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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05 04:50
[북한] 일제강점기때 독립군 단체 "동북항일연군"이란
 글쓴이 : 돌통
조회 : 904  

***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連軍]이란.?

 

 

**   만주 지역 항일투쟁을 주도함..




      1       일단 의미와 정의를 알아본다면..

 

 

 

중국공산당은 만주 지역의 항일투쟁을 체계화할 목적으로 1933년 9월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결성하였다. 1935년 7차 코민테른에서 ‘반제국주의 인민통일전선(反帝國主義 人民統一戰線)’ 노선이 채택되자 중국공산당은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결성 직후부터 관동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만주 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36년부터 본격화된 관동군(關東軍)과 만주국(滿洲國)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소련으로 월경하여 소련 극동군의 영향 아래에 있었지만,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더 감응하였다. 일본의 패전 이후에는 동북인민자위군(東北人民自衛軍)으로, 다시 동북민주연군(東北民主聯軍)으로 재편되었는데, 이는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정치 세력으로 탈바꿈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동북항일연군에는 김일성(金日成)과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등, 후일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한인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동북항일연군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2. 중국 전체의 ‘항일연군’이 활약함..

 



1931년의 만주사변과 이듬해의 만주국 건국은 이 지역의 항일투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공산당(이하 중공당) 반석현(磐石縣)위원회와 남만(南滿)유격대는 유격대의 항일투쟁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자 했다. 1933년 8월에 열린 유격대 대표자 회의를 통해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獨立師)가 창설되었으며, 9월 18일에 이를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 부대는 만주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중공당 계통의 정규군이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는 성립 당시 300여 명 규모였으며, 1934년 11월에는 2개 사로 확대되었다. 창설 때의 사장(師長) 겸 정치위원은 양정우(楊靖宇, 중국 한족)였다. 또한 참모장 이홍광(李紅光, 한인. 이하 최초의 표기에서 특별한 표시가 없는 것은 모두 한인이다), 소년영장(少年營長) 박호(朴浩), 3단장 한호(韓浩) 등, 주요 간부를 비롯해 부대원의 3분의 1이 한인이었다. 다만 조선의 독립이나 혁명을 지원하는 일은 군의 주요 목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을 무대로 하는 전투가 간혹 벌어지고는 했는데, 1935년 2월 13일에 이홍광이 이끄는 부대가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거와 과련하여  관련사료 : 

 

 

신문명:

조선중앙일보 에서.      

기사제목동흥읍을 습격한 공산군의 군세 판명, 수령 이홍광은 6백 부하 솔선, 과반 전투에 死者(사자) 10명/ 공산군의 신호를 발견하고 추격 중 행동개시한 水野(수야)  부대의 동정, 각 부대 오지로 진격/ 각 署(서)에서 다시 응원부대 파견, 토벌대의 제2진으로. 기사형식일반기사 발신지경무국 발행년월일1935년 02월 20일발행구분석간 면수02 단수01 
이름 : 이홍광,이강동,이홍수,山本,西岡(경부보)
지명 :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
관서 : 水野(수야)부대,만포경찰서


 

이어서~~ 1935년 코민테른(세계적 공산단체), 7차대회는 동북항일연군 결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중공당 중앙은 이 대회에서 결정된 ‘반제국주의 인민통일전선’ 노선을 받아 8월 1일에 새로운 투쟁방침을 제기했다. 홍군(紅軍), 동북인민혁명군, 반일의용군을 총집결하여 중국 전체의 ‘항일연군’을 조직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1936년 2월에 공표된 「동북항일연군통일군대건제선언」을 통해 동북항일연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1936년 3월부터 1937년 10월에 걸쳐 조직 확대가 진행되었다. 제1군에서 제11군으로 편재되었고, 제1·2군은 남만주, 제4·5·7·8·10군은 동만주, 제3·6·9·11군은 북만주를 활동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이 가운데 제1군과 2군에 한인이 많았고, 김일성(金日成)(본명:김성주)이 이끈 제2군 제3사는 부대원 대부분이 한인이었다.

 

1군과 2군은 1936년 7월 통합되어 양정우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제1로군으로 재편되었다. 이때 2군 1·2·3사는 각각 4·5·6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가운데 한인이 많은 6사(사장 김일성)와 4사는, 유격전을 전개하며 백두산 일대로 진격, 이른바 ‘유격구’를 건설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창설되자마자 각 지역에서 관동군, 만주국군, 조선 주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부대의 위세는 매우 커서 1937년 7월 현재, 4만 4,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과의 전투에서 전광(全光), 김일성, 허형식(許亨植), 김책, 최용건, 강신태(姜信泰), 최현(崔賢), 박득범(朴得範), 최춘국(崔春國) 등, 다수의 한인이 크게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전투로 제1로군 2군 6사의 보천보 전투(1937년 6월), 제2군 6사와 4사, 1군 2사 연합부대의 간삼봉 전투가 있다.

