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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6-26 05:28
[한국사] 발해 ㅡ 구국(舊國)과 고향(故鄉), 계루(桂婁)의 교차로 본 홀한성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3,129  



구국(舊國)과 고향(故鄉), 계루(桂婁)의 교차로 본 발해 홀한성의 위치




1. 구국(舊國)과 고향(故鄉)


요사(遼史)의 기록에는 신당서 발해전에서 언급된 구국(舊國)과 유사한 표현이, 그것도 발해 관련하여 등장한다. 이는 이미 본인의 글 「발해(渤海) 멸망과 동단국(東丹國) 사민(徙民)의 전말(顚末)」에서 소개한 바 있다. 해당 기록을 다시 보자.

■발해 멸망과 동단국 사민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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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顯三年 928년) 12월ㅡ생략ㅡ인황왕(야율아보기의 장자, 동단국왕)이 황도(상경)에 있을 때에 야율우지를 보내어 동단국 백성들을 옮겨 동평(요주 동평군)의 민호로 채우는 것을 보고하였다. 그 백성(동단국)들이 혹은 신라(고려)로, 혹은 여진으로 유입됨(도망감)에 그것을 옮기는 데에 역부족이 되었으므로 상국(요나라)의 허락을 받아서 종속됨으로써 백성을 보존하였다(의역). 동평군을 승격시켜 남경으로 삼았다.。《遼史 卷三本紀第三 太宗上》

오랑캐(발해 유민을 이름)가 번식하여 씨를 뿌리며 번져가는데 지금 거주하는 곳(동단국 수도 천복성, 즉 발해 홀한성을 이름)은 먼 변경에 있어서 후환이 두렵습니다. 양수가 있는 땅은 곧 그들(발해인들)의 고향(본적지)으로서 땅이 넓고 토양은 기름지며 나무와 철과 소금과 해산물의 이득이 있는 곳입니다. 그 백성(발해유민)을 (양수 일대에) 옮겨 살게 하는 것은 만세에 이르는 계책입니다. 저들은 고향을 얻고 또 나무와 철과 소금과 해산물의 넉넉함을 얻으니 반드시 즐거워하며 살 것입니다.《遼史 卷六十七 列傳第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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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우지는 표문에서 발해의 고향(故鄉)을 양수(梁水) 일대라고 말하고 있다. 발해인들을 이곳으로 옮겨 놓으면 반란과 이탈이 줄어들고 생업에 종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수(梁水)는 무경총요를 참고할 경우 현 부신시 서쪽 인근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대릉하로 들어가는 세하(시허강)로 볼 여지는 있으나 요사를 기본으로 하여 볼 경우 현 태자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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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는 동북쪽 산어귀로 나아가 범하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大口)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량하(東梁河)는 동쪽산에서 서쪽으로 흘러 혼하(渾河)와 합하여 소구(小口)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가니, 태자하(太子河)라고 하며 또한 대량수(大梁水)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사하(沙河)는 동남산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개주(蓋州)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또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력(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은 까닭이다. (다시 쓰는 유기 해석본) 《遼史 卷三十八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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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우지의 상소를 거란 태종이 받아들이면서 동단국은 결국 홀한성을 차지한 지 겨우 만 3년이 채 안 되어 거란 동평군 지역으로 쫓겨 가게 된다. 이 후에 야율우지가 발해의 고향이라고 언급한 양수 지역은 숙여진 지역으로 편성되었다. 이는 무경총요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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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서) 동쪽으로 숙여진 지역까지 약 500 리, 서쪽으로 요하까지 150 리이다. 《武經總要前集》

지금 거란의 호적에 등록된 자를 숙여진이라 한다. (숙여진에) 18 주를 설치했(으니 다음과 같)다. 요주, 빈주, 해주, 동주, 교주, 숭주, 흥주, 형주, 가주(하주), 조주, 로주, 빈주(반복돼 기술됐는데 실수거나 다른 비슷한 한자의 오기로 보인다), 우주, 철주, 정리주, 회북주, 록주, 광주 등이다. (숙여진은) 동경의 3면(동, 남, 북)에 거주하는데 모두 임시로 설치( # 僑는 즉 僑置되었다는 뜻인데 이는 중경현덕부 문제를 탐구하며 깊이 다룰 것이다)한 주 이름이며(비록 호적에 등록돼 있더라도 거주 및 활동상이 자유로웠다는 말) 호적(민적)은 각 주마다 1천 가구에서 백 가구에 달한다(대략 5백 ~ 5천 명 규모). 나머지 산림에 의지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생여진이라 칭한다.  (# "餘依山林。不服從者,謂之生女真。"는 한 문장으로 해석해야 옳다) 《武經總要前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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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총요에서는 동경과 그 주변의 지리정보를 기술하면서 숙여진 지역을 동경에서 동쪽으로 500 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으나 숙여진에 편성된 18 주의 면면은 실제로는 현 태자하를 중심하여 현 요양과 심양의 바깥에 이 지역을 둘러싼 형태로 위치해 있으므로 '동경에서 500 리에 숙여진'이라는 기록은 오히려 거란 동경의 이치 여부의 한 근거가 될 뿐이며 이후의 역사적 사실 등을 살펴보면 발해유민의 활동이 현 요양과 심양을 중심으로 소위 요동반도 일대에서 현저히 나타나므로 야울우지가 발해의 고향이라 한 양수(梁水)는 이러한 사실을 교차하여 볼 때에 현 태자하 일대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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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우지가 발해의 고향이라 한 양수(梁水)가 현 요동인데 옛 도읍지, 또는 옛 중심지, 또는 옛 터전의 뜻을 지닌 구국(舊國)이 이곳 태자하 일대에서 1천 5백여 리 떨어진 현 화룡시 일대일 수 있겠는가? 오히려 앞에서 본인의 '압록강 현 요하설을 근거로 고찰한 현 요원시와 이퉁만족자치현 일대가 거리와 그 위치 상 양수(梁水), 즉 현 태자하 지역과 가까우므로 타당성이 있다.


