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3년에 걸친 고구려 서쪽 강역 고찰이 논문으로 치면 초고 수준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이에 동반탐문자 여러분께 이 사실을 알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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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서계는 '거란과 고막해', '영주'의 위치와 밀접합니다.
2. 사학계 통설은 고대 평양 현 평양 비정, 고대 압록강 현 압록강 비정, 고대 요수 현 요하 비정, 영주 현 요녕성 조양시 비정을 고수ㆍ정설화 하고자 고막해와 거란의 거주ㆍ활동지를 현 조양시를 중심으로 북위 시대부터 당나라 시대까지 비정하였습니다
3. 그러나 고막해는 북위~북제~수ㆍ당에 이르기까지 현 적봉시 임서현 서부-적봉시 커스커덩기-현 시런궈런맹 다륜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북제 초기에는 산서성 근방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가 552년 북제 문선제에 의해 토벌된 바 있고, 수당 교체기에는 현 장가구시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개도에게 협력하여 유주, 즉 현 북경시를 침략하는 데에 동원된 바 있습니다
4. (고막)해가 현 적봉시와 승덕시 일원까지 거주 영역을 넓힌 것은 8세기의 일로 거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동원되면서부터이며 이후 거란의 세력에 예속되면서 그 영역이 뒤섞였고 9세기 말에 들어서는 거란이 해를 당나라로부터 거란을 방비하는 군사적 용도와 노동력 착취로서의 용도로 사용하면서입니다
5. 이 9세기 말 10세기 초에 거란을 벗어나 현 장가구시로 이주한 세력을 서해, 기존의 거란 예속 세력을 동해로 구분하게 됩니다
6. (고막)해의 남쪽에 있다 한 백랑수는 현 조하, 즉 옛 포구수입니다
7. 마찬가지로 479년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북위에 귀부한 일부 거란 부족이 안치된 '백랑수 동쪽' 의 백랑수 역시 현 조하의 동쪽 지역입니다
8. 거란은 5세기 말부터 대대로 현 시라무룬허와 로합하 사이에서 거주ㆍ활동하였으며 그 중심지는 현 시라무룬허 일대입니다
9. 후연은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10. 북연의 동쪽 한계는 현 망뉴하+대릉하입니다 그 이유는 풍소불을 비롯한 북연 지배층 무덤이 현 조양시 북표현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입니다
11. 3연의 화룡성은 한 곳에 고정돼 계속 유지됐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12. 북연은 풍씨 정권의 허세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기미 국가였습니다
13. 북위는 북연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전에, 군사작전을 하기 전에 미리 고구려에 그 사실을 알렸으며 고구려가 화룡성에 먼저 가서 풍홍을 비롯한 지배층과 백성, 모든 재물을 쓸어갔음에도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 했습니다
14. 북위는 북연을 멸망시키기 이미 1년 전에 장수왕에게 '도독요해제군사영호동이'의 작위를 주었으며 이 지위는 고구려가 세습합니다
15. 북연의 멸망은 신흥 강자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 완충지대가 사라졌음을 뜻합니다
16. 북연의 영역은 북위에 평주와 영주로 편성됩니다
17. 평주는 현 당산시 동부와 진황도시 일대로 433--434년 북연의 폐세자 풍숭이 요서를 들어바치며 북위에 귀순하면서 북위의 영토가 됐습니다
18. 이 나머지 영역이 북위의 영주가 되는데 북위는 북연 멸망 직후인 436년에 진(둔영)을 설치했을 뿐 곧바로 행정지로 편성하지 못 했으며 444년에 가서야 영주를 설치하고 447년이 되어서야 겨우 3군 6현으로 영주를 편성하고 그것도 그 직후 바로 1군 2현을 통폐합하여 2군 4현으로 영주를 행정적으로 설치합니다
19. 이는 곧 북위가 기존에 남아있던 북연 영역에서 서쪽으로 크게 후퇴하였음을 뜻합니다
20. 즉 북연 멸망 후 고구려는 현 대릉하 일대를 완전히 차지하였고 로합하 유역을 완충지로 삼았던 것입니다
21. 472년(에서 475년 사이)에 현 하얼빈 일대에 있던 물길은 백제와 모의하여 고구려를 고립시키고자 북위에 을력지를 사신으로 파견합니다
22. 을력지의 방문 경로는 위서와 북사 등에 비교적 명확히 기록돼 있는데 현 눈강쪽으로 배를 타고 거슬러 오르다가 조아하에 배를 가라앉혀 숨기고 걸어서 현 시라무룬허를 건너서 "거란 영역의 서쪽 경계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서 화룡에 도착"하였습니다
