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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7-02 10:42
[한국사] 발해 ㅡ 천문령(天門嶺)과 동모산(東牟山) 1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942  

※ 이 글은 발해 상경용천부 위치를 추적하는 한 방안으로서 작성된 것이다. 상경용천부, 구체적으로 상경성(홀한성)의 위치를 검토함에 있어서 천문령과 동모산의 위치를 따지지 않아도 앞에서 본인이 보인 고찰과 뒤에 따져보일 사서 기록 등에 의해 상경성은 현 하얼빈 일대에 가장 합리적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검토와 고찰과 고증의 엄밀성을 위하여 천문령과 동모산의 위치를 따지기로 한 것인데 본인이 먼저 블로그에 작성한 관련 원글이 있음에도 그것을 그대로 이곳에 옮기지 않고 그 원글을 재검토하여 충실화하느라 지난 6월 26일부터 지금 이 시각까지 일주일여의 시간이 추가적으로 들었다. 말하자면 발해 상경용천부 문제를 한달째 붙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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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령(天門嶺)과 동모산(東牟山) 1



​발해는 696년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를 함락하고 평주(平州, 현 당산시 동북지역 및 진황도시 일대)로 나아가 점거한 후 697년까지 단주(檀州, 현 북경시 밀운구 일대)와 유주(幽州, 현 북경시), 기주(冀州, 현 하북성 형수시 衡水市 일대), 영주(瀛州, 현 형수시 동북, 창주시 서쪽 일대)를 약탈, 살육한 이른 바 '이진충·손만영의 란' 때에 그 기회를 틈 타 영주(營州)를 벗어나 달아나서 《구당서》에 따르면 '계루의 옛땅(桂婁之故地)', 《신오대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옛땅(高麗故地)', 《신당서》에 따르면 '읍루의 동모산(挹婁之東牟山)'에서 건국하였다.

이 영주 탈주와 진국(震國) 건국 사이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 바로 천문령 전투이다. 그런데 영주에서 동모산에 이르는 공간적 이동이 시간적 순서와 순차적으로 비교적 바르게 배열된 구당서와 달리 신당서는 천문령 전투를 동모산에서 건국한 후에 벌어진 사건으로 기술하여 대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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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별종(別種)이다. 高句麗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족과 무리를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와 살았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696~697)에 거란인(契丹人) 이진충(李盡忠)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과 말갈인(靺鞨人) 걸사비우(乞四比羽)가 각각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 험준한 곳을 지키며 스스로 방비하였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는 좌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이진충의 잔당을 토벌케 하였다. 이해고의 당나라 군대는 먼저 걸사비우를 격파하여 참하고, 다시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 군대를 압박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무리를 규합하여 이해고의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당나라 군대가 대패하고 이해고만 몸을 빼어 귀환하였다. 때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突厥)에 항복하니, 측천무후는 더 이상 토벌할 수 없었다. 대조영은 드디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계루(桂婁)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東牟山)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대조영은 굳세고 용감하며 용병에 능하니, 말갈의 무리와 나머지 고구려 유민들이 점점 귀속하였다. 성력(聖曆 ; 698~700) 연간에 대조영이 자립하여 진국왕(振國王)이라 하고, 돌궐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다. 그 지역은 영주 동쪽 2천리 밖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서로 접하고 있다. 《구당서 발해전》

