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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6-26 00:10
[한국사] 예왕지인’ 한반도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장
 글쓴이 : 예왕지인
조회 : 1,916  

우리나라 최초의 국새는 ‘穢王之印’(예왕지인)이다. 국새(國璽)란 국사에 사용되는 관인을 말한다. 임금이나 임금이 지정하는 관원이 나라의 중요한 문서에 국가의 표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부여의 예왕(穢王)이 국새를 사용한 것이 시초이다. <증보문헌비고 예고새인조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부인(天符印)이 효시하는 주장도 있다.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적 문서에 사용되는 국새는 고려·조선시대에는 국인, 새보·대보 라 하여 왕의 인장이 국새로 간주됐다. 이것은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교린의 외교문서와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문서에 사용되었고, 왕위 계승시에는 전국의 징표로 전수되었으며, 왕의 각종 행차시 그 위의를 과시하기 위해 행렬의 앞에서 봉송되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국새를 사용한다. 가로, 세로, 높이 9.9cm이며, 손잡이는 봉황모양, 글씨는 훈민정음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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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왕지인 20-06-26 00:14
   
예왕지인(예족, 부여 황제 및 대단군의 옥새)는 삼국사기 남해차차웅편에 나옵니다.
석탈해 도래 후, 북명에서 예왕지인을 발견하여 남해차차웅에게 바쳤답니다.
     
윈도우폰 20-06-26 15:11
   
예왕이 부여라는 기록은 없고...지리적으로 보면 동예일 가능성이 더 크지요...부여가 고구려와 같은 맥족 국가인지 맥족과 친연성이 높은 예족국가인지...아니면 예와 맥이 하나로 예맥족인지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제 생각은 동예 쪽 인장일거고 동예가 동쪽으로 이동 전 예가 어딘인지도 불명확...하지만 군장국가 수준인 남려의 예는 아닐 듯...그런 점에서 예족 계열국가가 어디인지를 먼저 밝힐 수 있어야 할 듯
          
지누짱 20-06-26 15:28
   
부여국(扶餘國)의 인문(印文)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하다.
 
출전『增補文獻備考』 卷81 禮考28 璽印
夫餘印文曰 濊王之印

원글저자 말씀이 틀리지 않슴니다
               
지누짱 20-06-26 15:30
   
http://contents.nahf.or.kr/
동북아역사넷
구름위하늘 20-06-26 10:51
   
오~~~ 부여 시대라니 대단한 유물이네요.
아마르칸 20-06-26 11:00
   
오호
지누짱 20-06-26 15:28
   
부여국(扶餘國)의 인문(印文)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하다.
 
출전『增補文獻備考』 卷81 禮考28 璽印
夫餘印文曰 濊王之印

출처
http://contents.nahf.or.kr/
동북아역사넷
감방친구 20-06-26 15:29
   
     
지누짱 20-06-26 15:45
   
감방친구님이 거론한  부조예군이란 인장에 대한 보충.

출처. 한국고대사신론(윤내현), 제7장 한사군의 낙랑군과 평양의 낙랑, 낙랑유물의 재검토

일곱째로, “夫租薉君(부조예군)”, “夫租長(부조장)”등의 銀印(은인)이 있다. 이 은인은 1958년 평양의 정백동 土壙墓(토광묘)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묘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 또는 기원전 1세기 경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한의 낙랑군에는 夫租縣(부조현)이 있었다. 그러므로 평양에서 “부조예군”,“부조장”등의 은인이 출토되었다고 하는것은 그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 이었음을 알게하는 증거라고 인식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이미 김정학에 의해서 지적되었듯이 “부조예군”으; 은인은 낙랑군 설치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사군이 설치된 서한시대 이후의 관직을 보면 郡(군)에는 太守(태수), 大尹(대윤), 丞(승), 長史(장사)가 있었고 縣(현)에는 令(영)이나 長(장), 丞(승),尉(위) 등이 있었을뿐 君(군)이라는 관직은 없었다

 

