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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1-29 22:20
[한국사] 낙랑국과 낙랑군, 그리고 한사군의 실제 위치
 글쓴이 : 고구려거련
조회 : 2,175  


한사군 한반도설은 일제 식민사학 주장일 뿐
실제 한사군 낙랑군은 요서에 있었음

한나라 무제가 멸망시킨 위만조선은 요서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평양은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가 정벌한 최리의 낙랑국이 위치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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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게티 20-01-29 22:40
   
이나라 학자라는것들이  저 모양이니 어쩌겠음
윈도우폰 20-01-29 23:44
   
어떻게 군의 크기를 주만한 크기로 그리는지...아무리 자칭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지리감각이 없기로 서니 한사군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를 떠나 각 군의 크기를 저렇게 크게 비정하는 모르겠네...아무리 군이 크기로 서니 우리 나라의 도나 지나의 주만한 크기로 그리는게 가당키나 한가?  공간감각이 없는 놈이 시간감각이 제대로일리 없을 것이고...그런 놈들이 역사해석을 저 따위로 하는 것 같음...우리 때만 해도 문과생 역시 이과 과목인 지리를 기본적으로 배웠는데...지리 공부를 안한 놈들이 역사를 연구하니 저 따위 그림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함
없습니다 20-01-30 01:45
   
“ 낙랑군이 313년에 미천왕이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낙랑군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313년 이후에도 낙랑군이 존재했다. 물론 이 낙랑군은 평양에 있던 그 낙랑군과는 다르다.

313년에 평양의 낙랑군이 멸망한 후 낙랑군 유민들은 모용외에게로 갔다. 모용외는 이 유민들을 위하여 요서에 낙랑군을 이전 시켰다. 이를 교치(僑置)라고 한다. 이 요서의 낙랑군은 이름만 있는 낙랑군이 아니라 엄연히 태수가 존재하는 실재하는 낙랑군이었다. 그후 432년에는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옮겨버렸고 이때쯤 새로운 낙랑군은 쇠락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20년 대에 다시 북위에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없어졌고 537년에 또다시 요서의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됐다.

어쨌든 몇차례의 변화는 있었지만 313년 이후의 새로운 낙랑군은 요서에 있던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가 세운 기존의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요서 낙랑군에 대한 기록들을 기존의 낙랑군에 대한 기록인 듯이 왜곡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하기도 한다.

평양에 있던 낙랑군의 자체적인 정부는 멸망했지만 지역 자체는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 평양성으로서 남았고, 이는 고려시대의 서경과 현재 북한의 수도 평양직할시로 이어진다. 현재 평양에서 낙랑군의 흔적은 락랑구역에 남아있다. 낙랑에서 이름을 따온 지명인데, 낙랑군 관련 유적이 많이 발굴되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다만 현재의 평양 중심부에서는 다소 떨어져 위치해있고, 또 바로 다음시대인 고구려의 안학궁 유적이 있는 대성구역은 정반대로 평양 동북쪽에 위치해있어 같은 평양이어도 두 유적지는 거리가 멀다. 물론 유적이 나온다고 해서 이곳이 과거 낙랑군의 중심지였다는 근거는 없지만. ”
나무
     
고구려거련 20-01-30 04:29
   
한사군은 평양에 없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국사편찬위원회의 데이터베이스

○ 元封 2년(B.C.109) 에 漢나라는 使臣 涉何를 보내어 右渠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우거는] 끝내 天子의 命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涉何가 돌아가는 길에 국경인 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자기를] 전송나온 조선의 裨王 長註 028028 朝鮮裨王長 顔師古는 주석하기를 長은 裨王의 이름이라고 하였다.(『漢書』「朝鮮傳」) 그러나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正義』에서 張守節은 顔師古의 견해에 반대하고 본문의 ‘裨王長’은 裨王와 將士인 長 두 사람을 뜻한다고 하였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西漢의 사신인 涉何가 국경인 浿水에 이르러 그의 驅者를 시켜 涉何를 전송하러 나온 ‘裨王長’을 살해하고 강을 건너 도망하여 塞로 들어갔는데, 마침내 돌아가 天子에게 보고하기를 「朝鮮의 將」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 長이 裨王의 이름이었다면 涉何의 馭者가 살해한 사람은 裨王인 長이었다는 것이 되므로, 涉何가 天子에게 朝鮮의 裨王 또는 長을 죽였다고 보고했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涉何는 보고하기를 朝鮮의 將을 죽였다고 했으니, 裨王과 長을 나누어 長을 朝鮮의 將으로 보아야 옳을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長을 將士의 이름이라고 한 張守節의 견해가 옳은 것이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25)



 長을 古朝鮮에서 裨王이라는 地位에 있는 者의 人名이다.
이 裨王 長의 實體에 關해서는 몇 가지 見解가 提示되고 있으니, 우선 裨를 ‘助手’의 뜻이 있는 것으로 새기면서 裨王 長을 “王의 아들인 長”이라고 解釋하는 견해가 있다.




또 裨王을 文字 그대로 ‘副王’을 뜻한다고 把握하여 그것을 古朝鮮의 首相格에 該當하는 官職으로 보는 立場이 있다. 그리고 裨王은 古朝鮮의 高位武官 職의 一種이고, 長은 그런 職責을 맡은 者의 人名이라고 把握하는 見解가 있다. 本 史料上의 文脈으로 보아 裨王 長이 古朝鮮의 高位武官職에 있던 ‘長’이라고 새기는 것이 妥當하다고 본다.


원래 征服國家로서 興起한 衛滿朝鮮이 王을 頂點으로 하는 職業的인 行政官僚組織과 그것을 物理的으로 뒷받침해주는 强力한 軍事組織을 保有하고 있었음을 本 史料上에 나타나는 ‘裨王’이라고 일컬어지는 高位武官職의 存在를 통해서도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


≪參考文獻≫
『漢書』卷95「西南夷兩粤朝鮮傳」顔師古의 注.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崔夢龍,「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 -衛滿朝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유. 엠. 부찐,『古朝鮮』1986.







닫기을 찔러 죽이고 곧바로 [浿]水를 건너서 塞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註 029029 馳入塞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正義』는 이 塞를 平州 楡林關이라고 하였으나,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

국경지대에 있었던 要塞 또는 초소를 말하는 것인데, 西漢 초로부터 이 시기까지의 사이에는 西漢과 古朝鮮·衛滿朝鮮의 국경선에 변화가 없었으므로, 아마도 遼東故塞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고구려거련 20-01-30 04:30
   
<참조>
1.『漢書』「朝鮮傳」註 9)


築障
 『史記』「朝鮮列傳」에는 ‘鄣塞’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障(鄣)이라고만 되어 있다. 鄣塞나 鄣은 같은 의미로서 국경에 있는 초소를 뜻하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서 그것이 확인된다. 『漢書』「佞幸傳」의 주석에서 顔師古는 말하기를 ‘徼는 塞와 같은 것이다.


동북에 있는 것을 塞라 하고 서남에 있는 것을 徼라고 부른다. 塞라는 명칭은 鄣塞에서 온 것이고 徼는 徼遮의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史記』「黥布列傳」에 나오는 徼에 대한 『史記索隱』의 주석에서는 ‘徼라고 하는 것은 변방에 있는 亭과 鄣을 말한다.

徼로써 변방을 둘러싸고 항상 그것을 지킨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鄣·塞·鄣塞는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변방의 초소였던 것이다.


≪參考文獻≫
『史記』卷91「黥布列傳」所引『史記索隱』
 『漢書』卷93「佞幸傳」鄧通條.







2.『漢書』「朝鮮傳」註 12)
遼東故塞


 遼東故塞는 遼東에 있었던 옛 要塞 즉, 국경초소를 말한다. 漢이 흥기하였으나 당시의 국경초소였던 鄣塞와 遼東外徼가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遼東故塞를 다시 수리하여 사용했다고 했으며 浿水를 경계로 삼았다고 했으니, 遼東故塞는 鄣塞나 遼東外徼보다는 漢의 지역 즉, 서쪽으로 더 이동된 곳으로 浿水 유역에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본문의 다음 구절에 의하면 衛滿이 망명할 때 塞(遼東故塞)를 빠져나온 다음 浿水를 건넜다고 했는데, 당시에 衛滿은 동쪽을 향하여 망명하였으므로 遼東故塞는 浿水의 서부연안에 있었을 것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戰國時代에 燕國이 古朝鮮의 서부를 침공하여 鄣塞와 遼東外徼를 설치하기 이전의 燕國의 동북부 국경 초소는 지금의 灤河 서부연안에 있었던 令疵塞와 그곳으로부터 昌黎縣의 碣石으로 이어진 長城이었으므로 遼東故塞는 이 선상에 있었던 초소였을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漢이 흥기하였으나 鄣塞와 遼東外徼가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다’고 했는데, 이 기록은 매우 옳은 것이다. 기원전 202년에 西漢의 통일전쟁은 종결을 맺게 되었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경제와 사회는 크게 파괴되었고 국력이 약화되어 변경의 이민족들을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


당시의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西漢으로서는 長城에 이르는 국경선도 확보할 수가 없어서 그것만이라도 회복하는 것이 당면한 최대의 염원이었다. 이상과 같은 西漢 초의 정황을 이해하고 보면 西漢이 古朝鮮과의 국경선을 비교적 지키기 편리한 浿水 즉, 灤河의 서부연안과 長城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임을 알게 된다.(尹乃鉉, 「古朝鮮의 西邊境界考」pp.16~31)
 ≪參考文獻≫
尹乃鉉,「古朝鮮의 西邊境界考」『藍史鄭在學博士古稀記念, 東洋學論叢』1984.







