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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7-04 07:50
[한국사] 발해 ㅡ 천문령(天門嶺)과 동모산(東牟山) 2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3,263  

※ 천문령과 동모산 위치 추적은 발해 홀한성, 즉 상경용천부와 상경성의 위치를 고증하는 한 방안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특히 천문령의 위치를 추적하여 고증하는 일은 상경용천부의 위치를 고증하는 것보다 어렵다. 그 이유는 단서가 단 하나에 불과하고 그 단서에 따른 위치가 사학계 통설 비정지인 현 매하구시 일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단서에만 의존하지 못 하여 발해 건국 과정의 전후사를 모두 고려하고 분석, 비판하여 정황 속에서 추정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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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령(天門嶺)과 동모산(東牟山) 2



사학계 통설에서는 696년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를 함락하고 평주로 나아가 점거하여 하북 지방을 공격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였다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등 속말말갈이 중심이 된 고구려 유민들이 영주를 탈출하여 현 요하를 건너 이동하였다가 뒤이어 이를 추적해온 당나라 이해고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걸사비우가 죽고, 대조영을 중심으로 규합된 무리들이 현 매하구시 일대에 비정된 천문령에서 이해고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현 돈화시에 비정된 동모산에서 발해의 전신인 진국을 건국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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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반란은 서기 696년부터 697년까지 대략 1년 동안 지속됐으며 손만영의 죽음으로 반란군이 와해된 이후에도 700년까지 거란 출신 이해고(이진충의 양자)가 중심이 돼 잔당을 소탕하는 군사활동을 계속하였다. 

천문령은 발해 건국세력의 영주 탈출과 동모산 건국까지의 과정 상에 위치한 장소이자 사건의 중심이다. 천문령은 동모산의 서쪽에 위치했으며 따라서 동모산의 위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현 사학계 통설은 동모산과 첫 도읍지(구국)를 현 돈화시에 비정하고 있으며 이에 천문령은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현 돈화시 동쪽에서 적당한, 길목이라 할 만한 지역을 찾아 비정하였으니 그 지역이 바로 현 매하구시 일대이다.

반면에 본인은 신당서 발해전과 신당서 가탐도리기의 심층 교차분석을 통하여 두 기록을 모두 충족하는 고증을 하였으니 이러한 본인의 고증에 따르면 발해의 구국에 해당하는 곳은 현 이퉁만족자치현 일대, 신주는 칭위안만족자치현 인근, 고구려 왕도였던 현도현성은 무순-본계 일대로 나타났다. 이를 근거로 할 때에 동모산은 구국(현주)의 서쪽, 천문령은 동모산의 서쪽이므로 동모산은 현 심양-무순 일대, 천문령은 최소한 현 심양의 서쪽에 비정할 수 있다.

한편 천문령은 역사상 단 두 개의 사건과 결부돼 언급되는데 697년 발해 건국 과정사, 751 안록산의 거란 정벌기가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 구체적 위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나 후자의 경우 현 로합하에 해당하는 토호진하에서 북쪽으로 300 리 지점, 즉 현 적봉시 동쪽 인근의, 로합하가 만곡을 몇 차례 급격히 그리는 중하류 지역인 것으로 신당서 안록산전과 구당서 거란전을 교차하였을 시에 분석되었다.

실제 역대 사서를 교차분석하고 정황을 살펴 봤을 때에 천문령은 심양 서쪽이 동한계, 적봉시 인근 로합하 중하류 지역이 서한계로 나타나서 사학계 통설 비정지인 현 매하구시 일대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구당서와 신당서를 교차하였을 시에 이진충의 죽음, 또는 거란의 반란이 일단락된 직후에 거란 잔당 소탕의 일환으로 행해진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등 발해 건국 세력의 추적이 과연 사학계 통설대로 현 당산시로부터 현 매하구시 일대에 이르는 근 2천 리의 장거리 추격이 될 수 있었는지, 당나라는 거란 반란 진압 직후에 그러한 군사활동을 할 형편이었는지 등을 696-697 거란 반란의 전황부터 면밀히 살피는 것으로써 검토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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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당서 거란전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손만영이 매부 송막도독(松漠都督) 이진충(李盡忠)과 함께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에게 모욕을 받아 두 사람이 함께 병사를 일으켜 조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진충은 굴가의 후손으로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 겸 송막도독을 역임하였다. 측천무후는 이들의 반란에 분노하여 손만영의 이름은 만참(萬斬), 이진충의 이름은 진멸(盡滅)로 고치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진멸은 곧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으로 자칭하고 손만참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선봉에서 노략질하도록 하니, 전진하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켜 10일만에 병사가 수만명으로 불어나 단주(檀州)까지 육박하였다.(측천무후는) 조서를 내려 우금오대장군(右金吾大將軍) 장현우(張玄遇) 사농소경(司農少卿) 마인절(麻仁節)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러 나섰다.

서협석곡(西硤石谷)에서 손만참과 싸웠지만 관군이 대패하고 장현우와 마인절이 사로잡혔다. 다시 하관상서(夏官尙書) 왕효걸(王孝傑)·좌우림장군(左羽林將軍) 소굉휘(蘇宏暉)에게 7만을 거느리고 계속 토벌하게 하였다. 손만참과 동협석곡(東硤石谷)에서 싸웠지만 왕효걸은 진중에서 사망하고, 소굉휘는 갑옷을 버리고 도망갔다. 손만참은 승승장구하여 유주(幽州)까지 쳐들어가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청변도대총관(淸邊道大總管)·건안군왕(建安郡王) 무유의(武攸宜)가 부장을 보내 토벌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좌금오대장군(左金吾大將軍)·하내왕(河內王) 무의종(武懿宗)을 대총관으로 삼고, 어사대부(御史大夫) 누사덕(婁師德)을 부대총관(副大總管)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사탁충의(沙吒忠義)를 전군(前軍) 총관으로 삼아 30만을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다. 얼마후 이진멸이 죽고 손만참이 대신 무리를 이끌었다. 손만참은 다시 별도로 낙무정(駱務整)과 하아소(何阿小)를 유격대 선봉으로 삼아 기주(冀州)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자사 육보적(陸寶積)을 죽이고 관리의 자녀 수천명을 도륙하였다.

