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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28 16:53
[한국사] 허황옥과 왜의 이동경로
 글쓴이 : 밑져야본전
조회 : 447  

허황옥과 왜의 이동경로 : 가야와 왜의 관계
 
가야의 신화에 의하면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허황옥과 혼인 후 부족장인 9간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를 도입하게 된다.
중앙집권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왕권이 강화 되어야 하는데 수로왕은 해양세력인 허황옥과 혼인함으로써 왕비의 세력을 얻어 왕권을 강화하게 된다.
 
어느 날 왕이 신하에게 말했다.
“구간들이 모두 여러 벼슬아치의 으뜸이지만, 그 직위와 명칭이 다 소인, 농부의 칭호이며 고관 직위의 칭호가 아니니 만약 외국에 전해지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후 9간 등의 관리의 칭호을 고쳐 아도를 아궁이라 하고, 여도는 여해, 피도는 피장, 오도는 오상, 유수와 유천은 유공과 유덕으로 이라고 하고, 신천은 신도로 고치고 신귀神鬼는 신귀臣貴로 바꾸었다. 계림의 관직을 따라 각간 아질간 급간 등의 등급을 만들고 그 아래의 관리들도 주나라의 제도와 한나라의 절차로서 나누어 정했다.
수로왕은 왕후를 맞이한 뒤로 더욱 나라를 잘 다스려 가야국의 기틀을 튼튼히 다져나아갔으며, 나라는 점점 융성해 갔다.
이리하여 나라와 집안은 질서가 갖춰지게 되고,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므로 그 가르침은 엄숙히 작위를 짓지 않아도 저절로 위엄이 서고 그 정사는 엄격을 내세우지 않아도 잘 다스려져 갔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보면 왕비의 세력과 연합함으로써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부족장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로의 변경을 알 수 있다.

허황옥으로 표현되는 해양세력은 과연 누구인가? 많은 기록을 살펴보면 기원 전 2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중반까지 독자적인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남중국 해안에서 발해만과 한반도 남해안 일대를 떠돌던 ‘왜’로 표현되는 집단으로 보인다.
이들은 가야의 수로왕과 전략적 혼인을 통하여 가야의 지배집단의 한 축으로 성장하였으나 세력팽창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신라와 충돌하여 종래에는 멸망하게 되고 그중 일부가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허황옥
 
김해 지방의 가야 유적지 발굴 현장에서는 고도로 발전한 문화 유물이 발견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금관가야나 대가야도 독자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바다 건너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것은 가야가 바다로도 진출했음을 알려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허황옥은 왜 인도 사람이 되었고 쌍어문양처럼 신성시 되었을까.
보통 고대 국가의 개국에는 전설이 있다.
가야의 경우에는 구지가로 대표되는 건국 신화가 있고. 허황옥의 경우도 이런 건국신화 처럼 후대에서 각색하고 신성시 한 것이다.
이유는 금관가야의 지배층은 왕족 말고도 허황옥으로 대표되는 왕비 집안. 이렇게 두 집안이 최고 권력층이기 때문이다.

김수로왕 사후에도 허황옥 집안과 가야 왕실은 계속적으로 통혼한다. 이건 가야의 집권층의 권력이 왕실뿐만 아니라 왕비 집안인 허황옥 집안에게도 있었다는 얘기고, 그것은 가야 건국 때 왕실과 허황옥 집안이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허황옥의 집안은 신화를 보면, 허황옥은 배를 타고 먼 곳에서 온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실제로 허황옥이 인도는 아닐지라도 배를 중심으로 한 해양 세력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나중에 가야가 철을 중국, 왜, 백제, 신라 등지에 널리 수출하고, 중국의 사서에도 철기가 고도로 발달한 최첨단 국가라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철 수출국인 것에도 관련이 있다. 당시 철을 멀리까지 대량으로 수출하기 위해선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대규모의 선박은 필수 조건인데 가야는 당시 이런 능력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즉, 이런 해양 기술의 후원자이자 힘의 발원이 허황옥의 집안과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는 신라와 사이가 안좋아지는데, 신라와 가야의 싸움의 선두에는 석탈해와 호공이라는 본래 왜국의 토착 세력 출신과 주변 국가 출신이 있다. 즉, 가야의 팽창 자체도 신라엔 위협이었으나 이들 왜국 토착 세력과 주변국의 사람으로 볼 때 뛰어난 해양 기술로 빠르게 왜국 열도를 오가는 위협적인 세력이 지배층인 가야가 그리 곱게 안보였을 것이다. 이것도 허황옥 세력의 원류가 어디인지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즉, 영산강 유역 + 마한 잔존세력과 허황옥의 해양 세력은 같은 맥락의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이 세력들은 뛰어난 항해술과 힘을 이용해서 왜국 열도에까지 세력을 넓혔고 가야, 백제, 왜국이 나중에 연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볼수 있다.

