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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4-28 00:51
[북한] (하얼빈 특종) 조선족 이민 여사의 증언..06편.
 글쓴이 : 돌통
조회 : 1,846  

05편에 이어서 ~~

 

 

金日成(김일성)이 결혼을 돕다

 

여기선 질문을 적색으로 작석하고   답변을 그냥 검정색으로 하겠습니다.




―해방 후 당장 무슨 일을 했습니까.



『소련 시절 나의 계급은 그리 높지 못했습니다. 88여단 3영 6연의 지도원이었는데 계급은 소위였지요. 趙尙志(조상지) 파로 몰려 강등된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나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인지 日帝(일제)를 물리치고 중국에 돌아온 뒤부터 나의 官運(관운)은 잘 풀려나갔습니다. 縣委(현위) 서기직을 맡아 3개 현을 관장했습니다. 1945년 東北民主聯軍(동북민주연군) 흑룡강 1旅(여)의 正尉(정위)로 임명되었는데 1여는 5천명의 정규군으로 전투력이 대단했지요.

 

1946년 흑룡강 남부지역 龍南(용남) 지역위원회 부서기 겸 軍分區(군분구) 정치위원으로 승진되었습니다. 1947년 우리 부대는 중국 본토로 國府軍(국부군)과의 전쟁 일선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흑룡강 省委(성위)는 나를 정치공작과 사상공작에 능하다고 평가하여 省委(성위) 비서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뒤 1952년 흑룡강 省政府(성정부) 副省長(부성장), 그 다음 해 1953년 毛澤東(모택동) 주석 임명으로 흑룡강 성정부 主席(주석)을 맡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어떻게 그토록 빨리 승진할 수 있었는지 무슨 배경이 있는지 궁금해 하지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부지런한 배움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 전쟁 때, 평화 때나 결코 배움을 게을리한 적이 없습니다. 배움은 내 평생 할 일이지요. 지식은 끝이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배움이 제일입니다. 중국 속담, 「배우지 않으면 재능이 없다」, 「배움의 바다에는 代案(대안)이 없고 종점도 없다」를 나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도 나는 書冊(서책)을 열독하며 배움을 쉬지 않습니다』



―문화혁명은 중국의 큰 재난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당신은 문화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文革(문혁) 때 간첩 누명


『문화혁명은 나에게도 큰 재난이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나는 문화혁명 때 三反(삼반) 분자, 走資派(주자파), 소련 간첩, 조선 간첩 등 여러 가지 누명을 쓰고 크게 당했습니다.

 

억울함도 겪었고 모진 매도 맞았지만 혁명과 인민에 대한 신념과 믿음은 한시도 동요한 적이 없습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나는 10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아내도 5년간 감옥에 들어가야 했지요.

 

나는 감옥에 가서도 배움을 계속했습니다. 주로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문화혁명 前(앞) 중국과 일본은 국제적 지위나 발전 수준이 엇비슷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화혁명 때문에 중국은 20년 후퇴했고 일본은 반대로 고속으로 발전했으므로 오늘은 큰 차이가 났습니다.



문화혁명이 다 지난 1976년 나는 감옥에서 나와 하얼빈市(시) 베아링 공장에 가서 再(다시)교육을 받고 나서 省 건설위원회 주임을 맡았습니다. 나는 일생 동안 명예와 이익을 따진 적이 없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인민을 위해 더욱 많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려운 시련을 겪으면서 굳은 의지를 키울 수 있지요. 이 시기 나는 두 가지 큰일을 해놓았습니다. 하나는 하얼빈 공장을 건설한 것이고 또 하나는 흑룡강성 화학섬유공장을 세운 것입니다.

 

1977년 흑룡강성 혁명위원회 부주임, 1978년 鄧小平(등소평) 동지의 임명으로 다시 省長職(성장직)에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흑룡강성의 最長壽(최장수) 省長(성장)인 셈이지요』




金日成,(김일성) 내게 언제나 뜨거운 소련식 포옹


―金日成(김일성) 부자와의 친분에 대하여 좀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金日成(김일성)을 처음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그 사람에 대하여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사실은 金日成(김일성)을 만나기 전부터 그가 조선 인민혁명군의 영도자라는 말을 들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金日成(김일성)을 만난 것은 소련에서였지요.

 

나는 88여단 黨委(당위원회)비서요, 金日成(김일성)은 1營(영) 영장이었습니다. 金日成(김일성)의 1營(영)은 전투력이 강한 잘 훈련된 부대로 이름이 나 있었지요.

 

그런데 그 부대에 마땅한 정치 교육자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날더러 정치 훈련을 지도해달라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나는 黨委(당위원회)의 허락을 받고 1營(영)에 가서 정치 교원이 되면서 金日成(김일성)과 朝夕(조석)으로 만났습니다.

 

金日成(김일성)은 내가 만든 敎案(교안)을 언제나 꼼꼼히 검사했지요. 그만한 정치 수준을 가졌다고 봅니다. 나를 만나면 언제나 소련식으로 뜨겁게 포옹하곤 했어요. 우리 두 사람의 友情(우정)은 돈독해졌습니다.


