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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8-15 23:39
[북한] (제 1편) 대한제국의 일본육사 출신 김경천 (김현충=김광서=경천김장군)/백마탄 김일성 장군이 결코 아니다.
 글쓴이 : 돌통
조회 : 714  

(제 1편) 대한제국의 일본육사 출신 김경천 (김현충=김광서=경천김장군)/백마탄 김일성 장군이 결코 아니다.


(제 1편)
 

일본 육사 제23기 김경천[1888-1942. 55세로 소련에서 옥사]    내용상의 사진들은 삭제했음..

 

 

본명은 김현충[金顕忠]이고 독립운동시기에는 김광서[金光瑞]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09년 육군중앙유년학교[도쿄 소재. 만13-15세의 남자 중에서 육군현역장교 지원자를 선발하여 교육하던 기숙제 교육기간은 3년이었다]를 졸업할 때는 김현충[金顕忠]이었고, 육군유년학교 입학자는 당시에 7개의 고등학교나 제국대학을 웃도는 실력을 가진 수재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1909년 12월에 입학한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1910년 8월 한일합방 무렵에 김광서[金光瑞]로 개명했다. 1911년 5월에 740명의 졸업생 중 단 1명의 한국인으로 일본 육사 23기를 졸업했다. 1912년 서울에서의 호적명도 김광서이다. 독립운동 시기에는 김경천[金擎天]이라는 이름을 썼기 때문에 경천 김장군[擎天金將軍]이라고 불린다.

 

 

김경천 장군은 대한제국 최후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한일합방 후인 1911년 일제 육군기병중위로 근무하다가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해 주로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다. 소련 국적을 갖고 있다가 스탈린의 대숙청[볼쇼이 테로르Большой террор/Great Purge=1930년대 소련과 몽골인민공화국 등에서 행해진 대규모의 정치적 숙청사건] 때, 탄압을 받다가 1942년에 옥사했다.

 

 

김경천 본인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쓴 적이 없지만 북의 ‘김일성‘이 38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고 그 주석을 맡자 그의 항일투쟁을 거짓이나 왜곡할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독립운동가 ’경천 김장군’을 김일성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본 육사 54기로 대한민국 공군을 창설한 김정렬이 ‘김경천 장군의 3년 후배인 아버지 김준원[金埈元. 26기]로부터 김광서가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라고 말을 들었다고 한다.

 

 

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으로 김해 김씨 무반 집안 출신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서울로 서울에서 자랐다. 일본어 학교인 경성학당에 진학해 일어를 공부했다. 그의 부친도 1895년에 일본에 유학하고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도쿄 공업학교에서 수학하고 도쿄 포병공창에서 총탄 등 무기제작 연수를 받았으며 귀국 후에는 대한제국군 간부여서 아들을 육군사관학교에 유학 보냈다.

1909년 일본유학 1주일 전에 유계준[柳桂俊] 딸인 유정[柳貞. 1892-1971]과 결혼했지만 아내에게 피아노 배울 것을 권하고 단신 유학했다.

 

 

1909년에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육사 23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사관학교에 유학했던 한국인들은 김경천 혼자지만 육군유년학교에는 3년 후배로 육사 26기인 홍사익[1887-1946. 일제 육군중장, 필리핀에서 포로학대죄를 저지른 B급 전범으로 처형됨]과 지청천[1887-1957.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역임] 등이 유학했다. 1910년 한일합방에 충격을 받고 탈주하여 항일운동을 하자는 말이 돌았지만 김경천은 지금은 배울 시기라고 하면서 자중을 촉구했다.

 

 

1911년 5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2월에 기병소위로 임관, 육군기병학교로 배치될 무렵에 아내를 불러들여 결혼생활을 했는데 지바[千葉=현재 나리타국제공항이 있는 현] 부근에서 위의 두 딸이 출생했다. 임관 8년 후인 1919년, 기병 제1연대 소속 육군중위로 도쿄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이광수 등의 조선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접했다. 그는 곧 휴가를 내고는 처자를 동반하고 귀국했다.

서울에서 3·1 독립운동을 앞두고 그는 항일 독립운동 참여를 결심하고 육사 후배인 지청천[제26기]과 함께 국경을 넘어 남만주의 신흥무관학교로 갔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의병투쟁 때부터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 등이 설립한 무장독립운동가 양성기관으로 2018년의 흉작으로 폐쇄의 위기에 가까웠으나 일본 육군의 현역 장교였던 김경천과 지청천, 대한제국 군관학교 출신 장교인 신동천 등의 우수한 교관이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수백 명의 학생이 모였다.