닫기 드디어 天子에게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天子가 그 功을 기려 꾸짖지 않고 [涉]何에게 遼東東部都尉註 030030 遼東東部都尉 『漢書』「地理志」에 의하면 遼東郡 武次縣에 東部都尉의 治所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곳이 지금의 어느 곳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26)


遼東東部都尉
 漢帝國의 地方制度는 諸侯國과 列侯國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秦制를 繼承하여 郡縣制度를 實施하였다.
이 郡縣制度의 機構와 組織을 살펴보면 郡에는 郡守·丞·都尉가 있었는 바, 그들은 모두 中央政府에 의하여 任命·派遣되었다.


한편 漢帝國의 地方軍은 各 郡에 所屬되어 있었다. 그런데 各 郡에서 兵事를 擔當하고 있었던 것은 秩 2千石의 都尉였다. 都尉는 各 郡의 軍事的 要地에 한 사람 아니면 두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都尉가 그 郡의 兵力을 直接 掌握하고 있었다.

그러나 都尉는 郡의 最高責任者인 太守의 規制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兵力을 動員할 때는 中央에서 일종의 割符였던 銅虎符를 가진 使者가 太守한테 派遺되고, 太守가 가지고 었던 左半部와 合致되면 太守는 都尉에게 命令을 내려 兵力을 動員하였다.


≪參考文獻≫
『漢書』卷19上「百官公卿表」 第7上; 卷28「地理志」 第8下 遼東郡 武次縣條.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日中民族科學硏究所編,『中國歷代職官辭典』1980.
유. 엠. 부찐,『古朝鮮』1986.







닫기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조선은 何에게 원한을 품고 군사를 출동시켜 기습 공격하여 何를 죽이니, 天子는 罪人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어] 朝鮮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 해 가을에, 樓船將軍 楊僕註 031031 楊僕 楊僕은 宜陽人인데, 기원전 112년에 西漢의 武帝가 南越을 정벌할 때 樓船軍團(望樓가 2층으로 되어 있는 大船의 군단)의 장군으로 임명되었으므로, 樓船將軍이라고 부른다. 南越정벌에서 세운 공로로 將梁侯에 봉해졌다.
               
고구려거련 20-01-30 04:31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27)


楊僕
 楊僕에 關하여『史記』의「酷吏列傳」은
楊僕者 宜陽人也 以千夫爲吏 河南守案擧以爲能 遷爲御史 使督盜賊關東 治放尹齊 以爲敢摯行 稍遷至主爵都尉 列九卿 天子以爲能 南越反 拜爲樓船將軍 有功 封將梁侯 爲荀彘所縳 居久之 病死라 記述하고 있다.







한편 武帝는 南越을 征伐할 때, 주로 淮水 以南 사람으로 一種의 水軍인 樓船士를 組織했는데, 楊僕은 아마 이 戰役에 臨하는 樓船士의 指揮官으로 武功을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武帝는 楊僕의 이러한 水軍戰歷을 參酌하여 그를 對古朝鮮 渡海進攻作戰의 主將으로 任命하였던 것 같다.


한편『漢書』「酷吏傳」에는 楊僕에 關하여 ‘後復與左將軍荀彘俱擊朝鮮 爲彘所縳 語在朝鮮傳 還 免爲庶人 病死’라 記錄하고 있다.


≪參考文獻≫
『史記』卷122「酷吏列傳」 62.
『漢書』卷90「酷吏列傳」 60.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닫기을 파견하여 齊로부터 배를 타고 勃海를 건너가게 하고,註 032032 樓船將軍楊僕從齊浮勃海본문에 ‘樓船將軍楊僕從齊浮勃海’라고 하여 西漢의 樓船將軍인 楊僕이 齊를 출발하여 渤海에 떳다고 했으니, 이 구절은 衛滿朝鮮의 위치를 알게 하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齊가 지금의 山東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으므로, 당시의 渤海의 위치에 따라 楊僕軍의 항로를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渤海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데, 『戰國策』「齊一」에는 渤海가 齊國의 북쪽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史記』「河渠書」에는 黃河가 渤海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戰國策』은 戰國時代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고, 『史記』는 西漢의 武帝 때에 저술되었는데, 戰國時代의 齊國은 지금의 山東省이었으므로 戰國時代로부터 西漢時代에 이르기까지의 渤海는 지금의 渤海와 그 위치가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西漢의 樓船將軍 楊僕의 군대는 衛滿朝鮮을 치기 위하여 山東省을 출발하여 북쪽의 渤海로 항해하였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衛滿朝鮮의 右渠王은 이 楊僕의 군대를 맞아 싸웠으니, 衛滿朝鮮의 위치가 渤海의 北岸 즉, 지금의 중국 河北省 동북부로부터 遼寧省에 이르는 지역이었고, 한반도 북부가 될 수 없음이 자명해진다. 이것을 밑받침하는 기록이 『山海經』에도 보인다.




『山海經』의 「海內北經」에는 ‘朝鮮은 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하며 列陽은 燕國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同書「海內經」에는 ‘朝鮮은 東海의 안, 北海의 귀퉁이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朝鮮은 북쪽이 산과 접해 있었고, 남쪽은 바다와 접해 있었으며 중국 동해의 안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朝鮮(古朝鮮·衛滿朝鮮)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三韓 또는 그 전신의 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만약 朝鮮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면 그 남쪽은 바다와 접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山海經』은 朝鮮이 중국 동해의 안쪽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중국 동해는 한국의 황해가 되므로 한반도는 중국 동해의 밖이 되어 『山海經』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게 된다.


이상과 같은 문헌상의 기록을 밑받침하는 자료로서 13세기에 曾先之가 그린 지도가 있다. 그 지도는 그의 『十九史略通考』에 실려 있는데, 朝鮮의 위치가 압록강 밖, 발해의 북쪽에 있으며, 그 지도의 遼水는 그 흐름 방향으로 보아 지금의 灤河로 상정된다.





『十八史略』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曾先之는 南宋 말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라는 것은 주지되어 있거니와, 이 지도는 문헌의 기록이 지니는 모호함을 해결하여 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그리고 이 지도는 『三國遺事』가 집필되었던 시기와 거의 같은 때에 그려진 것으로, 당시까지도 중국의 역사가들은 古朝鮮과 衛滿朝鮮의 위치를 한반도가 아닌 渤海의 北岸으로 인식하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28)


渤海
 渤海는 기원전 3∼2세기 이전부터 渤海로 불리워 왔다. 즉, 기원전 5∼3세기의 기록으로 이해되는『山海經』「海內東經」에 ‘潦水出衛皋山 東南注渤海 入潦陽’(東南至潦陽注渤海로 읽어야 될 듯 하다)로 나타나고 있고,『史記』「河渠書」의 黃河가 渤海로 들어간다는 내용 등을 불 때 기원전 3∼2세기 이래로 渤海는 변함없이 渤海로 불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渤海는 遼東半島와 山東半島에 둘러싸인 지역으로 渤海灣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渤海의 이같은 위치확정에서 戰國時代의 齊지역인 山東半島에서 출발하여 향한 지역이 韓半島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올 경우 山東半島를 출발하여 발해만을 거쳐 요동반도 외곽으로 내륙을 끼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 견해는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參考文獻≫
『戰國策』卷8「齊策」 1.
『山海經』卷13「海內東經」
 『史記』卷29「河渠書」 7.
申采浩,『朝鮮上古史』(『丹齋申采浩全集』上卷, 1972)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參考文獻≫
『史記』卷29 「河渠書」
 『戰國策』卷8 「齊一」
 『山海經』卷12 「海內北經」; 卷18「海內經」
 尹乃鉉, 『韓國古代史新論』1986.


