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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6-25 00:48
[한국사] 발해 ㅡ 서기 926년, 함락 전황(戰況)을 중심으로 본 홀한성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182  

※ 지난 15일 동안 발해 상경용천부 위치를 연구하여 정리한 글을 이곳에 나누어서 연재합니다. 글의 분량이 많고 블로그와 가생이닷컴 입력 체제의 상성이 맞지 않아서 제대로 옮기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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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계의 발해 5경(을 비롯한 행정구역) 비정은 신당서를 기본으로 하여 정약용의 발해고(아방강역고 수록), 유득공의 발해고, (만주원류고) 등의 사서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의 영안시(寧安市, 목단강시 소속 현급시) 동경성(東京城)에 대한 최초 발굴 조사, 1960년대에 실시된 중공과 북한의 공동발굴조사 등을 바탕으로 하였다.

사학계 통설은 발해 최초 건국지인 동모산(東牟山)을 현 길림성 돈화시 서남쪽 12.5km 지점에 위치한 성자산(城子山)에 비정하고 있으며 이를 신당서가 기술한 소위 구국(舊國 : 옛 땅, 옛 중심지)으로 보고 있다. 신당서에 따르면 발해는 이 구국(舊國)에서 300 리 떨어진 홀한하의 동쪽에 있는 곳으로 도읍지를 옮겼는데 이곳을 상경(上京)이라 하였다. 사학계 통설은 홀한하(忽汗河)를 현 목단강(牧丹江)에, 홀한해(忽汗海)를 현 경박호(鏡泊湖)에, 상경성 자리는 현 영안시(寧安市, 목단강시 소속 현급시) 서남쪽 35km 지점에 위치한 동경성진(東京城鎭)에 비정하고 있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가 총 세 차례 수도를 옮긴 것으로 적혀있다. 구국에서 상경성으로, 상경성에서 동경성으로, 그리고 다시 동경성에서 상경성으로.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홀한성, 즉 상경성에서 거란에 항복을 하였으니 발해의 마지막 수도는 상경성인 셈이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신당서 발해전 기록과 달리 총 네 차례 천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신당서 지리지에 부록된 가탐도리기의 기술(신주에서 다시 육로로 400 리를 가면 천보 연간에 도읍이 있던 현주에 이른다. 다시 정북에서 다소 동쪽으로 기울인 방향으로 600 리를 가면 발해왕성에 이른다 至神州。又陸行四百里,至顯州,天寶中王所都。又正北如東六百里,至渤海王城。)을 적용한 결과이다. 학계에서는 가탐도리기의 압록강뿐만 아니라 역대 모든 사서에 등장하는 압록강, 또는 마자수 등을 현 압록강에 고정하여 정설로 삼고 있으므로 가탐도리기 '등주에서 뱃길로 고구려와 발해 가는 길'의 경로와 거리수치를 현 압록강에 적용하면 현주의 위치는 현 길림성 화룡시에 해당한다. 

한편 발해 부여부의 치소가 있던 부여성의 위치는 대체로 현 장춘시 농안현, 또는 현 철령시 창도현 팔면성진(八面城镇)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한국 사학계는 대체로 전자를, 중국역사지도집을 통해 본 중국 사학계의 견해는 후자를 따르고 있다. 한편 12세기의 실제 여정기인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 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록에 보면 신주에서 40 리를 더 간 곳에 황룡부가 있다고 하였는데 황룡부는 부여성 서남쪽 우하(雨河) 근처의, 야율아보기가 죽은 행궁지에 건립된 것이므로 만약 현 사평시 일원이 황룡부 자리가 맞다 한다면 실제 부여성은 이보다 동북쪽에 위치해야 옳다. 그렇다면 장춘시 농안현설이 설득력을 얻는데 이 지점은 완안아골타가 혼동강(지금의 제2송화강)을 건너 황룡부를 공격하는 요사와 금사의 전황에 비교적 부합한다. 농안현(부여성 비정지)에서 영안시(홀한성, 즉 상경성 비정지)까지 거리는 현대 도로 기준 약 500km이다.