우리의 돈독한 우정에 관한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지요. 한번은 金日成(김일성) 주석이 소련을 방문했다가 牧丹江(목단강)을 지나 귀국한다고 하기에 나와 省委(성 위원회) 서기가 목단강 역에 마중 나갔습니다.

 

金日成(김일성)은 우리와 만났을 때 나보다 서열이 위인 省委(성위원회) 서기를 제쳐놓고 나에게 먼저 달려와 뜨거운 포옹을 했지요. 또 한번은 내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얘깁니다. 마침 金日成(김일성)은 중국을 방문중이었어요.

 

周恩來(저우언라이) 수상이 金(김)을 안내하여 중국의 여러 곳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대련에 왔을 때 갑자기 金日成(김일성)은 周恩來(저우언라이)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周恩來(저우언라이)가 그 연유를 묻자 金(김)은 「지금 陳雷(천레이)가 조선에 가 있는데 빨리 귀국하여 그가 돌아가기 전에 만나봐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후 나와 金(김)의 친분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나에게 金日成(김일성)은 언제나 친한 戰友(전우)였습니다. 金日成(김일성) 생전에 나는 두 번 조선에 가서 만나 보았습니다. 한 번은 대련에서 돌아온 그때였고 다른 한 번은 1992년 4월 그의 80회 생일에 특별초청을 받고 갔었습니다.

 

1994년 7월 그의 장례식에는 물론 金正日(김정일)의 초청으로 가서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에서 다른 분들은 모두 머리만 숙이고 目禮(목례)를 했지만 나는 엎드려서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金日成(김일성)과 나는 전쟁을 통하여 혁명적 義氣(의기)가 투합된 그야말로 知己(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생 동한 知己(지기)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의 逝去(서거)를 진실로 슬퍼했습니다. 중국과 조선, 두 민족이 역사적 공동 운명에 처해 있을 때 우리는 단결하여 日帝(일제)와 싸웠으며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당신과 金正日(김정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金日成(김일성) 주석 장례식에 갔을 때 金正日(김정일)과 단독 접견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0주년을 맞아 경축행사에 갔을 때는 金正日(김정일)과 단독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金正日(김정일)은 인민위원회 상무부위원장 양형섭을 대신 내게 보냈지요. 매우 섭섭했습니다. 金正日(김정일)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빨리 소련을 답습하는 敎條主義(교조주의)를 버리고 사상을 해방하여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고 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권고할 생각이었지요』


북한의 어려움은 영도자의 과오


―金日成(김일성) 주석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 나라의 수령으로 볼 때 金日成(김일성)은 합격입니다. 정치, 외교 면에서 모두 조선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가 추진한 천리마운동, 청산리 경험 보급 등은 아주 찬양받을 만한 정책이었지요.

 

구태여 부족한 점을 말하라면 후계자 선택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꼭 아들이 계승하면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문제는 계승자가 그만한 능력이 있는가, 전임자의 뜻을 이어 받아 나라를 잘 다스리고 인민들의 요구를 보장할 수 있는가이지요.

근간에 조선의 식량 사정이 어려운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水災(수재)와 旱災(한재) 등 자연 재해로 말미암은 일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사업의 중점을 마땅히 자연 재해를 다스리는 데 두고 이를 해결하기에 전력을 다 해야겠지요.

 

그런데 조선에서 사정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라가 그 정도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결코 인민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영도자들의 과오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중국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毛澤東(모택동) 때도 세 끼 식사는 크게 문제가 안 되었지요. 鄧小平(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 이후에는 더욱 큰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흑룡강성만 하더라도 곡식이 남아돌아 이제는 貯藏(저장)이 문제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지요. 결국 소련 모델을 고집하여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소련은 이미 해체되지 않았습니까』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어떻게 보십니까.



『南(남)이 北(북)을 도와주는 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그 점은 찬성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햇볕정책이라고 하면 어딘가 타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도움을 받는 쪽의 자존심을 자극하지 않을까요?

 

진정으로 도와주려면 어떤 美名(미명)도 필요 없겠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北(북)에 대한 원조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타당성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南(남)이 햇볕이고 北(북)은 그 햇볕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북한 통일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민족이 2차 대전 이후 분단되어 이렇게 오랫동안 敵對視(적대시)하고 갈라져 있는 것은 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남북한의 통일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통일을 하는가? 두 가지 방법밖에 없지요.

 

평화적 통일과 무력 통일. 우리는 지금까지 무력통일을 반대해 왔습니다. 반드시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야 합니다. 남북한 간에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갈등은 줄어들 것이며 남북은 서로 접근할 것입니다.

 

남북이 모두 통일할 의사를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내가 보기에 빠른 시일 안에 정치적 합의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긴 시간이 필요해요. 너무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조선의 남북통일 문제는 미국정책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사실을 크게 문제삼고 있지요. 내가 보기에도 미군의 주둔은 남한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압력에 맞서서 북한은 강경하게 버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强硬 一邊倒(강경 일변도)로 나가면 결국 북한은 고립될 수밖에 없겠지요. 남한도 한 민족이 장기적으로 외국의 指示(지시)와 使嗾(사주)를 받는다는 것은 어쨌든 불행한 비극입니다.

 

 

이상..     07편에서 계속~~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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