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 : 무쿠리(mvkuri)
A 요택과 북평의 거리 구하기
1. 거리값(里數, 10리의 km값)
1) 기준
① 유주 → 북평
통전 거리 기록 500리, 독사방여기요 거리 기록 550리
실제 현대도로 거리 약 260km
② 정주 → 유주 독사방여기요 거리 기록 480리
실제 현대 도로 거리 230km 내외
2) 산출값
통전 10리 ≒ 5.2km
독사방여기요 10리 ≒ 4.73km
2. 속도값(645년, 당 태종의 하루 이동속도)
1) 1일 45리(23.63km, 통전 리수 기준)
유주(4월10일 출발) → 북평(4월20일 도착), 11일 소요, 통전 기록 500리
2) 1일 52리(28.08km, 통전 리수 기준)
영주(10월12일 출발) → 임유관(10월21일 도착), 10일 소요, 통전 기록 근거 추산 520리
3. 영주와 북평의 거리
영주(10월12일 출발) → 북평(10월25일 도착), 14일 소요(추정)
1) 통전 거리 기록에 통전 리수 산출값(10리≒5.2km) 적용시
700리 = 364km
2) 현대 도로 거리
약 345km 내외
4. 영주에서 북평까지 소요 시일 문제
영주(10월12일 출발) → 북평(10월25일 도착)으로 14일 소요된 것으로 추정
후퇴일정에서, 임유관(10월21일 도착)에서 유주(11월6일 도착)까지 총 15일이 소요되었으므로 두 지점 사이의 통전 기록 거리인 680리를 하루거리로 추산시 45리가 산출된다. 이 이동속도는 침공일정에서, 유주에서 북평까지 이동한 하루 이동속도와 동일한 값인데 이를 적용하면 침공시와 마찬가지로 후퇴시에도 북평에서 유주까지 총 11일이 걸렸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북평을 출발한 날짜는 10월 26일, 도착한 날짜는 10월 25일이 되므로 영주(10월11일 도착)에서 북평(10월25일 도착 추정)까지 걸린 시일은 14일이 산출된다.
그러나 이는 영주에 도착하여 하루밖에 머물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고 가정하였을 때에 도출되는 값이다. 당 태종은 10월 11일 영주에 도착하여 전사자들의 무덤을 조성하여 장사를 지내줬다. 당군은 요택을 건너느라 사상자와 부상자가 발생하고 당 태종 자신까지도 요택을 건너는 길을 만드는 것을 돕는 등 당군은 전체적으로 정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충분히 가정할 수 있다.
만약 하루를 더 지체했다고 가정한다면 영주에서 임유관까지 총 9일을 소요한 것이 되므로 이 때에 이 9일 동안 당군의 하루 이동속도는 약 58리, 현대 단위로 환산시 약 30.16km를 이동했다는 결과값이 산출되며 이렇게 하였을 때에 후퇴일정에서, 영주에서 북평까지 걸린 시일은 14일에서 하루 단축한 13일로 추론해 낼 수 있다.
5. 북평에서 요택까지의 거리
영주(4월 21일 출발) → 임유관(5월 3일 도착), 13일 소요
1) 2-1값(23.63km) 적용시 약 307km
2) 2-2값(28.08km) 적용시 약 365km
B 당 태종은 해안 경로를 따라 고구려를 침공했는가?