발해(渤海)(의 시조)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으로 고구려(高句麗)에 복속되어 있었었던 자이며 성은 대씨(大氏)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맞닿아 니하(泥河)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거란(契丹)이 있었다. 성곽을 쌓고 거처하니, 고구려 유민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통년(萬歲通天) 연간(696)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像)이 말갈(靺鞨)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 유민과 동쪽으로 달아났다. 요하(遼河)를 건너서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에 의지하여 성벽을 쌓고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측천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여 그 죄를 용서하고자 하였다. 걸사비우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자, 측천무후는 옥검위대장군(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中郎將) 색구(索仇)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죽였다. 이때에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아들 대조영이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달아나는데,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해고에게 저항하니, 이해고는 패하여 돌아왔다. 이때 거란이 돌궐(突厥)에 복속한 탓에 당나라 군대의 길이 막혀서 이들을 토벌할 수 없었다.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병하고 이 지역이 당나라에서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부르며, 돌궐에 사신를 보내어 통교하였다. 영역이 사방 오천리에 미쳤으며, 인구는 십여만호에 군사는 수만명이나 되었다. 《신당서 발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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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발해전》에의 발해건국기 서술에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동시대 사서인 《신오대사》뿐만 아니라 신당서보다 1백여 년 앞서 편찬된  《오대회요》에서도 비교적 동일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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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本號靺鞨,高麗之別種也。唐高宗滅高麗,徙其人散處中國,置安東都護府於平壤以統治之。武后時,契丹攻北邊,高麗別種大乞乞仲象與靺鞨酋長乞四比羽走遼東,分王高麗故地,武后遣將擊殺乞四比羽,而乞乞仲象亦病死。仲象子祚榮立,因并有比羽之眾,其眾四十萬人,據挹婁,臣于唐。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불렸는데 고구려의 별종이다.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멸하고 그들(말갈)을 중국으로 이주시켜 흩어져 거주케 하였는데 평양성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로써 그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측천무후 때에 거란이 북쪽 변방을 공격하자 고구려의 별종인 대걸걸중상이 말갈추장 걸사비우와 더불어 요동으로 달아나서 고구려의 옛땅을 나누어 다스렸는데 측천무후가 군사를 보내어 걸사비우를 쳐서 죽였고 걸걸중상 역시 병으로 죽었다. 걸걸중상의 아들인 조영이 (아비의 지위를 계승하여) 우두머리가 되어 걸사비우의 남은 무리를 병합하니 그 무리가 40 만 명이었으며 읍루에 거주하고 당나라에 신복하였다. 《신오대사 이부록 제3》

渤海靺鞨本髙麗種唐總章中髙宗平髙麗徙其人㪚居中國置州縣于遼外就平壤城置安東都護府以統之至萬歳通天中契丹李萬榮反攻陷營府冇髙麗别種大舍利乞乞仲象(大姓舍利官乞乞仲象名也)與靺鞨反人乞四比羽走保遼東分王髙麗故地則天封乞四比羽許國公大舍利乞乞仲象震國公乞四比羽不受命則天命將軍李楷固臨陣斬之時乞乞仲象已死其子大祚榮繼立併有比羽之衆勝兵下戶四千餘保據挹婁故地至聖歴中稱臣朝貢

