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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9-16 01:18
[북한] 소,꼭 「김일성집권」 아니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
 글쓴이 : 돌통
조회 : 2,080  

지금 아래의 내용들의 글들의 내용들은 실제(실화) 이며 사실이며 실제로 있었던 일들입니다.

이는 제가 우연히 읽게된 오래된..  그러니깐..   1991년 8월달에 중앙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오래된 글이기에 올려도 괜찮을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1991년이면 제 개인적으로 당시 국민학교 고학년 때인데  아주 옛날이군요..

지금으로 부터 29년 전의 일이네요..  무려 30년이라는 세월의 전에 신문에 있는 내용의 글을 읽게 되고 제법 사실 이어서 이렇게 글을 올리려 합니다.  그럼 내용 그대로 글을 시작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1991.08.12 00:00


[출처: 중앙일보] 소,꼭 「김일성집권」 아니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



연재를 시작하며/통일의 길목 역사복원



분단의 반세기는 우리 민족엔 인고의 역사이자 왜곡의 역사였다. 열강의 손으로 그어진 장벽의 뒤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위한 사실의 변조와 진실의 은폐가 이루어져 왔다.



이제 개방의 물결이 지난날의 왜곡된 진실에 새로운 조명을 가능케 하고있다.



소련의 변화,중국의 문호개방이 묻혀지고 잊혀져 가고 있던 사실의 발굴을 가능케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날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에 대한 준엄한 반성이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통일에 대비하는 민족의 동질성회복을 위한 노력이기도 한 것이다.



중앙일보는 통일이 준비되고 있는 길목에서 역사의 복원을 위한 어려운 작업에 감히 착수했다.


지난 1년여동안 자료를 정리하고 증인들을 만났다. 지난 반세기 격동과 혁명의 주역들은 이역의 망명지에서,혹은 아직도 은둔의 어둠속에서 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소련군정의 책임자로서 북한의 초창기 정권 창출을 주도했던 소련 군인들,권력의 암투과정에서 패배하고 이역의 땅으로 망명해야 했던 혁명가들,북한의 전직 고위관리들,북한관계 학자·전문가들…수백명과의 인터뷰와 증언 청취를 통해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고 감춰졌던 권력의 이면사에 한줄기 빛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본사 특별취재반은 모스크바·레닌그라드·알마아타·타슈켄트 등 소련,연변·심양·북경·하얼빈 등 중국,그리고 동경,하와이·필라델피아·워싱턴 등 미국 등에서 이들을 직접 만나고 자료를 발굴,수집했다.


이중에는 국내외에서 처음 공개되는 사진과 북한 노동당의 비밀문건들도 포함되어 있다.



본사는 이러한 생생한 역사적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김일성 정권의 창출과정을 조명하는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장기 연재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이 단순히 숨겨진 역사의 재발굴에 그치지 않고 분단과 이념 대결로 일그러진 우리 역사의 복원이자 분단극복의 한 노력으로 기여할 것임을 믿는다.



◎소 정치장교 요정 초청/고당·김 운명의 첫대면



1945년 9월30일 오후 6시.



평양시내 일본식 요정 「화방」에서는 조만식과 김일성의 운명적인 첫 대면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 자리를 주선한 사람은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 25군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이었던 메크레르 중좌였다.



북한정권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진주군의 막후 실력자가 이후 당시 북한의 두갈래의 큰 정치적 줄기였던 민족주의세력의 거두와 소련군에 밀착된 빨찌산의 한 지도자를 첫 대면시키는 자리였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한낱 술자리에 불과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45년 10월14일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 전후 처음 만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날 메크레르 중좌의 주선아래 비공식적으로 따로 만난 것이다.



지금 모스크바에 생존해 있는 메크레르씨(82)는 이렇게 당시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이글은 1991년 이었을때의 기사 이기 때문에 확인은 하지 않았지만 현재 2019년 인데 만약 이 사람이 살아있다면 대충 110살 정도 되니 당연히 사망하였을 거다.) 



