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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8-02 23:31
[기타] 적진 안에서 싸우고 있는 한인 병사 문제-독립신문 제3호 (대한민국 26년 8월 29일)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124  


敵陣 안에서 싸우고 있는 韓人 병사 문제
嚴大衛
 6∼7년 전부터 적진중의 한국인 병사에 대한 많은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당시에는 적진중에 한국인 사병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왜적들이 한국 장정들을 강제로 징집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2월부터였다. 이전까지는 한국인 징병 문제에 대해 왜적들 내부에서 찬반양론이 대립되어 있었던 관계로 결정을 보지 못하고, 미결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많은 우여 곡절 끝에 왜적들은 침략 전쟁이 확대되어 병역보충 문제가 곤란해짐에 따라, 1939년 2월 급기야는 이 문제에 단안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발표된 것이 「陸軍特別志願兵令」이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첫 번째로 시도해 본 모험이었다.
 시행 첫해,강제적 성격을 띤 지원병 수는 제1차로 400명이었고, 2차로 600명이었는데 훈련이 끝난 1939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화북 運城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日軍 20사단 각 부대에 배속시켜 中條山과 平陸 일대의 작전에 참가시켰다. 이 전투에서 대부분 한인 병사들은 부상을 입었거나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주 : 이 전투에서 맨 처음 사망한 한국인 병사는 李仁錫으로 1940년 7월 25일 조선총독부로부터 金?勳章을 받았다). 살아남은 병사는 이후 대부분 잡역에 동원되었다.
 1940년 지원병 훈련기간을 원래 6개월에서 4개월로 단축한다는 명령을 발표하였고, 이에 따라 1년에 2차례 진행되던 훈련을 3차례로 늘리는 반면, 매기마다 신병 정원을 1,000명으로 정해 놓았다.
 이에 맞추어, 지원병 채용규정 중 표준신장은 160센티미터에서 155센티미터로 하향조정하였고, 학력은 보통학교 6년 졸업이던 것을 4년 수학으로 개정하였다.
 실시 2차 연도에는 징병 인원수가 2,000명이었고, 3차 연도에는 3,000명, 4차 연도에는 무려 14만 명으로 증가되었는가 하면, 제5차 연도인 1943년에는 그 배인 25만 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지원병이라는 미명 아래 강제적으로 끌려간 한국인 병사 수는 모두39만 6,000명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징집된 숫자는 위의 공개된 숫자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믿을만한 보고에 의하면 실제 징집된 한국 장정은 겨우 10만 명 미만이라고 한다.
 한국 청년들이 징집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文部省에서는 가혹한 규정을 정해 모든 한국 학생은 총독부의 특허가 없이는 중국 또는 만주 등지로 여행할 수 없도록 발을 묶어 놓고 말았다.
 왜적들은 침략 전쟁이 더욱 불리해지자 제2단계 모험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곧 금년 4월부터 실시한 보편적 징병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이것은 장차 한국의 모든 인력을 총동원하려는 계획으로 청장년은 물론이려니와 부녀자까지도 동원시켜서 이미 훈련을 개시하였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행동하기에 간편한 「몸빼」라는 것을 입고, 어깨에 삽을 멘 채, 매일 군사훈련에 혹사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적들이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한국 본토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총인구는 2,500만이다. 여기에 일본 본토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100만 명, 동북지방(만주)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교 200만 명(보통 300만 명으로 보고 있으나 200만 이상은 족히 될 것이다), 중국의 일본 점령 구역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60만 명, 이리하여 왜적 통치하의 한국인 총수는 2,860만 명을 상회하고 있다.
 왜적들은 이 중에서 동원이 가능한 한국인 숫자를 300만으로 잡고 있다. 그리고 이 300만 중에서 제1선에서 작전할 수 있는 숫자를 100만이란 엄청난 숫자로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금년 4월 중 입영시킨 한인 병사(18세부터 23세까지)는 20여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필요시에는 금년내로 100만 명에 달하는 한국 장정들을 무장시키겠다는 것이다.
 1백만명의 신예부대가 적진의 제1선에서 작전에 임한다는 것은 매우 엄중한 사태이다.
 오늘날 한인들은 어느 누구도 왜적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왜구의 압박 때문에 한인들은 어쩔 수 없이 동맹군과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이니,그 영향이 어찌할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응당 적진중의 한적 사병들이 투항해올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일군에 끌려가 있는 한인 병사들이 과연 귀순을 원할까? 절대 의심하지 말라.