가야 왕실과 허황옥의 집안은 서로 통혼하면서 가야를 이끌고 가다가 금관가야의 6대 좌지왕 때 용녀 집안이라는 다른 세력과 통혼하게 된다.
이는 더 이상 허황옥 집안의 영향력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서기를 하겠다는 왕실의 의지이다.

그런데 신라와 이 시기에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결국 전면전을 하게 된다. 여기서 가야는 크게 위축되어 신라의 귀족 출신을 좌지왕의 왕비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좌지왕은 허황옥 집안의 힘이 다시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로인하여 좌지왕의 아들인 질지왕 때 허황옥의 집안을 달래기 위해 왕후사라는 절을 세운다.

가락국기 기사에는 "허황옥을 기리는 왕후사를 세워서 허황옥의 신령의 힘을 빌어 비로소 왜를 복속시켰다" 라고 나와 있다.
즉, 왕후사를 세우는 등 허황옥 집안의 권위를 높여 주면서 그들의 힘을 이용하게 되고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왜국 열도를 허황옥 집안의 힘을 바탕으로 점유하게 된다.
그리고 왕후사 창건의 힘으로 왜국을 복속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보아 위의 기사는 허황옥이 왜국과 연관이 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허황옥이 불교적 색채를 띄게 된것이 이런 이유이다. 즉, 가야 왕실이 허황옥 집안을 높이기 위해 불교적인 윤색을 한 것이다.

나중에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가야연맹의 지위가 바뀔 무렵에는 허황옥 집안의 가야에 대한 영향력이 급격하게 줄었다는 걸 의미한다. 이후에 이 세력은 영산강 세력 같은 일부 백제계 해양 세력과 더불어 일본 열도로 주무대를 옮기게 된다.

허황옥의 도착지

그렇다면 허왕후가 타고 온 배를 횃불로 표시하여 안내했다는 망산도는 어디이며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 망산도가 어디인가 하는 것은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진해시의 용원동이라는 설과 다른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전산도前山島(현 삼정동 부근)를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 망산도라고 표기하고 있고 당시 이 곳이 내해內海였다는 지리적 상황으로 보아 타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재의 주장을 수용하고 있는 망산도는 진해시 용원동 산 222번지에 위치하고 썰물 때는 뭍과 연결되는 작은 섬이다. 작은 암석과 많지 않은 잡목들만이 그 옛날 허왕후가 물살을 가르고 찾아 든 옛 가야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 곳에는 경상남도 기념물 89호라고 표시된 안내판이 서 있는데 여기에는 "수로가 왕이 된지 7년, 용원동 앞 작은 섬 망산도로 유천간을 보내 바다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색의 돛과 기旗를 단 돌로 만든 배를 맞았는데 거기에는 허왕후와 그 일행들이 타고 있었다" 고 적고 있다.