『그날은 김일센(소련인들은 김일성을 이렇게 발음)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있기 보름전이었습니다. 나는 사령부의 지시를 받아 1945년 9월30일 오후 6시 평양시내 화방이라는 요정에서 두 지도자의 첫 대면을 주선하게 됐지요.』



소련군 정치장교,민족주의자 조만식선생,빨찌산 김일성의 3자만남은 당시상황의 한 축도였다.



대부분의 역사는 김일성이 이미 소련군으로부터 북조선을 이끌 지도자로 내정되어 있었으며,따라서 그의 권력장악과정은 바로 그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메크레르씨는 이를 단호히 부인한다.



『당시 소련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만주였어요. 조선은 하나의 조그만 변수에 지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김일성을 데려다 교육시켜 북한을 담당하게 했다는건 소련을 잘못 보는 겁니다.』



그는 『극동방면군 정치위원 스티코프장군에게서도 아직 언질을 받은바가 없었으며 스탈린의 지령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김일성이 가장 유력한 후보자의 한사람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것은 조만식선생도 마찬가지였고 최용건·김책도,그리고 훗날의 박헌영도 마찬가지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말했다. 『소련은 어느 누구도 지도자로 지목하지 않은 상태지요. 소련 25군 정치사령부는 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날의 자리는 더더구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소련군은 일본군과 교전상태에 들어가 그해 8월9일 조선 북단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일본의 항복으로 붉은 군대가 평양에 입성한 8월24일, 이전에 조만식은 이미 건국준비위를 구성해 놓고 있었다.



평양에서는 8월17일 고당을 비롯 (여기서 고당은 조만식의 호 다.) ,22명의 지도자가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고 함북을 제외한 이북 각 지역에서도 자치위원회 인민위원회 등 제각기 자연발생적인 정권기관이 속출했다.



8월24일 평양에 들어온 소련 극동군 25군사령부는 북한의 지도자를 지목하지 못한 상황에서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의 핵심이 서울에 있는데다 이북지역의 토착 공산세력들은 일천해 수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자 일색인 지역인민위원회 등을 민족·공산 양세력으로 절반씩 배치,지역행정권을 장악하는 기초작업에 착수했다.



북한 정세를 살피기 위해 첫 진주군과 함께 평양에 들어왔던 메크레르 중좌는 『평양이 조만식판이었다』고 회상했다.



평양의 경우 8월27일 평남건준이 외견상 민족진영 16명,공산진영 16명의 평남인민 정치위원회로 탈바꿈되고 위원장은 그대로 조만식이 유임됐다.



◎“김일성입니다” 고당 보자 큰절/소 장교,조만식에 김일성 환영대회 위원장 부탁/끈질긴 권주에도 고당 안마셔



소련군과 함께 재소 고려인 2∼3세의 공산주의자들도 속속 북에 들어오기 시작했고,하바로프스크 근처에 있던 88특별여단의 김일성·김책·최용건 등 뒷날 북한 정권창립의 주체가 되는 항일빨찌산들도 속속 입국했다.



이같은 정세속에서 소련군정은 민족주의자 고당과 자신들이 후원하는 공산주의자 김일성등의 협력관계를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메크레르씨는 「화방」의 술자리를 이렇게 기억했다.



『화방은 일본 조선총독부의 고위관리·지주들이 주로 들락거리던 평양의 대표적인 기생집이지요.



나는 통역을 맡은 강미하일 중위와 같이 갔어요. 김일센은 2∼3명의 부하들을 대동하고 왔지만 그들은 술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렸으며 조만식쪽은 혼자였습니다.



나는 물론 소련군 장교복에 권총을 차고다녔죠. 처음보는 조만식은 하얀 수염이 드문드문난 얼굴에 검은테 안경을 끼고 엷은 잿빛의 한복 두루마기 왼쪽 팔목에 내용을 알수 없는 한문으로 쓴 완장,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더군요.』



김일성은 당시 귀밑까지 바짝 올려깎은 소위 닷분깎기머리와 약간 그을린 얼굴로 촌티가 흘렀다고 한다.



