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의하면 김정숙은 조용한 편이었으나 매우 자상한 성격이어서 어린 나에게 잘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김일성의 첫째아들 유라(김정일의 어릴적 소련식 아명)와 둘째아들 슈라(1947년 멱감다 익사) 형제의 어릴 적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다.
김정숙이 낮에 훈련받으러 갈 때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겼다가 일과후 데리고 오곤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김정일이 어릴 때부터 군사놀이를 즐겼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나 연구가들은 김정일 신비화 우상화 작업의 하나로 치부하며 무게를 두지 않는것으로 아는데.. 생각해봐도 김정일이 태어난 1942년이면 김일성이 소련령 하바로프스크 훈련기지에 있을 때인데 어떻게 백두산에서 탄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르게 말한다. 김정숙이 41년 초여름 여대원들과 함께 백두산 밀영에 가서 조선국내와 장백지구 혁명조직들을 지도하는 공작사업을 했는데, 다음해인 42년 2월 그곳 귀틀집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훈련기지에서 통신원을 통해 전해 듣고 다같이 환호성을 올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당시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녀는 김정숙을 직접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전해 들었다는 김정일 백두산 출생이야기가 어느 정도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지 가늠하기는 힘들다. 그녀는 이듬해인 43년 봄 훈련기지에서 김정일을 품에 안고 온 김정숙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하바로프스크 생활은 그녀에게 중대한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한게 기억난다. 인생의 동반자로, 정치적 동지로 해로하면서 일생을 함께 지낼 지금 지내고 있고, 남편 진뢰를 그곳에서 만나 결혼을 했다고 했다. 진뢰는 그녀보다 7살 위였다고 웃으면서 말한게 뚜렷이 기억난다.
한때 그녀의 소학교 교장이던 최용건도 그녀를 불러 크게 꾸중하면서 마음을 되돌리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조국이 광복하면 다같이 고국에 돌아가 함께 지내야 할 텐데, 중국인과 결혼해 혼자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느냐고 간곡히 말렸다고 한다.
막상 최용건 본인은 중국인 왕옥환과 결혼했는데, 이처럼 간곡히 말렸던 것은 그녀의 나이가 당시 스물밖에 안돼. 진뢰와 차이가 나기도 했지만, 진중생활에서 군기를 확립한다는 뜻이 컸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더욱이 진뢰는 중국공산당 내부 노선투쟁에서 소수파인 조상지파에 속한 거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주위의 반대가 컸다고 한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압력과 추궁을 받으며, 그녀와 진뢰는 일제가 패망하면 그때 자유롭게 만나자고 약속하고 교제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녀 관계가 무 자르듯 되는 것이 아니어서 상심이 매우 컸다고 한다.
그녀(당시 계급)준위와 중국인 진뢰 소위가 연애한다는 소문이 부대에 퍼졌다. 항일투쟁을 하는 부대에서 남녀간 문제는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자칫하면 혁명열기와 군기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비밀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그녀와 진뢰 소위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쫙 퍼지자 그녀는 상사에게 불려가 엄한 추궁과 비판을 받았다. 상대가 중국인이어서 더욱 설명하기가 난처했다고 한다.
이상.. 09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