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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1-13 17:30
[북한] 황장엽이 김정일에 대한 비판..김일성에 대해..10편.
 글쓴이 : 돌통
조회 : 659  

09편에서 이어서~~ 

 

 

 

김일성이 광복 후 나이나 투쟁경력으로 볼 때 한참 선배인 최용건이나 김책을 제치고 무리의 대표로 떠오른 데 대한 그녀의 분석은 시사하는 바 크다.
 
 
김일성이 1937년 보천보 전투를 통해 국내에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고, 성격이 활달해 리더십이 있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독립된 부대를 오래 거느리고 있어서 직계 조선인 부하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김일성이 동포들이 많은 동남만주(1로군)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길동지역(길림성 동쪽 북만주 지역·2로군)에서 활약한 최용건이나 더 북쪽인 북만주(3로군)지역의 김책에 비해 부대원 가운데 조선인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김책이나 최용건은 중국인 부하들이 많았으며 참모 역할을 많이 했기 때문에 직계 부하들이 적었다고 한다.  
 
그녀의 말해 의하면 당시 88특별여단의 조선인은 많을 경우 300명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180명 가량이 김일성 부대원이거나 김일성 부대와 합동 군사작전을 자주 폈던 1로군 소속이었다.
 
그녀의 말은 김일성이 김책·최용건을 제치고 떠오른 또다른 이유로 이들 각자와, 소련 및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도 작용했으리라고 추측했다.
 
 
항일혁명 투쟁에 일찍이 뛰어들고 중국공산당에도 앞서 입당한 최용건과 김책은, 독자적 군사활동을 주로 펴온 김일성보다 훨씬 중공당과 가까웠다고 한다.
 
이에 소련군이 최용건이나 김책을 꺼리고,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비슷한 서열로 리더십이 있는 김일성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더욱이 김책은 소련이 강력히 권하는데도 88여단에 합류하기를 거부하다 가장 뒤늦게 들어와 껄끄러운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김책은 김일성에 비해 9살이 많은 1903년생인데, 사리판단이 공정하고 신중해 특히 중국공산당 내에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그는 중국인들이 많은 북만주의 3로군 지역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며 항일투쟁을 벌였는데, 평소 언행이 신중해 중국인들도 매우 어려워했다. 
 
이때  3로군 내부에서 투쟁노선 등을 놓고 갈등이 생기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 김책이 조정역을 훌륭히 해내며 처신을 바로 해서 중국공산당 안에서 평가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하기를  당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연안 중국공산당 본부와 긴밀한 연락이 안 되는 상태에서, 초기에 3로군 총지휘를 맡았던 조상지가 중국공산당 본부의 노선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행동을 하려고 해서, 이조린 김책 등과 마찰이 심각했는데, 김책이 이조린을 지지하면서도 일을 무난히 수습해 위기를 넘기게 됐다는 것이다. 그녀는 굳이 비유하자면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총리와 성격이나 역할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녀에 의하면  김책은 북만주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면서 소련령으로 넘어오라는 88여단 지휘부의 지시를 거부했다. 그는 “누군가 근거지를 지키는 사람도 있어야지 모두 버리고 소련 땅으로 가면 이곳은 누가 지키느냐”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동북항일연군이 88특별여단으로 편성되면서 소련군에 사실상 편입하는 것은 당 노선에 맞지 않는다는 강력한 거부의 뜻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항일연군 지휘부에서는 일본군의 맹렬한 공세로 희생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훗날을 생각할 때 고급 간부들이 버티다가 죽으면 전략적 손실이 너무 크다면서 국경을 넘어올 것을 강력히 종용했다.

 

김책이 계속 말을 듣지 않자 지휘부가 김책의 후임자를 일방적으로 파견하기에 이른다. 결국 김책은 가장 늦게 1943년 말 소련국경을 넘어 88여단에 합류하고, 후임으로 파견된 중국인 간부는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고 말았다.