또 왕후가 타고 온 배가 망산도 동북쪽으로 약 70m 쯤 되는 곳에서 뒤집혔는데 그것이 지금의 유주암維舟岩이라는 것이고(허왕후는 돌배를 타고 왔다고 구전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의견으로 실제 돌로 만든 배가 아니라 파사석탑을 싣고 왔으므로 돌배라고 불렀다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1908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유주비석이다. 망산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 비석에는 대가락국 태조왕비 보주태후 허씨유주지지大駕洛國 太祖王后 普州太后 許氏維舟之址라고 적어 이 곳을 통해 허왕후가 가야로 들어와 수로왕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허왕후의 도착지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그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망산도 이외에 처음 배에서 내렸다는 주포主浦(임개), 비단바지를 벗었다는 고개인 능현綾峴(비단고개), 산신에게 고했다는 진현陳峴(무금티고개), 수로왕과 왕후가 합혼合婚을 했다는 곳에 지었다는 왕후사 등이 그것이다.
 
허황옥의 고향

허황옥 능비에는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 許氏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보주태후의 ‘보주’는 일종의 시호 같은 것인데 여기서 ‘보주’가 바로 허황옥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인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사천성 안악현의 옛 이름이다.
인도라는 것은 아마 허황옥 조상들의 원주지로 보인다.

광무光武 23년(서기 47) 남군南郡 만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무위장군 유상을 파견하여 토벌했다. 강하江夏로 이주시켰다.
建武 二十三年 春正月 南郡蠻叛 遣武威將軍 劉尙討之 徙其種人於江夏

화제和帝 영원永元 13년(서기 101) 허성許聖의 무리가 세금 차별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해 여름, 정부는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형주荊州의 여러 군郡의 1만여 병을 독려하여 반란군을 토벌했다. (……) 허성 일당을 크게 격파했더니 허성이 항복했다. 이들을 또다시 강하로 이주시켰다.
和帝永元 十三年 許聖等以郡收稅不均 懷怨恨 遂屯聚反叛 明年夏 遺使者督荊諸郡兵萬餘人討之 (……) 大破聖等 聖等乞降 復徙置江夏

후한後漢 때인 서기 47년에 촉 땅인 남군에서 토착 민족이 한나라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고, 반란은 한군漢軍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때 반란의 주동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강하江夏 지방, 곧 오늘날의 무한武漢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로부터 50년 후에 또 토착 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그 주모자가 한군에게 항복했다. 그 주모자의 이름이 허성許聖이다. 이로써 촉 땅에 살고 있던 토착 사회에 지도자급 인사로서 허씨 성을 가진 사람이다.
후한서에는 ‘허許’는 성씨가 아니라 세습되는 무당이라고 적혀 있다. 반란의 주동자인 허성은 소수 토착민 사회에서 정신적인 신앙 지도자였다. 따라서 허황옥은 첫 번째 반란이 실패했을 때 강제 이주당한 지도자급 가계家系의 한 여인인 모양이다.
그들은 정착지인 양쯔 강 중류의 무한 지방을 거쳐 양쯔 강을 따라 상해 지방으로 간 다음 바다를 건너 한반도 김해의 가락국에 도착한 것 같다.  보주 출신의 허황옥이 가락국에 와서 왕비가 되어 살다가 죽자 고향의 이름을 따서 시호를 보주태후라고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장유화상長遊和尙

장유화상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황옥許黃玉의 오라버니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김해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에 적혀있다.
허황옥은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의 공주로 1949년 전 가락국에 도착하였다고 『삼국유사』가 전하고 있다. 허황옥 공주가 가락국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王妃가 되었는데, 그때 나이 16세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공주의 일행은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신하 신보申輔와 그의 처 모정慕貞, 또다른 신하 조광趙光과 그의 처 모량慕良 뿐이고, 나머지 사람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서 누구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취운당 중수기에는 왕비의 오라버니가 '장유화상'이라고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왕비의 세력이 가야인의 정신적인 지배와 지속적인 교류가 이었음이 짐작된다.
 
아유타국

『삼국유사』에 기록된 허황옥의 고향인 아유타阿踰陀는 인도의 아요디아(Ayodhia)로 볼 수있다. 인도의 아요디아는 서기전 6세기 인도전국시대 때 맹주인 도시국가 코살라(Kosala)국의 수도다. 인도의 전통종교인 힌두교를 부흥시킨 라마(Ram)왕의 탄생지가 바로 아요디아이기 때문에 더욱 유명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아요디아는 불교의 교조인 싯다르타 왕자가 출가出家하여 처음 공부를 시작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 시내의 사원마다 대문 정면에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마주보는 물고기 두 마리는 김해 수로왕릉首露王陵 정문에 그려져 있는 쌍어문雙魚紋과 똑같은 모양이다.
 