부여부와 이를 계승한 황룡부의 영역은 역대 사서가 이설이 없이 대체로 현 송원시와 사평시 사이, 제2송화강 서쪽에 해당하므로 쟁점은 부여성이 아니라 홀한성, 즉 상경성의 위치이다. 이 고찰에서는 발해 홀한성에 대한 사학계 통설 비정에 반(反)하는 사례를 근거로 들어 통설을 비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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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기 926년, 함락 전황(戰況)을 중심으로 살펴 본 발해 홀한성의 위치


926년 (음력) 1월, 거란군은 경신일(1)에 부여성을 함락시켰고 병인일(7)에 석은 안단, 전 북부 재상 소아고지 등에게 명을 내려서 1만 기를 선봉으로 삼아 홀한성으로 향하던 중에 대인선의 늙은 재상(또는 노상)의 군대와 만나서 전투를 치른 후 승리하였으며 황태자(야율배, 훗날 동단국 인황왕)와 대원수 요골(훗날 요 태종), 남부 재상 야율소, 북원 이리근 사녈적, 남원 이리근 질리가 그날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였고 기사일(10)에 대인선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여기에서 관건은 부여성 함락 후 6일째 되는 날인 병인일의 기사(記事)이다. 본인은 처음에 이 날을 거란군이 안단을 선봉장으로 하여 부여성에서 홀한성으로 출발한 날로 이해하여 홀한성을 포위한 '그날'을 기사일의 바로 전 날인 무진일로 판단(https://blog.naver.com/mvkuri/221556182346)하였다. 즉 이틀 만에 홀한성에 도착한 것으로 본 것이다. 

본인이 '그날'을 무진일(9)로 판단한 이유는 "병인일(7)에 석은 안단, 전 북부 재상 소아고지 등에게 명을 내려서 1만 기를 선봉으로 삼았다"한 기술 내용에 있다. '명령을 내려서', '선봉으로 삼았다'는 이 헹간의 의미는 부여성 함락과 홀한성 포위라는 사건 사이에 발생한 사실로서 자연스럽게 부여성을 출발하여 홀한성으로 향하는 진군 명령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병인일 기사에 잇대어 바로 '그날'이 등장하므로 당일 부여성을 출발하여 그날 밤에 홀한성에 도착할 수 없는 노릇(부여성 바로 옆, 100~200 리 내외의 거리에 홀한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이므로 대인선이 항복을 청한 기사일(10) 전 날에 거란군이 홀한성에 도착한 것으로 분석한 것이다. 즉 병인일(7)로부터 무진일(9), 단 이틀만에 부여성을 출발해 홀한성에 도착하였다 본 것이다.

그런데 달리 해당 기사를 보면 사실 홀한성에 도착한 날을 무진일로 볼 여지는 희박하다. 병인일은 야율아보기가 홀한성 진군을 명령한 날이 아니라 '선봉장으로서 1만 기를 이끌고 앞에 설 것을 (야율아보기로부터 이미) 명령 받은' 안단 등이 홀한성으로 향하던 중에 발해군과 맞딱뜨려 전투를 벌인 날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당일에 부여성에서 홀한성에 도착했다거나 이틀만에 홀한성에 도착했다 하는 무리한 해석을 피할 수 있다.   

이 판단을 선택한다면 거란군이 홀한성에 도착한 것은 요사의 해당 기록대로 병인일(7) 밤이고, 부여성을 출발한 것은 경신일(1) 이후이다. 

거란군은 정사일(-2) 밤에 부여성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함락한 것은 그 사흘 후인 경신일(1)이다. 사흘 간의 공방전이 있었던 것이다. 함락한 후에 부여성을 비롯하여 관할지인 부여부에 대한 완전 무장해제와 장악, 그리고 거란군의 정비에 따르는 시간이 요구되므로 경신일 당일에 바로 홀한성으로 향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요사 종실 야율배전을 보면 부여성 함락 후 야율아보기는 그곳에 머무르며 부여부의 인적 현황을 조사하려 하였다. 그런데 야율아보기의 장자 야율배가 "민심이 불안하여 동요할 거이니 이대로 승기를 몰아 홀한성을 공략하자"고 설득을 하였다. 이 정황으로 가능한 추정은 거란군은 잠시 지체하다가 부여성에 진압군(주둔군)을 일부 남겨두고 곧바로 홀한성으로 진군하였다는 것이다. 이 지체의 시간을 얼마나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충분기록이 없으므로 추정이 어렵다. 다만 소극적으로 해석 시 경신일(1) 당일, 적극적으로 해석 시 신유일(2), 또는 임술일(3)로 상정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부여성을 현 장춘시 농안현에, 홀한성(상경성)을 현 목단강시 영안현(동경성 발해진)에 비정하고 있다. 양자(兩者)의 현대 도로 기준 거리는 약 500km이다. 리수 치환시 1천 리(5km 10 리 적용) ~ 1천 2백 리(4km 10 리 적용)이다. 물론 현대 도로 기준이므로 당시의 도로 사정을 고려한다면 경로상 거리는 더 길다 봐야 한다. 어찌되었든 논의를 위해서 기준이 필요하므로 현대 도로 기준 리수치를 기준으로 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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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계 비정 상경성까지, 부여성 농안현설(한국학계)을 따를 경우의 현대 도로 기준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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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계 비정 상경성까지, 부여성 사평시설(중국학계)을 따를 경우의 현대 도로 기준 거리