닫기 병력 5만註 033033 兵五萬본문에 ‘兵五萬’이라 하였는데, 그것이 樓船將軍 楊僕과 左將軍 荀彘의 군대를 합한 것인지 아니면 그 어느 한쪽 군대를 말한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닫기으로 左將軍 荀彘註 034034 荀彘 荀彘는 太原 廣武人이다. 侍中을 거쳐 校尉가 되어 大將軍 霍去病을 따라 여러차례 종군한 바 있다. 武帝 元封 3년에 左將軍이 되어 衛滿朝鮮의 정벌에 나섰다.
                    
고구려거련 20-01-30 04:32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29)


荀彘
 荀彘에 關해서『史記』列傳에는 ‘將軍荀彘 太原廣武人 以御見 侍中 爲校尉 數從大將軍 以元封三年爲左將軍擊朝鮮 毋功 以捕樓船將軍坐法死’라고 記述되어 있다.
한편『漢書』에는 荀彘에 관하여, ‘荀彘 太原廣武人 以御見 侍中 用校尉數從大將 元封三年 爲左將軍擊朝鮮 無功 坐捕樓船將軍誅’라고 記錄되어 있다.


≪參考文獻≫
『史記』卷111「衛將軍驃騎列傳」 51.
『漢書』卷55「衛靑·霍去病傳」 25.


닫기는 遼東註 035035 遼東 西漢의 左將軍 荀彘가 遼東에 출격하여 衛滿朝鮮의 右渠王을 토벌하였으니, 이 遼東은 衛滿朝鮮의 영토임을 알 수 있다. 앞의 주석 22)에서 이미 자세히 언급되었듯이 당시의 遼水는 지금의 遼河가 아니라 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灤河였고, 遼東은 그 동부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이었다.

그런데 遼東의 서남부 일부는 灤河 하류의 동부연안 즉, 灤河 하류로부터 昌黎縣의 碣石에 이르는 지역이 중국의 燕·秦·西漢에 속해 있던 遼東이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제외한 遼東의 대부분은 古朝鮮·衛滿朝鮮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참조>
 『漢書』「朝鮮傳」註 22)
遼東太守
 遼東郡을 다스렸던 지방장관을 말한다. 이 遼東을 흔히 지금의 遼河 동부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先秦時代부터 西漢 초까지의 遼東은 지금의 灤河 동부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戰國時代 말기의 저술인 『呂氏春秋』에는 당시의 6대 강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그 가운데 遼水가 들어있다. 이 遼水에 대해서 東漢의 高誘는 주석하기를 ‘遼水는 砥石山에서 나와 塞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곧게 遼東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呂氏春秋集解』「有始覽」) 이 기록에서 遼東은 遼水의 동북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西漢時代에 劉安이 편찬한 『淮南子』「墜形訓」에도 『呂氏春秋』에서 언급한 것과 동일한 6대 강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遼水에 대해서도 高誘는 주석하기를 ‘遼水는 碣石山에서 나와 塞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곧게 遼東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遼水에 대한 高誘의 주석은 『呂氏春秋』와 『淮南子』에서 내용이 비슷하나, 그 시원지가 『呂氏春秋』주석에서는 砥石山이라 하였고, 『淮南子』주석에서는 碣石山이라고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떻든 위의 주석은 遼水가 遼東의 서남부 경계를 이루는 강이라고 하였으니, 遼東은 그 동북부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遼東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는 당시의 遼水가 지금의 어느 강이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遼水의 시원지에 대해서는 高誘는 砥石山과 碣石山을 들었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착오일 것임이 분명한데, 砥石山은 아직까지 고증되지 못한 상태에 있고 碣石山은 지금의 중국 河北省 昌黎縣에 있는 碣石山이라는데 최근 중국학자들은 동의하고 있다.(高洪章·董寶瑞, 「碣石考」pp.225~228; 『辭海』卷下)


이 碣石山에서 가까운 강은 지금의 灤河이다. 碣石山은 渤海의 海岸으로부터 북쪽으로 2백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므로, 그 거리가 바다와 너무 가까와 遼水의 시원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켰을 것으로 본다면 高誘가 말한 遼水는 지금의 灤河일 것으로 상정된다.


遼水의 흐름 방향에 대해서 高誘는 말하기를 ‘塞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금의 灤河 하류의 흐름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遼河의 흐름 방향과는 반대가 되므로, 高誘가 말한 遼水는 지금의 遼水가 아니라 灤河일 것임을 알게 된다.


戰國時代로부터 西漢초에 이르는 시기의 遼水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보다 더 분명한 기록이 『說苑』에 보인다. 『說苑』「辨物」에는 春秋時代에 齊國의 桓公이 管仲과 더불어 孤竹國을 정벌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孤竹國에 이르기 전에 卑耳라는 계곡을 10리쯤 못가서 강을 건넜는데, 그 강의 명칭이 遼水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은 『管子』「小問」에 있는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인데, 『管子』에는 江名은 적혀 있지 않고 강을 건넌 것으로만 되어 있으나, 『說苑』에는 遼水라는 江名이 삽입되어 있다. 『說苑』의 저자인 劉向이 江名을 확인하여 보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孤竹國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금의 灤河 하류의 동부연안에 있는 盧龍縣 지역으로 보는데 이론이 없다.(陳槃, 『不見於春秋大事表之春秋方國稿』pp.28~31) 당시 齊國은 지금의 山東省에 있었고, 齊國을 출발한 桓公과 管仲은 지금의 河北省 북부에 있었던 山戎을 정벌한 후 동쪽으로 진군하여 孤竹國을 쳤으므로, 이러한 지리적 관계로 보아 桓公과 管仲이 孤竹國을 정벌할 때 건넌 遼水는 지금의 灤河였던 것이며 遼河일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
                         
고구려거련 20-01-30 04:33
   
『管子』는 戰國時代의 저술이지만 桓公과 管仲은 春秋時代 초기인 기원전 7세기의 인물이었으며, 『說苑』은 西漢時代에 劉向에 의하여 저술되었으므로, 春秋時代로부터 西漢 초에 이르기까지의 遼水는 지금의 灤河였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주석 13)에서 언급되었듯이 지금의 灤河는 濡水로도 불리어졌었는데, 『水經注』의 「濡水」를 보면 위에서 소개된 『管子』「小問」의 齊國의 桓公이 孤竹國을 정벌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肥如縣 근처의 산 위에 있는 祠堂에 얽힌 전설도 소개하고 있는데, 전설에 등장한 그곳의 강명이 遼水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水經注』의 편찬자인 酈道元도 지금의 灤河를 遼水로 인정했음을 알게 된다. 肥如縣은 孤竹國지역으로서 지금의 灤河 하류유역에 있었다.(『漢書』「地理志」)


지금까지의 고찰로서 분명하여진 것은 先秦時代로부터 西漢 초에 이르기까지의 遼水는 지금의 灤河였으며, 따라서 당시의 遼東은 지금의 遼河 동쪽이 아니라 灤河의 동쪽지역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에 遼東의 대부분은 古朝鮮에 속해 있었고, 그 서남부 일부가 燕·秦·西漢에 속해 있었다.




遼東이 古朝鮮에 속해 있었음은 『史記』「朝鮮列傳」과 다음에 언급된 주석 35)의 본문에서 衛滿朝鮮을 치기 위하여 출병한 西漢의 左將軍 荀彘가 遼東에 출격하여 衛滿朝鮮의 右渠王과 싸웠음을 전하는 내용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戰國時代로부터 西漢 초에 이르기까지의 국경선이 확인됨으로써 더욱 분명하여진다.




『鹽鐵論』「險國」에는 戰國時代 燕國의 동북부 국경이 遼水와 碣石이었다고 적혀 있다. 戰國時代의 遼水는 지금의 灤河였고, 碣石은 지금의 河北省 昌黎에 있는 碣石으로 灤河의 동부연안에 위치하므로 戰國時代 燕國과 古朝鮮의 국경은 북부는 灤河로 형성되었고, 남부는 灤河의 중하류로부터 碣石으로 이어지는 선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燕國의 遼東은 灤河의 하류 동부연안으로 灤河와 碣石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秦國의 遼東도 이 지역이었다. 秦帝國의 二世皇帝가 郡·縣을 순행하면서 碣石山을 다녀 온 일이 있는데, 이때 二世皇帝를 수행했던 대신들이 碣石山에 있었던 始皇帝의 순수비 귀퉁이에 자신들의 이름을 기념으로 새기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것을 안 二世皇帝가 대신들이 자신들이 이름만을 새겨넣고 始皇帝의 공덕을 새겨넣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그러자 대신들은 碣石山에 가서 始皇帝의 송덕비를 세우고 돌아온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司馬遷은 『史記』에서 대신들이 遼東에 다녀왔다고 적고 있다.(『史記』「秦始皇本紀」二世皇帝 元年條) 이 기록은 秦時代의 遼東이 碣石山이 있는 지금의 灤河 하류의 동부연안이었음을 알게 한다.