 조국의 기치 하에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군대로 모여들어 자기와 똑같은 혈통을 지닌 형제들과 손잡고 왜적과 생사를 건 일전을 나누는 것이 오늘날 한국 청년의 가장 숭고한 바람이다.
 이는 중국,미국이나 소련 등 여러 나라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국 청년들의 소원이기도 한 것이다. 그뿐인가? 일본제국주의의 압박 밑에서 목숨을 근근히 이어가고 있는 청년들의 더욱 간절한 소망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 청년들의 강력한 병역반대운동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건을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1937년 겨울, 경상북도 대구 시내의 100여 학생들은 중국항전에 호응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38년 11월 서울시 부근의 민중들은 폭동을 일으켜 왜적들과 3일간이나 싸움을 하였다.
 1939년 1월에는, 압록강 하구 多獅島의 한국 노동자들이 궐기하여 왜적들이 건설중이던 軍港을 파괴해 버렸다. 같은 해, 함경남도 甲山郡내 화전민들은 스스로 유격대를 조직하여, 동북 지방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의용군과 연락을 취하였다.
 1940년 부산의 4,000여 학생들은 운동회가 열리는 날을 계기로 무기를 준비하고, 왜적의 헌병대와 경찰들과 일전을 겨루었다. 그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같은 해 전국 각지에서 징집령에 반대하는 군중운동이 일어나, 그 결과 300여명의 애국청년들이 체포되었다. 역시 같은 해 山西省 運城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일군 20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한국 지원병 수백 명이 전쟁에 반대하여 소속 부대를 탈출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결국 同浦철도 연변에서 대규모 수색작전을 펼친 왜군에게 체포되었다.
 1941년에는 평양·신의주·원산·진낭포 등지에서 총수 3,000여 명의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켜 징집반대운동을 벌였는가 하면, 동년 산성성 동남 長治縣 부근에 있던 한국 징집병 3,000여 명(통솔자는 한인 金錫源 대좌)은 反戰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던 중, 인근에 있던 왜군과 충돌, 피차간 사상자를 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왜군 당국은 이 사건을 불문에 붙이고 시종 공개를 하지 않은 채, 임무교대라는 핑계로 비밀리에 그들을 소만 국경 부근으로 이동시켰다. 1942년에는 중국 廣州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중의 한인 병사 수백 명이 무장 반전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금년 4월 한국내의 청년 학생들이 징집반대운동을 치열하게 일으켰으며, 이에 따라 각 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폭동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진퇴유곡인 상황에 처한 대다수 가련한 한인들은 절망한 나머지 소극적인 저항운동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평양에서는 東京에서 대학을 마치고 돌아온 청년이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도망하다가 和信商會 4층 옥상까지 피신하였다. 더이상 도망할 곳이 없자 그는 자신을 잡으러온 왜경들의 면전에서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이런 일 말고도 전국 각지의 청년들은 징집 반대의 표시로 밤에 왜놈 경찰서 문 앞에서 자.살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중국에 있어서도 왜군에게 함락된 지구의 청년들은 적들의 이목을 피해 정처 없는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유 중국으로 도망하길 갈망하고 있으나,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청년들은 오래전부터 왜적들의 징병제도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리고 우리들 쪽으로 오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했던가? 현실은 냉혹하였다. 1939년 2월 왜적들이 한국 장정들을 강제징집하기 시작한 이래,지난 6년간 적진을 벗어나 우리측에 귀순한 병사는 단 두명에 불과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은 이름이 豊川秀雄이라는 병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林正泰라는 병사로 왜적들의 강압에 못이겨 일본명으로 개명하고 있었다.
 이들은 최근까지 강소성 중부 南通城에 주둔하고 있는 일군 야마모도(山本)부대 포병 중대에 배속되어 있던 이등병들이었다. 이들은 왜군의 진지를 탈출, 밤낮 8일간 모진 고생 끝에 지난 5월 18일 강소 북부 某 지역에서 작전하고 있는 중국군 모부대까지 도착한 것이다(본보 제2호 참조).
 이밖에 또 두 사람, 한국 청년 崔英俊과 田光一은 징병을 피하기 위하여 華北지방을 유랑하다가, 현지에서 작전하고 있던 한국광복군(전 조선의용대)의 영향을 받고 지난해 10월 23일 太行山의 항일 근거지를 찾아 왔다(1942년 12월 26일 ≪新華日報≫ 기사 참조).
