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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1-12 15:00
[북한] 북한 독재 괴물 인민공화국.18편.북한건국과정.역사
 글쓴이 : 돌통
조회 : 920  

김일성 승리로 끝난 '분국회의'

 
 
◎2차 집행위/자기의중대로 「통일전선」채택 성공/신진공산주의자들도 대거 가세 국내파 눌러

 


김일성은 입북 3개월만인 45년 12월18일 마침내 북한 공산당조직을 장악했다. 박헌영과의 비밀담판에서 북조선분국의 설치를 얻어낸지 두달만이었다.


45년 12월18일 열린 북조선분국의 비밀회의는 책임비서로 김일성을 선출했다. 김일성은 명실공히 분국을 장악하게 됐으며 김일성의 분국은 사실상 북조선공산당으로 행세하게 된다.


이날 회의는 북조선분국 제3차확대집행위 두번째 날 비밀회의였으며 의제는 지도부 개편안이었다.


일제때 동양척식주식회사 평야지점이었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회의장엔 긴장이 감돌았다.


그때까지 제1비서였던 김용범이 위장병을 앓다 수척해진 모습으로 연단에 섰다.


김은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능력뿐만 아니라 건강상의 이유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우니 사임하겠다』고 사퇴의사를 밝히곤 바로 『김일성 동지를 책임비서로 추대한다』고 제의했다.


○권력장악 “분수령”


순간 회의장은 술렁거렸다.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가 장내를 휩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곧이어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오기섭·정달헌·이봉수 등 국내파들은 그저 보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추대한다는 김용범의 제의는 거수표결조차없이 만장일치로 이렇게 통과됐다.


이로써 막후실세였던 김일성이 전면으로 부상하게 됐다. 김에게 저항해온 국내파들은 사실상 무너졌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서울중앙에 박헌영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책임비서 취임을 계기로 북조선공산당분국이 조선공산당내에서 가장 중요한 조직으로서 비중을 차지해 가게 되고 공산당지도노선의 주도자는 박헌영에서 김일성으로 옮겨가게 된다.


10여일후에 신탁통치문제가 터지자 당초 반탁이었던 박이 김일성이 찬탁노선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 회의에서 이북공산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기까지에는 많은 사전 정지작업이 필요했다.


10월초 박헌영과의 비밀회동을 통해 김일성은 「분국」이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발판을 확보했으나 그후 돌아가는 상황은 김일성파들에게는 지극히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우선 당이 만들어진지도 꽤 됐는데 당이 대중들에게 정치적 목표나 투쟁과업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노선을 둘러싼 국내파들과의 갈등과 민족주의 세력의 전반적인 우세속에 공산당이 갖는 한계 때문이기도 했다.


김일성파들은 그들이 전면에 나서 권력을 장악하든지,아니면 관망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러한 배경하에 개최된게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였다.


회의는 45년 11월23일부터 24일까지 열렸다. 그러나 이 회의에 대해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은 거의 전무하다.


○조직정비 서둘러


전 북한노동당 고위간부였던 서용규씨는 이에 대해 주목할만한 증언을 하고 있다.


서씨의 증언이다.


『2차회의에 앞서 11월20일부터 21일까지 예비토론회가 개최됐습니다.


여기서 김일성은 소위 「4대당면과업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합니다.


그 내용은 토지·노동·산업 등에서 민주개혁을 해야하고,이를 통해 혁명의 근거지를 이북에 창설해야하며 민족반역자를 숙청하되 민족통일전선의 기치하에 전 민족이 단합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예비토론회에서 김일성의 이같은 보고에 대해 별탈이 없었다.


그러나 23일 2차 확대집행위원회가 개최되자 국내파들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정치노선이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10월 열성자회의에서 이미 정치노선이 「인민전선」으로 결정이 났는데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통일전선」을 들먹거리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김일성파들로부터 즉각 반격을 받고 움츠러들었다.


서씨의 증언­.


『2차회의에는 일제때 공산주의 지하서클을 하다가 체포된후 해방이 되면서 풀려나온 신진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참가했습니다.


김택근·송관조·문태화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죠.


이들이 거침없이 민족통일전선을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게다가 주영하등 일부 국내파들도 이에 동조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김일성의 4대당면과업에 대한 결정서,즉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서가 채택되고 만거죠.』


정치노선 결정서의 채택은 김일성파의 본격적 승리에 대한 예고였다. 북조선분국의 정치노선은 김일성파의 생각대로 결정됐으나 김일성파에게는 넘어야할 언덕이 또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당조직정비문제였다. 당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조직은 아직 미약했다. 당원수는 4천2백여명에 불과했다.


서용규씨는 『김일성이 뒷날 「당시 그대로 놓아두어가지고는 죽도 밥도 안되겠더라」고 회상한 적이 있다』며 이렇게 증언한다.


『10월중순에 당이 창건되고 11월말에 정치노선이 확립됐으나 이를 관철하기 위해 투쟁해야할 조직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습니다.
 
