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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04 16:40
[한국사] 서기 1~3세기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867  

황해도 이남 한반도의 서기 1~3세기는
삼한과 삼국(백제, 신라, 가야)이 공존하는 이상한 형국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전)은 북쪽 지역에 대해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예맥, 조선 등 국가의 꼴을 갖추고 비교적 넓고 일정한 영역을 지닌 것으로 기술한 반면

남쪽의 삼한은 군장국가 수준의 백수십여 개의 소국이 난립한 연맹왕국으로서, 문화발전 정도에 있어서도 낙후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학계 주류의 입장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아닌 삼국지 위서 동이전(후한서 동이전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바탕한 것이다)의 기록에 더 무게를 두고서 어정쩡하게 국사를 서술하고 있고 내부적으로는 신라와 백제의 실제 수립 시기를 서기 사오 세기로 본다 하는 여러 전언이 있다

그렇다면 주체적 탐구자의 견지에서 이 시대의 실사를 어떻게 접근하여 이해하여야 할까

첫째ㅡ

기술 자체를 명확히 읽고 입체적으로 표로써 정리를 하여야 한다

둘째ㅡ

우리의 사서로는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저들의 사서로는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을 교차 분석하여

과연 삼국지 위서 동이전 사서 기자가 어디에서 삼한에 대한 정보를 취득했으며 그 정보는 그 당대의 정보인지 전대의 정보인지 따져보고

또한 후한이든 삼국의 조위든 저들의 정세에서 과연 1~3세기 당시 삼한의 상황을 제대로 취재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따져본다

셋째ㅡ

사서 기록이 불확실할 때에 고고물질문화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과연 한반도 남부의 물질문화상이 위서 동이전의 기술상에 부합하는지 따져본다

- - -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맹점은
삼한의 영역을 사방 4천 리로 적고 있는 점이다

사방, 또는 방이라 하는 개념은 하ㆍ은ㆍ주 시대를 다룬 여러 사서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서
해당 영역의 들고 남을 정사각형(방)의 형태로 채우고서
그 지름의 거리를 일컫는 것이다

이에 보통 사방 4천 리라 함은
동서의 길이 4천 리, 남북의 길이 4천 리를 뜻한다

하여
하나라는 방 5천 리, 상나라 말기는 방 3천 리, 주나라 때에는 방 7천리 하였던 것이다(예기주소)

그런데 임진강 이남을 따지면 방 1천 리도 되지 않으니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방 4천 리 기술이 맹점이 되는 것이다

방 4천 리는
남북
해남에서 북쪽으로 요원시 또는 길림시 근방까지
부산에서 북쪽으로 목단강시 동남 근방까지
동서
대련시에서 동쪽으로 연해주까지
조양시에서 동쪽으로 연해주까지

해당한다

이상한 노릇은 이 영역은
비파형동검, 고인돌 등의 분포지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 - -

서기 1~3세기에 남만주를 거쳐 서북한 지역에 나타나는
토착민계통의 무덤들

서기 전 2~1세기에 조성돼 서기 4~5세기 경까지 사용된 왕성급 규모의 풍납토성

서기 1~4세기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나타나는 백제계 산성

ㅡ> 이러한 식으로 위서 동이전의 기술의 진위여부를 따져볼 일이다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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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테이토칩 20-09-04 16:50
   
솔직히 진수나 후한서 편찬자(이름이 뭔지 모름)가 한반도를 방문하면서 기록을 남기진 않았을거고...

백제나 마한은 고구려나 부여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한-위나라와의 접촉이 덜했겠죠.
그래서 편찬자들이 대충 예전의 기록들을 인용해서 한반도의 상황을 서술한듯 합니다.