얼마후 해와 돌궐의 무리가 배후를 습격하여 노약자를 약탈하였다. 손만참이 무리를 버리고 경기병(輕騎兵) 수천명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났다. 전군부총관(前軍副總管) 장구절(張九節)이 수백기를 거느리고 매복하였다가 맞아 싸웠다. 손만참이 곤궁에 처하여 노비와 경기병 몇몇과 달아아 노하(潞河) 동쪽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안장을 풀고 쉬고 있을 때 노비가 목을 베었다. 장구절이 그 머리를 낙양으로 보냈다. 이로부터 잔당들이 모두 돌궐에 항복하였다. 《구당서 거란전》


■ 신당서 거란전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가 교만하여 자주 휘하의 거란인 추장들을 모욕하니 이진충 등이 모두 원망하였다. 손만영은 본래 인질로 당나라에 입조한 적이 있어서 중국의 지세를 자세히 알았다.

그래서 모반의 마음을 품고(이진충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營州)를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은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칭하고 손만영을 장수로 삼아 사방으로 공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이주일도 되지 않아 무리가 수만명이나 되었지만 거짓으로 십만이라고 하였다. 숭주(崇州)를 공격하여 토격부사(討擊副使) 허흠적(許欽寂)을 사로잡았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노하여 조서를 내려 응양장군(鷹揚將軍) 조인사(曹仁師)․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 장현우(張玄遇)․우무위대장군(右武威大將軍) 이다조(李多祚)·사농소경(司農少卿) 마인절(麻仁節) 등 28명의 장수들에게 토벌케 하였다.

한편 양왕(梁王) 무삼사(武三思)를 유관도안무대사(楡關道安撫大使), 납언(納言) 요숙(姚璹)을 부사(副使)로 삼고, 손만영의 이름은 만참(萬斬), 이진충의 이름은 진멸(盡滅)로 고쳐불렀다. 여러 장수들이 서협석(西硤石)의 황장곡(黃獐谷)에서 싸웠으나 당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장현우와 마인절은 모두 사로잡혔다. 거란군이 평주(平州)로 진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측천무후는 다시 우무의대장군(右武衛大將軍) 건안왕(建安王) 무유의(武攸宜)를 청변도대총관(淸邊道大總管)으로 임명하여 거란을 공격토록 하였는데, 이때 노비 가운데 용감한 자를 관청에서 그 주인에게 값을 주고 모집하여 군대에 충원하였다.

손만영이 말에 재갈을 채우고 밤에 단주(檀州)를 습격하였는데 청변도부총관(淸邊道副總管) 장구절(張九節)이 결사대 수백명을 모집하여 육박전을 벌이니 손망영이 패하여 산으로 달아났다. 얼마후 이진충도 죽으니, 돌궐의 묵철가한(黙啜可汗)이 거란의 부족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손만영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다시 세력을 떨치며 별장(別將) 낙무정(駱務整)과 하아소(何阿小)가 기주(冀州)를 공격하여 자사 육보적(陸寶積)을 죽이고 수천명을 약탈하였다. 측천무후는 이진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조서를 내려 하관상서(夏官尙書) 왕효걸(王孝傑)과 우림위장군(羽林衛將軍) 소굉휘(蘇宏暉)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거란을 공격하여 동협석(東硤石)에서 싸웠으나, 당나라 군대가 패하고 왕효걸이 죽었다. 손만영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드디어 유주(幽州)를 도륙하였다.

무유의가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으니 이기지 못하였다. 당나라에서 다시 우금오위대장군(右金吾衛大將軍)·하내군왕(河內郡王) 무의종(武懿宗)을 신병도대총관(神兵道大總管), 우숙정어사대부(右肅政臺御史大夫) 누사덕(婁師德)을 청변도대총관(淸邊道大總管),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사탁충의(沙吒忠義)를 청변중도전군총관(淸邊中道前軍總管)으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토벌케 하였다. 손만영의 부대 기세는 날카로와 북을 울리며 남진하며 영주(瀛州)의 속현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니 방자함이 거리끼는 바 없었다. 이때 신병도총관(神兵道總管) 양현기(楊玄基)가 해의 군대를 이끌고 그 후미를 공격하니 거란이 대패하였다.