2. 읍루(挹婁)와 계루(桂婁)


사학계에서는 신당서를 기본서로 하여 발해사, 특히 강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신당서에서 발해 최초의 건국지에 대해서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읍루는 흑룡강과 바다 사이, 지금의 연해주 남부 일대에 있으면서 부여에 복속돼 세금을 바치던 종족이다. 훗날 부여를 밀어내고 하얼빈 일대를 차지한 물길의 전신이다. 이 때문에 읍루는 물길, 흑수말갈은 물론 숙신(숙신 역시 이들의 범칭으로 종종 사용되었다)을 이르는 명칭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신당서의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이라는 기술, 그리고 현 압록강을 고대 압록강으로 고정하여 보는 학계의 고질적 태도로 인하여 발해는 현 요동지역을 차지하지도 못한 채 저 만주 동쪽 구석에 옹기종기 5개의 수도를 모아놓고 세월을 보낸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신당서에 앞 서 편찬된 구당서에는 다른 기록이 있다. 구당서는 신당서가 가리거나 없앤 정보를 복원하는 교차 사서의 역할을 한다. 다음의 두 기록을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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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창업자)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 고구려(高句麗)에 복속되어 있었었던 자이며 성은 대씨(大氏)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맞닿아 니하(泥河)를 경계로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거란(契丹)이 있었다. 성곽을 쌓고 거처하니, 고구려 유민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신당서 발해전》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突厥)에 항복하니, 측천무후는 더 이상 토벌할 수 없었다. 대조영은 드디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계루(桂婁)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東牟山)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대조영은 굳세고 용감하며 용병에 능하니, 말갈의 무리와 나머지 고구려 유민들이 점점 귀속하였다. 성력(聖曆, 698~700) 연간에 대조영이 자립하여 진국왕(振國王)이라 하고, 돌궐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다. 그 지역은 영주 동쪽 2천리 밖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서로 접하고 있다. 《구당서 발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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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는 945년에 완성되었고 신당서는 이보다 1백 년 후인 1060년에 완성되었다. 계루(桂婁)와 읍루(挹婁)는 분명히 다른 말이다. 그런데 신당서가 읍루라고 적으면서 후대사서들은 모두 이를 따랐다.

신당서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사마광의 자치통감(1084)만 해도 읍루나 계루 등의 표현이 없다. 그런데 이 자치통감에 주를 달아 자치통감주(1285)를 펴낸 호삼성은 "東牟山在挹婁國界,地直營州東二千里《資治通鑑注 卷第二百四》"​ 주를 다음과 같이 달아서 신당서와 마찬가지로 동모산을 읍루지역(國은 '나라'라는 뜻 이전에 '지역', '땅'이라는 뜻이다)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구당서와 신당서, 그리고 그 후대 사서가 기술한 발해의 본거지가 "영주 동쪽 2천 리 밖에 있다"한 표현은가탐도리기에서 비롯된 정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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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又經汝羅守捉,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府,故漢襄平城也。東南至平壤城八百里;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故安平縣也。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又經渤海長嶺府,千五百里至渤海王城《신당서 가탐도리기 제1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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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탐의 도리기는 정보가 짜깁기 된 것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대조, 교차분석, 비판검증이 필요한 자료이다. 특히 이 1도의 경우는 영주가 수차례 교치됐고, 안동도호부 역시 수차례 교치되었음에도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과 구분 없이 영주와 안동도호부를 뭉뚱그려 기술하고 있다. 가탐 당시인 8세기 후반의 당나라 영주는 현 진황도시 창려현 방면에 있었다. 여기가 영주의 마지막 위치이다. 당나라는 안녹산이 거짓으로 대군을 소집하여 거란 정벌에 나섰다가 대패한 이후로 도산의 북쪽으로 나아가지 못 하였다.