근데 위서동이전은 고구려조 항목도 별로 믿기지 않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개인적으로요)
     
감방친구 20-09-04 16:54
   
공감합니다
실은 지난 봄 장백산과 압록수 연구를 하면서
만주사는 거의 싹 다 다루었어요
그래서 성과가 큰데
내용이 너무 광대해요
          
포테이토칩 20-09-04 16:56
   
위나라는 고구려랑 전쟁도 치뤘는데 고구려조의 몇몇 기록은...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더군요.
촐라롱콘 20-09-04 18:21
   
[[사학계 주류의 입장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아닌 삼국지 위서 동이전(후한서 동이전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바탕한 것이다)의 기록에 더 무게를 두고서 어정쩡하게 국사를 서술하고 있고 내부적으로는 신라와 백제의 실제 수립 시기를 서기 사오 세기로 본다 하는 여러 전언이 있다.]]
.
.
삼국사기 1~3세기 기록에 여러 모순이 있기 때문에.. 삼국지나 위서 동이전을 더 신뢰하는 거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의 창업자인 온조왕대인 1세기초에 이미 마한을 멸망시켰는데
삼국지나 위서 동이전에는 3세기에도 마한은 건재한 것으로 나오며 백제는 마한을 구성하는 54국의
일개 국가로 등장합니다.

신라 또한 진한을 구성하는 12국의 일개 국가인 사로국(신라의 전신)으로 등장하지요~~

또한 결정적으로 고고학적 측면에서의 발굴과 연구성과가 축척될수록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지나 위서동이전의 기록에 더 들어맞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3세기 이전에는 경기권 일부에 한정된 백제양식의 유적이 3세기 이후에 들어서야
마한의 영역을 잠식해가며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오늘날 전남 일대는 5세기말까지도 백제와 마한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나오며
6세기 이후에 접어들어서야 백제 양식으로 단일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결정적으로 삼국사기는 당대의 기록이 아닌 수백년~1,000년 이후 고려중기의 기록인데 반해
삼국지만 하더라도 이를 저술한 진수는 삼국시대~진 대의 인물로 3세기 중후반대를 살아간 인물입니다.

또한 당시 위나라는 관구검의 고구려침략을 통해 고구려를 비롯하여 부여, 옥저, 동예, 숙신...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정보를 비교적 많이 취합했을 것이며
낙랑과 대방을 통해 한반도 북부지역은 물론이고 낙랑-대방 등과 교류한 한반도중남부와 왜의 정보도
수시로 취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감방친구 20-09-04 18:32
   
일단은 님도 충분히 양지하고 있으면서 거론 안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서울과 경기 일대에 서기 3세기까지 산재한 백제계 유적의 분포로 본 그 영역이 과연 위서 동이전의 기록대로 마한에 속한 수십 개 소국의 하나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죠

더구나 풍납토성은 이미 동시대인 서기전 2~1 세기 토성으로서 사학계 통설에서 왕검성으로 비정한 평양 대동면 낙랑토성보다 규모가 큽니다

이것을 풀어내야죠
          
촐라롱콘 20-09-04 20:16
   
물론 3세기 정도에 접어들면 위 댓글에서 제가 비록
백제가 마한 54국의 일부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3세기 중반에 일어난 기리영전투의 주도세력으로 백제 또한 강력한 후보군 몇몇 국가에
들어가는 것으로 봐서는... 3세기에는 마한 여러 소국 가운데 상위 몇 개국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세력이 컸던 것은 인정합니다.~~~
               
감방친구 20-09-05 08:58
   
즉 받아서 명확히 하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삼한 기록은
3세기 당시의 정보가 아니라
몇 세기 이전의 정보일 가능성이 높고
여기서 한발 물러서더라도
몇 세기 이전(기원전) 정보를 바탕으로
후한과 조위 시대 정보가 섞인 정보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방친구 20-09-04 18:34
   
그리고
삼국사기는 대외관계사에 있어서는 주로 자치통감을 중심으로 중국역대사서를 교차편집하였지만

고ㆍ백ㆍ신ㆍ가야의 기록은 실전된 우리측 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어요
     
감방친구 20-09-04 18:39
   
그리고
위나라 군이 방문한 지역은 옥저와 부여였습니다
옥저는 추격
부여는 군량미 지원을 받기 위해

나중에 후퇴할 때에 낙랑의 들판을 거쳐 물러갔다고 돼 있는데
이 낙랑이 서북한이라 볼 근거가 부족합니다

부여, 옥저 등에 대한 기술정보는 비교적 구체적이고 현장성이 있는 반면에 삼한에 대한 기술정보는 과연 3세기 정보가 맞느냐 의심스러운 것이죠
          
포테이토칩 20-09-04 18:58
   
낙랑을 거쳐 물러났다가 아니라 낙랑에서 물러났다 아니였나요?
               
