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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8-15 02:18
[북한] 제 3편 (비화발굴)..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조선족 항일투사.이민(李敏)여사의 ‘60년만의 증언’
 글쓴이 : 돌통
조회 : 1,054  

제 3편 (비화발굴)..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조선족 항일투사.이민(李敏)여사의 ‘60년만의 증언’


(비화발굴)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조선족 항일투사 이민(李敏)여사의 ‘60년만의 증언’

 

      (제 3편)

 

 

김책은 북만주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면서 소련령으로 넘어오라는 88여단 지휘부의 지시를 거부했다. 그는 “누군가 근거지를 지키는 사람도 있어야지 모두 버리고 소련 땅으로 가면 이곳은 누가 지키느냐”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동북항일연군이 88특별여단으로 편성되면서 소련군에 사실상 편입하는 것은 당 노선에 맞지 않는다는 강력한 거부의 뜻이 들어 있었다.

 

항일연군 지휘부에서는 일본군의 맹렬한 공세로 희생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훗날을 생각할 때 고급 간부들이 버티다가 죽으면 전략적 손실이 너무 크다면서 국경을 넘어올 것을 강력히 종용했다.

 

 

김책이 계속 말을 듣지 않자 지휘부가 김책의 후임자를 일방적으로 파견하기에 이른다. 결국 김책은 가장 늦게 1943년 말 소련국경을 넘어 88여단에 합류하고, 후임으로 파견된 중국인 간부는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고 말았다.

 



최용건 역시 투쟁 경력이 화려하다.그는 김일성보다 12살 많은 1900년생으로 좌익계 조선 혁명가 중 가장 연장자에 속한다. 그는 이승훈이 세운 기독교계 오산학교(당시 교장 조만식)에 다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운남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

  

 

당시 황포군관학교에는 장개석이 주도하는 국민당원들과 손을 잡은 중국공산당의 주은래 등이 있었다. 최용건은 1927년 광주(광동)코뮌 폭동에 참가했다. 

조선인 혁명가들이 200명 정도 참가했던 이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혁명가가 죽었을 때 최용건 등 살아남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만주로 파견된다. 화요파로 파견된 최용건은 길림성과 흑룡강성 등에 소학교, 농민학교 등을 여러 개 세우면서 교육사업을 하고 이곳을 혁명 근거지로 삼아 조직적으로 항일세력을 키운다.

 

이민 여사는 어려서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제법 학교 규모가 커서 중급반 고급반까지 있었고 건물도 2층이었으며, 학생이 많을 때는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저녁에는 농민들을 모아 야학을 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최용건이 교장이었으나 얼굴을 보기는 힘들었고, 황포군관학교 생도로 최용건을 따라온 젊은 선생들이 가르쳤다고 한다. 최용건은 이러한 항일 근거지 학교들을 돌아다니면서 항일투쟁을 했다.

 



당시 항일투사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여러개 썼는데, 각종 기록에 최석천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이 바로 최용건이다. 김지강이라는 가명도 썼다. 최용건은 동북항일연군 시절이나 88여단 시절에도 직접적인 군사활동 보다는 이론가형으로 정치교육 등 당 쪽의 고위 직책을 주로 맡았다. 그는 광복 후 북한 정권에서 부수상을 지냈다.

 



보천보전투후 김일성에 현상금 1만엔

   

이에 비해 김일성은 주로 야전 빨치산활동에 주력했다. 김일성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알려져 있어 중복을 피하지만, 동북항일연군 시절에도 일선 지휘관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병사로 출발했을 테지만, 점차 두각을 나타내면서 지휘관이 되고 여러 차례의 성공적 전투를 통해 동남만 지역에서 강력한 부대로 알려지게 됐다.

 

 

그는 동북항일연군이 연대틀을 갖추고 ··로군으로 재편되자 제2군 3사장, 6사장 등을 지내며 독립적인 단위 부대장으로 인상적인 군사활동을 펴나간다. 

 



김일성이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1937년 보천보 전투다. 보천보는 압록강변의 작은 마을로 총 가구 300호에 1400명 가량 살고 있었는데, 이중 일본인이 26가구 50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불과 20km 떨어진 곳에 혜산진이 있다. 김일성 부대는 현지 공작원들과 연계해 치밀한 사전준비를 한 뒤 6월4일 압록강을 건너가 마을을 점령했다. 주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항일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연설하는 등 24시간을 점령했다가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혜산진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해 뒤를 쫓았으나 오히려 사상자를 내고 도망쳤다.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이 조선땅에 쳐들어와 잠시나마 마을을 점령한 것은 처음있는 일로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당시 동아일보 등은 호외를 내고 김일성 일파와 최현 일파의 보천보 습격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일본군의 제1표적이 됐는데 그의 목에 현상금 1만엔이 걸렸다.김일성부대는 동남만 지역에서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유격전을 펴 일본 토벌군을 괴롭혔는데, 1940년 일본군에 쫓기다 맞닥뜨린 마에다 중대를 치열한 교전끝에 섬멸해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워 치열한 전투를 가장 많이 치렀던 제1로군은 대부분의 지휘부가 일본군에 잡혀 죽거나 투항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간부 중에서 김일성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통틀어 1로군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다