쌍어문雙魚紋
 
가락국의 국장國章은 쌍어문雙魚紋이다. 그런데 우연인지 몰라도 그 쌍어문이 인도의 아유타국 고지故地인 아요디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의 가락국과 인도의 아요디아는 역사 기록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으로도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
가락국 최초의 왕이자 아유타국에서 시집온 허황옥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김수로왕의 무덤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분명히 가락국의 국장國章이자 신앙의 상징 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림이 허황옥왕비의 고향인 인도 아요디아 사원마다 그려져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쌍어문은 필시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시집온 인도공주가 한국땅에 소개한 신앙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쌍어문은 그래서 인도와 한국을 연결하는 끈이고, 한국에 자리 잡은 인도 신앙의 증거이다.
 
따라서 조상이 인도출신인 허황옥 공주가 한국땅 가락국에 와서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면서 쌍어 신앙이 한국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 쌍어신앙은 지금까지 한국 땅에 남아있다.
쌍어신앙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선비들이 사용하던 묵墨에도 그려지고, 여인네들의 노리개에도 달리게 되었다.
지금도 옛날 가락국(후에 伽倻)의 옛땅이었던 경상남도에 여러 불교사원에 쌍어문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하사, 계원암, 합천의 영암사에 쌍어문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있고, 새로 창건한 김해의 동림사, 김해 장유종선원에 새로운 쌍어문이 등장하였다.
 현대에 와서도 각종 민간의식 즉 고사 등에 북어로 불리는 어포가 개업식, 상량식, 개통식, 취항식, 차량 취득시 고사 등 안녕과 번창을 기원하는 주술의식에 제물로 사용되고 상점의 문틀위에 걸려있다.
 
이천년 전에 한 여인의 국제결혼의 결과는 이렇게 지금까지도 우리 문화속에 살아 숨쉬는 현실을 보여준다.
 
왜의 이동경로
 
『한서漢書』(1세기, 후한의 반고 찬) 지리지에는 낭랑 바다 가운데 왜인이 있는데, 그 위치는 장안의 북쪽에서 6십도 동쪽에 있어 연나라 방향에 있다. 장안에서 보아 하북성 방향에 있었던 걸로 추정.
 
『논형論衡』(1세기말, 왕충 지음)에는 “주나라초기周初(B.C. 2세기) 동쪽 끝의 해 돋는 곳의 오랑케인 왜인이 창초(남방산 향초)를 바쳤다.라고 하였으니 남중국에 처음 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해경』(3세기, 저자 미상)에 “개국蓋國은 거鉅에 있고, 대연大燕의 남쪽 왜의 북쪽에 있어 왜倭는 연에 속한다” 이는 왜가 산동성 부근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위지魏志』3세기후반 한전에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어서 동서는 바다로써 격하고 남쪽은 왜와 접하였다”.
 
『후한서後漢書』5세기 전반 한전에 “변진(가야연맹의 전신)은 진한의 남쪽에 있어 또 열두 나라인데, 그 남쪽 또한 왜와 더불어 접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니, 왜라고 불리던 종족이 나라를 세웠건 그렇지 않건 간에 진한의 남쪽에 집단적으로 살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송서宋書』5세기 후반 왜국전에는 “왜국은 고려(고구려)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으니 처음으로 ‘왜’가 일본열도에도 있음이 확인 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636-643 황룡사 구층탑조의 자장법사의 이야기로 “신라의 북쪽은 말갈과 이어지고, 남쪽은 왜인과 접해 있었다”고 하였으니, 분명 7세기초까지는 신라의 남쪽에 땅으로 이어져 왜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은 나라를 잃고 난 뒤의 가야족 집단을 가리킨다.
 
6세기후반부터 남한지역의 ‘왜’의 세력이 쇄퇴하면서 중심세력이 일본열도로 이주해 버렸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는 ‘왜’라고 하면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버렸지만, 가락국이 망한 6세기 중반까지의 ‘왜’는 가야족과 구별되지 않았다.
 