발해말갈은 본래 고구려의 종족으로 당나라 총장 년간(668~670)에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들을 중국으로 이주시켜 요동 바깥에(혹은 동북쪽 바깥에)주와 현을 설치하여 흩어져 살게 하였다. 평양성을 함락시킨 뒤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이로써 그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만세통천 년간에 거란의 이만영이 영주도독부를 공격하여 함락하자 고구려의 별종인 대사리 걸걸중상이 말갈의 걸사비우와 더불어 요동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지키며 고구려의 옛땅을 나누어 다스렸다. 측천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봉하고 걸걸중상은 진국공에 봉하였는데 걸사비우가 이를 거부하자 츨천무후는 이해고에게 명하여 걸사비우를 베어죽였다. 이 때에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그 아들 대조영이 그 자리를 계승하여 걸사비우의 휘하에 남은 병사와 백성이 4천여 명을 합쳐서  읍루의 옛땅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성력 년간에 신하라 칭하며 조공하였다. 《오대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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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각 사서의 편찬, 또는 완성 시기를 보면 구당서 945년, 오대회요 963년, 신오대사 1053년, 신당서 1060년이다. 사학계 통설에서는 오대회요와 신당서 발해전의 내용이 당나라의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유주(幽州, 현 북경시)의 관리였던 장건장(張建章)이 835년 발해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보고 들은 바를 적은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저본으로 하였고, 구당서는 실록(本紀)을 중심으로 기술된 것으로 판단(사학계는 신당서 발해전의 전반부는 발해국기, 후반부는 구당서 발해전을 토대로 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서 발해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신당서를 구당서에 비해 더 높이, 그리고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장건장의 발해국기는 현전하지 않는데 사학계는 신당서 발해전이 담고 있는 발해 내부 사정의 내용이 구당서에 비하여 더 충실하므로 발해국기를 토대로 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당서가 발해국기 이전에 쓰여진 사서도 아니고 이 역시 발해국기가 쓰여진 835년 이후, 그것도 무려 110 년 후에 쓰여진 것인데 구당서가 발해국기를 비롯한 발해 관련 정보의 취합과 분별에 있어서 신당서(나 오대회요)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것은 모순에 가깝다. 이들 사서의 696년과 700년의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의, 발해 건국과정에 대한 시간과 공간의 순차에 대한 인식을 표로 간력화하여 대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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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서가 서로 신당서과 구당서를 양단으로 하여 공유점과 이질점을 보이고 있는데 사학계가 가장 신뢰하여 발해사 기술에 있어서 저본으로 삼는 신당서 발해전의 기술적 특징은 우선 앞의 세 사서와 달리 발해 건국 주체를 고구려 유민이 아닌 고구려에 복속돼 있었던 속말말갈로 기술하는 점이다. 즉 앞의 세 사서와 달리 고구려와 속말말갈을 분리하여 보는 인식적 태도를 띠고 있다. 이러한 인식적 태도는 만주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역사적 지배력과 연고권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말갈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 논란까지 파생시켰다. 상식적인 사고력, 합리적인 판단력을 갖춘 자라면 응당 앞의 세 사서와 신당서를 교차하여 발해건국 주체세력의 성격을 '고구려 유민(遺民)이었던 속말말갈, 또는 속말말갈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遺民)'이라고 정리해야 옳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 구당서 발해전의 "고구려 유민(遺民)들이 점점 귀속하였다", 신당서 발해전의 "고구려 유민(遺民)과 동쪽으로 달아났다", "말갈과 고구려 유민(遺民)을 데리고 이해고에게 항전하였다"한 기술의 맥락이 접점을 갖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신당서 발해전》의, 발해 건국까지의 기술내용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검토를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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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맞닿아 니하(泥河)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거란(契丹)이 있었다. 성곽을 쌓고 거처하니, 고구려 유민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ㅡ 고구려가 멸망한 후가 아니라 고구려 멸망 후 영주에 끌려가 있다가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를 함락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였다가 무리를 이끌고 탈주한 것이 시간적으로 먼저이다. 신당서를 비롯한 역대 정사의 외국전 기술의 태도와 양상은 전체적 요약을 하고 뒤에 상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ㅡ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 리밖에 위치한다 하는 것은 읍루의 동모산이 아니라 발해왕성의 위치이다. 이 2천 리 기록은 신당서뿐만 아니라 구당서, 기타 역대 여러 사서에서도 관성적으로 사용되는데 이는 가탐도리기 제1도 '영주에서 안동도호부 가는 길(營州入安東道)'의 기술(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 又經汝羅守捉, 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 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 又經渤海長嶺府, 千五百里至渤海王城)에 따른 것이다.  

ㅡ 신라와 니하를 경계로 한 것은 발해 건국기가 아니라 후대의 일이다. 아직 나라도 세우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경계를 정하겠는가. 

②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통년(萬歲通天) 연간(696)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像)이 말갈(靺鞨)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 유민과 동쪽으로 달아났다. 

ㅡ 여기서부터가 실제 사건의 시작이다.

③ 요하(遼河)를 건너서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에 의지하여 성벽을 쌓고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ㅡ 요하가 현 요하인지 아닌지는 여기서는 차치하자

