록>
신은 듣자옵건대, 고려의 왕조가 힘은 능히 삼한을 통합하였으나, 위엄이 북방에 미치지 못하여, 다만 철령(鐵嶺)으로 경계를 삼았고, 예종 때에 모사가가 지혜를 빌려 오랑캐를 유인해서 소탕하고 드디어 아홉 성을 두었습니다. 비록 금방 얻었다가 금방 잃어버려서 그 이(利)는 보지 못하였으나, 경계의 나눔과 판적(版籍)의 분명함은 후세에 혜택이 한이 없었습니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께서는 하늘이 낳으신 성무(聖武)로서 북방에서 일어나시어 대동(大東)을 차지하셨으니, 남으로는 바다까지 다하였고, 서북으로는 압록강까지 닿았으며, 동북으로는 두만강까지 이르러서, 이에 공주(孔州)ㆍ경성(鏡城)ㆍ길주(吉州)ㆍ단천(端川)ㆍ북청(北靑)ㆍ함흥(咸興)의 일곱 고을을 두셨으니, 진실로 동방이 개국한 이래 일찍이 없었던 성업(盛業)입니다. 
臣聞前朝王祖力能統合三韓, 威不及於朔方, 只以鐵嶺爲界, 其在睿宗, 謀臣騁智, 誘剪戎醜, 遂置九城, 雖旋得旋失, 未見其利, 然界域之分、版籍之明, 惠後無疆。 恭惟我太祖天縱聖武, 起於朔方, 奄有大東, 南盡于海, 西北抵于鴨綠, 東北至于豆滿, 爰置孔、鏡、吉、端、靑、洪、咸七州, 誠東方闢國以來未有之盛業也。

<고려사 지리지 동계 철령>
 〈공민왕〉9년(1360)에는 삭방강릉도라 불렀다. 이로써 살펴보면, 철령(鐵嶺) 이북은 삭방도가 되고, 이남은 강릉도가 된다. 고려 때에 혹 삭방도, 혹 강릉도, 혹 합쳐서 삭방강릉도, 혹 강릉삭방도, 또는 연해명주도라 불렀다.
九年, 稱朔方江陵道. 以此考之, 鐵嶺以北爲朔方道, 以南爲江陵道. 高麗時, 或稱朔方道, 或稱江陵道, 或合爲朔方江陵道, 或稱爲江陵朔方道, 又或稱沿海溟州道.


4.
<고려시대 강계 근처 철령위 기록>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 2인을 보내 병사 1,000여 명을 데리고 와서 강계(江界)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고 있으며, 황제가 먼저 본 위(衛)의 진무(鎭撫) 등의 관원을 설치하여, 모두 요동(遼東)에 이르렀습니다.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站)을 두고, 참마다 백호(百戶)를 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西北面都安撫使崔元沚報, “遼東都司遣指揮二人, 以兵千餘, 來至江界, 將立鐵嶺衛, 帝豫設本衛鎭撫等官, 皆至遼東. 自遼東至鐵嶺, 置七十站, 站置百戶.”

<조선왕조실록 양성지 상소문>
지금 듣건대 중국이 장차 개주(開州)에 위(衛)를 설치하려 한다 하는데, 신이 거듭 생각해 보니 크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개주는 봉황산(鳳凰山)에 의거하여 성(城)을 이루었는데, 산세가 우뚝하고 가운데에 대천(大川)이 있으며, 3면이 대단히 험하고 1면만이 겨우 인마(人馬)가 통하는 이른바 자연히 이루어진 지역이므로,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1만 명이라고 당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중략)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今聞中國, 將置衛於開州, 臣反覆籌之, 有大可慮者焉。 開州據鳳凰山爲城, 山勢突兀, 中有大川, 三面絶險, 一面才通人馬, 眞所謂天作之地, 一夫當關, 萬夫莫敵者也。
(중략) 我高皇帝明見萬里, 以遼東之東百八十里, 連山把截爲限

<명나라측 철령위 설치 기록>
홍무(洪武) 21년(1388) 3월에 옛 철령성(鐵嶺城)에 설치하였다. 〈홍무〉 26년(1393) 4월에 옛 은주(嚚州)의 땅으로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치소이다. 【서쪽에는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에는 범하(汎河)가 있으며 또한 남쪽에는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 들어간다. 또한 남쪽에는 의로성(懿路城)이 있는데, 홍무 29년(1396)에 의로천호소(懿路千戶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또한 범하성(范河城)이 위(衛)의 남쪽에 있는며 범하성(汎河城)이라고도 하는데, 정통(正統) 4년(1439)에 범하천호소(汎河千戶所)를 이곳에 두었다. 동남쪽에는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즉 옛 철령성으로 고려(高麗)와의 경계에 접해 있으며, 홍무 초년에 현(縣)을 설치했다가 곧 폐지하였다. 】 
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 〈洪武〉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 即今治也. 【西有遼河, 南有汎河, 又南有小淸河, 俱流入於遼河. 又南有懿路城, 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 又范河城在衞南, 亦曰汎河城, 正統四年置汎河千戶所於此. 東南有奉集縣, 即古鐵嶺城也, 接高麗界, 洪武初置縣, 尋廢.】 