1천~1천 2백여 리를 거란군은 최대 5일 걸려 진군한 것이다. 소수의 경기병이 아니라 야율아보기와 그 황태자 야율배, 야율덕광,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내로라 하는 종친들까지 참가한, 거란으로서는 총력전에 가까운 침략 규모였다. 이러한 대군을 이끌고 500 km를 5일(± 1일)에 돌파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게다가 학계통설 비정 부여성~홀한성 진군로 상에는 완안아골타도 요나라 황룡부를 공략할 때에 배를 타고 건넜던 혼동간, 즉 현 제 2송화강과 그 지류, 나아가 첩첩심산유곡이 막아서고 있다.   

부여성 전투 기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거란군은 부여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선입관을 깔고 쉽게 거란 하면 말만 타고 다니는 경기병만을 연상하는데 경기병만 가지고 무슨 수로 공성전을 벌이나? 대군이 움직였다는 것은 보급부대, 공병부대 등이 함께 움직인다는 말이다. 거란군은 안단, 소아고지를 선봉장으로 하여 기병으로 구성된 선봉부대 1만 기로 앞 길을 뚫으며 진군하였고 그 뒤를 다른 병력이 따른 것이다. (요사 야율배전에서 야율배와 야율덕광을 선봉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거란군이 홀한성 근처에 주둔하면서 홀한성 공격의 선봉부대를 이 두 황태자에게 맡겼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다)

1천여 리에 달하는 거리를 이렇게 짦은 시일 내에 도달한 사례는 우선 1636년 12월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군의 진군 속도를 들 수 있다.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군의 전봉장(前鋒將, 선봉장) 마부태의 부대는 전투를 모두 회피하며 쾌속으로 진군하여 단 5일만에 서울에 도착(12월 9일 출발, 14일 도착)하였다.  압록강에서 서울(한양)까지의 거리는 전근대 사료에서 보통 1천 1백 리여로 기술되었는데 현대 도로를 기준으로 할 때에 신의주에서 개성까지 약 400km, 개성에서 서울까지 65km이므로 도합 465km여를 단 5일만에 주파한 것이다. 이 경우는 전투를 단 한 차례도 치르지 않았고, 오직 빠른 시일 안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한 진군이었으므로 926년, 발해를 침공한 거란의 사례와 유사하다 할 수 없다(뒤따라 도착한 담태潭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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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청나라군은 12월 2일에 심양을 출발해 이들의 선봉부대인 예친왕 다탁과 선봉장 마부태가 압록강 도하를 마친 것이 9일이므로 이들은 심양에서 압록강 남안까지 7일 걸린 셈이다. 심양과 압록강의 거리는 보통 전근대 사서에서 600 리(沈陽中衛司北百二十里。北至鐵嶺衛百二十里,東南至鴨淥江六百里。<독사방여기요 산동8>)이라 적고 있다. 600 리를 7일 걸려(압록강 폭 제외) 진군한 것인데 이 심양과 압록강 사이의 지형이 학계통설에서 비정한 부여성과 홀한성 사이의 지형이 그 규모와 형태에 있어서 유사한 면이 있다. 심양과 압록강 북안의 단동 사이의 거리는 현대 도로기준 짧은 경로 238km, 긴 경로 269km이다. 즉 1636년의 여진족 청나라군대의 심양~압록강 진군은 종족의 성격, 군대의 규모, 이동 경로상의 지형 등에 있어서 학계 비정 926년 거란군의 부여성에서 홀한성의 진군과 유사하므로 홀한성이 학계 비정지인 영안현 동경성진이 맞다 한다면 5일이 아니라 1636년 사례의 두 배인 최소 14일이 걸렸어야 상식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거란군은 단 5일만에 현대 도로 기준 500~600km를, 그것도 수많은 강과 험준한 산맥을 두 개나 넘어서 진군하였다고 설명하는 게 학계 통설이다.