감방친구 20-09-04 19:15
   
님 말씀이 맞을 거에요
               
감방친구 20-09-04 19:23
   
현도에서 나와서 고구려를 치고
군대를 물릴 때는 낙랑에서 물러났습니다

사학계 통설에서는 당시 고구려가 현 압록강 중류 유역과 동가강 일대를 영역으로 했다고 하고
낙랑은 서북한,
당시 현도는 소위 제 3현도군에 해당하는 푸순시에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현 서북한에 군사를 주둔할 이유, 이곳을 경유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저는 당시 현도는 이미 공손씨 때부터 현 의무려산 일대에 있었고
낙랑군은 본래 현 요동에 있다가 대릉하 유역으로 옮겨졌거나 애초부터 대릉하 유역에 있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포테이토칩 20-09-04 19:26
   
동천왕이 패퇴하고 남옥저까지 도망한걸로 압니다.

사실 낙랑군에 대한 논쟁은 동천왕과 위나라의 전쟁기록보다는
그 이후 "평양으로 천도했다"(313년) 때문에 더 활활 불타오르죠.
                         
감방친구 20-09-04 19:31
   
이거는 진서의 불함산 고찰에서 상세히 다룬 것인데 나중에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 것입니다

남옥저는 동옥저, 옥저 등으로도 불렸는데
현 함경도 일대이고

위나라 군대는 거기서 1천여 리를 추격해서 치구루(북옥저)까지 갔습니다

인터넷의 많은 사람들이 이 진행 순서를 오해하더군요
                         
포테이토칩 20-09-04 20:26
   
아, 313년은 미천왕 대였죠.

동천왕은 247년 천도했습니다.
          
촐라롱콘 20-09-04 20:13
   
[[삼한에 대한 기술정보는 과연 3세기 정보가 맞느냐 의심스러운 것이죠]]
.
.
3세기 중반에 일어난 마한제국과 낙랑-대방과의 전쟁인 기리영전투 또한 삼국지에
언급된 것으로 봐서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삼국지 시기로부터 불과 몇 십년 이전시기까지의
당대에 상당히 근접한 시기의 역사적 사실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테이토칩 20-09-04 19:40
   
제가 위서동이전 고구려조의 기사도 잘 납득되지 않는다고 한 이유는 위서동이전의
"고구려 인구 3만호" 기록 때문입니다.

위서동이전과 삼국사기 모두 동천왕과 위나라의 전쟁에서 동천왕의 병력을 2만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3만호에서 2만명을 동원하고(거기다가 그 중 5천여명은 철기병이였음)
심지어 1만 8천이 사망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패를 당했는데
고구려가 그때 멸망하지 않았다는게 납득이 되지 않음;;;;;
          
촐라롱콘 20-09-04 20:19
   
관구검의 침략으로 고구려가 거의 멸망의 위기까지 갔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향후 대략 50년 동안 중국 어느 사서에서도 고구려가 특별히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위나라 침략으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하는데 수 십년 세월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포테이토칩 20-09-04 20:30
   
그렇다고 보기엔 바로 다음 왕인 중천왕은 위나라군 8천명을 갈아버린단 말이죠.

그리고 애초에 3만호에서 2만명을 동원했는데 거기서 1만 8천이 날아갔으면...
멸망의 위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멸망했어야 합니다.

