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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7-05 06:44
[한국사] 발해 ㅡ 천문령(天門嶺)과 동모산(東牟山) 3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2,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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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령(天門嶺)과 동모산(東牟山) 3



발해 건국 과정에 관하여 《구당서 발해전》과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은 앞에서 분석해 보인 바 대로 그 내용을 서사에 알맞게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여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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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서사의 기술 내용, 즉 서사가 대체로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오대회요》와 《신오대사》의 기록을 따져서 정리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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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서는 구당서(945년)와 신당서(1060년) 편찬 시기의 가운데 시기에 놓여있으면서 서로 90년도의 차가 있다. 오대회요 963년, 신오대사가 953년에 완성됐다. 후대에 편찬된 신오대사는 오대회요의 기술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면서도 다소 상이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보완재의 구실을 한다. 즉 각자의 ④번 항의 기술에 차이가 나는데 오대회요는 대조영이 걸사비우가 죽고 나서 그 무리를 합칠 때에 걸사비우 휘하에 있던 남은 사람의 수를 4천여 명이라고 적고 있고, 신오대사는 대조영의 무리와 죽은 걸사비우 무리를 합친 인원수가 40 만 명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듯 한데 맥락 상 동모산에서 최초 자립할 당시의 인구수를 말한 것으로 볼 여지 역시 있다. 이밖에는 대체로 신오대사가 오대회요의 기록을 비교적 간략화해 옮긴 모습이다. 이를 오대회요 기술내용을 중심하여 비판하면 다음과 같다.

- - - - - - -

① 당나라 총장(總章) 연간(668~670)에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들을 중국으로 이주시켜 요동 바깥에(혹은 동북쪽 바깥에)주와 현을 설치하여 흩어져 살게 하였는데 평양성을 함락시킨 뒤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로써 그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ㅡ 안동도호부는 요동에 있었다. 그 요동의 위치가 사학계 통설대로 현 요동지역이든 아니든.
ㅡ 걸사비우, 걸걸중상(대조영) 등의 무리는 안동도호부 관할이 아니라 영주에 끌려가 흩어져 살고 있었다.
ㅡ 따라서 안동도호부가 이들을 통솔하였다는 기술은 잘못된 것이다.

②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696~697)에 거란의 이만영이 영주도독부를 공격하여 함락하자 고구려의 별종인 대사리 걸걸중상이 말갈의 걸사비우와 더불어 요동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지키며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다스렸다. 

ㅡ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를 함락하자 요동을 달아난 것이 아니라 이들 거란의 반란에 호응하여 함께 행동을 취했다.
ㅡ 구당서 발해전은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가 거란의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하였고 그 명을 받은 거란 출신 이해고는 걸사비우와 대조영의 무리를 공격했다고 적고 있으며, 신당서 발해전은 그 전에 먼저 측천무후가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에게 각각 허국공과 진국공의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거부하였다고 적고 있다.
ㅡ 즉 걸사비우와 걸걸중상(대조영)의 무리는 이진충의 잔당, 즉 반란을 일으킨 거란의 잔당에 속하였던 무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ㅡ 따라서 거란이 영주를 함락하자 요동으로 달아났다는 기술은 잘못된 것이다.
ㅡ 안동도호부는 요동에 있었다. 그 요동의 위치가 사학계 통설대로 현 요동지역이든 아니든.
ㅡ 걸사비우, 걸걸중상(대조영) 등의 무리는 안동도호부 관할이 아니라 영주에 끌려가 흩어져 살고 있었다.
ㅡ 이들 무리는 거란의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당나라 이해고의 군대에 쫓겨 전투를 벌이며 요동으로 도주한 것이다.
ㅡ 요동에는 안동도호부가 있었다. 
ㅡ 걸사비우는 천문령 전투 이전에 이해고에게 죽임을 당했고, 걸걸중상은 그 때를 즈음하여 병으로 죽었다.
ㅡ 따라서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요동으로 도망가서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다스렸다한 기술은 잘못된 것이다.

③ 측천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봉하고 걸걸중상은 진국공에 봉하였는데 걸사비우가 이를 거부하자 츨천무후는 이해고에게 명하여 걸사비우를 베어죽였다. 