하아소를 사로잡았고 별장 이해고(李楷固)와 낙무정이 항복하였으며, 거란의 병장기를 산더미처럼 수습하였다. 손만영이 군대를 버리고 달아났다가 다시 패잔병을 모아 해와 싸웠다. 해가 사방에서 공격하자 크게 괴멸되어 손만영은 왼쪽으로 말달려 나갔지만 장구절이 세 방면에서 매복하여 기다렸다. 곤궁해진 손만영은 가노 및 경기병과 함께 로하(潞河) 동쪽으로 달아났다. 피곤하여 숲속에서 잠시 누운 참에 가노가 그 머리를 베어버렸다. 장구절이 손만영의 머리를 낙양으로 보내니 잔당들이 모두 괴멸되었다. 무유의가 개선가를 부르며 귀환하니 측천무후가 기뻐하여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신공(神功)으로 연호를 바꾸었다.(당나라에 패한 후) 거란은 자립할 수 없어 드디어 거란에 복속되었다.《신당서 거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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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서의 기록을 교차하여 지도상에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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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충과 손만영의 거란군은 영주를 함락한 후 숭주를 습격하였고 이후 평주의 서협석 황장곡에서 수비하던 당군을 크게 깨트리고 평주에 진입하여 평주를 거점으로 하여 하북 지역의 도처(到處)를 공격, 약탈, 살육한다. 장성 안쪽으로 진입함에 있어서 단주, 즉 고북구 방면의 경로를 택하지 않고 평주를 택한 것은 군사 전략 상 고북구 경로를 택할 경우 그 경로가 험란하고 그 지역이 해의 영역인데 해는 당나라에 복속돼 당시에는 비교적 양호한 관계를 형성하고 었으므로 저항에 부딪힐 우려, 뿐만 아니라 이 경로를 택하면 유주와 평주 등지의 양방향, 또는 다방향으로부터 협공을 받을 우려가 크기 때문이라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평주는 협공을 받을 염려가 적고, 노룡새의 험준함이 있어서 지형적으로 유주 방면으로부터 자체 방어가 되기에 군사적 이점이 있다. # 저 지도 상에서 평주라 표시한 원의 남쪽 바깥의 여분의 땅은 당시에는 다 바다, 또는 바닷가였다고 생각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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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충 · 손만영의 거란군이 평주로 진입한 서협석은 바이두백과는 위 지도상 1번 위치인, 현 당산 천안시 동북쪽에 비정하고 있다. 이는 훗날 도산전투(733)가 벌어진 도산의 바로 남쪽에 해당한다. 이 경로는 거란의 요나라 시대에도 택주로라 하여 평주 지역에서 중경 지역으로 통하는 경로였다. 

한편 당나라가 거란의 거점인 평주지역을 공략하고자 동협석에서 거란군과 전투를 벌여 크게 패하는데 바이두백과에서는 하북성 당산시 부근이라고 막연하게 언급하고 있으나 당산시 일대에서 평주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당시의 해안선을 고려했을 시에 지도상 2번 위치가 가장 적합하다.

반면에 중국역사지도집과 독사방여기요는 구체적 근거나 구체적 위치 비정 없이 막연하게 현 갈석산 부근을 언급하고, 또 표시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평주의 중심부로서 진입로(서협석)의 역할도 남쪽 지역에서 평주로 들어가는 침투로(동협석)의 역할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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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 천안시 동북쪽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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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해안선을 고려했을 시에 남쪽에서 평주로 들어가는 경로에 위치한 협곡형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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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갈석산 일대

우리를 탈출한 호랑이 무리처럼 거란군은 하북 지역을 휘젓고 다니는데 돌궐의 묵철에 의해 그 후방 지역인 송막부락이 공격을 당하면서 한번 크게 휘청거렸는데 그 후에 기주 등지를 공격, 약탈할 때에는 당나라가 해의 군사를 빌려서 후미를 공격하면서 와해돼 여러 방향에서 공격을 받고 몰리던 손만영이 현 북경시 통주구를 흐르는 로하의 동쪽에서 노비에 의해 목이 잘리면서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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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은 거란의 반란 이전부터 당나라의 변경을 공격, 약탈해왔다. 거란의 반란 때에 자청하여 거란의 본거지인 송막 부락을 공격, 손만영의 처자를 사로잡고, 물자를 약탈하고, 거란의 군사들을 죽였다. 그런데 이후 지도상에 표시된 것에서 보듯이 거란의 반란이 일단락되자마자 영주(靈州)와 승주(勝州)를 공격하였고 이듬해인 698년에는 규주(嬀州)와 단주(檀州)를 시작으로 울주(蔚州), 정주(定州), 조주(趙州) 등을 거쳐 상주(相州)까지 공격하는 등 당나라 내지로 매우 깊숙이 들어와 군사행동을 하였다. 696년, 또는 697년 초로 판단되는 송막 공격은 당나라를 도와주기 위함이기보다는 거란 지역을 복속화하고 당나라를 정탐하기 위한 구실을 얻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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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697년에 거란의 란을 가까스로 진압하였으나 본래의 영주(營州) 지역을 탈환하지 못하였으며 신당서에 따르면 오히려 그 2년 뒤인 699년에 현 당산시 계현에 해당하는 어양에 영주를 교치(萬歲通天元年為契丹所陷,聖歷二年僑治漁陽)하였다. 거란 잔당 소탕이 완료되었다 구당서와 신당서가 전하는 700 년 이후에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구당서에 따르면 705년에는 현 당산시 계현에 있던 영주를 다시 더 후퇴시켜서 유주(幽州)로 교치(神龍元年,移府於幽州界置,仍領漁陽、玉田二縣。)한다.  영주(營州) 문제는 거란 반란 진압 직후의 정세를 간략히 살펴보고 검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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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발해전에서는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는 좌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이진충의 잔당을 토벌케 하였다. 이해고의 당나라 군대는 먼저 걸사비우를 격파하여 참하고, 다시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 군대를 압박하였다.(盡忠既死,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先破斬乞四比羽,又度天門嶺以迫祚榮。)"라고 적고 있다. 이진충의 잔당, 즉 거란의 잔당을 토벌하면서 먼저 걸사비우와 대조영의 무리를 공격하고 있다. 즉 걸사비우와 대조영이 통솔하는 발해 건국의 선(先)집단을 '이진충의 잔당(其餘黨)'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술에서 보이는 인식적 태도는 고구려 멸망 후 영주에 묶여 있던 발해 건국의 선집단이 이진충과 손만영의 거란이 영주를 함락하고 하북 지역을 공격, 약탈할 때에 호응하여 함께 활동했음을 시사하며 동시에 발해 건국 선집단에 대한 당나라의 공격과 추격이 거란의 란이 일단락된 직후에 가장 먼저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학계 통설은 신당서 발해전을 중심으로 발해 건국 과정을 설명하면서 발해 건국 선집단이 영주를 탈주하여 현 돈화시 서남부의 동모산에 의지해 건국하였고, 그 전에 현 매하구시 일대의 천문령에서 이 이해고의 당나라 추격군을 무찔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학계 통설대로라면 이해고의 당나라군은 잔당이 숨어 있는, 전흔이 가시지도 않은 유주와 평주 등지를 두고 저 멀리 2천여 리의 대추격전을 감행하였다는 것이 된다. 그것도 돌궐이 변경을 공격할 조짐을 보이고, 해와 거란이 돌궐에 복속하는 분위기 속에서 말이다.