침공시와 퇴각시의 이동경로가 모두 동일하였다고 가정한다면, 즉 침공시에 임유관에서 대릉하를 타고 요택으로 이동했다면 영주(유성)와 요택은 동일한 거리, 또는 서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645년, 당 태종의 일정에서, 침공시에 북평과 요택 사이에 영주가 언급돼 있지 않으므로 다른 경로, 즉 임유관에서 해안, 또는 소릉하를 타고 현 금주(진저우)를 거쳐 사학계 통설이 비정한 요택(신민과 반금 사이)에 도달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이 경로의 현대 도로에서의 거리는 약 360km 내외로서 이 역시 22값을 적용한 거리인 약 365km와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후퇴시에는 장손무기와 당 태종이 이끄는 선두군 1만, 이세적과 강화왕 도종이 이끄는 후미군 4만, 총 5만의 군대가 이동하였으며, 침공시에, 당 태종이 거느린 군사의 수는 육군(六軍)과 이민족 부대까지 더하여 후퇴시 병력수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몇 배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이 되므로 이러한 대병력이 해안가, 또는 소릉하 경로를 따라 금주에 이르러 다시 현 사학계 통설의 645년 요택인 신민과 반금 사이의 요택으로 이동했다고 보기에 무리가 따른다
이 해안가, 또는 스릉하 경로는 당시까지 고구려와 중국계 정권의 전쟁사에서, 어느 사서도 거론하지 않은 경로로서 고구려를 몇 차레 침공한 수나라조차 침공과 후퇴의 경로에 반드시 임유관 →유성(영주) → 요수 경로를 이용하였다. 따라서 그 바로 후대의 정권인 당나라의 당 태종 역시 동일한 경로로 침공과 후퇴를 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세적만이 유성에서 요택을 건너 요수로 가는 경로가 아닌 북쪽으로 크게 돌아서 요수의 상류를 거쳐 들어가는 경로를 택하는, 허점을 노린 기습을 하였을 뿐이다.
1) 사서 기록에 나타난 임유관에서 해안 경로를 따라 현주(현 북진시)에 도달한 사례
하지만 사서에 임유관에서 남쪽 경로를 따라서 현 사학계가 645년 당 태종의 요택을 비정한 신민시 남쪽, 반금시 북쪽의 요택의 입구에 해당하는 북진시까지 도달한 기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소규모의, 비무장 인원이 이동한 기록이라는 차이를 제외하고 말이다.
947년에 임유관에서 해안을 따라서 현주까지 이동한 석중귀의 이동경로를 보면 금주에서 해북주를 거쳐 현주까지 이동하였다. 해북주는 현 의현과 금주 사이에 위치하면서 의현 쪽에 치우친 곳에 있어서 무경총요에 따르면 금주와 8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석중귀는 금주에서 바로 대릉하를 건너 의무려산의 남쪽을 돌아 현주, 즉 북진시로 간 것이 아니라 의현 방향으로 올라가 대릉하를 건넌 후에 의무려산을 가로질러 현 북진시에 도달한 것이다.
이보다 2백여 년 후의, 비슷한 경로를 이용한 실제 이동기록인 1125년 허황종의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의 기록에서 송나라 사신단은 금나라 상경으로 향하면서 임유관을 빠져나온 후 천주(遷州), 습주(習州), 래주(來州), 해운사(海雲寺), 홍화무(紅花務)를 거쳐서 금주(錦州)에 도착한 후 금주錦州에서 유가장(劉家莊)을 거쳐 현 북진시에 해당하는 현주(顯州)까지 이동하였다.
이 유가장(劉家莊)의 정확한 위치는 알기 어려운데 유가장에서 현주에 이르는 일정을 기술하면서 강 왼쪽에 눈에 띄게 솟아있는 의무려산을 묘사(出榆關以東行,南瀕海,而北限大山,書皆粗惡不毛。至此,山忽峭拔摩空,蒼翠萬仞,全類江左,乃醫巫閭山也)하고 있어서 1125년의 허황종 역시 947년의 석중귀와 동일하게 금주에서 북쪽으로 돌아서 대릉하를 건너서 의무려산을 통과하여 북진시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이 금주에서 곧장 의무려산의 남쪽을 지나서 현주로 향하는 경로를 택하지 않고 의현 방면에서 대릉하를 건너서 의무려산을 통과하는 경로를 택한 이유는 바로 현 대릉하 하구의 삼각지의 대부분, 그리고 이곳과 반금시 사이가 당시에는 바다였던 데에 그 까닭이 있다.