후대 사서와 달리 구당서가 언급한 계루(桂婁)는 무엇이고 또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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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에서 부(部)는 연맹 단계를 거쳐 소국의 수장이 중앙 귀족화하면서 편제된 지배자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고구려의 5부 역시 이른 시기부터 핵심 정치 체제로 기능하였다. 고구려 5부에 대해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는 왕의 부인 계루부와 함께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관노부(灌奴部), 순노부(順奴部)가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는 이들의 이름을 각각 계루부,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관나부(貫那部), 환나부(桓那部)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후한서』에 보이는 5부의 명칭에 대해서 당의 장회태자 이현이 주를 달아 계루부를 내부 또는 황부로, 절노부를 북부 또는 흑부·후부로, 순노부를 동부 또는 청부·상부·좌부로, 관노부를 북부 또는 적부·전부로, 소노부를 서부 또는 백부·하부·우부 등의 방위명 5부와 각각 대응시키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계루부 [桂婁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내부(內部)·황부(黃部)라고도 한다. 고구려 5부의 중심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소노부(消奴部)에서 왕위를 차지하다가 AD 53년 즉위한 제6대 태조왕(太祖王) 때부터 왕위교체가 이루어졌다.

태조왕의 왕위계승은, 포악한 군주로 이름난 모본왕(慕本王)이 근신에 의해 살해된 다음 모본왕에 태자가 있었음에도 제쳐두고 방계인 제2대 유리왕의 왕자 재사(再思)의 아들인 7세의 태조왕을 옹립하였다는 점과, 계루부의 초대왕인 그에게 건국의 시조에 해당하는 ‘태조’라는 왕호와 ‘국조(國祖)’라는 별호를 주어, 그로부터 정통왕(正統王)을 이으려 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정치적 역학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부터 왕족인 계루부의 대가(大加)들은 고추가(古鄒加)라는 특별 칭호를 가지게 되었고, 고구려 5부의 중추적인 세력이 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계루부 [桂婁部]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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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루는 계루부로서, 계루부는 고구려 5부 가운데에 왕을 배출한 부족으로 내부, 황부 등으로도 불렸다"고 요약해 볼 수 있다. 계루부는 주몽과 함께 부여에서 남하한 세력을 중심으로 한 초기 집결세력으로 보이는데 계루부의 핵심 영역을 학계는 집안(集安) 지역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소위 제 1, 제 2, 제 3 현도군설을 난잡하게 가공하여 제 2현도군 시기에 등장한 고구려현을 두고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학계 통설에서는 제 1 현도군은 현 압록강 중부에 중심지를 두고 함경도까지 차지했던 것으로 보고 제 2 현도군은 토착세력에 밀려 혼하의 상류인 흥경(興京)·노성(老城), 지금의  신빈현(新賓縣) 영릉진(永陵鎭) 지역으로 군치소를 옮겼으며 이후 다시 무순(撫順)지방으로 후퇴하여 제 3 현도군을 형성하고 요동군(遼東郡)의 속현인 고현(高顯), 후성(侯城), 요양(遼陽) 등 을 흡수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선 한서 지리지의 현도군 고구려현의 기술 내용을 보면 학계 통설에서 소요수를 현 혼하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현 무순~신빈 일대로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현 의무려산 일대와 그 서북에서 발원해 서남쪽으로 흘러 대릉하로 들어가는 세하 등을 고구려현과 소요수로 봄이 타당하다. 이는 본인의 글 '요수 연구 초고'에서 다룬 바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는 대요수가 새 밖을 나와(나가) 남쪽으로 안시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고, 소요수는 고구려현 요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고 했다. 또한 수경에서는 대요수가 동남쪽으로 흘러 안시현 서쪽을 지나서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했고, 소요수는 고구려현 요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고 했다. 현 혼하를 소요수라 하기에는 방위와 위치가 틀린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5년(서기 169년) 기사에 "임금이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현도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서 부산(富山)의 적도들을 토벌하였다. 五年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將兵助玄菟太守公孫度 討富山賊"한 기록이 있다. 부산(富山)은 영락 5년(서기 395년) 광개토대왕의 패려(거란) 정벌 때에 염수로 진군하는 경로에 등장하는데 학계 통설에서는 이 산을 현 의무려산에 비정하고 있다.

■염수와 염난수 2

서기 169년은 아직 후한이 망하기 전(220년에 망함)으로 비록 공손씨가 점거하고 있었으나 후한의 행정구역에는 포함이 돼 있다. 후한서 군국지 현도군에는 여전히 고구려현이 있고, 그 고구려현의 요산에서 요수가 발원한다(髙句驪, 遼山遼水出)고 기술하고 있다.

본인은 이 요수(소요수)와 요산의 문제를 무경총요를 분석하여 현 의무려산이 요산, 현 세하(시허강)이 소요수임을 고증한 바 있다. 무경총요에서 현 '세하~대릉하'는 '동경소요수'라는 이름으로 기술되었다. 이는 본인의 글 「요수 연구 초고」에 상세하다.

■요수 연구 초고

현도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서 부산(富山)의 적도들을 토벌하였다면 부산은 현도군에 있는 산인 것이고, 부산이 현 의무려산이므로 현도군은 현 의무려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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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학계 통설에서는 환도성을 현 집안의 성산자성에 비정하고 있으나 가탐도리기 2도를 현 요하~혼하에 적용하였을 시에 현 무순과 본계 일대에 해당함을 앞의 글에서 확인하였다.