<금나라측 봉집현 위치 기록>
봉집현(奉集縣)【요(遼)의 집주(集州) 회원군(懷遠軍) 봉집현(奉集縣)이며, 본래 발해(渤海)의 옛 현이었다. 혼하(渾河)가 있다.】
奉集【遼集州懷遠軍奉集縣, 本渤海舊縣. 有渾河.】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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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uder 20-09-11 16:38
   
잘읽었습니다. 요약하자면 고려시대 철령위는 한반도밖에있는 철령에 설치되었고 조선시대 철령은 한반도에있었으니 어느 철령이 어느철령을 의미하는것인지 구분이 필요하고 왜 착각했는지 알필요성이 있겠군요.
그리고 역사들이 서로 연결되어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게 동북 9성의 위치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촐라롱콘 20-09-11 17:28
   
고려가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요동정벌군을 출정시키기 전에 밀직제학 박의중에게
철령위 설치를 중지해 달라는 표문을 휴대시켜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표문의 내용일부에는......

[철령은 우리 수도의 개경과 불과 3백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공험진을 국경으로 삼은 것은
한두 해 전의 일이 아닙니다. 제 부친(공민왕)때 다행히 현명하신 황제(주원장)의 치세를 만나 제후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우리 땅도 상국의 판도에 편입된 바 있습니다.

이제 미천한 이 몸(우왕)에게 각별한 은총을 베푸시어 특별히 조서를 내려주심으로써 일시동인(一視同仁)
의 혜택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옆드려 바라옵건데 폐하(주원장)께서는 넓으신 도량으로 저희를
감싸주시고 도타운 덕으로 어루만져주시며 앞에 든 몇 주의 땅을 저희나라 영토로 인정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는(우왕) 나라를 다시 일으켜 주신 은혜에 감읍하며 늘 폐하(주원장)의 만수무강을 축원할
것입니다]

박의중은 고려에서 우왕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쫓겨난 이후 시기에 귀국했으니....

아마도 명나라 입장에서 고려에서 이성계를 위시한 친명세력이 정권을 잡은 마당에, 명나라에서는 머나먼
변방인(당시 명나라 수도는 양자강 유역의 남경) 철령위 문제로 고려와 다투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명은 고려의 위화도 회군 이후 압록강 이북으로 후퇴해서 강계의 대안인 황성(黃城)에 설치했다가,
뒤이어 봉집현(奉集縣)으로 옮겼다가.... 1398년 지금의 요녕성 철령시(랴오닝성 톄링시)로 옮겼습니다.
.
.
.
[[위 표문의 내용의 의하면 조선시기가 아닌 고려말 무렵 인식했던 철령의 위치 또한
강원도-함경도 접경지역의 철령이 맞는 것 같은데요.....??

만약 철령위가 압록강 이북이라면 표문에 개경에서 300리가 아니라 최소 1,000리이상
이라고 표현했겠지요!!!  개경에서 300리라면 합경도-강원도 접경의 철령이 실제거리와
부합합니다만......

그리고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러
고려지경인 강계(압록강 이남)까지 병력 1,000명을 대동하고 왔다고 하는데,
이는 다시말해 당시 압록강 이북지역은 명나라 관할이었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성립됩니다.

비무장 사신단도 아니고 병력 1,000명에 달하는 인원을 자국안의 한참 안쪽 지역까지
들어오게 허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Marauder 20-09-11 19:18
   
사실 처도 이점 의문이 들었었는데 잘꼽아주셨네요. 그리고 좀 의문이들어서 70참이 어느정도 거리인가 검색해봤는데 1참 거리는 보통 20 30리를 친답니다. 즉 요동을 요양성으로 가정하여 철령까지 70참을 두었다면 짧게는 1400리에서 길게는 2천리까지 볼 수 있는데 10리를 4키로로 한다면(조선시대 단위가 기억이 안나는군요)550 ~ 800 킬로정도군요.
그런데 현 요양시와 강원도 철령이 800km 이라 이 거리에 부합하는 반면 서북면으로 가정하면 너무 가까워서 맞지 않게되네요.
          