이 경로는 정확히 일치한다 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조선시대의 이른 바 동팔참로(東八站路)에 해당한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1636년 12월, 심양에 집결한 군사수는 총 12만 명이었다. 청 태종이 남한산성 근처에 도착한 것은 12월 말 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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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태의 사례 외에 비근한 사례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들 수 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은 평양에서 의주까지 진군하는 데에 20일을 소요한 반면 의주에서 개성까지 회군하는 데에는 거리가 두 배 이상 남에도 불구하고 그 반절인 10일을 소요했다. 진군 시 1일 행군 속도는 10km, 회군 시 1일 행군 속도는 40km에 해당한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사서에는 이성계의 군대가 정부군과 접전을 피하면서 일부러 여유를 부리고, 심지어 사냥놀이도 하면서 회군하였다 적고 있으나 회군 속도만을 놓고 보면 결코 느린 진군이 아니어서 여유를 부렸다는 식의 표현은 이성계를 미화하기 위한 수식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고대의 하루 행군 거리는 통상 30 리(12km~15km)이다. 손자병법의 군쟁편에서는 하루에 30 리를 가더라도 병력 전체가 아니라 3분의 2만을 보전할 수 있다고 하였다. 

926년 (음력) 1월 병인일(7) 밤에 야율배와 야율덕광 등 거란군이 홀한성을 포위했다 하는 것은 공성전을 벌일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기병과 경보병만으로는 공성전이 불가하다. 앞에서 부여성은 포위된 후 사흘만(1)에 함락됐으며 홀한성의 경우 대인선 역시 포위된 후 사흘 후인 기사일(10)에 항복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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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계 통설의 이 지도는 사평시에 부여성을 비정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상경성 비정지인 영안현까지 현대 도로 기준 약 600km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선봉장인 마부태의 기병대가 전투를 회피하고 전속력으로 압록강 남안으로부터 한양까지 도달한 시일이 5일이었고, 그 거리가 현대 도로 기준 약 465km이다. 이들은 한양까지 오며 단 한 차례도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파발병에 가까운 속도로 진군한 것이다. 조선시대 파발병이 하루에 100km 가량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30 리마다 역참(驛站)에서 말을 바꾸어 달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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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계 통설 비정대로라면 부여성에서 학계 통설 상경성 비정지인 목단강시 영안현까지 진군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막힐부든 장령부든 현덕부든 통과해야 한다. 즉 발해의 중심부를 대놓고 통과한 것이다. 비근한 예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진군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부산에서 한양까지 한반도의 중심을 통과하여 1천 리(약 400km) 거리를 고니시 기준 18일, 가토 기준 14일 걸려 도달했다. 이 자체만 놓고 봐도 매우 빠른 속도인데 500km~600km의 거리를 단 5일 만에 돌파했다며 926년 거란군의 진군을 설명하는 학계통설은 쉽게 믿기 어렵다.

거란이 홀한성을 함락하고 대인선의 최종 항복을 받아낸 뒤에도 거란의 발해지역 평정은 전혀 완료되지 않았다.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 남해부, 철주, 장령부 등 상경용천부 주변과 현 요동지역에 해당하거나 연접한 지역의 반란이 거셌고 장령부의 경우는 무려 7개월 후에나 굴복하였다. 