구당서의 계루(桂婁)가 신당서에서부터 읍루(挹婁)로 조작, 또는 오기되었다 한다면, 이에 구당서의 계루(桂婁)를 선택하여 역사를 보면 훨씬 명확해진다. 고구려의 계루부는 고구려의 중심지로서 현 제2송화강의 동남쪽, 현 압록강의 북쪽, 현 혼하를 중심한 심양, 본계, 무순 일대였던 것이다. 이는 그대로 발해의 구국(舊國)과 고향(故鄉) 지역과 비교적 일치하거나 지근 지역이다.

본인이 추정하는 계루 지역은 혼하와 태자하를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제2송화강 동남쪽, 현 압록강 북쪽 지역이다. 즉 이 지역이 고구려 건국지이자 중심지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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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가 계루를 읍루로 바꿔 기술하면서 코미디 같은 상황이 연출되는데 특히 요사 지리지 동경도 기술 내용이 그러하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는 신당서의 '읍루의 동모산' 기술을 답습하면서 동경도 지역에서 총 4 곳을 읍루 지역으로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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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동경의 외성인 한성에서) 북쪽으로 읍루현(挹婁縣)과 범하(范河)까지 270리 걸린다
② 심주(瀋州)는 소덕군(昭德軍)이 설치되었고 중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읍루국(挹婁國) 지역이었다. 
③ 쌍주(雙州)는 보안군(保安軍)이 설치되었으며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읍루의 옛 땅으로 발해는 안정군(安定郡)을 두었는데 오래전에 폐지되었다. 구리증(漚里僧, 액리삼額哩森)의 왕이 태종을 따라 남정할 때 사로잡은 진주(鎭州)와 정주(定州)의 백성으로 성을 세우고 주를 설치하였다. 
④ 정리부(定理府) 자사를 두었다. 옛 읍루국(挹婁國)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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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통설이 발해의 구국, 즉 현주(중경현덕부) 지역으로 비정한 현 길림성 화룡시 지역뿐만 아니라 동모산으로 비정한 현 길림성 돈화시 성자산 지역은 역사상 읍루(挹婁)의 옛땅이 된 적이 없다. 읍루는 동쪽으로 대해(大海)를 접하고 있었는데 현 흑룡강 일대를 포함하여 연해주 지역에 비정된다. 

상기 요사 지리지 동경도 기술에서 실제 읍루국, 또는 읍루지역에 해당하는 것은 ④밖에 안 된다. 실제로 학계 통설에서도 정리부를 현 연해주 남부에 비정하였으며, ③의 쌍주의 경우는 926년 당시 거란군 대원수였던 야율요골(야율덕광, 훗날 요 태종)의 발해 정벌활동 당시에 발해의 정리부 지역에서 데려온 포로들로 건립한 주로 현재 요녕성 철령시 서북쪽 인근에 비정돼 있다. 쌍주의 경우는 읍루의 땅이었던 연해주의 정리부(정주定州는 정리부 속주이다)에서 백성을 데려다가 세운 주여서 '옛 읍루국의 땅'이라는 설명이 붙은 것으로 ①과 ②의 경우와 그 지역이 교차된다. 즉 ①, ②, ③ 지역은 현 심양을 중심하여 그 북쪽 지역까지인데 이 지역은 ④의 정리부, 즉 읍루 지역에서 주민을 데려와 주를 설치하고 살게 하게 됨으로써 읍루가 업근된 것이고 이에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정보가 혼탁해져 나종에는 이 지역을 읍루지역이라 설명하게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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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상기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서 기술한, 현 심양시를 중심한 읍루를 계루(桂婁)의 오인으로 인한, 즉 신당서의 조작, 또는 오기로 말미암은 것으로 본다. 또한 이, 현 심양시를 중심한 지역에 발해의 최초 건국지 동모산(東牟山)이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구당서에서 말한 '계루의 옛 땅(桂婁之故地)'이라는 기술은 고구려의 옛 땅을 나타낸 수사적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보더라도 "대조영이 고구려의 옛 중심지(계루)를 차지하고 동모산에 의지해 성을 쌓고 살았다(祚榮遂率其眾東保桂婁之故地,據東牟山,築城以居之。)."로 해석이 되므로 마찬가지이다.

한편 만주원류고에서는 '계루'가 특정한 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으므로 구당서의 계루가 아니라 신당서의 읍루가 옳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앞에서 살펴 본 바, 사학계 통설에서조차 계루부가 차지한 지역을 현 집안시 일대로 비정하고 있고, 계루부가 중심부족이면 그 부족이 차지한 중심지역이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만주원류고의 이 해석은 특별히 염두할 가치가 없다. 


요약 정리

가탐도리기 제2도의 현주는 신당서 발해전의 구국으로서 현 이퉁만족자치현 일대이며, 가탐도리기 제2도의 신주는 현 칭위안만족자치현 일대, 환도성은 현 무순/본계 일대, 가탐도리기 제2도의 현 요하~혼하 경로는 요사에서 야율우지가 말한 '발해의 고향 양수(현 태자하) 지역', 그후 편성된 숙여진 18주 지역, 신당서의 읍루, 구당서의 계루 등과 일치하거나 연접하여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반면에 동일하게 가탐도리기 제2도와 신당서 발해전을 토대로 한 사학계 통설 비정지는 신당서 발해전의 "상경으로 천도했는데 상경은 구국에서 300 리 떨어진 홀한하의 동쪽에 있다"한 기록을 전혀 충족하지 못 하며 사학계 통설이 발해 구국으로 비정한 현 돈화시는 야율우지가 말한 '발해의 고향 양수 지역'과 아무런 지리적 맥락이 없이 동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또한 확인하였다. 