만약에 645년의 당 태종이 이끄는 침공군이 석중귀나 허황종과 같은 해안, 또는 소릉하 경로를 따라서 금주에 이른 다음에 사학게 통설이 비정한 요택의 입구에 해당하는 현 북진시에 도달하였다 한다면
소규모 인원도 아니고 수만 명에서 수십 만까지 추산되는 대병력 역시 금주에서 의현 방향을 거쳐 대릉하를 통과하여 의무려산을 통과하는 경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의무려산은 중국의 고대로부터 진산(鎮山)으로서 너무도 유명하므로 어떤 식으로든 이 산의 이름을 반드시 거명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 태종의 645년 침공과 후퇴 행적에서 거명된 산은 마수산과 주필산밖에는 달리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산은 모두 요택과 요수를 건너 그 동쪽 인근에 위치한 산이었다. 즉 사학계 통설을 따르더라도 요택의 위치뿐만 아니라 마수산과 주필산의 위치 비정 역시 사학계 통설은 자승자박한 꼴이 된다.
2) 군량과 이동경로의 상관성
당 태종은 644년 7월, 홍주(洪州), 요주(饒州), 강주(江州)의 3주에 명령하여 배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였고 같은 해 10월, 북쪽으로는 영주로 군량을 수송하게 하고, 동쪽으로는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군량을 비축하게 하였다.
당 태종이 이렇게 군량수송에 만전을 기울인 이유는 수나라가 군량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던 일을 반면교사로 삼은 까닭이다. 당 태종은 위정(韋挺)에게 군량수송의 책임을 맡기며 “유주의 북쪽으로 요수까지 2천리는 주와 현이 없어서 군사들이 행군하며 군량을 조달할 곳이 없으니 경이 이 일을 맡아서 하여 군사들이 쓰기에 떨어지거나 너무 모자르지 않게 하라. (幽州以北,遼水二千餘里無州縣,軍行資糧無所取給,卿宜為此使。但得軍用不乏,功不細矣/구당서 위정 열전)라고 하였다. 사실 이 기록만 보더라도 당시 당나라의 영토는 유주의 북평까지만 해당됐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학계 통설에서는 당시 당나라 영주의 위치를 현 조양시로 고정해서 보고 있는 바 사학계 통설의 설명을 따르더라도 군량 문제로 인하여 침공시에 영주를 거쳐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644년 10월 군량을 수송하여 비축케 한 영주의 위치를 사학계 통설대로 현 조양시라 한다면 침공일정에서 이 조양시에 들러서 반드시 군량을 보급 받아야 하는 것이 된다.
만약 해안이나 소릉하 경로를 통해 금주를 거쳐 요택 입구까지 이동했다 한다면 군량 공급을 군량선으로부터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으므로 당나라 해군은 산동의 등주에서 곧장 현 요동반도 여순/대련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연안항로를 따라 시계방향으로 이동한 것이 되므로 이 역시 사학계 통설이 스스로 걸려든 덫이 된다.
C 요약
1. 수나라는 침공과 퇴각 모두 임유관 - 유성 - 요수 경로를 이용하였다.
2. 당 태종이 만약 임유관 → 소릉하 → 금주 경로로 침공했다 하더라도 당시 금주와 반금시 사이는 바다였으므로 당 태종의 병력은 북쪽 의현 방면으로 이동한 후 대릉하를 건너서 의무려산을 통과해야 한다. 당 태종의 645년 침공과 후퇴 일정에서 동에서 서, 서에서 동으로 건넌 강은 요수밖에 없다. 또한 그 요수 바로 옆에 있는 산은 마수산 한 곳뿐이었다.
3. 당 태종은 수나라의 패배 원인 가운데 하나인 군량수급 문제를 반명교사 삼아서 군량수급에 만전을 기했다. 644년 10월, 북쪽으로 영주, 동쪽으로 고대인성에 군량을 비축한다.
이 영주의 위치를 사학계 통설 비정지이자 전통적 개념의 영주 위치인 현 조양시로 본다면 침공시의 당 태종과 그 휘하 육군은 군량 보급을 위해 반드시 영주가 있는 현 조양시로 이동해야 한다.
따라서 당 태종은 해안 경로가 아닌 임유관 → 영주(유성) → 요택 → 요수 경로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4. 만약 당 태종이 해안, 또는 소릉하 경로로 이동했다고 한다면 군량선으로부터 군량을 보급 받았다고 봐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당 태종의 수군은 등주에서 대련 방면으로 움직인 것이 아닌 발해를 시계방향으로 도는 연안항해를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여 사학계 통설의 자승자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