西漢초의 遼東도 같은 지역이었다. 『漢書』「張陳王周傳」에 의하면 西漢 초에 周勃이 燕王 盧綰의 모반을 평정하면서 盧綰을 추격하여 長城에까지 도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上谷郡·右北平·遼東郡·漁陽郡 등을 평정하였다.

그런데 西漢 초에 새로 長城을 축조하였거나 동북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한 일이 없으므로, 周勃이 도달한 長城은 秦長城 소위 萬里長城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평정된 遼東郡을 포함한 여러 郡·縣은 秦長城 안쪽에 있었을 것임을 알게 된다. 秦長城의 東端은 지금의 灤河 하류 동부연안인 碣石지역이었으므로,(尹乃鉉,「古朝鮮의 西邊境界考」pp.18~21) 西漢 초의 遼東郡도 燕·秦의 遼東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지금까지 고찰로서 분명해진 것은 先秦時代로부터 西漢 초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에 속했던 遼東은 灤河 하류 동부연안으로 灤河로부터 碣石에 이르는 지역이었고, 遼東의 나머지 부분은 古朝鮮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밝히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언제부터 지금의 遼河가 遼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漢書』「地理志」玄菟郡條에는 遼水가 보이는데, 이 강은 그 위치나 흐르는 방향으로 보아 지금의 遼河이다. 다시 말하면 『漢書』에 보이는 遼水는 지금의 遼河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에 근거하여 西漢時代의 遼水는 지금의 灤河가 아니라 지금의 遼河였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漢書』는 東漢時代에 편찬된 것으로 西漢 말까지의 역사지리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西漢時代에 그 동북지역은 영토에 변화가 있었다. 주지되어 있는 바와 같이 西漢 武帝는 元封 3년(기원전 108)에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漢四郡을 설치하였는데, 玄菟郡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고구려거련 20-01-30 04:34
   
漢書』「地理志」의 玄菟郡에 보이는 遼水는 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킨 후에 西漢의 영토에 편입된 지역의 강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遼水라는 강의 명칭이 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이 西漢에 편입됨에 따라 지금의 灤河로부터 遼河로 옮겨졌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遼水는 고대 중국인들이 그들의 동북부 국경을 이루는 강에 대한 호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尹乃鉉, 앞의 논문, pp.6~7) 지금의 遼河가 원래 遼水가 아니었음은 『三國遺事』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三國遺事』順道肇麗에는 遼水는 일명 鴨淥인데, 지금은 安民江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西漢 武帝 이후에 중국인들이 지금의 遼河를 遼水라고 부른 이후에도 고구려인들은 그것을 鴨淥水라고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安民江이라고 했음을 알게 된다.


≪參考文獻≫
『三國遺事』卷3「興法」順道肇麗.
『史記』卷6「秦始皇本紀」二世皇帝 元年條.
『漢書』卷28「地理志」下 玄菟郡 高句麗縣條·肥如縣條; 卷40「張陳王周傳」
 『呂氏春秋集解』卷13 「有始覽」
 『淮南子』卷4 「墮形訓」
 『說苑』卷18 「辨物」
 『水經注』卷14 「濡水」
 『鹽鐵論』卷9 「險固條」
 尹乃鉉,「古朝鮮의 西邊境界考」『藍史鄭在學博士古稀記念, 東洋學論叢』1984.
陳槃, 『不見於春秋大事表之春秋方國稿』册1, 孤竹條, 1970.
『辭海』卷下, 1979, 上海辭書出版社.
高洪章·董寶瑞, 「碣石考」『歷史地理』3輯, 1983.
닫기에서 출격하여 右渠를 誅殺하게 하였다.

右渠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註 028
朝鮮裨王長 : 顔師古는 주석하기를 長은 裨王의 이름이라고 하였다.(『漢書』「朝鮮傳」) 그러나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正義』에서 張守節은 顔師古의 견해에 반대하고 본문의 ‘裨王長’은 裨王와 將士인 長 두 사람을 뜻한다고 하였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西漢의 사신인 涉何가 국경인 浿水에 이르러 그의 驅者를 시켜 涉何를 전송하러 나온 ‘裨王長’을 살해하고 강을 건너 도망하여 塞로 들어갔는데, 마침내 돌아가 天子에게 보고하기를 「朝鮮의 將」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 長이 裨王의 이름이었다면 涉何의 馭者가 살해한 사람은 裨王인 長이었다는 것이 되므로, 涉何가 天子에게 朝鮮의 裨王 또는 長을 죽였다고 보고했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涉何는 보고하기를 朝鮮의 將을 죽였다고 했으니, 裨王과 長을 나누어 長을 朝鮮의 將으로 보아야 옳을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長을 將士의 이름이라고 한 張守節의 견해가 옳은 것이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25)

 長을 古朝鮮에서 裨王이라는 地位에 있는 者의 人名이다.
이 裨王 長의 實體에 關해서는 몇 가지 見解가 提示되고 있으니, 우선 裨를 ‘助手’의 뜻이 있는 것으로 새기면서 裨王 長을 “王의 아들인 長”이라고 解釋하는 견해가 있다. 또 裨王을 文字 그대로 ‘副王’을 뜻한다고 把握하여 그것을 古朝鮮의 首相格에 該當하는 官職으로 보는 立場이 있다.




그리고 裨王은 古朝鮮의 高位武官 職의 一種이고, 長은 그런 職責을 맡은 者의 人名이라고 把握하는 見解가 있다. 本 史料上의 文脈으로 보아 裨王 長이 古朝鮮의 高位武官職에 있던 ‘長’이라고 새기는 것이 妥當하다고 본다.

원래 征服國家로서 興起한 衛滿朝鮮이 王을 頂點으로 하는 職業的인 行政官僚組織과 그것을 物理的으로 뒷받침해주는 强力한 軍事組織을 保有하고 있었음을 本 史料上에 나타나는 ‘裨王’이라고 일컬어지는 高位武官職의 存在를 통해서도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


≪參考文獻≫
『漢書』卷95「西南夷兩粤朝鮮傳」顔師古의 注.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崔夢龍,「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 -衛滿朝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29
馳入塞 :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正義』는 이 塞를 平州 楡林關이라고 하였으나,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 국경지대에 있었던 要塞 또는 초소를 말하는 것인데, 西漢 초로부터 이 시기까지의 사이에는 西漢과 古朝鮮·衛滿朝鮮의 국경선에 변화가 없었으므로, 아마도 遼東故塞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참조>
1.『漢書』「朝鮮傳」註 9)
築障
 『史記』「朝鮮列傳」에는 ‘鄣塞’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障(鄣)이라고만 되어 있다. 鄣塞나 鄣은 같은 의미로서 국경에 있는 초소를 뜻하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서 그것이 확인된다. 『漢書』「佞幸傳」의 주석에서 顔師古는 말하기를 ‘徼는 塞와 같은 것이다. 동북에 있는 것을 塞라 하고 서남에 있는 것을 徼라고 부른다.


塞라는 명칭은 鄣塞에서 온 것이고 徼는 徼遮의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史記』「黥布列傳」에 나오는 徼에 대한 『史記索隱』의 주석에서는 ‘徼라고 하는 것은 변방에 있는 亭과 鄣을 말한다. 徼로써 변방을 둘러싸고 항상 그것을 지킨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鄣·塞·鄣塞는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변방의 초소였던 것이다.
                         
고구려거련 20-01-30 04:35
   
≪參考文獻≫
『史記』卷91「黥布列傳」所引『史記索隱』
 『漢書』卷93「佞幸傳」鄧通條.
2.『漢書』「朝鮮傳」註 12)




遼東故塞
 遼東故塞는 遼東에 있었던 옛 要塞 즉, 국경초소를 말한다. 漢이 흥기하였으나 당시의 국경초소였던 鄣塞와 遼東外徼가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遼東故塞를 다시 수리하여 사용했다고 했으며 浿水를 경계로 삼았다고 했으니, 遼東故塞는 鄣塞나 遼東外徼보다는 漢의 지역 즉, 서쪽으로 더 이동된 곳으로 浿水 유역에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본문의 다음 구절에 의하면 衛滿이 망명할 때 塞(遼東故塞)를 빠져나온 다음 浿水를 건넜다고 했는데, 당시에 衛滿은 동쪽을 향하여 망명하였으므로 遼東故塞는 浿水의 서부연안에 있었을 것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戰國時代에 燕國이 古朝鮮의 서부를 침공하여 鄣塞와 遼東外徼를 설치하기 이전의 燕國의 동북부 국경 초소는 지금의 灤河 서부연안에 있었던 令疵塞와 그곳으로부터 昌黎縣의 碣石으로 이어진 長城이었으므로 遼東故塞는 이 선상에 있었던 초소였을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漢이 흥기하였으나 鄣塞와 遼東外徼가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다’고 했는데, 이 기록은 매우 옳은 것이다. 기원전 202년에 西漢의 통일전쟁은 종결을 맺게 되었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경제와 사회는 크게 파괴되었고 국력이 약화되어 변경의 이민족들을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




당시의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西漢으로서는 長城에 이르는 국경선도 확보할 수가 없어서 그것만이라도 회복하는 것이 당면한 최대의 염원이었다.