야율아보기는 대인선이 항복을 청하자 항복의식을 거행한 후 발해 전역에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런데 대인선이 며칠 후에 홀한성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켜 최종 제압당한다. 이 말은 곧 대인선이 발해 각지에서 올 구원군을 기다리며 반격을 준비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부여성과 홀한성이 차례로 함락된 것을 발해 각지가 제 때에 모르고 있었고 뒤늦게 알았을 때에는 거란군을 공격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부여부와 상경용천부가 바로 연접해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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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년 경인일, 즉 대인선의 첫번째 항복 후 발해 전역에 이 사실을 알린지 16일째 되는 날이자 대인선이 홀한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최종 제압된 후 13일째 되는 날 발해 각지의 절도사와 자사들이 홀한성의 야율아보기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 직후부터 발해 각지에서 거란군에 저항하는 반란이 시작되었다. 그 해 8월 장령부 진압까지 무려 7개월 가량 이어진 다발성 저항이었다. 

이 사실은 거란군이 발해 각지를 제압한 후에 황성(홀한성)이 있는 상경용천부를 접수하는 절차, 또는 부여부 접수에 이어 상경용천부를 접수하며 동시에 발해 각지를 제압하는 절차가 아니라 부여부에서 바로 상경용천부만을 접수하여서 발해 각지가 여전히 그 구실을 하며 살아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모든 사서가 거란군의 발해 침공 절차를 부여성 접수 후 홀한성 접수로 적고 있다.

부여성과 홀한성, 부여부와 용천부만을 접수했고 그 후에 무려 7개월 동안 발해 각지에서 거란에 대한 군사적 저항이 빈발했다는 것은 학계가 비정한 통설에서의 발해 5경 15부 62주의 위치가 사실에 어긋난다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부여부 바로 옆에 상경용천부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926년, 발해를 침공한 거란군은 야율아보기를 비롯하여 수많은 종친, 황태자 야율배, 둘째 아들이자 훗날 요 태종이 되는, 대원수 직위의 야율덕광 등이 직접 참전한 총력전 성격이었다. 거란군은 부여성에서 3일 동안 공선전을 벌였다. 홀한성은 부여성 함락 후 6일만에 포위됐다. 거란군이 부여성을 출발하여 홀한성 도착에 걸린 시일은 최장 5(±1)일이다. 즉 발해 홀한성은 부여성에서 대군이 진군하여 최장 최장 5(±1)일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학계가 비정한 부여성과 상경성의 거리는 현대 도로에서의 거리로 측정 시 장춘 농안 기준 500km, 사평 기준 600km이다. 5일 걸려 이 거리를 이동했다는 것은 하루에 100km 이상, 리수 환산 시 200~300 리씩 이동했다는 말이 된다. 거란군은 부여성에서와 마찬가지로 홀한성에서 3일 동안 공성전을 벌였다. 거란군은 공성전을 벌였던 만큼 기병과 경보병만으로 구성된 병력이 아니었다. 

하루 이동거리 100km 이상은 역사적 사례에서 임진왜란 당시 파발 속도(부산에서 나흘만에 한양 도착), 그리고 몽골 징기스칸과 바투의 원정 시 이동 속도 등이 있을 뿐이다. 비근한 사례로 1636년 병자호란 개전 당시 청나라 군의 전봉장 마부태 부대가 압록강 남안에서 한양까지 5일만에 주파한 사례가 있다. 이 경우 그 거리가 현대 도로 기준 465km, 전근대 리수 기준 1,100여 리인데 하루에 대략 90 km, 2백 2십 리를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 사례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①전투를 치르지 않았고 ② 멸악산맥 서남단 지대를 제하고는 서북한 평양지대를 이동하여 비교적 평탄지를 이동하였으며 ③ 전투가 아니라 빠르게 도착하는 것을 목적하였던 것이므로 926년 거란군의 사례와 비교하기 어렵다. 

부여성 함락 후 6일째 되는 1월 병인일에 홀한성에 도착한 것은 부여성에서 홀한성으로 이동할 시 선봉부대였던 안단의 기병 1만 기만 아니었다. 거란군은 병인인일 홀한성 근처에 도착하여 진영을 갖추고 그날 밤에 제 1 황자 야율배와 당시 대원수 직위로 참전한 제 2 황자 야율덕광(야율요골)이 선봉장이 되어 홀한성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그 사흘째 되는 날 대인성의 항복을 받아냈다. 공성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공성무기가 필요하고 이를 운용할 인력이 필요하다. 보급부대가 있어서 군수물자부터 식량까지 조달하여야 한다. 음력 1월은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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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 요약

