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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21 05:20
[북한] 사진 한장으로 계기가 된 4.19혁명.이승만의 몰락..
 글쓴이 : 돌통
조회 : 734  

진보당 창당과 조봉암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 무소속 후보가 216만여 표를 얻은 것은 놀라운 결과였다. 게다가 부통령에 민주당 장면 후보가 당선된 것도 자유당으로서는 무척 불안한 일이었다. 이승만은 팔순을 넘긴 고령으로, 갑자기 서거하거나 건강상 업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다면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국회의원 하나 제대로 없는, 아직 창당도 하지 않은 혁신계의 조봉암 후보가 국민들로부터 예상 외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자유당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가운데 1956년 11월 10일 조봉암을 비롯한 혁신계가 '진보당'을 창당했다.

그들은 창당대회에서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채택하고, 위원장에 조봉암, 간사장에 윤길중을 선출했다. 진보당의 1차 목표는 1958년 5월에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20석 이상 확보에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1958년 1월 13일, 이승만은 경찰을 동원해 진보당 간부 전원을 체포 수감했다. 죄명은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58년 7월 2일 조봉암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2심에서는 결정적 증거인 이중간첩 양명산이 육군 특무대의 회유와 협박 때문이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양명산과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59년 2월 27일, 조봉암은 대법원 확정판결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조봉암은 최후 진술에서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심 청구가 기각된 바로 다음날인 1959년 7월 31일 사형을 집행했다. 이승만은 정적을 이른바 '사법살인'한 셈이었다. 이는 몰역사적인 처사로 백성들의 사상을 탄압하고, 입에 재갈을 물린 무자비한 폭거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3.15 선거



1960년 3월 15일은 제4대 정·부통령 선거일이다. 자유당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부통령은 이기붕이었다. 이에 맞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장면이 지명됐다. 그런데 민주당 후보 조병옥은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지병으로 쓰러졌다. 도미 후 월터리드육군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사망했다.



3대 신익희 후보의 비운이 다시 반복됐다. 자유당으로서는 제4대 대선에서 강력한 대항마인 조봉암, 신익희가 사라지자 이승만 후보는 '땅 짚고 헤엄치기'로 당선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당시 85세였다. 그래서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 자리는 매우 중요했다. 그런 까닭에 3.15 선거는 부통령 선거로 축소된 모양새였다. 이기붕 후보는 지난 선거 때 장면 후보에게 패한 전력이 있었다. 그래서 자유당은 1960년 3.15 선거에서는 더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고자 발버둥쳤다. 이는 곧 부정선거로 이어졌다.



자유당은 경찰과 공무원, 반공청년단, 정치 깡패 등 모든 세력을 총동원해 민주당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1960년 2월 28일은 당국은 일요일임에도 야당 후보자 유세에 방해하고자 대구 시내 중·고교생들을 등교시켰다. 이에 반발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학생들을 정치도구로 이용치 말라"라면서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자유당은 치밀하게 부정선거를 준비했다. 4할 사전 투표, 3인조 5인조 투표, 유권자 명부 조작, 완장부대 동원,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투표 계산서 조작 등등. 기상천외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이런 부정선거에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최초의 유혈시위는 선거 당일인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마산시민 수천 명은 개표장 부근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일제히 정전이 되면서 경찰의 시위대 발포가 시작됐다. 이날 8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4.19 혁명

  서울 시내 중고교생들의 4. 19 시위

▲  서울 시내 중고교생들의 4. 19 시위ⓒ 자료화면

 

 

 
4.19 혁명의 직접 도화선이 된 것은 한 학생의 시신 사진 때문이었다. 1960년 4월 11일 아침, 3.15 시위 때 최루탄을 맞고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이것이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마산시민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 그날 마산시민 2만여 명이 마산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했고, 파출소도 습격했다. 이날 이후 마산은 사흘간 행정이 마비됐다.



이런 시위에도 당시 홍진기 내무장관은 이 사태를 '빨갱이'들이 조종한 것으로 몰고 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호응해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제2차 마산항쟁은 전 국민을 술렁이게 했다.   
  고려대 구내의 4.18기념탑▲  고려대 구내의 4.18기념탑ⓒ 자료사진

 

 

 
그해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2000여 명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면서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했다. 학생들은 대정부건의문을 결의하고, 이날 밤 학교로 돌아오다가 종로 4가 부근에서 반공청년단 임화수가 거느린 100여 명 깡패들에게 각목, 쇠갈고리 등으로 집단 폭행을 당했다. 학생들이 거리에 쓰러진 사진이 이튿날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잠에서 깨어난 서울시민들과 학생들은 그 장면에 경악했다.



마침내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아침,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을 선두로 법대생 등 여러 단과대학생들이 교문을 뛰쳐나갔다. 서울 시내 많은 대학생, 고교생 및 일부 중학생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서울 세종로 일대는 10만 명 이상의 시위 인파로 가득 메워졌다.



서울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을 선점했다. 이에 동국대 학생들은 경무대 쪽으로 향했다. 경찰이 갑자기 시위대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피의 화요일'이 시작됐다. 당시 자유당 전위부대 노롯을 한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이 불길에 치솟았다. 그날 오후 3시 정부는 계엄을 선포했다.



4.19 시위는 지방으로도 번져갔다. 부산과 광주에 이어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인천 등 전국의 중소도시로도 산불처럼 무섭게 번져 나갔다. 이날 시위로 115명이 사망하고 700여 명이 부상당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심상치 않자 주한미 대사 매카나기는 경무대를 방문해 유감을 밝혔다. 그리고 미 국무장관은 주한대사를 통해 항의각서를 전달했다. 이에 이승만은 국무위원을 전원 사퇴시키고,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 취소 등으로 사태를 매듭지으려 했다.
    4.19. 시위대들이 경무대로 돌진하고 있다.

▲  4.19. 시위대들이 경무대로 돌진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이런 미온적인 방법으로 사태 해결을 모색하려는 가운데 대학 교수들이 나섰다. 1960년 4월 25일, 대학 교수들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벌였다. 자칫 잦아드려는 4?19 혁명에 대학 교수들의 시위는 다시 불길을 붙였다.

국민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때부터는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도 나서서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였다. 이에 미국마저도 이승만 정권 지지를 거두자 마침내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만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



첫째,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 직을 사임하겠다. 둘째, 3.15 정부통령 선거에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하도록 하겠다. 셋째, 이기붕 의장은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하겠다. 넷째,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4. 25. 교수단 시위

▲  4. 25. 교수단 시위ⓒ 자료사진

 

 

 
4월 27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튿날 이승만은 경무대에서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그때 자유당 정권의 제2인자 이기붕 가족은 시위대에 쫓기고 있었다. 그의 집은 시위대의 방화로 불에 탔다. 그들은 경기도 포천의 한 군부대를 찾아갔는데, 매정히 거절당한 뒤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날 밤 이기붕 가족은 몰래 경무대 별관 관사에 피신했다. 그제야 이들은 막마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장남 강석은 비장한 마음으로 권총 두 자루를 준비했다.   




  이승만 이기붕 가족 일동.

▲  이승만 이기붕 가족 일동.ⓒ 국가기록원

 

 

이상..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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