23. 즉 거란은 현 시라무룬허와 로합하 사이에 있었으므로 을력지가 도착한 북위의 화룡성은 현 조양시가 절대 될 수 없으며 현 적봉시 영성현, 또는 현 승덕시 평천현 일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4. 북위 말기인 524년에 취덕흥이 '영주성'에서 류안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류안정이 피살되자 "동쪽으로 달아나서 연왕을 자칭"합니다 연왕은 유주지역의 지배자들이 자칭타칭하는 칭호입니다
25. 사학계 통설대로 취덕흥이 반란을 일으킨 영주성이 현 조양시라면 취덕흥은 고구려로 달아나서 연왕을 자칭한 것이 되므로 어불성설이 됩니다
26. 취덕흥의 반란 진압을 525년에 담당한 지휘자의 지위가 유주자사였습니다 취덕흥은 유주, 즉 현 북경일대 또는 그 근처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27. 취덕흥은 526년에 평주를 침략해 평주 자사 왕매노를 살해합니다. 즉 취덕흥이 웅거하고 있던 곳은 유주와 평주 근처였다는 말이 됩니다
28. 무엇보다도 북위는 6진의 란으로 인하여 현 사학계 통설 비정대로 현 조양시 일대까지 군사를 파병할 여건이 안 됐습니다
29. 505년, 현 장가구시 흥화현 서북쪽에 있던 유현진에서 발생한 모래폭풍이 영주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갔다 한 위서의 기록을 지난 해에 발굴하여 소개한 바 있습니다
30. 즉 취덕흥의 반란 기사와 모래폭풍 기사는 지리맥락적으로 그대로 일치하면서 당시 영주가 현 북경시 연경구~창평구 일대에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31. 북위는 493년 평성(현 대동시)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남제는 494년 문자명왕에게 도독영평이주, 즉 영주와 평주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작위를 내립니다
32. 거란은 492년 직전에 북위를 침략해 백성을 납치하여 고구려에 넘깁니다
33. 고구려는 525~528 사이에 북위 평주를 침략해 당시 평주 사마자의참군 한상의 일가를 납치해 갑니다
34. 553년, 북제 문선제의 거란 정벌 기사를 정밀 분석한 결과 당시 영주는 현 당산시 천서현과 적봉시 영성현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습니다
35. 577~583년, 고보녕의 활동 기사 역시 그 영주의 위치가 지리맥락적으로 상기의 영주의 위치와 일치합니다
36. 수나라가 영주를 편성한 것은 581년으로 용성현 1개 현에 불과했습니다 이 용성현을 유성현으로 개칭합니다
37. 605년 수나라 영주는 거란의 침략을 받았고 수나라는 영주를 폐지합니다
38. 이 폐지된 영주의 경계에 있던 여라고성에 설치한 것이 요서군입니다
39. 이 요서군에 당나라가 영주를 설치하였습니다
40. 605년 영주를 침략한 거란에 복수하기 위해 수나라가 계민가한의 군사 2만 기를 빌려 거란을 토벌하는 기사를 보면 당시 유성은 고구려 소유였으며 그 위치는 거란의 남쪽이었으므로 역시 현 적봉시 영성현과 승덕시 평천현 일대입니다
41. 605년 고구려 소유의 유성과 수나라 영주가 있던 유성현, 그리고 수나라가 여라고성에 설치한 요서군은 서로 다른 위치입니다
42. 수양제 초에 속말말갈의 돌지계 세력이 수나라에 귀부해 오는데 이들을 받아들여 살게하면서 설치한 것이 요서군입니다
43. 즉, 고구려 소유의 유성이 현 적봉시 영성현 일대이므로 수나라 영주는 이보다 서쪽이며 돌지계가 안치된 여라고성 요서군은 거란의 침략으로 폐지된 수나라 영주보다 서쪽인 것입니다
44. 중국사에서 말갈의 등장은 577~583년 고보녕의 활동 기사가 처음으로, 고보녕은 서쪽으로 돌궐과 결탁돼 있으면서 거란과 말갈을 끌어들인 것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45. 거란과 말갈의 군사적 활동은 고구려의 활동을 의미합니다
46. 수문제 590년 조서, 수양제 612년 조서에는 고구려를 향하여 거란과 말갈을 단속하라는 내용이 똑같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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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너무 방대하므로 이 정도로 그칩니다
요약하면
1) 북위는 494년 이전에 기존의 영주 지역을 포기하고 '영주성'을 북경시 연경~창평의 모처에 설치
2) 북위 말기에 고구려는 현 승덕시 일대까지 차지
3) 당 태종 1차 침략 시대까지 고구려의 서쪽 강역은 장성이북까지
4) 당나라 초의 당나라 영주는 현 북경시 순의구와 밀운구 일대
5) 즉 당태종이 고구려 1차 원정을 준비하며 "유주북쪽부터 요수까지 (당나라 소유의) 주와 현이 없다"고 한 맥락, 그리고 북사 등에서 고구려의 서쪽 강역을 "서쪽으로 요수를 건너 2천 리"라고 한 것과 사실이 합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