일본측 기록을 보면 게이따이왕 23년(529) 9월조에, "일본인과 가락국 사람 사이에 자주 아이가 생겨서 재판으로도 결판을 내기 어려웠다"는 기사가 있으니 일본인이 가락국에 많이 살고 있었음을 시사하여 주는 동시에, 서로 이 민족이라는 의식이 없었다는 반증이 된다.
 
임나가야任那加羅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계체繼體3년(AD509)조에 의하면 백제가 임나任那(가락국)의 상다리上嗲리. 하다리下嗲리. 파타婆陀. 모루牟婁의 4현(가락국의 동남 해안지대)을 백제에 할양할 수밖에 없었던 정도로 가락국이 쇠퇴하여서 명목만의 독립국가였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백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일본서기에서조차 4세기말에 고구려의 침략을 임나가라가 안라가야安羅伽倻(한국사서에선 伽耶. 加耶라 하고 광개토호태왕비문에선 일본사서와 마찬가지로 加羅라고 함)에 망명정부를 세운 뒤에는 임나가라(=종주국)였던 가락국의 도읍인 김해를 종주국의 뜻인 ‘임나’라고 부르지 않고 ‘금관가야金官加羅'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임나가라가 이와 같이 쇠퇴한 때에 신라에 대한 왜인 왜병의 침입이 일본서기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왜를 추격하여 마침내 임나가라를 항복시켰다는 광개토대왕능비의 영락10년(AD400)조의 기사 즉 “왕이 보병과 기병 합쳐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라고 명령하였다. 남거성부터 신라성까지 왜가 그 성중에 가득하였다. 고구려군이 이르자 왜적은 후퇴하였다.
...뒤에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가락국)에 이르러 왕성을 함락시키니 왕성은 곧 항복하였다.“로 미루어서, 신라에 침입한 왜는 임나가라 자체의 병력이었거나, 임나가라가 왜의 본거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왠야하면, 퇴각하는 왜를 추격한 것이니 왜가 공격의 대상이 틀림없는데, 「왜」라는 말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임나가라」가 주공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왜」= 임나가라(가락국)이 성립된다.
그리고 임나가라의 세력이 쇠퇴한 결과 왜의 신라 침입사건이 역사상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임나가라가 왜의 지원세력이라기 보다 왜의 본거지 내지 종주국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즉 임나가라가 왜와 同種이었다고 추정된다.
임나가라가 왜와 동종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史實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201년에 가락국은 신라에 강화를 신청하였고, 서기209년에는 포상8국浦上八國(『삼국사기』에는 골포骨浦(창원). 칠포漆捕(칠원). 고사포古史浦(고성)의 3국만 나타나고 『삼국유사』에는 보라保羅(고성의 보령향). 사물史勿(사천)의 2국만 나타남)이 연합하여 아라가야阿羅伽倻(함안소재)에 침입한 것을 신라의 구원군이 이를 격퇴한 뒤인 212년 3월에, 가야(아라가야)가 신라에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서 가야에 관한 기사가 자취를 감춘다.
그 후 약 284년이 지나 496년에 갑자기 가야(가락국)로부터 신라에 5척 길이의 꼬리가 달린 흰 꿩을 보내 왔다는 기사가 나타나고, 그 후 532년(법흥왕 19년)과 562년(진흥왕 23년)에 금관가야(가락국도읍)와 고령가야(대가야)가 각각 망하였으며, 광개토대왕능비 속에서 영락10년(400)에 고구려군이 신라를 구하고 왜를 추격하여 임나가라를 항복시킨 사실을 보면 신라와 가야의 여러 나라 사이에 중간의 300년 가까이 전쟁이 없었다면 이상한 일이다.
이 같은 의문은 신라본기에 35회에 걸쳐 나타나는 ‘왜병 또는 왜인’의 신라침입 사건의 주체가 가야족의 병력이었다고 가정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공백의 의문이 풀린다.
즉 가야지배층도 왜의 지배층과 동족이었고 그 일부가 일본열도에 건너가 일본의 지배층을 형성한 것이 왜국(일본)이다.
 