만약 이러한 사학계 통설의 설명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본다면 저 2천여 리의 추격은 사학계 통설이 영주(營州)로 비정한 현 요녕성 조양시와 대릉하 유역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한 다음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학계가 비정한 천문령으로 가기 위해서는 현 요하를 건너야 하고 현 요하를 건너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현 대릉하 유역을 거쳐야 하기때문이다.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당나라는 본래의 영주(營州) 지역을 회복하지 못 하고 699년 현 당산시에 교치시켜 설치한 후, 다시 705년에는 아예 현 북경시에 있던 유주로 다시 교치시켜버렸다. 그런 후에 구당서에 따르면 716년, 신당서에 따르면 717년이 되어서야 유성(柳城)으로 돌아갔다.

거란이 영주를 함락한 696년부터 유성으로 돌아간 716년(구당서 기준)까지 무려 20년의 공백기가 있었던 것이다. 716년에 유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돌궐의 묵철가한이 쇠락해지자 돌궐에 복속돼 있던 거란이 돌궐에 등을 돌리며 714녀에 당나라에 다시 귀부해왔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716년에 거란에 송막도독부를 재설치하였다. 이런 정세에서 유성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잠시. 718년, 송막군왕 사고(娑固)와 대신 가돌우(可突于)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면서 사고가 당나라 영주로 도피, 직전에 돌궐에 복속돼 있다가 당나라와의 관계를 회복한 해왕(奚王) 이대보(李大輔)와 사고 등을 앞세워 가돌우에 맞섰으나 역부족이 돼 사고와 이대보가 가돌우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고 당나라 군대는 유관(渝關)의 서쪽으로 후퇴하였다. 여기서 유관이라 함은 현 진황도시 무령현 동북쪽의 임유진 자리에 있던 유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유관 자리에서 서북으로 도산(都山) 등을 잇는 방어선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해야 옳다. 이로 인하여 당나라 영주(營州)는 유성으로 나아간 지 불과 3~4년만인 720년에 현 당산시 계현 자리인 어양으로 교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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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6년의 영주 위치는 차치하더라도, 716~719년에 영주가 위치했던 유성은 본인이 전한의 요서군 유성현으로 고증하고, 태평환우기에서 "로수(현 청룡하)가 영주 유성현 경계에서 발원한다(  盧水,一名大沮水,今名小濡水,北自營州柳城縣界流入,《水經注》云:「玄水出肥如縣北,一名玄子溪。」)"하여 역시 본인이 유성현 위치 고증에 근거로 활용한 바 있는, 현 평천현과 영성현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위에 지도로 제시한 696~697 전황도와 697 거란 진압 직후의 정세도를 보면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바 거란의 란 당시와 그 직후에 현 로합하 유역과 그 동쪽 지역은 거란을 제외하고는 힘의 공백 상태였다. 당나라는 716년(구당서 기준)까지 이곳으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또한 앞에서 인용하여 설명한 구당서 발해전에서는 걸사비우와 대조영의 무리를 '이진충의 잔당'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측천무후에게 이진충의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 받은 이해고는 가장 먼저(盡忠既死,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先破斬乞四比羽,又度天門嶺以迫祚榮。) 걸사비우와 대조영의 무리를 공격하고 뒤쫓았다. 