고구려 후기 호구수를 대략 80만호로 잡는데, 이 당시에 고구려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한꺼번에 투입할수 있었던 병력이 약 20만 정도였습니다.
(수/당과의 전쟁으로 인한 국력소모가 고구려 멸망의 주요 원인이였죠)

하물며 고구려 후기보다 체제가 더 불안정했던 시기에 3만호에서 2만명을 동원하는것부터
이해가 안가는데....하물며 대패하고 90%의 병력이 소멸했다면....
                    
촐라롱콘 20-09-04 20:47
   
3만호 세력일 당시의 고구려 시기는 고구려후기시기보다는
농경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고 수렵-유목 인구가 상당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농경민보다는 유목-수렵민의 인구대비 전투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면 3세기 고구려 시기보다 쳔 년도 훨씬 더 지난 이후에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어느정도 통합될 당시의 인구를 3만호 정도로 추정합니다.

당시 선조의 명으로 임란 와중에 건주여진을 방문하고 누르하치를 접견한 남부주부 신충일이
남긴 '건주기정도기'라는 견문록에서 당시 누르하치가 거느린 건주여진의 병력규모를
1만5천~2만으로 파악하고 있으니... 당시 농경-수렵-유목이 혼합된 건주여진 인구의
대략 1/10 가까이는 병력으로 동원가능했던 셈입니다.....!!!   

전투가 일상화된 유목-수렵민 전투원 기준으로 1만 5천~2만 세력의 통합 정도만 되어도
당시 비록 임란 와중과 임란 이후 임란 후유증을 극복하는데 여념이 없다 하더라도
그래도 명색이 당시 인구 천 만을 상회하는 조선으로서도 그때부터는 독단적으로
여진 세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포테이토칩 20-09-04 20:55
   
글쎄요, 후금도 국가로서의 체계가 어느정도 잡힌 이후로는 그정도의
동원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가령 사르후 전투 당시 후금군의 규모도 최근에는 3만정도로 추정되고 있음
(물론 이건 누르하치가 단기결전으로 끝내기 위해 최정예 병력만을 동원한 탓도 있음)

그리고 누르하치가 영원성에서 호왈 13만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최근 연구결과
상당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얼핏 듣기로는 6~7만이였나?)
(누르하치 입장에서는 영원성 전투에 자신이 동원할수 있는 병력 거의 대부분을
털어넣었겠죠?)

그리고 입관전 후금의 인구는 약 200만쯤 되었구요.
의외로 후금은 그렇게 쩌는 동원력을 보여주지 못한 셈이죠
                    
촐라롱콘 20-09-04 21:21
   
[[누르하치가 영원성에서 호왈 13만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최근 연구결과
상당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얼핏 듣기로는 6~7만이였나?)]]
.
.
병자호란 역시 기존의 10~12만의 청나라군이 동원되었다는 건 오늘날에는
폐기처분화되어 버렸고....

전투원 기준 3만4천~4만5천, 노예-보조병인 쿠틀어들까지 죄다 포함해도
5~6만명 선이 동원되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대세론인 것 같습니다....!!!


[[입관전 후금의 인구는 약 150~200만쯤 되었구요.]]....!!!
.
.
그마저도 입관 전 후금~청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팔기에 속한 만주족과 내번몽골의
성인장정의 숫자가 각각 8~9만, 3~4만으로 파악되니 만주팔기-몽고팔기의
성인장정을 죄다 합쳐도 12만 내외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후금~초기 청나라 인구 숫자를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는 것이
만주족과 내번몽골인들 가운데 어린이~노인까지 포함된 전체 남성의 최소 절반 이상이
성인장정으로 분류되기 마련이므로 전체 남성인구가 20만을 약간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후금~청나라 초기에는 전쟁이 빈번했기 때문에 여성인구가 남성인구보다는
많았을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만주팔기와 몽골팔기에 속한 전체 인구를
최대치로 잡아도 50만 미만일 것입니다.

이외에 뒤늦게 조직된 한족팔기의 성인장정 숫자가 몽골팔기보다는 다소 상회하는
4~5만명 규모였으니 전체인구는 최대 20만으로 잡는다 하더라도.....