이상과 같은 西漢 초의 정황을 이해하고 보면 西漢이 古朝鮮과의 국경선을 비교적 지키기 편리한 浿水 즉, 灤河의 서부연안과 長城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임을 알게 된다.(尹乃鉉, 「古朝鮮의 西邊境界考」pp.16~31)
 ≪參考文獻≫
尹乃鉉,「古朝鮮의 西邊境界考」『藍史鄭在學博士古稀記念, 東洋學論叢』1984.

註 030
遼東東部都尉 : 『漢書』「地理志」에 의하면 遼東郡 武次縣에 東部都尉의 治所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곳이 지금의 어느 곳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26)


遼東東部都尉
 漢帝國의 地方制度는 諸侯國과 列侯國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秦制를 繼承하여 郡縣制度를 實施하였다.
이 郡縣制度의 機構와 組織을 살펴보면 郡에는 郡守·丞·都尉가 있었는 바, 그들은 모두 中央政府에 의하여 任命·派遣되었다.


한편 漢帝國의 地方軍은 各 郡에 所屬되어 있었다. 그런데 各 郡에서 兵事를 擔當하고 있었던 것은 秩 2千石의 都尉였다. 都尉는 各 郡의 軍事的 要地에 한 사람 아니면 두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都尉가 그 郡의 兵力을 直接 掌握하고 있었다. 그러나 都尉는 郡의 最高責任者인 太守의 規制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兵力을 動員할 때는 中央에서 일종의 割符였던 銅虎符를 가진 使者가 太守한테 派遺되고, 太守가 가지고 었던 左半部와 合致되면 太守는 都尉에게 命令을 내려 兵力을 動員하였다.

≪參考文獻≫
『漢書』卷19上「百官公卿表」 第7上; 卷28「地理志」 第8下 遼東郡 武次縣條.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日中民族科學硏究所編,『中國歷代職官辭典』1980.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31
楊僕 : 楊僕은 宜陽人인데, 기원전 112년에 西漢의 武帝가 南越을 정벌할 때 樓船軍團(望樓가 2층으로 되어 있는 大船의 군단)의 장군으로 임명되었으므로, 樓船將軍이라고 부른다. 南越정벌에서 세운 공로로 將梁侯에 봉해졌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27)
楊僕
 楊僕에 關하여『史記』의「酷吏列傳」은
楊僕者 宜陽人也 以千夫爲吏 河南守案擧以爲能 遷爲御史 使督盜賊關東 治放尹齊 以爲敢摯行 稍遷至主爵都尉 列九卿 天子以爲能 南越反 拜爲樓船將軍 有功 封將梁侯 爲荀彘所縳 居久之 病死라 記述하고 있다.




한편 武帝는 南越을 征伐할 때, 주로 淮水 以南 사람으로 一種의 水軍인 樓船士를 組織했는데, 楊僕은 아마 이 戰役에 臨하는 樓船士의 指揮官으로 武功을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武帝는 楊僕의 이러한 水軍戰歷을 參酌하여 그를 對古朝鮮 渡海進攻作戰의 主將으로 任命하였던 것 같다.





한편『漢書』「酷吏傳」에는 楊僕에 關하여 ‘後復與左將軍荀彘俱擊朝鮮 爲彘所縳 語在朝鮮傳 還 免爲庶人 病死’라 記錄하고 있다.
≪參考文獻≫
『史記』卷122「酷吏列傳」 62.
『漢書』卷90「酷吏列傳」 60.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註 032
樓船將軍楊僕從齊浮勃海 : 본문에 ‘樓船將軍楊僕從齊浮勃海’라고 하여 西漢의 樓船將軍인 楊僕이 齊를 출발하여 渤海에 떳다고 했으니, 이 구절은 衛滿朝鮮의 위치를 알게 하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齊가 지금의 山東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으므로, 당시의 渤海의 위치에 따라 楊僕軍의 항로를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渤海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데, 『戰國策』「齊一」에는 渤海가 齊國의 북쪽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史記』「河渠書」에는 黃河가 渤海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戰國策』은 戰國時代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고, 『史記』는 西漢의 武帝 때에 저술되었는데, 戰國時代의 齊國은 지금의 山東省이었으므로 戰國時代로부터 西漢時代에 이르기까지의 渤海는 지금의 渤海와 그 위치가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西漢의 樓船將軍 楊僕의 군대는 衛滿朝鮮을 치기 위하여 山東省을 출발하여 북쪽의 渤海로 항해하였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衛滿朝鮮의 右渠王은 이 楊僕의 군대를 맞아 싸웠으니, 衛滿朝鮮의 위치가 渤海의 北岸 즉, 지금의 중국 河北省 동북부로부터 遼寧省에 이르는 지역이었고, 한반도 북부가 될 수 없음이 자명해진다. 이것을 밑받침하는 기록이 『山海經』에도 보인다.





『山海經』의 「海內北經」에는 ‘朝鮮은 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하며 列陽은 燕國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同書「海內經」에는 ‘朝鮮은 東海의 안, 北海의 귀퉁이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朝鮮은 북쪽이 산과 접해 있었고, 남쪽은 바다와 접해 있었으며 중국 동해의 안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朝鮮(古朝鮮·衛滿朝鮮)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三韓 또는 그 전신의 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만약 朝鮮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면 그 남쪽은 바다와 접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山海經』은 朝鮮이 중국 동해의 안쪽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중국 동해는 한국의 황해가 되므로 한반도는 중국 동해의 밖이 되어 『山海經』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게 된다.





이상과 같은 문헌상의 기록을 밑받침하는 자료로서 13세기에 曾先之가 그린 지도가 있다. 그 지도는 그의 『十九史略通考』에 실려 있는데, 朝鮮의 위치가 압록강 밖, 발해의 북쪽에 있으며, 그 지도의 遼水는 그 흐름 방향으로 보아 지금의 灤河로 상정된다.


『十八史略』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曾先之는 南宋 말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라는 것은 주지되어 있거니와, 이 지도는 문헌의 기록이 지니는 모호함을 해결하여 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그리고 이 지도는 『三國遺事』가 집필되었던 시기와 거의 같은 때에 그려진 것으로, 당시까지도 중국의 역사가들은 古朝鮮과 衛滿朝鮮의 위치를 한반도가 아닌 渤海의 北岸으로 인식하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28)

渤海
 渤海는 기원전 3∼2세기 이전부터 渤海로 불리워 왔다. 즉, 기원전 5∼3세기의 기록으로 이해되는『山海經』「海內東經」에 ‘潦水出衛皋山 東南注渤海 入潦陽’(東南至潦陽注渤海로 읽어야 될 듯 하다)로 나타나고 있고,『史記』「河渠書」의 黃河가 渤海로 들어간다는 내용 등을 볼 때 기원전 3∼2세기 이래로 渤海는 변함없이 渤海로 불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渤海는 遼東半島와 山東半島에 둘러싸인 지역으로 渤海灣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渤海의 이같은 위치확정에서 戰國時代의 齊지역인 山東半島에서 출발하여 향한 지역이 韓半島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올 경우 山東半島를 출발하여 발해만을 거쳐 요동반도 외곽으로 내륙을 끼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 견해는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參考文獻≫
『戰國策』卷8「齊策」 1.
『山海經』卷13「海內東經」
 『史記』卷29「河渠書」 7.
申采浩,『朝鮮上古史』(『丹齋申采浩全集』上卷, 1972)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參考文獻≫
『史記』卷29 「河渠書」
 『戰國策』卷8 「齊一」
 『山海經』卷12 「海內北經」; 卷18「海內經」
 尹乃鉉, 『韓國古代史新論』1986.
                         
고구려거련 20-01-30 04:36
   
註 033
兵五萬 : 본문에 ‘兵五萬’이라 하였는데, 그것이 樓船將軍 楊僕과 左將軍 荀彘의 군대를 합한 것인지 아니면 그 어느 한쪽 군대를 말한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註 034
荀彘 : 荀彘는 太原 廣武人이다. 侍中을 거쳐 校尉가 되어 大將軍 霍去病을 따라 여러차례 종군한 바 있다. 武帝 元封 3년에 左將軍이 되어 衛滿朝鮮의 정벌에 나섰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29)
荀彘
 荀彘에 關해서『史記』列傳에는 ‘將軍荀彘 太原廣武人 以御見 侍中 爲校尉 數從大將軍 以元封三年爲左將軍擊朝鮮 毋功 以捕樓船將軍坐法死’라고 記述되어 있다.
한편『漢書』에는 荀彘에 관하여, ‘荀彘 太原廣武人 以御見 侍中 用校尉數從大將 元封三年 爲左將軍擊朝鮮 無功 坐捕樓船將軍誅’라고 記錄되어 있다.
≪參考文獻≫
『史記』卷111「衛將軍驃騎列傳」 51.
『漢書』卷55「衛靑·霍去病傳」 25.