① 925년 (음력) 12월, 발해 부여부를 포위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926년 1월 부여성에 이어 홀한성(상경성)을 함락한 거란군의 규모와 성격은 소수의 경기병이 아니라 태조 야율아보기 이하 황태자, 종친 등 수뇌부와 황족이 대거 직접 참전한 대규모의 총력전 성격이었으며 부여성과 홀한성에서 각각 사흘간 공성전을 벌였으므로 공성무기를 비롯한 군수물자의 운반 및 보급에 따른 보급부대 역시 동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② 거란군은 요동루트(현 요양, 심양 지역)를 병용한 양방향 공격이 아니라 요북(현 요하의 북쪽)에서 부여부로 가는 단방향 침공을 하였다.

③ 부여성에서 홀한성까지 이동에 소요된 시일은 5일(±1)이었다. 이 시일로는 현대 도로기준 600 km(1천 수백 리)에 달하는, 게다가 발해의 중심부를 통과해야 하며 수많은 강과 험준한 산맥을 넘어 이동해야 하는 현 학계 상경성 비정지인 목단강시 영안현 동경성까지 진군하는 것은 ㅡ 게다가 한겨울이었다 ㅡ 고대 행군속도 및 전쟁양상을 토대로 하여 봤을 때 불가능에 가깝다. 이 '5일(±1)'은 소수의 첨병부대가 홀한성에 도착한 날짜가 아니라 황태자 야율배와 대원수 야율요골이 홀한성을 포위한 날까지이다. 즉 주력군 모두가 홀한성에 도착하는 데에 걸린 시일이 5일(±1)인 것이다.

④ 사학계 통설에 따르면 부여성에서 홀한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장령부, 중경현덕부 등을 거쳐서 그것도 1천 수백 리를 이동해야 했다. 이러함에도 홀한성까지 가면서 별다른 저항의 기록이 없으며 발해 각지의 부와 주는 홀한성 함락이 알려지고 야율아보기에 의해 소집된 후에야 무려 장장 7개월에 걸쳐 거란에 저항을 하였고 동단국이 들어선 후에도 반란이 계속되어 결국 동단국이 성립된 지 2년 만에 만주를 포기하고 쫓겨갈 정도였다는 것은 사학계 통설과 달리 상경용천부와 부여부는 바로 연접해 있었다고 봐야 한다.

⑤ 서기 926년 전황(戰況)을 근거로 하여 볼 때에 발해 홀한성은 현 목단강시 영안현 동경성이 아니라 하얼빈시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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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글 출처 : The resonance of history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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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9-06-25 01:36
   
거란이 부여성에서 홀한성으로 진군하며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선봉부대인 안단의 1만 기병이 발해군(노상)을 만나 접전하여 깨트렸다

또한 거란국지에는 "강의 동쪽 기슭을 따라 싸우면서 진군했다"하는 기술이 있는데 그 기록의 주체가 당시 7세에 불과했던 훗날 요 세종(야율배의 장자)이어서 근거 기록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대인선이 항복한 이후에 무려 7 개월에 걸쳐 발해 각지의 저항이 있었던 사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의 중심이 학계비정 상경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장령부였다는 사실,
또한
이 이후에도 2 년 동안 반란이 계속돼 결국 동단국이 만주를 포기하고 쫓겨갔던 사실에 비추어

발해 상경용천부는 발해의 다른 지역을 거치지 않는 위치, 즉 부여부의 동쪽에 연접해 있었다고 봐야 합리적이다

거란의 발해 침략은 한 마디로 총력전이자 전격전이었다
촐라롱콘 19-06-25 18:50
   
본 내용의 주제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수적으로 언급하신 부분에 대한 몇 가지 오류이기는 하지만.....