ㅡ 신당서의 태백산(太白山)은 위서의(魏書)의 도태산(徒太山)이다. 신당서는 속말수(현 송화강)가 이 태백산 서쪽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타루하(현 조아하)와 만난다(元魏時曰勿吉。直京師東北六千里,東瀕海,西屬突厥,南高麗,北室韋。離為數十部,酋各自治。其著者曰粟末部,居最南,抵太白山,亦曰徒太山,與高麗接,依粟末水以居,水源於山西,北注它漏河)고 적었다. 이 태백산(太白山)이 후대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는 명칭으로 기술돼 나타나는데 서기 1156년에 남송에서 간행된 송막기문(松漠紀聞)은 냉산(冷山)을 기점으로 하여 장백산의 위치를 서술하고 있다. 영강주에서 냉산까지 170 리(寧江州去冷山百七十里), 냉산에서 금국 상경성까지 2백여 리(冷山去燕山三千里,去金國所都二百餘里), 냉산에서 동남쪽 1천여 리에 장백산(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蓋白衣觀音所居。其山禽獸皆白,人不敢入,恐穢其間,以致蛇虺之害。黑水發源於此,舊云粟末河。契丹德光破晉,改為混同江。)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영강주는 혼동현(混同县)이 치소였는데 혼동현은 현 송원시 소속 현급시인 부여시(扶余市) 동쪽 석두성자(石头城子)에 있었다. 냉산(冷山)은 이곳에서 170 리, 금 상경성이 있던 현 하얼빈시 아청구에서 2백여 리에 있었으므로 이 두 지점 사이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는데(사학계에서는 현 장춘시 농안현 북쪽에 막연히 비정하고 있다) 이 냉산 위치에서 동남쪽 1천여 리에 장백산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 1천여 리만을 주목하여 본다면 현 돈화시 인근의 길림합달령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금사(金史)에서는 생여진 지역에 혼동강(현 송화강)과 장백산이 있다고 기술(生女直地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黑龍江,所謂「白山黑水」是也。)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지리지에서는 회령부(현 하얼빈시 아청구)의 유일한 속현인 회령현의 지리정보를 기술하면서 이 회령현에 장백산이 있다고 기술(會寧倚,與府同時置。有長白山、青嶺、馬紀嶺、勃野澱、綠野澱。有按出虎河,又書作阿術滸。有混同江、淶流河。有得勝陀,國言忽土皚葛蠻,太祖誓師之地也。)하고 있다. 또한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에서도 역시 장백산이 회령현 남쪽 60 리에 있는 가로 길이가 1천 리이고 높이가 2백 리(長白山在舊會寧縣南六十里橫亙千里高二百里)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이 2백 리는 표고 높이가 아니라 정상까지 가는 거리를 이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대 사서의 기록을 교차 분석하여 볼 때에 태백산(太白山)은 현 길림합달령이 분명하고 오루하(奧婁河) - 奧는 '오'로도 읽히고 '욱'으로도 읽힌다 - 는 이 일대의 큰 강인 현 송화강, 즉 옛 속말수이자 혼동강으로밖에 달리 비정할 수 없다.

ㅡ 사학계에서는 발해의 중심지와 관련된 큰 강을 현 목단강에 비정하고 있으므로 현 송화강을 오루하로 보나 현 목단강을 오루하로 보나 발해가 태백산 동북쪽에서 큰 강에 의지하여 산 것은 8세기 말 상경 천도 이후의 일이다.

ㅡ 즉 이 기술 역시 발해 건국세력의 영주 탈주와 건국이라는 696~700년 사이의 사건과는 시간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이다.

④ 측천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여 그 죄를 용서하고자 하였다. 걸사비우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자, 측천무후는 옥검위대장군(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中郎將) 색구(索仇)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죽였다. 

ㅡ 이 대목이 위의 ②와 시간적으로 연결되는 대목이다.

⑤ 이때에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아들 대조영이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달아나는데,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해고에게 저항하니, 이해고는 패하여 돌아왔다. 

ㅡ ④에서 시간적으로 바로 연결되는 대목이다.

⑥ 이때에 거란이 돌궐(突厥)에 복속한 탓에 당나라 군대의 길이 막혀서 이들을 토벌할 수 없었다. 

ㅡ ⑤에서 시간적으로 바로 연결되는 대목이다.

⑦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병하고 이 지역이 당나라에서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부르며, 돌궐에 사신를 보내어 통교하였다. 영역이 사방 오천 리에 미쳤으며, 인구는 십여만 호에 군사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ㅡ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병한 것은 걸사비우가 죽은 뒤 이해고의 군대와 싸우는 과정에서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다른 세 사서, 즉 구당서, 오대회요, 신오대사 등은 시간적 순서로 그렇게 기술하고 있다. 즉 이 대목은 ⑤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다.

ㅡ 영역 사방 5천 리와 인구 십여만 호(가구)는 신오대사의 인구 40 만 명과 교차가 되는데 이는 곧 이 정보가 대조영이 이해고의 군대에게 대승을 거둔 후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칭한 직후, 즉 대조영 지배 하의 발해 초기의 영역과 인구로 봐야 한다. 그런데 현 사학계는 이것이 마치 발해 전성기인 9세기의 영역과 인구수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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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분석, 검토한 사실을 사건의 순서대로 재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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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고구려가 멸망하자 (말갈은 당나라 영주에 끌려와 살았다)

②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통년(萬歲通天) 연간(696)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像)이 말갈(靺鞨)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 유민과 동쪽으로 달아났다. 

③ 측천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여 그 죄를 용서하고자 하였다. 걸사비우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자, 측천무후는 옥검위대장군(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中郎將) 색구(索仇)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죽였다. 