註 035
遼東 : 西漢의 左將軍 荀彘가 遼東에 출격하여 衛滿朝鮮의 右渠王을 토벌하였으니, 이 遼東은 衛滿朝鮮의 영토임을 알 수 있다. 앞의 주석 22)에서 이미 자세히 언급되었듯이 당시의 遼水는 지금의 遼河가 아니라 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灤河였고, 遼東은 그 동부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이었다. 그런데 遼東의 서남부 일부는 灤河 하류의 동부연안 즉, 灤河 하류로부터 昌黎縣의 碣石에 이르는 지역이 중국의 燕·秦·西漢에 속해 있던 遼東이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제외한 遼東의 대부분은 古朝鮮·衛滿朝鮮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참조>
 『漢書』「朝鮮傳」註 22)


遼東太守
 遼東郡을 다스렸던 지방장관을 말한다. 이 遼東을 흔히 지금의 遼河 동부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先秦時代부터 西漢 초까지의 遼東은 지금의 灤河 동부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戰國時代 말기의 저술인 『呂氏春秋』에는 당시의 6대 강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그 가운데 遼水가 들어있다. 이 遼水에 대해서 東漢의 高誘는 주석하기를 ‘遼水는 砥石山에서 나와 塞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곧게 遼東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呂氏春秋集解』「有始覽」) 이 기록에서 遼東은 遼水의 동북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西漢時代에 劉安이 편찬한 『淮南子』「墜形訓」에도 『呂氏春秋』에서 언급한 것과 동일한 6대 강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遼水에 대해서도 高誘는 주석하기를 ‘遼水는 碣石山에서 나와 塞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곧게 遼東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遼水에 대한 高誘의 주석은 『呂氏春秋』와 『淮南子』에서 내용이 비슷하나, 그 시원지가 『呂氏春秋』주석에서는 砥石山이라 하였고, 『淮南子』주석에서는 碣石山이라고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떻든 위의 주석은 遼水가 遼東의 서남부 경계를 이루는 강이라고 하였으니, 遼東은 그 동북부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遼東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는 당시의 遼水가 지금의 어느 강이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遼水의 시원지에 대해서는 高誘는 砥石山과 碣石山을 들었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착오일 것임이 분명한데, 砥石山은 아직까지 고증되지 못한 상태에 있고 碣石山은 지금의 중국 河北省 昌黎縣에 있는 碣石山이라는데 최근 중국학자들은 동의하고 있다.(高洪章·董寶瑞, 「碣石考」pp.225~228; 『辭海』卷下)


이 碣石山에서 가까운 강은 지금의 灤河이다. 碣石山은 渤海의 海岸으로부터 북쪽으로 2백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므로, 그 거리가 바다와 너무 가까와 遼水의 시원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켰을 것으로 본다면 高誘가 말한 遼水는 지금의 灤河일 것으로 상정된다.







遼水의 흐름 방향에 대해서 高誘는 말하기를 ‘塞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금의 灤河 하류의 흐름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遼河의 흐름 방향과는 반대가 되므로, 高誘가 말한 遼水는 지금의 遼水가 아니라 灤河일 것임을 알게 된다.





戰國時代로부터 西漢초에 이르는 시기의 遼水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보다 더 분명한 기록이 『說苑』에 보인다. 『說苑』「辨物」에는 春秋時代에 齊國의 桓公이 管仲과 더불어 孤竹國을 정벌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孤竹國에 이르기 전에 卑耳라는 계곡을 10리쯤 못가서 강을 건넜는데, 그 강의 명칭이 遼水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은 『管子』「小問」에 있는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인데, 『管子』에는 江名은 적혀 있지 않고 강을 건넌 것으로만 되어 있으나, 『說苑』에는 遼水라는 江名이 삽입되어 있다.





『說苑』의 저자인 劉向이 江名을 확인하여 보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孤竹國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금의 灤河 하류의 동부연안에 있는 盧龍縣 지역으로 보는데 이론이 없다.(陳槃, 『不見於春秋大事表之春秋方國稿』pp.28~31) 당시 齊國은 지금의 山東省에 있었고, 齊國을 출발한 桓公과 管仲은 지금의 河北省 북부에 있었던 山戎을 정벌한 후 동쪽으로 진군하여 孤竹國을 쳤으므로, 이러한 지리적 관계로 보아 桓公과 管仲이 孤竹國을 정벌할 때 건넌 遼水는 지금의 灤河였던 것이며 遼河일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





『管子』는 戰國時代의 저술이지만 桓公과 管仲은 春秋時代 초기인 기원전 7세기의 인물이었으며, 『說苑』은 西漢時代에 劉向에 의하여 저술되었으므로, 春秋時代로부터 西漢 초에 이르기까지의 遼水는 지금의 灤河였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주석 13)에서 언급되었듯이 지금의 灤河는 濡水로도 불리어졌었는데, 『水經注』의 「濡水」를 보면 위에서 소개된 『管子』「小問」의 齊國의 桓公이 孤竹國을 정벌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肥如縣 근처의 산 위에 있는 祠堂에 얽힌 전설도 소개하고 있는데, 전설에 등장한 그곳의 강명이 遼水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水經注』의 편찬자인 酈道元도 지금의 灤河를 遼水로 인정했음을 알게 된다. 肥如縣은 孤竹國지역으로서 지금의 灤河 하류유역에 있었다.(『漢書』「地理志」)







지금까지의 고찰로서 분명하여진 것은 先秦時代로부터 西漢 초에 이르기까지의 遼水는 지금의 灤河였으며, 따라서 당시의 遼東은 지금의 遼河 동쪽이 아니라 灤河의 동쪽지역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에 遼東의 대부분은 古朝鮮에 속해 있었고, 그 서남부 일부가 燕·秦·西漢에 속해 있었다.




遼東이 古朝鮮에 속해 있었음은 『史記』「朝鮮列傳」과 다음에 언급된 주석 35)의 본문에서 衛滿朝鮮을 치기 위하여 출병한 西漢의 左將軍 荀彘가 遼東에 출격하여 衛滿朝鮮의 右渠王과 싸웠음을 전하는 내용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戰國時代로부터 西漢 초에 이르기까지의 국경선이 확인됨으로써 더욱 분명하여진다.





『鹽鐵論』「險國」에는 戰國時代 燕國의 동북부 국경이 遼水와 碣石이었다고 적혀 있다. 戰國時代의 遼水는 지금의 灤河였고, 碣石은 지금의 河北省 昌黎에 있는 碣石으로 灤河의 동부연안에 위치하므로 戰國時代 燕國과 古朝鮮의 국경은 북부는 灤河로 형성되었고, 남부는 灤河의 중하류로부터 碣石으로 이어지는 선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燕國의 遼東은 灤河의 하류 동부연안으로 灤河와 碣石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秦國의 遼東도 이 지역이었다. 秦帝國의 二世皇帝가 郡·縣을 순행하면서 碣石山을 다녀 온 일이 있는데, 이때 二世皇帝를 수행했던 대신들이 碣石山에 있었던 始皇帝의 순수비 귀퉁이에 자신들의 이름을 기념으로 새기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것을 안 二世皇帝가 대신들이 자신들이 이름만을 새겨넣고 始皇帝의 공덕을 새겨넣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그러자 대신들은 碣石山에 가서 始皇帝의 송덕비를 세우고 돌아온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司馬遷은 『史記』에서 대신들이 遼東에 다녀왔다고 적고 있다.(『史記』「秦始皇本紀」二世皇帝 元年條) 이 기록은 秦時代의 遼東이 碣石山이 있는 지금의 灤河 하류의 동부연안이었음을 알게 한다.







西漢초의 遼東도 같은 지역이었다. 『漢書』「張陳王周傳」에 의하면 西漢 초에 周勃이 燕王 盧綰의 모반을 평정하면서 盧綰을 추격하여 長城에까지 도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上谷郡·右北平·遼東郡·漁陽郡 등을 평정하였다. 그런데 西漢 초에 새로 長城을 축조하였거나 동북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한 일이 없으므로, 周勃이 도달한 長城은 秦長城 소위 萬里長城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평정된 遼東郡을 포함한 여러 郡·縣은 秦長城 안쪽에 있었을 것임을 알게 된다.