696~697 당시에 거란의 활동반경은 전방은 평주에 거점을 두고 유주, 단주, 기주, 영주(瀛州) 등 하북지역이었고, 후방은 거란의 전통적 본거지인 현 시라무룬허 유역이었다. 696년, 또는 697년 초에 돌궐에 의해 이 본거지(송막부락)를 공격 받고 기세가 주춤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고 기주를 공격하였다. 현 시라무룬허 유역의 송막을 후방기지로, 현 진황도시 일대의 평주를 전진 기지로 하였던 것인데 이 라인의 동쪽은 힘의 공백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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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6~697의 거란의 움직임, 그리고 그 이후 안록산이 거란 정벌에 나섰던 751년까지의 정황에서 나타난 거란의 움직임은 위 지도상 노란 원의 지역과는 상관이 없다. 저 노란 원의 한 가운데가 사학계 통설에서 영주의 치소가 있었다 한 조양시가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걸사비우와 대조영이 이끄는 무리들은 측천무후에게 거란의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 받은 이해고가 가장 먼저 공격한 대상이었으므로 이들이 거란의 란에 적극 참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손만영이 현 북경시 통주구 근방에서 노비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전란이 일단락 됐을 때에 오히려 평주의 서쪽, 또는 서남쪽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손만영의 거란군은 평주의 동협석에서 당나라 군대의 공격을 크게 물리치고 다시 나아가 유주(幽州)를 공격하고, 이어서 현 창저우시(沧州市) 서쪽에 있었던 영주(瀛州)를 공격하다가 신병도총관(神兵道總管) 양현기(楊玄基)가 이끄는 해의 군대에게 후미를 공격 받고 크게 패해서 전열이 무너진다. 이 때에 거란의 장수 이해고와 낙무정이 당나라에 항복했던 것이다. 손만영의 거란군은 영주(瀛州)에서 유주까지, 북쪽으로 도주하면서 계속 해의 군사들과 전투를 치렀는데 해의 군사들에게 사방합진의 공격을 당하고 남은 병력이 크게 괴멸되어 손만영만이 노비와 몇 명의 경기병을 데리고 도주하다가 현 북경시 통주구 동쪽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한편 거란이 영주(營州)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내 함락하자 당나라는 영주 예하의 속주를 내륙 깊숙이 교치시켰다. 이 때에 당연히 말갈인들이 소속된 주 역시 교치가 되었다. 다음의 지도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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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에 따른, 그것도 먼 거리를 이동한 교치였던 만큼 중간에 이탈한 자들이 많았을 것은 분명하고, 또 교치된 위치가 거란이 유린한 기주, 영주 등의 하북지역에 연접하여 있어서 거란의 반란에 동요내지 호응이 가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갈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이 거란의 란에 동참한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장정(壯丁)들은 군사로서 전장에 나가 있었을 것이나 그 가족들은 거란과 마찬가지로 후방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란의 란이 진압되는 국면에서 다른 거란군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도주를 하여 가족들이 있는 후방으로 가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때에 거란의 잔당을 토벌하는 명령을 받은 이해고가 가장 먼저 공격한 것이 걸사비우와 대조영이 이끄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창저우시 서쪽과 북경시 사이에서 연쇄적으로 전투를 벌이다 패전하였으므로 도주로로서의 장성(長城)은  현 북경시인 유주에서 제일 가까운 밀운의 고북구(古北口) 방면, 그리고 이보다 먼 평주, 즉 현 진황도시를 거쳐 도산으로 빠져 나가는 경로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도주 과정에서 허국공이니 진국공이니 하는 회유가 있었을 것이고, 걸사비우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들이 고북구 경로를 선택하여 장성을 넘어갔다면 천문령의 위치에 대한 유일한 언급인 신당서 안록산전의 기록을 근거로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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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령은 역사상 단 두 개의 사건과 관련이 있다. 697년 당나라 이해고와 대조영의 전투, 751년 안록산의 거란 정벌. 전자는 위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후자는 언급이 있다. 이를 근거로 두 사건의 전장지인 천문령을 확정하면 다음과 같은 지도가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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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건국 기원 세력이 고북구(古北口) 경로를 통하여 도주하였다 한다면 지도의 그림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천문령은 역사상 단 두 개의 사건과 결부돼 언급되고 그 두 개의 사건은 모두 거란과 연관이 있으며 시기적으로도 불과 54년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이 두 사건의 천문령이 다른 곳이라 할 이유는 없고 같은 곳이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앞에서 거란에게 영주를 함락 당한 후 당나라는 그 696년부터 무려 20 년 동안 영주 지역을 탈환하지 못 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영주는 거란의 란이 일단락된 지 2년 후에나 돼서야 현 당산시 계현 자리인 어양에 교치돼 다시 운영되었고, 그 후에 705년(측천무후 본기에 따르면 704년)에는 오히려 더 후퇴하여 현 북경시 자리인 유주로 교치되었다. 유주에는 영주뿐만 아니라 안동도호부까지 교치되어 가 있었다. 안동도호부는 698년에 도독부로 격하됐다가 705년에 복구됐는데 이후 714년에 다시 평주로 옮겨졌다.

이러한 전황과 정황의 사실과 사실에 근거한 맥락을 고려했을 때에 발해 건국 과정을 담은 사서 가운데에 가장 이른 시기의 사서인 《구당서 발해전》의 기록이 이치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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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천문령의 위치와 696~751의 거란의 활동상은 696년 함락 당시의 영주(영주의 치소가 있는 곳)의 위치 파악에 단서(현 적봉시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케 한다)가 되는 것이다. 이때문에 사학계 통설 조성자와 그 옹위자들은 더욱 예민하게 엉뚱하게도 저 먼 매하구시에 천문령을, 돈화시에 동모산을 비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오대회요와 신오대사의 "거란이 영주를 함락하자(북쪽 변경을 침략하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요동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지키며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다스렸다"한 대목이다. 이 대목의 진위를 가리고자 앞의 긴 여정을 여기까지 이어왔으므로 답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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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에서는 걸걸중상(대조영)과 걸사비우의 무리를 이진충, 즉 거란의 잔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측천무후가 이진충이 죽자(이는 이진충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거란의 반란이 손만영의 죽음으로 일단락되었을 때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이해고에게 거란의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고, 이해고는 이 명령을 받들어 가장 먼저 걸사비우의 무리를 공격하여 걸사비우를 죽였고(盡忠既死,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先破斬乞四比羽,又度天門嶺以迫祚榮。) 이어 천문령을 넘어가서 대조영의 무리를 압박하였다. 물론 구당서에서는 이 기술의 앞에서 신오대사, 오대회요 등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696~697)에 거란인(契丹人) 이진충(李盡忠)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과 말갈인(靺鞨人) 걸사비우(乞四比羽)가 각각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 험준한 곳을 지키며 스스로 방비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 기술은 전체적 서사의 맥락을 축약한 표현으로 봐야 한다. 중국 역대 정사 외국전의 기술은 먼저 축약해 제시하고, 뒤에 상술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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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발해전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재구성하였을 때에 그 내용은 구당서 발해전의 기술 내용과 비교적 일치하는데 구당서 발해전의 내용을 맥락에 맞게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맥락에 따른 구분은 신당서 발해전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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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에서 ②의 진술 중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쪽으로 달아났다"한 내용은 바로 뒤의 ③과 ④의 기술 내용의 맥락에 의해 바로 부정된다. ④는 ③에 따른 사건이므로 이들 무리는 이진충(거란)의 잔당으로 취급되었으며 걸사비우에게 허국공(오대회요, 신오대사, 신당서) 벼슬을 주어 회유하려 한 사실에서 이들 무리가 거란의 란 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추정케 한다.