1.[[압록강을 건넌 청나라군의 전봉장(前鋒將, 선봉장) 마부태의 부대는 전투를 모두 회피하며
쾌속으로 진군하여 ~중략~ 이 경우는 전투를 단 한 차례도 치르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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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의 최선봉 기병 300명을 이끈 청나라군 지휘관을 '마푸타(마부대)'로
알고 있는데, 물론 마푸타가 최선봉부대에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마푸타는 조선사행길을 여러 번 다녀온
배경때문에 최선봉부대의 길잡이 또는 조선과의 접촉의 목적으로 동행했을 것이고,
군사작전의 지휘권은 청나라군 지휘관 가운데 기습공격과 돌격에 잔뼈가 굵은 '로오사'가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청나라군 최선봉 부대는 한 차례 전투를 치르기는 했습니다....!!!
12월 14일 서울 근교 오늘날 삼송~지축일대에 해당하는 창릉전투에서 훈련도감 부장 이흥업이 이끄는
기병 80 여 명과 전투를 벌였고.... 청나라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 조선군 기병 60여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도주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2.[[한편 청나라군은 12월 2일에 심양을 출발해 이들의 선봉부대인 예친왕 다탁과 선봉장 마부태가
압록강 도하를 마친 것이 9일이므로 이들은 심양에서 압록강 남안까지 7일 걸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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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친왕 다탁(도도)이 이끄는 2번째 선봉부대 1,000기병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에 들어온 날짜는 12월 9일이
확실한데.... 최선봉부대인 마푸타-로오사의 300기병은 그보다 하루 빠른 12월 8일 압록강을 건넌 것으로
학계에서 인정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청나라군의 주력부대 대부분은 12월 2일 심양을 출발하여 12월 9일 압록강변 인근에 도달했거나
12월 9일~ 10일에 걸쳐 조선영내로 들어온 것은 맞으나.....
적어도 마푸타-로오사의 1차선봉대는 12월 9일을 기준으로 이미 그 이전인 적어도
12월 8일 압록강변에 도착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3.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1636년 12월, 심양에 집결한 군사수는 총 12만 명이었다.
청 태종이 남한산성 근처에 도착한 것은 12월 말 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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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학계에서는 병자호란에 출정한 청나라군 병력수를 5만~6만 규모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만주8기 가운데 7기가 출정하고, 거기다가 몽고팔기, 그리고 병자호란 일어나기 불과 2~3년전에
복속된 외번몽고에서도 병력들이 차출되고, 공유덕-상가희-경중명 등의 한족3왕 병력들까지 가세했기
때문에 피상적으로 10만은 훨씬 상회할 것이었다고 인식되고 있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해당되는 팔기 또는 소속부대 병력 거의 전원이 출정했음을 가정한 병력숫자이고....

결정적으로 청나라군의 대외원정일 경우에는 정원이 200~300명 규모인 1개 니루를 기준으로 따져보자면
니루에 속한 병력 전원이 출정하는 것이 아니라 60명 내외의 병력이 출정한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학계에서 인정되는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군 병력규모를 세분해서 보자면
만몽팔기 2만 + 외번몽고군 1만 2천 + 요동한족병력 1만 + 한족3왕병력 2천(청나라에 투항한 시기의 병력이
3왕 병력을 죄다 합쳐도 7천명 미만이었습니다.) + 청태종의 친위군 2천

여기까지 더하면 대략 4만 6천에..... 만몽팔기 정규군을 기준으로 대략 2:1의 비율로
팔기군의 보조병이라 할 노예병에 가까운 쿠툴어 1만명 내외가 동원되었다고 추산하면

총 병력 5만 6천 가량이 동원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방친구 19-06-25 19:07
   
오ㅡ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런데 맥락에는 별로 영향은 주지 않겠군요
그러나 맥락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여도 근거로서의 엄밀성은 주장 전개에 선명함을 강화시켜주므로 매우 필요합니다

어쨌거나 사평시, 또는 장춘시 농안현에서 목단강시 영안현까지 이르는 경로는 폭 100여 km 정도의 산령을 2개~3개나 넘어야 하며 제2송화강과 기타 송화강 지류를 여러개 건너야 하고

비교적 저지대로 보이는 장춘시 남쪽, 길림 남서쪽 매하구시 일대는 혼하와 휘발하와 음마하의 발원처로서 학계 통설이 천문령으로 비정하고 현장답사를 통해 험준한 지형을 파악했던 만큼 평탄로가 아니라는 것




심양~압록강 북안까지의 약 250km 내외(현대 도로 기준) 지형과 유사하다는 것이 포인트인데 이 심양~압록강 북안 지형의 2배에 해당하는 것이 사평/농안~목단강영안

즉 이러한 지형을 5일 내외로 대규모의 주력군 본진이 이동하여 공성전 준비를 마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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