입관 이전에 복속된 외번몽골의 성인장정 숫자도 대략 4~5만으로 파악되니
전체 인구 최대 20만으로 잡는다 하더라도.....

역시 입관 직전에 복속된 흑룡강 유역의 퉁구스계 소수민족 수 만명 규모까지 포함해도
대략 최대 100만명 이하였을 것입니다.

200만이라는 후금~청나라 초기 인구숫자는 만주팔기와 몽골팔기인들이
주로 부렸던 쿠틀어로 상징되는 포의-노예들까지 죄다 포함한 인구숫자일 것입니다.
                         
포테이토칩 20-09-04 21:31
   
1648년 조사에 따르면 팔기의 장정수는 35만여명 정도였던걸로 압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금의 발흥 당시 기후와 3세기 고구려의 기후는 달라요;;;;;

후금 발흥 당시에는 소빙하기였고, 3세기의 기후는 상당히 좋아서 후금 당시의
만주보다는 농경에 유리했다고 볼수 있겠죠.(즉 후금보다 농경적 성격이 더 강했겠죠?)

즉, 당시 후금의 상황을 고대로 고구려에 대입하는건 무리라는 말.

그리고 아까부터 님이 자꾸 간과하시는게 있는데 고구려는 2만을 동원한것뿐 아니라
그중에서 90%의 병력을 날려먹었습니다.
님 말대로 후금이 전 인구의 10%를 동원하고 그중 90%의 병력을 잃으며,
도읍지와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도 버틸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심??;;;;;

p.s: 근데 당시 노비로 분류되는 계층을 동원하지 않은건 후금뿐 아니라 고구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촐라롱콘 20-09-04 21:40
   
1648년 팔기 인구조사에서 35만의 성인장정이라는 건 노예 20만명 가량이 포함된
숫자입니다.

만주팔기-몽고팔기-한족팔기에 속한 성인장정(노예는 제외)을 죄다 합산해도
최대 16~17만을 넘지 못합니다.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청태종이 차하르몽골을 복속시키고 몽골대칸의 옥새를
손에 넣인 이후인 대략 1635년~1636년에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었는데
그것도 입관 이후인 1648년를 언급하시면서 후금이라고 표현하시면...... ^^::
                         
포테이토칩 20-09-04 21:44
   
네 그래서 님이 답글 달기 전에 수정했고요
개인적으로 이렇게 꼬투리잡는건 좀 불편하네요.
                    
촐라롱콘 20-09-04 21:55
   
[[후금 발흥 당시에는 소빙하기였고, 3세기의 기후는 상당히 좋아서 후금 당시의
만주보다는 농경에 유리했다고 볼수 있겠죠.(즉 후금보다 농경적 성격이 더 강했겠죠?)]]
.
.
기후적 측면에서는 고구려가 유리했다 하더라도
일천 수백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의 농경기술의 발전적 차이는 간과하시나 보네요!

그리고 후금의 주도세력이라 할 건주여진은 여타 해서여진, 야인여진 제부족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농경이 비중이 높은 부류들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나와바리 또한 초기 고구려와 건주여진이 비슷한 지역이네요~~

물론 건주여진에서 후금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여진족출신 장정들은 전투역량을
향상시키는 데 집중하고 농경은 주로 한족-조선인 출신 포로-노예들이 담당했습니다.

물론 남만주 일대의 기후적 특성상 논농사는 극히 일부이고 밭농사가 대부분이었겠지만...
                         
포테이토칩 20-09-04 22:05
   
전근대 이전까지는 농업기술의 향상보다도 기후가 농업이나 인구에 좀더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볼수 있겠죠.

그리고 아까 님이 후금의 노예를 언급하신건 후금 인구에서 노예에 해당하는 인구는
제하고 동원력을 추정하는게 맞을 거다-라는 걸 제게 알려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 고구려는 당시에 노비로 분류되는 계급까지 전쟁에 동원했나요??(이건 진짜
몰라서 묻는거;;) 그리고 고구려 또한 전쟁을 할때 경제력을 담당할 장정 인구는
어느정도 남겨놓았을 텐데 말이죠.
                         
