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위키에 있는 조선시대 노비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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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 Palais 같은 미국인 역사학자는 조선시대에 노비가 전체 인구에서 최소 30%~40%를 차지한 점을 들어 조선사회가 노비제 사회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주의해야 할 점은 노비 비율이 전체 인구의 30 - 40% 내외였던 시기는 17세기 기준이라는 것이고
비율 자체도 논란이 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선 인구구조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극단적으로 줄어든다.
노비 공급은 상당 부분 채무자가 자신의 딸이나 아내를 노비로 매매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양천교혼은 자손이 노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아야 정상이겠으나 정신이나 신체에 문제가 있는 사람부터 자손이 노예가 되건 말건 신경 끄고 일단 결혼부터 하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종 조에 가서는 노비종모법이 명시화되면서 노비의 숫자가 갈수록 증가하게 된다.
또한 납세와 군역을 피하기 위한 양인계층의 자발적인 예속화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학자들은 단성호적(경상도 단성현에서 관내의 호구를 조사한 호적대장)과 숙종실록 등을 바탕으로 17세기 조선시대 전 인구의 30~40% 정도를 노비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노비비율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계속 줄어든다.
영조-정조시기를 거치며 노비의 숫자가 크게 감소하였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영조시절에 노비비율은 전체인구의 10% 이하로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