 

 

이 교관을 ‘남만의 3천[三天]’이라고 불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한 ’한국정신문화대백과사전‘에는 김경천의 이름이 빠져 있다. 내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이 사전 편찬에 관여한 적이 있어 회고해 보면 아마도 최근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추진세력의 한 뿌리가 그 연구원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경천의 이름을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함께 양심적인 편찬자가 ’가짜 김일성장군‘ 설에 김경천 장군이 김일성 장군의 한 모델이 되는 역사적 허구 조작에 끼어들기 싫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양시쌍비론이 든다.

 

 

사실 김경천이 이 학교의 교관을 지낸 기간은 6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이미 1920년 초에 그는 하얼빈에 있으면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 동지와 연락을 취한 것이 일본 측의 정보자료에 보인다. 그는 1920년 초에 독립 운동의 무대를 시베리아로 옮긴 것이다.

 

[1920. 1.23. ‘高警第一五三五号秘国外情報不逞鮮人ノ行動(浦潮派遣員報告)「哈爾賓埠頭区十三道街居住金擎天ナル者ヨリ、目下浦潮ニ居住セル元平安南道平壌鎮衛隊下士ニシテ暴徒派不逞鮮人金燦五、及元咸鏡南道北青鎮衛隊下士崔元吉、並海牙密使事件ノ張本人李儁ノ実子李鏞等十二名ニ宛テ、陰十二月十五日(陽暦二月四日)愈々前進ノ予定ナルヲ以テ各位ハ二十人長トシテ部下ヲ引率シ同日迄ニ哈爾賓ニ集合セラレ度シトノ書面ノ発送シ来レリト謂フ’

 

 [기병장교 김경천의 모습]

 

 

 

 

북의 ‘김일성’이 가짜이고, ‘진짜 김일성이 김경천’이라는 한국 내 친일잔당들의 주장은 조작된 것이라는 증거가 여기에서도 발견된다. 자세한 것은 후술하는 부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당시 시베리아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10월 혁명 이후에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으로 시베리아에 있던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는 체코 군단이 백군[반혁명군]에 가담하면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이 시베리아에 출병했다. 그러나 대전의 종결에 따라 체코 군단은 전투를 중지하고, 백군도 거의 괴멸해 일본을 제외한 연합군은 모두 철병을 결정했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시베리아에는 고려인이 많았지만 러시아 국적을 가진 기존 이민자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망명자도 많았다. 그 지도자인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어, 레닌의 민족자결론에 공명했다. 김경천이 시베리아에 넘어가던 시기에는 레닌에게 독립운동자금 원조를 요구하는 지침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만주(간도)와 시베리아의 항일조선인 집단은 적군(赤軍)에 가담하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간도와 연해주의 항일세력이 무장투쟁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마침 김경천이 연락을 취한 시기, 간도에서 일어난 강도살인사건을 기화로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 거리인 신한촌에 대한 대규모 단속을 시작했다.

 

 [2016년 8월의 블라디보스토크 역 앞]

 

 

 

 

김경천은 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으나 단속을 피해서 교외의 산중으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동쪽으로 나홋카의 동북에 있는 파르티잔스크[Партизанск] 인근에서 빨치산 부대를 만들어 한창걸[韓昌傑. 연해주 태생의 러시아 국적 고려인으로 제1차 대전에 징병으로 대독전을 경험하고 키에프의 사관학교를 마치고 공산당에 입당해 빨치산 부대를 결성했으나 1930년대에 숙청됨]부대 등과 함께 중국인 마적부대와 교전하고 이를 물리쳤다. 김경천은 마적퇴치로 이름을 날리면서 ‘경천 김 장군’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의 파르티잔스크 빨치산 연합부대 규모는 300명 정도였지만 김경천은 이를 지휘하여 1921년 봄 무렵, 백군 잔당[콜차크부대]과의 전투를 치렀다. 파르티잔스크는 당시 치안이 매우 문란해서, 김경천은 민생을 정재관(鄭在寛)에게 맡겨 군정을 폈다고 한다. 당시, 정재관은 미국에서 한국독립운동을 하다가 헤이그 밀사사건에 연루된 것이 드러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권업회를 설립한 중심인물로, 권업 신문을 창간하는 등의 독립계몽운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신한촌 산비탈에 들어선 러시아인 아파트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 표지 앞에서]

 

 

 