④ 이때에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아들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병하여 무리를 이끌고 달아나는데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해고에게 저항하니, 이해고는 패하여 돌아왔다. 이때 거란이 돌궐(突厥)에 복속한 탓에 당나라 군대의 길이 막혀서 이들을 토벌할 수 없었다. 

⑤ (대조영은) 무리를 이끌고 (달아나)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이 지역이 당나라에서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부르며, 돌궐에 사신를 보내어 통교하였다. 성곽을 쌓고 거처하니 고구려 유민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영역이 사방 오천 리에 미쳤으며, 인구는 십여만 호에 군사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⑥ 그곳(발해왕성, 즉 상경성)은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리 밖으로, 태백산의 동북쪽이며 오루하奧婁河)에 의지한 위치이다. (발해의)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에는 거란(契丹)이 있으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맞닿아 니하(泥河)를 경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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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리를 하면 남은 문제는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과연 (요하를 건너) 요동으로 가서 웅거(雄據)하였는가의 여부이다. 구당서와 신당서는 "동쪽으로 달아나 험준한 곳을 지키며 방비했다(구)/동쪽으로 갔다(신)"라고 기술하고 있는 반면(물론 신당서 발해전은 이 기술 다음에 "요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욱루하)에 의지하여 성곽을 쌓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앞에서 비판, 검토한 바에 따라서 이 기술은 시기상 맞지 않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대회요와 신오대사는 모두 "요동으로 달아나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다스렸다(分王髙麗故地)"라고 기술하고 있어서 차이가 있다. 신당서를 아무 비판 없이 토대한 현 사학계 통설에서는 한술 더 떠서 발해 최초 건국지인 동모산을 현 돈화시에, 천문령을 현 매하구시 일대에 비정하고 있다. 문제의 포인트는 현 돈화시 일대였든 현 요하의 동쪽인 통설에서의 요동이든 과연 당나라 이해고(거란 출신 장수, 이진충의 란 때 당나라에 항복)의 군대가 현 요하를 건너 추격할 수 있었느냐이다. 이해고의 추격과 이로 말미암은 천문령 전투는 이진충이 죽고 거란의 후미를 해와 돌궐이 당나라를 도와 치면서 거란의 전열이 와해된 이후에 거란의 잔당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즉 발해 건국 세력이 타격대상의 중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거란 잔당이 타격과 섬멸 대상의 중심이었다. 

산당서 거란전에서는 서기 700년에 측천무후가 이해고에게 명하여 그 해에 거란을 토벌한 것(久視元年,詔左玉鈐衛大將軍李楷固、右武威衛將軍駱務整討契丹,破之。此兩人皆虜善將,嘗犯邊,數窘官軍者也,及是有功。)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구당서 발해전은 이진충이 죽자 이 때에 측천무후가 이해고에게 거란 잔당을 토벌하라 명령하였고 이 과정에서 발해 건국에 있어서 선(先)세력인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의 무리를 공격한 것(盡忠既死,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先破斬乞四比羽,又度天門嶺以迫祚榮。祚榮合高麗、靺鞨之眾以拒楷固;王師大敗,楷固脫身而還。)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이는 구당서 적인걸전(聖歷三年,則天幸三陽宮,王公百僚咸經侍從,唯仁傑特賜宅一區,當時恩寵無比。是歲六月,左玉鈐衛大將軍李楷固、右武威衛將軍駱務整討契丹餘眾,擒之,獻俘於含樞殿。則天大悅,特賜楷固姓武氏。)뿐만 아니라 신당서 적인걸전(是時李楷固、駱務整討契丹,克之,獻俘含樞殿,後大悅。二人者,本契丹李盡忠部將,盡忠入寇,楷固等數挫王師,後降,有司請論如法。仁傑稱其驍勇可任,若貸死,必感恩納節,可以責功。至是凱旋,後舉酒屬仁傑,賞其知人。授楷固左玉鈐衛大將軍、燕國公,賜姓武;務整右武威衛將軍。)의 기술 내용과도 그대로 호응한다. 