 

지휘부가 희생될 때마다 살아남은 자들로 새로 지휘부를 구성해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1로군 제2방면군의 총지휘를 맡게 됐다. 88여단에서 총지휘자 주보중이 김일성을 예우한 것도 이런 전과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책을 깍듯이 대한 김일성

   

김일성은 혁명 선배들 중에서 특히 김책을 존중했다고 한다. 광복 후 자신이 최고 지도자로 떠오른 뒤에도 김책만은 깍듯하게 대했다는 것이다.차를 타고 가다가도 길에서 마주치면 먼저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할 정도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김책은 전선사령관을 맡는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전세가 역전돼 미군기의 평양 공습이 잦아지면서, 다른 간부들은 모두 평양 북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김책은 다들 북쪽으로 피하기만 하면 여기는 누가 지키겠는가?  누군가는 지킬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선사령관으로 평양에 남겠다고 자청해  지하 방공호에서 지휘하다가 1951년 사망했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김책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쟁중임에도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김일성이 적군한테 점령 당하다시피한 평양에 직접와서 직접 김책의 빈소를 지켰다고 한다.  한번은 빈소 근처에 폭탄이 떨어져서 빈소가 무너질듯 매우 심하게 흔들 렸는데도, 다른사람들은 우왕자왕 하는데 김일성은 허리를 꼿꼿하게, 바르게 앉은체 김책의 영전 사진을 본채 꿈쩍도 안하는 것이 한 조직의 보수 같았다 


이렇게 김일성은 김책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동북아 항일투쟁사를 연구하고, 흑룡강성에 중국 최초로 중국공산당역사연구소를 만들어 소장을 지낸 조선족 김우종 교수는 이민 여사가 방한할 때 함께 와 조선말을 잊어버린 이민 여사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그는 북한을 자주 방문해 조선역사연구소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잦은데, 평양에서 들었다는 김일성과 김책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그의 사무실에 커다란 금고가 하나 놓여 있었다. 김정일이 그것을 열어 보니 낡아서 색이 누렇게 변한 김책의 사진이 한장 들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힘들고 지칠때 사진을 보면서 어떤 위로나 의지를 다지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다른 혁명 동지들이 많이 있는데도 유독 그의 이름을 따서 성진시를 김책시로, 대학교에 김책공대를, 김책제철소등 그의 이름을 명명하는 등 각별히 예우를 해준 것도 이런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김책의 아들 김국태는 지금 간부담당 비서로 김정일 체제의 핵심에 포진해 있다.

 



항일연군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와 투쟁하다 죽은 지휘관이 많지만, 그중에는 배고픔과 추위, 좌절감을 견디지 못하고 일제에 투항해 이름을 더럽힌 지도자도 많다.

 

 

일제는 투항한 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이들을 이용해 동지들 토벌에 이용하는 악랄한 수법을 썼다. 이 때문에 항일투쟁 조직의 비밀 아지트가 습격당하는 등 조직이 급속히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투항자 가운데 가장 아까운 인물로 전광을 들 수 있다. 제1로군 조직에서 김일성보다 지위도 높고 선배격인 운동가다. 님 웨일즈가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던 연안에서 우연히 만난 한 조선혁명가의 일생을 그린 작품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이 가장 존경하고 극찬하면서 투쟁을 함께 하려고 했던 독립운동가 오성륜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전광은 최용건과 동갑인 1900년생으로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나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해 테러리스트로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됐으나 탈출했다. 베를린을 거쳐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근로자공산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중국에 와 황포군관학교에서 러시아어 교관으로 활동했다.

 

 

김산(장지락)과 함께 광주코뮌 폭동에 참가했고, 그뒤 만주로 파견돼 파 일원으로 항일공작을 하다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다.

 



각종 기록을 보면 중요한 회의마다 참석자로 전광이란 그의 가명이 나온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고비를 견디지 못하고 1941년 일본군에 투항한다. 동지들을 배반하고 누구보다 찬란했던 투쟁경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는 일본군에 협력해 이름을 바꾸고 살다가, 광복 후 신분이 탄로났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형당하지는 않았고, 47년에 병사했다고 한다.

 

 
이민 여사는 항일연군이 소련국경을 넘기 직전 전향자가 속출했는데, 이는 일제가 교활하게도 투항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선전요원으로 썼기 때문에 배고픔과 좌절을 이기지 못해 배반자들이 나오게 됐다고 말한

 

김일성도 훗날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추위와 배고픔, 강행군은 참을 수 있었지만 배반한 동지들 때문에 버티기가 힘들었다고 이 당시를 술회한 바 있다. 

 

       제  마지막 4편에서..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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