『김일성은 밝고 쾌활한 청년이었죠.



나와 강중위가 먼저 가서 기다렸고 10여분후 조만식이,그리고 김일센은 맨나중에 도착했어요.


나와 강중위가 요정 대문을 들어서니 기생들이 마루에서 버선바람으로 마당까지 허겁지겁 내려와 우리를 곧바로 안방으로 안내하더군요.』



메크레르와 강중위·김일성은 이전에도 몇차례 이곳에서 술을 마신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생들은 메크레르와 김일성을 「장군」으로,강중위를 「부장」이라고 불렀다. 메크레르씨의 증언.



『나와 조만식이 방 아랫목에 앉아 있는데 김일센이 들어 옵디다. 「김일성 장군님,늦으셨군요. 인사하십시오. 조만식 선생입니다.」



방 문턱을 들어서는 김일성에게 강중위가 벌떡 일어서면서 조만식에게 인사를 시켰습니다.



김일성은 한국식으로 큰 절을 하면서 「선생님,김일성입니다」하고는 뭐라고 인사말을 하더군요.



조만식도 앉은 자세에서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어요.』



이렇게 하여 조선이 해방된지 꼭 한달반만에,김일성이 소련에서 입북한지 열하룻만에 63세의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33세의 빨찌산대장 김일성이 처음 만나게 됐다. 이후부터 두 지도자는 동상이몽속에서도 얼마동안 소군정하의 북한 역사를 이끌어가게 된다.



다시 메크레르씨의 증언이 계속된다.



『이날 밤 우리는 3시간여동안 술과 음식을 먹으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평양에 가기전 하바로프스크 극동방면군 시절 한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전문 정치용어등을 알아 들을수 없어 강미하일 중위가 통역을 했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이전에도 사령부와 인민정치위원회 등에서 나와 몇차례 만났지만 김일센과 조만식은 처음 만난 자리여서인지 이날 밤은 두사람간에 깊은 얘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주로 내가 조선생에게 소련군정 협조를 부탁했고 조만식은 「민족통일 국가건설」에 협력해달라고 한결같이 요구하는 정도였지요.』



메크레르씨는 이날 밤 술자리에 대해 분위기까지 상세히 기억했다.



『나는 여러차례 조만식과 김일센에게 술잔을 권했습니다.



그때마다 김일센은 술잔을 덜렁덜렁 받아 마시더군요.



그러나 조만식은 「기독교 장로이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면서 거절합디다.



이를 보다 못한 기생들이 「선생님,장군님의 소원인데 오늘 밤만 한잔 하시지요」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조만식은 삶은 닭고기 등 안주 몇점만 먹을뿐 끝내 한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날밤 이 요정의 술은 우리지도부와 친밀했던 사람(고당의 비서였던 박재창씨는 최아립으로 기억)의 양조장에서 제조한 「승리」라는 이름의 도수높은 곡주였거나 소련에서 공수해온 보트카였을 것이라고 기억됩니다.



내가 조만식에게 술을 권하는 동안 김일센은 왕성한 식욕을 과시했고 가끔 소련제 담배를 꺼내물고 옆 기생들과 농담하며 주석을 화기애애하게 이끌어 가기도 했지요.



한국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나는 김일센의 농담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조만식선생등 한국 사람들은 그때마다 파안대소하더군요.



나는 남보다 술이 센 편이었지만 혼자서 약간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맞추다보니 술자리가 끝날 무렵 약간 취했습니다.』



그러나 메크레르씨는 이날 밤의 술자리가 이날 이후부터 전개되는 「역사적 일들」을 진행해 나가는데 있어 매우 뜻있고 성공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날 밤 술자리는 그후 열린 조선공산당 이북5도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45년 10월10∼13일) 개최를 앞두고 있는데다 무엇보다 보름후로 다가온 김일센 장군 개선환영 평양시군중대회를 앞둔 시점이었기에 매우 뜻있는 자리였지요.



