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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0-13 11:49
[한국사]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한마디 "어리석도다!"
 글쓴이 : 멸망의징조
조회 : 4,221  

제국주의 시대는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모든 국가가 먹느냐 먹히느냐 양단 간 선택을 강요받는 시대였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를 이룩한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팽창 없는 근대화의 길은 새로 근대화를 시작하는 국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19세기 말의 전 세계 열강들에게 최대의 침략 대상은 중국이었다. 일본이 짧은 시간 내에 열강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데 유리한 위치 덕분이었다. 중국 침략은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자라나기 위해 필연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 한국이 있었다. 한국을 어떤 식으로든 끌어들여 놓는 것이 대륙 침략에 유리한 위치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일본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한국을 무력으로 병탄하자는 주장은 충분한 무력을 갖추기 전부터 일어나 합방이 실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보다 온건한 주장이 합방 직전까지 이에 맞서 펼쳐졌다.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무단(武斷)파와 문치(文治)파의 갈등으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초기의 갈등은 무단파의 거두 사이고 다카모리가 서남전쟁(1877)으로 몰락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당시 문치파는 정한(征韓)의 필요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대외적 침략에 앞서 내부 정비가 먼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일본이 치른 대외 전쟁은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 두 차례뿐이었다. 당시의 열강치고는 전쟁을 덜 치른 편이다. 내실을 중시하는 문치파 노선이 대체로 관철된 셈이다.


한국을 어떻게든 일본에 유리한 자세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그 기간 내내 문치파도 인정한 과제였다. 조선 정부를 메이지유신과 같은 길로 이끌어 일본과 협력하는 관계를 맺자는 온건 노선에서부터 조선을 정벌해 속국으로 만들자는 강경 노선까지 여러 노선이 엇갈렸다. 결국 합방은 강경 노선에 가까운 귀착이었지만, 문치파 주장도 가미된 타협적 노선이라 할 수 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에 대해 압도적인 영향력을 확보했을 때 갑오경장을 유도한 것은 일단 온건 노선이었다. 그 과정에서 왕비 살해 사건이 일어난 것은 무단파의 불만이 분출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관파천이 촉발되어 영향력의 지속적 행사가 막힌 것을 계기로 강경 노선의 문제점이 부각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대 조선 정책은 당분간 문치파의 온건 노선을 기조로 하게 되었다. 이 온건 노선을 대표한 것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아관파천 이래의 교착 상태를 벗어나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영향력을 다시 확보했다. 이때의 온건 노선은 보호국화 정책이었다. 갑오경장을 통해 조선을 근대국가로 육성하려던 계획은 '광무개혁'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진도가 너무 처진 조선을 일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온건 노선이라 하더라도 10년 전보다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광무개혁'이라고 따옴표를 쓰는 것은 전혀 '개혁'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개혁적 요소를 가리키며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본질을 갖춘 개혁이 아니다. 실용적 목적을 위해 피상적 변화 몇 가지를 체계성도 없이 진행시킨 것일 뿐, 시대적 요구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보이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반동성은 무엇보다 황제권의 전제화에 나타난다. 일본의 온건 노선이 조선 왕권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한 측면에는 평가할 만한 의미가 있다. 권력 사유화는 대외 관계에 앞서 조선 국내의 체제 문제로서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이 문제의 극복에 일본이 노력한 것은 조선의 향후 진로를 조선 자신이 자발적으로 나아가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군주권의 축소가 침략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무조건 침략을 하려면 이런 노력을 할 필요 없이 더 쉬운 길이 많이 있었다. 아직 일본이 군국주의에 빠져들기 전의 일이었다.


온건 노선이건 강경 노선이건 한국을 일본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이상 똑같은 침략 노선으로 보자는 주장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보는 태도다. 물리적 힘으로 강제하는 강경 노선과 한국 쪽의 자발성을 가능한 한 키워내려는 온건 노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상황에서 한국의 진로는 일본의 존재와 의지를 고려하지 않고 결정될 수 없었다. 개항기 이전까지 중국의 의지를, 그리고 해방 이후 미국의 의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강대국의 의지를 고려하더라도 주동적 판단에 따른 자발적 대응이라면 이쪽 사회의 발전을 위한 선택의 기회를 스스로 찾을 여지가 있다.


절제 없는 자유가 개인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민족자결'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국가라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제한된 선택의 범위를 가진다. 한국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의 힘을 주어진 여건으로 받아들여 왔다. 청일전쟁으로 중국의 힘이 무너진 상황에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한국을 둘러싼 국제 질서에서는 일본의 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갑오경장 당시의 '친일' 내각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일본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받아들이는 방법과 범위를 조정해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와 미국에 의지해 일본의 영향력을 거부하려 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을미사변이, 다시 이에 대한 반발로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견제로 일본의 영향력이 봉쇄된 데 고종은 만족하고 권력의 사유화에만 일로매진해서 대한제국을 세웠다.