秦長城의 東端은 지금의 灤河 하류 동부연안인 碣石지역이었으므로,(尹乃鉉,「古朝鮮의 西邊境界考」pp.18~21) 西漢 초의 遼東郡도 燕·秦의 遼東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지금까지 고찰로서 분명해진 것은 先秦時代로부터 西漢 초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에 속했던 遼東은 灤河 하류 동부연안으로 灤河로부터 碣石에 이르는 지역이었고, 遼東의 나머지 부분은 古朝鮮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밝히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언제부터 지금의 遼河가 遼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漢書』「地理志」玄菟郡條에는 遼水가 보이는데, 이 강은 그 위치나 흐르는 방향으로 보아 지금의 遼河이다. 다시 말하면 『漢書』에 보이는 遼水는 지금의 遼河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에 근거하여 西漢時代의 遼水는 지금의 灤河가 아니라 지금의 遼河였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漢書』는 東漢時代에 편찬된 것으로 西漢 말까지의 역사지리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西漢時代에 그 동북지역은 영토에 변화가 있었다. 주지되어 있는 바와 같이 西漢 武帝는 元封 3년(기원전 108)에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漢四郡을 설치하였는데, 玄菟郡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漢書』「地理志」의 玄菟郡에 보이는 遼水는 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킨 후에 西漢의 영토에 편입된 지역의 강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遼水라는 강의 명칭이 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이 西漢에 편입됨에 따라 지금의 灤河로부터 遼河로 옮겨졌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遼水는 고대 중국인들이 그들의 동북부 국경을 이루는 강에 대한 호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尹乃鉉, 앞의 논문, pp.6~7) 지금의 遼河가 원래 遼水가 아니었음은 『三國遺事』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三國遺事』順道肇麗에는 遼水는 일명 鴨淥인데, 지금은 安民江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西漢 武帝 이후에 중국인들이 지금의 遼河를 遼水라고 부른 이후에도 고구려인들은 그것을 鴨淥水라고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安民江이라고 했음을 알게 된다.


≪參考文獻≫
『三國遺事』卷3「興法」順道肇麗.
『史記』卷6「秦始皇本紀」二世皇帝 元年條.
『漢書』卷28「地理志」下 玄菟郡 高句麗縣條·肥如縣條; 卷40「張陳王周傳」
 『呂氏春秋集解』卷13 「有始覽」
 『淮南子』卷4 「墮形訓」
 『說苑』卷18 「辨物」
 『水經注』卷14 「濡水」
 『鹽鐵論』卷9 「險固條」
 尹乃鉉,「古朝鮮의 西邊境界考」『藍史鄭在學博士古稀記念, 東洋學論叢』1984.
陳槃, 『不見於春秋大事表之春秋方國稿』册1, 孤竹條, 1970.
『辭海』卷下, 1979, 上海辭書出版社.
高洪章·董寶瑞, 「碣石考」『歷史地理』3輯, 1983.
                         
고구려거련 20-01-30 04:45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는 기록들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출처: 이정훈 기자 / 신동아 요약

 

거란 역사서 ‘요사(遼史)’ 의 놀라운 증언 


우리 교과서는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고 밝혔으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정사(正史)인 ‘요사(遼史)’에는 광개토태왕 이후 패망할 때까지 요양을 평양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고대에는 지금의 요서를 요동으로 불렀으니 고구려 영토는 요하를 건너 서쪽까지 미쳤다.


‘요사(遼史)’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와 함께 제3자의 관점에서 우리 고대사를 알려주는 사서로 꼽혀왔다.
복기대 교수는 중국 유학 시절 ‘요사遼史’와 ‘금사金史’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만주지역을 답사해 사료와 맞춰보며 ‘요사遼史’ ‘금사金史’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역사 기초자료 번역 및 연구 사업’을 입안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을 통해 번역을 지원했다.



단국대 이상훈 교수와 이성규 교수가 실무를 맡아 출판을 하고 번역은 김위현 교수가 제자 김한기 변은숙 씨 등과 함께 했다. 김 교수는 번역의 전체적인 틀을 만들어 세밀히 고증했다.
 

중국은 한 왕조가 끝나면 다음 왕조가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렇게 25개 역사서가 만들어졌다(통칭 ‘25사’). 그런데 선비족이 세운 북위 등 5호16국 시대의 왕조와 요, 금, 몽골족의 원(元), 여진의 후예인 만족(滿族)이 건국한 청(淸)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었다.
 

요遼는 고려와 3번 전쟁을 했고,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적국 고려의 선조인 고구려와 고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으니 이들의 기록은 더욱 객관성을 갖는다. ‘요사遼史’에서 주목할 부분은 요나라 지리를 정리한 ‘지리지’다. 그중에서도 요나라 동쪽 지방인 ‘동경도(東京道)’ 부분이다. 요나라는 동경 서경 남경 상경 중경의 오경(五京) 제도를 갖고 있었다. 요나라는 동경도(東京道)의 중심인 동경을 지금의 요령성 요양(遼陽)에 뒀다. 그때도 요양은 요양으로 불렸다.
 

‘요사遼史’ 지리지 동경도(東京道) 편은 요양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 조선은 고조선(단군조선)을 가리킨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해놓았는데 ‘요사遼史’에선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우리는 요령성 땅을 세로로 가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동쪽을 ‘요동(遼東)’, 서쪽을 ‘요서(遼西)’로 부른다. 요령성을 관통하는 강을 요하遼河로 부르게 된 것은 거란이 요遼나라를 세운 다음이다. 요나라가 있기 전 이 강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대의 기록은 중국인만 남겨놓았는데, 요양은 중국인의 역사 무대인 중원(中原)에서 너무 먼 곳이기에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요하遼河의 ‘요(遼)’는 ‘멀 요’자다. 한족은 요하를 ‘멀리 있는 강’으로만 이해했다. 고대 중국인들은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흐르는 강을 ‘요하遼河’라고 불렀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연결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산해관까지를 영토로 인식했으니, 그곳에서부터 동쪽의 강은 ‘요하遼河’로 통칭됐다.
 


산해관 동쪽으로 난하, 대릉하, 그리고 지금의 요하遼河가 있다. 진나라 때의 중국인들은 난하를 요하로 불렀으니 난하 동쪽이 요동이었다. 난하 동쪽은 지금 요하의 서쪽이니, 요나라 이전인 고구려 시절에는 요동이 요서가 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는 요동을 지금의 요동으로 보고, 고구려 성(城)이 전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던 것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수(隨)와 당(唐)의 성은 지금의 요하까지 이르도록 동진(東進)시켰다. 고구려 영토를 중국에 헌납한 것이다.
 


‘요사遼河’ 지리지는 ‘요양은 진(秦)나라 때 요동의 변방에 속했다’고 밝혀놓았다. 요양은 요하 바로 동쪽에 있으니, 요동의 변방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진나라 시절이라면 요동의 변방에 있는 것이 맞다. ‘요사遼河’는 고대의 요동이 지금의 요서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거련 20-01-30 04:46
   
거란의 선조는 고구려와 혈투를 벌이고 패배해 복속됐다가 고구려가 무너진 후 세력을 형성해 고구려를 이은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다. 따라서 이들이 고구려와 관련해서 거론한 지리 기록만큼은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요사遼河’ 지리지는 고구려와 선비족 간의 싸움을 소재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의 위치를 거론한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연결한 것은 북쪽에 있는 흉노의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 이후 한나라의 여러 왕이 흉노를 토벌했다. 흉노족이 힘을 잃은 내몽골 지역에서 일어난 게 선비족이다. 선비족에서는 모용부와 우문부 탁발부 등 여섯 부족이 강력했는데, 리더는 부족 이름을 성(姓)으로 사용했다.
 
먼저 크게 일어난 것은 모용외-모용황 부자(父子) 때의 모용 선비족이다. 아버지 모용외가 세력을 키우자 아들 모용황은 황제에 올라 연(燕)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노관이 이끌었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전연(前燕)’으로 표기한다.
 
그때 중국에서는 유비와 조조 손권이 다투던 3국 시대가 끝나고 중국인과 북방민족이 뒤엉켜 싸우며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위진남북조시대, 일명 5호16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전쟁이 잦았다. 동쪽에서 팽창하던 고구려는 서쪽에서 확장하던 모용외 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고-연전(高燕戰)을 벌인 것이다.
 

가장 강력한 ‘고연전(高燕戰)’은 고구려 고국원왕 때인 342년 전연의 초대 황제 모용황 군의 침입으로 일어났다. 모용황은 아버지가 당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듯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생포했다. 그리고 고구려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갔다.
 
이에 고국원왕이 굴복해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고 어머니도 보내주었다. 그리고 고국원왕을 ‘제후국 고구려’의 왕으로 임명했다. ‘삼국사기’는 전연의 공격을 받기 전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었는데 침공 후인 343년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했다고 적어놓았다.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의 압록강가에 가보면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태왕의 능을 비롯한 여러 고분과 광개토태왕비, 그리고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사가들은 전연군에 대패한 고구려가 임시 천도한 곳이 집안 일대가 아닐까 보고 있다.
                         