김경천이 지휘한 빨치산 부대는 눈에 띄게 규율이 높고 군사 조직도 다른 빨치산과 달랐다. 적군 지도자도 ‘이 조선인 부대는 규율, 대의에 전념하고 경애의 모범을 보였다.……조선인들 사이에는 규율에 대한 불복종, 명령 불이행, 술에 만취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전부터 우수리스크의 근교에는 조선인 무장단체로 혈성단[血誠団]이 있었으므로 이를 중심으로 빨치산이 결집해 1921년 초 무렵에 파르티잔스크 고려의병단이 결성되었다. 김경천은 사령관으로 초빙되었고, 이 무렵부터 김경천은 김광서(金光瑞)라는 이름으로 일본 측의 정보보고서에도 등장하게 되는데, 그에 따르면 1922년 중순에 약 600명을 이끌었다고 한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김경천은 주로 이만[중국어 伊曼/러시아어 Дальнере́ченск달리네레첸스크 ;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중간에 있는 시베리아 철도역으로 우수리스크 강에 근접하고 강 건너편은 흑룡강성 호림[虎林]시이다.] 부근을 무대로 적군에 협력해 백군과 전투를 벌였다. 1922년 여름에는 연해주 혁명군사위원회가 김경천을 포시에트[Посьета/英語 Posyet=러시아가 두만강 건너로 북한과 중국에 저하고 있는 국경지대]군구 빨치산 연합부대장에 임명했다고 한다.

 

 

당시, 김경천이 시베리아에서 활약한 사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서도 활발하게 보도되었다.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1페이지를 모두 김경천의 인터뷰 기사로 실었다. 기사에서 김경천은 ‘1922년 1월 2일 이만에서의 전투에서는 사령관의 항복으로 지휘관을 잃은 소비에트 적군을 지휘하여 총알이 빗발치는 속을 백마에 타고 지휘하다가 급기야 이만 점령에 성공했다.’고 한다. 1920년대 한반도의 신문지상에서 가장 많이 보도된 독립운동가는 김경천이었고, 인터뷰 기사까지 실린 것은 그 한 사람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이 시기, 만주와 시베리아의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은 분열되고 1921년 6월의 흑하사변[자유시참변. 이 연재글 7참조]에서는 아군끼리 싸움을 벌이다

 

 

 

레닌쪽으로 기운 이동휘가 영향력을 잃었다. 또 1922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가 함락됐고 일본은 북 사할린을 제외한 시베리아 전역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백군의 잔당이나 박해를 두려워한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를 탈출해 망명길에 나서야 했다. 소련 내전에서 잠정적으로 완충국가로 시베리아에 수립되었던 극동공화국도 무너지고 소비에트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1922년에 러시아 내전이 끝남으로써 소련 정권으로서는 조선인 항일 빨치산의 역할을 재고하게 되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일본과의 관계 수복을 위해서도 독립운동단체의 무장활동을 방치할 수 없게 되었다.

 

 

김경천은 무장독립투쟁의 지속을 원하여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지도자의 대립으로 임시정부가 분열하고 시베리아의 고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세력만이 남아 조선공화국을 자처하는 조직이 됐다. 조선공화국 국무 위원에 지청천이 있어 김경천도 이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3년 8월 말, 조선공화국의 조직은 소련정부의 비호를 기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면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기다렸다. 하지만, 1924년 코민테른은 승인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응답하고 추방을 원하여 조직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경천은 시베리아에 남는 것을 선택해, 지청천과 삶의 길이 엇갈렸다.

 

 

1925년, 매일신보는 "김광서는 망명운동가들을 이끌고,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했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오보였다. 요새 말로 가짜뉴스였다.

 

 

무장독립운동의 꿈을 버리지 못한 김경천은 연해주 각지에서 군사지도를 맡으면서 무관학교의 설립을 시도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군인클럽을 조직하기도 했다. 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조선사범대학의 일본어와 군사학 강사를 맡아, 한때 영관급인 대우로 극동 소련당국에 초청 받아 군사전문가로서, 시베리아 각지에서 군대조직 정비를 도와주었다.

 

 

조선인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생들의 친목회인 전의회(全誼会) 회보에 의하면 일본군 현역장교로 근무하는 그들 가운데 지청천의 동기생인 홍사익[종전 후 필리핀에서 포로학대죄목으로 전범 처형됨]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김경천과 지청천의 서울에 남겨진 두 부인을 원조했다고 한다. 김경천의 아내 유정은 1923년 겨울, 많은 빚 때문에 소유하는 가옥을 처분하고 3명의 아이를 데리고 곤궁한 생활을 했지만 더 생활이 어려운 지청천의 부인에게 상당한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마지막편..     제 2편에서 계속~~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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