이와 같은 기록을 추정하면, 왜는 중국의 화남 화중의 연안지대에 분포하다. 해안을 따라 점차 북상하여 발해만에 도달한다. 진.한秦漢의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쫓기어 한반도로 유입하게 된다. 이들은 낙동강 유역에 도달하여 여러나라가 되고, 그 후신이 가락국(가야연맹)이 되었으며, 마침내 바다를 건너 대마도. 이끼壹崎. 구주 북부지방을 거쳐 야마도大和(奈良지방)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왜라고 하면 곧 일본인의 전신 즉 아이누족(스키타이계, 석昔씨 신라 지배층의 동계)을 제외한 일본열도 내의 원주민을 가리키는 것이 상식화 되어 있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고 5세기 초반까지는 왜의 주력이 남한의 가야족이었고 그 중심에는 허황옥으로 대표되는 여인이 있다.

 
『삼국사기』왜의 신라 침입년도
 BC 50 (박혁거세 8년)
 AD 14, 73, 121, 122, 208, 232, 233(3월, 6월), 249, 287, 289, 292, 294, 295, 346, 364, 393, 405, 407(3월, 6월), 415, 431, 440( ?, 6월), 444, 459, 462, 463, 476, 482, 486, 497, 500.
 
 
가야사 연표 [출처] 허황옥|작성자 압구정
(『삼국사기』,『삼국유사』,『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관련 기사에 의거)