오대회요와 신오대사, 신당서는 모두 걸걸중상은 이해고가 걸사비우를 살해했을 때에 이미 (병으로) 죽었다고 했으므로 측천무후가 거란 잔당 토벌을 명령하여 이해고가 출정한 697년의 어느 시점을 전후한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봐야 하며 따라서 이 당시 걸사비우와 함께 영주에 복속돼 있던 말갈 등 고구려 유민을 통솔한 지도자는 걸걸중상이 아니라 그의 아들 대조영으로 봐야 옳다. 또한 걸사비우에게 허국공(許國公),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 벼슬을 내려 회유한 것은 696~697 거란의 란 당시, 또는 그 직후로 봐야 한다.  허국공이(許國公)이라는  벼슬은 수나라의 우문술도 수나라 건국에 있어 큰 공을 인정 받아 받은 바 있는 벼슬로 종1품에 해당하는 가장 높은 직위이다. 이러한 직위를 책봉하였다는 것은 걸사비우를 비롯한 발해 건국 선집단이 거란의 란 당시에 매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당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고 동시에 매우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대회요와 신오대사의 "거란이 영주를 함락하자(북쪽 변경을 침략하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요동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지키며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다스렸다"한 기록에서 우선적으로 "거란이 영주를 함락하자(북쪽 변경을 침략하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요동으로 달아나"라 한 기술은 거란 잔당의 토벌에 있어서 가장 먼저 이들을 공격한 사실 정황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요동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지키며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다스렸다"한 기술 역시 의심 받아야 옳다.

즉 구당서의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696~697)에 거란인(契丹人) 이진충(李盡忠)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과 말갈인(靺鞨人) 걸사비우(乞四比羽)가 각각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 험준한 곳을 지키며 스스로 방비하였다."한 기술이 오대회요와 신오대사의 "거란이 영주를 함락하자(북쪽 변경을 침략하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요동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지키며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다스렸다" 형태로 살이 붙어 와전된 것으로 봐야 하며 이 역시 발해 건국 과정을 축약하여 기술하면서 발생한 오류로 판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거란의 영주 함락과 하북 지역 유린 당시에 요동(그곳이 현 사학계 통설대로 현 요하 동쪽이든 본인의 고증대로 현 대릉하와 요하 사이이든)에는 고구려 멸망 후 그 옛 땅에 설치된 안동도호부가 있었다. 즉 오대회요와 신오대사의 기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요동으로 가서 고구려 옛 땅을 나우어 다스렸다고 보려 해도 이미 요동에는 안동도호부가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안동도호부 지역의 고구려 유민과 다투거나 화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나라는 고구려 지역의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자 당나라 내지로 끌고 갔던 보장왕을 677년에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한 뒤에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설치하고, 함께 끌고 간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돌려보내서 이 지역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보장왕은 당나라 몰래 말갈과 내통하다가 발각되었고 이에 681년에 보장왕을 앙주(卬州)로 소환하였다. 보장왕은 이듬해에 죽었다. 고구려 유민들은 보장왕이 다시 소환되면서 역시 당나라 내지로 끌려가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라, 말갈, 돌궐 지역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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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삼국사기는 "수공(垂拱) 2년(서기 686), 항복한 임금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성력(聖曆) 초(서기 698)에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여 안동의 옛 부(部)들을 통치하게 하였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임금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원화(元和) 13년(서기 818)에 이르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악공(樂工)을 바쳤다."라고 적고 있는데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은 부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보장왕과 그 아래 고구려 유민의 소환 과정에서 소환과 도망 등으로 고구려 해당 지역의 거주자들이 줄어들었을 것은 분명하고, 696년에는 거란이 반란을 일으켜 영주를 함락한 뒤 평주로 들어와 하북지역을 유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이 막혀버렸고 당나라는 714년 돌궐에 등을 돌린 거란이 다시 당나라에 귀부하기 전까지 장성 밖으로 나가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듬해에 항복한 임금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한 기술 역시 신뢰할 수 없다. 역시 그 이유는 위와 같은데 옛 안동도호부 관할지의 고구려 유민들은 대조영의 세력에 합류한 것으로 봐야 서사 맥락상 옳다.

신당서 거란전과 구당서 거란전을 교차하여 정리한, 서기 700 년 이후의 상황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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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년, 이진충의 사촌 동생인 도독 실활(失活)이 돌궐의 묵철가한(黙啜可汗)이 쇠락한 틈을 타 당나라에 귀부

716년, 송막도독부를 다시 설치하고, 이실활을 송막도독에 임명하고 송막군왕(松漠郡王)에 책봉.

718년, 이실활이 죽고 그 사촌 동생 사고(娑固)가 무리를 대신 다스리자 사신을 보내 책봉하고 형의 관작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사고가 가돌우(可突于)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공격을 당하고 당나라 영주로 달아남

영주도독 허흠첨(許欽澹)이 설태에게 용감한 군사 500명을 거느려, 해왕(奚王) 이대보(李大輔) 및 사고의 무리를 징발하여 함께 가돌우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관군이 불리하여 사고와 이대보는 진중에서 가돌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설태는 생포되었다. 영주 도독부가 크게 놀라 허흠첨은 군대를 서쪽으로 유관(渝關)으로 후퇴시켰다. 