 

그녀는 최용건에 대해서도 말했다.  최용건 역시 투쟁 경력이 화려하다.그는 김일성보다 12살 많은 1900년생으로 좌익계 조선 혁명가 중 가장 연장자에 속한다. 그는 이승훈이 세운 기독교계 오산학교(당시 교장 조만식)에 다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운남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 

  

당시 황포군관학교에는 장개석이 주도하는 국민당원들과 손을 잡은 중국공산당의 주은래 등이 있었다. 최용건은 1927년 광주(광동)코뮌 폭동에 참가했다.

조선인 혁명가들이 200명 정도 참가했던 이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혁명가가 죽었을 때 최용건 등 살아남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만주로 파견된다.

 

화요파로 파견된 최용건은 길림성과 흑룡강성 등에 소학교, 농민학교 등을 여러 개 세우면서 교육사업을 하고 이곳을 혁명 근거지로 삼아 조직적으로 항일세력을 키운다.

 

그녀 자신은 어려서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제법 학교 규모가 커서 중급반 고급반까지 있었고 건물도 2층이었으며, 학생이 많을 때는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저녁에는 농민들을 모아 야학을 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최용건이 교장이었으나 얼굴을 보기는 힘들었고, 황포군관학교 생도로 최용건을 따라온 젊은 선생들이 가르쳤다고 한다. 최용건은 이러한 항일 근거지 학교들을 돌아다니면서 항일투쟁을 했다.   

 

당시 항일투사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여러개 썼는데, 각종 기록에 최석천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이 바로 최용건이다. 김지강이라는 가명도 썼다.

 

최용건은 동북항일연군 시절이나 88여단 시절에도 직접적인 군사활동 보다는 이론가형으로 정치교육 등 당 쪽의 고위 직책을 주로 맡았다. 그는 다 아는바와 같이 광복 후 북한 정권에서 부수상을 지냈다.

 

그리고 여기 남한에서는 보천보,보천보전투 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들은바 여러번 있다.

 

이에 비해 김일성은 주로 야전 빨치산활동에 주력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알려져 있어 중복을 피하지만, 동북항일연군 시절에도 일선 지휘관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병사로 출발했을 테지만, 점차 두각을 나타내면서 지휘관이 되고 여러 차례의 성공적 전투를 통해 동남만 지역에서 강력한 부대로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그는 동북항일연군이 연대틀을 갖추고 ··로군으로 재편되자 제2군 3사장, 6사장 등을 지내며 독립적인 단위 부대장으로 인상적인 군사활동을 펴나간다.

 

김일성(김성주)이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1937년 보천보 전투다. 보천보는 압록강변의 작은 마을로 총 가구 300호에 1400명 가량 살고 있었는데, 이중 일본인이 26가구 50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불과 20km 떨어진 곳에 혜산진이 있다. 김일성 부대는 현지 공작원들과 연계해 치밀한 사전준비를 한 뒤 6월4일 압록강을 건너가 마을을 점령했다. 주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항일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연설하는 등 24시간을 점령했다가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혜산진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해 뒤를 쫓았으나 일본군은 오히려 사상자를 내고 도망쳤다.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이 조선땅에 쳐들어와 잠시나마 마을을 점령한 것은 처음있는 일로..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당시 동아일보 등은 호외를 내고 김일성 일파와 최현 일파의 보천보 습격사건을 실제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일본군의 제1표적이 됐는데 그의 목에 현상금 1만엔이 걸렸다.김일성부대는 동남만 지역에서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유격전을 펴 일본 토벌군을 괴롭혔는데,

 

1940년 일본군에 쫓기다 맞닥뜨린 마에다 중대를 치열한 교전끝에 섬멸해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 전투등도 김일성은 북한의 김성주인 김일성이가 맞다. 이건 확실하다.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있겠나..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워 치열한 전투를 가장 많이 치렀던 김일성이 있던 제1로군은 대부분의 지휘부가 일본군에 잡혀 죽거나 투항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간부 중에서 김일성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통틀어 1로군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다

 

지휘부가 희생될 때마다 살아남은 자들로 새로 지휘부를 구성해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1로군 제2방면군의 총지휘를 맡게 됐다. 88여단에서 총지휘자 주보중이 김일성을 예우한 것도 이런 전과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    11편에 계속~~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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