그러나 漢書(한서) 武帝記(무제기)에 “元朔(원삭) 원년 (기원전 128) 가을에 東夷(동이)의 薉君(예군)인 南閭(남려)등 28만 명이 항복하니 그곳을 蒼海郡(창해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東夷(동이)의 薉族(예족)이 君(군)이라는 관직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부조현은 낙랑군에 속해있었는데 낙랑군 지역은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위만조선에 속해있었다. 따라서 부조예군은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사용하던 관직명임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조예군의 묘에서는 전형적인 고대 한국 청동기인 細形銅劍 (세형동검)등도 출토되어 그 주인이 중국계가 아님을 알게하여 주었다. 부조예군의 은인은 漢(한)으로부터 주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필자는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만들어 졌을 가능성을 인정하고있다. 고조선은 西周(서주)시대이래 중국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었으므로 漢字(한자)는 물론 중국의 문물제도가 상당히 수입되어 있었을 것이며 위만조선에 이르면 그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중국 망명객에 의하여 형성되어 있었을 것인데 그들은 서한의 문물제도에 매우 친숙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고찰로서 부조예군 은인이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인 되었지만 그 출토지점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부조였고 후에는 낙랑군의 부조현이었지 않겠느냐는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나 다음에 확인되겠지만 한사군의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灤河(난하)의 동부 연안에 있었다. 따라서 낙랑군의 부조현이나 고조선, 위만조선 시기의 부조도 그 지역에 있었다는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조예군 은인은 위만조선이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후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하던 시기 또는 서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던 시기에 당시의 지배계층이던 부조예군이 이에 항거하면서 지금의 평양지역으로 이주해 왔을것임을 알게 하여준다. 지금의 평양은 원래 마한지역이었는데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에 있었던 낙랑의 토착민들이 외세에 항거하다가 평양지역으로 이주해와 그 지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함으로써 평양지역도 낙랑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필자는 믿고있다.
이제 부조장 이라는 은인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한시대의 현에는 장이라는 관직이 있었다 따라서 이 은인은 낙랑군 부조현의 장이 소유했던 것이라고 볼 수있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점은 이 부조장 은인은 문자의 형태만 알아볼수 있도록 부식 시킨 것으로 인장으로서는 사용할수 없는 형식적인 물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묘의 주인이 부조현의 장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망시에는 자신이 사용했던 인장을 소지하고 있지 못했음을 알수있다. 따라서 필자는 부조장묘의 주인도 먼곳으로 부터의 이주민 이었을 것으로 믿고있다. 이 부조장묘는 앞의 부조예군묘와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친연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믿고있다. 그런데 필자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싶다/ 즉 부조장은 부조예군과 친연관계에 있었거나 그 후손 이었는데 부조예군이 외세에 항거하다 지금의 평양으로 이주한후 그 지역에 남아 낙랑군 부조현의 장이 되었다가 후에 그도 부조예군이 거주하고 있던 평양으로 이주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종합해 볼때 해방 이후에 출토된 부조예군, 부조장의 은인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될수 없고 해방전 일본인학자들에 의하여 조사 발굴된 고분.토성등 소위 평양의 낙랑유적은 그 조성연대가 한사군이 설치 되었던 서한시대가 아니라 그보다 늦은 동한시대 이후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 하였다

 

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거운데는 서한시대나 그 이전의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은 늦은 시기에 제조된 유물과 함께 출토됨으로써 후대에 뭍혀진 것임을 알게하여 주었다 소위 낙랑유적의 성격을 밝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출토된 유물의 제조연대가 아니라 유적의 조성연대인 것이다
          
지누짱 20-06-26 15:56
   
참고로 윤내현교수님의 한국고대사신론은 역사학계에 제출된 정통학술논문을 모은 논문집입니다.
고조선과 관련된 이슈들에 대해 윤교수님의 정확한 고증과 나름의 가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감방친구 20-06-26 16:16
   
귀중한 정보 공유 고맙습니다
oksoc 20-06-2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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