고구려거련 20-01-30 04:47
   
광개토태왕의 ‘복수혈전’ 
 
고구려를 굴복시킨 전연은 고국원왕이 살아 있던 370년 새로 일어난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고국원왕은 원수를 갚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로 진나라를 부추겨 전연을 공격해 무너지게 했다. 전연을 무너뜨린 진나라는 진시황의 진나라 등과 다르다. 사가들은 이 진을 다른 진과 구분하기 위해 ‘전진(前秦)’으로 적고 있다.
 

전연前燕이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기 전, 모용황의 동생 모용수가 전진에 투항해, 부견의 부하가 됐다. 전연前燕이 무너진 이듬해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국원왕은 평양(평양 동황성인 듯)까지 쳐들어온 백제군과 싸우다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371년). 기사회생을 위해 애쓰던 풍운아 고국원왕은 그렇게 스러졌다.
 
이로써 백제는 무너진 전연前燕을 대신해 고구려의 새로운 원수가 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이 등극하면서 국력을 회복했다. 그러던 382년 전진前秦이 동진(東晉)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그러자 전진前秦에서 부견의 부하로 있던 모용수가 독립해 384년 다시 연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이를 ‘후연(後燕)’으로 부른다.


후연後燕이 출범한 해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이 죽고 동생인 고국양왕이 등극했다. 이듬해(385년) 1월 고국양왕은 후연後燕을 공격해 승리했다. 그해 11월에는 후연이 반격해 승리했다. ‘고연전’이 재개된 것이다.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그의 아들 광개토태왕(391~412)이 등극했다. 396년 후연에서는 모용수가 죽고 아들 모용보가 황제가 됐다.
 
광개토태왕은 400, 402, 404, 407년 연거푸 공격해 후연後燕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광개토태왕 군은 지금의 내몽골과 하북성 지역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광개토태왕비는 선비족을 ‘비려(碑麗)’로 표현하면서 광대토태왕이 비려를 공격해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고 적어놓았다. 지리지는 모용보가 이끄는 후연이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옛땅을 내주게 된 것을, ‘모용보가 고구려왕 고안(高安·광개토태왕의 이름)을 그곳(요양)에 살게 했다’고 적어놓았다.



후연後燕은 광개토태왕 군과 함께 탁발 씨가 세운 또 다른 선비족의 나라 위(魏·북위)의 공격을 받아 그로기 상태가 됐다. 탁발 선비는 위나라를 세운 뒤 성을 원(元)씨로 바꿨다. 이 위나라를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북위’ 또는 ‘원위’로 표기한다.

‘요사’ 지리지는 ‘원위의 태무제가 그(광개토태왕)가 살고 있는 평양성으로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이것도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요양으로 재천도 했음을 보여준다.

 
407년 ‘고연전’이 끝나자 후연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고구려 출신인 고연이 새 왕조를 열었다. 고연은 연을 그대로 국호로 삼았는데, 사가들은 이를 ‘북연(北燕)’으로 명명했다. 광개토태왕의 복수심은 대단했다. 그는 할아버지(고국원왕)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공략해 아신왕을 생포해 항복을 받았다. 백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광개토태왕비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새겨놓았다.
 

고구려와 합세해 후연을 무너지게 한 북위는 5호16국 시절 선비족이 세운 나라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이러한 북위는 고구려와 싸우지 않고 외교 관계로 경쟁했다. 고구려와 북위가 양대 효웅이던 시절 또 다른 선비족인 거란이 등장했다. 광개토태왕은 이들을 공격해 굴복시켰다. 그 후 거란은 고구려가 약화될 때만 반기를 드는 고구려의 반(半)복속 종족이 됐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장수태왕 때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기록했다. 시차는 있지만 평양 동황성에 있던 고구려가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지리지에서, 장수태왕 때 옮긴 평양은 서경이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고려 때 서경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 국사학계는 장수태왕 때 고구려가 북한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보게 됐다. 북한 역사학계는 평양이 고향인 김일성 가계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사遼史’ 지리지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평양으로 불렀던 원래 수도 요양으로 재천도했다고 밝혀놓았다. 이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가장 큰 혼란이다. 고구려와 싸운 거란이 요양을 고구려의 수도라고 해놓았는데, 우리 역사학계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북한의 평양인가, 중국의 요양인가.
 


고구려 말기인 영양왕 때 수나라가 대군을 보내 공격했다가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 군에게 대패했다. 내호아가 이끈 수나라 수군은 패수(浿水)를 따라 들어가 평양을 공격하려다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 수군에게 일격을 당했다. 우리는 고구려의 수도를 평양으로 보기에 패수를 대동강으로, 살수는 청천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사서들의 기록은 다르다. 살수에 대해 거론한 중국 사서는 거의 없지만, 패수를 거론한 사서는 많다. 중국 사서들은 패수가 요령성에 있었던 것으로 서술해놓았다. ‘요사遼史’ 지리지가 요양 인근의 강 이름을 거론하는 중에 패수가 있다. 패수가 요양 인근에 있다면 수나라와 싸울 때의 고구려 수도는 평양이 아니라 원래부터의 수도인 요양이라는 얘기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들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가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뒀다고 했다. ‘요사遼史’ 지리지도 마찬가지인데 안동도호부는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았다.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닌 요양을 수도인 평양으로 삼고 있을 때 당나라에 패망했다고 밝힌 것이다.
 
요양이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의 수도였다면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은 지금 요하를 건너 훨씬 서쪽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때는 그곳을 요동으로 불렀으니 전방 성들은 그곳에 있고, 고구려는 지금 요하 혼하 태자하 등을 해자(垓字)로 삼아 수도인 요양을 보호했을 것이다.
 

 

발해 중경 현덕부 위치가 다르다. 
 

‘요사遼史’대로라면 발해의 중경은 지금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1000여 km 떨어진 요양에 있어야 한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요하를 건너 당(중국) 쪽으로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고구려에 복속한 종족 중 가장 충성한 것은 말갈족이다. 말갈족은 고구려가 수, 당과 전쟁할 때 적극 참전했다. 대(大)씨 성을 쓰는 말갈족이 고구려의 귀족이 됐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무너지자 대씨 집안의 대조영이 일어나 ‘대진국(大震國)’을 세웠다. 중국 사서들은 대진국을 ‘발해’로 표기했다.
 
대진국은 과거보다 세력을 키운 거란을 지배했다. 대진국은 당나라와 통일신라가 스러질 무렵 위기에 처하는데, 그때 야율(耶律)씨가 이끄는 거란족이 일어나 대진국을 무너뜨렸다. 그 후 요나라를 세우고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강국이 됐다. 요나라와 남중국의 송나라, 그리고 고려는 위-촉-오가 다툰 중국의 삼국시대처럼 삼각체제를 형성하며 부딪쳤다.
 
황제를 자칭한 나라들은 3경이나 5경 제도를 택했다. 발해는 대이진(大彛震)이 이끌 때 5경 제도를 택하고 황제국을 선포했다.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조선 실학자들의 추정을 근거로 중경 현덕부가 중국 길림성 서고성자(西古城子)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은 전혀 다른 기록을 남겼다.
 
요사 지리지는 ‘당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요양)을 홀한주로 바꾸게 했다.…대이진 때 옛 평양인 홀한주를 중경 현덕부로 불렀다’고 적었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우리는 중경 현덕부를 서쪽으로 1000여 km 옮긴 새로운 발해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중경이 요양에 있었다면 서경은 중경 서쪽에 있을 테니,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지금의 요하 건너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우리 역사학계는 우리와 다툰 인접 국가 사료에 기록된 것보다 작은 영토선을 그려놓았다. 이는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가깝다. 이렇게 하니 중국은 “얼씨구나” 하며 동북공정을 밀고 들어온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었다고 고집하는 것은 한민족이 한반도에서만 살았다는 전형적인 반도사관이다. 반도사관은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 때 생겼다. 우리가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삼국사기’는 고려 때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 중종 때 인쇄된 것이 전해진다. 중종 이전 ‘삼국사기’는 여러 번 개수(改修)됐으니 여기에도 소중화 사관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고구려와 발해사를 또 축소했다. 조선을 지배하게 된 일제는 이를 적극 전파해 식민사관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그것에 짓눌려 대륙사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산해관에서 끝나는 만리장성을 동쪽으로, 동쪽으로 자꾸 확장하고 있는데.
포테이토칩 20-01-31 21:09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어디로........
청천 20-02-01 17:38
   
산동성까지 고조선의 영향력 아니었나요?
토마스베델 20-03-20 21:05
   
이병도가 이미 자백한 날조를 신앙으로 모시는 토왜가 사라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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