722년, 가돌우가 사고의 사촌 동생 울우(鬱于)를 군장으로 추대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보내 울우를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가돌우를 사면하였다. 울우가 내조하자 솔경령(率更令)을 제수하고 종실의 여자인 모용(慕容)을 연군공주(燕郡公主)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가돌우도 내조하자 좌우림우장군(左羽林衛將軍)을 제수하였다. 

725년, 울우가 죽고 동생 토우(吐于)가 즉위하였는데 가돌우와 사이가 틀어져 휘하를 안정시키지 못하여 공주와 함께 (당나라로) 달아나 돌아가지 않으니, 요양군왕(遼陽郡王)에 봉하여 숙위(宿衛)로 머무르도록 하였다. 

가돌우가 이진충의 동생 소고(邵固)를 받들어 무리를 통치하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왕위를 계승하도록 허락하였다. 

730년,  가돌우가 소고를 죽이고 자기 부락과 협박한 해의 무리를 이끌고 돌궐에 항복하였다. 동화공주는 평로군(平盧軍)으로 투항하였다. 이에 중서사인(中書舍人) 배관(裴寬)·급사중(給事中) 설간(薛侃) 등이 수도와 관내(關內)·하동(河東)·하남(河南)·하북(河北)에서 나누어 용사들을 모집하고, 충왕준(忠王浚)을 하북도행군원수(河北道行軍元帥)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군대가 끝내 출동하지 못하였다. 

732년, 예부상서(禮部尙書) 신안왕(信安王) 위(禕)를 행군부대총관(行軍副大總管)으로 삼아 무리를 거느리고 유주장사(幽州長史) 조함장(趙含章)과 함께 장성을 넘어 격파하였으니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가돌우가 휘하의 무리를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니 해의 무리가 모두 항복하였고, 위는 곧바로 회군하였다. 

733년, 가돌우가 다시 노략질하였다. 유주장사 설초옥(薛楚玉)이 부장 곽영걸(郭英傑)·오극근(吳克勤)·오지의(鄔知義)·나수충(羅守忠)을 보내 정예병 만명과 항복한 해의 무리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군대가 유관(渝關)의 도산(都山)의 아래에 이르자 가돌우가 돌궐의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관군에 저항하였다. 해가 두려워하여 어느 쪽에 붙을까 기회를 엿보다가 달아나 험준한 곳에 숨어버렸다. 오지의와 나수충이 패하고 곽영걸과 오극근은 전사하니, (가돌우가) 당나라 병사 만여명을 죽였다. 현종이 장수규(張守珪)를 유주장사로 발탁하여 대응케 하였다. 장수규는 뛰어난 장수인지라 가돌우가 두려워하여 겉으로 신하가 되겠다고 하면서 서북쪽으로 달아나 돌궐에게 의탁하였다. 

735년, 거란의 관리 이과절(李過折)은 가돌우에 불평을 품고 있었다. 장수규가 부하 왕회(王悔)를 보내 몰래 그를 회유하고 군대로 가돌우를 포위하였다. 이과절이 즉시 밤에 가돌우와 굴열 및 부하 수십명을 죽이고 귀속하였다. 장수규가 이과절에게 그 부족을 통솔하게 하고 가돌우 등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낙양으로 전하였다

조서를 내려 이과절을 북평군왕(北平郡王)에 책봉하고 특진(特進)·검교송막주도독(檢校松漠州都督)을 제수하고 비단 옷 한 벌과 은 그릇 10개, 그리고 비단 3,000필을 하사하였다. 

735년, 이과절이 가돌우의 잔당 이례(泥禮)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다른 아들도 다 죽었는데 날건(剌乾)만이 안동도호부로 도망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좌효위장군을 제수하였다. 

751년, 안록산(安祿山)이 거란 추장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병사를 일으켜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8월 유주(幽州)·운중(雲中)·평로(平盧)의 군대 수만명을 동원하여 황수(潢水 ; 시라무렌) 남쪽에서 거란과 싸웠는데, 안록산이 대패하여 돌아왔으니 죽은 자가 수천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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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에 주요 사건을 지도상에서 시각화하여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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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년, 영주 반란 진압 직후 돌궐에 붙었다가 다시 당나라에 귀부한 거란으로 인하여 당나라는 716년(신당서 기준 717년), 즉 영주 반란이 발생한 지 20년이 돼서야 장성 밖으로 돌아간다. (이 돌아간 위치는 사학계 통설대로 현 조양시가 아니라 도산-유관 라인의 장성 바로 북쪽인 현 로합하 상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곳은 본인이 전한 요서군 유성현으로 고증한 곳이다.) 그리고 2년이 채 안 되어서 거란의 가돌우에게 쫓겨 다시 장성 안으로 후퇴한다. 

당나라는 이 과정에서 해의 우두머리 이대보와 쫓겨온 송막군왕 이사고를 데리고 가돌우의 거란군에게 맞서는데 이대보와 이사고 두 사람 모두 가돌우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당나라 장수 설태는 포로가 되었다. 이에 당나라는 유관의 서쪽(구당서)으로 후퇴한 것이다.

가돌우는 당시 거란에게 있어서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같은 사람인데 이후에도 권력을 틀어쥐고 당나라에 맞서거나 화친하는 등의 다변적 외교를 구사하며 군사행동도 서슴치 않아서 거란과 당나라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쥔다. 가돌우는 불과 10여 년 사이에 거란의 군장을 여럿 갈아치운다.  730년에 가돌우가  이진충의 동생 이소고를 군왕에 앉혔다가 곧 있어 죽이고 해의 무리를 협박하여 거란과 함께 돌궐에 다시 복속하자 동화공주가 도망쳐서 평로군(平盧軍)에 투항하는데 사학계 통설은 신당서 지리지에서 평로군이 영주에 있었다 한 기술을 근거로 이 평로군을 현 조양시 일대에 있었다 설명하는데 이는 참 콩떡 먹다가 팥방귀 뀌는 소리이다. 696년 거란의 영주 함락 당시는 몰라도 그 이후로 영주가 현 조양시에 있을 수 없다는 설명을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는데 아직도 딴 소리 하는 인간들은 구제불능이 아닌가? 718년 가돌우에게 패하고 밀린 당나라 영주의 군대가 유관의 서쪽(도산-유관 장성의 안쪽)으로 퇴각한 것을 보고도 팥방귀를 뀌는가? 