즉 신당서 거란전과 달리 구당서 발해전의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이 구당서와 신당서 적인걸전의 "獻俘於含樞殿(구)/獻俘含樞殿(신)"과 맥락이 일치하는 것이다. 현 사학계 통설에서도 "영주에 끌려가 있던 말갈과 고구려 유민이 거란 이진충의 반란에 호응하였다/영주가 거란의 공격을 받자 유주(幽州, 현 북경시)로 이주시키려 했으나 이를 피해 달아났다" 등식으로 서술하고 있었서 거란이 영주를 함락하고 평주로 나아가 점거하여 하북 지방을 약탈, 학살할 때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등의 무리가 '나 몰라라'식으로 외면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학계 통설측에서도 구당서 발해전과 구/신당서 적인걸 전의 맥락 일치를 토대로 하여 697년, 또는 698년으로 천문령 전투와 진국(발해의 전신) 건국년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거란의 잔당 소탕을 명 받은 이해고와 낙무정이 거란이 아닌 이렇게 고구려 유민의 무리를 공격한 데에서 이들이 거란의 반란에 협력하였다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거란이 잔당이 소탕되지 않은 상황(게다가 돌궐의 습격과 약탈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거란 소탕을 명 받은 군사가 유주와 단주, 평주 등을 비워두고 저 멀리 2천여 리 떨어진 현 요하 동쪽, 또는 이보다 더 먼, 현 사학계 천문령 비정지인 매하구시까지 진군하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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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의 란은 현 북경시 동쪽 통주구를 흐르는 로하(潞河)의 동쪽에서 쫓기던 손만영(손만참)이 데리고 있던 노비에게 목이 베여 죽으면서 일단락되었다. 거란은 현 진황도시와 당산시의 동북쪽 지역에 해당하는 평주를 거점으로 하북지역을 유린하였으므로 그 잔당들은 하북지역을 비롯하여 현 북경시와 진황도시 북쪽에서 거란의 본거지인 현 시라무룬허 일대의 송막지역까지 흩어져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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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본거지는 현 파림좌기와 시라무룬허 일대였고, 거란 잔당들이 흩어져 있는 곳은 이 본거지의 남쪽, 현 북경시 ~ 진황도시를 포함한 그 북쪽이었다. 그런데 사학계 통설에서 말하는 천문령이 현 매하구시 일대라 한다면 이 지역에 대한 지리정보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거란 이진충의 부하였던 이해고와 낙무정이 거란 잔당을 소탕하지 않고 유주와 단주, 평주 등 동북지역을 텅 비워두고 대체 왜 그 멀리까지 가야 한다는 말인가? 거란 반란을 수습하는 게 목적인데, 거란의 잔당들이 아직 남아있는데, 서쪽에서는 돌궐이 지속적으로 변경을 습격하는데 유주와 단주, 평주 등 동북지역을 텅 비워두고 어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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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의 묵철가한은 지속적으로 당나라를 괴롭히고 있었고, 특히 거란이 영주를 함락하고 평주를 점거하여 당나라의 하북(황하 북쪽)지역을 유린한, 이른 바 '696~697 거란의 란' 때에는 당나라 지원군을 자청하여 거란의 본거지가 있는 송막지역을 공격하여 손만영의 처자를 포로로 삼고, 물자를 약탈하고 그곳을 지키던 거란의 병력을 토벌하였으나 이내 그 전란의 틈을 타서 당나라의 서북변경을 공격하였다. 거란의 란이 일단락 된 후에는 거란과 해가 곧이어 돌궐에게 신속하였다. 

상기 지도에는 돌궐 중심이므로 표시하지 않았으나 '696~697 거란의 란'과 그 이후에는 토번(吐蕃) 역시 돌궐이 당나라의 서북변을 침략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696년부터 700년 사이에 임조(臨洮), 량주(涼州) 등 당나라의 서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거란의 란이 일단락된 직후이고, 이 전란의 뒷수습을 위해 그 잔당들을 토벌하여 전란지였던 유주, 단주, 평주 등과 그 북쪽으로서 거란의 본거지인 송막과 영주(營州) 등지를 안정화하는 것이 시급한 상황에서 사학계 통설에 따르면 2천 리도 더 넘게 추격전을 펼치며 거란의 본거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란이 점거하고 약탈하여 전흔이 남아 있고, 거란의 잔당들이 남아있는 유주, 평주 등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멀고 먼 현 매하구시(사학계 통설 천문령 비정지, 길림시 남서쪽, 요원시 동남쪽에 위치)까지 당나라의 이해고가 병력을 이끌고 갈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수천 리 추격전을 벌이며 군사와 돈을 써 가면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의 무리를 섬멸하는 게 당장의 거란의 잔당들과 돌궐의 침략보다 다급하고 절실할 이유가 있는가?