 

 

1936년 가을부터 만주국 군경은, 동북항일연군의 소멸을 최종 목표로 ‘치안숙정(治安肅正) 3개년계획’을 발동하였다. 관동군의 진압도 매우 격렬해졌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20만 병력을 동원한 남만대토벌과 송화강 하류지역에 대한 ‘삼강토벌(三江討伐)’을 진행하였다. 또한 1938년 가을에는 10만 병력을 투입하여 동변도(東邊道) 지구를 포위하였고, ‘3개성연합대토벌’도 일으켰다. 대규모 토벌작전의 효과는 매우 컸다.

 

 

1940년을 전후하여 남만과 동만의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괴멸되었고, 북만의 제3로군 일부만 명맥을 유지했다. 1940년 말의 병력 규모는 1,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동북항일연군의 세력이 급격이 약화되자 북만, 길동(吉東), 동남만성위원회(東南滿省委員會)의 간부들은 소련에 원조를 요청했다. 이들은 1940년 12월 하순부터 1941년 1월 상순 사이에 소련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에서 ‘만주전당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통일적 최고군사영도기관으로서 총사령부를 구성하고, 제1로군과 제2로군을 통합하며, 소련으로 월경한 부대를 5개 지대(支隊)로 편성한다’는, 동북항일연군의 새로운 투쟁방침이 정해졌다.

 

 

 

      3.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에서 김일성이 부상하다

 


이에 따라 소련 극동군사령부는 1940년 가을부터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의 이동을 지원하였다. 동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 등도 1940년 12월 중순에 연해주로 떠났다. 1942년 7월에 소련 극동군은 南(남)야영과 北(북)야영으로 나뉘어 있던 동북항일연군을 교도려로 재편하였다. 다만 교도려에는 소련공산당위원회와 중공당 조직이 병설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북항일연군은 중공당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주보중(周保中, 한족)(저우바오중)은 교도려의 임무를 “중공당 조직과 정치노선을 다르게 하지 않고 독립활동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한편 소련 극동군은 1942년 8월 1일에 교도려를 ‘소련 적군 88특별저격여단’(이하 88려)으로 개편하여 남북야영을 통합시켰다. 그리고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에서 바트스코예(Vyatskoye)로 이동시켰다. 여장은 주보중(저우바오중)이었으며, 최용건이 부참모장을 맡았다. 김일성은 제1영 영장이었다. 다만 허형식과 김책, 박길송(朴吉松) 등은 소련 극동군의 행위가 중공당의 ‘독자성’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소련으로 월경하라는 당위원회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북만주 현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관련 연구는 이들의 결단으로 인해 동북항일연군이 소련군의 부속부대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88려에는 140~180명의 한인이 있었다고 추산된다. 이와 관련해 주보중은 1944년 9월 현재 교도려 대원 1,007명 중에 ‘고려인’이 100명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이 숫자에는 한인빨치산 그룹도 들어 있는데, 이는 김일성이 정치적으로 부상하는 바탕이 되었다.

 

김일성 은 이러한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간부가 되었다. 1945년 7월, 주보중과 최용건은 ‘신(新)동북위원회’를 발족하고 ‘조선공작단’을 설치하였다. 김일성은 조선공작단의 단장이 되었으며, 최용건은 당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45년 8월, 소련과 일본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교도려의 일부 한인들은 소련군과 함께 대일작전에 참가했다. 일본의 패전 이후, 교도려의 한인은 연변으로 돌아가거나, 소련군을 따라 귀국하기도 하였다. 김일성 등은 9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19일에 원산에 도착하였다. 최용건은 주보중과 함께 장춘(長春)에 갔다가 10월에 귀국하였다.

 




      4. 중국과 북한 지도자의 정치적 기반이 되다

 


1945년 4월 23일부터 6월 11일까지 중공당 제7차 대표대회가 연안에서 개최되었다. 중공당은 “군대를 확대하는 동시에 적이 발 디딘 모든 지역에서 광범위하고 자발적으로 반일 무장조직을 만들고” “국민당에게는 의존하지 않는다”는 강령을 내세웠다. 동북항일연군 장병들은 연해주에서 야영하던 와중에도 이 강령에 깊이 감응하였다. 이 7차대회는 동북항일연군의 정치적 자각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준 대회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각성은 이후 동북항일연군의 행보를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1945년 5월, 소련의 참전이 결정되자 지휘부는 중공당의 영도에 따라 소련군과의 연합을 꾀했다. 또한 그들은 소련군이 만주에 진출하자 중공당 중앙과의 연계를 유지하며 중공당의 만주 지역 장악을 뒷받침하였다. 교도려 여장 주보중은 1945년 6월 2일에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푸르카예프(Maksim Alexeyevich Purkayev)와 만나 교도려는 만주에서 중공당 중앙의 영도에 따를 것임을 역설하였다.

 

 

1945년 7월, 중공당 동북당위원회는 지난 3년간을 결산하는 동시에, 일부는 조선으로 진공하고, 일부는 만주에 요길흑(遼吉黑)임시당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한다. 이후 선거를 거쳐 주보중이 이 위원회 서기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동북항일연군은 동북인민자위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길림·돈화·송강·치치하얼·북안 등지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10월에는 만주로 진격한 팔로군과 신사군이 연합하여 동북민주연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정치 세력으로 탈바꿈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향후 김일성이나 최용건, 김책 등, 동북항일연군 출신자들이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정치적 기반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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