ㅡ 이는 신당서, 오대회요, 신오대사가 모두 공유하는 기술 내용인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697년 당시에 유주, 또는 평주에서 가까운 곳을 점유하고 있어야 한다.
ㅡ 이해고는 측천무후로부터 이진충이 죽자 이진충의 잔당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과업의 일환으로 걸사비우와 걸걸중상(대조영)을 공격하였다. 또한 동시에 두 사람에 허국공과 진국공이라는 최고위 관작을 내려 회유를 하였다. 
ㅡ 이 사실은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의 무리가 거란의 반란에 적극 가담하여 활약하였고 이들이 이진충이 죽은 후에나 요동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유주, 또는 평주, 또는 이 지역에서 가까운 곳을 점유하고 비교적 막강한 힘을 가지고 당나라와 대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ㅡ 책봉을 거부하자 걸사비우를 먼저 죽였다는 것은 걸사비우의 무리가 이해고의 공격 경로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거나 이해고의 군대가 걸사비우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먼저 향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 구당서는 이해고가 걸사비우의 무리를 먼저 깨트리고 천문령을 넘어서 대조영의 무리를 압박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신당서는 대조영이 공격을 받은 걸사비우의 남은 무리를 합쳐서 이끌며 천문령을 넘어 도망쳤고, 이해고의 군대가 이를 쫓아가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다고 적고 있다.
ㅡ 정황을 보면 걸사비우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걸사비우의 무리가 먼저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천문령을 전장지로 하였다는 것은 천문령 일대에 대조영 무리의 거점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ㅡ 따라서 구당서의 기술 내용이 정황 맥락에 부합하며 이를 토대로 한다면 천문령의 서쪽에는 걸사비우의 거점이, 동쪽에는 걸걸중상(대조영)의 거점이 있었거나 천문령의 동쪽에 이들 모두의 거점이 있었는데 걸사비우의 무리가 천문령의 서쪽 경로로 이해고의 군대에게 쫓겨서, 혹은 전투를 벌이며 도주하여 오다가 천문령 이전에 이르러 크게 패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④ 이 때에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그 아들 대조영이 그 자리를 계승하여 걸사비우의 휘하에 남은 병사와 백성이 4천여 명을 합쳐서 읍루의 옛 땅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성력(聖曆) 연간(698~700)에 신하라 칭하며 조공하였다.

ㅡ "읍루의 옛 땅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성력(聖曆) 연간(698~700)에 신하라 칭하며 조공하였다."는 서사 맥락 상 천문령 전투의 승리와 요동으로 이동 이후에 나와야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오대회요와 신오대사의 기록은 천문령 전투는 기록에 없고, 요동으로 이동한 것은 앞에 배치하였다.
ㅡ 한편 걸사비우와 걸걸중상(대조영)의 무리가 거란의 반란에 함께 참여했다는 것은 이들 거주 지역이 거란의 본거지인 송막지역(현 시리무룬허 유역)과 가까웠다는 것을 시사한다.

- - - - - - -

이상의, 구당서, 신당서, 오대회요, 신오대사 등의 분석과 검토 내용을 토대로 평면도를 그려서 위치 관계의 맥락을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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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사비우와 걸걸중상(대조영) 무리의 위치, 천문령을 전후한 추격과 전투 순서 등을 고려했을 때에 위와 아래의 두 가지 형태로 시각화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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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렇다면 이것을 그대로 실제 지도 위에 옮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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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계 통설의 영주와 안동도호부 위치 비정을 고려했을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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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안록산전의 천문령 위치 기술을 고려했을 경우

그런데 구당서는 "거란이 돌궐에 복속한 탓에 더 이상 토벌할 수 없었다", 하였고 신당서는 "거란이 돌궐에 복속한 탓에 군대의 길이 막혀서 더 이상 토벌할 수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지도를 통해 거란 반란이 일단락된 직후 돌궐의 활동을 상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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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의 천문령 위치와 동모산, 구국 등의 위치는 사학계 통설을 반영한 것이다. 지도에 본인이 노란색으로 표시한 화살표 경로로 돌궐에 상관 없이 군사 행동을 할 수 있는데 거란이 돌궐에 복속한 탓에 군대의 길이 막혔다는 것은 무슨 곡절이겠는가? 

발해 건국 세력은 거란의 영주 반란 당시에도 행동을 함께 하였고, 대조영이 진국을 세운 후에는 돌궐과 통교하여 친하게 지내며 당나라를 견제하였으며 거란은 733년 도산 전투에서 돌궐과 함께 국제 연합군을 구성해 당나라를 압박하였다. 이러한 세 세력의 공조와 연대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그것은 서로의 이익, 그리고 신뢰가 밑바탕이 돼야 한다. 