오대회요와 신오대사의 기술만을 근거로, 사학계 통설이 비정한 견해를 더하여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의 무리가 현 요하를 건너 현 요동지역에 웅거하였고 여기에서 뒤쫓아 온 이해고의 군사와 전투를 벌여 걸사비우가 죽고, 대조영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더 동쪽으로 달아나서 현 매하구시 일대에 사학계 통설이 비정한 천문령에서 이해고의 군사를 물리쳤다 ㅡ 라고 한다면 당장의 거란의 잔당들과 돌궐의 침략보다 더 시급하고 절실한 이유가 설명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항상 모든 사서의 기록은 교차검증을 통해 비판돼야 한다. 오대회요와 신오대사는 "요동으로 달아나서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다스렸다"라고 적고 있다. 즉 이는 구당서의 "대조영이 드디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계루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에 의지해 성을 쌓고 살았다"한 기술과 맥락이 닿는다. 오대회요와 신오대사의 기록은 '요동 =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 등식을 성립한다. 그런데 구당서의 '계루의 옛 땅' 역시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 뜻이다. 좁게 보면 고구려의 정치적 중심부를 뜻하고, 넓게 보면 고구려를 뜻하는 말이 '계루'이다. 좁은 의미로서 현 사학계는 계루부가 차지한 지역을 현 집안시 일대로 보고 있다. 반면 본인이 앞서서 고찰한 바에 따르면 현 혼하의 심양과 무순 일대가 계루부에 해당(가탐도리기 제2도의 강을 거슬러 오르는 뱃길 경로를 현 요하~혼하에 비정시 현 무순 일대가 그 경로상의 '옛 고구려왕도'였던 현도현성 위치에 해당한다)였다. 

그런데 사학계 통설에서도 설명하는 바와 같이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의 무리는 거란의 반란에 호응하였고 이 때문에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띤 이해고에 의해 추격을 받은 것이므로 696년에서 697, 또는 698년에 이르는 그 단기간에 당시의 정세를 고려할 때에 요동으로 가서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다스리고 또 뒤쫓아 온 이해고에게 걸사비우가 살해 당하는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 지나치게 무리(無理)이다. 이들은 거란이 영주를 함락하자 바로 도주한 것이 아니라 거란의 반란에 참여하면서 사태가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거란이 돌궐과 해에 의해 후미를 공격 받고 당군에 몰려 제압되는 시점에서 이해고를 위시한 당군의 추격을 받고 도주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만약 발해가 거란에 협조하지 않고 모른 척하면서 곧바로 도주하였다면 이후 대조영이 돌궐과 친교를 맺고, 또 이어서 서기 733년, 천문령 전투에서 보인 바와 같은, 거란과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천문령(天門嶺)은 단 두 개의 사건과 결부돼 있다. 중국의 역대 사서에서 천문령은 단 두 개의 사건과 결부돼 있다. 하나는 697년 이해고와 발해 건국세력의 전투지, 다른 하나는 751년 안록산​(安祿山)의 거란 정벌 경로지가 그것이다.  

발해 관련 기록에는 천문령의 위치에 대한 구체적 단서가 전혀 없으나 안록산의 거란 정벌 기록에는 그 단서가 존재한다. 안록산은 하동절도사에 부임한 서기 751년에 당나라 조정에 "거란이 반란을 일으켰다"며 거짓 보고를 올리고 이를 빌미로 당나라 전체 군병력의 1/3을 장악한 하동절도사의 군권을 이용하여 거란 정벌에 나선다.  신당서 역신 안록산전의 기록에 따르면 해의 병력을 첨병으로 삼아 토호진하, 즉 현 로합하에 도착한 후에 밤낮이 없는 강행군으로 300 리를 진군하여 천문령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폭우를 만나서 병장기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고 거란군과 만나서는 고전을 면치 못 하다가 크게 패하고 퇴각하였다(率河東兵討契丹,告奚曰:「彼背盟,我將討之,爾助我乎?」奚為出徒兵二千鄉導。至土護真河,祿山計曰:「道雖遠,我疾趨賊,乘其不備,破之固矣。」乃敕人持一繩,欲盡縛契丹。晝夜行三百里,次天門嶺,會雨甚,弓弛矢脫不可用。). 한편 구당서 거란전에서는 안록산이 거란 정벌에 유주(幽州)·운중(雲中)·평로(平盧)의 군사 수만 명을 동원하였는데 황수(潢水, 현 시라무룬허) 남쪽에서 거란과 싸워 크게 패했다(天寶十年,安祿山誣其酋長欲叛,請舉兵討之。八月,以幽州、雲中、平盧之眾數萬人,就潢水南契丹衙與之戰,祿山大敗而還,死者數千人。)고 적고 있다. 