 이 두 사람은 비록 직접 적진을 탈출하여 우리들을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실인즉 적진 안에 있는 한인 병사들에 대한 우리들의 공작이 주효했던 것이다.
 지금 100만을 넘는 한국의 열혈 청년들은 군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끌려 나와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하루 속히 자유스런 신천지로 넘어 오도록 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을 죽음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인도적인 입장에서라도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 있으랴. 전략적 입장에서도 그들을 버려둘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우리들은 하루라도 빨리 그들이 우리들의 품속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절대 이같은 중대임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우리들이 훌륭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모든 맹우들의 솔직한 가르침과 진실된 원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한국인 두 병사의 영웅적 武勇譚
-하나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하나는 소련에서-
泳秀
 육군 보병 중위 金英玉(Capain Young Kim)은 미 육군 제100대대 소속의 한국인 장교였다.
 그는 일찍이 미 제5군을 따라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금년 3월 미국 정부로부터 銀星武功勳章을 받았으니,이것은 그 개인의 영예뿐만이 아니라 민족적인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김중위는 최근 5개월 동안 또다시 찬란한 전공을 세운 바 있다. 이는 우리 한민족이 천성적으로 용감하다는 민족정기를 대변하는 쾌사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이제 그 무용담을 소개할까 한다.
 1944년 5월 16일 김중위는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하고 있었다. 이때 그가 속한 부대의 임무는 적 동태를 살피는 척후였다.
 김중위는 용기를 내어 직접 적의 소굴에 들어가 적정을 살피기로 결심하였다. 당일 새벽,적진을 향해 출발하려는 순간,그의 부하인 赤星 상등병(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이 김중위를 수행하여 같이 모험을 해보겠노라 나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칠흑같은 어둠을 이용하여 적진 쪽으로 더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옷깃 스치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드디어 적들의 경계선과 철조망을 돌파, 계속 전진하였다. 적진이 가까워질수록 장애물은 많아져 앞으로 더듬어 나가기가 심히 곤란하였다. 그러나 약 세시간을 포복하여 그들은 3백미터 가량을 전진할 수 있었다.
 이때 동녁이 어슴푸레 밝아오며 산들바람을 타고 적군의 웃음소리가 전해왔다. 두 사람은 민첩한 동작으로 키 작은 나무 숲으로 몸을 숨긴 다음, 나뭇사이의 틈을 통해 적진을 살피기 시작했다. 약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독일군의 기갑 진지가 두 군데 있었다. 두 진지의 사이는 100미터쯤 되어 보였다. 이때는 아직 아침 안개가 걷히기 전인지라 시야가 모호하여 정확한 적정을 살필 수 없었다.
 마침내 김중위는 결단을 내리고, 부하 적성 상등병에게 그 곳에서 적 동태를 살피고 있으라 명령을 내린 후, 자기는 단신 지형과 은폐물을 이용하여 천천히 독일군 진지를 향하여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진지 가까이에 이르러보니 독일병 두명이 뭔지 떠들고 웃고 있었다. 김중위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은 뒤 자동소총을 꺼내들고 번개와 같이 뛰어나가 독일 초소병의 가슴을 겨누었다.
 돌연 급습을 받은 적 초소병은 혼비백산 부지중에 소지하고 있던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김중위의 지시에 따라 김중위가 잠복해 들어갔던 길을 따라 아군 진지 쪽으로 끌려왔다.
 한편, 김중위가 되돌아온 후에도, 적성 상등병은 명령대로 원위치에서 적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 진지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는지라 역시 김중위를 따라 부대로 돌아왔다.
 김중위가 독일군 두명을 앞세우고 적진지에서 멀리 빠져나올 때까지도 적진지에서는 적병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미 제5군 사령부는 적병을 사로잡아와 정보를 캐낸 김중위의 지혜와 용기를 높이 치하했다. 그리고 대위로 특진시키는 한편, 또 하나의 은성무공훈장까지 상신했던 것이다. 현재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파시스트 강도 섬멸에 매진하고 있다.