■ 원글 출처 : The resonance of history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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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9-06-26 19:33
   
구국과 고향은 '옛땅, 옛 거주지'라는 뜻으로 그 뜻이 일치한다
다만 구국의 '국'은 땅이라는 뜻이 있으면서 보통 중심지, 도읍지, 즉 울타리를 둘러 구분한 지역을 뜻을 지닌다

그런데 발해의 고향은 양수(현 태자하)가 있는 땅으로, 동단국이 거란 동평군으로 쫓겨가면서 928년 숙여진 18주가 편성되는데 이 지역은 현 요양, 심양을 중심하여 요동반도 일대에 해당한다

즉 이 지역이 발해의 고향, 초기의 중심지라는 사실이다

고대의 압록강은 현 요하~동요하인데 가탐도리기 2도의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730리' 코스는 현 요하~혼하에 해당하며

환도성은 현 무순/본계, 신주는 현 칭위안 만족자치현 일대, 현주는 현 이퉁만족자치현 일대에 방위와 거리가 그대로 일치한다

한편 이 가탐 2도 경로는 신당서 발해전의 "상경성은 구국에서 300 리 떨어진 홀한하의 동쪽에 있다"한 기술과 일치한다

본인은 구국이 현주라고 봤는데 본인의 현주 고증지인 이퉁만족자치현에서 300 리 떨어진 곳에는 송화강(제2송화강)이 위치하고, 또 이퉁만족자치현에서 동쪽으로 기운 정북방향 600 리에 현 하얼빈시가 위치하므로

가탐2도와 신당서 발해전 기록을 모두 충족하는 것을 밝혀 보였다



야율우지가 말한 발해의 고향과 신당서 발해전의 구국이
가탐도리기 제2도 경로 "작은 배를 갈아타고 강을 거슬러 신주까지 730리 + 신주에서 400 리 육로를 걸어 현주"의 경로 상에 나란히 연접하여 일치하는 것이다

한편 신당서는 1060년에 편찬됐으므로 신당서의 '읍루의 동모산'에서 읍루는 926년 옛 읍루지역인 정리부에서 반란진압 후 백성을 이주시킨 현 심양ㆍ철령 일대를 가리키는데

945년에 편찬된 구당서에서는 '계루의 땅'이라 했으므로 '계루'라 함은 고구려의 비유적 표현, 또는 고구려 중심지역을 뜻하는 바 가탐도리기 제2도에서 현 무순/본계 일대를 고구려 도읍지가 있던 환도현성이라고 기술한 것과 일치하고 있다

즉 이를 순차대로 정리하면

현 요하~혼하~이퉁만족차치현~제2송화강~하얼빈 경로를 따라서

발해의 고향ㅡ>계루(읍루)ㅡ>구국(현주)ㅡ>홀한하ㅡ>홀한성

이 나란히 연접해 놓이는 것이다

한편 명일통지와 만주원류고에서는 심양 동쪽의 천주산을 동모산이라 하였으므로 이 역시 정확히 지리적 맥락에 들어맞는 것이다
     
Attender 19-06-26 19:50
   
아시다시피 자꾸 “읍루” 하면

숙신—읍루—물길—(흑수말갈)—생여진—여진족—만주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생각나게해서 헷갈린감이 큰거 같습니다;;;;

사용언어가 겹치는감이 있네요;;;;:
감방친구 19-06-26 19:41
   
15일여를 잠 안 자고 끼니 거르며 고찰한 바를 정리하고 지도를 그리고 글을 쓰느라 체중이 급격히 빠질 정도로 고생을 했는데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참 아무런 보람이 없다.

지난 3년 동안 이곳 동아게는 내 연구글에 무댓글, 무반응, 무인용, 무언급이고 그저 흥미위주의 글들에만 사람들이 몰리는데

이거를 내리 3년을 겪으니 무기력에 깊이 빠진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이 고생을 나는 왜 이렇게 생활까지 무너지고 건강까지 나빠지면서까지 해오고 있나
     
Attender 19-06-26 19:48
   
이해해주세요 감방친구님,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동아게 회원들이 아직 지식이 일천해서 감방친구님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공부가 덜된 저 먼저 사과 드리겠습니다....;;:;
감방친구 19-06-26 19:55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는 통설에 의문을 품고 진실에 다가가고 싶은 욕망과 정의감에서 비롯한 것이고

그 연구한 바를 글로 써서 게시하여 공유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이곳 동아게에서 3년 동안 개고생을 해가며 본격 연구글을 공유해온 경험으로는