 
당조직만 짜였지 명령체계나 규율이 서질 않아 중구난방이었죠. 도당은 도당대로,군당은 군당대로 제멋대로 움직여 중앙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일부 지역에서는 「박헌영 만세」 「오기섭만세」를 외칠 정도였습니다. 때문에 중앙집권제를 시급히 확립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김일성이 당을 틀어쥐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게 된거죠.』


그러나 이같은 조직정비상의 측면을 포함해 보다 본질적인 요인이 내재돼 있었다.


○“서울중앙서 독립”


그것은 「박헌영의 서울중앙으로부터 이제는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김일성파들 사이에서 팽배해진 점이다.


김일성파로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박헌영은 분국설치를 승인한후 서울중앙으로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 대목에 대해 북한 문제전문가 서대숙 교수(미하와이대)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박헌영이 북조선분국을 등한시한 이유는 오기섭등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믿은거죠.


즉 조선공산당 본부가 서울에 있는데다 믿을만한 부하들이 분국에 대거 들어가 있는 만큼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돌아가겠느냐고 판단한 것입니다.』


게다가 서울중앙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서울중앙은 상급기관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게된 상황으로 몰린 것이다.


서씨의 증언­.


『당시 소련이나 김일성은 남과 북의 당조직을 통합해서 공산당중앙위를 평양에 두기를 바랐겠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북에서만이라도 분국이 실질적인 당중앙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정치노선을 관철한 만큼 당조직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3차 집행위/거수표결 조차없이 책임비서 차지/빨치산파서 분국명칭변경 들고나와 소란도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는 그런 분위기속에서 12월17일에 개막된다.


지금까지 이 회의에 대해 알려진 것은 김일성이 보고를 하고 책임비서로 선출됐다는 정도다.


서용규씨와 김창순씨(북한문제연구소이사장)는 이 비밀회의의 경과를 보다 자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우선 서씨의 회고다.


『회의장에는 공산당 리더들 및 도·군책임자등 1백50여명이 모였습니다. 상석에는 김일성·안길·주영하·오기섭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틀전에 소련서 들어온 허가이도 참석했어요. 허는 소련에서의 당생활경험을 살려 결정서 채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회의가 개막되자 김일성이 세시간에 걸쳐 「북부조선당 공작의 착오와 결점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다.


김일성은 이를 통해 당간부중에 불순분자가 침투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조직체계 정비를 강조한다.


서씨의 계속되는 증언­.


『김일성은 신의주 용암리사건에 관계된 면당위원장은 일제때 면서기출신이어서 당사업은 제대로 하지 않고 월권행위만 일삼았다고 비판했습니다.


또 황해도의 한 군당위원장은 만주에서 고등계 형사부장이었고,함남 어느 산골에도 형사부장 출신이 어엿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등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했죠.


그런데 후에 발간된 김일성선집에 수록된 김의 보고내용에는 이같은 구체적인 내용이 삭제됐더군요.』


김일성의 보고에 이어 토론이 벌어졌다. 지방 당조직의 부실,당원들의 비행,노동자·농민의 영입미비 등의 문제점에 대한 토론은 그런대로 진행됐다.


그러나 김일성을 위시한 빨치산파들이 분국의 명칭변경을 요구하자 회의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소란해졌다.


국내파들이 반발한 것이다.


김창순씨는 신의주에서 평북신보 주필로 있을 때 평북인민위원회 인민위원장이었던 정달헌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라는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바꾸자고 제의하자 국내파들은 즉각 반발을 했다는 겁니다.
 
 
특히 정은 「한 나라에 두개의 공산당이 어디에 있느냐. 북조선공산당이라고 하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공산당이 아니냐. 일국일당이어야지 어떻게 일국이당원칙이 있을 수 있느냐」며 격렬히 따졌다는 것이죠.


그러자 김일성파의 김책이 나서 「이렇게 토론만 해서는 끝이 없으니까 찬반

토론없이 거수로 결정짓자」고 제의했다는 거죠.



그러나 정이 「그것은 비민주적이다. 어떻게 당명을 고치는데 찬반토론 없이 하느냐. 의장직권으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배석했던 이그나티예프 대좌가 「이 문제는 보류하는게 좋겠다」고 해 논의가 중단됐다는 얘기입니다.』



서용규씨는 이와는 조금 뉘앙스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서씨의 증언이다.



『이 회의 이후부터 분국의 명칭이 「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로 바뀌었습니다. 공식문서상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됐죠. 서울의 박헌영이 지도하는 공산당과 차이를 두고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고친 것입니다.』



회의는 이런 우여곡절속에 다음날인 18일 오전까지 토론을 계속해서 조직정비 및 강화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한다.



그리고 이날 오후에는 이번 회의의 초점이었던 「김일성책임비서추대안」이 처리된 것이다.

 


분국 3차회의후 김일성은 북조선공산당내에서 확고한 위상을 확립했다.



김일성은 북조선공산당의 주도권을 장악했을뿐 아니라 박헌영에 맞서는 조선공산당의 실세로 등장했다. 더군다나 박헌영이 서울에서 억압받고 지하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대해,김일성은 소련군정의 후원하에 당당하게 조직을 관리할 수 있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북한전역으로 퍼져나가고 그를 찬양미화하는 구호가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이상. 끝.  제 1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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