42년 3월, 금관국 수로왕 즉위하여 가락국(금관국) 건국.(유사)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 (伊珍阿?王 일명 惱窒朱日)이 즉위하여 대가야국 건국.(승람)
43년 금관국 수로왕, 신답평(新畓平)에 도읍을 정함.(유사)
44년 금관국, 궁궐과 관사를 낙성함. 수로왕, 신궁으로 옮겨 정무를 봄. 탈해(탈해)가 나타나 왕위를 쟁탈하려 하자 수로가 싸워 계림(鷄林)으로 쫓아냄.(유사)
48년 아유타국(阿鍮陀國)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금관국에 오자 수로왕이 그녀와 혼인함.(유 사) 금관국, 9간(干)의 명칭을 고침.(유사)
77년 가야, 신라의 아찬(阿?) 길문(吉門)의 공격을 받아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웠으나 1천여명이 사로잡힘.(사기)
87년 7월,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백제와 가야의 침공에 대비하여 가소(加召), 마두(馬頭)의 두 성을 쌓음.(사기)
94년 2월, 가야, 신라의 마두성을 에워쌌으나 아찬 길원(吉元)의 공격을 받아 물러남.(사기)
96년 9월, 가야, 신라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여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죽였으나 신라 파사왕이 보낸 5천 병력과 싸워 패배함.(사기)
97년 정월, 가야, 신라 파사왕이 군사를 일으켜 치려 하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함.(사기)
102년 8월, 금관국 수로왕,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영역 싸움을 하자 신라의 요청을 받아 해결에 참여하여 문제된 땅을 음즙벌국의 것으로 판정함. 이때 신라 파사왕이 수로왕을 대접. 5부에서는 이찬(伊?)을 파견하였으나 오직 한기부(漢 祇部)만 직위가 낮은 자를 보내자 화가 난 수로왕이 한기부주(漢祇部主) 보제(保齊) 를 죽이고 귀국함.(사기)
106년 8월, 신라 파사왕이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가야를 정벌하게 함.(사기)
115년 2월, 가야, 신라의 남쪽 변경을 공격함.(사기) 7월, 가야, 신라 지마왕(祗摩王)이 친히 병력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너 공격해 오자 그를 물리침.(사기)
116년 8월, 가야, 정병 1만으로 구성된 신라의 공격을 받자 성을 굳게 지킴. 때마침 비가 오 래도록 내려 신라병이 물러남.(사기)
189년 3월, 금관국 허황후, 157세로 사망.(유사)
199년 3월, 금관국 수로왕, 158세로 사망하고 세조(世祖) 거등왕(居登王)이 즉위.(유사)
201년 2월, 가야, 신라에 화친을 요청함.(사기)
209년 7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공모하여 가라(加羅)를 침범하자 가라는 왕자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함. 신라 나해왕(奈解王)이 태자 우로(太子 于老)와 이벌찬(伊伐 ?) 이음(利音)을 보내어 가라를 구원하여 8국을 항복시킴.(사기)
*유사에는 212년 포상8국이 아라(阿羅)를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212년 골포(骨浦), 칠포(漆浦), 고사포(古史浦)등 3국인이 신라의 갈화성(竭火城)을 침공하였 으나 패퇴함.(사기)
*유사에는 215년의 일로 되어 있다. 3월, 가야, 신라에 왕자를 보내어 볼모로 삼게 함.(사기)
253년 금관국 거등왕이 사망하고, 마품왕(麻品王) 즉위.(유사)
291년 금관국 마품왕이 사망하고, 거질미왕(居叱彌王) 즉위.(유사)
346년 금관국 거질미왕이 사망하고, 이시품왕(伊尸品王) 즉위.(유사)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보낸 병력이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자 성이 항복. 안라인(安羅人)으로 구성된 수병(수병)은 그에 저항.(광개토대왕릉비)
407년 금관국 이시품왕이 사망하고, 좌지왕(坐知王)이 즉위.(유사)
421년 금관국 좌지왕이 사망하고, 취희왕(吹希王)이 즉위.(유사)
451년 금관국 취희왕이 사망하고, 질지왕(?知王)이 즉위.(유사)
452년 금관국,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후사(王后寺)를 세움.(유사)
479년 가락국왕 하지(荷知)가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 王)에 제수됨.(남제서)
481년 3월, 가야,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의 미질부성(彌秩夫城)등을 침공하자 백제와 연합하 여 신라를 구원함.(사기)
492년 금관국 질지왕이 사망하고 겸지왕(鉗知王)이 즉위.(유사)
496년 2월, 가야, 꼬리가 다섯자 되는 백치(白雉)를 신라에 보냄.(사기)
521년 금관국 겸지와이 사망하고, 구형왕(仇衡王)이 즉위.(유사)
522년 3월, 대가야의 이뇌왕(異腦王)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니 신라에서는 이 찬 비조부(比助夫) 딸을 보냄. 그들 사이에 월광태자(月光太子)가 탄생.(사기, 승람)
524년 9월 가야국왕, 신라 법흥왕이 남쪽 국경으로 순행하여 땅을 넓혀 오자 가서 만남.(사 기)
532년 금관국왕 김구해(金仇亥), 왕비와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 등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멸망. 신라는 그들을 진골로 편입시키고 본국을 식읍 (食邑)으로 삼게 함.(사기, 유사)
*『일본서기(일본서기)』에는 구체적인 연월일이 명시되지 않은 채 남가라의 멸망 기사가 여러 곳에 보인다.
551년 3월,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이 낭성(娘城)에 행차하였을 때 국원(國原)에 있던 대가야 출신의 악사 우륵(樂師 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이文)을 불러 음악을 연주케 함.(사 기)
*『일본서기』에는 이 해에 백제의 주도 아래 신라와 임나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것으로 되어있다.
552년 신라의 진흥왕이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등 3인으로 하여금 우륵에게 음 악을 배우게 함.(사기)
554년 가량(加良), 백제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다가 대패 당함.(사기)
*『일본서기』에도 비슷한 내용의 자세한 기사가 실려 있다.
562년 가야가 반란하므로, 이사부(異斯夫)가 거느린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함. 그곳에 대가야군(大加耶郡)이 두어짐.(사기)
*『일본서기』에는 같은 해 6월에 임나10국이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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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누짱 20-08-29 12:09
   
수고스런 글에 한마디하려니 미안한 맘이 듭니다.
다른건 아니구요. 이 정도 길이의 글이라면 4편정도로 나누어서 연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글이 너무 길면 읽다가 본질을 놓치게되서요^^
     
밑져야본전 20-08-29 21:15
   
좋은 팁 감사합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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