사람들은 사실이나 진실보다는 잔재미와 흥미위주로, 역사를 여흥거리로 여길뿐이요

평소에는 우리 역사의 쟁점에 관심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지만 막상 그것을 다루는 글에는 관심이 없으며 읽기도 귀찮아 한다는 것

글이 좀 길다, 한자가 섞였다, 어렵다 느끼면 읽을 생각도 안 한다는 것

나는 오직 사서원문만을 토대로 교차분석방법을 추구하여 역사를 연구해 왔고

내가 게시하여 공유하는 연구글들은 가능한 거의 모든 사서를 종합한 것으로 대한민국 인터넷 상의 어느 역사 유저와 견주어도 그 풍부함과 정교함에 있어서 뒤쳐지지 않는다 자부한다

가생이 동아게는 더이상 있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실망감과 무기력감을 주지만

어쨌거나 단 몇 사람의 진실한 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만을 가지고 가는 데까지 활동해 보련다
     
브로리 19-06-28 22:07
   
이 댓글을 보고 나도 몇마디 하겠소.

1, 사람들은 고구려 평양이 현재의 평양인가 아니면 지금의 요양시에 있었는가에 관심이 없소.다시 말해서 평양이 현재의 평양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받아드릴수 있소.

2, 사람들은 발해의 수도가 어디에 위치하였는가에 관해 개뿔도 관심이 없소.아마 평양에 대한 관심이 1이라고하면 발해수도 대한 관심은 0.01이라고 해두기오.

3, 사람들은 고구려 와 고려 시대 압록수가 현재의 압록강인가 아니면 요하인가에 대해 관심이 없소.현재의 압록강이라도해도 받아드릴수 있소.




그렇다면 문제가 하나 생기오,대체 식민사관을 타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중요한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가? 이게 지금 감방친구님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 이때문에 무기력해하시고 있소.지난번에도 내가 감방친구님께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


사람들이 관심가지는건 딱 두개요 ~

첫째, 낙랑군의 위치
둘째, 요동군의 위치


그니깐 감방친구님도 한번 낙랑군 요동군 이쪽으로 집중적으로 종합적인 연구를 시도해보오,물론 옛날에 올리신 글들 많이 봤소,그러나 그런건 모두 여러 사이트에 오래전부터 떠돌아다니는것들이여서 신선하지도 않소.

지금 사람들이 제일 바라는건 딱 한가지요.

부동한 시기마다 낙랑군 요동군 위치가 각각 어떻게 되는가, 이게 바로 식민사관을 타도할라는 사람들의 관심대상이지, 사람들은 발해 수도 어데 있고 요양이 평양이고 압록수가 요하인가 어디인가 개뿔도 관심이 업소 ~
브로리 19-06-28 22:10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예 글을 읽어보지 않소.

감방친구님도 한번 역사적으로 올라온 글들을 살펴보오,낙랑군 요동군 관련된 글에는 댓글이 항상 수태가게 달려있소.

나의 건의 를 한번 심도깊게 연구해보오.

식민사학을 무너뜨리고 박살낼려면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핵심을 공략해야지, 기타 자질구레한 문제는 맞대도 그들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소.

평양이 요양에 있다는 근거 압록수가 요하라는 근거... 이런게 아무리 많아 머하오, 끄떡하지 않소 ~

근데 요동군 낙랑군으로 한번 건드려보오, 식민사학과 그 추종세력은 가시나무떨듯 부들부들 떠오 ~

좋은 뜻으로 남긴 댓글이니, 상처받지 마오 ~
     
감방친구 19-06-28 22:51
   
님, 보니까 내 블로그에 친추했다가 일방적으로 친추 끊는 황당하고 무례한 짓을 한 역사○○라는 사람 같은데

님 얘기가 일리가 있고 그보다 더하여 맞는 말입니다

우선 제 역사연구의 본격 시작점은 낙랑군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초반에 건드렸는데
사기, 한서, 후한서, 진서, 삼국지 등의 사서원문을 이미 여러번 독파했습니다

그리고 사서교차방법론에 의해 거꾸로 추적해 올라가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즉 고려부터 거꾸로 올라가는 것이죠

사람들은 압록강이고 뭐시기고 딱딱 한두 문장에 떨어지는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죠

지난 3년 동안 하루 10시간 이상씩 상서부터 성경강역고까지 30 종이 넘는 사서를 면밀히, 그것도 여러번 보면 역사가 어떻게 왜곡됐는지 맥락이 잡히고 보입니다

그러면 이거를 어떻게 알려야 하는가 논리적으로 쉽게 풀어야 하고 풀기 전에 근거가 확실해야 하며 통설은 뭐라고 말하고 있고 맹점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글이 길어지고 복잡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ㅡ

이를테면 엉킨 실뭉치를 보여주며
이 실뭉치가 어떻게 엉겼는지를 하나하나 풀면서 보여주고 다시 원래 엉킨 모습 그대로 만들어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죠