보리스진 20-09-12 12:07
   
조선왕조실록 문종 2년의 기록을 보면,
요동과 북경의 사이가 29참이고, 북경과 남경의 사이가 41참이니 더하면 70참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이라는 말은 다른 기록과 교차비교를 해보면,
남경에서 요동 철령까지 70참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문종 2년>
요동(遼東)과 북경(北京)의 사이가 29참(站)이고 북경(北京)과 남경(南京)의
사이가 41참(站)이니 합계하면 70참(站)인데, 빨리 간다면 7, 8일이면 능히
도착할 것입니다.
『朝鮮王朝實錄』,「文宗實錄」13卷, 文宗 2年 4月 辛未
遼東北京之間, 二十九站, 北京南京之間, 四十一站, 竝計七十站, 而疾行則七八日能到
矣。
     
감방친구 20-09-11 19:22
   
그냥 쉽게 말해서
고려는 그 당시 요동지역을 간수하지 못 하고 있던 겁니다
애초에 압록강 이북이 명나라 지배 하에 있었던 게 아니라
명나라는 뒤늦게 요동에 뛰어든 거고
고려는 국력이 딸려서 요동을 쥐고도 통치하지 못 하고 있던 것입니다
     
Marauder 20-09-11 19:28
   
다만 또 의문인게 철령위를 설치한 지역이 철령이라고 할 경우 서북면이 고려의 땅인점을 감안한다면 요동부터 철령위까지 고려의 영역을 삥~ 돌아서 가야하는 문제점이 발생하네요. 1000명의 군사들이 고려땅을 가로질러 갔을리는 없으니까요. 이 거리가 현대도로라는 점을 생각하면 과거에는 이것보다 길이 더 멀었을텐데
          
촐라롱콘 20-09-11 22:28
   
공민왕~우왕시기 고려 나름의 북진정책을 통해 동북면방면 또한
오늘날 북한행정구역을 적용하여 언급한다면....

개마고원 일대에 해당하는 양강도와 함경북도는
그 당시까지도 대부분 미수복지역이었지만....

적어도 함경남도일대(철령 이북의)는 고려 판도에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

명나라가 고려의 쌍성총관부 수복 이후 고려영역화된 철령이북의
현 함경남도 일대를 원나라 시기처럼 다시 차지하려는 통보를 한 셈이지요~~~

만약 철령이 함경-강원접경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 인근의 철령이라면....

공민왕대 고려가 수복한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의 위치는 또 어디이며
쌍성 일대의 토호였던 이성계 가문의 본거지는 또 어디가 될 것인지.....?? ^^

이성계가 조선건국 이후 철령이북인..... 함경남도에서도 비교적 남부에 위치한
영흥~함흥일대를 자기 집안의 본거지로 인식했는데
만약 철령이 요동 인근이라면, 이성계는 노망이 들어 자기 고향도 헤깔릴
정도로 막장이었다는 논리인지.....??? ^^
     
보리스진 20-09-12 11:58
   
박의중 표문에 의거하면,
철령 이북,이서,이동은 개원에 속하니 모두 요동에 소속시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강원도 철령 이동은 얼마안가 바닷가가 나오고, 강원도 철령 북서쪽에 있던 서경이 명나라에 넘어가게 되는데, 서경이 명나라로 넘어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표문에서 언급된 철령이북에 문,고,화,정,함주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화주에 쌍성총관부가 있었고, 화주 이북이 쌍성총관부 관할이었다고 나오는데, 목은 이색의 기록에 정료위가 쌍성총관부와 접경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료위의 영토가 동으로 압록강, 북으로 개원을 한계로 한다고 했습니다.

강계가 압록강에서 철령위와 접경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강계는 북계에 속하므로, 압록강은 고려의 북계와 접경하게 됩니다.

철령이북은 동북계에 속하는데, 정료위가 압록강을 따라 고려의 북계가 접경하게 되니, 남은 것은
압록강의 북동쪽과 개원의 동쪽입니다. 결국 압록강 북동쪽과 개원의 동쪽에 쌍성총관부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의 북계가 요양과 심양에 접경하고 있다는 기록을 보면,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기 이전 상황에 분명 고려가 요양과 심양의 남쪽 그리고 압록강의 북쪽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했던 곳이 기록에 본시 만족 자치현에서 신빈 만족 자치현이었고, 고려와는 강계에서 접경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압록강 북쪽의 관할을 명나라가 갖게 되는데, 고려와 명나라가 철령위를 다툴 때 주고 받은 기록에 따르면, 철령이북은 받아드리지 않고, 압록강을 경계로 하게 됩니다.

여기서 나온 지명 철령이북이 강원도 철령이라면, 압록강은 철령이북에 해당하기 때문에 강원도철령에서 압록강은 고려땅이 아닙니다. 그런데 압록강을 경계로 한다고 했으니, 강원도 철령이 아닙니다.
따라서 고려와 명나라가 철령위를 다툴 때 주고 받던 철령이북이라는 지명은 압록강 북쪽입니다.