삼국사기는 이 당시의 안동도호부의 형편에 대하여 "수공(垂拱) 2년(서기 686), 항복한 임금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성력(聖曆) 초(서기 698)에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여 안동의 옛 부(部)들을 통치하게 하였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임금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라고 적고 있다. 비록 당나라가 거란 반란 진압 후에 본래의 영주지역 되찾지는 못했지만 도호부를 도독부로 격하시키면서도 어느 정도의 관리를 하였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대조영 무리가 천문령 전투 후에도 거란 인근 지역에 머물면서 거란이 돌궐에 복속돼 거란 지역이 돌궐의 간접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당나라의 힘이 미치지 못 하게 되고, 곧 이어 돌궐이 697년 승주, 영주 공격을 시작으로 698년 규주, 단주, 울주, 정주, 조주, 상주 등을 공격할 즈음을 전후하여 요동 지역으로 이동하였음을 추정케 한다.

한편 본인은 안동도호부의 위치에 대하여 사학계 통설과 달리 현 의무려산을 중심한 지역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 지역은 후에 발해 영역이 되는데 1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야율아보기가 유주 등지를 공격하기에 앞서 배후를 안정화하기 위하여 그곳을 빼앗아 동평군을 두었다. 또한 928년 동단국의 천복성이 이치돼 와서 남경이 됐다가 다시 동경으로 이름을 바꾼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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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만주원류고에서는 천문령의 위치를 현 심양시 서쪽으로 비정하고 있다. 

天門嶺舊唐書渤海大祚榮保阻自固則天命李楷固率兵度天門嶺以迫祚榮祚榮合髙麗靺鞨之眾以拒楷固王師大敗楷固脫身還〔案祚榮始居營州後東奔保阻楷固兵度天門嶺以迫之楷固既敗則天不能討祚榮遂東保東牟山則天門嶺當在今承徳縣西境〕《欽定滿洲源流考卷十四》

이러한 이유는 동모산(東牟山)의 위치와 관련이 있다.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당대 사서는 없다. 가장 오래된 것은 《원일통지》인데 동모산이 심양로(沈陽路)의 읍루고지(挹婁故地)에 있다고 적고 있다. 심양로는 현 심양시가 있는 곳이다. 요와 금의 심주가 원에서 심양로가 되고 명나라에 이르러 심양중위가 되었다. 

沈陽路
建置沿革
沈陽路本挹婁故地渤海建定理府都督瀋定二州領定理平邱岩城慕美安夷瀋水安定保山能利九縣此為瀋州地後罹兵火其定州與縣並廢即瀋州為興遼軍節度金末瀋州複毀於兵火

沈陽渤海建定理府都督瀋定二州此為瀋州地後罹契丹兵火其定州與縣並廢即瀋州為興遼軍又更昭德

山川
東牟山
東牟山在沈陽路挹婁故地唐滅高麗粟末靺鞨保挹婁之東牟山即此

渾河
渾河在遼陽路本路圖冊引遼志云源自越喜國出熊水西北合眾流會淄水屈曲數千里入於海按地志集略云源出女真國西流過貴德州由州西流入梁水西南七十里合遼河入於海

渾河在沈陽路源出廢貴德州東北瑚呼瑪山西南經瀋州南一十五里遼陽西四十里會太子河合遼水南注于海舊稱瀋水水勢湍激沙土混流故名渾河今水澄澈遇漲則渾

蒲河
蒲河在沈陽路源出鐵利國蒲谷流經蒲水田過故名

《大元一統志》

심양지역에서 읍루가 거론되게 된 연유는 앞의 <읍루(挹婁)와 계루(桂婁)>에서 설명한 바 있다. 요나라 태종 야율요골(야율덕광)이 926년 대원수의 신분으로 발해를 침략하여 발해 각지의 저항을 진압하며 근 7개월여의 군사활동을 벌였는데 그 때에 발해 정리부(정리부는 926년 3월과 5월 두 차례 반란을 일으켰는데 3월 반란은 안단이 8일만에 진압했으나 5월의 반란은 한달이 넘어서야 진압됐다. 이 5월 반란 진압에 야율요골이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에서 백성들을 끌고왔는데(거란은 발해지역에서 반란이 있을 때마다 주민을 소개, 사민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이 때에 정리부(읍루) 출신 주민들이 살게 된 지역이 심주와 쌍주 등지로 오늘날의 심양시, 그리고 그 북쪽 지역이다.

이렇게 지리정보가 꼬이게 되자 후대를 다룬 금사(金史)에서는 아예 심주(沈州, 현 심양시)를 아예 정리부(定理府) 지역이라고 기술하기에 이른다. 