낙랑군 실뭉치를 풀려면
당연히 왕건의 현 평양 성역화 프로파간다부터 풀어서 알려야 하는 겁니다

현 평양은 왕건이 시작해 1백여 년 동안 고려왕조가 열심을 기울여 성을 쌓고 궁궐을 짓고 백성을 이주시키면서 조성하였고

기자신사는 몽골간섭기에 만든 것이며
기자무덤이라는 것도 가짜무덤이고

구월산ㅡ아사달ㅡ장당경ㅡ단군 전설도
몽골간섭기에 민간정서와 명칭의 기원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은 것이며

발해가 멸망하기 전부터 발해인들의 내투가 시작됐고
고려 광종 대에 숙여진 지역(현 요동반도)을 고려 땅으로 만들었으며

고려 성종 대에 압록강 성보구축 작업을 하며 여진족을 내쫓았으며 이후 거란이 여진족을 정벌할 때에 길을 열어주어 이를 여진족(정안국)이 송나라에 꼬발랐으며

이 여진족세력은 실상 여진족이 아니라 발해유민세력으로 현 혼하, 휘발하, 동요하 상류 지역에 있었으며 이들이 있던 곳이 그후 강동6주가 됐으며

이러한 식으로 아주 치밀하게 올라가고 있는 것이죠

어느 한 시대만을 건드려서는 절대 그 시대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천 년, 이천 년의 사실이 얽혀있기 때문이죠

장백산을 예로 들어볼까요?

이게 처음에는 말갈서남산, 백산, 도태산 등으로 나옵니다
그러다가 신당서에서 태백산으로 나오고 금사에서는 장백산으로 나옵니다

이게 마자수와 속말수(혼동강, 현 제2송화강)의 발원처인데

이게 아주 복잡하면서도 간단합니다
속말수로 들어가면 신당서에서는 속말수가 태백산 서쪽에서 나온다고 적었는데

이 이후 사서들은 서쪽은 쏙 빼놓고 태백산에서 나온다, 장백산에서 나온다 서술하거든요

이러니 사서를 제대로 안 읽은 얼뜨기들이 봐라 송화강은 현 백두산에서 발원하므로 장백산, 태백산은 현 백두산이다ㅡ이러고 마는 것입니다

요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경에서는 대요수는 동쪽으로 흐르다가 안시현의 서쪽을 지나 남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고 소요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대요수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빌어먹을 수경주를 쓴 역도원 ㅅㅂ놈은 이거를 대요수가 안시현 서남쪽을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조작을 하거든요
          
브로리 19-06-28 22:54
   
답글 달아주셔서 고맙지만 첫줄은 삭제하오, 중국에서는 네이버 블로그 다음 사이트 못 접속하오 ~ 이 정도는 알면서 답글 달아야지 ㅎㅎ

나는 감방친구님의 방법이 틀렸다고 한적은 없소.

다만 감방친구님께서 자꾸 자신의 글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 무기력하게 느낀대서 말해봤을 뿐이요 ~

뭐 역사를 어떻게 증명하던간에 방법이 어찌하고를 떠나 결과가 중요하지 과정은 중요하지 않소.

다만 감방친구님이 쓸데없는데서 무기력해지는게 안타까워서 몇마디 했을 뿐이요,

연구는 계속 하시오, 나는 감방친구님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식민사학을 박살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박수를 쳐줄뿐이요
               
감방친구 19-06-28 22:59
   
고대의 요동과 요수는 이글을 보면 대략적인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77057&sca=&sfl=mb_id%2C1&stx=cellmate&page=10
                    
브로리 19-06-28 23:11
   
하여튼 감방친구님의 글을 보면 대단하십니다...

저는 어릴때부터 한어를 배우니깐, 고대문자가 들어가 있는 부분에서 그리 거부감을 느끼는편은 아니지만,그래도 보기가 쉽지 만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문을 계통적으로 배우지 못하시는 한국 유저들은 어떻겠습니까...

감히 건의드리건대, 가능하시면 앞으로 문장을 쓰시는 방법을 한번 연구해보시는것이 좋을듯 싶습니다.

마치 네이버에 백과사전을 읽는듯한 난이도로 문장을 짜주셨으면 하는 욕심이 지나친 저의 바램입니다.

일단 주신 링크의 문장은 한번 열심히 공부해보겠씁니다, 주말에 쉬면서 감방친구님의 연구성과를 한번 배워보겠습니다.좋은 링크 감사합니다.
                    
브로리 19-06-28 23:19
   
아마 감방친구님께서 고대원문사료를 뽑아오신후 국역을 하시지 않는 부분이 조금 있기때문에 많은 유저들이 보다가 달아날수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그나마 대략적으로 알아볼수는 있지만, 저는 또 때마침 게을러자빠져서 배울려고 하지 않죠..물론 앞으로 배워나가도록 하겠습니디만 ...

그래도 국역은 올려주시는것이 더 많은 유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가 라는 생각을 해보며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오늘밤에는 잘 주무시고 내일 좋은 연구를 많이 해주십시오.
                    