왕경(王京)에서 300리 떨어졌다는 기록에서 왕경을 어떤 학자는 서경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좀와라 20-09-12 06:45
   
지금의 요동 지역에 납합출의 군대가 있었구요. 이 들 군대는 기본적으로 고려를 침공하려고 있었던 군대인데 고려를 침공 하던 중에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에 전멸 함으로 써 고려 침공은 좌절되고 그냥 주둔하고 있었던 거고 실제는 당시 요동은 고려의 영토에요.

이 때 납함출이 이끌던 군대가 왜병 2만으로 원사에 나와요. 왜는 일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요. 이 싸움에서 이성계에 패하고 돌아간 군인들이 십수명 정도 밖에 안될정도로 전멸 당할 정도로 우리에겐 역사상 드문 대첩 중의 하나이고 이성계가 중앙으로 화려하게 등장하는 전투죠.

이들의 잔존세력이 요동에 있었고 중간 생략 한다면 이 들은 고려에 귀의 요청을 했는데 고려에서 거절 당하자 명나라에 항복합니다. 명나라도 저 지역을 점령해서 통치 할 의사는 없었고 ( 전에도 말 햇듯이 기본적으로 중원의 왕조들은 만리장성 밖을 통치 안합니다) 저 당시에는 납합출의 군대를 정리 할 목적으로 간 것 뿐이에요.

정리하고 당연히 후퇴하죠. 이 걸 최영이 공격한다고 한 거구요. 

요동문제 때문에 가끔 국사 편찬 위원회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는데 이게 아주 재밌는 것이 내용이 조금씩 바뀌어요. 그 것도 아주 민감한 내용이요.

이 성계는 묘가 분명히 장성 밑이라고 나오는데 이런 내용이 사라졌더만요.

그리고 북청에 관한 내용이 분명하게 청주라는 지역이 두 지역이 있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고 이성계는 고향은 북쪽에 있는 청주라 북청이라고 나왔는데 지금은 원래 청주목을 설치해서 북청이라고 한다니 뭐가 맞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죠.

사서에 있는 내용 중에 상당수는 조선 후기 특히 실학자 들이 워낙 장난질을 쳐 놔서 솔직하게 신임이 안가요.

왜 북청에 관한 내용이 중요 하면요. 북청에 있는 민속 중에 북청사자놀이라는 것이 있어요. 아주 옛날에 한국학을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가 중국에 있는 사자춤은 북청사자놀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해서 드럽게 까인 적이 있죠.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중국의 사자춤과 용춤 등은 같은 것이라 봐요. 용춤은 드라곤 플라이 댄스로 해서 토룡 즉 지렁이 춤이라고 보통 불리죠. 이 들의 기원이 북경지방 이거든요. 하여간 이들 춤과 북청 사자 춤이 같아요. 누가 봐도 같다는 것이 나오거든요.

그럼 두 가지 가설이 생기는 거죠. 북청 춤이 북경 춤의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그 반대거나. 그런데 북청춤은 기본적으로 가면극춤이고 우리는 북청 춤 말고 다른 가면극 춤이 있는 반면에 중국은 없거든요. 결국은 북경 춤은 북청 춤의 영향을 받았다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북청이 지금의 한반도에 있는 북청이 아니라 북경이라면요? 일단 북청이라는 지명은 북청주라는 지명에서 나온 것이고 그럼 북청 밑에 남청이 있어야 정상 이겠죠? 한반도의 북청 밑에는 남청 또는 청주가 없어요. 반면에 북경 밑에는 청주가 있죠. 산동의 옛 이름이 청주죠.

그리고 북경은 장성 밑이죠.

그리고 북경의 옛이름은 북평이에요. 이 북평이라는 이름도 대륙조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던 내용이던데 그 당시에는 무시 하다가 지금 보니 중국에는 북평이라고 처음에는 설립 했다가 북경으로 불린다고 하더만요.

그런데 솔직하게 짱게 말 믿을 수 있어요? 하여간 지금의 북경이 북평이라고 한다면 삼국지 의 공손찬의 북평은 어디란 말일까요? 그리고 북평은 요동에 있었거든요? 그 밑에 있었던 원소가 발해태수로 있었고요. 다시 말해서 은근 슬적 중화의 영토가 확장되고 우리의 영토는 마구 줄어드네요.

영락제 시기에 자금성의 모든 건물이 무너지는 지진이 일어나서 자금성을 다시 세웠다고 하죠. 그런데 지금의 북경지역에서 그런 지진이 일어나요? 당산에서 일어났었고 앞으로 주의 해야할 지역이죠. 다시 말해서 영락제 초기 시기의 자금성은 당산에 있었을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낙양은 낙양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낙樂자를 요라고 발음 한다는 것은 한자를 조금만 공부하면 알 수 있는 기본이에요. 그러면 요양 즉 원래의 평양은 어디에 있었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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