730년에 발생한 가돌우의 이소고 살해와 돌궐 귀부는 당나라를 둘러싼 국제 역학에 있어서의 한 조각이다. 이는 그 이전인 722년 당나라와 흑수말갈의 비밀 접선을 통해 마련된 흑수부(黑水州都督府) 설치와도 관련이 있다. 당나라를 둘러싸고 돌궐-거란-발해가 연합해 있었으며, 당나라는 이를 타개하고자 처음에는 발해에게 작위와 칭호를 내려주며 국가로서 인정하는 등 유화책을 썼으나 먹히지 않자 흑수말갈과의 연대를 통하여 이 외교적, 군사적 고립을 타파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서기 472년(혹은 475년)에 백제가 물길을 사주하여 물길-북위-백제 연합을 통하여 고구려를 고립시키려 한 외교전략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백제의 이러한 시도는 고구려 장수왕으로 하여금 지두우국 분할과 백제 정벌을 야기하였고 도리어 동북 지역에 대한 북위의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8세기 정세에서는 732년 발해의 등주 함락과 733년 도산(都山) 전투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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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거란전과 구당서 거란전 등에서는 733년 도산 전투에서 거란만을 거론하고 있으나 신당서 오승체(烏承玼)전과 구당서  곽영걸(郭英傑)전, 신당서 돌궐전에서는 각각 이 전투의 주체가 거란의 가돌우만이 아닌 발해(신당서 오승체전)와 돌궐(구당서 곽영걸전, 돌권전) 함께 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사학계 통설에서는 신당서와 구당서 거란전 위주로 근거하여 발해가 전투가 다 끝난 곳에 발해가 뒤늦게 구경이나 하러 간 것처럼 설명하고 있으나 특히 신당서 오승체전을 보면 대무예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도산에 쳐들어 와서 성읍을 도륙했다(引兵至馬都山,屠城邑)"라고 적고 있어서 사학계 통설이 콩떡 먹다가 팥방귀 뀌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한번, 침착하게, 대가리가 악세사리가 아닌 다음에는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라. 신당서와 구당서 지리지의 기술 대로 717년(신당서), 또는 723년(구당서) 당나라 영주가 원래 위치로 복귀하여 줄곧 그곳에 있었고, 그 위치가 사학계 통설대로 현 조양시를 중심한 대릉하 유역이라 한다면 대체 왜 거란과 돌궐과 발해가 연합하여 마도산을 전선으로 삼아 전투를 치르고, 당나라는 왜 그 아래 후방에 가로 400 리(160km~200km)에 달하는 규모의, 큰 돌을 쌓고 깊이 판 참호를 만들어 방어를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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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 돌궐과 발해가 뭔 수로 서로 연합군을 꾸릴 것이며, 발해의 왕인 대무예가 그것도 직접 병사를 뭔 수로 이끌고 저 멀리 도산까지 가서 전투를 치르며 성읍의 주민을 도륙할 수 있겠나?

저 사학계 통설 발해 중심지와 강역 비정한 꼬라지를 좀 보라. 배는 어디서 만들고, 해군은 어디서 훈련 시키고, 또 배는 어디서 뭔 수로 띄워서 등주를 함락하냐? 현 요동지역까지 당나라 땅이고, 현 요녕성 대릉하 유역이 당나라 영주였으면 사학계 통설대로 저 길림성에서부터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해야 했다는 말인데 이해가 가는가? 당나라가 영주가 신당서와 구당서 지리지의 기술만 그대로 따르더라도 696년부터 716년까지 도산-유관의 장성 밖으로 나가지를 못 했는데 발해가 왜 저 멀리 깊숙이 구석에 무슨 은둔형 외톨이처럼 도망 가서 처박혀 있었어야 하나?

당나라는 733년 도산 전투 이후에도 도산 바깥으로 나가지 못 하고 있었다. 안동도호부는 영주와 함께 움직이는데 안동도호부는 유주에 있다가 714년 평주로 교치돼 줄곧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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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더 떠들 것 없이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리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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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구국)의 위치는 앞의 A, B 등에서 고증해 보인 바 있는데 위 지도에 표시된 위치는 조금 잘못되었다. 표시된 위치보다 남쪽의, 화살표의 머리가 있는 지점인 현 이퉁만족자치현 일대, 또는 그 근방이 현주(구국)의 위치에 해당한다. 발해의 최초 건국지는 현 심양과 무순을 좌우한 혼하 유역으로 판단되는데 이곳에서 8세기 초반 경에 본인이 고증한 현주 위치로 수도를 옮겨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아마도 당과 흑수말갈의 관계, 등주와 도산 전투 등을 전후한 정세 속에서 보다 안전한 장소를 찾은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위치를 본인은 고구려 최초기의 졸본과 관계가 있다고 추정하는데 또한 이 일대는 본인이 고증한 정안국 및 강동6주 지역에 해당한다. 이 위치는 서북으로 동요하, 서남으로 혼하, 동북으로 송화강이 가까이 있어서 교통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주변이 험준하여 외적의 침입 시 방비하기에 좋은 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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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글 출처 : The resonance of history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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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20-04-15 20:07
   
빈틈이 없으면서도 명쾌한 연구에 감탄하고 갑니다. 간만에 시간 여행을 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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