×    ×    ×
 또 한 사람은 한인 군관 全彼得(음역)이다. 그는 소련군 모 기관총 중대의 소대장으로 1941∼1942년 그가 소속된 부대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사이의 전장에서 나치스군과 싸우고 있었다. 이 때의 전황을 볼 것 같으면, 소련군은 나치스군의 맹공 아래 사뭇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였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사이에는 가리닌그라드라는 곳이 있는데,이곳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간 철도교통의 연결적으로 전략상 매우 중요한 거점이다. 불행히도 이곳이 나치군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고,전피득의 부대는 이곳을 탈환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942년 1월 17일 밤, 가리닌그라드성 중심가에 있는 한 높은 망루 꼭대기에서 갑자기 기관총이 사면 팔방으로 불을 뿜기 시작했다. 콩볶는 듯한 총성은 정적을 찢고 있었으며 갈수록 치열해졌다.
 갑작스런 총격에 성내에 있던 독일군 중형 탱크기계화부대 5백명은 아연실색하여 반격도 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도망하기에 급급하였다. 이미 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련군은 성밖으로 도망치는 독일군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생포하였다.
 성안에 있던 5백명의 독일군 탱크부대는 이렇게 망루 위의 한 영웅에 인해 해결되었다. 그 영웅이 바로 한국인 군관 전피득이었다.
 이 위대한 공적은 소련 전역에 널리 보도되었다.
 전 병사의 용맹도 역시 우리 한민족의 용감성과 우수성을 과시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우리들뿐만이 아니라 전 소련 국민들에게서도 오래오래 칭송을 받을 만한 인물이라 하겠다.

敵障 중에서의 한국 사병의 反戰 일화
復榮
 1941년 3,000여 명의 한국인 지원병이 산서 동남의 長治縣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그 부대의 부대장은 한국인 군관 金錫源 대좌였다.
 어느날,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같은 일본군이 무엇에 놀랐는지 김석원 부대를 중국의 중앙군 대부대로 오인, 시험삼아 그 부대를 향해 대포 한발을 쏘아대었다. 한국인들은 이에 원한을 씻어 볼 때가 왔음을 깨닫고 곧 전병력을 동원 응사하여 교전이 붙었다.
 김부대장은 중대한 책임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같은 일본군의 오인으로 인한 발포임을 역설하고, 즉각 전투행위를 중지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김대장을 욕했다.
 “당신은 단군의 자손이 아닙니까? 당신의 혈관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는단 말입니까?”
 김부대장은 이와 같은 강박에 몰려 할 수 없이 그들을 직접 지휘하여 일본군의 진지를 포위하고 맹렬히 포화를 퍼부었던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같은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일본인 병사들도 한국인 병사들의 위협에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결국 일본군과 일본군이 교전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먼저 발포한 일본군 부대는 곧 자기네가 오인했음을 알고 白旗를 흔들어 용서를 빌었으나, 한국인 사병들은 그것을 못 본척 더욱 치열한 사격을 가하였다. 이렇게 되어 마침내 상황이 수습될 수 없음을 알아차린 일본군 부대는 한편으로 응전하는 한편, 상부에 이 어려운 사태를 무선으로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상급 부대에서는 곧 트럭과 비행기를 동원, 많은 지원 병력을 현지로 급파하였으며, 김석원 부대측에서도 많은 지원 병력이 도착한 것을 보자 급기야 사격을 중지, 자기들 역시 같은 오해로 인한 사격임을 짐짓 사과하였다.
 일본군 당국에서는 비록 이 교전이 한국인 사병들이 많이 배속된 부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고의적인 행동임을 명백하게 알 수 있었으나, 사태가 사태인 만큼 손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진상을 조사하여 문제를 확대시키는 것보다는 현상대로 묵과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려 결국 불문에 붙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비밀리에 김석원을 부대장 직에서 해임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동 부대는 교체를 구실로 소만 국경으로 배치되었다가 마침내 해체시켜 버렸다. 그리고 동 부대의 한국인 사병들을 일본군 각 부대에 분산 배속시키고 암암리에 그들의 행동을 감시한다고 한다.
 상술한 일화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招募委員 金學奎 동지의 지난해 보고서에서 얻은 것이며, 그는 현재 晥(安徵省)·豫(河南省)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공작을 위하여 적의 포화를 무릅쓰고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그의 행동에 대하여 우리는 크게 감사하는 동시에, 그에게 열렬한 지원과 동정을 보내는 당지의 중국 군·관·민 등 각계의 영수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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