포테이토칩 20-09-04 22:19
   
그리고 하나 더 여쭙자면 건주여진을 호령하던 누르하치의 병력이 1만5천~2만이라는
기록 또한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바가 되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고려 군사를 약 60만으로 적어놨는데,
실제로 고려가 최대로 동원할수 있는 병력은 그의 절반 가량이였죠.
                    
촐라롱콘 20-09-04 22:19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상식적으로 전쟁의 성격이 대외침략전이냐 외세의 침공에 대한 방어전이냐에 따라
확연히 차이나겠지요~~~

아무래도 외적의 대대적인 침공에 대한 방어전일 경우에 가용한 최대치의 병력을
동원하기 마련이니까요~~

대외원정의 경우야 국내 방어용 병력과 생산담당할 장정 숫자를 제외한
적정규모의 병력을 동원할 수 밖에 없겠지만....

(병자호란에서 당시 청나라군의 병력규모에서의 오류가 이런 부분이지요.
8기가운데 7기가 동원되었다고 해서 8기전체병력의 7/8이 동원되었다고 계산했는데
당시 청나라군의 대외원정에서의 병력동원은 니루에 속한 정정의 1/3~1/5이
동원되는 것이(팔기로 확대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일반적이라는 사실은 간과하고
계산한 셈이었지요~~~
                         
포테이토칩 20-09-04 22:24
   
그렇다기엔 사르후 전투 또한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 도합
9~12만명이 쳐들어오는 후금 입장에서는 방어전이였죠.

그리고 고구려의 2만 병력 중에서는 철기병만 5천여명 이상이 있었으리라 추정되니까
이게 무조건 고구려가 모든 힘을 다 쏟아부은 전력인지도 의문스럽다고 여겨지고요.

일단 님의 의견은 잘 들었고, 후금사에 대해서는 미흡하게 알던 부분을 새롭게
다시 보충할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방친구 20-09-04 20:47
   
기리영 전투랑 염시착인지 염사착인지 하는 인간 탓에
어떻게든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구르미그린 20-09-04 22:58
   
옛날 중국인들이 "호왈 100만"이라고 하는 걸 실제는 몇 분의 1었을 거라고 말하는데

중국역사서에서 말하는 삼국 영토, 길이, 인구를 지금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 역사서를 쓴 중국인들이 직접 측정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2차 여요전쟁 때 현종이 거란군에게 잡힐 위험에 처했을 때, 하공진이 요 성종을 찾아가 "고려 남방은 수천리에 이른다"고 뻥을 치자, 성종이 더 추격하다간 위험하다고 보고 철수했고
조선 건국 직후 요동에서 주원장에게 "조선이 30만 대군을 동원하면 요동을 못 지킨다"는 보고를 올린 적이 있는데

삼국시대~고려시대에 외국인들은 한반도를
지금보다 몇 배 큰 땅 = 수십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농업생산력이 있는 땅
으로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구르미그린 20-09-04 22:59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와 전쟁할 때 3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을 거라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작 고구려가 백제, 신라와 전쟁할 때 동원한 병력은 5만을 넘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한번에 10만명만 동원해서 백제, 신라 중 한쪽 먼저 밀고 삼국통일했으면
나중에 당나라와 전쟁 때 양면전쟁 부담이 없어서 고구려가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 병력이 5만 정도입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조선 인구는 (고구려 인구보다 훨씬 많은) 1000만에 육박했던 것으로 학자들이 추산하는데, 조선이 동원한 병력은 10만을 넘지 않습니다....

즉 중국의 "호왈백만"이 실제보다 몇 배 부풀려진 경우가 많듯,
한국 역사에서 "수십만 병력" 기록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누짱 20-09-05 16:08
   
역사문외한이지만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1~3세기에 관해선 일도안사님의 책 삼한사의재조명1,2를 권합니다. 많은 모순이 해결되더군요
     
감방친구 20-09-05 16:37
   
일도안사님은 동아게에서 한 때 활동하신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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