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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24 19:40
[북한] (일제).독립운동이여.!! 07편
 글쓴이 : 돌통
조회 : 657  

조선인 중심부대 항일연군 2군 3사의 탄생

 

 

중공당의 신노선과 방침에 따라 미혼진 회의에서는 제2군의 재편성 문제를 결정하였는데, 모두 3개의 사단과 1개 독립여단으로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2군 군장에는 왕더타이, 정치위원에 웨이쩡민, 정치부주임에 리쉐쭝(李學忠), 참모장에 류한싱(劉漢興)을 각각 임명했다. 제1사는 연길1단과 일부 반일 산림대를 토대로 편성하였는데 사장에는 안봉학, 정치위원에는 저우슈동, 정치부주임에는 루보치(呂伯岐), 참모장에는 박득범(朴得範)이 임명되었다. 1단 단장에는 최현, 정치위원에 임수산(林水山) 등 조선인이 임명되었다. 2사는 왕청3단과 훈춘4단, 그리고 구국군 시쭝헹(史忠恒) 부대를 바탕으로 조직되었는데, 사장에는 시쭝헹, 정치위원에 왕룬청, 참모장에 첸한쟝(陳翰章)이 각각 임명되었다.

 

3사 사장에는 김일성이, 정치위원에는 1935년 3월 다홍왜 회의에서 민생단 문제를 두고 김일성과 격하게 충돌했던 차오야판(曹亞範)이 각각 임명되었다.(주11) 사실상 ‘조선인민혁명군’ 성격을 띠고 활동할 2군 3사 정치위원에 차오야판을 임명한 것은 여전히 중국인들이 김일성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워낙 조선인 대원들의 감정이 나빠서 차오야판은 실제로 3사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지 못했다고 한다. 차오야판이 후에 일본군 토벌대에 살해되었을 때 조선인 대원들이 ‘잘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자 김일성이 동지의 죽음에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고 할 정도로, 조선인들의 민생단에 대한 상처는 깊었다.

 

 

  ▲ 왕청현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 옛터(사진=길림신문)

 

 

동북항일연군 제2군은 애초 2개 사단으로 편성해 민족별 분리를 추진하려 했으나 그와 달리 3개 사단으로 편성하였고, 3사에 조중 국경지역으로 진출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고 조선 국내로 진출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런데 이 3사 사장은 김일성이었지만 4개단 중 3개 단장이 모두 중국인이었다. 7단 단장 쑨쟝샹(孫長祥)은 김일환이 1934년 가을 처창즈에서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될 때 무장한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석방을 요구했던 구국군 지휘관이었고, 9단장 마더취엔(馬德全)은 김일성과 김일의 초기 활동 때부터 동지였던 김산호가 확보한 반일부대 지휘관으로 1935년 5월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정식으로 성립할 때 편입되어 유격대장이 된 인물이었으며, 10단장 쑤쿠이우(書魁武)는 김일성의 동생 김철주가 파견되어 사업을 한 적이 있는 산림대 지휘관 출신이었다. 8단장 전영림(錢永林)만 조선인이었다.(주12) 이처럼 김일성은 중국인, 그 중에서도 구국군이나 산림대 출신의 부대들을 거느리고 조중 합작사업을 펴는 게 훨씬 편했을 정도로 조선인과 중국인 공산주의자 사이에 벽이 있었다.  

 

 

  ▲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마안사. 민생단 혐의자들이 갇혀 있던 곳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2군 3사는 편성은 되었지만 실제 병력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손발을 맞추며 활동했던 왕청3단과 훈춘4단은 2군 2사에 편입되어 저우바오중의 5군과 함께 길동지역에서 공동 작전을 펴고 있었고, 3단의 일부는 최용건이 활동하고 있던 7군 요하지역으로, 4단의 일부는 김책이 활동하고 있던 3군의 주하지역으로 파견되었다.(주13) 미혼진 회의가 끝난 뒤 김일성은 오백룡, 김산호, 이동백 등 20여명에 불과한 병력을 이끌고 무송현 마안산으로 향했다. 김일성은 마안산에서 화룡2단의 병력을 인수받을 예정이었으나 실제로 가보니 2단장 장첸위(張泉玉)와 정치위원 차오야판이 부대를 이끌고 교하로 원정을 떠나고 없었다. 

 

김일성은 그곳 감옥에 갇혀 있던 100여명의 민생단 혐의자들의 문서보따리를 불사르고 전투가 가능한 사람들을 모두 대원으로 받아들여 부대를 편성했다. 이때 편입한 이들로 3사의 주력인 7단과 8단이 조직됨으로써 ‘김일성부대의 신화’를 창조할 주력부대가 마련되었다. 이들은 장백현과 국내에 공작원으로 파견되어 조국광복회 결성에 나섰으며, 1937년 6월 초에는 국내진공작전인 보천보 전투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김일성은 평생 잘한 두 가지 결단이 국민부계통의 화성의숙을 그만두고 김림의 육문중학에 입학한 것과 마안산에서 민생단 보따리를 불태운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만큼 민생단 혐의자들을 풀어주고 자신의 부대에 받아들이는 일은 김일성에게도 큰 모험이었고 결단이 필요했던 일이었다. 

 

 

 08편에서 계속~~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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