沈州,昭德軍刺史,中。本遼定理府地,遼太宗時軍曰興遼,後為昭德軍,置節度。明昌四年改為刺史,與通、貴德、澄三州皆隸東京。戶三萬六千八百九十二

邑樓遼舊興州人中軍常安縣,遼嘗置定理府刺史於此,本邑樓故地,大定二十九年章宗更名。有范河、清河,國名叩隈必剌。

雙城遼雙州保安軍也,皇統三年降為縣,章宗時廢。

《金史 志第五 地理上》

동모산의 위치는 명일통지에 이르러서 '東牟山在瀋陽衞東二十里'라고 구체적으로 제시되는데 이를 후대의 독사방여기요, 만주원류고가 그대로 받아적는다.

東牟山在瀋陽衞東二十里唐髙宗平髙麗渤海大氏以衆保挹婁之東牟山即此萬嵗通天中為契丹盡忠所逼有乞乞仲象者度遼水自固武后封為震國公

《明一統志 卷二十五》

沈陽中衛司北百二十里。北至鐵嶺衛百二十里,東南至鴨淥江六百里。東牟山衛東二十里。唐高宗平高麗,勃海大氏以眾保挹婁之東牟山。

《讀史方輿紀要 卷三十七 山東八》

만주원류고는 전대의 사서 기록을 쭉 열거하며 비교적 치밀하게 동모산의 위치를 고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사서보다 구체적으로 동모산의 위치를 제시하는 바 심양 동쪽 20 리 경의 천주산(天柱山)을 동모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東牟山。舊唐書渤海大祚榮保桂婁〔新唐書作挹婁〕之故地據東牟山築城以居之。新唐書渤海本粟末靺鞨保挹婁之東牟山遼史渤海大氏始保挹婁東牟山。金史李績破髙麗粟末靺鞨保東牟山。元一統志東牟山在沈陽路挹婁故地唐滅髙驪粟末靺鞨保挹婁之東牟山即此。明統志東牟山在沈陽衛東二十里唐髙宗平髙麗渤海大氏以眾保挹婁之東牟山即此〔案今承徳縣城東二十里為天柱山當即東牟山也〕。舊唐書渤海大祚榮保阻自固則天命李楷固率兵度天門嶺以迫祚榮祚榮合髙麗靺鞨之眾以拒楷固王師大敗楷固脫身還〔案祚榮始居營州後東奔保阻楷固兵度天門嶺以迫之楷固既敗則天不能討祚榮遂東保東牟山則天門嶺當在今承徳縣西境〕。

《欽定滿洲源流考卷十四》

본인은 신당서 발해전과 가탐도리기의 교차 분석을 통하여 "작은 배로 갈아타서 강을 거슬러 오르는 뱃길 경로"가 현 요하~혼하"이고 당시의 압록강은' 현 요하~동요하'이며 신주는 현 칭위안만족자치현 일대, 현주는 구국으로서 현 이퉁만족자치현 인근이라는 것을 고증하였고, 구당서 발해전의 '계루의 땅'과 신당서 발해전의 '읍루의 땅'은 동일한 장소로 현 심양을 중심한 혼하유역이라는 것을 고증하였으며 요사 본기와 야율배전을 토대로 하여 발해 멸망과 동단국 사민의 전말을 탐구하여 발해의 고향이 현 태자하인 당수 양수가 있는 지역이며, 실제 숙여진이 설치된 지역이 현 태자하를 중심한 지역이라는 것을 밝혀서 당시 거란인들이 현 요동지역을 발해의 옛 터전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밝혀내었다. 

이러한 고찰과 고증을 통하여 발해의 최초 건국지가 현 심양과 무순을 중심한 혼하 유역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동모산은 이 지역에 있을 것이라 하는 추정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본인의 이러한 긴 고찰을 근거한 추정과는 별개로 중국의 역대 사서들 역시 현 심양 지역에 동모산이 있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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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는 사학계 통설과 달리 현 심양시 서쪽 경계를 천문령으로 보고 있으며 그 동쪽 20 리의 천주산을 동모산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명일통지와 (독사방여기요) 만주원류고의 사서 기자들은 발해 대조영이 건국한 장소로 현 심양을 중심한 혼하 일대로 파악한 것이다. 이는 928년 (음력) 12월 야율우지가 요 태종에게 올린 표문에서 발해의 고향(故鄉)이라고 표현한, 현 태자하에 비정되는 양수(梁水)와 거의 동일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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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천주산은 중국 사람들이 성경팔경盛京八景) 가운데 제 1경으로 꼽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앞에서 고찰하여 다룬 내용의 일부를 간략히 복기하여 이 '천문령과 동모산' 추적 3회 분을 가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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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글 출처 : The resonance of history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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