토호진하(土護真河)가 현 로합하인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안록산의 정벌군은 현 당산 천안시 북쪽의 도산(都山) 경로를 따라 현 승덕시 평천현을 지나 토호진하, 즉 현 로합하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신당서에서는 천문령이 이 토호진하에서 300 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구당서는 안록산의 군대가 황수(潢水, 현 시라무룬허) 남쪽에서 거란과 싸워 크게 패했다고 하였으므로 토호진하의 발원처이자 상류지역인 현 평천현의 북부, 또는 그 북쪽 인근인 영성현에서 황수, 즉 현 시라무룬허 방향으로 300 리(120km~150km) 떨어진 곳에 천문령이 위치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호삼성과 독사방여기요의 고조우는 모두 "天門嶺在土護真河北三百里。"라고 적고 있고, 이렇게 적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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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보 10년은 서기 751년이다. 지도 상의 표기가 잘못됐다. 이해고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무리 추격은 거란 이진충이 죽은 후에 곧장 시작되었으므로(손만영을 이진충으로 잘못 적은 것이라 하여도 관계 없다) 697년으로 봄이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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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실을 상기시키면, 천문령은 역사적으로 단 두 개의 사건에서 언급되었다. 697년 이해고와 발해 건국세력의 전장지, 751년 안록산의 거란 원정지. 발해 관련하여서 천문령의 위치에 대한 구체적 단서는 전혀 없으나 안록산 관련하여서는 신당서 안록산전에 '토호진하(로합하)에서 300 리'라고 명시돼 있으며 구당서 거란전은 안록산이 황수(潢水, 현 시라무룬허) 남쪽에서 거란과 싸워 크게 패했다고 적고 있으므로 천문령은 현 로합하와 시라무룬허 사이에 위치한 곳일 수밖에 없다. 기록이 명백함으로 지도 상에 표시한 위치보다 조금 더 북쪽, 또는 다소 동쪽에 비정할 수는 있으나 현 사학계 통설대로 저 멀리 근 2천 리 떨어진 현 매하구시 일대에 비정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696~697 거란의 란 당시의 전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나아가 안록산의 거란 정벌이 있었던 751년 이전까지의 정황을 역시 구체적으로 살펴서 현 사학계 통설 비정 천문령 위치뿐만 아니라 신당서 기술 천문령의 위치가 과연 697 이해고와 대조영의 찬문령이 맞는지 여부 또한 검토해 보겠다.








□원글 출처 : The resonance of history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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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ender 19-07-03 12:14
   


네 사서가 서로 신당서과 구당서를 양단으로 하여 공유점과 이질점을 보이고 있는데 사학계가 가장 신뢰하여 발해사 기술에 있어서 저본으로 삼는 신당서 발해전의 기술적 특징은 우선 앞의 세 사서와 달리 발해 건국 주체를 고구려 유민이 아닌 고구려에 복속돼 있었던 속말말갈로 기술하는 점이다. 즉 앞의 세 사서와 달리 고구려와 속말말갈을 분리하여 보는 인식적 태도를 띠고 있다. 이러한 인식적 태도는 만주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역사적 지배력과 연고권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말갈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 논란까지 파생시켰다. 상식적인 사고력, 합리적인 판단력을 갖춘 자라면 응당 앞의 세 사서와 신당서를 교차하여 발해건국 주체세력의 성격을 '고구려 유민(遺民)이었던 속말말갈, 또는 속말말갈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遺民)'이라고 정리해야 옳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 구당서 발해전의 "고구려 유민(遺民)들이 점점 귀속하였다", 신당서 발해전의 "고구려 유민(遺民)과 동쪽으로 달아났다", "말갈과 고구려 유민(遺民)을 데리고 이해고에게 항전하였다"한 기술의 맥락이 접점을 갖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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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많은 네티즌들이 이런사실을 잘 알고 동북공정에 대응만 했어도, 왜구코리아(FMkorea)나 와이고수 같은 파급력이 큰 일뽕성향의 남초 싸이트에서 존 롤스같은 유사역사학자들과 발해가 만주족의 역사다 라고 헛소리를 주장하는 아이신기오로 하응하치 , 역사통신사 같은 자들이 유튜브에 설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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