러일전쟁을 통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확보하면서 일본은 10년 전 갑오경장 때의 '지도' 방식에 비해 강압적인 '통제' 방식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1904년 8월의 제1차 한일협약으로 고문(顧問) 정치의 방식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종이 겉으로만 이에 응하는 시늉을 하면서 일본의 통제를 피하려고 온갖 획책을 했기 때문에 외교권을 공식적으로 박탈하는 을사조약과 더욱 강압적인 통감(統監)정치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겉으로만 보면 일본의 통제를 피하려는 고종의 노력에 주권 수호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권 수호를 하더라도 합당한 방법이 있고 그렇지 못한 방법이 있다. 전형적인 고종의 수법 한 가지는 의정부 대신들을 자주 갈아치우는 것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정책 결정이 황제 아닌 의정부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질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대신을 자주 바꿈으로써 의정부의 활동이 연속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대신들이 자기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이것은 무엇을 위해서라도 합당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제국을 운영하는 동안 고종은 방대한 비자금을 조성했다. 그 규모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돈과 관계되는 사업이라면 가리지 않고 궁내부로 끌어들인 것을 보면 비자금 조성에 그야말로 전력을 기울인 것 같다. 이 비자금으로 밀사들을 움직여 열강들, 특히 러시아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고종에게는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최선의 방책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이권으로 유혹하면 열강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환상을 그는 끝까지 버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을 위해 천황의 특사 자격으로 한국에 왔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듬해 3월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가 1909년 6월 통감 직을 그만둘 때는 야마가타의 강경파에 의해 합방 정책이 구체화되고 있을 때였다. 조선 통감 자리는 그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합방 후의 조선 총독은 대신 급과 총리 급 사이에서 임명되었다. 총리급을 넘어 국가 최고 원로인 이토가 총독보다 가벼운 통감 자리를 맡은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온건 노선을 대표하는 이토가 무력 합방을 피하거나 늦추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통감 자리를 떠난 몇 달 후 하얼빈에서 자신을 저격한 것이 조선 청년이라는 말을 듣고 "어리석도다." 말했다는 데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한국이 변화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기회를 최대한 만들어주기 위해 통감 자리에서 강경 노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이 늙은 정치인이 인생의 마지막 몇 해를 바친 일이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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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각 19-10-13 14:05
   
모지리 토왜놈이 똥싸지르고 도망갔네
MementoMori 19-10-13 15:10
   
토왜시키 일기를 장황하게도 처 쓰고 빤스런했구만.
centrum 19-10-13 15:21
   
하~
하늘치 19-10-13 21:43
   
한동안 안보이더만 다시 기어나왔네? ^오^
그리고 이미 구라치 회고록으로 병합은 결정된 사항이였음이 들어난지가 한참이나 지났는데 이런 출처도 없는 개소릴 아직도 싸지르는 놈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늘치 19-10-13 21:51
   
개소릴 쓰려거든 니 블로그에서나 싸질러라
니 저열한 지적 수준 이런 식으로 들어내서 개망신 당하지나 말고 ^오^
하늘치 19-10-13 22:27
   

그리고 만약 유언을 하더라도 "읔! 여자를 더 안아보지도 못하고 뒈지니 원통하도다!"라고 했겠지
도다 기와코란 여자도 강X할 정도로 호색한이였으니 wwwwwwwwwwwww
무한성장맨 19-10-15 15:29
   
와 이런글을 진짜 진지하게도 쓰셨네요.ㅋㅋㅋ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 후 신이 나서 방방 뛰어다녔던 놈이고,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착착 진행시켜나가던 인물이었어요. 이 늙은 구렁이가 죽지 않았다면 조선은 더 힘들어졌으면 힘들어졌지 나아질 일은 눈꼽만큼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바나 19-10-16 15:11
   
븅신 왜구새끼 ㅋㅋ
술먹지말자 19-10-17 13:08
   
마지막 한말은  죽으면서 남긴 으악 아니였을까 추측함
청호님 19-10-20 11:47
   
칙쇼 ㅋㅋ
서실 19-10-21 15:36
   
뒈질 놈이 잘 뒈졌는데 그런 잡종을 옹호하는 글을 대한민국 암에서 보게 될 줄은.....대한민국은 참으로 좋은 나라란 걸 다시 한 번 느낀다.
아비요 19-10-21 21:18
   
왈본 멸망의 징조인듯..
강시 19-10-27 11:43
   
ㅗㅗㅗㅗㅗㅗㅗ  똥구녁 놔두고  주딩이로 똥을 싸네
닥생 19-12-14 14:18
   
이토 히로부미가 온건 노선이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어요.
상징적인 인물이어서 사살한 거지. 그가 조선 침략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다는 얘기.
이른바 합방을 강력히 주장하는 쪽에 있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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