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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6-06 18:51
[북한] 북한은 광복을 '쟁취'했다는 이유는.? 04편.
 글쓴이 : 돌통
조회 : 701  

***   전민항쟁 준비단계

 

 

**   조국광복회

 

 

주보중..“저우바오중문선”에 따르면 “(조선인민혁명군은)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의 민족혁명군중활동의 기초상에서 창건되고 발전장성되었다.

 

기타 각군의 지도간부와 전사들 중에는 상당히 많은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의 성원이 들어있었다. 항일유격전쟁 중에서 중조,인민은 공동의 사업을 위하여 붉은 피를 같이 흘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44쪽.)

 

조국광복회는 전민항쟁을 위해 꾸려진 독립운동조직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6년 2월 27일 남호두에서 열린 군정간부회의에서 조국광복회 건설을 결정했다.

 

조선인민혁명군과의 긴밀한 연계 하에, 일제에 드러나지 않게 비공개독립운동조직을 꾸리기로 한 것이다.

 

조국광복회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을 기본으로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민족주의자, 애국적인 종교인, 양심적인 민족자본가 등도 포괄하기로 했다.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했던 조선인민혁명군이 종교인, 자본가들까지 독립운동의 동력으로 삼은 것은 상당히 혁신적인 입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36년 5월 5일 조국광복회의 창립선언과 10대강령이 발표되었고 기관지 명칭은 ‘3·1월간’으로 확정되었다.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준 3·1운동을 계승하겠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조국광복회는

 

㉠우리민족을 총동원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독립적인 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중국 땅에 사는 우리민족의 진정한 자치를 실현할 것,

 

㉢조선독립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

 

㉣일본과 매국적 친일분자의 모든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와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전취하고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양반, 상민 기타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 등 차별없는 인륜적 평등을 실현하고 여자의 인격을 존중할 것,

 

㉦의무무상교육을 실시할 것,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재해보험법을 실시할 것,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국가·민족과 친선을 유지할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10대 강령을 발표했다.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220~221쪽.)

 

조국광복회는 장백지구(백두산지구)를 중심으로 서서히 확대되어갔다.

 

조국광복회가 결성된 지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장백현의 조직은 현위원회, 그 산하에 상강구, 하강구의 각 구위원회 및 각 방면의 구회, 지회, 분회, 반 등의 정연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자료에 근거하면  조국광복회 장백현 위원회는 구회 3, 지회 11, 분조 41, 반 10개를 포괄하고 있었으며 지방대중단체인 농민협회, 반일부녀회, 반일청년회 등과 긴밀한 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309쪽.)

 

조국광복회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사건은 혜산사건이다.

 

혜산사건은 일제가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조국광복회 회원 총 739명, 그 중 188명을 기소한 사건이었다.


1937년 10월 혜산 사건 1차 검거 당시 체포된 박달(앞줄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찬 사람.)


한국 역사학계는 혜산사건을 일제 강점기 항일조직사건 중 국내외조직이 대규모로 연결된 특별한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혜산사건”)

 

일제가 1937년 11월 중순까지 조선 내에서 체포한 인원이 162명에 달했을 정도로 조국광복회 국내조직들은 결성 1년 반 만에 국내에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어 있었다.


혜산사건 수사에 대한 공로로, 함경남도 경찰부의 최령(崔鈴 = 崔燕), 시원감일(市原感一), 금야좌차랑(今野佐次郞) 3인이 경찰공로기장(警察功勞記章)을 수여받고, 급천정인(及川正人), 촌전금오(村田金吾) 등 2인이 감장(感狀)을 수여받은 것이 1940년 2월 11일자 매일신보에 보도.

 

 

조선 양강도 중부지역 갑산군에 있었던 조국광복회 갑산공작위원회는 조직의 은폐와 확대를 위해 ‘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여 확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314쪽.)


국내에서는 반일회, 반일소년회, 반일부녀회 등 다양한 명칭을 띠고 조직이 확대되어 평양, 서울, 부산까지 각계각층이 묶여 있었다.

 

**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이 1939년 9월 1일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이미 수년간 중국대륙 침략전쟁에서 침체에 빠져 있었다.

 

일제는 만주지역에서 10년 가까이 존속하고 있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대륙으로의 군수물자 보급의 장애물로 여겼다.

 

따라서 1939년 가을부터 조선인민혁명군 토벌작전에, 일본정규군을 포함한 20만 대군을 동원해 초토화 작전을 벌이게 된다.

 

일본군의 탄압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은 오히려 일제가 패배하고 조국광복이 머지 않았음을 예견했다고 한다.

 

일본이 중국대륙을 침략하면서 최정예부대의 절반을 잃어버린 상황, 중국 대륙 전역에서 전쟁을 수행하다보니 군수물자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점 등을 근거로 중국에서의 일제의 패망을 예상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로 침략의 예봉을 돌린 일본이 아시아 전체의 저항에 직면하고 소련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일본의 패망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국내에서도 여운형 선생의 건국동맹이 1944년 발족해 이미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을 미루어볼 때 독립운동가, 일부 지식인들은 어느 정도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40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은 최후대결전과 전민항쟁을 준비하자는 측면에서 소부대활동으로 행동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이후 그들은 역량 보존을 위해 대규모 전투를 피하고 조국광복회 확대를 위한 소부대활동을 진행했다.

 

소부대들은 적정 정찰 등 최후대결전 예비활동을 진행했으며 철도, 간선도로 등 일제 수송로를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국내에서도 전민항쟁을 준비하는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이재화의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에 따르면 1942년 당시 국내에 총 183개의 정치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을 정도로, 반일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28쪽.)

 

평양에는 무장항쟁을 목표로 하는 260여명 규모의 조국해방단이 꾸려졌다.

 

경상북도에서는 청장년 27명이 ‘결심대’를 꾸려 죽창, 낫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산중에 은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34쪽.)

 

1943년 상반기에는 총 30만명의 강제징용자 중에 11만명이 강제노동을 그만두고 탈주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고등의사월보, 1944년 51호, 67쪽. 300,654명 중 109,185명이 탈주해 총 36%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 덕유산, 백운산 할 것 없이 깊은 산중에는 가는 곳마다 학병과 징용을 피해 입산해 있는 청년들이 널려 있었고 이들 중에는 무장유격대오를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할 준비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34쪽.)

 

한편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소련 극동지방으로 이동해 1942년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부대들과 함께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을 꾸리게 된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소련 적군 제88독립저격여단(88 Otdel’naya Strel’kovaya Brigada)”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사전에서는 “명칭은 88독립보병여단(88여단)으로 4개의 대대와 독립통신대대, 독립보병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제1대대는 항일연군 제1로군의 조선인 대원들을 기본으로 구성하였고, 대대장은 김일성이었으며, 안길이 정치담당 부대대장을 맡았다.

 

최용건여단의 부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소련으로 들어온 동북항일연군은 대략 590명 정도였고, 이들 중 최소 190여 명은 조선인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에 소속된 조선인민혁명군은 최후 전민항쟁을 앞두고 하바롭스크 근처 북야영에서 대규모 현대전의 수행에 필요한 낙하산훈련, 공병훈련, 무전훈련 등을 진행했다.

 

김참봉, 석산, 김병갑, 지병학, 오백룡,(이사람은, 태영호 아내와 연관 있다는 설이 있다.) 백학림 등은 오케얀스카야 근처의 국영농장에서 소련군의 정찰부대 성원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김병균, “쉽게 보는 북한역사, 그리고 통일항일무장투쟁사편”,해드림,2013, 266~274쪽.)


 

 

이상..                  0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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