감방친구 19-06-28 23:24
   
사서원문을 함께 제시하는 이유는 원문 없이 제시하면 사람들이 속인다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잘못 해석한 게 있으면 지적하라는 뜻이죠

번체자가 어려우면 간체자로 번역을 해서 보세요
어플 중에 파파고가 좋고 구글번역기도 있고 어플이나 사이트 등이 있을 겁니다
                         
브로리 19-06-29 11:08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역사를 배우는 대부분 사람들은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아마 고대문자를 보기 어려워 할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부분은, 고대 원문 사료는 필수지만, 그 밑에 한국인 유저들이 쉽게 볼수 있도록 국역을 해주심이 ~

그니깐 여기서 아마 대량의 사람들이 달아나지 않을가 라는 생각이 들기때문입니다.

물론 보는 사람들은 어떤 방법 동용해서라도 보겠죠 ...
               
감방친구 19-06-28 23:21
   
연ㆍ진 시대의 요동은 현 랑방시~승덕시 일대였어요

그리고 한나라가 들어선 후에 이곳이 요동국이 되고요

그런데 서기 2세기 말에 한나라가 동북쪽으로 세력이 크게 확장되면서 새롭게 군현을 편재합니다 즉 소위 한사군(현도, 임둔, 진번, 낙랑)과 함께 요서군과 요동군이 동쪽으로 쭉 뻗게 됩니다

그래서 본래의 요동의 동쪽으로 본래는 고조선 땅이었던 현 진황도시가 요서군이 되고 요서군이 현 대릉하 진저우, 또는 호로도시 근처까지 뻗습니다

현도군은 현 동요하와 제2송화강 지역에
낙랑군은 현 혼하남쪽에
그런데 이 한사군이 만들어진 지 30년이 안 되어서 토착세력에 의해 축출이 돼요

임둔과 진번이 낙랑과 현도에 흡수가 되고
현도는 현 동요하와 의무려산 지역으로 쪼그라들고
낙랑군은 현 대릉하 지역으로 이치가 돼요

그런데 한서 지리지는 이렇게 뒤바뀐 다음의 지리상을 담고 있는데 ㅡ 대개 지리지는 그 시대 말기를 기준으로 작성됨ㅡ 유독 낙랑군만 처음의 지리정보를 담고 있어서 애를 먹이는 것이죠

그래서 이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다른 군현의 위치와 규모의 상태, 다른 사서, 또는 여러 관련 전쟁, 전투 성황 등을 종합하여 접근해야 하는 것이죠

한나라는 신나라로 바뀐 다음에 만리장성 밖의 상황이 엉망이 됩니다 그리고 후한은 이 만리장성 밖의 경비를 오환에게 맡깁니다

이러면서 이후 조조가 오환을 정벌하는 시기가 오면 장성 밖 뿐만 아니라 현 북경일대의 도로까지 엉망이 됩니다

조조가 현 석가장시ㅡ보정시ㅡ로하(현 북경 창주구에서 랑방현 방면으로 흐르는 조백하 물줄기)를 건너 현 승덕시 옥전현에서 산을 타고 길을 만들며 노룡새를 지나 500리 산길을 가서 유성현을 200 리 앞두고 오환과 조우하거든요

그러면 님이 지도를 펴서 보면 알겠지만
산길 500 리 + 200 리에 유성현이며
이게 현 조양시가 가당키나 합니까

저는 예전부터 계속해서 전한 요서군 유성현은 현 로합하 상류의 유성현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쭝궈 사서들이
이 이후로 이거를 왜곡해서
옥전~노룡새~유성현 직전 200 리 = 500 리인데

이거를
노룡~유성현 700 리로 적어버립니다

노룡현은 노룡새에서 동쪽으로 200 리 떨어진 곳으로
수나라 때에 처음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지랄을 해버리니 현 진황도시 노룡현 동쪽 700 히가 현 조양시에 딱 들어맞게 되는 것이죠

이 수나라 노룡현도 지금 노룡현 위치가 아닙니다
현 청룡하가 난하로 흘러드는 곳 북쪽에 있었던 비여현입니다
     
감방친구 19-06-28 22:56
   
낙랑군, 요동군 문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편린적으로 계속 언급해왔는데

새롭지 않다는 거는 잘못 보신 겁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도 면밀히 올라가야 해요

그리고 제가 40대 남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돈벌이에 온 정신을 쏟아도 모자를 나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잠도 안 자고 끼니도 거르면서 몇 년 이러고 있는데
그 고통스런 일상이 상상이 안 가십니까
          
브로리 19-06-28 23:07
   
제가 반드시 하고 싶은 말은, 저는 감방친구님처럼 한국의 식민사학을 박살낼려는 분들을 존경합니다.

한국에 식민사학이 살던 죽던 저랑은 직접적 관계가 없겠지만, 그래도 저도 민족정체성이라는게 있는 사람인데, 식민사학이 죽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

하지만 바램은 바램일뿐, 저는 감방친구님처럼 역사에 흥취를 가지고 있거나 역사를 연구할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게으르기 때문이요. 이런면에서 저는 감방친구님처럼 열심히 하시는 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감방친구님께서 자꾸 무기력하시다 하니깐, 이러다가 아예 그만두시는거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의 짧은 소견을 도움을 준다는 좋은 뜻하에 몇마디 한것이니 혹시라도 오해를 하시지 말길 바랍니다.

어쩃든 열심히 계속 끝까지 연구 하시길 바라는 이 마음만은 진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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