김일센은 이 대회에서 비로소 처음 군중에 얼굴을 내밀게 되는데 우리는 이 군중대회를 조선생이 책임을 맡도록 계획했지요.』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조만식은 아직 김에 대해 그리 마음이 내키지않았던 게 사실인듯 한다.



이날 술자리를 확인해주는 익명의 전북한요인(현재 68세인 그는 (여기서 68세는 물론 1991년 당시때 이다.)  여러가지 사정때문에 아직 신분을 밝힐 수 없는 해외망명객으로 초창기부터 노동당에 참여했던 인사다)는 이렇게 기억한다.



『고당이 김일성을 처음 만난 것은 9월말이었지요. 로마넨코 군정부에서 소련 군인들과 만나고 메크레르가 두사람 관계를 돈독히할 요량으로 술자리를 주선했다지요.



그런데 고당은 처음 보는 김일성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어리고 나이 차이가 많아 아무 대답도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 했답니다. 김일성은 이날 상당히 겸손한 태도로 예절을 지켰다고 들었어요.』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건국문제가 나오자 완전자수독립과 각계각층의 단결·협력을 강조했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조만식도 공감을 표했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후 조만식은 몇차례 더 김일성과 만났고 결국 김일성 환영대회 위원장을 맡게된다.



고당이 위원장직을 맡은 그 심중은 헤아릴 길이 없으나 소련군과 김일성은 이 완강한 민족주의자로부터 그들의 목적을 일단은 달성한 것이다.



증언자 메크레르… 그는 누구인가/극동군 중좌로 북한정권수립 막후 설계

해방후 북한정치의 막후에서 소련의 정치설계를 담당했던 메크레르 그리고리 코노비치 중좌는..  현재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  물론 당시 1991년 당시..



1955년 대좌(대령)로 예편한 그는 학자로 변신,한국·일본·중국 등에 관한 전문가로 동방학연구소에서 최근까지 근무하다 은퇴했다.



당시 소련군 극동방면군의 정치장교였던 그는 스탈린정부의 지시에 따라 중좌(중령) 계급장을 달고 1945년 9월초 평양에 급파돼 1946년 9월초까지 1년여동안 소련군 25군사령부(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에서 정치담당관으로 일했었다.



그는 특히 최일선에서 소군정과 조만식,조만식과 김일성,김일성과 박헌영 등을 접목하면서 북한의 초대 정권지도자를 물색했던 북한정권 창립 초창기의 막후 실력자였다.



1909년 백러시아에서 태어난 메크레르씨는 모스크바대 역사철학부와 동양대 일본학부를 졸업한후 1935년 장교로 붉은 군대에 입대했었다.



예편후 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친뒤 줄곧 이 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과 대학교수로 재직,소련 연방공화국 특별공로학자 칭호를 받았으며 82년부터 연금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의 생애중 한국기자를 처음으로 만난다는 메크레르씨는 자신이 직접 찍도록 해, 보관하고 있던 조만식­김일성의 첫 만남 술자리 사진등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그 당시를 또렷하게 기억해 내곤했다.


그는 『한반도의 38선은 처음부터 인위적이었기 때문에 한반도 통일이 독일보다 빨리 올 것으로 예측했었다』며 『소한수교는 통일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강조했다.



메크레르씨는 『남한 연구에 대해 절대 금지됐던 61년 남한경제에 대한 책을 발간,당지도부에 보낸 유일한 학자가 바로 자신』이라며 『나의 증언이 북한의 현대사를 재조명하는데 보탬이 되도록 기억을 되살려 진실을 털어놓겠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 계속..


□특별취재반

▲김국후 북한부차장

▲안희창기자

▲유영구〃

▲안성규〃

[출처: 중앙일보] 소,꼭 「김일성집권」 아니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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